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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표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2. 12. 18.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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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경제관료 출신 정치인이자, 제21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관료 시절 능력을 인정 받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중용되어 부총리, 장관, 차관 등을 5번이나 역임했다. 정계 입문 이후 지역구 수원에서 내리 5선에 성공했다. 2000년대 이후 민주당계 정당에서 오랜 기간 경제 정책을 주도해온 인물로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역할을 한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 모두에게 중용되었고 실제 후술되어 있듯 성과도 있었지만, 안티 특히 진보 진영의 안티들에겐 IMF 이후 민주당 정부를 이헌재, 이광재 등과 함께 경제적으로 우클릭시킨 주범이라는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실제로 참여정부 경제부총리 시절 법인세 인하, 노동유연성 강화 등을 추진해 진보 진영 내 분란의 씨앗을 뿌리기도 했다. 참여정부/부정적 평가 항목에도 나오지만 이른바 '좌측 깜박이 켜고 우회전 한다'는 말이 나오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도 있어 진보정당은 물론이고 민주당 내부나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김진표를 곱게 보지 않는 시선이 많이 존재한다.[] 또 독실한 보수 개신교 신자라[] 그런지 동성애나 낙태에 부정적인 문화적 보수주의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다만 그의 입장에선 좀 억울할 수도 있는 게, 그는 정계 입문 이후 단 한번도 민주당계 정당을 떠난 적이 없는 진성 민주당원이며,[]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했을 때 진행된 후보 성향 조사에서도 진보5~보수5 척도 중 진보1로 평가받았다

1947년 5월 4일, 경기도 연백군 연안읍[]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1.4 후퇴 당시 아버지[]의 손을 잡고 피난하여 경기도 수원시에 정착했다. 이 때 곧 따라오겠다던 어머니는 영영 따라오지 못해 이산가족이 되었다.

수원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1954년 매산국민학교에 입학해 1958년 서호국민학교가 개교되자 서호국민학교로 전학, 1960년 2회로 졸업했다. 1963년엔 수원중학교를 13회로 졸업하였고, 이후 서울로 유학하여 경복고등학교[]를 41회로 졸업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해 1971년에 졸업했다.

병역은 공직 입문 후 수원 권선구 수원비행장에 있는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서 수행했으며, 1년 방위병이기에 일병으로 전역했다.

김진표 관료 시절

대학을 졸업하고 2년 후인 1973년 제13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한 후 재무 관련 부처에서 오랫동안 재경직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하였다. 행시 동기로는 노건일 전 교통부장관, 참여정부에서 호흡을 맞춘 박봉흠 전 기획예산처장관 등이 있다.

첫 발령지는 대전지방국세청이었으며, 부과국에서 소비세과장을 맡았다. 이 당시에는 초임 사무관들도 지방청 과장직을 수행했다. 이후 세무공무원교육원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재무부 세제국으로 발령받았다. 이 때 김영룡 전 국방부차관[], 서영택 전 국세청장[], 하동선 전 경제기획원 차관보[] 등과 함께 전두환 정부가 추진하던 세제 개혁의 실무를 맡았다.

1983년, 공직 입문 10년 만에 서기관으로 승진해 강원도 영월군을 관할하는 중부지방국세청 영월세무서장을 맡았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지역 유지가 된 셈이다.[] 2년간 세무서장을 지내고 다시 재무부 본부 과장이 되었고, 1988년엔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해 공공정책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재무부 세제국(→ 세제실)에서 과장 직위를 맡았으며, 1992년 공직 입문 19년 만에 고위공무원이라 할 수 있는 부이사관으로 승진해 한국조세연구원[]에서 근무했다. 이 때 까지는 평범한 관료라고 할 수 있겠지만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면서 그의 관료 인생이 바뀌게 된다.

1993년 재무부 본부로 복귀해 세제실 심의관을 맡았으며, 김영삼 대통령이 비밀리에 금융실명제 시행을 추진할 때 실무를 담당했다. 이후 국세심판소 상임심판관을 역임했는데, 이 때 문민정부의 또 다른 경제 개혁이라 할 수 있는 부동산 실명제 추진단 부단장을 겸임했다. 1995년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이 재정경제원으로 통합되자 대외경제국 심의관을 맡았으며, 1996년엔 이사관(2급)으로 승진해 현재의 대변인 격인 공보관을 맡았다. 이 해에 나웅배, 한승수[] 재정경제원장관의 비서실장과 은행보험심의관을 맡았다. 은행보험심의관을 맡던 1997년 한보 사태가 터져 이를 수습하는 업무도 맡았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후 첫 인사인 1998년 3월 인사에서는 세제실 재산소비세심의관을 맡게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제총괄심의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연말엔 공직 입문 25년 만에 관리관(1급)으로 승진해 2000년 10월 열린 ASEM 정상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설치된 ASEM 준비기획단 사업추진본부장을 맡았으며, 1999년 1월엔 정부의 조세 실무를 총괄하는 재정경제부 세제실장에 임명되었다.

