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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소속 프로 축구 클럽. 연고지는 맨체스터. 홈 구장은 에티하드 스타디움.
맨체스터의 이름을 가진 축구 팀은 그레이터맨체스터 주 안에 무수히 있지만 개중 그레이터맨체스터 주의 중심도시인 맨체스터 시를 연고로 하는 유일한 1부 리그 팀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는 그레이터 맨체스터 주의 트래포드(Trafford)가 연고지이고 볼턴 원더러스 FC, 위건 애슬레틱 FC는 그레이터 맨체스터 주의 볼턴과 위건에 속해있다. 자세한 사항은 맨체스터 항목 참조.
1880년 세인트 마크스라는 이름으로 창단하여 1887년 아드윅 AFC로 바꿨다가 1894년에 맨체스터 시티로 처음 시작하게 되었다.
구단주는 아랍 에미리트의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이다. 법적으로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아부다비 유나이티드 그룹(ADUG)이 시티 풋볼 그룹의 대주주가 되고 시티 풋볼 그룹과 그 회장인 칼둔 알 무바라크가 그를 대신하여 구단을 지배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나, 만수르가 투자청을 세운 이유는 맨시티를 인수하기 위해서이고 그 예하의 시티 풋볼 그룹은 맨시티 인수 이후 전 세계의 다른 구단들(뉴욕 시티 FC, 멜버른 시티 FC 등)과 함께 지배하기 위해서 생겨난 경영 구조일 뿐이므로 최종 결재권자는 여전히 만수르이다.
엠블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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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를 포함해서 역대 엠블럼에 공통적으로 (또는 몇 군데에서만) 들어가는 상징들은 모두 본래 맨체스터 시의 상징들에서 따온 것이다. 각각을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방패는 맨체스터라는 도시의 발생 계기가 고대 로마 시절 요새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도시가 지형적으로 방어 능력이 뛰어났던 것을 의미한다.
방패 안에서 윗부분에 있는 것은 배(船)로 맨체스터가 교역도시임을 상징하며 배 아래에 물결치는 것은 맨체스터에 있는 운하를 의미한다. 지역 라이벌 클럽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물 위에 떠다니는 배를 찾을 수 있다.
그 아래의 세 개의 직선은 맨체스터의 세 개의 강을 뜻하는 것으로 각각 어웰 (Irwell), 어크 (Irk), 메들록 (Medlock) 강이라고 한다.
그리고 장미는 맨체스터가 지금은 분리되어있지만 본래 랭커셔 주의 일부였기 때문에 랭커셔 주와 랭커스터 가문의 상징인 장미가 들어간 것이다.
검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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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City unveil a new club badge. This new design features the Latin motto “Superbia in proelio” meaning ‘Pride in battle’.
1997년 시티가 새로운 클럽 뱃지를 발표한다. 이 새로운 디자인은 '전장에서의 자긍심' (Pride in battle)이라는 뜻의 라틴어 모토 “Superbia in proelio”가 특징이다.
- 공식 웹 사이트의 클럽 히스토리
1997년부터 2016년까지 쓰인 엠블럼이다.
중앙의 독수리는 검독수리 (Golden Eagle)이며 아래에 적혀있는 문구는 Pride in Battle (전장에서의 자긍심)을 뜻하는 라틴어 표어인 Superbia in proelio이다. 엠블럼에는 필기체로 적혀있기 때문에 o가 a와 헷갈려 proelio, proelia, praelio, praelia 등(...) 논쟁이 있었지만 분명히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proelio가 맞다.
독수리 위에 있는 세 개의 별은 세리에 A의 유벤투스나 인테르처럼 리그 우승 횟수 같은 걸 상징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장식이다.
사실 이 엠블럼의 문양은 화려해보이지만 이것이 만들어진 역사는 참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엠블럼이 만들어진 해가 1997년인데 맨시티는 해당시즌인 1997-98 시즌 챔피언십 18위를 차지하며, 팀 역사상 최초로 3부 리그로 강등당하기 때문이다. 강등당하기 바로 직전인 당시 1997-98 시즌엔 2부 리그 14위를 차지하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팀 성적이 떨어지는 와중에, 구단은 뜬금없이 100년간 쓰던 역사적인 엠블럼을 버리고, 단순히 멋있어 보인다고 아무 의미없는 별 세개와 독수리로 엠블럼을 교체했다. 당시 팬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주변 여론은 이 사실을 비꼬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만수르 부임부터 엠블럼에 대한 얘기가 오가다가 교체 20년 뒤인 2016년에 전통의 엠블럼으로 회귀하게 된다.
