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정보 !

임재범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2. 9. 4. 14:03
728x90
반응형

대한민국의 록 음악, R&B, 발라드 가수이자, 한국 최초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의 1집 보컬리스트다.

1986년 서울고 동창인 신대철의 밴드 <시나위> 1집에 참여하여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부르면서 대중 음악계에 데뷔를 했다. 참고로 시나위의 1집인 'Heavy Metal Sinawe'는 국내 최초의 헤비메탈 음반으로 알려져있다. 하드록에서 헤비메탈로 넘어오는 경계선에 서있는 그룹들은 몇 있었지만,[8] 스스로를 헤비메탈로 표방하고 앨범을 낸 이들은 시나위가 최초였다.

가창력

맹수의 포효를 연상케 하는 가창력은 풍부한 성량과 두터우면서도 애절한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임재범의 이 음색이 얼마나 좋은가 하면, 흔히 말하는 대부분의 음색 좋은 가수들이 소화할 수 있는 종류의 폭이 제한적인 반면 임재범은 록, 발라드, R&B, 소울, 포크, 블루스 등 거의 모든 장르를 자신만의 색깔과 독창성으로 소화해낸다.
임재범의 창법은 락음악과 소울, 팝 음악 등 다양한 장르 가수들의 영향을 받아 완성되었다. 임재범이 팬카페나 라디오에서 밝힌 바로는 락 쪽으로는 데이빗 커버데일, 로니 제임스 디오, 롭 헬포드. 소울이나 팝 쪽으로는 스팅, 제임스 잉그램, 루더 밴드로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녹음할 때 곡에 어울리는 특정 가수들의 소리를 썼기에 몇몇 곡에 그들의 소리가 숨어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다양한 창법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라이브할 때 힘들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백두산의 기타리스트 김도균은 지금은 사라진 그의 블로그에서 임재범과 영국 거주 시절 함께 했던 SARANG 시절을 회상하면서 "드럼 연주자가 영국에서 상당히 유명한 밴드 "Marmalade"의 후기 드럼 연주자로 활동했던 친구라, 주위에 많은 유명 음악인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Michael Schenker 밴드의 보컬 Gary Barden을 추천했죠. 그러나 저는 밴드 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인 보컬을 이야기했었죠. 그래서 급기야 재범이를 영국으로 불러오게 된 겁니다."라고 쓰고 있다. 임재범이 영국 본토 시장 공략에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탁월한 락 보컬로 여기고 있었다고 봐도 될 듯하다.


당시 앨범 작업에 참여한 후배 뮤지션과 녹음 관계자는 지금도 그는 그때 미쳐있었다. 3집 음반에 대한 열정으로 불가사의한 능력이 인간에 존재할 수 있다면 그건 그때 그의 모습이었다라고 회고한다.

2006년 고스트 스테이션에서 신해철이 말하길 리즈 시절 임재범은 롤플레잉 게임 들어갔을 때, 전사이면서, 마법 배우고, 아이템 긁어모아서 칼 바꾸고, 갑옷 바꾸고, 투구 바꾸고,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손에 넣는 불가사리 같은 존재 같았다며, 영국적인 보컬리스트들의 흉내내기를 통해서 목소리를 단련시켜 나가고 있던 젊은 보컬리스트가, 또 그 이후에 아시아나 등의 여러 락밴드들을 거치게 되면서, 이제 정제되고 단련되고 해서 어느 정도 수준의 경지에 올라간 그런 모습을 보여주다가, 그 이후에 소울이라든가 발라드에 여러 팝을 소화하는 여러 가지를 집어 삼켜 버리고, 그리고 또 원래 임재범이 소유하고 있던 음역대 훨씬 이상의, 거의 한 옥타브에 가까운 음역대를 손에 넣어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는 그런 무기들을 손에 넣고 나서는, 마치 이제 이 앞으로의 행보는 이 아티스트에게 있어서는 "내 맘인데 뭘 하면 좋을까?" 왼손에는 포크 300개, 오른손에는 나이프 15개, 그리고 발에다가는 국자 차고... "도대체 뭘 요리를 하면 좋단 말인가"라는 그런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그런 아티스트로 보여진다고.