2001년 4월 1일, 제8대 재정경제부차관으로 깜짝 발탁되었다. 보통 차관직은 외청장[]을 한 번 지내고 임명되는 게 관례였는데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실장에서 차관으로 직행했다. 2002년 1월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이 되었고, 같은 해 7월엔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에게 정권을 인수할 때, 김진표를 반드시 중용하라는 조언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참여정부 초기인 2003년부터 2004년까지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이 시절 2002년 가계 신용카드 대출 부실 사태를 수습했다.

김진표 정치 활동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2005년부터 2006년까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을 역임하였으며, 2007년 열린우리당의 마지막 정책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10년까지 민주당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와의 야권단일화 경선에서 패배하여 출마하지 못했다. 경선 과정에서 패배한 것이기에 의원직은 유지하였다. 이때 유시민은 김문수에게 패해 낙선하긴 했지만, 김진표가 물심양면으로 자신의 선거운동을 도와준 것에 대해 훗날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관련 글.

2011년 5월 정세균 등의 지원을 받아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했고, 당선되어 같은 해 12월까지 민주당 원내대표를 역임하였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경기도 수원시 정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2014년 6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새정치민주연합 경기도지사 후보로 선출되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여론조사는 오차범위 밖으로 크게 지는 결과가 대부분이었다가 출구조사에서 앞서 역전의 가능성이 보였으나, 개표 결과는 새누리당의 남경필 후보에게 단 1% 차이로 밀려 낙선했다.

2014년 7월 열린 재보궐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한 박광온 의원을 지원하여 당선되도록 도왔다.# 그리고 2015년 3월 문재인 당대표 밑에서 새정치민주연합 국정자문위원장을 맡았다.

이 때 대한민국 정당사상 최초로 열린 정책엑스포 조직위원장을 맡아 새정치민주연합이 유능한 경제정당, 정책정당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새롭게 신설된 경기도 수원시 무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원래의 지역구는 박광온이 자신이 사퇴했을 때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가져갔기 때문에, 자신이 선거구를 옮겼다.

2017년 19대 대선에서는 문재인 캠프의 선거 공동대책위원장과 일자리위원장을 맡았으며,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 이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위원장 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국정기획자문위원장으로서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를 설계, 발표하였고, 특히 강점인 경제 분야에서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성장의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렸다.

2018년 7회 지방선거에서 현직인 남경필 지사와의 경기도지사 리매치가 점쳐졌으나, 불출마 선언을 하고 전해철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아무래도 경선까지 포함해서 두 번이나 패배한 만큼 또 출마하기에는 부담이 컸던 듯. 또한 70대의 많은 나이도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8년 7월 26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당대표 예비경선 컷오프를 통과하여 이해찬, 송영길과 민주당 당대표직을 놓고 겨루게 되었으나 3위로 낙선했다.

2018년 9월, 이해찬 당시 대표에 의해 더불어민주당의 경제자문기구인 국가경제자문회의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2019년 11월부터 문재인 정부의 차기 국무총리 후보자로 검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 문서 하단에 나와있는 논란거리들 때문에 진보 진영에선 국무총리 지명을 크게 반기진 않는 모습이다.# 반대로 소상공인연합회, 외식업중앙회, 한국SWㆍICT총연합회 등 경제단체들은 김 의원이 총리가 돼야 한다는 내용의 지지성명을 발표했으며#, 김무성 등 일부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김진표 국무총리 임명을 찬성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여론조사에서도 민주당 정권의 총리 후보자에 대해 진보층과 보수층 찬성 여론이 엇비슷한 드문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허나 김진표 내정설이 돌자 일부 시민단체에서 반발하고 나섰고, 민주당 권리당원 카페에서도 당원 간 대립각이 세워졌다. 이렇게 여권 내에서도 기류가 심상치 않자 김진표가 직접 대통령을 만나 고사의 의사를 전했다고 한다. 이후 거론되는 인물은 정세균 전 의장. 결국 정 전 의장이 문 전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국무총리가 되었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는 단수공천을 받아 5선에 도전하여 무난히 당선되어 21대 총선 최고령 당선자가 되었다. 동갑인 국민의힘 홍문표 의원보다 생일이 약 5개월 빠르다.

선수나 나이가 있다보니, 총선 직후 21대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언급되었다. 실제 5월 25일 최다선 박병석 VS 최연장자 김진표의 양자대결로 경선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5월 20일 국회의장 불출마를 선언함에 따라 21대 전반기 국회의장직은 박병석 의원의 몫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다만 제1차 본회의 의장 선거에서 의장 내정자 본인을 제외한 최다선이 임시의장을 맡는 관례에 따라, 임시의장을 맡았다. 다만 21대 국회 후반기 의장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다.[]

본인 의원실에 월1회 주4일 근무제를 시범적으로 실시하고, 연차를 모두 소모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김 의원은 "국회는 법을 만드는 곳이고 근무환경 개선의 내용을 담은 법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곳임에도 정작 보좌진들은 주5일제나 주52시간 근무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21대 국회에서는 보좌진들의 근무조건을 현실에 맞게 적용하고 근무시간은 단축하되 업무능률은 올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

