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에 대해알아보자
대한민국의 가수·프로듀서다. 1989년 10월 15일 1집 《B.C 603》으로 데뷔했으며, '어린 왕자'라는 별명[10]으로 유명하다.
1990년대의 대표적인 뮤지션 중 한 명[11]이었고, 그의 콘서트에 대한 열정, 생동감 넘치는 콘서트 등으로 '공연의 신'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한창 절정의 인기를 자랑하던 2~3집 시기(1990~1992년)에는 아이돌로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12]로 10대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받았었고 대학가에서 인기가 많았던 시기였다.
데뷔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온갖 음반사를 다녔으나 데뷔는커녕 물만 먹고 다녔다. 음악을 하겠다고 부모님 속을 끓이다가, 결국 아버지가 유산을 미리 떼준다는 심보로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둔다는 약속을 받고 이승환에게 음반 제작비로 쓰라고 돈을 내주었다.[13] 그 돈으로 이승환은 자기 제작으로 앨범을 만들게 되었고, 그때까지도 부모님은 앨범 낸다면서 같이 다니는 친구랑 이승환을 보면서 외려 속만 더 끓었다는데[14] 결과는 1년 동안의 장기전 후에 대박이 났다. 지상파 방송 출연도 안 하고 100만 장 판매를 해버렸다. 같이 작업했던 친구는 바로 1990년대 초중반을 풍미한 작곡가 오태호다. 오태호가 명성을 얻은 것도 이승환 1집을 통해서였다.
공연의신
데뷔 때부터 꽤 뜸했던 방송 출연[15]은, 본격적으로 발라드가 아닌 록 등의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게 된 5집 이후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와 함께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 또한 지나가버렸고, 결국 이승환은 대중 전반에 걸쳐 사랑받기보다는 매니악한 팬덤과 주로 소통하는 유형의 가수가 되었다.
라이브 밴드 출신임과 더불어, 오디오 매니아라는 점이 영향을 끼쳤는지 이승환의 라이브 무대에서 퍼포먼스와 음향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16] 따라서 이승환의 콘서트는 국내 대중음악계에서는 선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여러가지 새로운 기술적인 시도와 더불어 절대적인 횟수, 그리고 그 수준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국내 최초로 전국 공연 투어에 이름을 붙여 브랜드화했다. 99년 무적투어[17], 01-02년 SSEN CONCERT, 05년 이승환의 난 '亂李'투어 등. 최초의 용산 전쟁기념관에서의 대중음악 공연[18], 최초의 ABR(움직임 제어가 가능한 초대형 풍선 예술)의 공연도입, 국내 최초의 젠하이저 후원 가수, 게스트도 없이 9시간 30분의 공연 시간 등등의 많은 공연 관련 기록을 가지고 있다.[19] 공연 내용에서는 갖가지 이벤트가 풍성하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발라드 레퍼토리를 주로 하는 대형/연말 공연과, 록 넘버가 주가 되고 주로 스탠딩으로 열리는 중소형 공연이 나뉘어 지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입문하는 사람은 연말 공연 쪽을 도전해보는 것이 좋다.
이리저리 공연 중간에 이벤트도 많은 편이며,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몇몇 공연 외주 업체에 십여년 이상 전담하다시피 외주를 주어 일관성있는 수준을 뽑아내고 있다. 과거에는 더 뛰어다니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달고 점프 연습을 하기도 하였으며, 공연 도중에 맹장염이 나면 어쩌나 싶어서 병원에 가서 미리 짤라버리면 안 되나요 하고 상담했다가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공연 기획부터 주최, 연출까지 직접 하다 보니 공연 도중에 자꾸 이런저런 손동작으로 엔지니어들과 대화하며 이런저런 것들을 조정하기도 한다. 공연장이나 라이브 영상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인터뷰에서 노래 부르는 것보다 "아... 왜 여기서 조명이랑 노래랑 타이밍이 안 맞지?" 이런 생각에 더 집중하기도 한다고 하기도 했다.