그 동년배 또래의 가수들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나름대로 이제 언더그라운드 혹은 헤비락 씬에서 탈출해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을 때, "몰라, 난 노래 연습해" 이러고 지리산에 들어가버리기도 했다. 가끔 수련의 결과물로 앨범을 내어주시고는 앨범에다가 "내공과 외공을 겸비하면 이렇게 되느니라, 아이들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평했다. 신해철이 평가하는 임재범

2009년 이선희는 20대 시절 시나위의 임재범을 보며 저렇게 부를 수 없어서 절망했다고 한다. 

2010년 시나위 신대철은 시나위를 함께 한 보컬리스트 중 임재범을 최고로 뽑기도 했다.

신대철은 정영진 최욱의 불금쇼 108회에서도 "저는 굉장히 임재범 씨 보컬에 대해서 굉장히 저는 좋아했었어요. 야... 우리나라에 저런 보컬이 있었어 정말 대단해"라고 평하기도. 


2011년 SBS 라디오 프로그램인 '이현우의 뮤직 라이브'를 진행할 당시 이현우는 처음 음반사에 오디션 보러갔을 때 마침 녹음실에서 녹음하고 있던 임재범을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아, '내가 과연 가수를 할 수 있을까'라고 무척 고민했다고 밝혔다. '하필이면 임재범이야~!!!'라고.

음악 채널 Mnet에서 교수, 가요 전문 기자, 평론가, 뮤지션, 업계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50명의 심사위원단이 한국 가요사를 빛낸 전설의 가수 100명을 선정하면서, 레전드 20인의 보컬 아티스트에 선정되었다. "진심을 노래한 카리스마 보이스 임재범은 살아남은, 그리고 살아있는 록 보컬리스트다. 헤비메탈로 시작한 임재범의 강렬한 힘은 시간과 관록이 켜켜이 쌓이며 큰 울림을 갖게 되었다.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에 도달한 내공은 때로는 경외로 듣는 이들을 밀어냈고, 때로는 짙은 잔향으로 듣는 이들을 끌어당겼다. 살아남은 자의 살아있는 목소리, 단 한 순간도 잊힌 적이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깊이를 더해가는 그의 목소리에 박수 소리는 더욱 커진다."는 평 레전드 20인의 보컬 아티스트

록&밴드 부문 레전드 20에서도 그의 데뷔 앨범 시나위 1집 'Heavy Metal Sinawe'가 선정되었다. 엠넷 레전드|록&밴드 부문 레전드 20 관련기사 "한국 헤비메탈의 개척자 신대철은 시나위가 '장르 음악'을 좀 더 일반화시키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것으로 그룹이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갖는 의미를 정리한다. 시나위는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대표적 언더그라운드 장르였던 헤비메탈을 주류로 끌어올린 주인공으로 평가받는다. 비록 대중적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받은 적은 없지만 항상 우직하고 튼실한 존재가 시나위다. 한국의 록 팬들은 1980년대에도 지금도 시나위의 존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라는 심사평.

Mnet Legend 100-Artist 3회:보컬 #2.자유의 정신ROCK편에서는 "묵직한 고음의 파워 보컬, 거칠고 시원한 목소리에 녹아있는 세상에 얽메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불세출의 로커, Legend 임재범"라고 평했다.[mnet legend 100-artist 3회:보컬] #2.자유의 정신ROCK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임재범의 데뷔 앨범 시나위 1집 'Heavy Metal Sinawe'가 32위에 랭크되어 있다. 

