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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0. 10. 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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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의 전설적인 카리스마
'엠넷 레전드 100 아티스트'에서의 소개문구

대한민국의 가수로 자타공인 197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으로서 라이벌인 남진과 함께 한 시대를 양분했던 슈퍼스타이다. 트로트 보컬로 주로 유명세를 탔지만, 수많은 히트곡을 직접 작곡해서 히트시킨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한데, 히트곡만 무려 120곡이 넘는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노래방 반주기에 수록된 곡이 가장 많은 가수다.

나훈아는 히트곡의 숫자에서도 국내 최다는 물론이고, 앨범 발표수만 해도 무려 200장 이상, 800곡 이상의 자작곡을 포함해서 2600곡 정도의 취입곡을 자랑한다. 이처럼 나훈아는 트로트의 황제, 가황(歌皇)이라는 별명이 정말 잘 어울리는 가수다.

1966년에 '천리길'을 발표하며 데뷔하였다...는데 데뷔년도를 빨리 올리기 위한 이야기로 추정된다. 실물 음반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가장 오래된 실물 레코딩 노래는 1968년 8월 16일 내 사랑이 확인된다. 천리길은 1969년 5월 29일 발표되었다. 2020년 KBS에서 진행한 콘서트 준비를 하며 본인이 데뷔 54년 가수 생활이라고 언급 한 것을 보아 본인은 1966년 데뷔를 확실시 하는 듯.

나이

47년생으로 익히 알려져 있으나 어린 시절에 데뷔한 것으로 인해 험한 연예계에서 얕잡아 보일까봐 나이를 올린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1947년생이 아니다. 남진도 조용필을 통해 나훈아의 나이를 전해들은 바를 이야기 한 적이 있으며 1960~1970년대 LP들에서 나이를 소개할 때 1950년, 1951년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남진의 해당 발언이 담긴 최일구의 허리케인 라디오에 달린 나이 관련 내용을 조사한 댓글이 있다. 아래는 해당 댓글과 관련 증언들을 언급 기사들과 함께 정리한 것.
"호적상에는 1951년생임. 그러면 호적이 4년이나 늦게 올려져 있다는 얘기인데 본인과 가족들 만이 진실을 알고 있겠지요. '53년 생이고 부산 출신이며 지금까지 부산에 살고 있는 저는 초량 초등, 부산 대동중 출신 친구들이 몇명 있는데 그 들은 우리 두해 선배로 기억 하더군요.
나훈아가 대동중학교 시절 야구를 했는데 청소년 야구대표팀 감독과 포철공고, 서울고 야구팀 감독을 역임한 유태중(대동중 18회, 1967년 2월 졸업)과 동기였다고 하며 허구연 야구 해설위원(1951년생, 경남중 24회 1967년 졸업)이 'MBC FM4U 두시의 데이트, 박경림입니다'(2013.12.27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중학교 때 나훈아가 야구선수로 뛰었다. 나는 부산 경남중학교, 나훈아는 부산 대동중학교에서 선수생활 을 했다"면서 장기자랑을 할때 노래를 정말 잘불렀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중학교 선배인 이희수 감독 (1948년생) 역시 나훈아가 그 당시 빼어난 실력을 가진 내야수였다고 기억을 한다. 2001년 매일경제 기사에도 언급된다.
서라벌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호랑이 그림 화가로 유명한 서양화가 이목일 (1951년생, 서라벌고 13회 1970년 졸업) 화백은 '그 시절부터 이미 노래 하나는 끝내줬던 인물'로 기억한다. “1학년 때 우이동 골짜기로 봄소풍을 갔었어요. 그때 홍기(나훈아의 본명)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불렀는데 함께 소풍 왔던 이웃 동덕여고생들까지 환호성을 질러 골짜기가 온통 함성으로 뒤덮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결국 이후 가수로 데뷔한 이 자랑스러운 홍기를 위해 친구들이 너도나도 엽서를 사서 방송국에 신청곡을 보내던 기억이 새롭습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냥 일반인 증언도 아니고 허구연, 이목일 등의 같은 시절 중학교를 다닌 사람, 고등학교 동창 그것도 같은 반 친구되는 양반들의 직접적인 증언과 조용필 등의 발언을 종합할 때 1951년생 말고는 달리 언급 할 방도가 없다. 특히 이희수 감독이 1948년생인데 도저히 1947년생이 맞을 수가 없다. 1945년생인 남진과의 라이벌 구도를 위해서라도 47년생까지는 끌어올리는 것이 당시엔 이득이었을 것이고.

특징

묵직하고 중후함이 느껴지는 저음과 특유의 절묘한 고음, 이를 활용하면서 나오는 트레이드마크인 꺾기로 대표되는 나훈아 특유의 창법은 가요계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으며, 수많은 가짜 나훈아를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유달리 나훈아의 노래는 가수가 자기만의 색을 입혀서 노래하는 것이 엄청나게 부담되는 노래로 유명한데, 나훈아의 노래를 소화하다보면 자칫하면 어설픈 모창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이나 나훈아의 창법은 엄청나게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9]

대부분의 히트곡이 본인이 작사하고 작곡한 곡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 의해 작곡된 히트곡도 꽤 많다. 일례로 2005년에 발표한 "고장난 벽시계(윤중민 작사, 박성훈 작곡)" 같은 곡은 의외로 나훈아가 작사 작곡을 하지 않았다. "행운", "남자라 울지 못했다" 등. 자작곡 중 다른 가수에게 준 곡도 있는데 이중에서 유명한 노래로는 <땡벌> (강진이 부름)이 있다. 사실 "땡벌" 은 나훈아가 1987년에 이미 직접 불러서 발표했었다. (당시 땡벌을 부르는 나훈아 방송 영상) 또한 1991년에 원로가수 정원이 "인생은 본전" 이라는 이름으로 가사만 바꿔서 불렀다. 나훈아는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잘 주는 편은 아니다. 땡벌 외에는 이자연이 부른 "당신의 의미", 심수봉의 "여자이니까" 등이 대표적인 곡이다. 자작곡 전반을 보면 평생에 걸쳐 블루스와 민요를 트로트에 접목한 형태의 음악적 시도를 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가창력 만큼이나 자타가 공인하는 장점은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무대 장악력과 무대 연출능력을 꼽을 수 있다.