새 엠블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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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6 시즌, 예전 엠블럼으로 회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다가 영국 특허청의 유출로 인해 이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에 따르면, 현지 팬들과 30일 동안 엠블럼의 교체 여부와 엠블럼의 문양에 대해 협의했는데 이전의 독수리 엠블럼을 유지하자고 하는 입장은 1/3 (34%) 밖에 되지 않았으며 엠블럼을 교체하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차기 엠블럼에 들어갈, 맨시티와 맨체스터를 대표할 수 있는 색상과 상징물들을 투표했는데 색상은 하늘색 (94%) 과 흰색 (68%) 이 채택되었고, 상징물은 이전의 엠블럼에도 있었던 맨체스터의 배 (85%), 세 개의 강 (67%), 그리고 예전에 있었다가 사라진 붉은 장미 (60%) 가 채택되어 새 엠블럼에 조합되었다.
그 외 기타 팬들의 피드백과 기존 엠블럼 등을 포함하여 새 엠블럼을 만들었는데, 팀 이름의 배치를 위아래로 각각 Manchester, City로 나눈 것은 독수리 엠블럼에 있던 이니셜 (M.C.F.C)보다 더욱 맨시티를 대표하는 이름을 넣기 위해, 창단연도인 1894를 넣은 것[14][15]은 맨시티의 긴 역사와 불변성을 강조하기 위해, 방패를 넣되 그 모양이 예전과는 다르게 바깥 원을 넘도록 만든 것은 방패 안의 문양을 돋보이게 하며 현대적인 감각을 더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창단과 짧은 리즈시절 전까지
1880년, 잉글랜드 맨체스터의 고튼 서부에 위치한 세인트 마크스 교회 (St. Mark's Church)의 교인들이 다분히 인도적인 목적으로 훗날 맨체스터 시티로 알려질 축구 클럽을 창단했다. 당시 많은 실업자와 범죄자들이 맨체스터 동부, 특히 고튼에 만연해있었는데 현지인들을 위한 새로운 활동을 도입함으로써 이것을 개선하고 사회적 병폐를 줄이라는 아서 코넬 (Arthur Connell) 목사의 독려에 따라 교회 관리인인 윌리엄 비스토우 (William Beastow)와 토마스 굿비히어 (Thomas Goodbehere), 그리고 아서 코넬 목사의 딸인 안나 코넬 (Anna Connell)이 세인트 마크스 웨스트 고튼 (St. Mark's West Gorton) 라는 교회 축구 팀을 창단한 것이다. 특히 안나 코넬은 19세기에 창단된 프로 축구 팀 가운데, 창단 멤버 중에 유일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게다가 안나 코넬이 창단에 큰 기여를 했는데 원래는 크리켓이나 럭비팀을 만들려고 했는데 당시 지방 음주 노숙자라든지 여러 사회문제가 된 알콜중독자를 위한 스포츠로 두 종목은 맞지 않는다며[16] 축구팀을 만들자고 건의한 게 그녀였다고 한다.(2016년 9월호 베스트 일레븐 지 출처)
1884년, 세인트 마크스는 고튼의 또 다른 축구 클럽인 고튼 애슬레틱과 합병되지만 불과 한 시즌 뒤에 세인트 마크스는 고튼 AFC로, 고튼 애슬레틱은 웨스트 고튼 애슬레틱으로 분리되었다. 1887년에 연고지를 맨체스터 시 동부에 위치한 아드윅이란 동네로 옮겨 클럽 이름을 아드윅 AFC로 바꾸고, 홈 구장도 하이드 로드로 옮기게 된다. 1889년에는 하이드 로드 근처의 탄광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23명의 광부가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고, 아드윅 AFC와 뉴턴 히스(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가 지역 주민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 자선 경기를 치르기도 하였다.
1892년 잉글랜드 축구 2부리그가 설립되었고 아드윅 AFC가 창립 멤버로 참가, 1894년에는 팀 이름을 맨체스터 시티 FC로 바꾸기도 하였으나 그 시절 리그는 매우 열악했고 지방의 중소 구단으로 자금 문제로 2부 리그로 내려갔다가 1898-99시즌에서야 드디어 1부 리그로 올라왔으나 다시 2시즌도 안 가 강등당했다. 그러다가 1시즌 만에 승격과 같이 다음 해인 1903-04시즌 볼턴 원더러스를 꺾고 FA컵 우승과 같이 리그 2위(우승은 더 웬즈데이가 2연속 우승)의 성적을 거두며 이름을 알리는가 했지만 오래가지 않아 또다시 강등과 승격을 거치며 중소 구단으로서 지내야 했다.(그 와중에 1923년 홈구장 하이드 로드가 불에 타버려서 메인 로드로 경기장을 옮기기도했다.)
