1963년 말 데뷔해 한국 대중음악과 성악을 가요에 접목시켜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가수
사실 본업인 음악 뿐 아니라 작가, 화가, 방송인, 라디오 DJ 등 다방면으로 활동해왔다. 솔비나 구혜선, 홍서범 등도 종합 예술인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이들보다 앞선 조영남이 원조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실상은 성희롱이나 각종 사건사고, 그림 대작 등[6] 여러가지 구설수나 계속해서 만들어대는 트러블 메이커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황해도 출신이라 분단의 아픔과 지역감정의 대립 등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역감정으로 갈라서기 시작한 경상도와 전라도의 화합을 내포한 '화개장터'라는 곡을 불렀다. 참고로 그는 작곡만 했고 작사는 친구인 김한길 전 의원이 했는데, 그 친구는 다른 쪽으로 유명해졌다.
데뷔전
1945년 5월 13일(음력 1945년 4월 2일), 황해도 평산군[7]에서 태어나, 1.4 후퇴의 피난 행렬에 섞여[]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이주했다.
조영남은 용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그러다가 1962년에 한양대학교를 자퇴하였는데, 자퇴의 이유가 재밌다(?). 2013년 10월에 방송된 SBS '좋은 아침'에 조영남은 한양대 성악과 후배 김승일과 함께 출연하여, 한양대를 자퇴한 이유를 설명하며 "2학년이 됐는데 신입생 여자 아이들 중에 정말 예쁜 여자가 들어왔었다. 그 여자가 한양대학교에 오는 걸 매일 몰래 봤다. 걔가 입학한 후로 온 정신은 '그 애와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였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내가 사회를 보면서 걔를 의식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약혼자가 있는 여자였다. 학교에서 그 여자와 내가 데이트 한다는 소문이 났고 약혼자가 날 찾아오기까지 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조영남은 "학교에 퍼진 소문 때문에 자퇴하게 됐다. 다시 공부해서 서울대에 갔고 그 여자는 파혼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15년 10월 방송된 MBN '속풀이쇼 동치미'에 출연해서는 한양대 자퇴에 대해 "잘렸다"는 말을 하였다. 즉 이날 방송에서 조영남은 "내가 한양대학교에 다니다 뜨거운 연애를 하고 잘린 적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에 출연진들이 "연애를 한다고 학교를 잘리냐?"며 의아해했고, 조영남은 "약혼한 여자와 눈이 맞은 거였다. 그 때는 내가 전액장학금을 받는 학생이었으니까 그러면 안 되는데…. 예쁜 걸 어떻게 하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자퇴서를 냈다. 이후 공부를 해서 다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후 1964년에 서울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하였는데, 1968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대 성악과도 이후 자퇴하였다. 다만, 2000년대 들어 서울대학교 측에서 조영남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서울대학교 자퇴의 이유에 대해 조영남은 2010년 9월 방송된 ‘황금어장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여 “서울대 음대를 다니던 중 미8군 오디션을 보고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깜짝 놀랄 만큼 수입이 좋아 더 이상 학교 다닐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해서 자퇴했다”고 밝혔다
무명가수에서 데뷔까지
조영남은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밤무대를 전전하다 주한미군이 운용하는 쇼룸에서 팝송을 부르다 성악을 그만두고 상업가수의 벌이가 좋은 것을 이유로 상업가수로 전환, 1968년에 '딜라일라'라는 번안곡으로 데뷔한다.
이 딜라일라로 방송에 데뷔했는데,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데뷔하자마자 굉장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본인도 본인 저서나 출연방송에서 본인은 거의 무명 시절은 없었던 편이라 회고하곤 한다.[] 이후 텔레비전이 지금처럼 절대적인 대중매체가 되기 전 시절이었음에도 TV에 자주 나와 TV를 자주 못 보던 서민들도 가수 조영남을 아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사실 지금 젊은 층은 (조영남의) 히트곡이라고 하면 화개장터 외에는 아는 노래가 없지만, 조영남과 같은 세대거나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윗세대 어르신들의 경우 1970년대 유명하던 대중 클래식 가수였다고(실제로는 번안 스탠다드팝 가수지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어쨌거나 유명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대부분 잘 모른다는 것은 팩트다. 어차피 70년대 최고 인기까지는 아니었으니... 그때 진짜 최고는 오히려 나훈아였다. 1980년대에는 조용필이 다 쓸어버렸고, 이후로는 이문세나 변진섭 같은 발라드왕들도 튀어나왔으니, 대중음악매니아가 아니고서야 조영남 노래까지 기억할 메모리는 부족하다. 1970년대 LP로만 음반을 발매하던 시절에 7만 5천 장을 팔았다고 하니 1990년대 기준이면 밀리언셀러 못지 않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한 인기 가수인 것.
