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시민운동가, 정치인.
마산공업고등학교 화공과를 졸업했으며, 1966년 서울대학교 법학과 입학 후 학생운동에 투신하면서 1995년에야 졸업했다. 재야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에 오랜 기간 헌신했으며 진보좌파 정당을 결성하면서 정계에 입문, 정치인과 시민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선출직 공직선거 운은 매우 좋지 않은 편으로, 제14대부터 제17대까지 국회의원 선거에 연이어 도전했으나 모두 낙선했고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보수정당 후보로 진영을 옮기면서까지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 시민 운동의 대부이면서도 끝까지 제도권 정치에 진출하지 못하여 이러한 행보로 영원한 재야(在野)라는 별명을 얻었다.
장기표 뜨거운 청춘, 그리고 민주화 운동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참여하며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장기표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 이후 노동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후 유신 체제 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며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민주화 이후에도 다양한 정당과 시민단체를 거치며 사회 변혁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장기표 다양한 활동과 논란
장기표는 정치인으로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특권 폐지 운동, 녹색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사회의 변화를 이끌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끊임없는 변신과 다양한 정당을 거치는 행보는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과거 행적과는 다른 발언이나 행동으로 인해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장기표 정치 활동
민중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부르짖던 장기표, 이재오, 이우재는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던 김문수와 손잡고 1990년 대중적인 진보정당을 기치로 민중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1991년 지방선거 결과 강원도의원 1명만 당선시키는 데 그쳤고,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아예 1명의 당선자도 못 내며 처참하게 실패하였다. 장기표도 서울특별시 동작구 갑에 출마해서 21%를 득표했지만 3위로 1번째 낙선한다. 민중당은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면서 자동해산되었다.
1993년 집권한 김영삼이 여당(민주자유당) 물갈이를 염두에 두고 이우재, 김문수, 이재오 등 민중당 출신 인사들을 영입하였으나, 장기표는 통합민주당에 합류하여 1996년 15대 총선에서 다시 동작구 갑에 출마했지만 2번째 낙선한 후 탈당한다.
이후 재야운동, 제도권 정치와 거리를 두고 "신문명정책연구원"을 만들어서 저술과 강연활동에 몰두한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홍사덕과 함께 인터넷 정당을 선언했지만 홍사덕이 한나라당 선대위원장으로 가면서 무산되었고, 느닷없이 김윤환, 이기택, 조순, 이수성 등 신한국당 공천탈락자들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한다. 민국당 전국구 3번으로 출마했지만, 3번째 낙선하였고, 총선 이후 민국당이 새천년민주당/자민련과 3당연대를 형성해서 공동내각을 꾸리자 반DJ를 주장하면서 탈당한다.
2002년에는 8월 재보선을 앞두고 정권말기 현상으로 집권세력인 새천년민주당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민주당의 대선후보였건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도 10%대로 급락하자 민주당의 대선후보 교체론이 대두될 때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해서 서울 영등포구 을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2위로 4번째 낙선 했다. 이때 노무현 후보가 그의 입당을 반대했는데, 만약 그가 입당해서 영등포을구에서 당선되면 대선 후보자리를 뺏길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많았다. 그러나 선거 패배 직후 곧바로 탈당한다.
2004년에는 17대 총선을 앞두고는 한국노총과 한국사회민주당의 대표를 맡았다가 녹색정치를 주장하던 녹색평화당과 합당해서 녹색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대표를 맡았다. 녹색사회민주당 후보로 다시 동작구 갑에 출마했으나 득표율 4.8%, 5위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5번째 낙선하였다. 녹색사민당은 비례득표율 미달로 자동해산되었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다시 정치권에 등장한다. 이번에는 보수이론가로 유명한 박세일 교수와 손잡고 개혁적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함께하는 국민생각 창당을 준비했지만, 국민생각을 탈당한 장기표는 녹색통일당이라는 독자 정당을 창당하고 이후 이 당이 확대 개편된 정통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지만 역시나 6번째 낙선하였다. 정통민주당은 민주당계 지지층의 표를 분산시켜서 새누리당에게 총선 승리를 안겨주는 역할만을 하고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한 채 자동 해산되었으며, 야권단일 후보였던 홍희덕, 천호선까지 낙선시켜서 한화갑. 한광옥 등 정통민주당원들과 함께 민주통합당 지지자, 당원들뿐만 아니라 통합진보당의 구 민주노동당계, 참여계 지지자들로부터 욕을 먹었다. 특히 18대 국회에서 3년 연속 국정감사 우수 의원으로 뽑히기도 했던 홍희덕 의원의 낙선은 19대 국회에서 노동, 인권 관련 입법활동을 멈추게 하여 더 부정적인 평가를 얻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선언을 했으나 결국 출마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국민의소리 시민단체를 만들어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광화문집회를 주도했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박근혜에겐 최순실이 1명, 문재인에겐 최순실이 10명"이라고 하기도 했다
장기표 특권 폐지 운동
2023년 7월 언론 인터뷰에서 독자 창당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 이후 국민의힘을 탈당했고, '국회의원 특권 폐지'를 기치로 하는 특권폐지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특권폐지당의 정식 창당을 위한 세력 결집이 지지부진해지는 가운데, 창당발기인들과 함께 김준수 대표의 가락당에 집단 입당했다. 가락당의 당명을 '가락특권폐지당'으로 바꾸고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본인은 출마하지 않고 지역구에 1명, 비례대표로 2명의 후보를 냈으나 전원 낙선하며 원내 진출에 실패하였다.
총선 후 가락특권폐지당은 다시 가락당으로 되돌아갔으며, 탈당은 하지 않았다. 별도로 남아있던 특권폐지당 창당준비위원회는 활동 기한 만료로 2024년 6월 5일 자동 해산되었다. 창당에는 실패했지만 언론 인터뷰와 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국회의원 특권 폐지'를 주창하였다.
장기표 투명 및 사망
2024년 7월 17일 페이스북 계정 게시글을 통해 담낭암 말기 판정을 받아 곧 입원한다고 밝혔다. # 8월 7일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이 이후 보도되었다. # 이것이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되었다.
2024년 9월 22일 새벽 1시 35분경 경기도 고양시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8세.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마련되었다
장기표 평가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스타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1990년대 이후로는 계속 제도정치권 진입에 실패했다. 사실 출마한 당적만 놓고볼때 당선가능성이 높은 당이 아니라 주로 3당이나 군소정당 소속으로 나왔고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한 시기도 노무현 후보가 고전하던 시기라서 낙선을 하는 것 자체에 장기표 개인의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낙선 이후에 번번이 탈당해 버리는 것이 문제였다. 7번 출마하면서 낙선 이후 비교적 오래 탈당을 하지 않은 것이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이긴 하지만 결국 탈당하여 2023년 말에 신당(특권폐지당)창당을 준비하였다.
2019년 조국 사태 초반에 한 인터뷰 중 조국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입장을 밝힌 것이 있다. # 장기표가 후보로 출마한 21대 총선에서는 이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과 조국 지지층은 장기표에 대해 비난을 쏟아냈고, 진영을 옮겨 배신했다는 점을 들어 철새, 정치 낭인 중 1인 등으로 폄하하기도 하였다. 문재인정부와 민주당을 향한 장기표의 날카로운 비판에 공감하는 지지층도 있었기에 김해에서 41% 넘는 득표를 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결과는 뼈 아픈 낙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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