평소 성격은 잘 알려진 바가 없지만, 공연 전후로 스탭들에게는 까칠 그 자체라고 알려져 있다.
탁재훈, 신정환의 컨츄리꼬꼬와 무대도용에 대한 소송이 2008년 시작되어 2009년 여름에야 끝났다. 이승환은 지난 2007년 12월 22일부터 24일 3일간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콘서트 '슈퍼히어로'를 열었고 컨츄리꼬꼬는 12월 25일 같은 장소에서 콘서트 '불후의 명곡'을 펼쳤다. 문제는 컨츄리꼬꼬가 이승환이 사용했던 무대 설비와 특수효과 등을 철거 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승환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상의도 없이 자신의 무대를 도용한 컨츄리꼬꼬의 공연 기획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양측의 법정공방이 시작됐다.
정확히는 컨츄리꼬꼬의 공연 기획사와 이승환의 공연 기획사 간의 문제였지만, 이승환이 워낙에 공연에 목숨을 거는 스타일이라 본인이 직접 대응을 하게 되어 꽤 일이 커졌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제12부(재판장 양재영 판사)는 2009년 2월 6일, "이승환 측의 저작권 침해나 소유권 침해 주장은 명시적 승낙은 없지만, 제반사정에 의해 묵시적으로 승낙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를 기각하였으나, 컨츄리꼬꼬 측이 이승환의 명예를 훼손한 점은 인정하여 금 1,000만 원의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훗날 탁재훈은 오빠밴드 녹화 관계로 이 펜싱 경기장을 다시 찾게 되는데 여기 좋지 않은 추억이 있다면서 몸서리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 문제는 "컨츄리꼬꼬 공연 기획사"의 문제이지 탁재훈과 신정환이 일으킨 문제는 아니라서 이승환과의 사이는 딱히 나쁘지 않다.
콘서트 때 모니터링 이어폰으로 B&O사의 오픈형 이어폰 A8을 주로 사용했었다. 보통 모니터링 이어폰은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커널형을 사용하는 것에 비추어 보면 의외스러운 일이기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곤 했다. 이승환이 홈페이지에서 밝힌 바로는 첫째로 커널형은 외부의 소리를 차단해서 콘서트 중 관객들의 반응을 들을 수 없고, 둘째로는 어떤 이어폰을 사용해도 귀에서 빠져나가버리기 때문에 귀 걸개가 있는 A8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격렬하게 움직이다 두 세 개씩 고장내기도 하고, 그 중에 알루미늄으로 된 이어폰에 귀가 긁혀 그 다친 곳을 만지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매번 공연 때마다 기본 2, 3개는 사용후 맛이 가버려서 쓸 수 없어 버린다고 말한 적이 있어 식호 덕후들을 열폭하게 만들었다. 정말 여담이지만, 시코 에서는 "이승환 왜 A8 같은 거 쓰나요? 별로네~" 하고 이승환과 A8을 동시에 비난했다. 게다가 A8은 일반적으로 저음부가 약하다는 게 중론인데 이승환이 A8을 쓰는 이유중에 "저음이 좋다"고 하는 부분이 있어서 비난하는 사람들은 '가수라면서 귀는 폼으로 달았네'라며 까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니들이 음악쪽으로 이승환보다 잘났냐'며 키배를 떴다. 2015년 이후로는 DF가 쓰여진 노란색 커스텀 이어폰을 사용하고 있다. 2015년 9월 19일 빠데이공연 때 A8을 쓰지 않고 커스텀 이어폰으로보이는 노란 이어폰을 사용했다. 그 후 Westone의 엔도서로 선정되어 동사의 um pro 50 에 이어 ES 60 이어폰을 사용하고 있다.