스타가 되어 돈을 벌고 좀 먹고 살 만해진 뒤엔 본인이 한때의 굶주림에 상업가수로 전향한 것을 후회했는지 동생인 조영수가 성악가가 되길 원하자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었다고 한다.
결혼과 전성기
1971년, 군생활 도중 알게 된 배우 윤여정과 결혼한 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주도한 여의도 평화집회[14]에서 성악 쪽 담당자들을 수소문하고 직접 지휘한 후 빌리 그레이엄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 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수로 돌아오면서 활동도 왕성했지만, 집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끝내는 윤여정과도 갈라섰다. 스스로도 윤여정과 갈라섰을 때를 매우 반성하지만, 진심으로 윤여정을 위한다면 윤여정의 'ㅇ'조차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여론이 대다수다. 사실 조영남은 옛날부터 악명높은 바람둥이였는데, 결혼하고도 그 버릇을 통 고치지 못했다. 그런데다가 돈도 한 푼도 벌지 않았다. 오죽하면 쌀독에 쌀이 없던 날이 있던 날보다 많았다고 했을 정도다. 그래도 윤여정은 결혼생활동안 조영남에게 헌신적이었고, 7~80년대 미국에서 두부 구하기가 어렵던 시절 두부를 좋아하던 조영남을 위해 직접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무릎팍도사 윤여정 편을 보면 알듯이 윤여정에게는 이게 엄청난 트라우마다. 실제로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조영남의 'ㅈ'조차도 꺼내지 않았으며, 그 기세등등한 강호동과 유세윤도 몸 둘 바를 모른 채 진행을 했을 정도.[] 물론, 조영남 본인도 직접 "그녀가 입을 열었다면 조영남이란 사람은 사회에서 매장당했을 것"이라며 잘못을 시인했다.[] 그래놓고는 나중에는 윤여정이 못생겨서 같이 잘 수 없다는 초특급 망언을 했다. 일단 당신부터 거울이나 보쇼!
지금이야 양원경처럼 결혼 생활 내내 개막장 짓거리를 저질렀다거나, 송종국처럼 불륜(간통)을 저질렀다거나 하는 등의 예들처럼 어마무시한 사고를 친 것이 아닌 이상, (이혼에 대한) 인식은 제대로 잡혀서 이혼하고도 누구든 응원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저때 이혼이라는 건 여자 연예인들에게 있어서는 마약 복용 같은 수위 높은 사고를 저지른 후 브라운관에 복귀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동급으로 여겨졌을 만큼 사회에서 매장당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아 현정아, 내 때는 예수재림이었어! 조영남과 이혼을 했던 윤여정 역시 그 때문에 매장당할 뻔했지만, 본인과 가까웠던 김수현 덕분에 생활연기인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재기에 성공했다. 이러니까 조영남의 'ㅈ'만 들어도 경기할 만큼 증오하는 것은 당연지사. 윤여정에게는 당장 지우고 싶은 악몽이 바로 그 때다. 그런데도 조영남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를 "첫번째 결혼시절"이라고 말한다. 온갖 쓰레기짓을 다 하고 살았으니 잘도 편했겠지! 윤여정, 그리고 아들과 함께 지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말과 함께 당시 세 가족이 함께 찍었던 사진을 이용하여 미술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하여간 조영남은 이혼 후에도 정신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여자들과 엽색 행각을 벌였으며, 1980년대에는 자주 여성지에 이름이 올라왔다. 그리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자신은 자유로운 정신으로서의 자유 연애, 결혼 제도에 대한 실험이라며 되도 않는 변명을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그냥 쓰레기 같은 할배. 이 사람 이상의 개막장은 임택근 정도가 있다. 조영남이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가수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로부터, 특히 중장년층 어르신들에게 평판이 극도로 나쁜 이유도 다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한테 이미지가 좋냐면 그것도 절대로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금껏 계속 방송에 잘도 나왔었는지 아이러니할 따름.
가스 은퇴후
이혼 후에는 방송에 인생을 올인하여 체험 삶의 현장으로 대표되는 체험 다큐 형태의 방송을 이끌었으며, 2006년부터 2016년 5월 23일까지 MBC 표준FM의 오후4시 ~ 오후6시 라디오 프로그램 <지금은 라디오 시대> DJ를 맡았다.
