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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김대건 안드레아)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3. 9. 18.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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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은 조선 최초의 가톨릭 사제(신부)로,[]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성 피에르 모방 신부의 천거로 마카오에서 유학하며 신학을 공부해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하였으나, 단 1년밖에 사목생활을 하지 못하고 붙잡혀 군난을 받고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1846년, 병오박해). 1984년 한국의 동료 순교자 102명과 함께 시성됐다.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의 외조부이며 안경공 김영정의 증손인 해녕 부원군 김희철의 동생 김희현의 9대손이다. 집안 대대로 가톨릭 집안인데 그의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신앙을 이어왔고 증조할아버지(김진후), 큰할아버지(김택현), 아버지(김제준)가 순교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김진후도 마찬가지로 세례명을 받았는데 '비오'. 아버지 김제준은 이냐시오이다. 충청도 솔뫼[](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태어났으나 출생 몇 년 만에 가족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지금의 미리내 성지 인근 은이공소)으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1836년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온 선교사인 피에르 모방 신부가 은이공소에 왔을 때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모방 신부는 선교지의 주민들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교육하고 성직서품을 주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전통에 따라 신학생 셋을 선발했다. 당시 선발 기준은 1. 세속화되지 않은 16세 미만, 2. 부모가 가톨릭 신자인터라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배운 사람일 것, 3. 당사자가 성직자가 되려는 뜻이 있어야 함이었다. 선발된 사람은 조선 가톨릭교회의 사정을 이해하는 정하상 바오로의 도움을 받았다. 최양업 토마스, 김대건 안드레아, 최방제 프란치스코 신학생은 부친과 함께 모방 신부가 숙식하던 정하상 바오로 댁에 도착했으며, 이 중 김대건은 두 신학생보다 6개월 늦게 한문과 라틴어를 배웠다.

1834년에 입국하여 조선 가톨릭교회에서 교우들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헌신적으로 활동한 중국인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와 함께 중국과 조선의 국경을 출발했다. 중국인 안내원들이 옆에서 돌보았고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했는데 마카오는 명나라 시대부터 포르투갈의 영구 임대 영지였기 때문이다. 중국 마카오까지 가서 비밀리에 사제 수업을 받았는데[], 마카오에서 아편 문제로 인해 대내 정세가 혼란해지자 필리핀으로 피신해 사제 수업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프랑스어, 라틴어, 신학, 서양 철학 등을 가르쳤으며 신학생들은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에는 산책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그러나 세 사람 중 최방제 신학생은 성실히 공부하다 1837년 11월에 16세의 어린 나이에 위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1839년에는 기해박해로 자신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 은사 피에르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 등이 순교하는 슬픔을 겪었다. 당시 순교한 이들 중에는 신학교 동기생이자 김대건에 이어 2번째 조선인 사제가 되는 최양업의 부모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도 있었다.

그럼에도 신학 공부에 매진하여 마침내 1845년 중국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최초의 조선인 천주교 사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김대건은 순교한 앵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제3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된 페레올 주교와 함께 상하이에서 라파엘 호를 타고 충청남도 강경을 거쳐[] 입국했으며 입국 후에는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미사와 고해성사 집전 등을 수행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게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할 것을 지시했다.[]

김대건 신부는 중국 어선들이 조기잡이를 위해 조선 해안에 온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1846년 6월 5일 선교사 입국로 개척을 위한 조선 지도[]와 편지들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보내려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만 발각되었는데 해주목에 위치한 황해감영의 조사로 천주교 신부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된다.

체포된 김대건 신부의 죄목은 '혹세무민'과 '청나라 밀입국' 혐의를 씌웠고 최종적으로는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투옥된 김대건은 관원으로부터 "당신이 천주교인이요?"라는 질문을 받았고[] 이에 당당히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답했는데 그 대가로 가혹한 취조와 고문을 겪어야 했다.

