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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0. 10. 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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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냄 또는 그런 의식.

한국에서는 유교적 제례 행위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유교식으로는 기본적으로 사대봉사(四代奉祀)라고 하여 '제주'의 4대조(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기본이었고,[1] 이게 넘어가면[2] 매안(埋安)이라고 하여 신위를 사당에서 옮겨 땅에 묻고 원칙적으로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후 5대조 이상의 조상은 개개인의 기일이 아닌 음력 10월에 동시에 기리는 묘사(墓祀)[3]를 지내거나, 큰 공을 세운 조상의 신위는 시대가 지나도 옮겨 그만두지 않고 계속 제사를 지내는 불천위(不遷位) 같은 예외가 추가되었다.[4]

보통 서양권에서 이 문화를 소개할때 제사를 보통 Korean Ancestral Rites (한국의 조상에 대한 의례) 라고 하거나 Jesa 로 음역한다.

유래

제사의 기원은 토테미즘이나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신앙에 있다. 자연재해, 질병, 맹수들의 공격 같은 인간집단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재앙을 막기 위해 하늘이나 땅, 강이나 바다, 오래된 나무, 높은 산, 조상 등에 절차를 갖추어 빌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신성에 대하여 지내는 종교 의식은 '제사(祭祀)'로 통칭할 수 있다. 이는 조로아스터교와 아브라함 계통 종교 같이 인류사 초기에 세계 각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 문화권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지역적 특성이 섞여 형성되었다. 고대 중국 상나라(은나라)의 왕 조갑이 주변 토착신을 배제하고 조갑의 직계 조상만 섬기는 조상신 풍습을 만든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기록을 보면 상족의 조상은 직계인 근조선공과 직계가 아닌 원조선공으로 나뉘는데, 상나라에서 제사는 직계 선조인 근조선공에게만 지냈다. 조갑은 왕의 어령에 반발하는 사람을 막기 위해 "자신의 조상을 숭배하면 농사가 잘 되고 전쟁에서 승리하며 재앙을 막아준다"는 등 만사가 다 잘 돌아간다고 퍼뜨렸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조상 섬기는 문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 제사의 시초다.[5]

상나라는 주나라에 의해 멸망당하는데, 주나라는 위에서 조갑이 퍼뜨린 풍습을 따라 상나라의 제사방식을 이어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상나라의 전 지도층을 제후로 임명해 상나라 조상에 대한 제사를 계속 이어가도록 했다. 이것도 다른 가문의 제사를 끊기게 하면 그 사람에게 제사가 끊어진 조상 귀신들이 재앙을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왕들을 가르치던 공자가 "상나라 제사 문화 띵호와" 하면서 재정비했다.[6][7]

일반명사로서 제사의 뜻은 이렇지만, 흔히 한국에서 '제사'라고 하면 '조상 제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8]

이런 수단으로서 행해진 제사는 중, 근세에 이르러 유교와 결합하여 조상숭배의 제도로 고착되었다. 또한 종교적 의미를 가지면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정교가 분리된 이후에도 황제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며, 자신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권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다만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의 왕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낼 수 없었고, 왕조의 조상신(종묘)과 땅의 신(사직)에는 제사를 지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가정에서는 효의 의미를 가져 가문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종교적 면은 사후세계의 인정을 통한 유교 특유의 간접적 영생법의 의미를 가졌다.

고려, 조선 전기까지는 아들딸 상관없이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받고 제사의 주체에서도 남녀차별이 없었으나[9] 조선 중기 이후 소중화 의식이 강해지면서,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남[10]이 아버지의 재산 2/3을 받고, 나머지를 다른 아들들이 나누고, 딸은 받지 못하는 인습(因習)이 1990년대까지 유지되기도 했다

차례와 제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하며# 두산백과에 따르면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에 간단히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한다.# 따라서 설날과 추석에 한해서 제사가 아니라 차례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차례도 제사에 포함되는 개념이므로 설날이나 추석에도 제사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반대로 제사를 차례라 부르진 않는데, 명절 등에 지내는 차례는 보통 제주 위로 돌아가신 4대 조상[12]까지 대접하는 제사를 의미하므로, 죽은 사람의 기일에 그 사람만을 위해 지내는 제사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뜻으로는 제사, 차례와 구별하는 뜻으로는 기제사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보면 차례는 명절 제례로 고려시대부터 지낸 것으로 추정되고, 이름 그대로 원래는 차를 올리는 다례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고려시대와 차라는 부분을 고려하면, 세시풍습 + 계절제와 불교식 성향이 더해져서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한 조선시대가 되면서 불교식 세시풍습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세시 풍습도 유교식으로 변화해간다. 실제로 조선시대 예법의 기본 취급 받는 주자가례 중 참례와 천신례는 세시의 제사를 다루고 있는데, 이 때 초일에는 술과 차를, 그리고 보름에는 차만을 올렸다. 다만 술 대신 차를 올리는 것은 아무리 봐도 불교 냄새가 강하다는 생각도 있었고,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 차는 엄청난 고급 사치품이었기 때문에[13]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아무래도 중국에서는 차를 올리지만, 조선은 술이죠"를 아놔 조상님들 외치면서[14] 차례상에서 차를 빼고 술을 채워넣었다. 이후 명절에 지내는 제사의 다른 이름이 된 것은, 조선 후기 성리학적 성향이 강해진 영향으로 보인다.

