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정치인. 제90·96-98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전후 세대 출신의 첫 번째 총리이자 전후 최연소 총리[7] 그리고 메이지 유신 이래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한 수상[8] 기록을 보유한 인물. 또한, 헤이세이 시대의 마지막 총리이자 레이와 시대의 첫 총리이기도 하다.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뒤를 이어 첫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제 1차 아베 내각). 그러나 지나치게 빨랐던[9][10] 정치적 성공 탓인지 여러 문제점들을 노출하며 권위가 실추된 데다 건강상의 문제가 겹쳐, 단 1년 만에 사퇴하면서 단명 총리로 남았다.[11]
하지만 이후 자유민주당 출신의 후임 총리들도 1년 이하의 임기로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에 정권을 내주었고, 민주당 총리들 역시 단명 내각을 이끌며 3년 만에 지지율이 급전직하하였다. 결국 2012년 12월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의 승리로 정권 교체에 성공, 총리에 복귀하며 정치적 재기에 성공한다(제 2차 아베 내각). 2년 뒤인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5년 뒤인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압도적 다수 의석을 그대로 유지하였다(제 3, 4차 아베 내각).
정치 측면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임기 종료 이후 약 7년간 회전문 총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안정했던 일본 내각제를 탄탄한 지지율을 기반으로 안정시킨 인물이다.[12][13] 경제 측면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아베노믹스라는 이름의 강력한 양적 완화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의 경제를 상당 수준 활성화하는 데 성공[14]하였다.
외교 측면에서 아베는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등 서방 국가들에게, 러시아, 중국, 북한을 위시한 반서방 세력 견제의 매우 중요한 조력자[15]로 인식되고 있다. 아베노믹스나 아베독트린이 국제 사회에서 별 잡음없이 통과된 데에는 이같은 배경이 깔려있다고 보면 된다. 반면, 한국과 중국에서는 아베 신조의 그릇된 역사관을 이유로 들어 양국 관계 악화의 원인으로 지목해 비판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2013년에는 과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의 참배를 강행하기도 했다.[16] 이후에도 계속 공물 봉납을 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며 주변국의 반발을 부르고 있다.[17][18] 실제로 일본 최대 극우 단체인 일본회의의 회원이다.
또한, 국방 및 군사적 측면에서는 일본의 재 무장 및 군비 증강을 추진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신 냉전 구도의 당사자인 중국은 당연히 이를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악화시키는 행동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한국도 이를 일본 군국주의 발흥의 전조 증상이라며 비판에 가세하는 중이다. G7 서방국가들의 ‘요구’와 일본내 우익의 '요구'에 응하여[19] 진행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의 경기가 나아져 매년 늘어난 GDP와 세수액 및 예산을 비교해 본다면 비록 매년 증가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1%대 군사비를 지출하는 일본은 오히려 한국(GDP 대비 2.6%)이나 중국(GDP 대비 2.0%[20])과 비교하였을 때 양호한 수치를 유지하고 있다 볼 수 있다
집안 배경과 성장기
아베 신조는 1954년 아베 신타로와 기시 요코의 둘째 아들(사진의 왼쪽 아이)로 태어났다. 이 집안은 무척 화려한 정계 집안이다. 외할아버지는 자민당 체제를 확립한 쇼와의 요괴 기시 노부스케, 외종조부는 기시의 친동생이자 7년이 넘는 장기집권에 비핵 3원칙으로 유명한 사토 에이사쿠다. 할아버지인 아베 간도 중의원을 지냈고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외무장관을 지내다가 유력한 총리 후보로 거론됐다.
다만 친가와 외가가 보이는 행적이 반대다. 아베의 외고조부는 일본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의 밑에서 사상적 영향을 받은 오오시마 요시마사로, 이 자는 청일전쟁 이전 고종과 당시 왕세자 이척이 있던 경복궁을 불법으로 기습하여 점거한 전적이 있는 일본 육군 대장 출신이다.[22] 아베의 외조부는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기시 노부스케로 1930~1940년대 만주국에서 주요 요직을 지내며 일본 군국주의를 최전선에서 주도하던 A급 전범이며, 전후 총리대신을 역임하기도 했다.
반면에 친할아버지인 아베 간은 야마구치현의 대지주 출신으로, 오슈(奥州, 지금의 이와테현)에 근거를 둔 아베노 무네토의 후예라고 하는데,[23] 외조부와는 상반되는 반전 평화주의자였다. 일제의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1942년에 대놓고 전쟁 반대를 외치며 도조 히데키를 정면 비판했으며, 대정익찬회의 공천도 거부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될 정도로 반골정신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1946년 총선을 준비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해 전후 일본 정치 질서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아베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도 본인이 아베 간의 아들이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 했으며 '기시 노부스케의 데릴사위'라고 부르면 매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아베 신타로는 자민당 간사장을 역임하며 총리대신이 목전에 들어온 순간 췌장암으로 사망한다.
아베 신조는 친가쪽 보다는 외가쪽의 정치적 사상에 어렸을 적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외할아버지에 대한 애정 등 감정적인 요소가 아베 신조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24][25]
아베는 학생 시절부터 자신을 아베 간이 아닌 '기시 노부스케의 손주'라고 칭하고 다녔으며, 가장 존경하는 사람도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으로 꼽았다.[26] (이토 히로부미에게 '조슈 번 번영을 위한 일본 황권 내란 수모자'라고 비난주며, 조선계 러시아인 최재형과의 히로부미 암살 공모를 꾸몄다는)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 말한 내각관방장관의 언행을 두둔하기도 했다
아베 신조는 소학교에 입학하면서 계열학교까지 입시를 치르지 않고 자동으로 입학하는 체계(일관교육)를 가진 사립학교인 세이케이(成蹊) 소학교에 입학, 세이케이 중학교, 세이케이 고등학교를 거쳐서 세이케이대학[28]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에 미국에 건너가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USC) 정치학과를 다녔지만 1979년에 중퇴했다.[29] 외조부와 작은 외조부, 거기에 모자라 친조부와 부친까지 죄다 도쿄대 법대 출신이었던지라 아베 자신도 집안 안팎에서 도쿄대 진학을 압박 받았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기사 아베 신조의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 신타로가 '우리집에서 대학은 도쿄대 밖에 없다!'고 말하며 두꺼운 책으로 신조의 머리를 때리는 일도 있을 정도로 좀 심하게 강요했고, 이는 역효과가 나서 오히려 신조는 반항심에 공부를 소홀히 했다고 한다.
참고로 미국 USC 유학 경력에 대한 허위의혹이 존재한다. 1998년의 아베신조 홈페이지 경력란에는 USC 정치학과에 2년간 유학했다고 기재되어 있었으나 2016년 시점에서는 삭제된 상태였다. 2004년 '주간 포스트(週刊ポスト)'의 보도에 의하면 아베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의 정치학과에 재적한 적이 없고, 이수한 코스 절반이 외국인을 위한 영어코스였으며, 실제로는 유학기간이 1년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기사 다만 2015년에 대학 캠퍼스를 방문해서 총장과 이야기한 것이 홈페이지에 보도된 것으로 보아서 동문 취급은 잘 해주는 듯. 대학교 기사 신타로는 아들의 부족한 스펙을 커버할 목적으로 신조를 외국에 유학을 보냈는데, 신조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자주 국제전화로 고국의 지인과 이야기를 했고, 국제 전화요금이 엄청나게 나온 것이 아버지에게 들통나서 강제로 귀국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교에선 아베노 무네토(헤이안 시대 선조), 모리 모토나리처럼 양궁을 배웠다고 한다. 후지TV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양궁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정계 입문
미국 유학 뒤 고베 제강이란 회사에서 일하다가 1982년 아버지 아베 신타로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1987년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30]의 주선으로 모리나가(森永) 제과(일본 최초 제과 주식회사) 마쓰자키 아키오(松崎昭雄) 회장의 딸인 마쓰자키 아키에[31]와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자녀는 없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유력한 총리 후보였으나 암 선고를 받고 1991년 사망했다. 아베 신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1993년 아버지의 지역구인 야마구치현 제1선거구에 출마해 당선하며 국회에 입성했다.
모리 요시로 총리 시절에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추천으로 내각관방 부장관에 임명되었고 고이즈미가 총리로 취임한 뒤에도 유임했다. 참고로 내각관방은 총리 비서실 겸 내각 대변인실로 총리 집무실 바로 옆방에 사무실이 있으며, 내각총리대신을 총괄, 보좌해서 내각의 조정 업무를 담당한다. 대변인그 내각의 얼굴마담으로 언론에도 매일 나오기 때문에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알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보통 정치세력의 차세대 에이스들이 내각관방장관으로 경험을 쌓은 뒤에 총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자민당에서 북한에 대한 대북 강경파로 주목을 받았고 북한에게 무력 사용과 경제제재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해 인기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다만 2002년 10월 22일 북한에 의한 납치 사건에 관련하여 아베가 민주당의 간 나오토 간사장과 사회민주당의 도이 다카코 당수를 얼간이 의원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다카키 요시아키 의원이 아베를 비판하였다.
그 인기 덕인지 2003년 자민당의 간사장을 맡았다. 3선 밖에 안 되는 젊은 정치인인 그에게 간사장직을 맡김은 2003년 11월 중의원 선거의 승리를 위해서였는데, 실제로 11월 총선에서 자민당은 과반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재선확률이 50%에 못미쳐 3선쯤 되면 중진이 되는 한국에서야 이해가 안 될 수 있지만, 아베에게 간사장을 맡긴 것 자체가 소위 '고이즈미식'의 엄청난 파격으로 여겨졌다. 지역 기반이 확고하고 자리를 잡은(혹은 세습을 받은) 의원이 거이 자동으로 연임하는 일이 매우 흔한데다가 잦은 의회해산으로 인한 조기총선도 많은 일본에서는 3선 의원 정도는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 파벌의 입김인사가 강한 자민당 내부에서는 파벌간의 불협화음을 방지하기 위해 관례적으로 "당선 횟수 주의"가 상당히 중시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간사장은 7선 의원부터 가능한 자리이며, 3선은 정무차관 급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이즈미는 자민당의 파벌을 반쯤 해체시킨 사람이라 이런 인사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간사장으로서 아베 신조는 당내 개혁 조치를 폈지만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서 목표치 51석에 못 미치는 49석을 확보하자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그러나 후임 간사장의 요청으로 간사장의 밑인 간사장 대리를 맡는다. 어쨌든 간사장 대리로서 아베 신조는 우정개혁으로 촉발된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반고이즈미파 낙선을 위한 소위 ‘고이즈미의 자객’으로 불린 미녀 후보들을 공천하는데 역할을 했고 큰 성공을 거뒀다.