한편 같은 해에 프랑스 해군의 장 바티스트 세실 제독은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형된 사건에 항의하는 서신을 전달했는데, 조선 정부는 김대건 신부를 통하여 프랑스와의 외교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 신부는 영어[], 스페인어, 라틴어, 중국어, 프랑스어의 5개 국어를 구사[]가 가능한 엘리트였고 당시 조선 8도를 통틀어 이런 인재는 전례가 없는 수준이었기에[] 국가적으로도 굉장히 쓸모있는 인재였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조정 관리들 앞에서 즉석에서 깃털펜을 만들어 가늘고 꼬부랑대는 서양 글자 필기체를 능숙하게 써 보이자[] 조정 관리들이 놀라서 마술보듯 신기하게 보았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조선 관리들 대부분은 철펜이나 깃털펜의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서양인들은 붓으로 그 가늘고 꼬부랑거리는 서양 글자를 쓰는 능력자들의 집합체인 줄 알았다고 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훌륭한 서예 능력은 곧 인신 수양의 결과이자 선비로서의 자질이며 업무에 필요한 핵심 능력이었으니 그 가늘고 조그만 서양 글자를 붓으로 쓴다고 생각했다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 조정의 몇몇 대신들도 그의 능력이 너무나도 아깝다고 여겨 "천주교만 버리면 살려줄 뿐 아니라 벼슬도 내리고 후한 보상을 하겠다"면서 설득해 보았지만 김대건은 강력히 거부했다. 다만 배교는 거부해도 조정에서 프랑스와의 협상을 요청해 오면 그 일은 협조할 생각이었는데, 천주교 사제 신분으로 조선 정부를 대신하여 프랑스와 협상을 좋게 이끌어 내는데 성공만 한다면, 천주교 공인까지는 몰라도 천주교의 이미지가 올라갈 건 확실하니 김대건 신부로서도 해볼만한 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자신들의 입장이 담긴 문서만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떠나면서 이런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조선 조정은 어쩔 수 없었는지 그에게 배교를 다시 권했으나, 김대건은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결국 사형 판결이 내려졌고,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 강화도 조약 체결 전까지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 형장에서 다른 신자들처럼 참수를 당하며 순교하였는데, 이 때 편안한 자세로 형을 받아들였다. 최초의 조선인 천주교 사제로서 그가 소명을 수행할 수 있었던 시간은 불과 13개월이었다.

본래 사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4일 뒤에 연고자가 시신을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는 참수된 자리에 시신을 파묻고 경비를 두어 지키게 했다. 당시 17세의 소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 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 순교 40일이 지난 후에 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며 험한 산길로만 밤에만 걸어서 닷새 만에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 도착하여 무사히 안장시킬 수 있었는데[] 이 곳이 바로 오늘날 미리내 성지이다. 1857년 교황 비오 9세가 가경자로 선포한 것을 시작으로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 때문에 그의 이름 전체를 다시 세례명으로 쓸 수 있는데 이 경우 본명인 '대건'과 세례명인 '안드레아'를 모두 합쳐 세례명으로 쓰기 때문에 홍길동이란 사람이 이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으면 교적에 홍길동 대건 안드레아라는 식으로 올라가게 된다. 이것은 본명을 갖고 있는 한국 출신 성인의 경우에는 모두 마찬가지다.

참수된 후 신자들이 수습한 김대건 신부의 두개골은 납으로 방부 처리한 후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의 의뢰로 한국의 법의학자들이 이 두개골의 측정치를 이용하여 김대건의 생전 모습을 3번에 걸쳐 복원하였는데 최종적으로 복원된 김대건의 얼굴은 흔히 알려진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갸름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미리내 성지에 안장되어 있으며 경당 바로 밑에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아래 턱뼈는 미리내 성지 내의 조그만 성당인 성 요셉 성당 제단 아래에 모셔져 있으며 치아는 절두산 성지 순교기념관에 분리안치, 기타 여러 뼛조각들도 성유물로 전 세계에 산재되어 있는데, 가톨릭대 성신교정 대성당 및 이천시 어농성지 성당에도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2021년에는 탄생 200주년을 맞아 일부 유해를 부르키나파소에 안치한다

김대건 유골판매 논란

2022년 3월 26일, 김대건 신부의 척추뼈가 담긴 함을 1천만 원에 판매한다는 글이 번개장터에 올라와 교계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낚시글 수준도 아닌 게, 상품 사진을 본 가톨릭계에서도 '유해함 형태를 갖춘 것은 확실'하다고 할 정도였다.#

2022년 6월 8일,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김대건 신부의 유해 관리 부실 논란과 관련해 공식 사과했다. 이어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교회 기관 외에도 사제와 수녀, 신자 등 개인에게 나눠져 유해 분배와 관리에 논란이 있다는 연합뉴스 보도와 관련해 "무분별하게 분배된 것이 아니라 교회 책임자들이 관례와 전통에 맞게 분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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