음악취향Y Best 100에서는 96위에 아시아나(Asiana) 'Out On The Street'가 선정되었다. "임재범은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로서 최고의 컨디션을 보여주고 있는데, 쇳소리 두성과 비음을 적절히 섞어 만들어 낸 고음은 당대 외국의 어떤 보컬리스트와 견줘도 손색없는 빼어난 실력을 선보인다."는 평 음악취향Y Best 100

음악취향Y Best 100 Heaviness 부문에서 아시아나(Asiana)의 'Out On The Street'는 1위에 선정되었다. 음악취향Y Best 100 Heaviness 50+5 "임재범은 쇳소리 두성과 엄청난 호흡을 바탕으로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선보인다." "임재범의 육중하면서도 문득문득 한국적 한이 서린듯 소울 냄새를 풍겨내는 목소리, 김도균의 국적을 무색케 하는 무시무시한 피킹의 향연이 주는 이질적인 하모니는 물론 그 자체로도 인상적이다."는 평.

《월간조선》에서 대중문화·음악평론가 1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여 '한국 대중가요 역사를 통틀어 가장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를 선정한 결과, 80년대 이후 가수 중 이승철과 공동 1위를 차지하였다. 전문가가 선정한 이 시대 최고의 가수는? 임재범은 이 평가에서 "어떤 곡도 '임재범의 창법'으로 소화해내는 록보컬의 레전드", "기교와 형식을 넘어선 깊이감을 갖춘 가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6년 조선일보에서 김연우 등의 보컬 트레이너들에게 물어본 최고의 보컬리스트에서 조용필, 이승철에 이어서 3위를 차지하였고, "한국 가수가 갖기 힘든 톤과 파워를 가졌다"는 평.

음악 전문가 20인에게 질문한 가장 노래 잘 하는 가수에서도 조용필, 이승철, 인순이에 이어서 4위#, ##

'대중음악 사운드(SOUND)'에서 한국 대중음악 명예의 전당에 추천하는 100인을 10개 분야(보컬리스트, 기타리스트, 베이시스트, 드러머, 키보디스트, 작곡가, 작사가, 프로듀서, 레코딩엔지니어, 음반기획자) 10인씩 선정한 결과, 한국 대중음악 '최고의 보컬리스트' 10인에 선정됐다. 

음악취향 Y에서 선정한 Ballad Best 100에서 "너를 위해"가 13위, 박정현과 함께 부른 "사랑보다 깊은 상처"가 17위에 올랐다.[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2018년)에서 34위에 Heavy Metal Sinawe 시나위가 선정되었다. 100대 명반 선정은 총 3번의 시도가 있었는데, 첫째로 1998년 잡지 '서브'에서 선정된 리스트가 있고, 둘째로 2007년에 음악전문 웹진 가슴네트워크에서 52인의 선정위원을 위촉하고 100개의 명반을 선정해 경향신문에 공개하고 리뷰를 연재했던 리스트가 있다. 그리고 셋째로 2018년에 언론사 한겨레, 음원사이트 멜론, 출판사 태림스코어가 47인의 선정위원의 투표를 통해 선정한 리스트가 있다. 임재범의 데뷔 앨범 시나위 1집은 3차례 연속 선정되었다.
작곡가 겸 음악 프로듀서 김형석이 프로듀싱 도중에 녹음실 부스 안에서 노래를 부르던 임재범을 두고 "가수 10명 중에 한 명이라도 임재범의 반만큼만 노래할 줄 알면 좋겠다"는 평을 할 정도.#

윤도현은 MelOn PLAYLIST에서 그의 음악 인생에 막대한 영향 끼친 추천곡으로 외인부대의 쥴리를 선곡하고, "대한민국 헤비메탈의 일맥을 장식한 밴드, 윤도현이 가수 데뷔를 하게 된 시발점이 된 노래"라고 소개하고 있다. "목소리가 정말로 그런 보컬이 없어요. 뭔가 칼 같기도 하면서 목소리 톤도 되게 와이드하고 굉장히 고급스러운..." 영상

임재범의 보컬적인 장점을 요약하자면, 허스키한 탁성과 맑은 소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컨트롤 능력과 스피드한 음악까지 쉽게 소화하는 뛰어난 리듬감,한 소절조차 흘려 보내지 않는 디테일, 열린 발성을 기반으로 한 엄청난 성량, 저음과 고음을 오가는 넓은 음역대,그리고 다양한 장르의 곡을 자신만의 창법으로 소화해내는 표현력이다.