콘서트에서 한 팔만 들면 자기가 작사 또는 작곡한 노래이고 작사와 작곡을 다 한 노래를 부를 때는 양 팔을 위로 올리는 퍼포먼스를 취한다.

대표곡

사랑: "이 세상에 하나 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아내들이 남편에게 듣고 싶어하는 노래 1위. 각종 대중가요 관련 조사에서 빠지지 않고 상위권에 선정되는 국민 애창가요이다.
영영: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 그런데도 아직 난 너를 잊지 못하네"
데뷔 25주년 기념 앨범의 타이틀곡.
울긴 왜 울어: "울지마 울긴 왜 울어 고까짓것 사랑 때문에"
1982년 [나.훈.아 1982' 3집] 앨범의 공동 타이틀인 '울긴 왜 울어'와 '잡초'는 동반히트를 기록했는데, 이 두 곡은 모두 뽕짝, 트로트 등의 단어로 불리며 쉽게 폄하되기 일쑤던 한국 성인가요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노래들이었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잡초: "아무도 찾지 않은 바람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
무시로: "이미 와버린 이별인데 슬퍼도 울지 말아요"
일본어라고 오해받지만, 무시로의 뜻은 정한 때가 없이 수시로라는 단어이다. 2011년 백지영이 나는 가수다에서 열창해 재조명을 받았으나 그 후 모종의 문제로 2017년까지 음원서비스를 하지 않았던 비운의 곡. 최근 저작권 협의가 되어 들을 수 있게 됐다. 박우철 그리고 훗날 조항조가 불러 유명해지게 된 '남자라는 이유로'의 모티브가 되어 다시 화제가 되었다.
고향역: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나훈아의 무명시절을 날려 준 곡.
공: "살다보면 알게돼 일러주지 않아도"
물레방아 도는데: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번 보고"
대동강 편지: "대동강아 내가 왔다. 을밀대야 내가 왔다"
1981년 발표곡으로 오랜만의 컴백 앨범이었다. 당시 보기 드물었던 8페이지 풀컬러 화보집이 LP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태양음향 전속으로 발매.
갈무리: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몰라"
1989년 발표곡으로 나훈아가 재기할 수 있게 해 준 결정적인 곡 중 하나.
홍시: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엄마가 생각이 난다"
1992년 후배 가수 김지애의 앨범에 '석류가 웃는 이유'로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김지애의 앨범에 레퍼토리로 자주 나왔음에도 뜨지 못 했고, 나훈아 본인이 리메이크하여 대박이 나자 김지애가 아예 수록곡으로만 치부했던 곡으로 새 앨범을 내서 활동 중이며, 나훈아 모친을 회상하여 추모하는 곡으로 많은 이들이 이 노래를 듣고 떠나가신 어머니와 부모님을 생각해 눈물을 흘렸다는 댓글이 많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가사가 너무 애절하고 어머니를 추모하는 가사이기 때문이다.[10]
애정이 꽃피던 시절: "첫 사랑 만나던 그날 얼굴을 붉히면서"
천리길: "돌뿌리 가시밭길 산을 넘어 천리길"
나훈아의 첫 데뷔곡[11]으로 한동안 큰 인기를 누렸지만 배호의 노래 ‘황금의 눈’을 표절했다 하여 문제가 되었고, 이후 새로운 홍보곡으로 내세운 노래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었다.#
너와 나의 고향: "미워도 한 세상 좋아도 한 세상"
머나먼 고향: "머나먼 남쪽 하늘아래 그리운 고향"
강촌에 살고 싶네: "날이 새면 물새들도 시름없이 나는"
해변의 여인: "물위에 떠있는 황혼의 종이배"
어매: "어매 어매 우리 어매 뭣할라고 날 낳았던가"
감나무 골: "산제비 넘는 고갯길 산딸기 피는 고갯길 재 넘어 감나무골"
인생길 나그네길: "사나이 한번나서 고향에만 살수있나 젊어서 한때라면 고생을 사자"
사랑은 눈물의 씨앗: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첫 히트곡은 '천리길'[12]이었으나, 이 곡은 표절시비가 있었으며#, 나훈아를 가수로 부상시킨 곡은 '사랑은 눈물이 씨앗'[13]이었다.#
가라지: "간다면 누가 너를 못 보낼 줄 알고 가라지 누가 너를 잡을 줄 알고"
사내: "큰 소리로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 가진 것은 없어도 비굴하지 않았다"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사랑했어요. 당신을 사랑이 이렇게 아픈줄도 모르고 당신을 사랑했어요"
18세 순이: "살구꽃이 필때면 돌아온다던 내 사랑 순이는 "
건배: "냉정한 세상 허무한 세상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세상은"
모정의 세월
나훈아의 '모정의 세월'은 1972년 TBC 드라마 《어머니》의 주제가로 쓰였으나, 노래는 흥행하지 못했다.# 무명가수였던 한세일(본명: 박현진)이 1973년 이 곡을 리메이크하면서 히트를 거두고 MBC 10대 가수 신인상까지 차지했다. 관련 기사
고장난 벽시계