2005년 우정 해산 직후에 발표된 차기 총리 여론조사에서 아베 신조는 53%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였다. 고이즈미가 차기 총리로 낙점해 둔 부분도 있었지만, 일본 국민들로부터 이미 자생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었다는 부분이 확인된다. 여기에는 아베 신조라는 정치인이 납북자 문제와 북한에 대한 강경 스탠스를 갖고 있는 것에 대한 일본인들의 강력한 지지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제1차 내각
2006년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해 경쟁후보인 덕후 아소 다로와 다니가키 사다카즈 재무상을 물리치고 자민당 21대 총재에 당선됐다. 선거에서 이긴 다수당 대표(총재이자 간사장)가 총리를 맡는 일본의 관례에 따라 제 90대 일본 총리에 올랐다. 전후세대 이후 첫 총리, (전후) 최연소 총리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총리 취임 후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경색한 한일관계, 중일관계 회복을 위해 2006년 10월 8일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 주석과 중일정상회담을, 10월 9일에는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과 한일정상회담을 가졌다..
방한 당시 우익 색을 드러내지도 않고, 국립현충원에 일본 총리 사상 최초로 참배하며,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해결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다른 행보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자의에 상관없이 끌려간 사람들에 대한 위로가 필요하다고 하는 등 현재의 아베 모습에 비추어보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아베가 지금처럼 우익적인 성향이 강해진 건 2010년 이후로 알려져 있는데, 일각에서는 한국에 저자세로 일관하던 일본에게 이명박 정부가 천황 사죄 발언 및 A380 독도 시범비행 등 일본에 상당히 공세적인 외교 스탠스[32]가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분석을 내놓았으나, 진실은 본인만이 알 길. 이에 대해서는 한일관계 항목의 일본의 입장 항목을 참조. 하지만 저래놓고 국회에선 일본의 위안부 강제연행 사실을 부정하는 등, 이때부터 싹수가 노랗긴 했다. 해당 발언 영상.
그러나 아베 총리의 첫 재임기간은 내각의 각종 스캔들로 얼룩졌다. 사다 겐이치로 행정개혁상이 사무실 재정운영 문제가 불거져 사임했고 마쓰오카 도시카쓰 농림수산상이 각종 비리 의혹으로 자살했으며 규마 후미오 방위상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었던 일[33]이라는 일본인에게 매우 민감한 발언으로 결국 주의 처분을 받고 사임했다. 후임 방위상은 고이즈미 총리가 2006년 자객후보로 공천한 고이케 유리코가 선임되었다.
이런 악재 가운데 열린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37석에 그쳤다. 자민당이 36석을 확보하는 데 그친 1989년 참의원 선거 이후 사상 최악의 성과를 거두며 연립여당인 공명당과 더해도 과반의석을 못 얻은 역사적 참패를 겪었다. 자민당이 83석, 연립여당인 공명당이 20석으로 모으면 103석, 여당계 무소속 2석을 더해 105석인데 민주당이 단독으로 확보한 의석 109석에도 못 미쳤다. 거기에 일본 공산당과 사민당이 7석, 5석을 확보했고 국민 신당과 신당 일본이 4석, 1석을 확보하고 야당계 무소속까지 모으면 139석이어서 자민당의 입장에서는 기록적 참패였다. 아베 총리는 내각을 계속 유지할 것임을 시사했지만 새로운 아베 내각에 국민들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렇게 되자 아베 총리는 2007년 9월 10일부터 열리는 국회에서 '테러 특별조치법'(テーロ特別措置法)을 연장시키지 못하면 내각이 총사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인 9월 12일 총리 사퇴를 선언해 무책임하다는 비판만 받았다. 사임의 이유로는 아베 총리가 민주당 오자와 이치로 대표와 협상을 가지고 테러 특별조치법 연장을 위해 노력했으나 오자와 대표가 이를 거부해 사퇴를 결심했다고. 물론 건강이 안 좋아진 것도 원인이지만 자민당 안에서 아베 총리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계파간 밀실 합의로 밀려났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퇴임 뒤 수상 관저에서 나와 바로 병원으로 향했는데 이를 두고 영국 BBC는 '수상 관저에서 체크아웃해서 병원에서 체크인했다' 라고 비아냥댔다.
그러나 추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정말로 건강이 안 좋았다고 한다.[34] 그가 걸린 궤양성 대장염은 심하면 음식 먹은 지 5분 뒤에 대변으로 나올 만큼 심각한 병으로 그를 압박했으며, 아내 아베 아키에는 "총리직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다"며 울면서 그를 설득했다고 한다.
이 당시 그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골골거리는 "도련님(봇짱)"이었다.
총리직 사임뒤 재기
한동안 몸을 챙기다가 2008년부터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35]#자민당 몰락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인물임에도 반성은 전혀 없이 자민당이 캐몰락한 2009년 중의원 선거에서도 당당히 자기 지역구에 출마해 당연히 당선했다. 이후 고이즈미의 우정개혁에 반발해 탈당했던 히라누마 다케오를 자민당으로 복당시키고 총재선거에 출마하려 했지만 히라누마가 거부해, 자신의 측근인 니시무라 야스토시를 밀었지만 실패했다. 아마도 니시무라를 당선시켜서 막후에서 자민당을 이끌어보려고 했던 듯하지만 자민당 안에서는 니시무라의 총재선거 출마 선언에 웬 듣보잡이라는 반응이었다니...
보수 정치인답게 민주당 각료들은 단 1명도 참배하지 않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고,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로 불리는 시진핑이 일본을 방문할 때 천황을 예방하자 이를 격렬하게 반대하는가 하면 중국을 나치즘에 비유하는 등 반중국 활동을 벌인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식민지 지배를 사과한 간 담화에 대해서도 당시 일본 내각을 무지하고 경솔한 사람으로 비난 하는 등 일본 우익 지지기반을 차근차근 다지고 있었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 천황 사과 요구에 대해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자 예의를 잊은 행동'이라고 맹비난했다.
한편 자민당은 다니가키 사다카즈 대표의 후임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아베 전 총리를 투표없이 대표로 추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은 자신의 보수신당에 아베의 참여를 요청하고 있어서 느닷없이 다시 일본 정계의 태풍의 핵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본인은 자민당에 남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11월에 열릴 듯한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단독 과반 확보까지는 못 가더라도 제1당일 가능성이 유력한지라 차기 당대표로 거론받는 아베 입장에선 다시 총리를 할 절호의 기회이고 자신이 다루기 어려운 하시모토와의 연대보단 이쪽이 훨씬 낫기도 할 테니.
제2 3 4차 내각
2012년 12월 26일 96대 총리 취임으로, 전후 요시다 시게루 이후 처음으로 총리직을 공백기(5년 3개월)를 두고 2번 재임하는 총리가 됐다. 공백기가 길기로는 역대 4위로 1923년 9년 5개월만에 정권을 찾은 야마모토 곤노효에 이후로 89년 만에 최초다.(참고로 일본 총리직의 역사가 고작 130년이다) 이보다 조금 짧은 게 이토 히로부미의 1차, 2차 내각의 격차가 4년 3개월,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4년 1개월. 야마모토 이후로 아베 이전 공백기가 가장 길었던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4년. 참고로 역대 최장 공백은 15년 5개월의 오쿠마 시게노부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베처럼 잊혀졌다가 완벽하게 부활한 인물은 전무후무하다. 공백 뒤 2차 내각이란 기준으로 이번 중의원 임기 중 사임하지 않는다면 (같은 조슈 번 출신으로의) 이토 히로부미(4년), 가쓰라 다로(3년)을 빼면 가장 긴 임기로 잔류할 수도 있다. 물론 공백이 아닌 단순한 2차 내각의 임기는 전후에도 긴 총리가 많다
2012년 재집권
2012년 9월 26일 자민당 총재로 당선하고 11월 16일에 중의원이 해산해 2012년 12월 16일 치른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공명당이 320석[36]이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압도적인 승리로 96대 총리 및 아베 신조 내각이 재탄생했다. 총리 정식 취임일은 2012년 12월 26일로 결정했다.
선거철인 2012년 11월, 일본에서 무제한 양적완화를 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기사. 그러면서 시라카와 마사아키 일본은행 총재를 제일 먼저 짤라버리겠다는 공약은 덤. 그리고 총리에 당선되자마자 제일 먼저 시라카와 마사아키 총재한테 파면을 통보한다. 이에 대해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물러나기 전에 후임자 결정때까지는 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는 규정을 이용해 버틴다. 결국 일본은행 총재 시라카와 마사아키를 굴복시키고 무려 10조 엔에 달하는 1차적 양적완화를 폈다. 뉴스. 2013년 3월 31일까지 임기인 시라카와 총재를 곧이어 물러나게 하고 아베 신조의 측근을 심어서 양적완화를 하겠다는 뜻을 더더욱 밀어붙일 듯하다.
96대 총리로 당선하자마자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는 일본 땅'이라고 발표했다. 기사.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를 총리 임기 동안 반드시 참배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기사.
대체적인 분석이, 아베 내각의 출현은 한국 입장에선 달갑지 않다. 과거사 문제나 독도 문제야 차치하고라도 무제한 양적완화를 내세운 탓에 한국과 일본이 환율 전쟁을 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우려가 있다. 한편으로는 아베 내각이 한중과의 관계 개선을 안하면 일본 경제에 악영향이리라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동아시아 외교에서는 매우 강경한 공약을 내건 아베인지라 한중과의 관계 개선이 썩 쉽지는 않으니 문제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아베가 과연 일본을 부흥시킬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외조부 때부터 긴밀한 연을 맺던 박근혜 정부가 탄생했기 때문에 양자 사이의 친밀성으로 한일관계가 호전하라는 전망도 있다. 박근혜 당선인의 당선이 확정되자 아베는 박 당선인과 조속한 시일에 만나겠다는 의사도 보였다. 기사. 대놓고 "다케시마의 날 지정을 자기(아베) 임기 중에는 유보하겠다" 는 것으로 봐서 관계 개선의 의지가 정말 강한 듯 했다. 부인 아베 아키에의 한류 드라마 시청 재개 역시 관계 개선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걸 보여주는 듯. 중국을 자극할 우려가 큰 센카쿠 열도 공무원 상주 공약 역시 유보했다. 그야말로 집권하자마자 외교정책 관련 공약을 하나도 지킬 생각이 없음을 천명하는 똘끼를 보였다.