1925-26시즌에는 감독 없이 FA컵 우승을 하기도 하고, 맨유 원정에서 6대1로 이기기도 했지만 강등당한다(...). 1928년에는 최고의 서포터즈를 가진 클럽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1934년 FA컵 우승, 라이벌인 맨유가 첫 리그 우승(1907-08시즌)을 거둔 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인 1936-37시즌에서야 맨시티도 첫 리그 우승의 감격을 누린다. 하지만 37-38시즌, 리그 42경기에서 80골이나 넣는 공격력을 보유하고도 77실점이나 허용하는(...)수비진 탓에 강등당했다. 결국 맨시티는 지금까지 다음 시즌에 강등된 유일한 디펜딩 챔피언이자 실점보다 높은 득점(+3)을 기록하고도 강등된 유일한 팀으로 남는다. 그래서 1951년에 전쟁포로 독일인 골키퍼 버르트 트라우트만을 전격 영입하면서 타팀의 어그로와 수비를 강화하면서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승격과 강등을 거치면서 1955년에 FA컵 결승전에서 뉴캐슬에게 패해 우승컵을 내주지만, 1년 후 다시 결승에 진출해 우승한다. 1958년 뮌헨 참사에서 맨시티의 골키퍼였으며 기자로 활동하였던 프랭크 스위프트[17]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영광의 시대와 참체기
1965년에 조 머서가 감독으로, '빅 말(Big Mal)'이라는 닉네임을 막 달았던 말콤 앨리슨이 코치로 맨체스터 시티에 부임했다.
머서와 앨리슨의 부임 이후 맨시티는 큰 변혁을 맞았다. 조 머서 감독의 지휘 아래 말콤 앨리슨은 프랜시스 리, 콜린 벨, 마이크 서머비 삼총사를 중심으로 활력 넘치는 공격진을 만들었다. 간단하지 않은 전술과 투지 넘치고 정교한 축구를 3년 연속 이어갔고 2부리그로 강등된 신세에서 다시 승격, 1967-68시즌 팀의 2번째이자 31년만의 리그 우승, 1968-69시즌 FA컵 우승, 그리고 1969-70시즌, 풋볼 리그 컵 우승과 함께 지금까지 맨시티의 유일한 유럽 클럽 대항전 우승인 UEFA 컵 위너스 컵까지, 이 모든 것은 단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1972년 구단 엠블럼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짧은 영광도 잠시, 1971년 피터 스웨일스 회장 취임 후 조 머서가 맨시티를 떠났고, 1973년 맨시티 성공의 주역이었던 앨리슨이 조 머서와의 불화로 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자 팀을 떠났다. 이후 1975-76시즌 풋볼 리그 컵우승을 하지만, 1981년 FA컵 준우승 이후로 거둔 우승은 고작해야 2부 리그 우승뿐이었다.
다만 맨시티의 20세기 후반 역사를 명맥유지도 불안했던 하위팀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맨시티는 당시에도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구장 중 하나를 가진 인기클럽으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한 1980년대에도 꾸준히 관중순위 3-4위를 찍었으며, 프리미어리그 개편 전 1부리그 통산 테이블에서도 7위를 기록한다. 우승을 밥먹듯 하던 전세계구 명문은 아니었으나 리그에서 가장 입지가 탄탄한 터줏대감 클럽 중 하나로 90년대에 방만한 운영으로 강등되기 전까지는 꾸준히 중위권 정도의 성적은 냈었던 팀이다.
프리미어 리그 이후 탁신의 인수
1992-93 시즌부터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로 새롭게 개편하면서 맨유가 프리미어 리그 최다 우승을 거두며 세계적인 강호이자 인기팀이 될 때, 맨시티는 쇠락을 거듭했다. 그 사이 팀을 방만하게 운영해 온 피터 스웨일스는 1994년에 사임했고, 팀 레전드인 프랜시스 리가 회장으로 부임했다.
그럼에도 팀의 경영은 갈수록 더 악화되어 1995-96시즌 챔피언십 리그(2부), 더 나아가 1997-98 시즌 리그 1, 즉 3부리그까지 강등되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리그 강호는 아니지만, 이것은 역대 유럽 클럽 국제 대회 우승팀 역사상 처음(UEFA 컵 위너스 컵 우승)으로 3부 리그 강등기록[18]이란 불명예였다. 그나마 1시즌만인 1998-99 시즌 도중에 데이비드 번스타인 회장과 조 로일 감독이 각각 취임하여 1999년에 다시 2부리그로 승격했고[19] 1999-2000 시즌에 2부 리그 플레이오프에서 블랙번 로버스를 꺾고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하였으나, 한 시즌만에 18위로 아쉽게 강등당했다.