2020년 이낙연 민주당 대표 체제 하에서 당 대표 직속 국가경제자문회의를 신설하면서 국가경제자문회의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부동산 정책에 대해 "부동산시장 안정책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시장에 공급 물량을 늘려야 한다"며 수요공급의 원리로 풀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그동안 부동산 대책을 두고 민주당 내에서 투기세력을 잡아야 한다는 규제파와 시장친화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공급확대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해찬 체제에서는 규제파가 앞섰지만 이낙연 체제에서는 김진표 등 공급확대파도 목소리를 낼 것으로 보인다. #

이낙연 前 대표가 대선 출마 준비를 위해 2021년 3월 9일, 당대표직에서 조기 사퇴했지만 후임 대표로 선출된 비문 성향 송영길 前 대표 체제에서도 부동산 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어 종합부동산세 완화 등을 주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이번 국회의원 임기가 마지막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도 원혜영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통해 정계에서 은퇴했고, 이해찬, 진영 또한 지역구 불출마 선언을 통해 정계에서 물러났다. 제21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에 당선되어 임기를 치른 후 명예롭게 물러나는 게 김진표 의원 본인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일 것이다.

2022년 2월 10일, 목회자 모임 미래목회포럼이 주최한 ‘대선과 기독교에 대한 토론회’ 자리에 나서서 자신을 2013년 당시 민주당 김한길 의원이 발의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철회시킨 ‘장본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20개 개별적 차별금지법 중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사실상 포괄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같은 내용의 법을 포괄적으로 한다는 것은 동성애와 동성혼을 사실상 합법화하는 그런 목적으로 법을 만드는 게 아니냐 하는 기독교계 우려를 가중시키게 되고, 동성애, 동성혼에 반대하는 설교나 그런 자유를 어디서 빼앗게 되면 역차별을 만들어내는 것 아니냐 하는 것 때문에 우리 교회가 반대하는 거로 안다. 이런 문제 인식을 우리 당 국회의원 대부분이 다 같이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입법화는) 제가 보기에는 가까운 시간 내에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다”고 했다. 그는 “우리 기독교계가 좀 더 그 뜻을 분명히 해서 공론화 과정을 만들어 (달라)”고도 했다.

결국 2022년 5월 24일 원내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국회의장 후보로 우상호 의원을 누르고 공식 선출되어 제21대 국회의 후반기 의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회의장이 된다면, 1979년 이후 43년 만에 3부요인과 국무총리가 모두 직업공무원 출신이게 된다.

이후 후반기 원구성 협상이 늦어지면서 실제 취임이 지연되다가 여야가 극적으로 원구성 협상을 타결한 이후 2022년 7월 4일 본회의에서 총 투표수 275표 중 255표를 얻어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수락 연설에서 김 의장은 “국회 개원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고, 국민의 명령이다. 여야 지도부는 국민의 명령을 지체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며 “당면한 민생경제 위기에 긴급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국회 민생경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뒤이어 후반기 국회부의장으로 김영주 의원과 정진석 의원을 선출하는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의장 취임 이후 처음 의사봉을 잡았다.#

7월 6일,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를 국회사무총장으로 내정했다.#

7월 22일, 김진표 의장의 중재 아래 극적으로 여야가 원구성에 합의하면서 각 상임위원장 및 국회사무총장이 선출·임명되면서 본격적인 후반기 원 활동이 시작되었다.#

8월 4일, 대만 방문을 마치고 방한하는 낸시 펠로시 미 연방 하원의장과 양자 회담을 가지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양국 의장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 경제 협력 및 기후위기 등의 현안을 놓고 약 50분간 회담을 진행한 뒤 공동으로 언론발표를 할 계획이다.#

김 의장은 공동 언론 발표에서 펠로시 의장에게 한미동맹 70주년 축하결의안 채택을 직접 제안하였다.# 이어서 첨단기술-공급망 협력, 북핵 문제, 한미 김치의날 지정 논의 등을 가졌다고 발표했다.

한편 윤석열 대통령은 휴가라는 이유로 펠로시와의 만남을 패싱한 상태고 한덕수 국무총리, 박진 외교부장관 등 윤석열 정부 구성원들 역시 펠로시 의장과 만나지 않으면서 펠로시 의장의 이번 방한에서 유일하게 만난 정상급 의전서열 정치인이 되었다.# 회담에 관한 내용은 미국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 패싱 사건 문서의 2.4 문단 참조. 이때문에 친민주당 성향 커뮤니티는 물론 평소 반민주당 성향이 압도적인 에펨코리아에서조차 실질적인 대통령의 권한을 수행하고 있다며 김진표 대통령 권한대행이라 칭하기도 했다.

한편 펠로시 의장과 회담한 이후 5박 7일로 폴란드와 루마니아를 순방하며 폴란드의 대규모 한국산 방산 장비 도입 계약 및 폴란드 신공항 사업 및 '에너지 정책 2040'과 관련한 원전 사업에 대한 한국 기업 참가 등 현안에 대하여 논의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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