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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 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1. 10. 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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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대표했던 국민 배우이자 만인의 연인. 1988년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한 이래 20년 동안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199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시대의 아이콘이자 국민 스타이다.

타켓층이 특정 연령대가 아닌 유치원생부터 60대 이상 노년층까지 남녀노소 전 연령대 층을 아우르는 인지도, 대중성, 호감도, 스타성, 파급력 등을 지님과 동시에 옆집 딸, 친구, 누나, 언니, 동생 같은 친근한 슈퍼스타 이미지의 배우였다

 

1968년 12월 24일에 태어났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최국현이 가출한 뒤 어머니 정옥숙, 남동생 최진영과 함께 살았다.[5] 정옥숙은 화장품 외판원 혹은 포장마차 운영을, 최진실은 아르바이트로 햄버거 가게 점원을, 최진영은 아르바이트로 광고 모델을 했다. 그러다가 최진실도 연예계에 발을 디디게 되고 최진영도 본격적으로 연예인의 길을 걷게 되는데, 통상 최진실은 1988년, 최진영은 1990년을 공식 연예계 입문 연도로 본다. 정옥숙은 최국현과 1985년부터 13년간 별거하다가 1998년 이혼한다. 그 13년 동안 정옥숙은 육아를 전담하고 딸의 사회적 부상과 함께 촬영장 동행 등 최진실 매니저 역할에 매진한다. 그러다가 박진희가 최진실을 따라다니며 정옥숙의 역할을 맡는다.# 박진희의 딸 이은정과는 의자매가 된다. 최진실은 내성적인 정옥숙보다 외향적인 박진희를 일적으로 더 맞아한다. 최진실은 2000년 야구선수 조성민과 결혼해 2001년 8월에는 아들 최환희를, 2003년 3월에는 딸 최준희를 낳아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지만 2004년에 이혼했다. 이후 최환희의 양육 역할은 정옥숙에게, 최준희의 양육은 박진희에게 맡긴다.

정옥숙은 그림과 시에 소질이 있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소설광이었으며 신광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에는 미용사로 일했는데 이후에도 그런 재능을 살려 어린 최진실에게 직접 근사한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하고 멋진 시를 써서 보여주기도 하며 최진실의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정옥숙의 자매 중에 소설가가 된 막내 여동생 정현숙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최진실은 자신보다 다섯 살 연상인 정현숙을 이모들 중 가장 좋아했다. 정현숙은 1991년 MBC 다큐멘터리 <인간시대> '최진실의 진실' 편에도 최진실, 정옥숙과 같이 출연하여 최진실의 친구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학생운동 경험이 있던 정현숙은 '숲속의 방' 캐릭터 연구에도 도움을 준다. 정옥숙보다 아홉 살 연상인 최국현은 경복고등학교 시절 연극을 하고 KBS 탤런트 공채 1기였다고 하나 부친의 극심한 반대로 운수업에 종사하게 된다. 배우 최재성은 6촌 오빠였고 최재성의 아버지이자 최국현의 사촌 형 최상현은 연극배우 출신의 KBS 연출가였다​.# 중학생 시절에 아역 배우로 유명했던 2살 연상 배우 강수연이 같은 재단 고등학교를 다녔고 최진실은 강수연을 우상으로 삼는다.

최진실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연기에도 재능을 보이는 등 예체능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초등학생 시절에 친구들한테 만화를 그려주고 용돈을 벌기도 하고 드라마를 보고나면 그걸 따라하는 게 일이었다. '연기 놀이'에 얼마나 심취했는지 가족들이 다 자는 밤중에 큰 거울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거울을 보며 혼자 '연기 놀이'를 하다가 그 거울이 넘어지는 바람에 자던 가족들이 크게 다칠 뻔 한 적도 있다. 중학생 시절에 미술 교사로부터 미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미술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2년때까지 미술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학창시절을 보낸다. 추리소설 매니아이기도 했다.#

성장기에 몸싸움 과정에서 두 살 연상 최진실보다 힘이 세지는 시점이 왔고 그때 여자와 남자 사이에는 완력에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체감하게 된 최진영은 남성우월의식 없이 정옥숙, 최진실, 최준희 등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길을 가게 된다. 그래서 최진실의 엄청난 성공 이후에도 남매간에 큰 불화 없이 조화롭게 지낸다. 정옥숙이 포장마차를 운영할 때 최진실은 포장마차 하는 어머니를 부끄러워해 피했지만 최진영은 포장마차를 밀어주며 어머니 일을 적극적으로 도왔었다. 최진영은 그런 최진실을 질책하고 최진실은 그런 최진영을 고마워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 말은 잘 안들어도 최진영의 조언은 늘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최진영은 최준희에 대해서도 '최준희의 수호천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최진실은 최진영과 연기합을 맞추며 연기력을 연마하다가 1986년 'KBS 탤런트 공채 시험'에 함께 합격한다. 하지만 정옥숙은 최진실의 연예계 진출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방송사 연수비도 마련하지 못해 배우 꿈은 좌절되고 미대 진학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형편 때문에 좌초되면서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1987년 서울 시내 유명 호텔에 취직하게 된다.# 하지만 배우 꿈을 접을 수 없어 1988년 호텔을 그만두게 되고 두 달 동안의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이 때 고등학교 3학년 최진영은 모델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은 셈. 최진영은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광고 모델로 활동함. 얼마 후 정옥숙은 항복하게 되고 최진영도 최진실을 돕기로 한다. 최진영은 최진실의 프로필 사진도 직접 찍어주고 그 사진들을 들고 모델 에이전시들을 직접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다가 최진영의 모델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게 되고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를 하게 된다. 초기에는 최진영이 최진실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한다. 1988년 4월에 모델 박영선이 주인공인 광고에서 뒷배경 역할을 맡게 된 최진실은 추운 날씨에 수영장에 뛰어드는 연속 촬영으로 호된 신고식을 치르게 되고 함께 동행한 최진영은 덜덜 떠는 최진실에게 수건을 덮어주며 이렇게 힘든데도 계속 할거냐고 물었다는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최진영은 급한 마음에 컨셉 가리지 않고 일을 하려는 초짜 모델 최진실에게 처음부터 길을 잘 들어야 한다고 조언하며 최진실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배우로 성장하도록 이끈다.#

이후 배우 김희애가 주인공인 화장품 광고 '센시티브'에 여러 조연 중 한 명으로 출연한다. 이게 A안이다. 근데 광고 감독 박경삼은 콘티에 변주를 줘서 김희애와 최진실 투톱인 B안을 만들어 본다.