A8 이전에는 인이어를 절대 하지 않고(상기된 관객 반응 캐치의 이유) 거의 메인 스피커 만큼의 물량을 모니터에 투입했었다. 덕분에 드럼은 아크릴 벽에 갇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모니터 외에 공연시 주로 선호하는 스피커는 클레어브라더스, Adamson, 메이어사운드 등이며, 마이크는 SHURE 이승환 자체 커스터마이징 버전(젠하이저는 기간 만료)이고 마이크스탠드는 특별 주문한 빙빙 돌리기 좋은 물건이다.
이승환의 음악
스스로 음악의 출발점을 들국화로 꼽고 있으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재학 시절 '아카시아', '셀프서비스[SS]' 등의 헤비메탈 밴드를 결성하는 등 이승환 음악의 시작점은 록 음악이다. 이후에도 오태호와 함께 파고다 극장 언더그라운드의 여러 밴드를 거쳤다.[20]
본인의 발언에 따르면 이 시기 가죽 자켓에 쇠사슬을 매달고 무대 위를 뛰어다녔다고 한다.[21][22] 이를테면 1집의 데뷔곡 〈텅 빈 마음〉[23]의 경우에도 분명 음악 장르적 분법으로는 발라드에 속하지만, 곡 진행과 사운드의 활용에 있어 록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정통 발라드스럽지만은 않고, 같은 앨범의 다른 트랙들, 특히 〈좋은 날〉이나 〈그냥 그런 이야기〉[24]는 아예 록적인 접근이 더 두드러진다. 그리고 데뷔 이후 계속된 음악 작업에서는 전통적인 문법에 따른 록 음악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런 록적인 본색은 본인 스스로도 《이오공감》의 앨범에서 많이 드러냈다고 고백을 한 적이 있고[25] 3집부터는 1, 2집에 비하면 록적인 접근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당시의 이승환 본인에게 있었던 일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3집부터 내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할 정도다. 그래서 3집의 타이틀이 《My Story》다.
하지만 메이저 데뷔를 발라드로부터 시작했으며, 당시 큰 활약을 했던 오태호와의 콤비로 엄청난 대중성을 발휘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그 후 앨범에서도 록적인 요소가 가미된 곡이나 록 음악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앨범의 타이틀 곡은 발라드였으므로, 추구하는 장르가 어떻든지 대중은 이승환을 발라드 가수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이승환 본인의 말로는 록 보컬로는 자신의 음색에 강한 한계를 느껴서 결국 발라드와 록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는 같은 무명 시절에 파고다 극장 무대에 선 김종서의 공연을 보고 쟤 때문에 난 록은 안 되겠다라고 느껴서 방향을 틀었다고 했고, 이문세의 〈소녀〉가 본인을 발라드로 전향하게 만든 곡이라고 했다.
그래서 팬들도 발라드 가수 이승환을 좋아하는 팬들과, 록 음악을 하는 이승환까지 좋아하는 팬들로 나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난 이승환 옛날엔 좋았는데 요즘은 별로야라면 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다만 노래 중간중간에 나오는 메탈릭한 샤우트 보컬은 곡의 전개에 큰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기도 한다.[26]
이에 따라 4집 《Human》에서는 'Fire'와 'Water', 6집 《The War In Life》에서는 '정상'과 '비정상', 7집 《Egg》에서는 'Sunny Side-Up'과 'Over Easy' 등으로 앨범을 이분하여 앞부분에는 발라드를 위시한 팝 적인 분위기의 곡들, 뒷부분에는 록 위주의 곡들을 수록하여 양쪽 모두의 팬들을 끌어들이려 하였지만 음악적 퀄리티와는 무관하게 그다지 성공한 시도로는 평가받지 못한다. 발라드 팬들은 뒷부분을 싫어하고 록음악 팬들은 앞부분을 싫어하니 결국 불만은 그대로. 게다가 음반 자체로서의 연결성과 완결성이 떨어진다는 비판까지 나왔었다. 그래서 《Serious Day》라는 록 음악에 집중한 음반을, 《Monglong》이라는 발라드에 집중한 비정규 음반을 내기도 했다. 정규 9집과 10집은 락과 발라드를 잘 섞어서 한 장의 음반으로 발매했다. 또 발라드로만 구성되어있는 《His Ballad I》, 《His Ballad II》 앨범을 내기도 했다. 이 앨범들엔 주로 예전에 나온 노래를 다시 녹음하거나 새 곡을 넣었다.