발성을 보자면 성량에 있어서 상당한 강점을 보인다. 고음뿐 아니라 중저음에서도 성량이 크게 나오고 게다가 야외 콘서트에서도 관중석 뒤쪽까지 울려퍼지는 수준, 거기에 허스키한 음색을 더욱 두껍게 만드는 파워가 전부 성량이다.[] 파사지오 구간에 진입할수록 터져나오는 듯한 강렬한 고음역 성량도 백미. 게다가 가성이 진성처럼 들려서 따라부르기도 어렵다.
음역대 역시 0옥타브 레♯(D♯2)부터 3옥타브 솔(G5)까지 소화해내는 상당히 넓은 음역을 가졌다(가성 포함).

임재범의 전성기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은 아시아나와 외인부대에서의 활약을 위시한 강력한 록 보컬로서의 전성기. 이 당시의 임재범 거칠고 강렬한 벨팅과 국내 가요계 거대한 성량, 파워풀한 샤우팅을 기반으로 무시무시한 난이도의 헤비한 메탈 록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괴물 같은 보컬이었다. 특유의 낮은 톤으로 3옥타브 후반대를 발성하는 강력함과 폭발적인 스크래치를 보여주었다.[]
다만 원래도 고음이 주무기였던 보컬은 아니었고, 나이가 들면서 성대에 팽팽한 내전율과 탄성력이 필요한 파사지오 구간에서의 음 이탈이 잦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임재범에게 리즈 시절의 록커 모습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이후 임재범은 솔로활동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감성 보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고해>, <너를 위해>, <비상>을 비롯한 발라드 곡을 잇달아 발표하며 파워풀한 록커에서 부드라운 발라더로서의 전환을 시도하다가, 결정적으로 나는 가수다에서 여러분을 통해 감성 보컬의 포텐을 제대로 터뜨렸다. 특유의 애절한 음색을 이용한 매력적인 중저음, 감정을 토해내는 듯한 고음에 몇몇 사연이 만들어낸 불세출의 감성이 더해져 정상급 발라더의 면모도 제대로 보여주는 상황이다.

2022년 현재 정규 7집을 통해 봤을 때, 회춘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역량이 회복됐다. 본인이 7년 만에 활동을 재개했고, 이 동안 목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예전같았으면 특유의 반가성으로 올렸을 음들을 진성으로 무자비하게 때려박아버릴 정도로 진성의 질이 올라갔으며, 목소리 또한 굉장히 깨끗하고 안정적이다.

히트곡

시나위 1집 앨범의 크게 라디오를 켜고, 이 밤이 지나면, 사랑보다 깊은 상처, 비상, 고해, 그대는 어디에, 너를 위해, 낙인, 사랑이 유명하다.

성격

어릴적부터 고아원에서 살았다거나, 생년월일이 불분명한 것 등등 다사다난한 일을 많이 겪어서인지, 심리적으로 많이 혼란스러웠다고 전해지며, 나가수 출연 전까진 TV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공연과 음반활동 위주로 가수 생활을 하고 있다. 젊은 시절엔 활동 도중에 매니저조차 따돌리고 홀연히 잠적하는 경우가 많아서 방송 펑크가 잦은 것으로도 유명했다거나 록음악을 하다가 발라드 혹은 R&B 로 전향하면서 록에 대한 배신자로 찍혀서 많은 비난을 받아서 잠적을 했다는 말이 있느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임재범은 1집 당시 공연윤리위원회에 표절 판정을 받았고 방송 3사에 출연 금지를 당해서 방송을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었다.