이 곡은 2005년에 나훈아 데뷔 40주년 기념음반에 수록된 곡으로, 당시 트로트 작곡가들의 헌정음반 비슷한 개념으로 몇 곡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한 곡이다. 즉 나훈아 본인이 작사작곡을 하지 않은 곡.(윤중민 작사 / 박성훈 작곡) 발매 당시에는 이런 곡이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으나, 2008 ~ 9년을 전후해서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게 된다. 이 외에도 당시 앨범에 같이 수록된 곡으로는 "남자라 울지 못했다", "행운", "너도 역시 여자였구나", "발코니에 앉아서" 등이 있다. 나훈아 본인이 작사 작곡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곡들은 이후 현철을 비롯한 다른 가수들이 많이 리메이크해서 불렀다. 워낙 리메이크가 많이 되어서 중장년층 뿐만 아니라 20.30대 젊은 층도 한번쯤은 들어본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노래이다. 이 노래를 너무 좋아해서 이름을 손고장난벽시로 개명한 아저씨가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전파를 탄 적이 있다.
땡벌
흔히 트로트 곡 제목 '땡벌'이라고 한다면 강진이 부른 노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나훈아가 부른 곡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나훈아판 땡벌과 리메이크 땡벌은 가사 내용이 다소 차이가 있다. 또한 트로트 가수들끼리도 다른 가수가 히트친 곡을 자기만의 색깔로 리메이크해서 출시하는데, 나훈아 버젼이 아닌 강진이 리메이크한 가사와 구성을 바탕으로 리메이크를 하는 일이 잦다.
녹슬은 기찻길: "전해다오 전해다오. 고향 잃은 서러움을 녹슬은 기찻길아"
1972년에 발표한 이 노래는 끊어진 경의선 철길을 ‘녹슬은 기찻길’로 표현해 실향민의 아픔을 드러냈다. (한국경제신문)
평양 아줌마
이 곡은 1985년 대한적십자사와 북한 적십자사의 주최로 분단 40년 만에 처음 남북 이산가족 교환 상봉 및 남북 예술단 교류로 나훈아, 하춘화, 김희갑 등 많은 연예인과 MC, 국악인 등 예술인들이 평양을 방문하고, 북한 예술인들이 처음 서울에서 공연을 개최한 역사적인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나훈아가 평양 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이 곡을 작사, 작곡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곡이 발표되고 방송과 공연에서 불리우자 많은 실향민과 탈북자들이 고향 생각을 하며 울었다고 한다.
청춘을 돌려다오
발표 당시 가수 신행일의 노래로 녹음됐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80년대 들어 나훈아와 현철이 다시 불어 비로소 히트됨.
고향으로 가는 배
2017년 11월 3일 나훈아 Dream 서울 콘서트에서 지난 2월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피살된 북한의 김정남 얼굴을 스크린에 띄우고는 "난 정치를 모르지만 이 사람이 생전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10번 불렀다고 한다"며 '고향으로 가는 배'를 부르기도 했다.
팔자
인생의 팔자를 표현한 곡으로 하루를 살아도 열심히 살자고하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
불길
가지마오
라디오에서 나오기 시작하며 엄청난 히트를 쳤던 나훈아의 '가지마오'는 원곡이 있는데 박철이라는 가수가 불렀다. 자세한 사연은 '나훈아 - 가지마오 (1970) (1970 박철 원곡 포함 Karaoke)' 설명에서 확인하자.
님 그리워
1969년 노래로 사촌지간인 가수 나진기씨가 가요무대에서 불렀고 다른 가수들도 많이 부른다.
남자의 인생
2017년 11년만에 컴백하면서 발표한 타이틀 곡. 현대적인 느낌의 가사와 중장년 층 남자의 삶에 대 하여 나훈아 특유의 구성진 목소리와 새로운 느낌 의 신곡.
몰라
아이라예(아닙니다)
찻집의 고독
70년대 발표한 곡. 서정적인 가사로 남녀의 애틋한 마음을 그 시대의 분위기에 잘 맞게 세련된 느낌으로 부른 곡. 나훈아씨가 젊을 적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부르다 괴한에게 흉기로 칼을 맞아 얼굴을 다쳤던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왠만한 공연에서 이 노래만 부르면 그때가 생각난다해서 잘 안부른다.
아리수
2005년 한강 아리수 기념으로 만든 곡. 무대위에 말을 타고 갑옷을 입고 부르면 그 모습이 천하제일대장군이다.
아담과 이브처럼: "난 그냥 니가 왠지 좋아 이유도 없이 그냥 그냥 좋아"
먼저 솔로곡으로 발표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후에 탤런트 배종옥과 듀엣곡으로 부르면서 히트하게 되었다. 2001년 취입, 동명의 KBS 일일드라마 삽입곡이기도 했다. 나훈아씨의 감성적이고 로맨틱한 면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곡. 래퍼가 피처링한 버전도 있다. 2001년 명예의전당 무대에서 가수 장나라씨와 이지훈씨가 이 노래를 헌정곡으로 불러 나훈아씨의 미소를 자아냈다.
낙엽이 가는 길
나훈아씨가 가진 가을 노래 중 몇안되는 가을 곡.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간간히 너를 그리워 하지만 어쩌면 너를 잊기도 하지"
나훈아 씨 특유의 창법과 애절하고 예쁜 가사로 만들어진 곡. 1998년 IMF 외환위기 시절 발매되어 나훈아가 90년대에도 건재함을 알렸다. 발라드 풍의 곡으로 수많은 남녀 커플이 이 노래를 좋아한다.
오로라
인도풍 느낌이 나지만 나훈아 특유의 간드러지고 감성적인 목소리가 느껴지는 애절한 느낌의 노래.
꿈속의 고향: "가고파도 갈 수없는 고향이기에"
한백년: "이왕에 만났으니 한백년은 살고 갑시다"
행복을 비는 마음: "차라리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후회: "내가 먼저 사랑하던 그 사람 버려놓고"
공항의 두 얼굴: "떠날 시간 남겨놓고"

