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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1. 12. 31.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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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羅蕙錫, 1896년 4월 28일 ~ 1948년 12월 10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차미리사와 같은 여성지식인로 평가받았다.[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정월(晶月)이다.

조선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출생으로 수원 삼일소학당과 서울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하여 서양화를 전공했다.[] 귀국 후에는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지내기도 했고, 김일엽과 함께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 발행하기도 했다.

작품 세계

작품경향은 크게 2기로 나눌 수 있는데, 프랑스 파리에 가기 이전에는 주로 사실적인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으며, 그 뒤로는 야수파와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아들인 한결 참신한 수법을 보였다.

그의 작품 <자화상>. 30년대에 그린 이 유화는 서구적 신여성의 우아한 자태를 묘사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나혜석의 <자화상>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1930년 당시 이처럼 창조성이 내포된 자화상은 단 1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도, 표현, 색상 모두 놀라울 정도로 뛰어납니다. 천재 화가를 포용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죠."라고 평하였다.

작품 <해인사의 풍경>은 겹겹이 두꺼운 붓질로 사물의 윤곽과 초점을 흐린 나혜석의 독특한 기법이 발휘되고 있으며, 화면 전면의 탑뒤로 대웅전의 일부가 보인다는 평이 있다.

예술의 전당 정형민 전시예술감독은 “예술적 수준을 논하기 이전에 나혜석의 공간과 시간속으로 다가가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하는 작가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나혜석은 프랑스 파리의 야수파계 미술연구소에서 새로운 예술성에 눈을 떴다.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로 표현해냈다.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강렬하게 구사하였다. 그의 풍경화에는 섬세한 필선, 밝고 고운 색조, 구도의 신선함을 활용하였다

1921년 그가 <개벽(開闢)> 제13호에 발표한 목판화 <개척자>는 한국 근대 판화의 효시의 하나로도 손꼽힌다.

친구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이광수와의 작품경향에 대한 비교도 이루어졌다. 그에 의하면 "이광수의 유학생 주인공들이 거창한 문명개화의 구호를 외치면서도 소설 안에서는 공허한 동어반복만을 되풀이하는 데 비해 나혜석의 글쓰기는 대중을 선도하기보다 대중과 공동의 체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술과 자아, 감성이 하나가 되는 ‘삶의 본질’을 누렸다"는 평도 있다.

나혜석은 그림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감각을 담은 소설과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18년 도쿄 여자친목회 기관지 <여자계>에 발표된 소설 「경희」는 일본 유학생인 신여성이 구여성을 설득하며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실감있게 그리고 있는 자전적 소설로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염상섭, 김동인,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등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고백체 소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기반으로 한 성적인 금기에 도전했으며 1920년-1930년대의 소설의 사조이기도 했다. <경희>는 이러한 고백체 소설들 가운데 가장 빼어난 소설로 꼽힌다.

시 <노라를 놓아주게>에서는 유교의 삼종지도를 비판하였다. <노라를 놓아주게> 등에서 그는 가부장제 하에서 아버지만을 따르고, 남편만을 따르고, 아들만을 따라야 된다는 것이 잘못임을 비판하였으며, 아버지의 착한 딸, 남편의 착한 아내, 아들의 좋은 어머니 역할을 인형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1937년 10월에 발표한 <어머니와 딸>에서 나혜석은 자신이 이혼 직후 머물렀던 어느 하숙집에서 본 구식 어머니와 신식 공부한 딸의 갈등을 표현하였다.

임신•출산으로 여성이 갖는 좌절 및 고난과 자신의 외도 사실을 상세하게 고백한 나혜석, 배신당했던 일을 고백했던 김일엽, 성폭행 피해 경험을 고백하고 그랬던 자신을 글로 유린했던 남성 문학인들과 맞선 김명순 등 절절하게 자신들의 아픔을 세상에 드러냈던 여성 작가들은 탕녀로 낙인찍혀 문학사에서 매장된 반면, 이들을 탕녀로 만드는 일을 주동했던 김동인, 김기진 등의 남성 작가들은 이전까지는 어떠한 평가나 굴곡 없이 근대 고백소설의 모범으로 문학사에 기록되었으나, 현재의 학계에서는 해당 작가들의 행동과 관련된 논의가 펼쳐지고 있다. 2016년 문화계 성추문 폭로 사건이라는 큰 일을 겪은 현재 한국의 문학계가 앞으로 과거의 이러한 과오들도 청산할 수 있을지 지켜볼 필요가 있을 듯.