사내에서 B안에 대한 선호도가 좋아 B안이 낙점되고 전파를 탄다. 신예 모델을 찾던 삼성전자 후배에게 박경삼은 지체없이 최진실을 추천하였고 최진실은 곧 삼성전자와 전속 계약을 맺는다.

초창기 광고 모델 시절에는 성우 권희덕이 목소리를 맡았는데, 권희덕이 목소리를 담당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 대사는 널리 알려져 유행했다. 이 대사가 담긴 광고는 최진실이라는 사람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광고계에서의 활약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1995년 제1회 '한국 모델 페스티벌'에서 CF 부문 대상을 수상한다.#

치솟는 인기 속에 활동 영역을 넓혀 1989년 2월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에 단역으로 사도세자가 평양에서 데려왔다가 죽임을 당하는 기생인 '장미' 역[7]을 맡아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다. 1989년 4월 MBC 베스트셀러극장 <시진읍>은 드라마 첫 주연작. 이후 영화 남부군 촬영과 함께 MBC에서 주조연•조연급으로 계속 얼굴을 비친다.

1990년 청소년특집드라마《두 권의 일기》[]에서 자신의 발랄한 개성을 드러내며 주목받았고, 영화 남부군•나의 사랑 나의 신부로 영화계의 신예 스타로도 떠오른다. 이어서 같은 해 말부터 91년까지 MBC 인기 청춘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에서 비련의 여주인공 승미[] 역을 맡아 공감과 인기를 얻으며 청소년•신세대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1991년 11월 MBC 다큐멘터리 <인간시대>에 연예인으로서는 국민배우 안성기에 이어 두 번째로 출연했다. 43%의 시청률이 나오면서 대박이 나고 최진실은 <인간시대> '최진실의 진실'을 통해 대중들에게 세대 불문 전국민적 호감을 얻는다.

1992년 1월 MBC 드라마 <약속>에 출연하여 최고시청률 41.5%를 이끌며 MBC를 드라마 왕국으로 만드는 서막을 올리게 되고 1992년 6월 MBC 드라마 <질투>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면서 배우로서 강인한 인상을 남기고 최고의 인기스타로 대한민국을 흔들어 버린다. <질투>의 최고시청률은 56.1%였다. 이때부터 대한민국 드라마 흐름이 바뀌어 트렌디 드라마가 대거 제작된다. 1992년 3월에는 MBC Radio <0시의 데이트> DJ가 되기도 한다. 1993년 MBC 드라마 <폭풍의 계절>에서 배우 김희애와 멋진 자매애를 펼치며 성숙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1994년에 배우 최재성과 연인 연기를 할 뻔 했으나 배우 이병헌이 상대 배우로 선택되며 SBS 드라마 <사랑의 향기>에 출연한다. SBS 주말극장 사랑의 향기가 방영 당시 전체 시청률 순위에서 SBS 프로그램 중 최고등수를 차지(4위 기록)하는 준수한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최진실은 SBS에서도 성과를 내 SBS 연기대상에서 2년 연속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MBC 특채 출신이라 문화방송에서만 활동하다가 거액의 계약금을 받으며 SBS로 자리를 옮긴 거였는데, 최진실을 놓칠 수 없었던 MBC는 SBS와 협의 끝에 최진실을 전속 배우로 다시 데려오게 된다. 1995년 후반기에는 전문적으로 연기를 연구하기 위해 중앙대학교 예술전문대학원 공연예술학부 영화학과 지도자 코스에 진학한다.

1996년 SBS <째즈>(1995년), <아스팔트 사나이>(1995년)가 동남아시아에서 방영되고 좋은 반응이 나온다. <아스팔트 사나이>는 미국 로케이션 작품. 1998년 10월 일본 대중 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고 최진실도 일본어 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일본 진출을 준비한다. 대외적 활약이 이어진 결과 2010년 8월 중국 '한류 드라마 속 미녀 여자 주인공 TOP 10' 조사에서 1위에 오르는 등 아시아권에서의 파워를 보여준다.#

1997년 MBC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 <그대 그리고 나>에 출연한다. 데뷔 10년차가 된 1997년, 나이로도 30대에 접어들면서 '최진실의 시대는 갔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SBS와의 계약 위반을 감수하면서 출연한 트렌디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에서도 여전히 발랄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의상디자이너 이연이 역을 잘 소화해내 친정 MBC로 화려하게 복귀했고 뒤이어 출연한 주말연속극 <그대 그리고 나>에서도 커리어우먼 윤수경 역으로 출연해 시청률 62.4%라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특히, 최진실은 트렌디드라마의 발랄한 이미지와 주말연속극의 중후한 이미지를 동시에 1997년 한해에 보여줌으로써 연말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는다. 즉 중후한 이미지를 성공시켜 인기 연착륙에도 성공해 30대의 포문을 화려하게 열었다. 2005년 KBS 드라마 <장밋빛 인생>에서 적나라한 서민 연기를 실감나게 해서 대중을 감동시킨다. 그 결과 한국갤럽이 조사한 '2005년을 빛낸 탤런트'에서 1위를 하고 연말 KBS 연기대상에서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받는다. MBC 전속 배우였는데 KBS 드라마에 출연한거다. 그 해 MBC 드라마 출연 계획이 없어 경영진과의 딜 끝에 KBS에 한 해 잠깐 출연한 건데 거기서도 잘해내고야 만다. 그래서 KBS 사장 정연주도 최진실에게 고마워한다.# 다시 MBC로 돌아와 2007년 <나쁜 여자 착한 여자>에 출연하고 시청률로 MBC에 보답한다. MBC 사장 최문순도 그런 최진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2008년 MBC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출연하여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킨다.