한국의 제사

삼국시대 이전: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 하늘 숭배 사상이 유행하는 원시적인 종교 형태를 띠고 있다.
삼국시대 초기: 고조선, 부여, 고구려, 삼한(마한, 진한, 변한)에선 동맹, 수신, 영고 등 우리 고유의 산과 강, 신과 하늘에게 지내는 의식 비슷한 제사가 진행됨. 이후 왕조의 형태가 잡히면서 주로 황실에서 시조에 대한 제사가 진행됨. 이때 고구려에서 시조의 조각상을 세우고 그를 숭배하는 제사는 고려에도 이어진다.[15]
삼국시대 중후반 ~ 남북국시대: 불교와 도교의 수입이 이루어지면서 절이 세워지고 불교식 제사가 자주 진행됨.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행사가 황실 위주로 이루어짐. 신라에선 도교식 제사인 초제[16]가 행해져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다. 이후 유교의 수입도 이어져 신라에선 종묘와 사직단이 설치되어 황실에서 유교식 제사가 이루어진다.
고려시대: 삼국의 제사들이 이어져 내려오고 성종대에 종묘와 환구단, 사직단 등을 설치해 황실에서 제사를 시행, 민중들은 팔관회, 연등회 등에 참가했다.
고려 말: 성리학의 수입과 더불어 주자가례에 따라 가문의 무덤(가묘)를 설치하려는 운동이 사대부 사이에서 활발해졌으나 별로 보급되진 않음. 절에 제사를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초기: 불교의례의 전통이 남아 주자가례와 같은 유교의례는 사회전반에 보급되지 않음.
16세기 중반: 성리학이 심화되어 양반사회에서 주자가례가 정착되고 주자가례에 명시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표시로 행하여 지고 있다.

외국의 제사

중국
문화대혁명 탓인지, 제사가 간단하며 한국에 비하면 그렇게 지내지도 않는 편. 하나의 제사상으로 6대 조상의 제사를 전부 지내며, 제사음식은 튀긴 물고기, 튀긴 닭, 안 깎은 과일 여러 개가 끝이다. 중국 산둥성에 공자묘가 있는데, 제사 그딴 거 없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공자묘를 훼손시킬 정도였다. 반대로 한국은 무형문화재 85호로 석관대제(공자 제사)를 지정해서, 몇몇 중국인들은 '한국인이 공자가 한국인이라고 주장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베트남
호찌민이 추석(et trung thu)을 어린이날로 바꾸자는 제안을 해서, tet thieu nhi라고 부르기도 한다. 낮에 제사를 지내며, 가족이나 친구끼리 월병을 먹는다. 여담으로 공자 제사를 지내는 문묘가 있다.

의의

핵가족화가 되어버린 현대에는 의의가 매우 퇴색되었다. 일단 보통 미디어 등에서는 제사가 후손들에게 공경심과 효심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사회적 소속감, 연대감을 증진하며 가족 간의 우애와 화목을 다지는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하며 특히 현대 핵가족 사회에서 초래되는 단절과 공동체 의식의 결핍을 보완하여 현대적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사방으로 나뉘어 살아가는 현대 가족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고 가족애를 확인 할 수 있는 자리가 제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학계에서는 "현재에도 제사를 올리는 집은 조상에 대한 숭배의 목적이 아닌 친척 형제와의 관계유지와 전통적인 관례와 풍습으로 하는 것이고, 조상신을 모신다는 종교적인 이유는 매우 약해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몇몇 기성세대나 서민층에서는 여전히 '조상신을 모신다'는 관습적 혹은 종교적 이유 때문에 유지되는 면이 가장 크다. 이것은 다른 종교와도 비슷하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사회적 역할은 따로 두고, 예식을 집전하는 사람들은 믿어야 하니까.

그러나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분명하게 "괴력난신을 인정치 아니한다"고 하였고 이 때문에 제사의 본질적인 목적을 고민해서 초기 유교는 괴력난신에 해당하는 조상신을 모시는 기복신앙이 아닌 제사를 크게 치름으로 가문의 세를 과시하는 목적을 인식해 유교의 범위에 포함시켰다고 봐야 맞다. 단, 공자가 말하는 괴력난신은 모든 종교의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모든 현상들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라,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걸 들어 제사를 비판할 수는 없다. 공자는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뭐, 공자 자신도 제자들과 함께 제삿밥 얻어먹는 처지가 되었지만.

실제로도 제사는, 제사의 대상이 되는 이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거나 한 위인일 경우에 한해서만 '불천위'라고 해서 특별히 대를 뛰어넘어 그밑에 후손들에게 지내게 하는 제도가 있다. 일반적으론 사대봉사라 하여 직계 4대 위론 올라가지 않는다는 점이 제사를 조상에 대한 기복신앙과 차별되게 하는 요소이다.[17] 또한 제사를 지낼 때 가문의 남자들이 모임으로서 가문의 수와 힘을 과시하고, 또 제사상의 차림으로 그 재력을 증명하는 등 가문의 세를 과시하는 모습이 보인다.