활동

오빠부대, 요즘은 빠라고 불리는 무리들이 많았던 인기 가수였다. 전성기 시절에도 상당한 인기가 있었고, 2010년대인 현재에도 트로트 가수 인기순위에서 최상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정말 많다. 2008년 기자회견 후 잠적. 11년만에 복귀하여 2017년 하반기 본격적으로 공연을 시작하였다. 현재 다시 성인가요 시장의 불을 지폈다.

1970년대

사실 7, 80년대를 기준으로 두 가수의 행보는 조금 차이가 있다. 1973년 7월 비밀리에 공군 병사로 자원 입대, 군악대에서 복무하였다.

1980년대 

1980년 초반대에는 나훈아씨가 세번째 부인이었던 정수경 씨와 혼인하여 가정생활을 하였고. 대표적으로 '사랑'이라는 노래를 작사작곡하였다. 그 후 87, 88, 89년도 무시로, 갈무리 등을 발표하며 히트를 쳤고 방송사에 얼굴을 가끔씩 비췄다,

1987년, 5.18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젊은이들이 안타까워 망자의 어머니들에게 바치는 노래 '엄니'를 직접 작사작곡했다. 나훈아는 곡을 쓴 다음 광주시 망월동 5.18 묘역(현재 구묘역)에 참배하고 '엄니' 테이프 2,000개를 광주 MBC 방송국을 통해 제작 후 5.18 유족들에게 배포하려고 했지만, 정권의 방해로 실패한다. 이 '엄니'는 결국 33년이 지난 2020년에야 발표되었다

1990년대

1993년 당시 남진은 '내 영혼의 히로인' 등을 히트시키며 또 한번 주목을 받았으며, 나훈아는 '갈무리',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등 히트곡들을 내고 꾸준한 몸관리와 공연 등이 알려지면서 그 이후로도 더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젊은 층에게 꾸준히 어필이 된 듯. 방송 출연이 없어서 그렇지 어르신들 사이에서 나훈아의 인기는 여전했다. 이런 차이는 남진은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도 워낙에 많은 방송 출연과 공개 활동으로 이미지가 일찍 소비된 반면에, 나훈아는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신비주의 전략으로 포장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지상파 TV에선 매년 명절 때마다 나훈아를 모시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2000년대

2000년대 이후로 또 다시 둘의 상황은 정반대가 되는데, 남진의 경우 1999년 '둥지', 2005년 '저리가', 2008년 '나야 나' 등의 노래를 히트시키면서 꾸준한 활동을 했다.

나훈아는 간헐적인 콘서트(나훈아 빅콘서트라는 명칭으로 전국 순회 공연)외에는 방송출연 등의 연예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칩거생활을 반복했다. 이후 2006년의 순회 콘서트가 2007년 3월 예정된 단독 콘서트 취소로 마지막 공연이 되었고, 이후 유명한 인터뷰 사건 이후로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2008년 야쿠자 테러설 기자회견과 2013년 이혼 소송과 투병이 알려지면서 심경이 복잡한 듯. 나훈아가 2008년 이후 칩거에 들어간 반면 남진은 2008~2010년에 걸쳐 대한가수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각종 방송에 출연하며 1970년대 당시의 라이벌 구도에 대한 증언 역시 남진의 입장을 중심으로 정리되었고, 굳어지게 되었다. 나훈아는 계속 칩거하면서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는 중이었다. 덕분에 나훈아 팬들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측면이 있다. 게다가 2008년 기자회견에서 격한 퍼포먼스가 세월이 지나서도 계속 패러디되고 있었다.

2010년대

11년만의 공백기를 깨고 2017년 7월 16일 앨범 "Dream Again"으로 컴백했다. 그동안 나훈아 앨범은 오프라인 매장에서만 구입할 수 있었지만, 이번 신곡 앨범은 7월 17일 12시부터 온라인에서 노래를 다운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유튜브에서 타이틀곡인 “남자의 인생”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유튜브 영상

2017년 11월 3일부터 11월 5일, 총 3일간 서울 올림픽공원 內 올림픽홀에서 단독(게스트無) 공연을 선보인다.
2017.12.15 ~ 2017.12.17 대구 EXCO 컨벤션홀, 2017.11.24 ~ 2017.11.26 부산 벡스코오디토리움에서 공연이 차례로 이어질 예정이다. 티켓예매는 온라인으로만 진행되었고 전 티켓이 7~10분만에 매진되었다고 한다. 사재기를 해서 되파는 사람들을 적발해 티켓을 회수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는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며 재판매를 하기도 했다.

공연시간은 120분. 서울 공연 첫 날에 관한 기사에 따르면 아무런 말 없이 10곡 넘게 노래만 부르던 나훈아는 ’에끼 이사람이’ 무대 뒤 비로소 관객들에게 직접 인삿말을 건넸다고 한다. 그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죄송하다. 미안한 마음은 구석에 놔두고 얼굴을 두껍게 하고 공연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팬들이 환호로 위로를 하자 나훈아는 “노래를 11년 굶었다”며 “계속하자 하면 밤새도록 노래할 준비가 돼 있다” 고 전했다.