루머가 워낙 많은 임재범[14]이지만 지인들의 임재범 성격에 대한 평은 세간의 평과 상당히 다르다.
일례로 30년 지기인 김도균은 MBN '아궁이'에서 "평소 임재범은 양처럼 순하다. 다만 너무 바르고 교과서적이다 보니, 틀을 벗어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데 세상 일이 교과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 부분에서 마찰이 생기는 것 같다. 임재범을 '거친 남자'로 오해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서부터 오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였다. 김도균, "카리스마 임재범, 양처럼 순한 사람"

손지창은 2001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형과 몇 번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내가 형의 동생이라는 점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괴팍하다는 소문과는 달리 다정다감했고 모든 면에 천재성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너무 순박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점이 아쉬웠다." 한편, 손지창은 지난 2011년 3부자 상봉 후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좋은 형을 갖게 되어 자랑스럽다"며 "형은 음악적 재능을 떠나서라도 지금까지 내가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임재범에 대한 마음을 밝혔다.기사

동창들에 따르면, 임재범은 J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J 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3학년 시절에는 당시 학생들의 제식 훈련을 지휘하는 '학생 연대장'을 지냈고, 또 학생들의 질서를 담당하는 규율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서울고등학교를 다니다 가수를 하기 위해 자퇴한 것으로 알려졌다.임재범의 학창시절

그와 친했던 동창생들은 그가 우등생까지는 아니었어도 반듯한 학생이었고, 일단 친해진 친구들에게는 매우 유머러스한 학생이었다고 기억했다. 임재범의 국민학교 동창인 B씨는 "재범이는 늘 좋은 옷을 입은 예쁘장한 아이였고, 쾌활하고 명랑했다"고 말했다. 중학교 동창인 C씨는 "그가 또래에 비해 키도 크고 낯을 좀 가리는 편이어서 평소에는 무게를 잡았지만, 일단 친해진 친구들에게는 배한성씨나 이대근씨의 성대모사를 하거나, 가수들 모창도 들려주곤 했다"고 말했다. C씨는 "친한 사이에서는 재미있는 얘기들을 자주 들려줘서 웃음을 주는, 아주 유머러스하고 착한 친구였다"고 말했다.

정성호는 "사실 '나도 가수다'는 일회성 코너로 기획됐어요. 처음에는 괜히 희화화해 누가 될까봐 겁이 났죠. 부담이 컸는데 예상과 달리 반응이 엄청나더라고요. 그래도 불안감이 없지 않았는데 임재범 형님이 직접 전화를 해주셔서 '즐겁게 잘 보고 있다', '계속 같이 잘 해보자'고 응원해 주셔서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죠."라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임재범은 최근 콘서트 무대에서 정재범을 화제로 올렸고, 정성호에게 문자를 보내 소재가 떨어지지 않았는지 걱정도 해줬다. 심지어 '이런 걸 해보는 건 어떠냐'고 아이디어까지 제공해줬다. 정성호는 "아직 실제로 뵙진 못했지만 정말 털털하고 좋은 분이고, 제가 웃다가 통화가 끝날 만큼 유머감각이 탁월한 분"이라면서 "(임재범 씨가) 가수가 아니라 배우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라고 말했다. 기사

정성호는 임재범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자신이 6개월 간 '나도 가수다'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임재범의 지원이 컸다. 그는 "사실 하는 동안 안티팬이 많이 늘었다. 임재범 형 팬들의 미움을 많은 받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도 있었는데 임재범 형이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줘 지금까지 잘해올 수 있었다"고 전했다. 