다만 이는 농업기반의 집성촌의 존재로 성씨에 연관된 집안사람을 즉각적으로 동원가능한 전근대적 사회에서의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와 6.25 그리고 도시화로 인해 집안의 결속력이 효과적이지 못한 현대에는 상술된 세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주가 아니라 장례와 같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먼저 죽은 사람을 추억하고 기리는 이유 혹은 아직까지도 집성촌과 종중단위를 유지하는 큰 집안의 제사를 담당하여 제사를 지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산을 비롯한 재산의 상속과 관련된 재산권 관련 이유, 또는 순수한 기복신앙과 효 문화와 동시에 과거의 영광에 기대서 명예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이유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유지 되고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회탈 전설만 봐도 고려시대 중반 마을 사람들이 자살한 김 씨 처녀의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조선시대부터 본인 조상만 모시는 이기주의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비판

선산의 이권 때문이건 제사의 비용이나 수고로움 때문이건 간에 제사 때문에 싸움이 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19] 제사가 없었다면 헛수고나 헛돈이 들 일이 없으니, 얼굴 붉혀가며 싸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명절이나 기일에 모여서 조상을 기리고 우애와 화목을 다지는 의미만 남겨 놓고, 제사라는 형식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전통의 긍정적 의의를 살리는 길이다.

예컨대 명절을 이용해 가족들끼리 여행을 간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친목을 다질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기껏 쉬는 날 모여서 기름 냄새 맡으면서 음식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만 정상적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이다. 제사 때문에 친척들 간에 얼굴을 붉힌다거나 고성이 오가는 경우를 제외해도[20], 제사가 있으면 부부싸움이나 분쟁이 생길 확률이 높다. 이런 현상을 고려하면, 제사를 집안의 화목을 다지는 행사라고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아도 팍팍한 사회에서, 가정에 경제적 및 노동 부담을 가중시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오죽하면 "조상 덕을 못 본 사람들이나 조상 모신답시고 상차리고 절하고 있고, 조상 덕을 본 사람들은 그럴 시간에 해외여행 간다"는 말이 나올까.

우습게도 민속의 날로 명명되어 하루밖에 안 쉬던 명절이 길어진 게 반드시 설날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기 위해 고향에 방문해야 하는 귀성길문제임을 감안하면, 제사 때문에 길어진 명절을 제사를 안 지내고 가족 간의 친목을 위해 소모한다는것은 앞뒤가 바뀐 말이다.

위 말에 반론하자면, 유럽이나 미국 등 기독교 문화권에서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를 현재까지 공휴일로 유지하는 것이 꼭 신앙심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기 때문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이런 불만은, "믿는 것은 신이지 신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부처님 오신 날과 성탄절에 절, 교회, 성당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사고방식과 일치한다. 젊은 세대에서 무신론이 대세를 이루는 요즘은, 상대의 집안이 제사를 지내느냐만큼이나 상대가 독실하게 종교활동[21]을 하느냐는 파혼과 이혼의 큰 이유를 차지한다.

게다가 무엇보다 경제적 이유로 가족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제사 때문에 한 집에 모이는 일 자체가 줄어가고 있다. 친족 공동체가 모여 친목을 다지는 전통을 유지/계승하고 싶으면, 보다 친족들이 모이고 싶은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모이게 만들어야 하는데, 제사는 모이고 싶지 않은 이유로 작용해 오히려 친족이 모이는 것을 방해하기만 한다. 명절에 해외여행을 떠나는 가족이 해마다 늘어나는 것을 떠올려 보자.

음복

제사를 지낸 뒤에 제사에 쓰인 제주(祭酒)와 제물을 나눠서 먹는 것. 집안에 따라 제상에 올린 나물과 밥을 함께 비벼서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22]

제물이 평소 먹던 음식보다 맛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음식이 식고 난 뒤에 먹기 때문이다. 특히 고기나 생선류는 한번 조리되고 나서 식으면 수조육류 특유의 냄새가 나고, 다시 데우면 오히려 냄새가 심해진다. 양념이 안 되다 보니, 양념이 들어갔을 때보다 냄새가 심하다. 음식에 간은 하지만 양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양념의 매운 맛이나 향이 영혼을 쫓아낸다는 믿음 때문이다. 무당들도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을 행할 때 마늘이나 고춧가루를 사용한다. 물론 무당 이야기 나온 것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근거 따위는 전혀 없다. 실제로 강한 양념을 하지 않는 것은, 양념을 강하게 하는 것이 상스러운 것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이거나, 혹은 강한 양념 자체가 제사 풍습이 확립된 다음에 들어왔기 때문[23]. 그 향신료로 귀신을 쫓을 수 있느냐 마느냐는 모든 종교의 바탕인 신과 귀신의 실존을 증명할 수 없는 이상 믿음의 문제니 넘어갈 일이다.