사실 〈천 일 동안〉[27] 등의 히트 발라드곡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승환의 록 음악은 어느 수준 이상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사운드 측면에서는. 하지만 전통적인 록/메탈씬에서는 발라드 가수 출신인 이승환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으며, 이승환 스스로도 전통적인 문법에 따른 록 음악보다는 가스펠을 도입하고 Choir를 강조하는 등 변형된 록 음악을 추구하고 있기에 실제보다는 낮게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싱어송라이터다. 데뷔 앨범만 하더라도 수록곡 10곡 중 7곡을 자작곡으로 넣을 정도며, 매 앨범마다 꾸준히 자작곡을 채우는 사람이다.[28] 문제는 유명한 곡들 대다수가 다른 뮤지션 혹은 작곡가들의 곡이거나 아님 공동 작사/작곡이라는 것이다. 특히 공동 작사/작곡인 경우에는 엄밀히 말해서 일단 이승환이 먼저 곡을 쓰고 그것을 공동 작사/작곡으로 명시되는 뮤지션과 공동으로 수정, 보완하는 식으로 완성하는데 문제는 이게 그 공동 작곡가의 곡이라고만 알려진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본인도 내가 곡을 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29]
한편, 가수 유재하 다음으로 가수 본인이 직접 자신의 음반을 제작한 가수이다. 1집을 제작한 '우리기획'은 이승환이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서 차린 회사다. 이후 1997년, 우리기획[30]을 확장시켜 '드림팩토리'라는 종합 연예기획사를 만들어 휘하에 공연 스탭 양성 학교, 음반 녹음 스튜디오, 연예 매니지먼트 사업부, 캐릭터 디자인 사업 등을 하였으나 국내 음반 시장의 전체적인 부진과 더불어 그리 전문적이지 못했던 경영 등의 이유로 시원하게 말아먹고 대부분 철수 혹은 분리하였고, 직접 매니지먼트하던 박신혜, 정성미, 김시후 등은 모두 다른 기획사로 이적하게 됐다.
이후로 드림팩토리에 본인만 남은 형태를 유지하고, 인디 뮤지션들에 대한 제작과 지원의 끈은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듯 했으나, 드림팩토리클럽은 잠정 휴업에 들어갔었다.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윤상과 같은 소속사였고, 이후 오드뮤직에서 나와 1인 기획사 형태로 드림팩토리를 운영한다.
가창력
하현우나 김경호처럼 소름끼치도록 압도적인 고음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자신의 음역대 내에서는 어마어마한 내구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승환의 음역대가 낮다는 소리가 아니다. 이승환의 음역대는 진성으로 0옥타브 파♯(F♯2)[31]에서 3옥타브 도(C5)[32]까지[33], 가성 애드리브로 4옥타브 도 (C6)[34]까지 올라가는 등 충분히 넓고 높은 음역대를 가졌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빠데이에서 6시간 반동안 66곡을 불러댔음에도 전혀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고, 그 다음주에 다른 공연 일정을 차질 없이 소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량도 어마어마하게 큰데, 노래를 부를 때 종종 마이크를 단전에 갖다대고 노래를 부름에도 불구하고 밴드의 사운드와 어우러져 무대를 꽉 채우는 성량을 느낄 수 있다. 이런 퍼포먼스를 50대 중반이 된 현재까지도 계속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놀랄 만한 일이다.[35]
보통 한국에서는 음역대가 넓거나, 고음이 잘 올라가거나, 테크닉적으로 뛰어난 보컬리스트를 높게 쳐주는 경향이 있는데, 이승환처럼 편하고, 오래, 흔들림 없이 부르는 창법이 발성에 있어서 가장 권장하는 이상적 형태다.