이어 “그동안 지구 다섯 바퀴를 돌았다. 미국에서는 한국 라디오에 ‘사나이 눈물’이 흘러나와 울기도 했다”고 밝혔다. 나훈아는 “우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나이 눈물’을 부르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관련기사1 관련기사2 관련기사3

컴백과 동시에, 그동안 음원사이트에서 서비스되지 않았던 음반들[15]이 서비스되고 있다. 특히 2000년대에 발표한 인기곡인 "고장난 벽시계", "홍시", "모르고" 등의 곡들을 음원사이트에서 내려받을 수 있게 되어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2017년 서울, 대구, 부산 콘서트의 대흥행으로 2018년에는 20개도시 전국투어를 추가로 개최했다. 2019년엔 5월부터 투어를 돌게 되는데 이번에도 부모님을 위한 자식들의 예매 전쟁이 불꽃을 튀기며 전개되었고, 결국 5월 공연분 3만장이 8분만에 매진되었다고 한다

2019년 5월 3일에는 새로운 앨범 "벗2" 를 발표했다. 2005년 발표한 40주년 기념앨범인 "벗"의 후속 개념으로, 1곡을 제외하고 모두 다른 작곡가가 쓴 곡으로 채운 앨범이다.

2019년 5월 17일부터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 3일 무대를 시작으로 전국투어 콘서트를 가진다.

여담으로 이 서울 콘서트의 둘째날인 5월 18일 공연의 진행이 후배이자 인기 아이돌 그룹인 여자친구의 콘서트 첫날 타임과 완전히 겹치며 귀갓길 올림픽공원역과 몽촌토성역, 그리고 일대 도로에 큰 혼잡이 벌어졌다. 그만큼 나훈아의 팬덤과 인기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2020년대

2020년 8월 20일 새 앨범 ‘2020 나훈아의 아홉 이야기’를 발표했다. 신보 '나훈아 아홉이야기'에는 '내게 애인이 생겼어요', '명자!', '테스형!'[16], '딱 한 번 인생', '웬수', '감사',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모란동백', '엄니'까지 총 9곡이 수록되었다.
나훈아 측은 "반갑지 않은 손님 코로나19가 온 세상을 휘젓고 가까운 사람마저 선뜻 손 내밀지 못하게 하는 삭막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까지는 다치게 내어 줄 수 없다"며 "신곡을 포함한 아홉 곡의 노래 한 곡 한 곡에 따뜻한 이야기와 삶의 해학을 담아 여러분께 전한다"고 했다. 이어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에 많은 이의 마음이 따뜻해져서 다시 한 번 힘내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2020년 9월 23일 저녁 7시 30분에 인생 최초의 비대면 공연을 개최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고 응원하고자 마련된 콘서트로, 이 공연은 9월 30일 KBS 2TV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를 통해 전국으로 송출되면서 15년 만에 TV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다. 과거 여러 언론 매체에서 잘못된 루머를 퍼뜨려 큰 홍역을 치른 적이 있어 언론사들을 매우 불신임하기도 했고 이로 인해 다시는 방송에 출연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언급한 적도 있어서 그에게 있어서 큰 도전인 셈이다.[17] 게다가 KBS 측으로부터 출연료도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과거 기자회견 이후 다소 안 좋아진 대중적인 이미지도 많이 회복할 듯하다.[18]

그리고 이 무대는 상당히 화려한 연출로 화제거리가 되었으며, 올레TV 점유율이 70%를 넘겼고 # 닐슨코리아 기준 실시간 순간 시청률 41.44%를 기록했다. #1 #2 #3 #4[19] 특히나 나훈아를 그냥 옛날 가수나 '5분간'으로만 알고 있던 젊은층 시청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선사하며 온라인상에서 엄청난 화제에 올랐다. 이처럼 예상을 초월한 반응을 얻자 KBS는 10월 3일에 이 공연을 8개월간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긴급 편성했다.

그는 방송에서 자신이 신비주의라는게 가당치도 않다고 일축했다. 예술적 창작력이 고갈되었다 느껴서 영감을 얻기 위해 11년간 세계를 떠돈 것을 가지고 은둔한다 그러고, 또 신곡 앨범을 만드는 데 짧게는 반년 길면 1년은 걸리는데 작업한다고 안 보이면 잠적했다 그러고 심지어 요새는 뇌경색이니 못걷는다느니 하는 얘기까지 나왔는데 자신이 건강해서 얼굴을 못들 정도라고 언론을 향한 불만을 익살맞게 표현했다.

또한 공연 도중 IMF 외환위기, 코로나 사태 등을 언급하면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저력을 칭송하기도 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힘듭니다. 우리는 많이 지쳐있습니다. 저는 옛날의 역사책을 보든 제가 살아오는 동안에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나라를 누가 지켰냐 하면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이 나라를 지켰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유관순 누나, 또 진주의 논개, 윤봉길, 안중근 열사[20] 이런 분들 모두가 다 보통 우리 국민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IMF 때도 이 세계가 깜짝 놀라지 않습니까? 집에 있는 금붙이 다 꺼내서 팔고 나라를 위해서.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세계에서 제일 1등 국민입니다.
한국일보 조선일보 고발뉴스

그리고 KBS를 향해 “저는 이번에 공연을 하면서 처음 겪는 일이 많습니다. 특히 우리 KBS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소리를 듣고 같은 소리를 내는 정말 이것저것 눈치 안보고 정말 국민들을 위한 방송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여러분 기대하십시오. KBS 거듭날 겁니다.”라고 발언했다.