12월 21일에 아베는 박 당선자에게 직접 친서를 보내고 누카가 후쿠시로 전 재무상을 특사로 파견하겠다는 발표를 했지만 박 당선자측에서 주말이고 해서 일정이 안 맞으니[37] 아베가 총리에 정식 취임하는 12월 26일 이후에 일정을 조율하자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아베가 일방적으로 한일 관계 개선에 나서서 박 당선자 측이 부담을 느꼈냐는 분석이 나왔으나 박 당선자 측은 일정이 안 맞았을 뿐 정치적인 이유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12월 26일 이후에 아베의 특사가 박 당선자를 방문할 것으로 보인다. 2013년 1월 4일에 공식 방문하였다.
12월 25일 내각 주요 인사를 내정, 한국에 각종 망언을 한 바 있는 아소 다로 전 총리가 재무부총리에 내정되는 등 극우 인사들을 대거 기용해 앞으로의 한-일 관계가 미궁 속에 휩싸였다. 하지만 12월 27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가 밝혔던 무라야마 담화를 이어갈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기사. 이로써 선거할 때 내놨던 외교 공약은 전부 폐기처분 확정. 다만 고노 담화 수정 검토라든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추진하겠다고 밝혀 이것이 앞으로 한일 관계에 암초일 가능성은 있다.
그 밖에 탈원전 노선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혀 사실상 원전 재가동을 밀어붙일 개연성이 높아졌다.
일본 국민들은 '닥치고 경제나 살려' 라는 여론이 큰 편이다. 평화헌법 개정에는 약 50% 정도가 반대의사를 나타냈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도 30% 정도가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이것은 우경화 바람에 반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경제가 어려운데 쓰잘데기 없는 데에만 신경 쓴다는 쪽에 더 가깝지만, 아베 내각은 연립여당인 공명당도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이런 국민적 여론을 의식한 듯 우경화 정책을 보류하거나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여갔다.
물론 아베 내각의 행보가 우경화를 절대 포기하지는 않으리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런 분석에 힘을 싣는 상황이 나왔는데 12월 31일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는 적절한 시점에 역사 문제에 입장표명을 하리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을 언제 발표할지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대체적인 분석으로는 무라야마 담화는 그대로 두고서 새로이 아베 담화를 발표해 '침략전쟁이 피해를 준 것은 반성하겠지만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임을 드러내리라는 이야기가 있다. 발표 시점은 당장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일본 여론도 좋지도 않고 한국의 박근혜 정부, 중국의 시진핑 정권 등 새로 출발하는 정권들과 구태여 초장부터 각을 세우는 무리수를 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담화의 발표 시점은 일본 패전 70주년이 되는 2015년일 공산이 커보인다고. 2015년은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한 지 20주년인 해이고 한일 기본조약(한일협상) 체결 50주년이기도 하다.[38] 장기집권 기반을 구축해놓은 뒤에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드러내겠다는 복안으로 보여 우려를 낳는다.
제2차 아베 내각이 처음 성립되었을 때 아베 총리가 다시 일본 경제의 부흥기를 가져오겠다고 하자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아베 총리가 심도있는 경제 정책을 펴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고 실은 경제에 관심이 적은 사람이라고 비판하여 한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13년 도쿄 올림픽 유치성공
2013년 3월 구로다 하루히코를 일본은행 총재에 지명하고 4월 1일부로 앉혀서 아베노믹스 기조를 본격화했다.
2013년 7월의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참의원 선거에서 이겨보기 위해 일본 엔화를 더더욱 떨어뜨리는 엔저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른바 아베노믹스. 각종 양적완화 및 경기부양책을 시행하는 것은 물론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해서 지속적으로 미국 달러와 유로화를 사들였다. 이에 따라 엔-달러 환율은 20% 넘게 올랐고(엔화 가치 하락) 일본의 외환보유고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심지어 닛케이지수는 30% 뛰어올라 14000 포인트를 찍었다.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낙승이 예상됨에 따라 아베 신조 정권에서 우익 성향을 조금씩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2013년 2월, 일본 유신회와 다함께당 등에 제안하여 헌법 개정안 발의 요건을 중의원, 일본 참의원 2/3 서명에서 과반수 발의로 바꾸자는 개헌안을 내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기사.
심지어 안보 법제 간담회의 야나이 슌지 위원장은 집단적 자위권에 '한국과 호주도 들어간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즉, 한국과 호주에 대한 공격도 일본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서 자위대를 파병하겠다는 것. 다만 일본이 한미일 동맹체제에 들어가 있음을 감안하면 이전부터 추진중이던 것이기는 했고, 무엇보다 두 나라 모두 일본의 육상자위대라면 모를까, 해자대와 공자대는 필요한 입장이다.
미일관계 복원을 외치면서도 도쿄 전범재판을 '승자의 판단으로 단죄한 재판'이라고까지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한 마디로 저 말은 '미국이 이겼으니까 지들 마음대로 처단했지?'라는 뜻이라서 일본 안에서도 미일 관계에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2013년 3월 15일 TPP 협상에 정식으로 참가하겠다고 발표했다. 노다 요시히코 전 총리가 참가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보류한 뒤 다시 참가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2013년 4월 23일 기사. "침략의 정의는 학계에서도 전세계적으로도 확실치 않다며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는가에 따라 다르다"고 말해 논란이다. 이런 극우적 발언에 일본 안에서도 '외교 관계가 가뜩이나 나쁜데 제정신이냐'며 비판했다.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을 침략이 아닌 '진출'로 여기는 극우파의 역사인식을 대놓고 까발린 셈. 극우파 정치인들의 대규모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함께 외교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듯하고 이미 한국과 중국은 '이게 무슨 개소리야?'라며 격렬한 반응이다. 아사히 신문은 '지지율 70%에 취해서 국제관계를 까먹었냐?'며 우려했다. 중의원 선거 이전에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할 의사는 없다며 눈치를 보다가 압승이 확실하자 강공으로 나섰다는 분석도 있다.
4월 24일에는 '서울대 교수가 일제시대에 인구가 증가했다는 연구를 내놓은 바 있다'라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들어 일제 통치의 정당성을 설파하냐는 논란이 있다. # 그리고 4월 28일 미군정이 끝난 날을 기념해 주권 회복의 날(主権回復の日)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기념식을 거행하리라고 밝히는 등 우경화 폭주를 이을 기세다. [39]
끝내 미국까지 나서서 비공식적으로 일본의 우경화 폭주에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한중일 3국 재무장관 회담까지 취소된 데다가 일본 내에서 심지어는 보수적 언론인 요미우리 신문까지 신중론을 제기하자 아베도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4월 26일, "역사 인식문제가 정치외교 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통해서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 것. 그러나 이런 행보는 일단 한 발 물러서는 척해서 현재의 국면을 타개하려는 제스처일 가능성이 높고 적당히 시기를 봐서 다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일본 안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니 아베가 폭주를 이으리라 생각해도 좋을 듯.
4월 27일, 니코니코 동화[40]가 주최한 박람회인 '니코니코 초회의 2'[41]를 찾아 "반드시 강한 경제를 되찾겠다. 지금 일본 영해와 영토에 도전이 이어지지만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42] 이어 자위대와 주일미군 부스에 방문해 군복과 헬멧을 쓰고 육상자위대 최신 전차 10식 전차 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전차에 탄 총리는 아베가 전후 최초라고 한다. 당연히 군국주의 부활이라는 한국과 중국의 유감, 우려가 한층 더 커졌다.
4월 28일, 주권 회복의 날 행사를 강행했다. 심지어 천황 부처까지 동원해서. 이때 한 기념사가 가관으로 "일본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 전세계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나라가 되도록 하자". 게다가 행사 말미에는 패전 이후 공적인 장소에선 금기시하던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 천황 폐하 만세)!"도 외쳤다. 그러나 우경화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알려진 아키히토 덴노 부부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나가서 불쾌감을 표현했다.[43][44]
'침략'의 정의가 나라마다 다르다는 발언에 내각 차원에서 표현부족으로 벌어진 오해라고 국회에서 야당이 질의하면 해명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개헌을 앞두고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행보란 분석이다.
2013년 5월, 미국 의회조사국이 아베의 견해에 침략을 부정하는 수정주의자의 견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미국의 국익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아베 내각이 침략사실을 부정한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고 한다.
5월 5일에는 도쿄돔에서 프로야구 시구[45]를 하면서 등 번호를 96번을 달고 시구를 했는데 이는 일본 헌법 96조의 개헌 발의요건을 완화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이라 어그로라는 비판을 받았다. 아베 총리가 96대 총리이기 때문에 썼다는 해석도 있어 당시에는 과민 반응이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이후의 행적을 보면 개헌 의지로 보는 것이 맞다.
여기에 더해서 2013년 5월 12일, 아베 총리가 미야기현의 항공자위대 기지를 방문해서 블루 임펄스 곡예비행단을 시찰했다. 이때 그는 훈련기 조종석에 앉아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는데 이 비행기의 번호는 731이다. 관련 기사. 이게 얼마나 도발적인 행위인지는 731 부대 항목 참조. 당장 중국은 명백한 도발이라고 맹비판했고, 한국에서도 메르켈 독일 총리가 하켄크로이츠 문양이 달린 비행기를 타는 일과 같은 행위라는 맹비판이 쏟아졌다. 우연히든 의도적이든 도발적 행위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후의 폭주 행각들을 살펴보면 의도적인 도발임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2013년 5월 14일,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가 문제가 되고 있으니 새로운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서 야스쿠니 신사에 전범들을 그대로 두겠다는 것이다.
2013년 5월 19일,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야스쿠니 신사와 알링턴 국립묘지가 뭐가 다른가라는 망언을 했다. 한국과 중국에도 비판의 날을 세웠는데 몇 년 사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별다른 항의를 하지않다가 갑자기 이에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치른 5월 21일 지방선거에서 자민-공명 연합이 6개 선거구에서 3개 선거구 당선에 그쳐서 자민당 내에서 충격적인 결과라는 지적이 있다. 특히 자민당은 사이타마 시장 선거에 아소 다로 부총리와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까지 지원유세에 투입하면서 아베노믹스의 성과를 홍보했으나 자-공연합이 내세운 후보가 현직 시장에게 패배했다. 아오모리와 나고야에서도 현직 시장들에게 패배했다. 득표 결과를 보면 공명당 지지층의 80%가 자-공연합에 투표했으나 자민당 지지층의 55%만이 자-공연합에 투표했다고 드러났다는 점에서 공명당이나 자민당이나 크게 우려하는 실정. 물론 이런 결과는 자민당이 고령의 지역 본부장이나 간사장을 공천해 비교적 젊은 현직 시장들에 맞서기에는 신선미가 떨어졌다는 지적이 많으며, 아베노믹스의 성과가 지역까지 못 퍼졌다는 지적도 있다. 반면 6월 23일 도쿄도의회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이 전원 당선 기록을 세웠다.