이렇게 방송계도 주름잡았지만 영화계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강력한 파워를 드러낸다. 1990년 '남부군'을 시작으로 '나의 사랑 나의 신부'로 대박을 터뜨리며 영화 배우로 자리잡는다. 1990년 '꼭지딴', 1991년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1992년 '숲속의 방', 1994년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9년 '마요네즈' 등으로 캐릭터 다변화를 이룬다. '남부군'(1990년)은 금기시되었던 빨치산을 소재로 한 최초의 대한민국 영화로, 청룡영화상에서 최진실은 이 작품으로 '신인여우상'을 받는다.#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1991년)은 입양 문제를 다룬 스웨덴 로케이션 작품으로, 청룡영화상에서 최진실은 이 작품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년)은 한국 페미니즘 영화사에 새 장을 연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에서 최진실은 이 작품으로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를 받는다.# '마누라 죽이기'(1995년)로 대종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편지'(1997년)는 1997-98년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한 작품으로 청룡영화상에서 '한국영화최다관객상'을 받는다. 전혜성 각본 '마요네즈'(1999년)는 2000년 케랄라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작품이다.# 이를 통해 1990년대 한국 영화계 부흥을 견인하고 1990년대 청룡영화상 최다 '인기 스타상' 수상자로서 이름을 떨친다. 2000년대에 유일하게 출연한 영화이자 그녀의 마지막 영화인 단적비연수(2000년)는 서울관객 61만, 전국관객 177만[]을 기록하는 등 당해 한국영화 흥행순위 4위를 기록했다.

 

<질투>는 한국 최초의 트렌디 드라마이자 중국으로 수출된 첫 한국 드라마, <째즈>는 한국 최초의 동성애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는 최초의 한류드라마라고 할 만큼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 드라마다. 이렇듯 최진실은 1990년대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상징적 인물이고 한류 배우 1세대였으며 한국 영화사에서도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밝고 경쾌한 연기부터 인간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연기까지 모두 잘 소화해내는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였다.

예능계에서도 타고난 감각을 보여 예능 프로그램이 새로 편성되면 첫회에 출연하는 단골 연예인이었고, 무명생활을 오래 하다 서세원쇼를 통해 조금씩 인지도를 쌓아가던 패널 전문 개그맨 유재석을 MC로 추천해 성공시킨 것도 최진실이었다.[] 이러한 발군의 능력과 인기로 인하여 2008년에 진행자로 나선 OBS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의 출연료가 예능계 최고 스타인 유재석의 출연료보다 더 높아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위상 그리고 인기

최진실은 1988년 삼성전자 CF모델과 MBC 특채 배우로 연예계에 데뷔한 이래 브라운관, 스크린, 광고판을 넘나들며 약 20년간 최정상의 범국민적 인기를 누린 국민 배우이다. 특히 1990년대, 20세기 후반의 오랫동안 지속적이면서 높았던 인기는 어떤 배우, 연예인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강력했다.[]


1990년대에 텔레비전 배우로는 김희애, 채시라와 함께, 영화 배우로는 강수연, 심혜진과 함께 각기 '트로이카'라고 언론에서 불렸다. 최진실이 두 분야의 공통 분모인 것이 1990년대 최진실의 독특한 포지션을 말해준다. 일찌감치 신비주의 벗어던진 예능계 블루칩이었고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에 세 번 속은 연예인으로 2006년 12월 시점 최진실이 유일했다

 

MBC 라디오 방송국 개국 시기인 1960년대에 데뷔한 배우들[14], MBC 텔레비전 방송국 개국 시기인 1970년대에 데뷔한 배우들[], 흑백TV에서 컬러TV로 전환되는 시기인 1980년대에 데뷔한 배우들[], 동년배 배우들이지만 1980년대 중반에 데뷔해 이미 왕성하게 활동한 배우들[], 비슷한 시기에 영화계에 데뷔한 CF스타 심혜진 등과 공생한 1990년대 전반기에 최진실은 깜찍한 용모, 여유로운 표정, 유머감각, 진정성 있는 말투, 녹록치 않았던 성장기를 공개하는 담대함, 준수한 연기력 등이 어울어져 남다른 아우라가 생겼고 그것이 최고의 인기스타로 자리매김하는 원동력이 된다.


배우 안성기는 1989년 영화 <남부군> 제작사 사무실에서 최진실을 처음 만나게 되는데 '최진실은 그늘지지 않고 상큼하고 발랄한,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캐릭터였다. 암울한 시대를 거치다보니 그 당시 배우들은 어두운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몸에 배어 있었는데, 최진실의 경우 빨치산을 돕는 간호사 역할을 맡았는데도 밝은 분위기가 났다. 우리와는 다르구나, 세대도 다르고 느낌도 새로운 새 시대의 배우가 나왔구나'라고 했단다.# 1988 서울 올림픽을 거치면서 한국 경제가 도약을 하자 컬러TV가 널리 보급이 되고 대중문화도 활기를 띄는데 이 때 최진실이라는 캐릭터가 절묘했던 것. 실제로 삼성전자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컬러TV 인지도를 크게 올리고 최진실을 통해서는 가전제품 판매 1위를 달성한다.


동시대 톱스타들의[] 건재는 물론 후배들[] 특히, 신은경[]•김지호•장동건•이병헌•배용준•김민종•김희선 등 X세대 스타들과 영화계에서 정선경•진희경 등 색다른 개성의 배우들이 등장한 1990년대 중반에도 최진실은 자기만의 고유한 영역을 구축하며 승승장구했고 김희선•심은하 등이 최고 주가를 달린 1990년대 후반에도 최진실은 탁월한 작품 선택이라는 변곡점을 통해 상승 곡선을 이어가며 여전히 높은 인기를 보여주게 된다. 그래서 10년 넘게 부동의 톱스타 자리를 유지했다.