어린 시절

나혜석은 나 참판댁 또는 나 부잣집이라고 불리는 경기도 수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나기정(羅基貞)과 어머니 최시의(崔是議) 사이의 2남 3녀 중 넷째(차녀)였다. 동복 형제들 외에 나계석이라는 이복언니도 있었는데, 나기정이 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서녀였다. 나계석은 나혜석이 태어날 무렵, 13살의 어린 나이에 조혼을 했다.

나혜석은 부유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는 등 부족함 없는 삶을 보낸 것으로 보이지만, 개인적으로 그리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고위 관료였던 아버지 나기정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자녀들에게 신교육[8]을 받게 해주는 등 상당히 진보적인 엘리트처럼 보였지만, 시대적인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딸들에게는 정식 이름이 아닌 아명을 불렀고, 나혜석또한 진명여학교 입학 전까지는 정식 이름 대신에 ‘나아기(=나 참판댁 아기씨)’로 부르다가, 학교 입학 후에야 정식으로 ‘나명순'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또한 나기정은 본처 최시의 외에도 여러 여자들을 첩으로 두었다. 심지어 나혜석이 10대일 때, 나혜석보다 불과 1살 연상인 어린 첩을 두기도 했다. 그 어린 첩은 기생 출신이었는데, 가장인 나기정으로부터 총애를 받는다는 자신의 이점을 이용하여 최시의에게 온갖 갑질을 했다. 본처의 입장에서 첩에게 무시를 받는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결국 최시의는 남편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많은 고생을 했다.

이런 어머니를 가까이서 보며 자랐던 나혜석은 당시의 남성중심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 반감을 가졌다. 나혜석은 고통받는 어머니의 삶과 (아마도 1910년대에) 주변의 또래 친구들이 어린 나이에 강제적으로 시집보내져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절대 결혼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고도 한다.

성평등을 외치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시, 소설, 칼럼, 강연 등을 통해 '여자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하였다. 1927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을 때의 어느 날 그는 프랑스의 한 여권운동가를 만나 ‘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파리에 체류할 무렵, '남녀관계,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 혼자 계속 파리에 남기로 결심했다.'라고 했다. 또한 귀국 후 그는 여행기 <구미유기>에서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영국여성운동가의 활약을 알렸다. 인간평등에 기초한 참정권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정조, 이혼, 산아제한, 시험결혼 등 여성문제를 소개하였다.

그녀는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조선 신여성의 표본이 되었다. 그는 억압된 조선 여성들을 대변하고,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고자 했다.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라는 주장을 글로만 쓴 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실천한 것이다.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를 질타했던, 글과 그림으로 ‘여자도 사람’임을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그는 여자, 남자 이전에 사람이라며 여자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라며,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해줄 것을 거듭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일제, 보수적인 지식인과 노인, 유학자 등은 모두 그의 견해를 외면했다.

<섣달대목, 초하룻날>이란 제목의 연작은 여성들의 일상과 가사노동을 중심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섣달의 풍경을 담고 있으며, 계속해서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는 만평형식의 목판화에도 신여성·구여성의 고달픈 일상에 대한 연민을 나타냈다.

또한 그는 명절이 여자들에게만 일을 시키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했다. 나혜석이 1930년대 신문삽화 <섣달대목>으로 일찌감치 명절이 여성들에게 고단한 날임을 고발하였다. 그가 명절의 고단함을 지적한 것은 후일 명절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화두가 되기도 했다.

결혼을 여성을 억압하고 옥죄는 족쇄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는 '이혼의 비극은 여성해방으로 예방해야 하고 시험결혼이 필요하다.'라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칼럼을 <삼천리> 잡지에 기고하여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나혜석은 잘못된 결혼으로 불행을 야기하는 것보다는 시험 결혼이나 동거혼 비슷한 결혼을 통해 비극을 예방해야 된다고 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 서로 맞지 않는 결혼 생활을 억지로 유지하면서 불행을 억지로 참고 살아야 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가정폭력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는 여성 지인들에게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 알콜중독 남편 등의 가정폭력이나 구타를 억지로 참지 말고 이혼하라고 하였다.