2013년 7월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은 아베 신조의 높은 지지율를 의식해서인지 아베와 부인 아베 아키에와 친분이 있는 인사들을 대거 공천했는데 이를 두고 정실 공천이라는 논란이 있다. 공천을 받은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가관인데 에이벡스 소속 가수인 이토 요스케, 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 츠카하라 미츠오, 개훈련 전문가 다나베 히사토 등은 모두 아베의 부인 아베 아키에가 추천한 인물들로 알려졌다. 이토 요스케는 아베 아키에의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었던 모리나가 제과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고 츠카하라 미츠오는 아베 아키에와 술친구라고 하며 다나베 히사토 또한 강아지를 좋아하는 아베 아키에와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공천에 총리 부인이 개입한 모양새라 뒷말이 무성한 듯하다. 심지어 이토 요스케는 자민당 간사장인 이시바 시게루조차 "그게 누구지?"라 했다고 아베 또한 자신의 고향 친구인 기타무라 츠네오를 공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럼에도 상대당인 민주당은 인지도가 부족한 노조 출신들을 대거 공천했고 그나마도 공천을 포기하고 사퇴하는 인물들이 속출했다고 알려졌다. 개나 소나 공천해도 자민당의 승리가 유력하니, 일본 정치가 얼마나 개판으로 돌아가나 짐작할 만하다.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첫 번째 유세지역으로 후쿠시마를 선택하였다. 이 부분에서 방사능 유출 사고가 터졌을 때 자기 지역구인 이와테를 버리고 도쿄로 도주한 오자와 이치로 생활당 대표와 더욱 극명히 대비되고 있다. 기사. 이후 참의원 선거에서 65석을 확보, 민주당의 17석보다 크게 앞서나가는 결과가 나오면서 장기 집권이 유력해졌다.
9월 7일, 아베 신조를 비롯한 내각과 유치 위원회가 총출동한 결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개최된 IOC 총회에서 도쿄가 경쟁 도시인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터키의 이스탄불을 제치고 2020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개최 도시 발표 영상 일본 내부는 물론 대축제 분위기. 56년 만의 하계 올림픽 개최 결정으로 내각 지지율도 폭등하였다.
2013년 11월 15일 일본의 주간문춘에 올린 기고문에 '한국을 어리석은 나라'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와 큰 논란을 일으켰다. 아베 본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한 상태
2014년 제3차 내각 성립
특정비밀보호법으로 여론이 나빠진데 이어 2월 9일로 예정된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에 대항하여 전 총리인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출마하고 아베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호소카와를 지지함에 따라 리더십이 상당히 흔들렸다. 만일 호소카와가 당선하면 아베의 집권기반이 흔들려 조기 퇴진할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도 나왔을 정도.
민주당은 호소카와를 지원하기 위해 아예 후보를 안 내기로 했다. 게다가 고이즈미의 아들이자 정치적 후계자이기도 한 고이즈미 신지로 부흥정무관도 자민당이 지원하는 후보에 지원할 대의를 못 느끼겠다면서 반기를 들었다. 아베는 되도록 원전문제를 안 거론하면서 고이즈미-호소카와 돌풍을 잠재우려 했고 신지로를 앞세워서 고이즈미에 맞서려 했지만 신지로의 이런 반발에 결국 포기했다.[46]
그러나 마스조에가 야권의 표가 우쓰노미야 겐지와 호소카와로 19%씩 갈린 틈을 타 42.9%의 득표로 무난하게 도쿄도지사에 당선되었다. 한숨 돌린 셈.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 사고 3주년 행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규제 기준을 바탕으로(적합하다고) 인정되는 원전에 대해서는 재가동을 추진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내각의 여성 각료들의 각종 스캔들과 경제정책에 대한 불신임으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국면 돌파를 위해 기습적으로 중의원 해산을 내놓았다. 과연 2014년 12월,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전체 475석 가운데 절반을 훨씬 넘어서며 압승. 아베도 계속해서 총리직을 이어나가게 됐다. 일본 국민들이 아베와 자민당을 뽑았다기보다도, 사실상 무능의 극치인 제1야당 민주당을 뽑지 않은 것이라는 평.
투표 이전부터 뽑을 사람이 없으니 이번 투표는 제끼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이었고, 실제로 투표율은 태평양전쟁 이후 최저인 52~3%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 자민당도 민주당도 뽑고싶지 않으니 차라리 공산당을 뽑고 말겠다는 의견도 많았는데,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 가장 득을 본 것이 의석수를 2배로 늘린 공산당이었다. 8석에서 21석으로 2.5배 정도 의석을 늘렸다. 하지만 여당에 갈 표가 아닌 아닌 민주당표를 뺏어온지라. 결국 전반적인 국회의 구조 자체는 큰 차이는 없다.
대신 민주당은 정말로 죽쒔었다. 당시 민주당 대표 가이에다 반리와 전 총리인 간 나오토가 도쿄도 제1구와 도쿄도 제18구에서 떨어졌었을 정도. 간 나오토는 도쿄 권역 비례대표 끝자락으로 생환했지만 가이에다 반리 민주당 대표는 그마저도 실패해서 아예 낙선이 확정되었다. 이 둘은 2012년 제46회 총선에서도 지역구에서는 낙선했으나 석패율제로 생환한 상태였다.
2015년 아베 담화
중의원 선거로 한숨 돌린 2015년의 시작부터 아베 내각을 반기는 것은 일본의 신용등급 강등 소식들이다. 사실상 작년 11월 말에서 12월 중순에 결정 된 것이나, 보통 1분기까지도 추이를 더 지켜보면서 여유를 주는 것이 일반적이란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특히 무디스의 경우는 일본 국내외로 불만이 좀 있었다.
이미 무디스는 2014년 11월에 결정을 내려 같은 해 12월 1일부터 강등을 시행시킨 상태였고(Aa3 → A1), 또다른 주요 신평사인 피치의 결정이 주목을 받고 있던 시점에서 피치 또한 12월 15일에 일본의 신용강등을 한 차례 강등하기로 결정을 내려 2015년 1분기 동안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A+ → A) 만일 아베 내각이 불과 한달 전 중의원 선거에서 했던 공약을 깨고 2017년까지 미룬다던 소비세 인상을 즉각 몰아붙인다면 2015년 1분기가 끝나기 전에 강등을 모면할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으론 불가능하다.
2015년 6월 12일 중의원에서 일본판 국회 공성전이 일어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 일본의 파견노동법[47] 개정안 처리가 자민 + 공명 + 유신 3당 연합 강행처리를 하기로 하고 민주 + 사민 + 공산 3당은 격렬하게 반발하여 국회에서 대치하고 있는데 그 장면에 아베가 온 것. 민주당의 오카다 가쓰야 대표 등이 아베한테 파견노동법 개정안 처리 연기를 요청했지만 아베 신조 총리는 가볍게 웃으면서 데리고 온 자민당 소속 후생노동위 위원장한테 날치기 강행처리를 지시했다.
당연히 민주당 등 야당은 격렬히 반발해서 회의장 봉쇄, 의장석 점거 등을 하고 자민당은 질서유지권과 경호권 발동으로 한바탕 난투극이 벌어졌다.
2015년 6월 17일 일본 참의원에서 선거권 연령을 만 20세 이상에서 만 18세 이상으로 낮추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선거 연령 변화는 1945년 이후 70년 만의 일이며, 개정된 법은 내년에 있을 참의원 선거때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이번 개정이 아베 정권의 헌법 개정 수순 중 하나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일본 헌법 개정은 의회의 3분 2 이상 찬성에 의한 발의와 국민투표에서 과반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민투표 행사연령도 18세로 낮춰 집권 내에 개헌을 이룬다는 계산이다.
2015년 7월 6일 처음으로 아베 신조 내각에 대한 반대가 지지율을 넘어섰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기사 다만 자민당 내에서도 대체자가 없고 자민당의 지지율도 확고한 상태라서 아베 신조의 정치 기반에 크게 흔들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15년 8월 14일 전후 70주년 담화(아베 담화)를 발표했다. 이전 담화의 핵심 표현을 모두 언급했다는 점에서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수준은 아니지만, 표현을 복잡하고 어렵게 하면서 이전 담화의 핵심표현을 나열하는 수준에 그쳤고 무라야마 담화 등 역대 총리의 담화보다 역사인식 면에서 훨씬 후퇴했다는 평가. 특히 을사늑약의 체결로 이어지는 러일전쟁에 관해 "러일전쟁은 식민지 지배 아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라고한 내용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국가들에게 일본이 역사인식에서 후퇴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실제로 러일전쟁의 영향으로 한국을 비롯한 많은 유럽열강에게 위협받던 국가들이 일본의 사례로부터 용기를 받은 것은 사실일지 몰라도(대표적으로 판보이쩌우가 이끌었던 베트남의 근대화 운동이 있다.), 그 본질은 일본이 서구 열강과 다를 바 없는, 혹은 그보다 더한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데 있었다는 것은 이후 다른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도 눈치챈 사실이었으며(네루의 3.1운동에 대한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본 국내의 역사학자들조차 인정하는 사실이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은, 쑨원의 말처럼, 동양의 간성(干城)이 아니라 서양 제국주의의 패도(覇道)를 잇는 번견(番犬)의 행위를 했을 뿐이다. 그런 러일전쟁을 아베는 지극히 일시적이었던 긍정적인 측면만 부각한 것이다.
안보 문제를 이유로 집단자위권 법안 처리를 강행하려 하자 일본 내에서도 그동안 쌓인 불만이 폭발해 8월 30일 아베 신조 정권의 안보법 처리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전국적으로 300여 곳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의사당 앞에서의 시위대 규모는 10만이 넘었는데 일본에서 정치적 시위의 규모가 점점 축소되는 추세였음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이례적인 사태였다. #
2015년 9월 16일 국제 신용평가회사 S&P에서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강등하였다. 이에 한국과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은 무디스, S&P, 피치 3사 모두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높아지게 되는 역전현상이 나타났다.기사
2015년 9월 17일 오후 일본 참의원(상원) 법안심사위원회에서 자민당 - 공명당 연립정부가 안보법안을 야당의원들이 의장석을 점거한 것을 국회 공성전 난투극으로 진압하고 날치기 통과시켰다. 아베 신조 총리는 9월 17일 심야에라도 본회의를 열어서 통과시키겠다고 했고 일본 야당은 이에 본회의장 의장석을 점거하는 국회 공성전 2차전에 돌입한 상태.