위에 자주 언급되었듯이 과거와 현재의 음악성이 좀 다른지라 창법이나 목소리도 꽤나 변화가 큰 편이다. 히든싱어에서도 보였듯이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를 가장 이승환처럼 불렀다고 생각된 사람은 이승환이 아닌 모창 가수였다. 조성모처럼 아예 목이 가버려서 창법이 바뀐 수준은 아니고 본인이 원하는 음악성에 따르다보니 창법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나이도 적잖다 보니 과거와 같은 목소리를 내기도 어려울 것으로 추정된다.
확실히 과거에는 고음 샤우팅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아주 가늘듯 떨리는 미성을 주로 사용했는데 앨범이 점점 뒤로 가면서 조금조금씩 굵은 목소리의 사용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과거의 노래를 듣고 현재의 이승환 라이브를 들으면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이는 음악 스타일의 변화가 매우 큰 것으로 보이는데, 1~4집 시절 불렀던 좋은 날, 악녀 탄생, 덩크 슛 등의 밝은 밴드 음악풍 곡들을 들어보면 현재 보이스, 창법과 거의 유사하다. 하지만 오태호식 발라드로 대표되던 초기 대표곡인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같은 곡들에서 보여준 목소리는 2010년 경 이후로는 들을 수 없는데, 이 활동 초기 발매곡들을 최근 콘서트에서는 바뀐 창법으로 부른다.
그렇다고 가창력이 줄어들었다는 평가는 거의 없다. 말 그대로 본인의 의사로 바꾼 것이고 기본적인 베이스에는 변화가 없다. 적지 않은 나이와 라이브 경력을 생각하면 괜히 억지로 목을 끌어쓰기보단 자기가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최대한 힘을 쓰는 게 장기적으로 훨씬 유리하다.
라이브 콘서트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상기된 바와 같이 김경호 등의 초고음 가수와는 괴리가 있으나 그의 깔끔한 고음과 성량은 인터넷 상에서 떠받드는 본좌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오히려 출발선 문제 때문에 또 그의 타고난 미성 때문에 상당히 저평가 되었을 뿐, 이승환은 최고의 발라드, 록 싱어이다.
정치성향
2010년대 들어 촛불집회와 MBC 파업 콘서트 등 사회적인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젊은 시절인 1980년대에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하지 못하고 홀로 조용히 대학 생활을 해왔던 것에 대해 모종의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2012년 11월에 개봉한 《26년》의 제작에 10억 원을 투자하면서 그의 스탠스를 다시금 보여줬다. 영화 제작 환경이 불확실했던 데다 드림팩토리의 사세가 낙관적이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어려운 결정을 내린 셈이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과거 《His Ballad II》 앨범에 수록되었던 곡 〈꽃〉[36]이 삽입되었다.