다음주에 둘째 딸을 갖게 되는 정성호는 "정재범이[] 라는 이름을 지어주려고 했는데 둘째도 딸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아들을 낳을 때까지만 계속 낳자'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정성호는 MBC TV '웃고 또 웃고-나도 가수다'에서 가수 임재범을 따라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임재범은 정성호 부부를 직접 자신의 콘서트에 초대하기도 했다. 정성호는 "임재범 씨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 부부를 정말 잘 챙겨주셨다. 나와 아내를 자신의 콘서트 무대에 세워줘서 영광이었다"며 "말이 별로 없으셨는데도 포스가 대단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정성호, 임재범 때문? "아들 낳으면 재범이라는 이름 붙여줄 것"

김영호는 임재범을 "자기 세계가 강한 사람"이라고 했다. 김영호는 "방송에선 귀엽고 익살스런 임대디의 모습이 많이 비춰지지만 촬영하지 않을 땐 남에게 말도 안 걸고 조용히 음악만 들어요. 자기 세계가 너무 강해 다른 사람들이 어울리기 힘들어 하지만 누구보다 맑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차지연은 "임재범 씨를 처음 봤을 때 무섭지는 않았나"라는 질문에 "진짜 무서워서 기가 팍 죽었다. 그러다 두세 번 뵙고 나니 겉으로 표현은 못해도 속은 참 여린 분이란 생각이 들더라. 투박하게 '밥 먹었나'라고 짧게 말을 해도 영혼이 순수하고 맑은 사람이란 느낌이 왔다."고 밝혔다. 

윤도현은 임재범의 첫인상에 대해 "무서웠지만 막상 만나 보니 선하시다"며 "임재범을 만났을 때 잃어버린 형제를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임재범 형님과 의형제를 맺었다. 강렬하고 카리스마가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픈 묘한 에너지를 가진 분"이라고 전했다. 기사 "임재범의 집에 자주 놀러가곤 했는데 가면 잘해주고 선물도 해주며 자상하게 대해줬다 그래서 나도 답례로 자전거를 드렸다"며 우정을 과시했다(힐링 캠프). 

소울다이브는 "호랑이 같은 면은 선배님의 카리스마를 말하는 것이다. 정말 호랑이처럼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계신다. 하지만 강한 면모 속 숨겨 놓은 부드러운 진심으로 후배들에게 따뜻한 말로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며 "식사를 챙겨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무대 위에서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배려해주시는 따뜻한 분"이라고 호랑이보다는 어머님같은 선배라고 전했다. 소울다이브, 호랑이 같은 임재범에 "호랑이 아닌 어머님"

1집 당시 록을 버리고 다른 장르를 시도했을 당시엔 출연 정지를 당해서 나오고 싶어도 못나왔고, 자의로 잠적한 게 아니다라며 자신의 억측을 사실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임재범이 이밤이 지나면으로 나가수 출연 당시만큼 인기를 얻었던 건 1991년이었고, 출연정지 기사가 난 건 1993년 3월 이후이다. 그가 1년간 오대산에서 칩거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관련 기사

92년 특종 TV연예 임재범 신대철을 비롯한 시나위 멤버들과 함께 '특종 TV 연예'에 출연한 임재범은 인터뷰에서 "혹시 또 한 번 증발하실 계획이 있으신가요?"라는 질문에 "글쎄요. 증발이라는 단어 자체가 날아가 없어진다는 뜻인데 제가 물이 아니므로, 더는 증발할 이유는 없고 다 말랐습니다. 이제"라고 대답하는 모습에서 젊은 시절 임재범의 반항적인 카리스마를 엿볼 수 있었다(1992년).