기어이 2015년 9월 19일 오전 2시 20분경 일본 참의원에서 안보 관련 법안이 가결되었다. 야당은 내각 불신임안 결의 등을 통한 필리버스터를 동원하며 최대한 시간끌기를 시도했지만 연립여당의 수적우세를 극복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민주당의 에다노 유키오간사장은 내각 불신임안 결의안 때 2시간 가량 발언했다. 그는 “오늘(18일)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한 날”이라며 “아베 총리가 되돌리려고 하는 일본은 쇼와(昭和) 초기의 폭주하던 시대의 일본이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10월 5일, TPP가 타결되었다.
2015년 11월 2일, 3년 반만에 한일정상회담이 성사되었고, 12월 8일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협상으로 인해 일제의 피해자들인 7, 80대 지지층 조차 박근혜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결국 1년 뒤... 20대 총선과 여소야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결과를 낳았다.
2016년 리우 올림픽 폐막식 등장
7월 10일 실시된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또 승리하였다.
8월 22일, 2016 리우 올림픽 폐막식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닌텐도가 제작하였던 슈퍼 마리오 시리즈의 대표 캐릭터 중 하나인 마리오로 분장해서 등장했다. 차기 올림픽 개최지의 대표로서 등장한 것이다.[48] 이 퍼포먼스 직후 내각 지지율은 다시 60%를 돌파하였다
2017년 제4차 내각 성립
10월 22일,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통해 수상 4선에 성공했다. 11월 1일부로 수상 4선에 따라 4차 내각이 출범했다.
12월 26일, 아베 신조의 2, 3, 4차 연속내각이 취임 5년을 맞았고, 1차 내각을 합쳐서 6년 임기를 돌파하였다.
2018년 오사카 엑스포 유치성공
9월 20일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을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3선 연임에 성공하였다.
11월 25일, 2025 오사카 엑스포 유치에 성공했다.
2019년 역대 최장기 집권 기록 수립
4월의 통일지방선거와 7월 21일 실시된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또 승리했다. 이로써, 2012년 재집권 이래 전국 단위 선거 6연승[51]을 달성하였다.
11월 20일자로 가쓰라 다로[52] 전 총리의 기록을 경신하며, 역대 최장기 집권 일본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경제 정책 아베노믹스
무제한적 양적완화와 정부지출, 구조개혁이라는 소위 3개의 화살을 정책기조로 삼고 있다. 아베의 취임과 동시에 G7 국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실시하기 시작해서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비관론도 만만치 않게 거세다. 아베노믹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양적완화와 정부지출의 목표는 기업들의 낙수효과와 소비심리 회복이다. 구조개혁이란 '1억총활약사회'[53]라는 기치아래 여성과 노인의 노동을 장려하고, 기간산업 민영화와 고용시장의 유연화를 심화시키고, 기업규제를 개혁해서 일본을 더 활기차게 만들고, 이민 완화를 통해 90년대부터 일본의 골칫거리인 저출산 고령화를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일본 닛케이 지수는 아베가 본격적으로 아베노믹스를 밀어붙이자 하루에 3~4%가 넘는 급상승세를 펼쳐 5년 4개월만에 15,000선을 돌파했다. 2015년 이후로는 거의 18000선 부근에서 안정을 찾았고, 2016 후반기부터 2017년 중반기에는 19000대 후반에서 20000사이를 오르내리는 중으로 경기가 많이 호전되었으며 엔/달러 환율 역시 111엔대로 상당히 안정적이다.
사족으로 통화 정책은 그 연구를 가장 활발히 하던 1980년대에도 국가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정책으로서는 연구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미국에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경기 부양책으로 대대적인 세금 감면과 기술 개발의 정부 보조 등을 약속하는 와중에 이러한 조세 정책만으로는 자본이 제대로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는 비판을 받자(Timing Problem), 보다 단기적인 대책으로 통화 정책이 부상한 것이다.
또한 경제와 친서방 행보를 동시에 잡는 정책의 일환으로 당초 일본은 미국이 권유하는 TPP(다자간 FTA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참가 여부를 놓고 저울질했다. 그러나 당시 내각이 민주당인 데다가 농가의 타격을 우려한 만큼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자민당의 반대가 많아 소극적이었으나 아베는 높은 인기를 기반으로 TPP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2013년 4월 TPP 참가국들의 참가 협상 승인을 받았고 # 미국은 자국 의회에 정식으로 일본의 TPP 협상 참여를 통보하였다. # 이것으로 한국의 FTA 행보(특히 한미 FTA)에 뒤처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던 일본이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TPP가 성사되면 일본의 국내 총생산은 0.66%(3조 2,000억엔)이 증가할 것이고, TPP 참여국 가운데 미일만으로 90%의 경제 규모를 차지하는 만큼 환태평양 경제권의 리더로 재도약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 수치조차 보수적인 예측으로 피터 페트리 미국 브랜다이스대 교수는 니혼 게이자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TPPA 참여는 일본 경제 생산성을 높여줄 것"이라며 GDP를 10조엔(약 98조원) 정도 늘리는 효과가 있으리라 추산했는데 이것은 일본 정부의 예측치 3조 2천억엔의 3배를 넘는 수치다. # 또한 일본의 갈라파고스화가 된 시장과 규제를 TPP 참여로 단숨에 글로벌 규격에 맞추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노릴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TPP에서 미국을 빼낸 도널드 트럼프 당선 전까지의 장밋빛 청사진이었다. 트럼프는 다자무역협정은 물론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가 협상한 모든 대외협정에 대해 부정적인데, TPP는 여기에 모두 해당되었으니 불가피한 결과였다. 아베는 트럼프의 당선소식을 듣자마자 뉴욕 트럼프타워로 황금 골프채를 들고 달려가는 정성을 보이면서까지 TPP를 지키려 안간힘을 썼으나 트럼프의 마음을 돌리는데 실패했다. 어쨌건 일본은 중국을 견제하고 해외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추가 시장개방까지 해가면서 TPP-11로 밀어붙였지만 참여국 중 일본이 가장 큰 시장이 되어버렸다. 즉, 일본은 미국과의 FTA 효과도 못누리고 졸지에 다른 10개국으로부터는 무역적자만 볼 수도 있는 상황에 놓여버린 것. 혹여 미국이 향후 다시 TPP에 복귀한다하더라도 위와 같은 희망섞인 전망을 재현하기엔 어려워보인다.
특히 아베노믹스가 좋게 끝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존재한다. 왜냐면 이런 식의 무제한적인 양적완화는 언젠가는 장기 금리 상승으로 이어지게 되어있다. 특히 현재의 일본 경제는 구조적으로 국채 금리 상승에 취약한 상황이다. 이미 국채 자체가 GDP의 2배를 훌쩍 넘어간 지 오래이기 때문에 출구전략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이때문에 일본이 영영 마이너스 금리를 못 빠져나올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소비세를 증세하는 것도 논란이 많은데, 양적완화와 정부지출이 하는 것과 정 반대의 디플레이션, 소비침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아베 2차 내각에서도 소비세를 8%로 증세를 하면서 아베노믹스의 효과를 상쇄하는 부작용이 일어나 두 차례 추가 인상일정을 연기하고 말았다. 2013년, 2%의 성장률을 이뤄내며 기분좋은 출발을 하던 아베 노믹스는 8%로 소비세 인상을 강행하면서 상당히 동력을 잃어버린 상황이다. 2013년 당시만해도 일본이 곧 3% 성장도 가능하다는 꿈같은 관측도 나왔었지만 소비세 인상 이후 성장률이 다시 하회하면서 말그대로 꿈으로 끝나버린 것.
사실 이런 문제점이 있는데도 꿋꿋이 인상하겠다고 하는 이유는 그마저도 안할경우 일본의 높은 재정지출과 함께 국가 신용에 대한 의문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국채 금리가 상승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보다 더 급박한 이유는 심각한 재정 적자와 국가 부채를 막기 위해서이다. 이에 대한 일본 시민사회의 반응은 소비세를 증세하는 것과 빚을 갚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는 회의적인 시선이 대부분인데, 일본이 빚갚는답시고 소비세를 1990년대부터 당시 3%에서 현재 8%로 5%포인트 올렸으나 부채는 GDP대비 50%대에서 200%로 증가해 무려 4배가 됐기 때문.
아베노믹스가 경기부양을 위한 적극적인 승부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양적완화가 핵심정책이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새로운 기조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일본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아베 2기 내각의 정책의 성공여부가 일본의 명운을 가를 것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54]
일단 아베는 2019년 연말에 현행 소비세 8%에서 10%로 증세하기로 거듭 확정한 상황이다. 또한 2019년 4월부터 외국인 노동자 수용을 시작했다.
외교 정책 강한 친미친 서방 노선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강한 친 미국-친 유럽 노선과 반중[55], 반북 정책. 이는 일본 자민당의 전통적인 외교 노선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우파인 자민당은 친미, 친서방 성향이며, 좌파인 야당들은 일반적으로 친중, 친한 노선을 띠고 있기 때문
한일관계 광복 이래 역대 최악
2019년 이후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한반도가 일본으로부터 해방 된 이래 정치적으로 가장 험악한 관계로 치달아 가는 중이다. 과거의 경우엔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과 패권 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두 나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 중재를 시도 하였으나, 일본이 대한민국 대법원의 일본제철 강제징용 소송 배상 판결에 불만을 품고 경제제재를 가하자 한국의 문재인 정권이 지소미아 종료 카드를 꺼내 들었다.[56] 요즘은 심심하면 아베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한국을 세게 때리고, 한국도 정치적 목적을 채울 겸 거기에 세게 맞대응 하는 패턴이 반복되면서 한일 관계는 광복 이후 역대 최악으로 치달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미국 역시 중재에 힘을 쓰지 않고 있다..
군사 정책 급격한 군사력 팽창 및 공격용 무기 도입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강력한 지지 하에서, 전후 일본이 미국에 안보를 전적으로 의지해왔던 노선을 폐기하고, 중국, 러시아, 북한 등 반 서방 세계 국가들에 대한 억지력과 공격력을 키우는 대규모 군비 증강 정책이 아베 내각 기간 내내 이루어지고 있다. 당연히 동아시아의 과거 일본제국에 의한 전쟁 피해국이었던 한국, 북한, 중국 등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G7을 포함한 서방 국가의 지지를 확보한 일본은 이러한 저항을 가볍게 쌩까고 해군력과 공군력을 급속도로 키우고 있는 중이다.
일본의 국방 예산은 아베의 취임 시기인 2012년 4조 7억 엔에서, 2019년 5조 3천억 엔으로 증가했으며,[57] 2018년엔 다른 국가들의 해병대에 해당되는 수륙기동단을 창설했다.[58] 거기다 사실상의 항공모함에 해당하는 이즈모급 함선을 2척 건조했고 F-35를 100대 이상, 구축함급인 30FFM도 20여척 이상 추가 주문해놓은 상태다.