2014년 11집을 발표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헌정곡도 만들었다. 그 곡이 바로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이다. 도종환이 작사했고, 수익금은 백혈병 어린이 재단에 기부한다고 했다.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건 이명박 전 대통령 때문이라고 밝혔다. 《JTBC 뉴스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정치 세계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명박 후보가 당선됐을 때 "조금 더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많은 사람들의 믿음과 허무맹랑한 공약이 만나 결국 당선이 됐는데 난 그게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말에 손석희 사장이 "전임 대통령을 말씀하시는 건가요?"라고 묻자 말을 흐리는 것 없이 "네"라고 딱 잘라 대답했다
2016년 11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항의해 박근혜 퇴진 운동에 동참하여 드림팩토리 건물에 박근혜는 하야하라 현수막을 내걸었다. 구청에서 문제삼자 변호사의 자문을 거쳐 '신고된 집회를 알리는 현수막은 합법' 규정을 이용해 2016년 11월 민중총궐기 참여 독려 문구를 추가하여 다시 현수막을 달았다. 촛불집회에서 공연도 하였는데, 〈덩크 슛〉을 부를 때는 일부러 가사를 "하야하라 박근혜 하야하라 박근혜", "하야하라 박근혜는 하야하라 하야하라"[37]로 바꿔서 불러 화제가 되었다. 참 재미있는 사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사람 중 한 명인 차은택은 이승환의 뮤직비디오 두 편(〈당부〉, 〈그대가, 그대를...〉)을 찍었으며, 이승환의 고등학교 후배이다. 우스갯소리로 이 덕분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않았다고 하기도 한다. 실제로 차은택은 이승환과 상당히 절친했던 사이였고 차은택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관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승환은 차은택에게 자수하고 죄값을 받으라 했지만 차은택이 무시하자 연락을 끊었다고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밝혔다.
상술된 대로 박근혜 정권 뿐만 아니라 2017년 9월에 밝혀진 이명박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도 명단이 오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승환은 '내 이름은 왜 빼냐 나도 넣어라 이놈들아.'라며 매우 섭섭해 했고, "MB 국정원 퇴출 리스트에도 없는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고 있다"라는 글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사실 만든 세력에서도 이승환은 방송출연으로 먹고 사는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방송출연을 막는 것을 주된 공격기법으로 하는 연예인 블랙리스트에서 실질적 손해가 거의 없다는 걸 계산했을 가능성이 있다. 소속사에 대한 압력도, 이승환은 1인 기획사로 본인이 직접 소속사를 운영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압력을 넣기가 힘든 상황이다. 이를 두고 팬들은 농담삼아 '어용 가수', '적폐 가수'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혹은 국정교과서 반대 콘서트 당시에 모 트위터리안이 했던 '듣도 보도 못한' 이라는 표현 때문에 듣보 가수라서 정부가 몰라서 안 넣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2017년 11월 16일 tvN <인생술집>에 주진우와 함께 출연했을 때는 '(블랙리스트에 없으니) 창피하기도 하고 잘못 살았나 싶기도 하다'라고 농담을 하였다.
대표적인 '친민주당’ 연예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주저함이 없으며, 그래서 성향이 굉장히 잘 드러난다. 본인은 '그저 국민의 편' 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과는 별개로 성향이 그렇다. 그래서 음악과는 별개로 이런 면의 이승환을 싫어하는 사람도 좀 있다.
살해 협박
어떤 사람한테 살해 협박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단순한 장난이거나 근래에 들어 우리나라 정치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시하기 시작하면서 그와 반대되는 정치 성향을 가진 누군가가 나쁜 방법으로 불만을 표출한 듯 싶다. 이승환 본인은 이러한 협박에 '그네들의 수준이란... 피식. 어떻게 하겠다고 말하면 정말로 어떻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 이라며 되려 비웃었다.