거기다가 남아서 냉장고에 넣어 두면 냉장고의 냄새까지 밴다(...) 밀폐용기나 지퍼백에 넣어둔다면 어느 정도는 괜찮지만, 대부분의 집이 비닐봉지에 대충 담아놓는 환경을 생각한다면 지못미.(...)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먹다 버린 것 같은 느낌이나 음식에 상한 냄새가 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팁을 적자면, 수제 냉동식품처럼 취급하면 된다. 이삼일 안에 먹을 것은 냉장실에 보관하고, 그 후에 먹을 것은 전을 한입거리로 잘라 비닐백에 골고루 소분해 넣어 꽁꽁 얼리면 된다. 집에서 만들었는데 양을 줄여도 전이 남아 골치라면, 손님이 돌아간 다음, 한 번에 소분 냉동해도 된다.
1) 바닥에 신문지를 넓게 깔고, 전바구니와 도마를 놓고, 도마 주변에 롤백 비닐봉지 10~30개를 주머니처럼 입을 벌여 놓는다.
2) 전바구니에서 전을 종류별로 적당한 갯수씩 주머니에 나눠 담는다. 큰 전이면 한입거리로 잘라 나눈다.
3) 롤백 한 봉지에 들어갈 분량은 한 번에 먹을 양. 되도록 프라이팬 하나로 데울 양을 넘지 않는다. 한 봉지에 전 여러 종류가 골고루 들어가도록 한다.
4) 김치냉장고에 꽁꽁 얼린다.
먹기 전날 냉장고 냉장실에서 해동한다. 이게 가장 좋다. 급하면 꺼내 전자레인지에 1차 해동한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조금 두르고 데워 식사나 도시락 반찬으로 사용한다. 즉석냉동식품과 다를 게 없다.

나물류와 탕국은 가능한 재료를 섞어 육개장을 만드는 것도 방법.

그리고, 음복 때에는 제사에 쓰인 술인 제주[24]를 제사에 참여한 모든 구성원들이 한 잔씩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민짜"들이 공개적으로(…) 술맛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25]물론 이런 데 엄격한 집안에서는 이럴 때도 아이들에게 술을 못 마시게 한다.

그래도 어른들 입장에서 장점을 찾아보자면, 소위 "주도"를 훈육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첫 술은 이렇게 순한 술로, 어디 어두침침한 양아치 소굴 말고 이렇게 중인환시리에 환한 자리에서, 적당히 긴장 타면서 배우게 하는 것이 지극히 바람직하다. 처음 술버릇이 평생의 술버릇에 미치는 영향이 정말 지대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명절에 차례나 성묘를 하고 제주로 음복을 하고는 음주운전을 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명절날 큰 묘지 주변에선 낮시간에도 음주단속을 하기도 한다. 아무리 소량이라도 술은 술인 만큼 운전할 사람은 제주를 마시지 말자. 단속 이전에 안전 문제다. 조상님들한테 제사 지내러 왔다가 다음 제사부터 조상님들과 같이 제삿밥 먹을 수도 있다

현대 이전에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는 명절, 잔치와 함께 음식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기회가 음복이기도 하였다. 아래 내용의 '헛제삿밥'의 기원으로 이를 꼽기도 한다.

영혼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의식이다보니 어른들이 "남의 집 젯밥은 함부로 얻어먹으면 안 된다"고 충고하는 경우가 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남의 집 젯밥을 먹음은 곧 남의 집 귀신과 한솥밥을 먹은 셈이기 때문이다. 자기 조상님도 아니고, 남의 조상님 귀신과 한솥밥을 먹는다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비슷한 이유로 무당들도 제사를 지낸 음식에는 귀신이 붙어 먹으면 부정을 탄다고 하여 일절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본토와 문화가 다른 제주도 토박이 가문들은 예외로 지인의 집 제사에 참석하거나 하는 경우도 허용된다.

그러나 저것은 와전된 감이 있다. 오히려 기독교도같은 서구에서 들어온 종교를 믿는 신자는 타 종교의 세례를 받았다 할 수 있는 제사음식을 꺼릴 수 있지만, 제사를 지내는 집들은 남의 집 제사음식을 먹는 것을 꺼리지 않기도 한다. 왜냐 하면 원래 제사음식을 많이 하는 것은 혈족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동네사람들이 (절은 하지 않았다 해도 남의 집 제사음식을) 나눠먹었기 때문에 생긴 풍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혈연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회생활하며 알게 된 사람의 일로 문상가서 얻어먹는 밥도 따지고 보면 그런 음식이다.