또한 평화헌법에서 집단적 자위권 부분을 개정하는데 성공했으며 순수 공격용 무기인 JASSM 및 JSM 공대지 순항미사일 도입에 사실상 지대지 탄도미사일에 해당되는 도서 방위용 고속 활공탄까지 개발하기 시작했다. 미래에는 자체적으로 초음속 대지 순항미사일까지 개발하여 배치할 계획으로 이미 예산 증편을 완료했으니 평화헌법이 사실상 무력화시킨게 아니냐는 여론이 많다.
외국인 노동자 수용 정책
아베 정권 하에서 일본 내의 외국인 노동자[59]는 2018년 기준 138만명으로, 그가 집권하기 이전에 비해 2배가 되었다. 2018년 10월, 2025년까지 50만명의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법안을 승인했으며,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2019년 4월부터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 법안에 따르면 이제 일본은 저임금 단순노동직도 5년간 노동자 자격으로 일할 수 있으며, 기술직 노동자의 경우 가족 동반이 가능하고 사실상 무제한으로 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데다 영주권도 취득 가능하다. 또한 일본어 능력시험 요건도 대폭 완화한다. 아베는 이것이 '이민정책'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하였으나 동시에 '일본의 문화를 외국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공존의 방법을 모색해야한다'고 하며 다문화 이민정책을 추진함을 시인하였다.
물론 자민당 주요 지지층인 보수계에서 격렬한 반대가 터져나오고 있으나 설문조사에 따르면 과반의 일본국민들이 이민개방을 용납한다는 결과가 나오는 등 무난하게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야당중에서도 일본제일당만이 극렬 반대할 뿐, 나머지 일본 유신회 등 우익성향 정당들은 모두 찬성이며, 입헌민주당 등 리버럴 계열 야당은 내국인의 임금감소 등 다소 우려는 있으나, 만약 유럽식 이민제도를 확립하고 외국인에게도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환영할만할 변화라는 입장이다.
이로서 아베는 일본에 첫 대규모 외국인 이민을 결단한 총리가 될 전망이다. 특히 일본 인구의 28%가 노인이고 젊은이들은 힘든 직종은 기피하고 있어 농어촌이나 지방 중소기업들은 이미 일할 사람이 없어 폐업이 잇따르고, 저출산노령화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 이민이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 국내외의 회의론자들은 아베가 한 일은 체류자격을 세분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기능실습생이라는 이름 하에 오랫동안 들어온 사실상의 노동자들을 이제서야 노동자라고 인정하는 것일 뿐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리고 일본의 거류외국인 비율도 예전부터 참 말이 많은데, 의도적으로 불법체류자 숫자를 축소해서 발표하고 있다는 소리가 있다. 다만 이것도 한국 입장에서는 위기가 올 전망인데, 한일 무역 분쟁이 촉발되면서 현재로서는 일본의 현재 사실상 유일한 실질적 통상 이민제도이자 취업이민 제도인 5년 이상 합법체류를 통한 취업 종사를 성공적으로 끝마칠 시 영주권이 발급되는 이민제도가 차질을 빚게 될 가능성이 커졌으며, 더군다나 아베와 측근들 측에서 꺼내들 순차적인 잠정적 카드로 이미 발표가 된 지라 더더욱 대한민국 국내의 일본 취업 희망자들에겐 크나큰 차질이 생길 전망이다.
저서
3권 모두 2016년 기준 국내에는 번역 출간되지 않은 상태이다. 다만, 한국에도 아베 신조에 대한 내용을 담은 최신 도서는 많다. 예를 들면 한동안 꽤 화제가 되기도 했던 아베 신조, 침묵의 가면이란 책이라던가, 참고로 이 책은 아베 신조의 출생부터 지금 일본 정치의 최정점인 총리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인생을 서술한 책이다. 아베 신조라는 인물에 대해 보다 면밀히 알 수 있는 책이지만 작가의 성향이나 시각이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해 상당 부분 비판적으로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 또한 책이 완성된 시기에서 보여지는 아베 신조의 행적과 현재의 행적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의 반영이 누락된 부분은 감안하여야 한다.
그외
か행(카키쿠케코) 발음이 좋지 않은 편이다. 2012년 자민당 광고 사실 아베의 발음은 전체적으로 부정확하고 새는 경향이 강해서 알아먹기 힘든 편. 대학 일본어 수업에서 아베의 스피칭은 최고의 난적으로 꼽힌다.
일본의 총리들중 가장 최장기 집권을 해온 총리다.
친일 성향 언론인인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과 친분이 깊다. 이미 오래 전(2005년 간사장 시절)부터 서로 면식과 인터뷰를 한 경험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2013년 집무실에서 인터뷰(녹음)도 했다. 조갑제 닷컴의 기사. 여하간 양국 관계가 나쁜 상황에서 한 아베 재취임 이래 한국언론 최초의 인터뷰다.
그의 행보 때문인지 히틀러 분장을 당해 까이기도 했다.
역대 일본의 수상들 중 TV 토크쇼, 예능 프로그램을 가장 즐겨 출연하고있다. 유튜브에서만 뒤져봐도 2012년 2차 내각 이후 최소한 10회 이상 TV 토크쇼, 예능 등에 출연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사진은 2016년 5월 1일 일요 아침 예능 방송인 와이도나쇼(버라이어티 성격의 시사 프로)에 출연한 모습.# 현 정권에서 보육원에 대한 정책 방향을 비롯해 인터넷에서의 비방이나 국회에서의 야유에 대한 생각, 그 밖에 음주와 관련된 에피소드 등을 진솔하게 이야기하였다. 음주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과거 고베 제강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 대장염으로 인해 전혀 음주를 하지 못했지만 야유회에는 참여했는데, 바로 운전수 역할이었다는 얘기.
미국에서도 존 올리버에게 드디어 까이기 시작했다. #
2015년에 정치자금 모금액 상위 20명 가운데 17명이 자민당 의원이며, 전체 6위를 차지했다.#
2017년 2월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악수할 때 트럼프가 손을 세게 잡는 악수를 했는데 악수가 끝난 후 아베의 표정이 뭔가 웃겨서 짤방으로 쓰이고 있다.문제의 악수
2017년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려있을 무렵, 아베는 총리 관저에 자주 머물렀는데 MBC에서 제작한 드라마 제5공화국을 시청하였다.
역대 최장 수준의 재임 기간을 보내고 있는 탓에, 아베 내각의 주요 각료들도, 역대 최장기 재임 기록들을 함께 경신하고 있다. 정부 대변인 격인 관방장관을 맡고있는 스가 요시히데, 재무상과 부총리를 맡고 있는 아소 다로 전 총리는 각각 역대 최장기 재임 관방장관과 최장기 재임 부총리 겸 재무상이다. 보스이자 총리인 아베가 최장기 집권 중이니 어쩌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물론 나머지 각료들은 내각 개조 혹은, 중의원 해산을 통한 차기 내각 성립 때 물갈이 되고 있다.
그가 총리로 재임하던 시기에 대한민국에선 노무현, 이명박[65],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이 차례로 집권했고, 미국에선 조지 W. 부시, 버락 후세인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차례로 집권했다. 워낙 오랜 기간 총리로 집권했기 때문.
2차 이후의 아베 내각은 극단적인 남고여저의 지지율 양상을 보인다.(10% 이상) 관련 기사 재미있는 부분은, 처음 집권했던 2006년, 2007년의 1차 내각 시절엔 패턴이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아베는 전후 출신의 첫 수상이자 전후 최연소에, 정치 명문가에서 태어난 귀공자 타입의 이미지가 강해서 여성들에게 인기가 더 높았다고 한다.(10% 이상) 그러나 2012년 재집권한 2차 내각 이후에는 1차 내각 시절의 신선미가 사라지고 노련한(노회한?) 정치인의 이미지가 생긴데다 정치 성향마저 극우화 되면서, 혹시라도 아베가 밀어붙이는 개헌이 실현되면 자신들의 자녀 세대가 조상들처럼 전쟁의 참상 속에서 희생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자식을 키우고 있는 어머니 세대 즉, 30-50대 여성의 계층에서 지지율이 현저하게 낮은 것으로 조사된다.
또한 2012년 이후의 2차 내각은 10대부터 30대까지의 젊은층에서 지지율이 두드러지게 높다. 관련 기사 이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우선 양적완화를 기반으로 하는 아베노믹스의 영향으로 2030 세대의 경제 상황이 상당히 좋아졌고, 2011년 중국에게 GDP를 추월당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 타이틀을 빼앗긴 이후 자신감을 잃었던 일본에게 ‘강한 일본’을 슬로건으로 외치며 군비를 강화하고 세계적인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는 아베 내각과 자민당의 노선에 대해 젊은 세대가 열광하고 있는 부분이 크다. 보수 정당이자 정권인 자민당과 아베 내각이 젊은 세대로 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여러모로 상당히 이례적이며 신기한 부분이다. 주요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한국 등)과는 정반대의 패턴이기 때문.
제 87-89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고이즈미 준이치로와는 정치적 사제 관계이다. 아베 신조가 제 90대 내각총리대신(제 1차 아베 내각)으로 처음 취임했던 2006년에 직전 내각이었던 고이즈미 정권에서 관방장관을 맡았으며, 그 당시의 총리 지명 역시 현직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전폭적인 지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원자력을 중요시하는 아베 신조와 탈원전을 주장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관계는 현재 그닥 좋지 않다. 고이즈미의 임기가 시작된 2001년부터 2019년 현재까지 약 20여년의 기간 중, 이 정치적 사제 관계인 두 사람의 임기는 거의 2/3[66]에 육박한다. 즉 21세기의 일본은 고이즈미와 아베가 이끌어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2006년 연말에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기자: 총리한테 '올해의 한 글자'라고 하면 어떤 게 떠오르나요?
아베: 올해는 제게...'변화'(変化)의 한해였을까요.
기자: 한 글자로 표현한다면...
아베: 그건...'책임'(責任)이겠죠.
한 일본의 역사 학자는 2기 아베 정권을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라고 비유한 적 있다.#
놀랍게도 야쿠르트 스왈로즈 팬이다. 자기 저서에서 전신인 산케이 스왈로즈 시절부터 응원했다고 써놨고 방송에서도 여러차례 야쿠르트 빠심을 드러낸다. 또한 스왈로즈 빠라면 당연하게도 골수 안티 교진이다. 나가시마 시게오, 마쓰이 히데키의 국민영예상 시상식에서도 이 둘에게 "난 안티 교진이라서 이들에게 주는게 못마땅하네"라고 할정도니(.....