결혼이 필수이던 시대에 연예인의 연애와 결혼은 연예 기자들의 주 관심사였는데 최진실의 연애와 결혼도 늘 기자들의 초미의 관심사라 1990년대를 거치면서 전반기에는 변진섭, 후반기에는 이병헌, 재벌 2세 등이 기사에 오르내렸다. 얼마나 관심이 과했는지 광고계에 종사하는 친척 오빠를 연인으로 오해해 기자들이 난리를 치기도 한다. 연예계 입문 13년차인 2000년에도 최진실의 연애나 결혼이 최고 연예가 뉴스라며 최고의 화제로 떠올랐을 정도다.


연예계 데뷔 초기부터 언론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고 그로 인해 부작용도 많이 겪지만 진솔한 모습으로 그 상황을 처리해 나갔다. 2005년 이후에도 베테랑 배우로서 대중에게 계속 존재감을 어필했다. 2007년에는 배우로서, 아들과 딸을 둔 어머니로서 '지금이 딱 좋다'고 말할 정도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행보를 이어가자 2008년에는 귀여운 외모에 가려졌던 카리스마와 통찰력이 존재에서 뿜어져 나오게 되었다. 토크쇼 진행자는 최진실에게 사물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을 가졌다고 말하고 최진실은 '메사끼'를 말하냐고 응답했다. 최문순도 '행동하는 지성' 최진실에 주목을 했다.


1990년대에는 각종 인기조사에서 계속 높은 순위에 들었다. 귀여운 외모에 털털하고 친근한 딸, 누나, 언니, 동생 이미지로 최진실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면서 호랑이 등에 탄 형국으로 연예인 생활을 시작했다. 유머감각이 뛰어나 1990년대 내내 예능 단골 손님이었고 프로그램 기획 능력도 탁월해 예능 PD들은 첫회에 최진실을 출연시켜 고칠 건 고치고 보강할 건 보강하곤 했다. 각종 언론과 기관에서 주관한 호감도 여론조사에서 1위를 석권했다. 그렇게 호감도가 높으니 2,30대 남성이 뽑은 1등 신부감, 가장 보고 싶은(적합한) CF 모델, 가장 예쁜 얼굴 등 다양한 조사에서 대다수 1위를 차지했다. 여러 조사 중 근검절약형 연예인에선 항상 1위를 차지하며 '저축왕 이미지'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한국이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소비의 중요성이 공유되자 최진실도 전향적 태도를 취했다.


1990년에 부활한 스포츠조선의 청룡영화상에서 1990년 이래 1996년과 1999년을 제외하고 8번이나 독자•관객들이 뽑는 인기스타상을 수상하며 1990년대에 영화배우로서 큰 인기를 얻었다.


최진실은 자신이 연예인으로서 그렇게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는 아니라는 말을 틈나는 대로 대중을 향해 직접 하면서 엄청난 인기가 주는 높은 긴장도를 낮추는 행동을 한다. 1995년 SBS 모래시계에서 기자 역을 맡은 이승연의 외모와 스타일이 맘에 들어 먼저 친구 제의를 할 정도로 연예계 내에서도 소탈한 모습을 취했다.


1990년 출연한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한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시초이고 ​만화적 구성을 사용하여 새로운 영화문법을 제시했다.# 1990년에는 영화 <꼭지딴>에도 출연하는데 특별히 무술 훈련도 따로 받아 준수한 액션 연기를 보여줬고 한국 영화 여전사 계보에서 시조새쯤 랭킹된다.#

1990년 MBC <두 권의 일기>, 1991년 영화 <있잖아요 비밀이예요 2>에서 고등학생 연기를 했다. 결과론적으로 이미 하이틴 스타로 유명했던 동년배 배우 하희라, 채시라, 김혜수 등과 이미지상 밸런스를 맞추게 된다.


최진실은 배우가 방송사 분장실을 사용하던 관행을 깨고 개인 메이크업아티스트 시대를 열었다. 그 만큼 연예인의 자율성이 신장된거다. 그때 함께 했던 메이크업아티스트가 김선진이다.#


1993년까지 MBC에서 활동하던 최진실은 톱스타답게 1994년 2월 SBS로 스카우트될 때 최고 대우인 '회당 300만 원에 드라마 출연 100회' 전속 계약을 맺었다. 즉 드라마 100회 출연을 하면 매회 300만 원씩을 받아 총 수입이 3억 원이 된다는 거다. MBC에서 활동할 때에는 방송사 자체 출연등급표에 따라 출연료를 받았다.[] 이에 비해 신생 방송사 SBS는 거물 연예인들을 확보하기 위해 거액의 출연료를 제시하기로 방송계에서 유명했는데[], 최진실도 방송사 이동으로 한순간에 역대 최고의 출연료를 받게 되었다. 이후 SBS에서 2년간 드라마 사랑의 향기•아스팔트 사나이•째즈 등에 출연하면서 SBS 인지도 상승에 기여한다. 하지만 100회를 다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1995년 MBC에서 드라마 출연 제의가 들어오고 최진실은 MBC 주말연속극 아파트에 출연을 하게 된다. <아파트> 출연은 MBC 특채 배우로서 최진실 스스로 MBC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MBC가 SBS 전속 배우 최진실을 다시 출연시켰다는 점, SBS와 전속 계약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SBS가 기꺼이 타방송사 출연 그것도 방송사들의 간판 드라마인 주말극에 출연하는 것을 허용해준 점에서 최진실의 위상을 또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최진실이 <아파트>에 출연 중인 상황에서 1996년 3월 SBS는 최진실과 전속 계약을 다시 맺었다. 이후 SBS는 여러 번 최진실에게 드라마 출연을 제안하게 되는데 최진실은 영화배우•CF모델이기도 했기에 영화 촬영 등을 이유로 모두 고사하게 되면서 출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년이 지난 무렵인 1997년 MBC에서 드라마 출연 제의가 들어오고 최진실은 MBC 미니시리즈 별은 내 가슴에 출연을 결정하게 된다. <별은 내 가슴에> 출연에 대해서 SBS는 1995년때와는 달리 계약대로 최진실에게 위약금을 요구했고 MBC는 그 위약금을 대신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최진실은 SBS 전속 배우에서 MBC 전속 배우가 된다. 즉 방송사 간에 최진실 쟁탈전이 그만큼 치열했다는 의미다.