임재범은 "1990년대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토토즐)에 나가서 '이 밤이 지나면'을 딱 한 번 불렀는데 지금의 '나는 가수다'(나가수) 같은 반응이 왔다. 하루 새에 갑자기 음악 차트 3, 4위 상위권에 랭크가 되더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실제로 임재범 1집은 60만장 이상 팔리는 놀라운 판매고를 보였다. 하지만 록커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임재범에게 이들은 '솔로로 잘 나가서 좋냐'고 비아냥 거렸고 록커의 자존심을 버렸단 생각에 임재범 또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가끔 포장마차 이런 데서 막걸리 한잔 할 때면 신대철한테 무조건 사과부터 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그는 록커로서가 아니라 한국의 마이클 볼튼으로 불렸다. 결국 그는 리듬 앤 블루스나 소울, 발라드는 진정 하고 싶은 음악이 아니라며 오대산 등에서 1년간 잠적하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앨범을 내고 잠적하고 다시 돌아와 앨범을 내고 잠적하는, 아니 증발하는 일이 반복됐다. 하지만 김준원은 임재범이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인한 잠적을 했다고 했고, 실제로 소속사에게 제대로 된 정산을 받지 못하였다. 이를 보면 잠적은 임재범 개인의 문제라고만 볼 수 없다. 그리고 임재범은 가수를 꼭두각시처럼 다루는 연예계 상황, 홀대받는 한국 락 음악, 그리고 아티스트로서 가수를 존중해주지 않고 비판하는 대중들에게 스트레스를 느꼈고, 이런 점 또한 잠적에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가족사

배우이자 가수인 손지창과 이복형제다. 임재범의 아버지인 임택근 전 MBC 아나운서[]가 외도로 인해 낳은 자식이 임재범과 손지창이다. 손지창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보면 그 아픔이 어땠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후 손지창은 방송을 통해 아버지와 재회. 방송분만 보면 삼부자가 완벽하게 화해한 듯 보이지만, 이후 손지창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건 방송사의 편집이며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할 생각도 없고 다시 보고 싶지도 않다'라고. 여기서 임재범은 임택근의 세컨드, 손지창은 임택근의 써드의 자식이다. 사실 족보가 너무 꼬여서 정확한 정의가 불가능하다.

임재범도 손지창도 둘 다 임택근의 서자다. 임택근은 둘 다 바람피워 얻은 자식이고 그나마 임재범은 이혼 과정을 이용해서 어찌어찌 출생 사유를 숨겨서 임씨 성을 물려줬지만 손지창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해 이리저리 떠넘기다가 결국 손윗동서에게 떠넘겨서 그 동서의 성인 '손씨'로 호적에 올라가게 만들었다. 임택근은 본처에게 한 행동이 개차반이어도 너무 개차반인 것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위의 발언을 봐서 손지창도 너무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가 토크쇼에서 고백한 바에 따르면 적어도 대학교 합격한 후에 첫 등록금만은 아버지에게 받고 싶었기 때문에 찾아간 적은 있었는데[] 문자 그대로 넌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문전박대했던 트라우마가 있었다. 나중에도 손지창은 '나는 손지창이지 임지창이 아니다.' 하고 밝혔고, '나와 오연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을 임씨로 개명할 마음도 없다.'고 밝혔다. 애초에 손지창에게 손씨라는 성을 준 사람(호적상의 아버지)은 손지창의 이모부다. 손지창은 이모부를 아버지로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자식을 얻지 못한 아버지 임택근은 이 사이 이미 바람을 피워 사생아인 임재범, 손지창을 얻었다. 이후 임재범은 한 살 때 생모가 일본으로 떠나 어쩔 수 없이 키웠지만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관심도 주지 않은 채 숨겨 키웠다. 이후 이혼하고 두 번째 결혼을 한 뒤에야 호적에는 올려줬다고 한다.[] 임재범도 자신의 어머니가 생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한동안 방황했다.[] 즉 첫 번째 부인하고 결혼 생활 중에 제3의 여인(임재범의 생모)과 바람을 피워 자식을 낳았는데 호적에는 또다시 별개인 두 번째 부인 아들로 들어가 있다(…). 이딴 출생의 비밀은 어지간한 막장 드라마에도 나오기 힘들 듯.
하지만 손지창을 끝까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다가, 이런저런 소문이 나게 되고 기자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 후에야 비로서 '아들아!'라며 감동의 재회 따위를 연출한다. 아버지인 임택근이 MBC의 유명 아나운서 출신 간부에다가 파워까지 있었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그런 연출에 응했던 손지창이지만 이후 '그건 다 연출이고 난 그 인간 아버지로 인정할 생각 없다'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래도 임재범과 손지창의 사이는 나쁘지 않다고 한다.[] 손지창이 라디오에 출연해서 말하길 더 블루 재결합을 했을 때 손지창에게 보컬 트레이닝을 시켜준 사람이 임재범이었다고 한다. 제수 오연수도 임재범의 팬인 듯.관련 기사