명예 훼손 집단 고소
2019년 7월 2일 김반장[38]을 비롯한 악플러 50명을 모욕죄로 고소 고발했다. 이승환이 본인 페이스북에 오늘의 추천곡이라며 도시아이들의 노래인 〈달빛 창가에서〉를 올렸는데,[39] 저격한 이를 주어가 없다며 누구를 향한 언급이냐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 후에 이승환은 페이지에 "경직된 사고로 폭력적 언사를 행하며 증오를 부추기고 편가르기를 하는 사람이 설마 너니?", "바보들. 풉. 찔리니?"[40], "정말 바보들이었어... 앜ㅋㅋㅋ 바보한테 바보라고 하면 안되는데... 막 또 쌍욕하고 그럴 텐데."라며 여전히 누구를 지칭하지 않은 채 조롱을 했으며, 이에 따라 이들의 비난도 거세졌다. 이승환은 이 후, 자신의 팬들이 환창이라고 모욕을 당했단 내용과 팬까지 비난하는 것은 참지 못한다며 고소 예고글을 작성했다. 고소 예고글을 작성한 뒤에 가장 수위 높은 욕설을 했다며 김반장의 욕설을 캡쳐한 뒤론 김반장이란 트위터리안이 아닌 본명을 들어 꼬박꼬박 선진 군으로 부르며 문재인 지지자의 멸칭인 똥파리를 연상하는 개똥 무덤이 집이란 멘션, 9시간 반동안 93곡을 부르는 내 절제와 관리를 보고 용서를 구하려면 스스로 궁리를 구해라, 네 글을 읽는 게 고역인데 다음 주부터 녹음인데 감성 조절에 문제가 생긴다, 쪽팔리게 글이나 지우지 마라, 소심한 줄 알았는데 꽤 버티네? 법정에서 나한테 발리지나 마라. 나는 운동하러 간다 같은 내용의 조롱을 했으며, 그 와중엔 밴드 드러머의 결혼식 기념 콘서트 홍보 포스터에 인생도 결혼도 실전이란 문구를 적고 김 선진 군에게 감사드린다는 과격한 멘션을 남기기도 했다.멘션을 정리한 스샷 이후 욕설을 한 사람들을 고발했단 내용을 기사화했고[41], 이후 소속사를 통해 명예훼손 고소를 밝히게 된다.### 이에 김반장도 고소에 맞대응하겠다고 밝히고 어째서 이승환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입장문을 남긴 상황#이고, 이에 대해 이승환은 '내가 나경원을 옹호하고 문대통령과 지지자를 조롱한 것인지 5월 11일 게시물 확인. "이 게시물은 문파를 조롱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써야 함? 외계인도 텔레파시로 알아먹을 듯. 혹시라도 전략 짜고 지시하는 거면 교체해라. 무능하다'라고 게시물을 올렸는데, 작전세력[42]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며 비판을 받았다. 또한 고소글에 자신이 광장에 선 첫 가수란 언급[43]을 한 것, '노파, 문파면 날 응원해야죠. 읭? 뭐지?'이라고 한 것도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1년이 지난 2020년 10월 15일 김반장에 대한 판결이 선고되었다. 검찰에서는 약식명령을 청구하여 벌금형을 구형하였으나, 법원에서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고 판단하여 공판절차에 회부하였고 징역형 집행유예와 상당 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했다.
동안
연예계의 대표적인 동안으로 유명하다. 2020-12-26 21:41:50+0900 기준 55세다. 같은 남자 가수 중 절친 신승훈도 동안으로 유명하지만, 이승환이 신승훈보다 생일이 4달 빠르다. 각종 토크쇼에 나와서 이야기하길 본인은 실버보험이 가입되는 나이라고 한다.[44] 보험비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사망 밖에 없다는 자학개그를 열심히 밀고 있다. 자신의 별명인 '공연의 신'을 팬들이 이제 50세가 되었다며 '공연의 쉰'이라고 바꿔 부른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최근 매체에서 등장하는 모습에서 스타일과 별개로 나이가 든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본인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인다는 사실엔 큰 변함이 없다.
여성 연예인 중에 동안으로 이승환과 비교될 만한 인물로는 이선희가 있는데, 이선희는 젊을 때부터 무대 이외의 장소에서는 조용하고 점잖은 성향과 스타일 때문에 잘 안 드러났고, 데뷔 초에는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다. 심지어 20대 시절에 시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40대 초반부터 당시 신인스타 이승기의 스승이었다는게 매스컴에 많이 어필되고 이승기가 "선생님"[45]이라고 부르는 모습도 방송에 꽤 많이 나와 선생님 이미지까지 생기며 실제 외모에 비해서는 이승환처럼 많이 어려 보인다는 이미지는 꽤 약해졌다. 이에 비해 이승환은 본인이 나이를 초월하여 '영원한 오빠', '영원한 형' 기믹을 원하기도 하고 후배들에게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하는 등 젊은 이미지에 노력하는 부분도 있어 이미지 차이는 많이 난다.