보조 MC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는데 미국에서 MC로 성공한 자니 윤을 불러와서 그를 메인 MC로 한 '자니윤 쇼'에 조영남이 보조MC를 맡았는데 두 사람의 호흡이 너무 잘맞아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가수 쪽은 공식적인 은퇴 앨범을 낸 만큼 폐업 상태이나 프로그램의 PD들이 찾아와 사정을 하면 한두 곡 정도는 불러준다. '화개장터' 는 자기 스스로도 쪽팔려서 안 부르는 편. 결국 데뷔곡인 '딜라일라'를 우려먹고 있다.[17] 하지만 은퇴했으니 개런티는 공짜나 기부한다는 조건으로 안 받고 있다.
한국 연예인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이자 재산가이다. 그가 살고 있는 청담동 고급 빌라는 연예인이 살고 있는 집 중 제일 비싸다고 하며, 공시지가만 50억 원 이상, 실거래가는 100억 원이 훨씬 넘는다고... 사실 그 고급 빌라는 조영남이 아주 오래 전 구입한 것으로, 구입 당시에는 그리 고가가 아니었으나 재건축만 2번을 거듭하다보니 주변 시세와 맞물려 건물 가격이 폭등한 것. 게다가 집값이 너무 비싸다 보니 팔리지도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실제로 정말 작정하고 돈을 모았으면 지금의 재산 따위 푼돈으로 여길 정도로 엄청난 갑부가 되었겠지만[] 전술한 바람기를 바탕으로 한 방탕한 생활로 인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들한테 돈을 거의 뿌리다시피 하면서 재산을 홀라당 까먹기가 일상다반사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인기가 좋아서 돈을 엄청 잘 벌어서 저런 재산가가 된 것이다. 특히 재건축을 거듭할때마다 그 집을 팔라는 요구는 있었는데, 본인은 그 집 자체가 좋아서 그걸 지키고 싶어 안 팔았다고 한다.[]
은퇴 이후에는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주로 그리는 게 화투 그림을 크게 확대한 그림이다. 아무튼 이 화가 타이틀로 개인전도 여러 차례 열었고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명작 스캔들에서 미학 칼럼니스트 기믹으로 출연도 했다. 하지만 괜히 조영남이 아닌지라 사건사고 문서에서 설명하듯 큰 사건을 또 일으켰다.
이런저런 안 좋은 행각들이 크게 알려진 뒤론, 그의 취급은 거의 범죄자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면, 품위있는 행동을 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려준 인물.
가창력에 관하여
목소리가 아주 빼어나다. 과거부터 그는 쩌렁쩌렁한 성량과 정확한 음정, 박자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윤여정도 인정한다는 조영남 노래실력
준수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한 우렁찬 발성이 그의 가창력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클래식 창법을 베이스로 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대중음악의 장점을 접목한 보컬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 조영남은 노래가 아닌 그냥 하는 말을 들어봐도 목소리가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즉석에서 편곡이나 애드립을 하는데, 공연 직전에 갑자기 곡을 바꿀 일이 생기면 자기가 평소에 외우는 다른 곡의 악보를 급하게 자기 손으로 써서 밴드에게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음악적 감각이 약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애드립으로 노래 도중 엇박이나 음을 바꾸는 기교를 보여주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이탈할랑 말랑 하면서도 끝내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성악 공부로 인해 코드 진행, 멜로디와 화성에 대한 이해가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게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부분인데, 실제로 가창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많은 가수들도 콘서트 같은 공연에서 기교를 부리다가 조절을 못 해서 아예 음정이나 리듬이 3~4단계씩 확 빗나가 버리는 사례도 많다. 음이탈은 덤이고... 반대로 조영남이랑 비슷한 또래의 연예인들이 특별손님의 형식으로 조영남 공연에 출연해 조영남 모창을 위해 고의로 엇박을 넣었다가 마무리까지 박자를 못잡고 날려버리기도 했다. 조영남 식의 창법이 결코 쉬운 게 아닌 것이다. 조영남이 그 나이에도 흔들리지 않는 음감을 보유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소싯적부터 그는 트로트 가수들의 가창력을 비판하기를 좋아했는데, 가창력에 있어서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 중론. 스탠더드 팝이 유행이었던 시절, 조영남은 미군들이 좋아할 만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로 꼽혔고 당시 미군들에게 American Voice로 선호받던 가수였다. '딜라일라'를 비롯한 번안곡이나 팝송 역시 성악을 베이스로 한 쩌렁쩌렁한 성량으로 힘차게 소화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톰 존스라고 불리웠고 실제로도 그에 손색이 없는 수준. 지금도 조영남과 비슷한 연배이거나 7080세대의 어르신들은 "조영남이가 노래 하나는 참 멋지게 불렀지." 라는 식으로 왕년의 조영남을 팝과 클래식에 뛰어났던 가수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이유로 그가 진행하는 디너쇼는 아직까지 티켓파워가 있다.