가문별 지역별 특색

제주도에서는 제사를 식게라고 부른다. 균분상속의 전통이 남아있어 시집간 딸과 사위도 제사에 참석한다.[26] 자녀가 생기면 자녀도 동행하므로 외손자가 제사에 참석하는게 유별난 일이 아니다.[27] 뿐만 아니라 친구를 제사에 초대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제주도 사람이 제사에 초대한다면 혈족만큼 친밀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된다.
제주도에서만 상에 올리는 음식들이 있다. 빵[28], 빙떡 등. 갱도 생선국[29]으로 올린다(주로 생선미역국). 지역특성상 어적도 빠지지 않고 올린다. 적갈 재료는 주로 상어, 오징어, 옥돔. 명절 때 차례상에 만두를 올리지 않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 술 대신 음료를 쓰기도 한다고.
경북 지방의 경우도 제주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지방에서 보기 힘든 돔배기 같은 음식이 제사에 올라온다. 제사 음식들 중에서도 비중을 상당히 높게 치는 편. 집안에 따라서는 문어도 삶아서 올린다.
안동시에는 헛제삿밥이라는 음식이 있다. 안동의 제삿밥이 맛있기로 유명하자 그곳에 부임한 미식가 관리가 이를 원하였는데, 아랫 사람이 실제 제사에 쓰인 음식은 아니고 같은 재료로 똑같이 만들어 대접하자 관리가 이를 먹고서는 "향이 나지 않으니 진짜 젯밥이 아니구나(헛제삿밥)[30]"라고 하였다고 한다.
신숙주의 본관인 고령 신씨의 일부 집안에서는 제사상에 숙주나물을 올리지 않는다.
일반적인 제수와 달리 종묘제례나 사직제례에 쓰이는 제수에는 익히지 않은 날 것과 양념하지 않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종종 산신제나 일부 종중에서도 볼 수 있는데, 산신제에서 이렇게 올리는 것은 유교의 영향이다. 산신제에는 고기를 잘 쓰지 않으나, 이는 현재 대부분의 산신각이 절 안에 있는 것도 있고, 남자 산신에게만 고기를 올리는 곳도 있다. 강원도 영월군의 태백산 산신제에서는 쇠고기를 쓰는데, 이는 영월에서 사망한 단종을 태백산 산신으로 존대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이후 제사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남성, 특히 장남이 지내는 것으로 인식되나, 현대에는 평등 의식으로 인해 형제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지내거나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발의 가문인 광산 이씨 문중에서는 칼로 고기나 무를 썰 때 '정철정철정철...'이라고 외운다고 한다. 이발의 가문은 정여립의 난 때 정철의 주도로 철저하게 숙청당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정철에 대한 원한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의 제사상엔 소고기가 올라가지 않는다. 이이가 생전에 소를 사람들이 부려먹으니 소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명재 윤증의 직계인 파평 윤씨 노종파 종가의 제사상은 엄청나게 검소한데[31], 이는 "제사상에 손이 많이 가는 전과류나 기름이 들어가는 전을 올리지 말라"는 유훈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남부 해안 지방에는 명절 차례를 당일날 아침에 지내지 않고 이전인 전날 저녁이나 밤(자정 직후)에 지내는 곳이 있다.
경남 서부 내륙 지방 에서는 소고기 산적 대신 돼지 수육을 쓰며, 닭고기 산적 대신 삶은 달걀이 쓰이기도 한다.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음식

유교의 가르침에는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데 귀신 운운하는 내용이니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민간이나 도교에서 내려오는 풍습이다. 즉,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
복숭아 - 귀신을 쫓아낼 때 사용하는 과일이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 무속으로부터 유례된 풍습일 가능성이 높은데, 복숭아 나무로 만든 목검이나 제기로 귀신을 쫓기 때문이다.
고춧가루, 마늘 등의 양념/향신료 - 고춧가루, 마늘의 냄새가 귀신을 쫓는다고 하여 제사 음식에는 간만 해두지 양념을 하지 않으며, 소금조차 넣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만 오늘날에는 치면 눈에 확 띠는 고춧가루는 사용하지 않지만 실고추는 사용하는 집도 있고, 후추, 생강, 마늘처럼 색이 없는 것은 얼마든지 쓰는 집이 많다.
팥이 들어간 음식들 - 귀신을 쫓아내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치' 자가 들어간 음식들 - '痴(어리석을 치)', '恥(부끄러울 치)' 와 같은 음이어서 부정하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치 자가 들어간 생선을 올리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이 생선들은 격이 떨어지기 때문에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치킨

제사상 놓는법 쉽게 기억하기

신주를 중심으로 첫 열에 밥, 2번째에 메인요리 (적), 3번째 열에 탕, 4번째 열에 반찬, 마지막 열에 디저트라고 생각하면 쉽다. 우리가 평소 밥 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제사 지내는 입장에서는 이걸 거꾸로 보니 (첫열에 디저트) 외우기가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사상 놓는 법이 아니다. 고인이 좋아하던 것으로 차릴 수도 있고 후손들, 특히 어린이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어린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차려도 무관하다.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

단순히 집안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35]가 아닌, 말 그대로 특정 이유 때문에 제사만 할 수 없는 경우들이다.
개신교 신자(여기서 갈라져 나온 여호와의 증인 포함)와 무슬림들: 이쪽은 제사 자체를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 숭배라며 금지시킨다. 개신교에서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드린다. 만일 자신이 개신교 신자일 때는 웃어른께 정중히 설명하자.
천주교 신자의 경우는, 상술했다시피 여러가지 원칙을 지킨다면 조건부로 제사를 지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교식 제사'는 지낼 수 없다고 보면 된다. 제사를 드리려면 천주교식 제사법을 따르거나 신주, 축문, 합문 등을 없애야 한다.
항목에 나오듯이 예외도 많은데, 가령 무슬림이 전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유목민적 전통도 적잖게 남아 있는 터키 같은 경우 제사와는 다소 다르지만 고인의 무덤을 방문해 성묘하고 의식을 치르는 풍습이 있다.
성매매 여성: 전근대에는 부정하기 때문에 제사에 참석하면 무례하다 하여 자발적으로 또는 집안에서 강제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임산부: 절하는 것이 몸에 무리가 간다는 이유로 대개 금지된다. 만삭인 경우라면 더더욱.
하반신장애인 등 일부 지체장애인: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절을 할 수 없어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 과거 주리틀기를 당한 죄수들이 적장자라도 폐적된 이유. 부상을 이유로 다리나 발에 깁스를 한 경우에도 동일하다.
고인이 사형수인 경우: 북한에서 사형수는 반역자로 취급되어 '반역자는 제사를 지낼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금지하고 있다. 이게 걸리면 노동단련대로 끌려간다.