그 사이 덴마크 같은 유럽축구 변방과 중국 같은 제3세계 등지에서 젊은 선수들을 영입해 전력 보강에 주력한 후, 2001-02 시즌에 새로 부임한 케빈 키건의 지휘 하에 리그 1위를 차지해 프리미어리그로 단숨에 올라왔다. 승격 첫 시즌인 2002-03 시즌에 상대팀에 따라 기복이 심하고 수비가 약해 54점 실점을 기록했으나, 9위로 마감하여 다크호스 노릇을 했다. 해당 시즌 우승팀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매치업에서 1승 1무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2003년에는 정든 메인 로드를 떠나 새 구장인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으로 둥지를 틀었다.
구장 이전 후 수비를 보강키 위해 아스날의 명수문장 데이비드 시먼을 영입하고, 풋볼 리그 디비전 1으로 막 강등당한 웨스트햄으로부터 미드필더 트레버 싱클레어를 사들여 전력 안정을 꾀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안 되어 리그 성적은 연이어 2004-05 시즌 빼고 16위, 15위, 14위를 각각 기록했고, 하위 팀으로서 강등을 겨우 모면하는 신세인 팀이었다. 2006-07 시즌에는 리그 컵에서 3부 리그 팀 체스터필드에게 털리고, 리그 내내 홈에서 10골만을 넣고, 리그 후반기 1월 이후엔 홈에서 단 한 골도 못 넣는 미친 대활약을 벌이면서 강등을 겨우 모면하고, 이 때 감독 스튜어트 피어스는 맨시티의 흑역사가 되어 쫓겨난다.[20] 컬트적인 인기를 좀 얻긴 했지만...
그러다가 2007년에는 1년 전 쿠데타로 태국에서 쫓겨난 전 타이 총리 탁신 친나왓이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구단을 매입한다. 사실 맨시티 서포터들이나 영국 반응은 무덤덤했다. 탁신은 이전에 리버풀 FC를 사려다가 실패했었고 이 와중에 자신이 리버풀 팬이란 언론 홍보를 하는 바람에 맨시티 팬들에게 '리버풀에서 거절하자 꿩 대신 닭이라고 맨시티를 샀다'며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그래도 돈 좀 들여서 과거 잉글랜드 국대를 지휘한 바 있는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과 프리미어 리그에서 통할 만한 몇몇 선수들을 영입했다.[21] 2007-08 시즌 맨시티는 초반 프리미어리그 3연승을 거두며 선두에 오르기도 했고, 맨유에 홈어웨이 모두 승리를 거두는 등[22] 좋은 성적을 내며 리그 2/3 정도 치른 시점까지 챔피언스리그를 사정권에 두었다. 첼시 원정 0:6 패배, 마지막 경기인 미들즈브러 원정에서 1:8 대패라는 옥의 티도 있었지만 리차드 던과 마이카 리차즈의 센터백 라인은 맨시티의 호성적에 큰 뒷받침이 되었다. 그리고 이적생인 엘라누와 마틴 페트로프도 적응기 없이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돌풍 팀들이 겪듯이 맨유 원정 승리 후 리그 12경기에서 3승2무7패에 그치며 리그 9위(영국 언론 포포투에서는 중위권 성적인 9위도 잘한 것이라고 평을 내렸다.)로 리그를 마쳤다. 9위로 리그를 마쳤지만 그 해 페어 플레이 팀으로 선정되며 1차 예선부터 UEFA 컵에 출전할 수 있는 진출권을 따내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탁신은 하위 팀을 중위권 성적까지 올려주고 25년 만에 UEFA 컵에 진출시킨 감독을 경질하고[23][24], 호나우지뉴를 영입하겠다고 떠들면서 정작 팀의 주전 수비수 리처드 던의 주급을 올려주지 못해 잃을 뻔하던 일 등 한심하고 답이 없는 운용을 거듭하다가 태국에 있던 그의 자금이 법으로 막혀버리자 구단을 냅다 알 파힘을 통해 만수르에게 팔아 버렸다.[25]
이 당시의 맨체스터 시티에 대해 한국에서는 쑨지하이가 활약한 것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쑨지하이는 팀이 2부 소속이었던 2001-02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 이적했고, 다음 시즌 팀이 1부로 승격한 뒤 탁신이 구단주로 취임했던 2007-08 시즌 이전까지 계속 주전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탁신이 구단주가 된 이후 선수 보강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잃어 결국 2008년 셰필드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또한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고의 악동 중 한 명인 조이 바튼이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일으키면서 한국 언론에서 종종 이름이 언급되기도 했고,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마르크 비비앙 푀의 소속팀으로 알려져 있었다.[26] 또 페테르 슈마이켈과 데이비드 시먼 등 특급 수문장들도 이곳에서 선수 말년을 보냈다.