1994년말에 MBC <신(新)인간시대>에서 신년 특집으로 '앞서가는 한국인 50인'이라는 제목으로 분야 별 스타를 조사했는데 최진실은 여자 연기자 부문 1위에 선정되었다. 1994년 11월 29일 서울시는 1394년 서울을 수도로 정한 지 60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 타임캡슐을 파묻는 행사를 하고 '역사적으로 남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최진실의 인터뷰도 거기에 담겼다. 이 타임캡슐은 400년 후인 2394년에 개봉된다.#


1990년대 후반기에는 기존의 상큼하고 친근한 젊은이 이미지에 기혼자 혹은 직장인을 안정감있게 잘 표현해 10대 이상 대중에게 골고루 호감도가 급상승하는 등 계속해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중장년층, 노년층까지 아우르는 인기라 파워가 굉장했다.


최진실은 특히 1997년에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모두 최대 흥행작들을 양산했다. 일단 3월에 MBC 트렌디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에 의상디자이너 '이연이'로 출연해 연예계 입문 10년차에도 여전히 발랄한 이미지를 선보이며 신세대들의 사랑을 받았다. 7개월 후인 10월에는 MBC 주말연속극 그대 그리고 나에서 성숙한 커리어우먼과 똑똑한 기혼자 역할을 맡아 58회 동안 극의 중심을 안정적으로 이끌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대 그리고 나> 출연은 최진실의 주말드라마 징크스도 완전히 깨버리는 동시에 선배 배우들로부터도 높이 평가받는 계기가 된다. 즉 명실상부 연예계 내외부에서 무게감 있는 배우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대 그리고 나>는 평균 시청률 42.5%를 기록하게 되면서 최진실 최대 흥행 드라마로 남았다. <별은 내 가슴에>도 평균 시청률 40.2%였다. 스크린에서도 11월에 개봉한 영화 편지에 국문학과 대학원생 '정인'으로 출연해 서울에서만 72만 명의 관객을을 모으며[] 그해 한국영화 중 흥행 1위를 기록했고, 이는 최진실 역대 필모그래피 중 최고 흥행 영화였다. <편지>는 러시아 유학파 배우 박신양과 호흡을 맞췄고 좋은 하모니를 보여주었다. 1997년 야망을 이룬 유명인 조사에서 정치인 1위 김영삼, 경제인 1위 정주영, 스포츠인 1위 박찬호와 함께 연예인 1위는 최진실이 선정되었다.# 1997년 삼성경제연구소가 ‘한국 영화스타의 스타파워 분석’ 보고서를 냈고 최진실은 최민수와 함께 관객동원력이 가장 뛰어난 배우로 꼽혔다.#


1990년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 흡연 연기를 하면서 담배맛을 처음 알게 되고 이 때는 구토를 할 정도로 힘든 촬영이었지만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 흡연가가 된다. 7년 후인 1997년 <별은 내 가슴에>에서도 1인 2역 중 사진작가 '소피아'를 연기할 때 흡연 연기를 보여주게 되는데 그러면서 여성 흡연 금기 사회에서 '흡연' 이미지를 과감하게 입는다. 1998년 자서전에도 자신이 흡연가라는 걸 밝혀 둔다.

1992년 '저축의 날'에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대통령 노태우는 저축유공자 최진실을 청와대 오찬에 초대했다. 1992년 KBO 한국시리즈에서 시구를 했고 한국시리즈 연예인 시구는 최진실이 최초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긴급명령으로 19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되었다. 최진실은 금융실명제 홍보 모델로 발탁되어 투명한 금융 흐름이 가능해졌음을 전 국민에게 알렸다. 금융실명제 정착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1994년 김영삼은 최진실을 청와대 오찬에 초대했다.


1995년 영화 배우로만 활동하던 정선경에게 텔레비전 배우로도 활동해야 배우 생명이 오래 간다고 조언하며 방송계로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해서 대중은 안방극장에서도 정선경을 볼 수 있게 된다.


인기 스펙트럼이 넓어 거의 모든 연령대의 유권자들한테 호감형이었기 때문에 서민 이미지가 아쉬웠던 여당 신한국당에서 1996년 최진실을 자당 광고 모델로 발탁했다. 대한민국 최초로 연예인으로서 정당의 광고 모델이 된 것이다. 이로써 정치가 최진실을 타고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 생활 정치가 도래하게 되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라는 직업 군인 출신 대통령 시절에는 권위주의가 팽배했는데 문민정부를 표방하며 들어선 '김영삼 정부'는 그 시절과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고 최진실이라는 캐릭터가 그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는 묘수였던 셈이다.


1998년 최진실은 MBC <추억>에 출연하면서 이혼 금기 사회에서 '이혼' 이미지를 과감하게 입는다. 같은 해 일본에서 가장 선호하는 한국 배우로 뽑히는데 일본어를 공부하며 일본 진출을 모색했다.


1998년에는 건국 50주년을 맞이해 MBC가 한국갤럽에 의뢰한 '건국 50년 최고 연예인' 조사[]에서 그대 그리고 나 등으로 정상의 인기를 여전히 누린 덕분에 탤런트•영화배우 부문에서 전 연령층을 합쳐 전체 1위를 차지했다. 연령별로는 신세대층(11~24세)에서 3위(40명), 청장년층(25~39세)에서 2위(44명), 중년층(40~59세)에서 5위(26명)를 기록하며 전 연령층에서 고른 인기를 얻어 기존과 당대의 최고 인기 배우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본 조사가 '건국 50년 최고 연예인' 조사이기 때문에 연예계 전 부문을 합쳐 지난 50년간의 연예인들을 대상으로도 국민들의 의견을 구했는데, 최진실은 신세대층에서 공동 11위(13명), 청장년층에서 4위(26명), 중장년층에서 6위(19명)를 기록하며 역시 비교적 모든 연령층에서 고른 인기를 얻어 전체 연예인 중 5위를 차지했다.[] 이를 통해 1990년대 전 기간 동안 최진실이 연예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였고 그 영향력과 파급력을 짐작할 수 있다.