원래 제사를 지낼 때에는 심신이 청정해야 한다 하여 목욕제계를 한다거나, 음식도 비린 것을 먹지 않거나 하는 등 준비과정이 있었다. 제삿날에 남의 집에 문상을 갔거나 집안에 병자가 있거나 하는 경우에는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예법에서는 심지어 관리가 형벌에 관련된 문서를 처리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제사를 앞두고 남에게 벌을 주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심신의 청정'을 깨트리는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야깃 거리

현대 한국은 교육열이 강해지면서 자녀가 외국어고등학교나 과학고등학교 등 특수목적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중3이라거나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3이라면 그 해 제사를 포기하기도 한다. 실제 사례로, 외국어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제사를 포기한 경우가 있었다.[36] 고시생이나 공무원 준비생들 역시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제사 참석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과 관리요원, 검토위원이 합숙 기간에 제사가 걸려도 합숙 기간 중에는 외출이 금지되기 때문에[37] 참석하지 못한다. 수능뿐 아니라 공무원 시험이나 각종 자격면허 시험에서도 출제위원, 관리요원, 검토위원들은 제사가 걸려도 못 간다.[38] 일단 나랏일이 이유가 되면 가문의 제사는 나중에 간단히 성묘를 하든 여의치 않으면 건너뛰어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해당하는 당사자는 참석하지 못해도 허물이 아니라고 인정된다. 탁구선수 유승민은 제삿날에도 경기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올림픽 선수들은 올림픽 기간에 제사가 껴 있으면 메달을 노리기 위해 대부분 불참한다. 이들은 ‘비록 절은 못 올리지만 조상님이 내 메달을 보면 더 기뻐하실 거다’라는 마인드로 불참한다고.
KBO 리그에서도 제사와 관련된 사건이 있었다. SK 와이번스의 2군 코치가 이만수 당시 감독에게 부친의 제사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받으려 했는데 이만수가 김성근 감독의 허락도 없이 OK를 했고, 이를 알아차린 김성근 당시 1군 감독은 제사 참석도 장수가 전쟁 중에 전쟁터를 비우는 행위로 간주해 “어딜 감히 장수가 전쟁 중에 전쟁터를 비우냐”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는 차례나 기제사를 지내게 되면 전국, 적어도 두 광역시권에 흩어진 친척이 모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구제역이나 MERS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같은 전염병이 생기면 제주 일가만 간소하게 지내기도 한다. 집안에 임산부와 환자가 있는 경우도, 집에 따라 아이가 아직 돌이 되지 않은 경우도 마찬가지로 참석하지 않거나 부르지 않는다. 제사가 학기 중의 평일이나 시험기간에 걸려 있으면 대부분 불참한다.
실향민들은 대부분 임진각 망배단[39] 등 북녘이 보이는 곳으로 가서 제사를 지낸다. 댐 건설로 고향이 수몰되거나[40] 이런저런 시설을 짓는 과정에서 고향이 철거된 지역 출신[41] 등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실향민들은 고향을 북한 지역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제사상의 동서남북은 실제 방위와 다를 수 있다. 같으면 좋겠지만 건물 구조상 불가능한 경우, 제사상의 방/신위가 있는 곳을 북쪽, 지내는 사람이 있는 곳을 남쪽, 동쪽은 지내는 사람의 오른쪽, 서쪽은 지내는 사람의 왼쪽으로 설정한다. 전통가옥이면 대청마루가 남향이니까 맞지면 현대는 그냥 신위가 북쪽이다.
놀부는 제물 대신에 종이에 음식 이름을 써서 올렸다. 조선 후기 주자가례가 널리 보급되면서 사당을 지을 능력이 되지 않는 집에서는 사당을 그린 그림을 대신 걸고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놀부는 재력도 있으면서 구두쇠라 아끼려고. 그 다음 해에는 제기 위에 그냥 동전을 올리고, 그 다음 해에는 무려 신위를 들고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며 음식 앞에다가 신주를 들이 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도 등장인물마다 다르게 묘사된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가난한 선비가 제사는 지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조상님의 신주를 들고 시장을 돌아다녔는데, 그날 밤 꿈에 조상님이 나타나 배불리 먹어 만족스럽다며 은덕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다.
제사 날짜는 대부분 음력으로 계산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에서는 양력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성균관 문묘에서 행하는 석전대제와 종묘 제례는 양력으로 계산해서 치르고 있다. 석전대제는 9월 28일(공자의 탄신일)과 5월 11일(공자의 기일), 종묘제례는 매년 5월의 첫째 주 일요일에 행한다. 양력을 중심으로 한 생활 습관에 익숙한 세대가 늘면서 음력으로 치르는 집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2월 29일이 제삿날이면 4년에 한 번[42]씩 제사를 지내게 된다. 이렇게 되면 평년에는 2월 28일이나 3월 1일로 땜빵하거나 음력으로 환산한 날짜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음력으로 윤달이 제삿날이면 날짜를 영원히 못 찾을 수 있으므로[43] 무조건 양력으로 지내야 한다.