하지만 아버지라는 인간은 '두 아들을 둬서 행복하다' 따위의 발언#을 하고 앉았으니 임재범과 손지창만 불쌍하다. 정작 두 아들들은 각자의 2세를 위해 호적 정리를 할 예정이라고. 이미 손지창의 혈연 관계가 임택근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단, 아버지 임택근이 최근 "임재범이랑 교류 안 하고 산 지 몇 년이 된다."라고 인터뷰한 것으로 봐선 호적정리 유무를 떠나 거의 담 쌓고 사는 사이임은 분명하다.[]

이후 승승장구에 게스트로 출연하면서 임재범 본인과 아버지 임택근, 이복동생 손지창에 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풀어놓았다. 동생인 손지창의 경우 자주 연락하며 만나고 있는 듯 하며 삼촌인 손지창이 임재범의 딸을 무척 귀여워한다는 듯. 임재범은 한동안 자신을 무녀독남으로 알고 있었으나 집안어른들을 통해 '지창'이라는 이름의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후 손지창이 스타가 되어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자 그것을 보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자에게 '내게 숨겨진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지창이가 아무래도 내 동생인 거 같다'라고 털어놓았다. 그 기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무척 놀랐는데, 왜냐하면 기자는 손지창에게 그 이야기를 이미 듣고 알고 있었기 때문. 결국 그 기자를 통해 이복형제가 만나게 되는데, 손지창은 임재범을 만나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론 미워하는 감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형인 임재범은 아버지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그러나 만나서 실상을[28] 알게 된 후 서로 별반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알고 원망의 감정은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은 오랜 세월이 지나고 서로 나이도 많이 먹었기 때문에 가슴의 상처도 적잖이 아문 듯.

아버지인 임택근과의 관계는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 손지창과는 다르게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었다고는 하나 아버지에게 대놓고 '아버지는 밖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100점 짜리일지 모르나 집에서는 0점이에요'라고 말했다고 할 정도였다. 나중 가선 임택근과 더 이상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임택근은 이전에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당한 목이 부러지는 사고[29]로 하반신 마비가 왔다. 또한 담석 수술 등으로 이미 몸이 크게 약해진 상태. 이런 아버지에게 임재범이 메세지를 날렸는데, '아버지가 지금 굉장히 힘들고 어려우며 몸과 마음도 많이 망가진 것은 알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라며 냉정하게 채찍을 들었다. 이것만 봐도 임재범이 임택근에게 쌓인 한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듯. 그래도 언젠가 아버지를 용서해야 될 때가 올 것 같다고 담담히 털어놓기는 했다. 손지창과의 이복 형제이며, 그 아버지가 임택근 아나운서라는 점이 최초로 밝혀질 당시 한 TV 연예뉴스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도 임재범은 이 문제에 대해 지난 일이고, 그분(임택근)의 인생에 대해서 어찌되었건 자식이 이렇다 저렇다 제 3자에게 말하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일이라는 식으로 담담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20년 1월 11일 사망한 임택근의 빈소를 상주로서 지켰다. #

2022년 6월 청음회에서 아버지의 죽음에 크게 슬퍼했다고 하는 걸 보면, 임택근에 대해 아버지로서 인정하는 마음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728x90
반응형

'연예인 정보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니엘 헤니에 대해알아보자  (0) 2022.09.12
가수 한혜진에 대해알아보자  (0) 2022.09.05
유주은에 대해알아보자  (0) 2022.08.29
이정현에 대해알아보자  (0) 2022.08.28
공효진에 대해알아보자  (0) 2022.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