몇 편의 시와 《규원》(1921년), 《현숙》(1936년) 등의 단편소설, 그리고 여러 편의 수필을 발표했는데 수필과 작품에서는 주로 인습의 굴레에서 고통받는 여인들의 삶을 그렸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그렇게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살림살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까지 담은 여러 논설들을 썼으며, 여성이 각성하고 사람답게 사는 길로는 교육과 계몽, 사회참여, 남자들로부터의 경제적 자립 등을 들었다. 그의 작품 중 《경희》는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기도 했다.

그녀는 인형보다는 인간이기를 원했던 여성이었다. 19세에 <이상적 부인>이란 글에서 현모양처론이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는 주의라고 주장한 바 있는 나혜석은, 40세에 쓴 글 <신생활에 들면서>에서도 여성의 정조는 취미일 뿐이지 도덕이나 법률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근대 사회로의 전환기, 개성의 확립이 문화계의 화두였던 시절 나혜석은 여성화가와 여성해방론자로, 그리고 여성작가로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마다가 조선 여성의 진일보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아이는 에미의 살점을 떼어먹는 악마' 라고 분노하던 그는, 모성애를 "사회가 여성에게 인위적으로 강요한 역할"이라고 주장하였다.[] 모성이라는 이름 아래 어머니는 수많은 희생을 감내한다. 그리고 이는 본능이 아니라 강요라는 것이다. 그는 모성애가 사회에 의해 학습되는 경향도 있다는 것을 처음 언급하였다. 그는 모성애가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강요되는 강요의 결과물로 파악하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도 비슷한 논지의 내용을 주장한 바 있다.

모성애 반론

나혜석은 여성에게 모성애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사회가 여성에게 인위적으로 억압, 강요한 역할이라고 규정했다. 여성에게도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의 자유와 성공 등의 욕구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현모양처는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인습이자 굴레라고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라 하였다. 그는 모성은 인간으로서 자식과 관계를 맺으며 쌓아가는 경험적 인간관계라 주장했다.

모든 여성은 모성애를 지니고 태어나는가, 학습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자 그는 모성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물이 자기 새끼를 버리는 것이라거나 새끼를 물어 죽인 수컷과도 관계하는 것을 하나의 예로 들기도 했다.

나혜석은 종종 '자식은 악마', 또는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 '자식은 모체를 희생시키는 존재'라고 규정하였는데, 자식을 악마라고 발언한 그의 발언들 역시 화제가 되었다.

그는 "모성애는 의무사항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나혜석은 결혼 1년 만에 첫아이를 낳았다. 그는 생각지도 못한 빠른 임신, 고통스러운 출산과 육아의 심경을 '모(母) 된 감상기'로 『동명』지 1923.1.1~21호에 발표한다. 여기에서 나혜석은 모성애가 본능이 아니라고 밝혔다. 이후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며, 모성애는 의무가 아니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1923년의 <모 된 감상기>에서 그는 자신이 “나열(羅悅)[]의 어미’는 '어미 될 때'로 '어미가 되기'까지의 있는 듯 없는 듯한 이상한 심리 중에서 '있었던 것을' 찾아 여러 신식 엄마들과 공유하고자 '그렇지 않습디까, 아니 그랬었지요?'라고 묻고 싶다”는 게 이 글의 취지였다. 즉 그는 '엄마'로서 겪는 여러 감정을 다른 엄마들과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사회가 강요하는 모성애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모성애는 의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모 된 감상기>에서 그는 자신의 임신 과정을 고백했다. 그는 입덧을 하면서도 자신이 임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했다. “그런 중에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움직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이 오싹해지고 가슴에서 무엇인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가끔은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로 설레고 기쁜 적도 있었지만, 촉망받던 예술가로서의 인생이 갑작스러운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헝클어져 버린 것에 대한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 더 컸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여성이라고 해서 임신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모성애가 생기는 것은 아니더라고 말한다. 나혜석은 임신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발표되자 지식인 남성들은 반발했다. '백결생'이라는 필명의 논객은 모성애는 숭고한 것이라며 "원래 임신이라는 것은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니 여성의 존귀가 여기 있고 여성이 인류에게 향하여 이행하는 최대 의무의 한 가지인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반박했다. 여기에서 그는 나혜석의 임신이나 육아의 의무를 방기하려는 태도라고 규정, 비난했다.[]