1999년 출연 영화 <마요네즈>는 케랄라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해 예술영화와의 접속에도 성공했다. 최진실은 실험영화에 대한 열망이 컸고 그래서 신인 감독과 작업을 하고 싶어 했다.#


2000년엔 영화 단적비연수로 서울 관객 61만 여명이 들어 어느 정도의 흥행을 기록했으나 제작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결과였다. 그러나 최진실은 개인적으로 5살 연하의 야구선수 조성민과의 연애와 결혼 발표로 국내에 연상연하 커플 신드롬을 일으켰다. 즉 공중전에서 구시대 유물 가부장제를 거하게 허물어뜨린 사건이라 한국 사회가 좀 더 유연해진다. 또 김대중 정부의 전국적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 직후 이뤄지고 500,000명의 네티즌이 동시 접속한 결혼식 인터넷 생중계는 대중의 인터넷 개인방송 맛보기의 장이 되어 인터넷이 한국인의 생활에 더 깊숙이 들어온다. 세계 최초의 SNS인 싸이월드에 2004년 ​가입한다.


2000년 하반기에 2000년대까지 공신력 있는 조사기관이었던 <리스피아르>에서 진행한 연예인 인기도 조사에서 여자탤런트 부문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런 까닭에 MBC와 전속계약을 다시 맺었다.


2000년 MBC의 친한 PD가 새 프로그램 MC로 고민하자 KBS의 무명 개그맨[] '메뚜기' 유재석을 '메뚜기라는 개그맨이 있는데, 너무 재밌다며 새로 하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한번 MC로 기용 해보라'며 강력 추천을 하여 유재석이 MBC로 넘어와 MC로서 첫 출세작인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에 출연하게 됐다.


최진실은 2001년 임신 중에 4월에는 남양유업과 광고 계약을 맺을 뻔 했고 출산이 임박한 7월에는 삼성전자 가전제품 광고를 찍었다. 남양유업 광고료가 고가로 잘못 알려져서 소비자의 분노를 샀고 급기야 인터넷에 '안티 남양', '안티 최진실' 카페가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된 최진실은 남양유업 광고 제의를 거절했다. 2002년 1월 KBS <서세원쇼>에 최진영과 출연해 즐거움을 선사했고 이 회차 시청률이 28%로 대폭 상승해 주간 시청률 5위를 기록하는 등 여전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홍진경, 정선희 등도 코너를 장식해 내용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또, 2001년까지 각종 인기조사에서 주요 순위에 들었고 2002년 10월에 조사한 '사귀고 싶은 연상녀' 조사에서 전성기를 다시 누리던 이미연과 이미숙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2002년 4월 MBC <그대를 알고부터>에서 중국 교포 무역회사 직원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며 류시원과 호흡을 맞춘다. 김혜자와의 합도 관전포인트였다. 연변 언어를 소화하기 위해 정선희의 도움을 받았다. 딸을 임신한 상태에서 연기를 했고 여름을 거치면서 탈진했다는 기사가 나와 대중의 염려를 받는다. <그대를 알고부터> 평균시청률은 16.5%였다. 2002년에는 광고 촬영을 같이 하면서 알게 된 남궁민을 안타깝게 여겨 매니지먼트사를 연결해 주게 되고 그게 발판이 돼 남궁민은 시트콤 '대박가족'에 출연하게 되고 비로소 무명 배우에서 탈출하게 된다.


2004년 <장미의 전쟁>에서 의사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며 최수종과 호흡을 맞춘다. 이 작품은 '비혼'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장미의 전쟁> 평균시청률은 12.5%였다. <장미의 전쟁>의 경우 KBS2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채시라 주연의 <애정의 조건>을 방영했다. 주말 저녁 8시대 다수 시청자들은 산부인과 의사 최진실과 전업주부 채시라 중에 전업주부 채시라를 선택해서 <애정의 조건>은 최고 시청률 45.4%를 기록했다. <애정의 조건> 작가 문영남은 다음 해 2005년에는 최진실을 통해 시청률 재미를 또 톡톡히 보게 된다.


최진실은 세대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채시라•하희라•김혜수 등 다른 30대 배우들을 응원하는 입장을 취했다. 2005년 KBS 첫 출연작 장밋빛 인생에서 적나라한 서민 연기로 다양한 연령층에 화제를 불러모았고 그해 말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올해를 빛낸 탤런트'에서 전 성별, 연령층에서 1위를 차지했다#. 최진실의 네임밸류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최진실을 영입하기 위해 많은 매니지먼트사들이 10억 원대의 계약금을 제시하며 딜을 해왔다.# 새로 계약을 맺은 매니지먼트사가 최진실과의 계약 성사 직후 코스닥 등록업체 <라이브코드>의 인수 대상이 되면서 최진실의 네임밸류가 또 다시 높이 평가받았다#. 에어컨 전문브랜드 <캐리어코리아>와 전속 광고모델 계약을 체결했다.# <캐리어코리아>는 최진실을 20대와 중장년층에까지 폭넓은 호감을 받고 있는 배우로 평가했다.


2007년 MBC <나쁜 여자 착한 여자>에서 보육원 원장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며 이재룡과 호흡을 맞춘다. KBS에서 금의환향한 후 첫 출연한 작품으로 최고시청률 24.6%로 선방을 했다. <나쁜 여자 착한 여자>는 최진실의 첫 일일연속극 출연이었고 선후배들과의 협업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2007년 MBC 예능국에서 삼고초려해 출연한 <무릎팍도사>에서 김희선이 더 활발하게 연기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응원한다.


2008년엔 MBC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의 주연을 맡아 적나라한 서민 연기, 최진실표 코믹 연기, 세련된 이미지를 동시에 선보여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켰다. 최진실은 '와이어 액션' 연기도 보여준다. 일종의 주부 트렌디 드라마[30]류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흥행에 성공을 했다. 이후 2008년 말엔 시즌2 제작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OBS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도 흥행에 성공하여 시즌2 제작이 예정되었다.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는 광고 시장 불황 속에서도 방송 6회만에 광고가 완판되는 성과를 올렸다

 

최진실 사단

최진실은 톱스타였지만 대단히 소탈한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다양한 분야의 연예계 사람들과 친분을 나눴다. 코미디언 이영자, 모델 이소라, 모델 홍진경, 가수 겸 배우 엄정화, 코미디언 정선희, 배우 겸 라디오 DJ 최화정, 배우 신애, 배우 김희선, 메이크업 아티스트 조성아 등과 특별히 가깝게 지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영자와 조성아는 최진실 사후 최진실 재단을 추진한다.