라이벌 남진과의 비교

남진과 나훈아는 1970년대부터 라이벌로 경쟁했고, 두 사람의 팬덤도 갈라져 있었다. 마침 언론 및 대중들이 두 사람을 라이벌 구도로 만들기 딱 좋은 차이점들이 여럿 있었다. 남진은 수려한 외모에 호방한 목소리로 대중성이 강했고, 나훈아는 상대적으로 외모가 투박했으나 싱어송라이터로 음악성을 어필하는 느낌이 강했다. 노래의 성격 역시 남진은 도시의 세련된 이미지를 담은 가사를 주로 사용한[21] 반면 나훈아는 고향에 대한 향수나 시골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담은 가사를 주로 사용했다. 두 사람의 집안 배경조차 대조적이어서 나훈아는 부산 출신의 서민 집안이지만,[22] 남진은 전남 목포 출신의 매우 부유한[23] 집안이었다.

두 사람의 상반된 외모 차이와 분위기 탓에 양쪽 팬덤에서도 라이벌 대립각이 만들어져서, 당시 공연장에 가면 남진 팬들은 나훈아에게 '소도둑놈 저리가라'고 외치고, 나훈아 팬들은 남진에게 '돼지 멱따는 소리 치워라'라 외치며 공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80년대 칼럼 두 사람은 '어머님 생전에(1973년)'같은 영화에 나란히 출연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남진이 인기가 좀 더 많았지만 나훈아가 후에 부각되며 라이벌로 불리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예술적인 곡을 많이 작곡, 작사를 한 나훈아는 가수, 예술가로서 확실한 자리를 잡는다.

남진 콘서트도 매번 매진되지만 나훈아 콘서트는 티켓은 발매를 개시하자마자 10초도 안 되어서 동나기 때문에 콘서트 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에 가깝다. BTS, 이승환[24], 한국시리즈 7차전[25] 급으로 티켓 예매하기 어려우며, 아들 딸 전부 동원해서 예매를 해도 성공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이것은 활동노선의 차이도 있다. 나훈아는 극도의 신비주의로 신곡을 발표하는 텀도 길게 두고,[26] 신곡도 오직 콘서트에서만 들을 수 있다. 반면 남진은 가요프로 출연도 잦고 후배들과 자주 협업하는 등 트로트 가수치고는 다작하는 편이다. 팬 입장에서는 '반드시 콘서트에 가야 할'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이는 가수로서의 각자의 철학에 따른 것이기도 한데, 나훈아는 '저 하늘 위의 별'로서 본인을 포지셔닝한 반면 남진은 어디까지나 '대중의 친구'를 지향했다.[27] 누가 맞고 틀린게 아니라 애초에 두 사람이 가진 가수로서의 가치관이 다른 것.

개인사

아버지가 무역선 선원이었기 때문에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195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음에도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온 축음기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그 덕에 형과 더불어 부산에서 서울의 서라벌예술고등학교로 유학을 올 수 있었다. 여기서 보듯 원래는 성악가를 목표로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작곡가 심형섭이 오아시스 레코드의 손진석 사장에게 소개해줬고, 그가 LP판을 무료로 녹음시켜주겠다고 하면서[28] 대중가요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래 중학교 때까지만해도 공부를 잘했던 그가 의사나 판검사 같은 엘리트 직업을 갖기를 바랬던 그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관련 인터뷰
1972년 6월 4일, 어느 스토커 같은 이에게 테러당해서 한동안 입원한 적도 있다. 사이다 병 파편으로 왼쪽 얼굴을 찔렸는데 무려 70여 바늘이나 꿰맸고 지금도 그 흉터가 남아 있다. 이 사건을 남진이 사주했다는 소문이 돌아서 한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남진은 "재론할 가치조차 없다"고 잘라말했으며, 남진이 관련됐다는 증거도 없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라이벌인 남진도 테러당한 적이 있다. 남진 문서 참조. 1990년대 TV에 나와 과거를 회상할 당시 가수 위기를 겪었다고...
영화배우 김지미가 나훈아의 재능을 크게 사서 예절과 서예 등 다방면에 걸쳐 가르쳤다. 그 덕분에 현재도 나훈아는 서예에 능하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연인 사이를 유지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나훈아는 훗날 "김지미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준 사람"이라 평했다. 김지미도 "진정 남편으로 믿고 의지할 남자였다"라고 평했다. 나훈아는 김지미와 헤어질 당시 그녀에게 수천만 원의 돈을 건넸는데 "여자 혼자 살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시엔 이혼한 여자 혼자 살기 힘든 세상이긴 했지만 나훈아의 군자다운 면모가 보이는 일화. 한편으로 김지미와 나훈아의 혼인이 화목했던 기간은 별로 길지 않았으며, 김지미는 주위에 간혹 나훈아와의 혼인이 조금 후회된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내용을 말한 적도 있다. 원래 둘은 평범하게 식당을 경영하면서 살고 싶어했지만 나훈아가 가수로 복귀하면서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고.
김지미와 이혼 후 가수 정수경과 동거를 하다 첫째 아들을 얻었고 1983년 연말에 3번째 결혼을 한다. 1988년 둘째 딸이 태어났으며, 정수경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1993년 하와이로 거처를 옮기며 나훈아는 기러기 아빠 생활을 시작했다. 2007년 아들의 결혼식에 나훈아가 불참한 이후로 둘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2008년에 일본 야쿠자와 여배우 K[29]를 놓고 시비가 붙어 고자되기를 당했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헛소문이 너무 돌자 이런저런 의혹에 답변하고자 1시간짜리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정말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기자회견을 어느 정도 진행하다가 "제가 지금부터 이 위에 올라가서,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하더니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고 단상 위로 올라갔고, 그 자리에서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서는 "자, 지금 여러분들 중에서 대표로 얘기해 주십시오. 제가 내려서 5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믿으시겠습니까?"라고 하며 원한다면 아예 바지를 벗어 증명하겠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한 것. 당연히 기자회견장은 그가 단상에 올라갈 때부터 술렁이고 셔터가 미친듯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 때 나훈아의 팬들이 나훈아를 굳게 믿는다고 외쳐서 진짜 바지를 내리지는 않고 끝나게 되었다.