주요선수
빌리 메레디스
에릭 브룩
피터 도허티
토미 존슨
프랭크 스위프트
로이 클라크
로이 폴
베르트 트라우트만
콜린 벨
프랜시스 리
마이크 서머비
토니 북
마이크 도일[31]
데니스 튜어트
폴 파워
폴 레이크
게오르기 킨클라제
션 고터
폴 디코프
리처드 던
쑨지하이
숀 라이트 필립스[32]
조 하트
파블로 사발레타
뱅상 콤파니
야야 투레[33]
다비드 실바
세르히오 아구에로
케빈 더 브라위너
알렉산다르 콜라로브
가엘 클리시
가레스 배리
에딘 제코
페르난지뉴
응원가
Blue moon,
You saw me standing alone
Without a dream in my heart
Without a love of my own
Blue moon,
You knew just what I was there for
You heard me saying a prayer for
Someone I really could care for
And then there suddenly appeared before me
The only one my arms will ever hold
I heard somebody whisper 'Please adore me'
And when I looked, the moon had turned to gold
Blue moon,
Now I'm no longer alone
Without a dream in my heart
Without a love of my own
블루 문,
넌 내가 혼자 서 있는 것을 봤어
내 가슴 속의 꿈 없이
내 자신에 대한 사랑 없이
블루 문,
넌 내가 무엇을 위해 여기 있는지 알았지
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들었어
그러자 갑자기 내가 평생 안을 단 한명이 내 앞에 나타났어
나는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 주세요' 라고 속삭이는 것을 들었어
그리고 내가 보았을 때, 달은 금으로 변했어
블루 문,
난 더이상 혼자가 아니야
내 가슴 속의 꿈 없이
내 자신에 대한 사랑 없이
만수르가 맨시티를 택한 이유
사실 만수르는 왜 굳이 맨시티를 구매했는가라는 의문은 맨시티가 만수르에게 인수되면서 돈방석에 앉지 못한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에버튼 FC 등의 팀의 팬들, 그리고 맨시티 팬들 사이에서도 여러 번 제기된 의문이다. 겉으로 보면 사실 당시의 맨시티나 선덜랜드나 풀럼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이고, 특히 대부분의 팬들이 빅클럽의 팬이고 중위권 이하의 팀과 리그에 관해선 관심이 없는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렇게 보이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만수르가 맨시티를 구원 선택한 이유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두터운 팬층 - 맨시티는 성적에 비해서도 팬이 특히 많은 편인 팀이었다. 3부리그에서도 평균 관중이 3만 명에 육박했다는 건 맨시티 팬들이 구호로도 쓸 만큼 자랑스러워 하는 사실이고, 탁신 인수 전에도 맨시티 홈구장의 평균 관중은 사실 우승 이후의 평균 관중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이 조건은 사실 기본조건으로 몇 년 전 만수르가 아스널 FC를 사려다 실패한 이후로 만수르와 칼둔은 빅클럽보다는 잠재력을 지닌 팬층이 두터운 클럽으로 선회하게 되었다는 기정사실 수준의 설이 있다. 당시와 현재 거론되던 클럽인 뉴캐슬, 에버턴, 토트넘 등(이 셋이 가장 가까웠던 팀이다)이 모두 만족하는 조건이다. 아스톤 빌라 FC도 팬층이 두터운 편이나 당시 이미 러너에게 인수된 이후였다.
새로 증축된 큰+확장가능한 홈 구장 - 당시 맨시티는 2002년에 맨체스터가 영연방 경기대회를 개최하며 지은 4만 5천석 규모의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가지고 있었고, 낡은 구장을 가진 에버튼, 확장이나 이전이 어려워 지금도 허덕이고 있는 토트넘에 비해 맨시티가 확실한 강점으로 쓸 수 있었던 조건이다.[37] 구단주가 올드 트래포드를 뺨치는 8만 석 이상 경기장으로 확장될 예정이란 말도 있지만, 우선은 55,097석 규모로 증축했다. 올드 트래포드,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토트넘 핫스퍼 스타디움, 런던 스타디움 다음으로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5번째 규모 경기장이다.