한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 여자는 두루마기를 벗고, 남자는 두루마기를 입어야 한다. 여자는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도 되지만 남자의 경우 바지저고리 차림(생활한복은 제외)이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현대 시중에서 파는 아동한복의 90% 이상이 두루마기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냥 저고리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다.
양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면 남자는 와이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넥타이를 맨 뒤 블레이저를 입으며, 여자는 블라우스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블레이저를 입는 것이 원칙이다. 즉, 와이셔츠나 블라우스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다만 장례식장에서 철저히 지켜지는 것과는 달리 제사나 차례에서는 지키지 않는 집안도 많다. 교복이 한복이 아닌 이상 교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도 양복과 동일하게 적용된다. FM(?)을 중시하는 집안이 아닌 한, 단정한 차림이면 모두 허용하는 집도 많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이고 유교적인 제사문화가 완전히 정착하기 이전이라, 절이나 무당에게 땅이나 노비 등의 재산을 제사비용으로 주고 제사를 대리하는 경우도 흔했다. 이런 풍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유교적 제사문화가 강화되어 없어졌으나, 유교의 영향력이 약화된 현대에는 부활하여[44] 점점 성행하고 있는 중. 때문에 불교 집안이라도 자주 다니는 절에 제사를 맡기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도 있다. 혹은 명절법회라 하여, 명절마다 절의 신도들이 한데 모여 합동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고려 말기에는 유밀과가 크게 유행했는데, 불교 국가인 고려의 특성상 살생을 터부시하다 보니 대충 동물 모양으로 유밀과를 올리던 게, 점점 과일대신 과일 모양 유밀과도 올리고, 모양도 점점 호화로워지니 보다못한 조정에서 유밀과 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게, 전통 한과는 제조하는 데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과 문서 참조.
천도교에서는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위패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다만 일반 가정에서는 그다지 엄격하게 지키지는 않는 듯.
홀수가 상당히 중요하다. 수를 셀 수 있는 제물들(ex-과일, 송편, 포 등)은 절대 짝을 맞춰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제물 준비를 할때 밤을 10개를 샀다 해서 10개를 다 놓느냐 하면 10개는 짝수기 때문에 1개는 남겨놓고 9개만 올리는 방법이다. 사실 이는 음양의 철학문제로, 땅에서 난 것은 음의 속성을 가졌으므로 홀수로 놓아 고인과 더불어 음양의 조화를 꾀했다고 봐야한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난 것, 이를테면 새 종류는 원래 짝수를 놓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홀수로 놓아야 한다'는 규칙만 살아남은 것.
현대에는 인간이 아닌 생물에게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유교적인 의식보다는 추모 행사에 가까운 것. 개인이 생전에 아끼던 애완동물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나 혹은 의학 및 생물학 연구를 위한 실험 과정에서 희생된 생물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 등이 있다. 또한 대구 치맥 페스티벌은 닭들을 위한 위령제를 개막행사 때 진지하게 지낸다.
북한에서도 봉건적인 잔재라고 해서 없애려고 노력을 했고, 많은 가족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고, 80년대 이후 당국의 허용으로 제사를 다시 지내는 가족이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많은 북한 사람들은 여전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조상에 대한 예라고 해봐야 무덤에 가서 꽃을 바치고 묵념하는 정도이다. 제사를 할 경우 남한에서는 제사 때 2번 절하지만 북한에서는 3번 절한다. 다른 점은 사형수에 대한 취급인데, 남한에서는 고인이 사형수라고 하더라도 유족이 원하면 제사를 지낼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사형수는 반역자로 취급되어 '반역자는 제사를 지낼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제사를 못 지내게 하고 사형수의 제사를 지내려다가 걸리면 노동단련대로 끌려간다. 이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유현주가 증언했다고 한다. 유현주가 증언한 해당 사례는 그녀의 고향인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공개처형을 당한 사형수의 제사를 지내려다 발각된 가족이 두들겨 맞고 6개월짜리 노동단련대로 끌려간 사례였다.
남의 집 제사를 방해하면 제사방해죄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제사방해에는 제사장소에서 떠들거나 제사상을 뒤엎거나 제사를 진행할 수 없게 하는 행위등이 있다. 정말로 남의 집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면 제사방해로 졸지에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으며#, 최악에는 3년 이하의 징역도 가능하다.#