아베 신조는 한국계
보수 성향 정치인임에도 뜻밖에 한국계라는 떡밥이 있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보통 넷 우익들의 한국계 드립은 하토야마 유키오나 간 나오토 같이 진보 성향의 정치인에 치는 경우가 많지만, 아베 신조는 우파 성향임에도 한국계설이 나돈다. 대표적으로 참의원 선거 때 파칭코 업계[68]에게 5천만엔의 정치 자금을 받았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파칭코나 야쿠자 정치 자금설은 어느 정치인에게나 흔하니 비방성 루머로만 그쳤지만 한국계 떡밥을 결정적으로 불지핌은 아베 신조 1차 내각이 나온 2006년 9월 주간 아사히가 아베가에서 40년간 가정부로 일해온 구보 우메와의 인터뷰에서였다.# 인터뷰에 따르면 아베 신조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가 스스로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 私は朝鮮(人)だ。朝鮮 )" 이라 말한 적이 있었으며 입관식 때 본 그의 골격이 조선인 체형이었다고. 아베 칸 부부는 키가 작은 편인데, 아베 신타로의 키는 180cm가 넘었기에 조선인 체형이라고 말한 것. 출처가 어디까지나 가십 기사로 먹고 사는 주간 아사히이니 신뢰성에 의문은 있다.
이것 말고도 그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와[69]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아베가 한국계라는 주장도 있다. 동아일보에서 도공 심수관[70]을 인터뷰 하던 도중 심수관이 자신에게 기시의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71]가 자신도 1600년대 이후에 건너온 조선인 집안이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14대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가문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임을 추정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1964∼1972년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에게서다. 지금도 그의 거실에는 사토 전 총리가 써준 휘호가 걸려 있다. ‘묵이식지(默而識之)’라는 글씨 곁에 ‘심수관 선생에게, 갑인년 봄 에이사쿠’라는 서명이 적혀 있다. 갑인년은 1974년을 뜻한다.
14대는 사토 전 총리가 이 휘호를 써준 날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사토 전 총리는 차를 대접받은 뒤 “좋은 차였습니다”고 인사하고는 “수관 씨, 몇 대째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14대입니다”라고 하니 “저는 좀 더 짧을 겁니다. 당신네는 게이초(慶長·1596∼1615년) 때 왔는데 우리 선조는 그 뒤에 온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붓과 벼루를 청해 글씨를 써줬다는 것이다. 묵이식지는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줄 것은 다 알아주고 통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14대는 “그 말의 진위를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사토 총리의 고향인 야마구치(山口)는 예로부터 조선반도와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라 가능한 얘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토 에이사쿠는 아베 현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친동생이다. 1975년 세상을 떴다.#
또한 중요한 선거 전날 모든 유세를 마치고 한국식당으로 가서 불고기를 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단골 식당인 가레아(可禮亜)는 코리아를 발음대로 한자로 적은 것이며, 딱히 비싼 식당도 아닌 저렴한 불고기 전문점이다. 내부는 한국식 병풍과 하회탈, 조선 백자, 궤짝 등으로 꾸며놓아 누가봐도 한국식당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일부 극우 인사들로부터 종종 비난을 받기도 했다.# 만약 중요한 선거 때마다 한국 대통령이 저팬이라는 식당에서 일식을 먹는다고 가정해본다면, 굳이 오해살 만한 일을 왜 하는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불고기를 중요한 날 먹는다고 조선계라고 확정 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업가이자 극우 평론가 나카스기 히로시는 이런 말을 했다.
아베상의 집에서 조선장롱(이조 가구)이 나왔어.. 사진이 찍혔어. 역시 이 자식은 썩었어. 이것도 진실은 모르겠지. 이조의 마지막 이 은(영친왕)이라는 왕이 있었죠? 마지막이 '이 은' 이라고 합니다. 부인은 일본인입니다. 아이가 있었어. 그 아이가 '신(晉)' 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니까 '이 신(李 晉)' 이네요. 황족이에요. 조선의 일본 황족. '이 은' 그 아들이 '이 신' 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죽은거야. 그런데 이상한게... (본론부터 얘기하자면) 그게 아베 신타로 상인거야. 아베 신타로는 '아베 칸' 의 양자로 가게 됩니다. 전혀 (아베 칸 부부) 둘은 키가 작은데 아베 신타로 상은 키가 큽니다. 많이는 아니지만 다릅니다. 양자로 들어간 아이야.. (또한) 기시 노부스케의 딸(요코)을 받은 사람이 아베 신타로 지요? 이씨 왕족의 피가 들어 있어요. 그러니까 요코타 메구미상과 친척이다[72] 라고 아베에 대해 말하지. 아베상의 속사정을 말하면 일본이 싫은 거예요. 아니 일본이 싫은게 아니예요. 본래 성격으로 말하자면 (일본이 싫은게 아니라) '일본인'이 싫은거예요. 머리속은 조선인입니다.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 상이 언제나 "나는 조선인이다" 라고 말했다 하네요. 그걸 가정부가 듣고 문춘에 내서 "나는 조선인이다"라고 말했다고. 아베 신타로가 죽고 보니 관이 이렇게 크다고. '역시나 이거 정말로 조선인이다' 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네요. 그러니까 아베 신조 머리속은 조선인이예요. 그리고 부인(아키에)도 조선인이예요. 모리나가 제과. 모리나가 제과가 조선이니까요. 조선에서 온 거예요. 그리고 아이가 없다고. 그들의 머리속이란 다들 잘못되어 있지만, 그들은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조선인이지만요.. 하지만! 그들은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 자라서.. 여기는 조국이라 생각하면서.. 태어난 곳은 일본이라고.. 그러니까 본인은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피의 흐름을 본다면 조선인이라고. 그렇게 따지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이 나라는 우리들의 나라라는 것. 조선인의 일본이라는 것..' 이런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인이 일본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본국 같은건 상관없어요. 한국이 어쩌고 전혀 상관없어. 여기는 일본으로 우리들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우리들은 일본인이다." 라고.. 자 그러면 옛날부터 있었던 일본인들은?.. 방해입니다(방해된다는 겁니다). 옛날부터 있었던 일본인들을 '현 일본인(겐 니혼진)' 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롯뽄기 등에서 그런 이야기를 항상하고 있습니다. " '현 일본인'은.. 바보들이야".. 어쩌고 하면서, "(진짜) 일본인이란 우리들을 말하는 것이다." 라며..
(이후 다른 주제로 넘어감)
# 한글자막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아베 신조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사실 영친왕의 첫번째 아들인 '이진李晉'(일본발음으로 이신)이라는 것. 이진은 1921년에 태어나 1922년 한국을 방문 중에 요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진은 일본제국 정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자식이 없던 '아베 칸'의 양자로 들어가 '아베 신타로(1924년 출생)'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아마도 이진의 어머니인 이방자는 첫째 만큼은 남편인 영친왕처럼 일본 정부의 감시를 사사건건 받으면서 살게는 하고 싶지 않았으며, 이방자 본인 또한 일본 황족의 방계이므로 첫째가 의문사 했다고 말하고선 이후 방계황족의 인맥을 통해 자식이 없던 '아베 칸'의 양자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아베 칸' 부부의 키는 160cm 중반 정도인데, '아베 신타로'의 골격은 180cm가 넘는다는 점, 몇십년간 일했던 아베가문의 가정부 조차 아베 신타로가 평소에 자신은 조선인이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또한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73])는 아들의 이름을 '이진(李晉)'에서 晋이 3번째로 이어진다고 하여, '신조'(安倍'晋三')라는 이름으로 지었다는 것도 극우들의 주장이다. 따라서 혈통의 계보는 이은(영친왕)→이진(李 晉) =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아베 신조(安倍晋三) 이며, 이 이름에는 공통적으로 '晉' 이라는 한자가 들어간다. 유교의 주역에서 '晉'괘란 '암흑에서 광명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난관을 돌파하여 영광을 얻는다'는 '晉'의 이름을 물려줌으로써, '암울한 조선황실에서 홀로 떨어졌지만 곧 그것을 극복하리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아베 신조는 아베 신타로의 둘째 아들인데.. 왜 첫째 아들에게 그러한 이름을 붙이지 않았느냐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아베 신타로의 첫째 아들 이름은 (극우들의 주장에 따르면 양아버지) '아베 칸(安倍寛)'의 이름을 따서 '아베 히로노부(安倍寛信)'로 정했고(한자가 똑같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이름인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에서 이름을 따서 '아베 신조(安倍晋三)'라고 정했다. 보통 자신의 이름을 첫째에게 물려주는데, 이상하게도 아베 신타로는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인 '아베 칸'을 첫째에게 물려주고, 자신의 이름은 둘째에게 물려줬다는 점에서, '아베 신타로 자신이 아베 칸의 양자로 들어가 보살핌을 받았다는 보답으로, 자신의 첫째 아들은 아베 칸의 이름을 넣기로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으며, 더욱이 첫째 아들의 이름인 '아베 히로노부(安倍寛信)'의 한자를 해석하면 '아베 칸(安倍 寛)을 믿는다(信)' 는 뜻이 되므로, 그런 의심은 더욱더 굳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셋째 역시 같은 방식으로 기시 가문의 양자가 되었고, 아베 신타로 자신도 기시 노부스케의 데릴사위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얽혀 있었던 것을 볼 때, 명망 높은 아베 가문이 데릴 사위나 유력 가문의 자녀를 받아들이지 못할 망정, 신타로 자신을 포함하여 아들들이 다른 가문에 과도하게 의지한다는 점도 극우들의 의심을 사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아베 신타로의 생전 정치인 시절에, 재일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이었고 한국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었던 '친한(親韓) 정치인'이었다는 것도, 이런 루머가 생기게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는 아베 신조 집에서 찍힌 '조선식 장롱' 사진 뿐이며(이 마저도 불분명하다), 나머지 주장들은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참고로 나가스기 히로시는 방구석에서 헛소리나 하는 노인네가 아니라, 유명 라멘 체인점인 《라멘 카게츠》의 설립자이자 오너이다.그러니까 방구석에서 헛소리하는 돈많은 노인네라는 뜻이다 《거리로 나온 넷우익》의 저자 야스다 고이치의 말에 따르면 오래전부터 "일본은 조선인에게 지배당하고 있다" 라는 주장을 해 왔다고 한다
지한파
나라가 다르면 역사나 문화도 다르다. 양국 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서 그것들을 전부 일일이 연관 짓는 것은 과연 좋은 것인가. 서로 다름은 다름으로 해서 존중하는 것도 필요한 것은 아닌가. 일본과 중국은 서로의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수뇌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과도 마찬가지이다.일한 양국은 지금 하루 1만 명 이상이 왕래하는 중요한 관계이다. 일본은 오랜 기간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흡수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의미에서 한류 붐은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나는 일한 관계에 관해서 낙관적이다. 한국과 일본은 자유민주주의, 기본적인 인권과 법의 지배라고 하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일한관계의 기초가 아닌가. 우리들은 과거에 대해서 겸허하고 예의바르고 미래지향으로 마주보는 한 반드시 양국의 관계는 보다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국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EPA(경제협력협정)의 체결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 총리 관저 입주 거부
일본 총리의 집무실인 일본 총리 관저에는 총리가 숙식을 하는 장소가 있지만 아베는 총리가 된지 5년이 지나도록 시부야에 있는 사택에서 총리 관저로 매일매일 출퇴근을 하고 있다. 아베 신조가 비교적 젊었던 시절인 제1차 아베 내각 때에는 총리관저에 입주했다. 이로 인해 민주당 등 야당에서 "안보 위기 의식이 없다"고 태클을 걸었지만 아베는 "총리 생활과 사생활을 구분하고 싶다"고 대답했다.[74]
총리 취임 뒤로 총리 관저에 들어가질 않아서 총리 관저의 귀신 때문에 못 들어가냐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실제로 일본 총리 관저에서 1932년 5.15 사건 때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비롯해 여러 명이 피살된 이후로 이곳에서 전직 총리들이 귀신을 봤다는 소문이 있었다고.[75] 일본 국회까지 이 문제를 거론하자 아베 총리는 "귀신 때문에 관저에 안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소문은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한편으로 6월 1일 요미우리 TV 방송에서는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관저에서 귀신의 다리를 봤다"는 이야기를 해서 "귀신 때문에 못 들어가냐"는 소문은 식을 기미가 없다. 아베 신조 1기 내각 때 총리관저에 입주했다가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참패하고 불명예 퇴진한 것에 대한 트라우마때문에, 2기 이후로 아베가 총리관저 대신 사택에서 출퇴근한다는 설이 있다..