맨체스터의 규모, 발전 가능성 - 맨체스터는 잉글랜드 제2/3의 도시/광역권으로 버밍엄과 경쟁하는 관계이고 기반시설 또한 좋다. 또한, 경기장 근처에 개발할 만한 땅이 많은 조건이었고 맨체스터 동북쪽에 개발로 자본이 들어온다는 말 역시 많았다. 뉴캐슬과 비교하면 확실한 강점이고, 쇠퇴한 지 오래된 도시인 리버풀에 연고지를 둔 에버튼에 비해서도 강점으로 작용하며, 토트넘은 런던팀이지만 주변 환경이 좋단 평가는 못 받고, 또한 런던에 팀이 많기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존재 - 전 세계에 팬이 있는 맨유의 존재는 방해거리만이 아니라 강점으로 작용한다. 라이벌리를 이용한 기삿거리나 관심거리로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고, 맨유는 리그 내에 적이 가장 많은 팀이기도 하므로 맨시티의 지지층을 더 불러모을 수 있는 조건도 된다. 실제로 맨체스터라는 도시 이름이 맨유의 활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맨유의 성적이 떨어지자 맨시티로 갈아타겠다는 라이트 팬들의 존재가 많은 것을 보면, 라이벌리로서 맨유의 가치는 맨시티에게 큰 도움이 된다.[38]
하늘색의 사용 - 하늘색을 주색으로 사용하는 팀은 드물며,[39] 이는 쉽게 인지도를 올릴 수 있는 좋은 조건으로 작용한다. 에버튼의 파란색은 첼시 FC가, 토트넘의 흰색은 레알 마드리드 C.F.가, 뉴캐슬의 바코드흰색/검은색은 유벤투스 FC가 이미 국제적인 이미지를 구축한 뒤였다.
팀 명 '시티' - 당시에도 맨시티는 전 세계에서 이름에 시티가 붙은 축구팀 중 가장 유명하고 명성이 높은 팀[40]이었으며 당시든 지금이든 영국 내에서 관련된 내용에서 시티라 부르면 맨시티를 맨 처음 연상하게 된다. 이 시티라는 이름은 역시 브랜드를 만들기 쉬운 조건이었고, 이 조건상의 유리함은 이후 맨시티가 해외로 확장할 때 뉴욕 시티 FC, 멜버른 시티 FC의 사례에서 드러나게 된다.
전 소유자 - 전 소유자 탁신 친나왓은 위에도 서술되어 있듯 돈에 쫄려 빨리 팀을 팔아치워야 할 상황이었고, 이는 맨시티 매각가격 하락으로 나타났다. 에버튼과 뉴캐슬의 소유자인 켄라이트와 애슐리는 까다로운 사람으로 팬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며, 둘 다 만수르에게 값을 너무 높이 불렀다는 소문이 있었다. 물론 가격이 하락했다해도 탁신은 맨시티를 팔면서 2배가 넘는 이득을 보았지만...
상술된 이유로 인해 만수르는 다른 팀이 아닌 맨시티를 인수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의 관계
2014년 1월, 마이카 리차즈, 제임스 밀너, 스테반 요베티치가 한국어로 새해인사를 했다. 해당 영상 직원 중 한국 마케팅 담당자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기사 그리고 이 세 명은 14/15시즌 이후 같이 맨시티에서 떠났다.
이후 14-15, 15-16, 16-17시즌에도 선수 3명씩 나와서 꾸준히 한국어로 새해인사를 하고 있다. 심지어 16-17시즌인 2016년 11월 13일에는 수능 응원 영상(!)까지 업로드 되었다. 출연자는 니콜라스 오타멘디와 알레시 가르시아. 17-18시즌에는 르로이 사네, 가브리엘 제수스가 출연하여 한국 수험생 팬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수능 응원인데 하필 제수스가 나온건 함정.
2016년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에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친선경기를 위해서 처음 방한이 예정되었으나, 전북 현대 모터스 심판매수 사건 의 여파로 결국 취소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 바람.
많은 팬들이 위의 2016년 7월의 한국 방문을 구단 창단이래 최초의 방한이라고 지칭하고 있고 일부 언론보도에서도 첫 방한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미 1976년 6월에 방한하여 동대문운동장, 구덕운동장,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세 경기를 치르고 간 역사가 있기 때문.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1진 화랑과 두 경기, 2진 충무와 한 경기를 가졌고 2승 1패의 성적을 거두고 돌아갔다. 동대문에서 열린 충무와의 경기는 행정절차상 문제로 급하게 치러지다 보니 홍보가 미진해서 불과 4천여명의 관중들만이 입장했고, 경기를 관전한 주한 영국대사가 관중이 너무 적다며 디스하기도 했다.