무슬림은 샤하다[45]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제사상에 절하는 것을 이슬람교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라며 죄악시하기 때문.[46] 개신교의 경우는 워낙 신학적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제사에 대한 의견이 갈린다. 교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은 제사를 금지한다.[47]
사제(司祭)라는 직명을 직역하면 "제사를 맡는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사실 이 말은 기독교 신학적으로 보더라도 절대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동양식 제사'와는 목적도 형식도 모두 다르다. 자세한 것은 미사, 성찬예배, 감사성찬례 참조.
설날이나 추석 때 합동 차례를 지내는 군 부대도 있다. 대상은 설날이나 추석 때 휴가를 안 나가는 부대원 전체(...). 부대 분위기에 따라서는 병들은 명절 안 그립겠냐? 지휘(자)관이 모범 안 보일 거야? 간부들(특히 지휘관, 참모, 주임원사)도 상당수가 명절 땐 휴가를 못가고 당직이 아님에도 부대에 출근해서 이 행사를 같이 치뤄야 한다. 특히, 차례상 차리는 거 감독해야 하므로 조리 부사관들은 태생적으로 명절 당일 반일 정도는 의무적으로 출근해야 한다. 축구대회 등 단결행사로 이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높으신 분들은 명절 연휴 중 병들 무료하게 놔두면 고향 생각에 우울해지거나 심심함을 못 이겨 사고 친다고 여겨서 일부러 고생시킨다는 카더라가 많이 퍼져있다. 다만 실제로는 사서 고생을 시킨다기보다는, 명절 때 이런저런 이벤트(?)를 많이 하는 것이 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이런 이벤트들은 휴가나 외박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작정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힘을 내보자. 배에서 생활하는 해군의 경우에는 함정에서, 공군은 활주로 위에서 차례를 지낸다고 한다. 지휘관이 대인배인 경우는 종교별로 병들을 분류하여 각자의 종교에 따른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종교적으로 제사가 허용되지 않는 병들은 안 해도 된다.[48]
교도소에서도 설날, 추석에는 차례를 지낸다. 이를 "재소자 합동차례"라고 부른다. 물론 모범수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BC3000년경 갑골문 연구로 은나라의 왕이 자신이 왕이 되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주변에 있는 토착종교를 싸그리 배척하고 왕의 조상만 섬기게 하는 문화를 만들었고, 이에 대해 일어날 불만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자기 조상을 섬기면 날씨도 좋아지고 전쟁도 이기고 하는 일마다 잘된다고 하였다. 그러다 은나라는 주나라에 멸망 당하는데 주나라가 자기 나라도 졔례의식을 잘 받아들이고 은나라의 제사담당자를 불러들인다. 그러면서 주나라에도 조상숭배 문화가 퍼진 것이다. 그러다 춘추전국시대 공자의 등장으로 유교의 영향아래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으나 해당 주장은 유학에 매우 비판적인 김경은 교수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부분은 고려해서 판단하자.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정치가였던 안영은 "유자(儒者)들은 복상(服喪)의 예를 중시하고 가산을 기울여서라도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는데, 만약 그것을 백성들이 본받게 된다면 이 또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주문왕(周文王)은 이미 가셨고 왕실까지 쇠퇴한 지 오래 되었는데도 지금 유자들은 의례(儀禮)를 성대히 꾸미고 번잡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세상에 옛날의 예를 부활하려고 하더라도 헛수고에 끝날 것은 명백합니다."라고 하며 제사의 폐단을 지적했다.
제사음식에 특별한 제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알려지기 시작하자 제사상에 피자, 스테이크, 치킨 등의 신세대 음식이나 양식을 올려서 조상님들이 다양한 음식을 맛보게 해드리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집안도 있다.
윤달에 사망한 사람의 제사는 처리 방법이 복잡하다. 윤달이 있는 해에만 지내는 경우[49]도 있고, 윤달이 없는 해에는 평달에 지내고 윤달이 돌아오면 그 윤달에 지내는 경우[50]도 있고, 평달에 지내는 것은 맞지 않으니 다음 달 초하루에 지내는 방법[51]도 있다.
음력 11월 중순~12월 중순이 기일인 경우 윤달 배치에 따라 한 해에 두 번 제사를 지내는 해와 아예 제사를 지내지 않는 해가 나타나기도 한다. 2003년 12월 30일이 음력 12월 8일이었으므로 이 날 제사를 지냈다면 2004년에는 윤2월[52] 때문에 건너뛰고 2005년 1월 17일에나 다음 제사가 오는 셈이다.
일부에서는 장애인들이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다.
기독교에서의 제사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에서 제사의 대상은 하느님 뿐이며, 이 제사를 집전하는 이를 사제라고 칭한다. 가톨릭과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에서는 사제가 미사와 성찬예배를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로서 바친다. 개신교에서는 예수가 사제인 동시에 십자가 위에서 제물이 되어 한 번의 완전한 제사를 이뤘으므로 더이상의 제사는 무의미하다는 신앙을 갖고 있으며, 사제의 직위 또한 부정한다. 다만 성공회의 경우는 좀 복잡한데, 사제 계급이 존재하며 감사성찬례라는 제사를 드리지만, 평신도 또한 일상 생활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거룩한 사제와 제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신앙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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