글로만 보면 우스운 해프닝처럼 보일 법 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초강수였다. TV에 많이 나와야 인지도를 쌓고 돈을 많이 버는 연예인들은 이때만 해도 진짜 누구 뒷배가 있지 않는 한 기자들 앞에선 그냥 일개 광대 취급을 받았다. 기자가 기사 한 줄만 작심하고 써도 힘 없는 연예인은 잘못하면 연예계에서 강제 은퇴당할 수도 있을 정도로 권력의 추가 언론에 기울어진 그런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전 언론사 기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기 할 말 하고 더이상 다른 사람 괴롭히지 말라고 기자들에게 일갈한 나훈아의 이 퍼포먼스 덕에 여배우 K나 고자 스캔들은 싹 사라져버렸다. 반면 기자들은 이전에 루머 유포에 앞장선 것도 있고 이 때 나훈아가 저렇게까지 하는데도 사진이나 찍느라 바빴다는 것 등도 포함해 기레기 소리를 들으며 욕만 실컷 먹었다. 나훈아는 추가로 인터뷰에서 "여러분(기자)들이 펜으로 사람(연예인들)을 죽이는 겁니다."라고 다시 한 번 강하게 비판하기까지 했다.
대중문화 기자 백은하는 이 퍼포먼스를 "땅으로 내려왔던 셀러브리티가 그렇게 다시 하늘에서 빛나는 별로 올라갔다."라고 평했고, 음악 평론가 차우진은 "이런 카리스마는 어떤 지도자에게서도,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과연 교주님이라 외칠 만하다."라며 극찬했다. # 200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 네티즌이나 기자들의 명예훼손, 허위사실유포, 모욕 등에 대해서 연예인들이 무대응하는 것이 관례[30]였으나 나훈아의 이 기자회견 이후로 서서히 법적대응을 하는 기조로 바뀌었다.#
한 때 개그맨 황기순의 첫 번째 부인 불륜 상대가 나훈아였다는 소문이 돈 적도 있는데 이 역시 그냥 루머인 채 끝났다.
2012년 12월에는 인도와 티베트를 돌아다니며 심신을 달래고 있었다고 한다. 지인이 말한 바로는, 거의 도사의 모습이 됐다고.
2013년 1월, SNL 코리아 최민수 편에서 최민수가 패러디하기도 했다. 다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뭘 패러디 한 건지도 알 수 없게 자연스럽게 스토리에 녹였다.
2013년 4월 세 번째 부인 정수경과의 이혼 소송에 들어갔다. 제1심에서 승소했으나 정 씨 측에서 상고를 결정했다. 또한 지병이 있다는 게 알려지고 칩거했고, 양평에 있던 자택도 내놓았다고 한다.
나훈아의 아내 정수경이 2014년 10월 8일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나훈아도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한다. 결국 조정 절차 거쳐 이혼에 합의 하였고 재산분할로 12억을 지급했다.

그외

체력과 폐활량, 근력이 남달랐다고 한다. 저음을 불러도 단순히 목소리 내리깔며 부르는 게 아닌, 힘있는 저음처리였기 때문에, 이를 보고 반하는 음악팬들도 있었다고.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 따르면 삼성 일가가 개인적 파티에서의 공연을 요청했을 때 유일하게 거부한 연예인.[31]
"나는 대중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공연하겠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표 끊어라"고 했다고. 더불어 1990년대 연예인들의 정치 입문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당시 여당이던 민주자유당에서 권유한 정계 입문을 거부하면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난 가수가 천직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스타란 하늘의 별과 같아야 한다며 신비주의를 장려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가수는 꿈을 파는 사람인데 가수의 뒷무대가 보여지면 환상이 깨질 수 있다고 말하였다. 덧붙여 본래 슈퍼스타는 30%의 안티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연예계 최고의 슈퍼스타답게 시장의 생리를 꿰뚫고 있는 발언이라 할 수 있다. 100% 충성팬을 가진 셀럽이란 있을 수도 없고,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이슈에서 멀어지기 쉽다는 것을 함축한 한 마디다.

이게 정말 신의 한 수인 것이 전성기를 보낸 후 라이벌이었던 남진과 비교를 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단 나훈아는 방송에 나오지 않는다. 나훈아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콘서트 밖에 없다. 당연히 콘서트 수요가 늘어날 수 밖에 없고 이로 인해 나훈아 콘서트는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에 비견 된다. 그에 비해 남진은 평소에 쇼 예능 등의 티비 프로에 워낙 얼굴을 자주 비추다 보니 이미지가 너무 소모된 측면이 있다.[32]
다만, 2020년 10월 1일 KBS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콘서트에서 나훈아는 김동건과의 토크에서 자신의 입으로, 자신에게 신비주의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고 밝혔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작사, 작곡을 하기 위해 꿈을 채우고 많은 책을 읽는 등 단단한 준비를 하므로 6개월 이상의 제법 긴 준비기간을 갖게 되는데 이 사이에 언론이 떠들며 신비주의라 윤색한 것이라고. 또한 해당 인터뷰에서 언론들이 자기가 뇌경색에 걸려 걷기도 어렵고 말도 어눌하다던데 이리 멀쩡히 걸어다니는 게 미안해 죽겠다며 농담을 섞어 언론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훈아의 곡은 내일은 미스터트롯 에서 인기가 있다. 본선 1차전과 레전드 미션을 제외하고 그의 노래가 꾸준히 선곡이 되었으며 특히 미에 오른 이찬원이 중요한 고비마다 울긴 왜 울어, 18세 순이 등 나훈아의 곡을 불러 높은 인기를 얻었다.
노래방 책에 가장 많은 곡을 올린 가수다. 2위는 쿨. 덕분에 저작권료가 월 5,000만 ~ 1억원이라고 한다.
야구선수 강정호가 나훈아와 닮아있다. 강정호에게 한때 붙었던 별명이 '목동 나훈아'였지만 강정호 본인이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물론 지금 강정호가 어떤 위치로 추락했는지 생각해보면 강정호를 나훈아에 빗대는게 엄청난 실례겠지만(...)