활발한 SNS활용
페이스북을 비롯해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SNS를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정치인으로 하루 평균 1.8개의 페북 소식을 올린다고. '인터넷 재상'이라고 불릴 만큼 독보적 인기를 누리는데 늘 휴대하는 태블릿 PC로 전직 관료, 현직 야당 의원, 한국 그 자체 등을 심하게 까내리면서 호평과 혹평을 함께 받는다. # 참 문제 많은 행태지만 일본의 보수와 젊은 세대들은 열광한다고. 특히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아베는 "폭거다. 점령하는 쪽이 도발적 행동을 하면 몰상식하다"는 글을 올렸고 반나절 만에 2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좋아요"를 연발했다.근데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표를 얻기 위해 비슷한 수법을 쓰기도 한다여하간 일본에선 대단히 보기 드문 유형인 인터넷 활동이라, 분명 대중적 인기를 끄는 총리다.
요즘에는 페이스북보다는 주로 트위터를 통해 외교 정상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영상을 올리고 있으며 정책 홍보 글도 올리고 있다. 2019년 2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스마트폰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영화광
소문난 영화광이다. 연평균 50회 이상 영화관에 방문하여 영화를 본다. 거의 1주일에 최소 한번은 영화를 보는데, 공휴일을 이용하거나 공휴일이 없으면 수요일 저녁에 영화를 본다. 일본인들은 영화관에 잘 방문하지 않아 1인당 평균 영화 관람 횟수가 1회를 간신히 넘는다. 1.5회 정도 된다. 한국은 같은 지표에서 4.1회. 아베 신조는 전 세계 국가원수급 정치인 레벨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를 많이 본다. 실제로 일반인 수준에서도 연평균 영화관 관람 50회면 이미 영화 관람 상위 0.1% 안에 들어가는 중증 영화광이다. 2018년 12월 31일은 부인과 이런 야심한 밤에 바나나라니 사랑스러운 실화(こんな夜更けにバナナかよ 愛しき実話)라는 영화를 보고, 2019년 1월 1일 새해 시작을 보헤미안 랩소디와 함께한 것도 아베의 영화광적인 성격이 드러난 면모이다. 일본의 영화관 표값이 2D 일반 영화도 1,800엔에서 2,000엔 정도 하는 것을 보면 영화에 대한 지출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도호시네마와 이온시네마 두군데를 이용중이며, 둘 다 VIP 등급이 있는 것으로(정확한 등급은 불명) 알려져 있다.
아베의 영화 성향은 저예산 독립영화부터 외국 블록버스터 상업영화, 애니메이션 영화까지 다양한 편이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잘 안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베 신조와 사이가 안 좋은 소노 시온이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작품도 아베 신조가 보고 나서 가끔 트위터를 통해 의견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일본에 개봉한 한국 영화는 본 적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베의 영화광적 면모 때문에 일본 영화계에 대한 여러 지원책을 내놨고, 그 중 하나가 쿨 재팬 사업이었다. 그러나 일본 영화 시장 규모가 20억 달러 선에서 정체되는 등 커지질 못하니[76] 아베 신조 본인도 안타깝다고 2018년 10월 국회 질의에 답변한 바 있다. 이 때 아베는 "일본인들이 영화를 더 사랑해주었으면 좋겠다. 일본 영화든 외국 영화든 여러 국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그런데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일본 영화인 어느 가족에 대해선 입다물고 외면하고 있다, 일본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다뤘기 때문으로 보인다. 논란이 되자 아베 신조 총리가 늦게서야 축전을 보냈으나, 감독이 거절했다고 한다.
역대 최장기 집권과 6연속 선거 압승
2019년 11월 20일을 기준으로 가쓰라 다로의 2,886일 기록을 경신[78]하며 총리 직책이 창설된 메이지 유신 이래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한 총리가 됐다. 만약 현행 3기(1차 내각 포함 시 4기) 자민당 총재 임기가 끝나는 2021년 9월 30일까지 집권할 경우 통산 재직 일수는 무려 3,567일에 달하게 된다.[79]
2차 내각이 성립된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시작으로,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내리 압승하였다. 이는 일본 내각제 130년 역사 이래 유례가 없는 놀라운 연승 기록이다. 이는 아베 내각의 경제적 성과와 더불어 정치적(개헌 추진과 군비 증강 정책), 외교적(강력한 친미, 친서방 정책) 스탠스를 국민들이 크게 지지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를 단순히 자민당 장기집권의 연장선 덕분이다 라고 치부하기엔 꽤나 어마어마한 결과이다. 당장 아베의 1차 내각 이후 2009년에 압도적인 민주당 정권 교체가 있었고, 그 이전의 자민당 독주 시대에도, 단일 내각이 선거에서 연거푸 승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어떤 내각이 장기간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정치를 지속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을뿐더러, 설사 그렇게 성공적인 정책을 펼쳤다 하더라도, 오랜 기간 독주하는 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견제 심리로 인해 선거에서 연승을 거두는 것은 상당히 힘들기 때문. 물론 2차 아베 내각 이후의 연승은 민주당 정권 시절의 심각했던 실정을 다시는 보고싶지 않은 일본 국민들의 심리에 의한 반대 급부 성격이 짙은 것도 부인하긴 힘들지만.
1차 아베 내각의 직전 내각총리대신이자 아베 신조의 정치적 스승이기도 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역시 선거의 제왕 소리를 들을 정도의 높은 인기를 누렸던 수상이지만, 2018년을 지나는 현 시점에서는 이미 그 수준을 능가했다고 볼 수 있을만큼 많은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고이즈미는 2004년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참패(49석/121석)했다. 아베도 2007년 참의원 선거 참패(37석/121석)해서 가려졌지 고이즈미도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하는 바람에 수상직에서 짤릴뻔했다. 2005년 우정 해산(중의원)이라는 도박이 대박이 터졌기에(중의원 2/3 장악) 2004년 참의원 선거 참패를 덮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베가 2차 내각 들어서는 참의원 선거도 싹쓸이중이라 더 무서운 것. 그야말로 청출어람이다
아사히 TV에서 발표한 2017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비례대표 연령별 투표 성향. 당 이름은 왼쪽부터 자민당, 공명당, 희망의 당, 일본 유신회, 입헌민주당, 일본 공산당이다.
일본에서 아베 수상의 장기집권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계층은 바로 30대 이하의 젊은 층이다. 그 이유는 아베노믹스와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위시한 여러 중산층 위주의 경제정책이 크게 성공했고, 이에 대한 최대 수혜자가 10~20대 계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연 150만명씩 은퇴하는데 반해 신규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청년층은 70만명 수준인 상황이라 일자리가 넘쳐나 아베의 장기집권에 득이 되는 상황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베 정권은 연금 수령 연령을 상향하고 노인 복지 규모를 축소하는 등 비록 증세에는 적극적이나 노인층 부양으로 인한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적극적이고, 당연히 젊은 계층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80]
일본 야당의 상황도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야당들은 현실 정치와 경제 상황과 괴리되어 '반대를 위한 반대' 또는 이상적인 정치 이념을 주장하는 등, 집권당인 자민당에 대한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 일본의 국제적 위상 회복, 불황 탈출 등 현실적인 정책을 제시하고 점진적으로 성과를 내고 있는 자민당과 아베 총리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아베 총리는 방송 출연, SNS 이용 등을 통해 젊은 층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이런 것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은 당 안팍의 정치적 경쟁자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된다. 즉, 문제가 많긴 하지만, 능력은 좋다는 게 대략적인 평.
2018년 8월 10일 교도통신의 여론조사가 나왔는데, 아베 신조를 적극 지지하는 연령대가 20대, 반대하는 연령대는 60대 이상인 것으로 나왔다. 아베 신조의 경제 정책 자체가 일본의 20대를 타겟으로 하였고 저출산 고령화때문에 20대 일자리가 넘쳐나는 현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베는 아소 다로가 2017년에 고령층을 상대로 한 언제까지 살아있을 셈이냐는 말까지 할 정도로 노인층들한테는 각종 사회보장 혜택을 대거 축소하고 있다. 노인층한테 돌아갈 세금을 20대한테 쏟아붓는 것이 아베 정부의 아베노믹스 재정정책이다
2018년 12월 10일 일본 NHK에서 발표한 여론조사. 여기서도 20대의 아베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20대 남성의 아베 지지율은 무려 73%이였다
'기타 정보 유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뮤니티 실드에 대해알아보자 (0) | 2020.08.30 |
---|---|
여행에 미치다 에대해 알아보자 (0) | 2020.08.30 |
코인빗 에 대해알아보자 (0) | 2020.08.26 |
한타바이러스에 대해알아보자 (0) | 2020.08.26 |
CGV에 대해알아보자 (0) | 2020.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