이 덕에 매우 풍족한 생활을 유지하면서 성악의 길을 그만 두고 대중가수로서의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미군 부대에서 한 달간 벌어 들이는 수입이 당시 한 학기 대학 등록금과 맞먹는 수준이었고, 당대의 문화 아이콘으로 등극했었다고 한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지만 예술인들이 어지간해서는 먹고 살기 힘들 때였는데 본인의 수입은 당대 최고 수준이였기에, 가진 자의 여유로 동생들에게 많이 베풀어서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조영남을 많이들 따랐다고 한다. 당시에는 미 8군 부대에서 노래하는 것이 다른 그 어떤 무대보다도 높은 수입을 보장해줄 때였는데, 그 중에서도 조영남은 미군들로부터 가장 미국적인 목소리로 평가받는 인물이었으니 당연지사.
하지만 이미 스탠더드 팝의 시대는 끝났고 성악 특유의 톤을 진정성이 없다거나 작위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현재의 풍토이기에 그런 점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은 나올 만하다. 예능용 멘션이긴 했지만, 본인도 자신의 창법이 대다수의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라 세련된 대중가요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종래 조영남의 가창력 기반은 현란한 기교나 힘조절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에너지를 잃지 않고 뚝심있게 음을 질러서 울리는 방식으로 감정의 흐름을 관객석 끝까지 온전하게 밀어붙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조영남은 순수하게 타고난 힘을 앞세운, 그야말로 뜨겁고 우렁찬 노래로 성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성악톤의 스탠다드 팝이라는 장르로 큰 인기를 얻은 원천이었다. 이처럼 성악톤을 이용하는 방식 자체는 힘있는 발성을 기본으로 해야 감동이 커지는데, 현재 나이가 든 조영남은 젊을 때보다야 확실히 힘이 약해져 그만의 노래맛이 떨어진 감이 있다.[] 사실 이건 음악적 재능과는 무관하게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다. 혹시나 조영남이 운동과 식이조절로 벌크업을 하고 힘을 키워서 젊었을 때의 파워를 유지하고자 노력했었다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본인이 그렇게까지 죽어라 노력하지는 않았다.[25]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조영남이라는 인물이 일생에 걸쳐 크고 작은 사고를 치고있지만, 가수라는 본업의 실력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없고 예술적 재능이 풍부한 사람인 것도 사실이기에 연예계에서 롱런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보면 적당하다. 본인도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대한 자부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는 한다.
작곡과 음악성에 관하여
작곡 능력은 평범한 편이다. 길옥윤 등의 당시 작곡가들에게 공개적으로 비판을 당한 적도 있고 본인도 곡은 쓰는데 영 생각만큼 안 나온다는 이야기를 자주 할 정도. 음악적으로도 번안곡 가수의 한계점 역시 많은 부분에서 보인다. 애초에 그의 히트곡 대부분은 자기 노래가 아닌 남의 노래를 그대로 가져다가 가사만 한국어로 바꾼 것이다. 다만, 불멸의 히트곡 화개장터가 있으니 작곡가로서 완전히 꽝은 아니고 대한민국의 인기가수로서 체면치레 정도는 한 셈.
클래식에 대한 조예는 깊을지 모르나 대중가요에 대한 이해는 몹시 부족해서, 싱어로만 살기에는 본인의 재능이 아깝고 싱어송라이터를 겸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로, 세시봉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뉴 웨이브' 의 한 축 내지는 아이콘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나마도 김민기, 송창식이라는 뛰어난 송라이터들 때문에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것. 김민기와 송창식, (그리고 평가는 이들에게 살짝 못미치지만) 양희은 등이 세시봉의 한계였던 번안곡, 포크에 한정된 음악성,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뛰어난 음악세계를 이루어 내는 데 성공했음을 고려한다면 그는 그야말로 '노래 잘하는 가수'에서 멈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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