70년대에는 수려한 외모의 남진에 비해 투박한 외모로 평가받았으나, 현재는 푸근한 아저씨상이 된 남진에 비해 카리스마 있는 미중년의 모습이 되었다.
2017년 나훈아 컴백무대인 "나훈아 Dream 콘서트"가 서울특별시, 대구광역시, 부산광역시에서 각 3일씩 열렸는데 온라인으로 예매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쉽게 티켓을 예매를 할 수 있도록 전용 페이지도 개설하였다. 그 동안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으로 실력을 다져왔던자녀들은 부모님들의 재촉에 티켓 판매를 기다라며 예매를 했고 인터넷에서는 나훈아 콘서트 티켓을 구했느냐 못 구했느냐로 효자 불효자가 나눠진다며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결국 서울 콘서트는 3분만에, 대구와 부산 표까지는 10분만에 매진되었고 예매당일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18년 팬들의 성원에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깊은 고민을 했다며 앙코르 공연과 전국 순회 공연을 추진하였다. 2월 8일 오전 10시부터 전용 홈페이지에서 표를 구입할 수 있고 이번에도 전석이 초고속 매진되었다. 앙코르 공연은 같은 장소인 서울(올림픽홀/ 3월23~25일), 부산(벡스코 오디토리움/ 4월13~15일), 대구(엑스코 컨벤션홀/ 4월 20일~22일) 에서 이루어진다. 몇몇 공연 후기에 따르면, 효도하기 위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가 본인이 입덕하고 말았다라는 평이 나올 정도로 공연의 퀄리티가 우수하다고. 실제로 커뮤니티에서 장문의 리뷰글이 많이 올라온다.
2019년에도 상반기 전국 투어 콘서트 일정이 잡혔다. 공연 장소 및 일정은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5월 17일~19일),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6월 8일~9일), 대구 엑스코 1층(6월 15일~16일), 청주 청주대 석우문화체육관(6월 29일), 울산 동천실내체육관(7월 6일). 지난 공연 예매와 마찬가지로, 3월 20일에 열린 서울 공연 온라인 티켓팅도 3분만에 매진되었다. 이번에도 효자판독기 명성에 걸맞는 고난이도 피켓팅. 그리고 본인과 공연 주최측이 서울시내버스에 매진 감사 광고를 내기도 했다.
사촌지간인 나진기가 KBS2 방송 가요1번지 무대 나훈아 편에서 강진 씨와 나와 나훈아 씨의 어릴적 비하인드 이야기에 대해 많이 나눴다. 영상
월간조선 2002년 1월호 오효진의 인간탐험 나훈아 인터뷰 기사
공연료가 부르는 게 값인 단 3명 뿐인 가수 중 하나이다. 나머지는 가왕으로 유명한 조용필, 대한민국 가요계를 완전히 천지개벽하게 한 서태지이다. 철저하게 신비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셋의 공통점이기도 하다.[33] 이에 나훈아는 2020년에 코로나로 힘들어하는 국민들을 위해 추석 기념으로 콘서트를 TV로 방영하였다.
디에고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수염을 기르고 백발이 섞인 머리를 하여 나훈아를 닮았다며 마라훈아라고 불리기도 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구에 익명으로 3억 원의 통큰 기부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
KBS 개그맨 정태호가 신인 시절에 나훈아를 따라했다. 폭소클럽2에서는 나훈아를 패러디한 나온나로 등장했으며 개콘에서도 간간히 나훈아를 따라했다.
199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 공천을 제의받았지만 자신은 정치보다 노래 부르는 것이 더 알맞다고 거절했다. 정치인들이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뭘 하면 나라에 도움이 되는지"를 생각 않고, 자기 당이 한 석 더 차지하는 것에만 관심있다고 비판적인 태도를 비쳤다. #
1996년 나훈아는 일본 오사카에서 공연을 하며 노래중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당당히 부른 적이 있다. 공연 마무리로 2천여 관중과 함께 '쾌지나 칭칭나네'를 합창하면서 그 가사 안에 즉흥적으로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말을 넣어 부른 것. # 이후 한국에서의 인터뷰[34]에서 나훈아는 일본 우익세력들에게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훈아는 그 협박범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때리 직일라면 지기삐라(때려 죽이려면 죽여버려라)". #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에서 앞으로 어떤 가수로 남고싶냐는 이훈희 KBS 제2본부장의 질문에 자신은 "흐를 유, 행할 행, 노래 가, 유행가 가수다. 남는 게 웃기는 거다. 뭘로 남는다는 말 자체가 웃기는 얘기라고 생각한다"고 답하며 어떤 가수로 남을지에 대해선 관심도 없다며 호쾌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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