2017년 추석에는 맨체스터 시티 한국 공식 홈페이지에서 맨체스터 시티에 관한 퀴즈 이벤트를 열었다. 당첨 상품은 퀴즈별로 각각 17/18시즌 홈, 어웨이, 써드 유니폼.
2017년 9월 15일 리버풀전, 맨체스터 시티에서 공식적으로 한국의 팬들을 위해 서울의 MUV홀에서 '서울: Our Kind of City' 이벤트를 열었다. 진행은 드러가쒀요! 쎄르히오 아구에로오!!! 로 유명한 김동완 해설위원이 맡았으며, 500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대형 스크린으로 리버풀전을 관람하였다. 이날 시티는 5:0으로 리버풀을 격파하면서 각종 이벤트와 더불어 한국의 시티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피파온라인4의 2주년 기념영상을 찍기도 했다.(...)
그외
만수르에게 인수되기 이전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명성에 의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영국 현지에서는 예전부터 팬층이 두터운 팀이다. 특히 1934년 스토크 시티 FC와의 FA컵 경기에서의 관중 수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홈 관중 수 최고 기록인 84,569명이었으며 3부 리그로 떨어졌을 때조차 리그 평균 관중 수가 8,000여명일 때 약 30,000명 정도 기록한 것은 맨시티 팬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점이다.
이 팀의 유명인 팬으로는 밴드 오아시스의 갤러거 형제가 가장 유명하며, 전설적인 록 밴드 더 스미스의 기타리스트 자니 마, 그 외에도 티머시 돌턴, 알란 릭맨, 마르코 피에르 화이트, 조이 디비전의 보컬인 이안 커티스[41], 더 폴의 마크 E. 스미스, 영국의 유명 복싱 선수 리키 해튼[42], 라이언에어의 사장 마이클 오리어리 등이 있다. 위의 유명 연예인들에 비해 경기장에 자주 오는 탤런트들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유명하지 않은 편.
오아시스의 맨시티 사랑은 축구계에서도 유명한 편. 노엘 갤러거는 만수르 인수 이전에는 언젠가 벌어둔 돈으로 자신이 구단주가 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고, 현재는 구단 사장이랑 같이 식사하는 사이(...)이다. 보컬이자 프런트맨인 그의 동생 리암 갤러거는 아예 라이브를 할 때 맨체스터 시티 티셔츠를 입고 한다. 참고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크기로 알려진 노엘은 방한했을때 인터뷰에서 에릭 남에게 라이벌구단인 맨유에서 뛰었던 박지성에 대한 질문을 들었었는데, 인터뷰에서 박지성의 사진이 등장하자 "저런 사람 모른다"라고 대답. 에릭 남이 웃으며 "정말 모르냐"라고 되풀이해서 물었지만, 갤러거는 "몰라 몰라"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고,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냈다.
팀에 이상할 정도로 대머리 또는 빡빡이 선수가 많다.[43] 탈모에 걸린 레전드가 많은 라이벌 팀과 달리 이쪽은 아예 빡빡이가 팀 컬러냐는 소릴 들을 정도로 빡빡이가 많은 편. 리버풀의 예전 애칭인 빡빡풀의 뒤를 잇는 수준이다. 오죽하면 머리를 밀어버린 선수를 근본컷이라고 추켜세울 정도로 빡빡이가 많은데, 감독으로 펩 과르디올라가 부임한 이후에 이런 경향이 더욱 짙어졌다. 특히 17-18시즌 풍성한 머리카락을 지닌 다비드 실바가 머리를 밀어버린 이후에는 펩이 빡빡이를 강요한게 아니냐는 루머가 돌았을 정도. 모근을 버리는 자 중용받을 것이다 큰 관계는 없겠지만, 실제로 맨시티의 장발 선수는 정말 드물다. 금발 선수도 마찬가지.[44] 19-20 시즌에는 에데르송까지 머리를 밀었다.
17/18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맨시티와 웨스트햄의 경기가 끝나고 SBS에서 하이라이트 영상을 기획하며 역대급 선곡을 했다. 맨시티가 이때 EPL에서 무패행진을 하고 있을 당시였는데 웨스트햄의 경기에서 전반 44분에 빡빡이 선수인 오그본나가 골을 넣고 경기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후반 11분만에 오타멘디가 동점골을 넣고, 후반 37분 쯤에서 빡빡이 다비드 실바가 역전골을 넣어 맨시티가 승리한다. 결과적으로 맨시티의 빡빡이 선수진들의 하드캐리로 인하여 무패행진을 계속하게 된 스토리다...