하지만 알고 보면 동안 때문에 불편함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단골 미용실에 머리를 자르러 가면 언제나 아줌마가 머리를 짧게 잘라버렸는데 이승환 본인이 약간 길게 해달라고 하면 학생이 그러면 못 쓴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저 가수인데요라고 말을 하고나니 그제서야 머리가 강제로 짧게 잘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 외에도 동안 때문에 겪었던 일화를 들어보면 꽤 나오며, 한창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1990년대에도 동안으로 유명했다. 60년대 후반에 태어난 수많은 연예인 동생들에게 초면에 동생 취급 당해서 억울했던 에피소드들이 있다. 그래서 본인이 그냥 자신과 5살 미만으로 차이 나는 연예인들에게는 그냥 최대한 깍듯하게 존대했다고.
사실 2014년을 기준으로 20여 년전의 지상파 출연 당시와 지금의 패션을 비교를 해보면 코디의 힘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46] 검색을 해보면 코디 때문에 웃긴 동영상이 꽤 많다.
오덕끼
일반인에게는 동안 가수, 혹은 김종서, 김태원과 동갑으로, 서브컬처의 오덕력 충만한 사람들에게는 님도 우리들 동지, 오덕 가수 등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확인된 오덕계열 취미로 피규어 수집, 게임 등이 있다. 피규어의 경우는 본인이 말하길 약 1,000여 점이 넘게 소지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홍콩 쪽 유명 아티스트의 고가 제품도 있다.
경제야 놀자 등 방송 등지에서 확인된 바로는 오! 나의 여신님의 베르단디, 파이널 판타지 10의 유우나 피규어도 있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캐릭터 피규어도 있었다. 물론 그런 류의 피규어만 수집하는 것은 아니며 아메리칸 코믹스의 히어로 피규어나 이소룡 피규어 같은 것도 있었다. 피규어 수집의 경우, 애완견을 키우고 난 뒤로 접었다고 본인이 언급했다.
십수 년 전에 방영한 라디오 스타에서는 동갑인 김국진과 말놓기로 하다가 당시엔 서로 이혼하고 혼자라 김국진이 곰 인형 남는 거 없냐고 물었는데 이승환은 "난 곰돌이 인형 같은 건 취급 안 해."라고 답했다.
발매된 거의 모든 게임기를 소유하고 있다. 과거 콘서트 전국투어때 메가드라이브를 갖고 다니면서 밴드들과 내기를 하기도 했으며, 방송에 나와서 유명해졌듯이 지상파 방송에서 MC 들과 Wii 닌텐도 위스포츠를 즐기는 모습을 보이는 등의 파격적인 오덕행보를 보였다. Wii 정발 전에 방송된 것이라 정발 전까지는 Wii가 통칭 '이승환 게임기'로 불리기도 했다.
하나 있는 누나의 자식들인 조카들과 사이가 좋은데, 매번 게임기랑 게임이 나올 때마다 재밌어 보이면 무조건 사서 조카들에게 선물해주는 게 취미라고 한다.
이외에도 하이파이 오디오, 홈시어터 구축, DVD 수집 등의 매니악한 취미를 갖고 있다. 무릎팍도사에서도 취미가 오디오비주얼[47]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용산 전자상가 수입음향기기 코너에 가끔 안경 벗고 돌아다닌다고 전해져 있다. 맨날 츄리닝 입고 구경하러 다니니까 점주들이 돈 없는 사람인 줄 알고 상담을 잘 안 해주더라, 주문해서 집에 배달된 거 보니까 이승환이라고 이름이 적혀 있더라 하는 전설적인 괴담을 남기고 있다.
어느 기사의 인터뷰에서 자기 스스로 "중년 오덕후"라고 인증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