그러자 나혜석은 이에 자신의 감상기가 임신과 출산을 한 여성들의 솔직한 감정이라고 반박한다. 그래서 자신의 글이 분명 일부 여성들에게는 공감을 얻으리라 확신한다고 말한다.[] 모성애는 의무가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하자, 일부 지식인 남성과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나혜석은 "모든 어머니가 모성애를 가진 것은 아니며, 모든 여성이 모성애를 가진 것은 아니며, 모든 여성이 모성애를 가져야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하였다. 또한 사회가 여성에게 모성애를 강요한다고 반박하였다.

논쟁이 있은 후 훨씬 나중의 일이기는 하지만, 나혜석의 아들은 자신을 이렇게 적대시한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으며 원망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모성이 신화라고 주장하면서 정작 그 수단으로 아이를 학대한 부분에 대하여는 생각해 볼 만한 부분.

하지만 나혜석은 이혼 후, 자신의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남편 몰래 아이들을 찾아오곤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임신과 출산 그 자체에만 회의감을 품었을 뿐이지 친자식을 적대시하지는 않았던듯 하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는 아무리 좋게 쳐줘도 우리들을 버리고 우리들을 욕하며 적대하는 매정한 어머니 그 이상도 이하로도 보이지 않았으며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결국 자신의 생모에게 정이 다 떨어진 뒤였고 이로 인해 나혜석은 아이들을 그리워만하다 최후를 맞게 된다.

사랑과 결혼

나혜석은 전통과 근대가 충돌한 혼란스런 식민지의 과도기 상황에서 이상적인 사랑과 결혼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했다. 그는 결혼하는 것만이 올바른 선택은 아니라고 평하였다. 결혼 생활 중에는 이를 조심스럽게 내비쳤지만, 1930년 이혼 이후에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결혼 제도의 대안으로 독신 생활, 남자 매춘부[], 시험 결혼,[] 이성 간 우정과 같은 다양한 대안들을 제시했다. 그는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라며 "결코 마음의 구속을 당할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혼에 대한 편견과 색안경에 대해서도, 이혼 역시 하나의 선택에 불과하며 죄악이거나 잘못은 아니라며 반박하였다.

그는 "여자도 인간이다."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반복 되풀이하면서 여자들의 인권, 권리를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일부 글에서 가족애를 다룰 때에는 여성인권에 대한 의견을 모호하게 드러내기도 했는데, 이는 당대 상황에 지혜롭게 맞춘 현실주의적인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당시의 남자들의 가부장성은 무척 뿌리깊었고, 제도 자체는 개혁할 수 있어도 어릴 때부터 뿌리깊게 새겨진 성향은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연령과 관계없이 평등을 추구한다고 해도 중고생이 성인인 나에게 대뜸 반말을 쓰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저 당시는 여성이 독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데다 가정폭력 등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세간의 눈에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던 것. 그렇다면 사소한 가정생활에서의 자존심이나 주도권 정도는 조금 접어주고, 대신 남편에게 책임감을 더 부여하여 외도나 일탈을 통제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전략이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당시 여성들 중에서 꿋꿋히 주체성을 유지할 여성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신가정이 불화가 컸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즉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해할만한 이야기라는 것.

 

최후

자식들과의 정으로 가족과 사회적으로 멸시를 당하면서도 파리로 출국하지 않고 국내에 남았다고 한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 커서 말년에는 자식을 보고싶어 많은 시도를 했지만 결국 다 무산되었고 요양원에서 탈출하면서까지 자식을 보려 했으나 결국 길에서 쓰러져 발견되었으며, 1948년 12월 10일 저녁 8시 30분 서울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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