19-20시즌에도 이런 기믹은 이어졌는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카일 워커가 머리를 밀고 나오더니 맹활약을 하기 시작했고, 새로 합류한 신성 로드리를 본 교주과르디올라는 “그는 귀고리도 하지 않고 문신 하나 없다. 헤어스타일 또한 짧고 단정하다. 축구를 위한 바람직한 자세가 되어있다”라고 극찬했다.
펩 과르디올라 감독으로 들어온 이후 대부분의 영입한 선수들이 첫시즌은 부진, 그 다음 시즌은 활약하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 가브리에우 제주스와 리로이 자네, 베르나르두 실바가 영입 첫 시즌에는 경기에서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 않다가 두 번째 시즌에는 주전 자리를 확보하거나, 많은 공격포인트를 올리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인지 2018-19 시즌 부진한 모습을 보였던 리야드 마레즈가 팬들의 기대를 받고 있는 상황인데 마레즈 역시 2번째 시즌부터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다.
물론 에이메릭 라포르트처럼 첫 시즌부터 활약을 보이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뱅자맹 망디와 같이 꾸준히 부진한 경우도 존재한다.
공식적인 라이벌은 맨유 하나지만 시티즌들이 느끼는 맨시티의 최대 라이벌은 리버풀 FC이다. 두 팀은 2010년 후반대부터 리그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45]
대한민국 5부 축구리그인 K5리그 울산리그와 경기리그에 참가하는 울산 시터스 FC와 수원 시티 FC의 앰블럼이 이 팀의 것과 상당히(...) 닮았다.
2020년 UEFA 의 FFP를 위반 징계와 CAS의 징계철회
UEFA산하 구단 재정 조사 기관이 맨체스터 시티가 재정적 페어 플레이 룰[46]을 위반하여 12-16시즌 회계 장부를 조작했다고 판단하면서 맨시티에게 향후 2년간 국제대회 출전이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물론 구단 측에서는 불합리한 판단이라 하며 항소를 진행하고 있기에[47]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만약 뒤집히지 않고 결과가 확정된다면 구단 입장에선 큰 타격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챔스 진출이 2년이나 금지당할 경우 팀을 떠날 주축 선수들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되었기에, 많은 구단들이 맨시티의 항소 결과에 주목하고 있었다.
항간에서는 CAS 항소 패배시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의 자체 징계 절차에 따라 프리미어리그 승점 삭감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한국에서는 4부리그 강등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처음 제기한 영국 현지 언론부터가 '가능성이 극히 낮다' 라고 전제한 클릭 미끼에 불과하고,[48] 정론지에서 진지하게 보도된 적은 없는 이야기이다.
만약 맨체스터 시티가 최종적으로 유럽대항전 출전 금지 징계를 받았다면 재정적 위기 역시 찾아왔을 것이다. 일단 킷 스폰서인 퓨마는 연간 1000억원에 달하는 계약을 유지할것임을 밝혔지만, 챔피언스 리그 중계권 수입이 매우 크기 때문에 그것을 잃는다는건 큰 타격이었다.
2020년 7월 13일에 발표된 CAS 판결 결과, 맨시티의 혐의에 대해 증거 불충분 혹은 공소시효[49] 만료를 이유로 챔피언스리그 출전 정지 징계는 철회했고, UEFA의 조사에 협조해야한다는 FFP 56조에 대한 위반 혐의[50]는 인정되어 벌금 €10M을 내는 걸로 감경되었다.
현지 시간으로 7월 28일 CAS의 전체 판결문이 공개되었다. 이 판결문에서 UEFA는 해킹된 이메일 말고 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독일 언론이 공개한 해킹된 이메일조차 악의적인 짜깁기와 조작이 있었음이 밝혀졌다.[51] 결국 판결은 맨시티 측에서 CAS에 제출한 원본 이메일을 두고 이뤄졌다. 2012-13. 2013-14, 2015-16 세 시즌에 대한 혐의 중에서 12-13은 UEFA자체 징계 유효기간이 지나서 기각되었고, 13-14 시즌과 15-16 시즌의 경우 UEFA가 주장한 에티하드를 통한 우회 스폰서 혐의는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었다.
무혐의로 결정되면서 맨체스터 시티 팬들은 축구를 계속 볼 수 있게 되었다. 맨체스터 시티는 이것을 계기로 여름 이적시장에서 선수 보강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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