 

사망

2008년 9월 안재환의 사망과 관련된 거짓 소문을 겪었다.[33] 허위사실 유포와 사적으로 친했던 정선희에 대한 미안함에 심적으로 큰 고통을 토로하다가 2008년 10월 2일에 자살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최진실의 죽음은 여파가 컸던지라 그녀의 죽음을 따라해서 똑같이 자살한 베르테르 효과가 일어나기도 했다.

 

불의에 분노

배병수 사망 관련, 조성민 관련, 안재환 사망 관련 명예 훼손 피해를 심각하게 겪었다. 이런 인격살인 행각에 대해 토크쇼에서 깊은 분노를 표현했다. 연예인에 대해 함부로 대하는 세태에 대해 큰 우려를 했다. 비슷한 일을 겪은 나훈아의 기자회견을 언급하며 연예계 대선배 나훈아를 다시 못볼까봐 두렵다고 했다.

최진실은 연예계 생활 중에 크게 살인교사범, 유책배우자, 악덕사채업자로 부당하게 몰렸다. 그 외에도 여러 모함과 모욕을 겪었다고 인터뷰한 게 적지 않다. 1991년 <인간시대 - 최진실의 진실>에서 연예인을 향한 인격권 침해에 이모 정현숙한테 분노를 표현하는 게 나온다. 일찍부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다. 최진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연예인으로서 겪는 이런 고통에 대해 언급했다. 김재우에게도 가짜뉴스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분하다고 했다. 2007년 <무릎팍도사>에서도 이로 인한 깊은 고독감 혹은 고립감을 강호동에게 표현하는 게 나온다. 2008년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 진행도 이런 잘못된 문화를 타개하는데 도움이 될까싶어 연기 못지않게 심혈을 기울여 임하게 된다.

2008년 9월 최진실을 악덕사채업자로 몰았던 백승연이 선처를 바라며 최진실에게 수시로 전화를 해대자 최진실은 '악마의 전화'라고 분노했고 백승연이 자신의 연락처를 알아낸 경위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졌다. 이런 상황에서 2008년 10월호 월간 잡지에 조성민이 최진실을 유책배우자로 모함하는 인터뷰가 실리자 다시 시작된 조성민의 범죄 행각에 대해 분노하고 문자메시지로 경고했다.[34] 최진실은 백승연의 범죄 행각에 이은 조성민의 범죄 행각에 대해 김재우에게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했다.

KBS 드라마 PD 김종창과 그 처는 범죄자 조성민의 대표적 수족 노릇 장본인.# 2005년의 최진실 출연 드라마 성공 후 2006년 2월 김종창 본인이 직접 말한 게 있음. 김종창의 처가 더 악질적이었다고 함. 하지만 배우로서의 최진실한테 아쉬운 게 있어 캐스팅은 했다는 의미. MBC 전속 배우였던 최진실을 KBS로 끌고 올 만큼 아쉬웠다는 의미. 최진실은 이런 모욕을 겪으면서도 대인의 면모를 대중에게 보여주며 웃어넘김. 방송계뿐만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최진실 죽이기'가 노골적으로 이뤄져 최진실은 '카메오'로라도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을 정도. 2000년대는 한국 영화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라 중견 배우에 대한 수요가 컸기 때문에 1990년대 영화계 대표 배우 최진실 입에서 '카메오' 운운할 상황이 아니었음. 서로 모셔가려고 해도 모자란 상황. 더구나 2002년 12월 18일부터 2004년 8월 31일까지 최진실은 대중에게 자신이 위법한 행위를 한 바가 전혀 없음을, 자신을 유책배우자로 몬 자는 모두 여론조작범임을 입증해 보임.[] 대중은 최진실이 범죄 피해자일 뿐임을 다 확인함. 그래서 2005년 12월에 방송사 네티즌상까지 거머쥠. 여론조사에서 2005년을 빛낸 텔레비전 배우로도 선정됨.[] 그 모든 연예계 내외부 방해 공작을 타고넘어 2006년 4월 자신의 역대 최고 개런티로 영화 출연 계약을 맺게 됨.# 이런 승승장구에 동료 배우 최수종이 누구보다 기뻐함.# 최수종은 최진실을 죽이려던 공작이 극에 달했던 2004년 '장미의 전쟁'에 최진실을 추천해 그 해 같이 출연하기도 함. 최진실을 죽이려던 행태는 집단광기에 가까웠고 상식적인 대중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만해야 했음. 그 마음은 이듬해 2005년 엄청난 시청률, 네티즌상, 그해를 빛낸 텔레비전 배우 선정으로 표현됨. 그리고 최진실은 그 집단광기에 대해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킨다고 우려함.# 집단광기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최진실은 2002년 12월 18일부터 2004년 8월 31일까지 '혼인유지'가 공식 입장이었는데 이혼한다고 했다며 비난하고 혼인유지한다고 했다며 비난함.[] 서병기가 유독 범죄자 조성민의 공범 역할 열심히 수행함. 그 전부터 '최진실 죽이기'에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일 정도로 악질적임. 최진실한테 뒤집어씌우기 신공이 아주 기가 막힘. 이에 반해 성범죄자 ​이경영은 영화계에서 쉬지않고 캐스팅해줘서 대중은 어이없어함.

최진실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언론에 의해 유책배우자로 몰리는 부당한 일을 겪으면서 수면제와 항우울제를 복용하게 된다고 한다. 최진실이 얼마나 극심한 심적 고통을 겪었는지는 그의 일기장 일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엄마… 미안해! 약[]에 취해, 약 먹은 사실을 까먹고, 또 입에다가 한웅큼 물구. 눈은 반쯤 감겨서. 나 죽으면 그냥 흰 천에 둘둘 말아 갠지스강에 띄워 달라구

“환희야. 수민[]아. 나의 아들. 나의 딸아. 엄마 어떻게 하면 좋아? 너희를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구나. 엄마는 지금 너무 막막하고 무섭고 너희를 지푸라기라고 생각하고 간신히 너희를 잡고 버티고 있단다. 너희만 아니라면 삶의 끈을 놔버리고 싶을 정도다. 하루를 살더라도 너희와 활짝 웃으며 푸른 들판을 달리고 싶고, 한창 예쁜 너희 재롱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눈에 담아 기억의 창고에 넣어두고 싶은데 사는 것 자체가 너무도 힘들어 너희 모습도 놓치고 있구나, 떠날까? 우리 떠나자. 미지의 세계에 대해 불안감, 엄마의 소심한 성격 탓으로 지옥 같은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너무도 한심하다. 온 집안을 어두컴컴하게 해두고 불안한 마음으로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해가 지면 어두운 세상을 바라보며 울부짖는다. 환희야 수민아 미안하다. 여러 가지로 엄마가 부족한 게 많아 너희에게 항상 죄짓는 기분이다

그녀는 평소에 지인에게 “죽고 싶다”, “내가 죽으면 납골당이 아니라 산에 뿌려달라”,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는 말을 자주 했던 것으로 밝혀졌고, 그녀의 우울증 증세를 악화시키는 것에는 가정폭력 피해자에 대한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한 몫한 것으로 보인다. 

2004년 MBC의 한 국장은 “최진실은 끝났다. 귀엽고 발랄함으로 떠오르던 최진실이 이제는 가정 폭력과 이혼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어디에다 쓰겠는가”라고 말했고
드라마 장밋빛 인생을 연출한 김종창PD는 “처음 드라마를 시작할 때 제작진의 99%가 최진실의 캐스팅을 반대했다. 오죽하면 아내가 '최진실을 캐스팅하려면 짐싸서 나가라'고 협박할 정도로 최진실을 섭외한다는 것은 도박이었다”고 밝혔다.#

또, 최진실은 뉴스엔과의 인터뷰에서 “영화계가 나를 버렸다”고 말했다고 한다.#
1990년대 TV 드라마가 주력 매체였던 시대에도 이름값으로 티켓파워를 자랑하며 많은 영화 히트작을 내놓았지만 2000년 개봉한 ‘단적비연수’ 이후에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장밋빛 인생> 차기작으로 여자판 <살인의 추억>인 스릴러 영화 <실종>을 선택해 사이코패스 ‘혜정’을 연기할 예정이었으나 무산되었다.#

최진실의 자살 소식은 해외에도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미국,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인도 등은 최진실의 사망을 비중있게 다뤘다. 뉴욕 타임즈, AP통신, UPI, BBC, LA타임스, 가디언 등 미국의 유력 언론들도 최진실의 사망 소식을 앞다퉈 보도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도 최진실의 사망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악플, 루머를 주요 사망 원인으로 보도하던 한국 언론과는 달리 당시 한국의 보수적인 사회 문화를 꼬집기도 하였다.[40]

2008년 10월 7일(한국시각), 타임은 《South Koreans Are Shaken by a Cerebrity Suicide(스타의 자살에 한국인들이 흔들리고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최진실이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 사회의 문제점과 최진실의 자살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후폭풍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진실은 '한국의 줄리아 로버츠', '한국의 안젤리나 졸리'라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국민적인 배우이다. 한국은 정서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인 사회이고 정보기술적으로는 능숙한 사회이다. 최진실은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한국 여성이 맞닥뜨릴 수 있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대표적으로 보여주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강한 여성을 좋아하지 않고 싱글맘은 인격 장애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최진실은 2004년 이혼을 했고 싱글맘이었는데, 한국에서 금기시되는 이혼모에 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했으며 싱글맘이 환영받지 못하는 한국 사회를 바꿔보기 위해 노력했다. 최진실은 자살한 동료 배우와 관련된 악성 루머 때문에 힘들어 했고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지만, 한국 사회에서 사회생활하는 여성의 경우, ‘싱글이고 이혼모’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 '괄시받는 계층(pariah status)'으로 여겨져 사회활동에 불이익을 받는데, 최진실은 이러한 것들로도 고초를 겪어왔다. 최진실의 죽음이 모든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지만,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이혼모로 살아간 최진실의 고통을 언급하는 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루머와 악플 문제도 상당히 심각했었다. 사망 며칠 전, “나는 외톨이…, 왕따…, 도무지 숨쉴 수가 없다”, “사채니 뭐니 나와는 상관이 없는데 세상 사람들이 왜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꿋꿋하게 극복하겠다”라는 메모를 남겼고, 사망 직전 잡지사 퀸의 김재우 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들을 남겼다.

“오늘은 '최진실 안티 사이트'에 들어가 봤어. 이들은 왜 나를 싫어하는 걸까, 알아보기 위해서였어.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싶어. 최진실이라는 사람이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웃집 사람 같은 편안함 때문이었는데, 어느 순간 톱스타라는 칭호가 따르게 되고, 자신들과 다른 이질감을 느껴서가 아닌가 싶어. 그 어떤 배신감 같은 거라고 나 스스로 정의를 내려봤어. 인기를 얻고 돈을 벌고 그들과 다른 삶을 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내 성격이나 취향이 달라진 게 아닌데…. 난 명품도 안 좋아하고, 아직도 수제비와 분식이 좋은데, 왜 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날 평가하고 그렇게 믿는 걸까? '안티팬들과의 만남', 뭐 이런 거라도 해서 해명을 해야 하나? 그러면 세상은 또 뭐라 할까…? 나 언제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거니? 그냥 은퇴를 하는 게 옳을까? 은퇴를 한다고 해서 나에게 주던 시선을 거두기나 할까?”

연예인 증명사진 맛집으로 유명한 여의도 쌍마스튜디오 사진관 사장은 “최진실씨가 사망 한 달 전, 그동안 찍은 사진을 전부 앨범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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