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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3. 5. 3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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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보수주의 정당인 정의개발당(Adalet ve Kalkınma Partisi - AKP) 소속 전 총리이자 2014년 8월 28일부로 현직 튀르키예 공화국 대통령.

일반적으로 Erdogan으로 알려진 Recep Tayyip Erdogan은 터키에서 저명한 정치인입니다. 1954년 2월 26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0년대 초부터 국가의 정치적 지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Erdogan의 정치 경력은 터키의 이슬람 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001년 정의개발당(AKP)을 창당하고 당수가 됐다. AKP의 주요 의제는 보수적 가치와 민주주의 원칙을 결합하고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2003년 에르도안은 터키의 총리가 되어 2014년까지 3번 연속으로 이 직책을 맡았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에르도안은 터키 경제 현대화와 인프라 개선을 목표로 다양한 개혁을 시행했습니다. 그의 정부는 또한 사회 복지 프로그램을 우선시하고 빈곤을 줄이기 위한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Erdogan의 리더십은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의 통치가 터키에서 민주주의 제도와 언론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식시켰다고 주장합니다. 언론 검열,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탄압, 사법부에 대한 간섭 등의 혐의가 있었습니다. Erdogan 정부는 인권 문제를 다루는 것에 대해 국내 및 국제 관측통 모두로부터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Erdogan의 외교 정책도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세계 무대에서 터키에 대한 보다 단호하고 독립적인 입장을 옹호했습니다. 그의 지도력 하에 터키는 중동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종종 다른 지역 강대국과 대립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로 인해 시리아, 이라크, 그리스와 같은 국가들과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Erdogan은 권력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2017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개헌 국민투표에서 그에게 행정 권한이 확대되어 터키를 의회 체제에서 대통령 체제로 전환했습니다. 에르도안은 2018년 차기 대선에서 승리했고 이후 권위주의적 경향이 증가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왔다.


논란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Erdogan은 터키 정치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리더십 스타일과 정책은 여론을 양극화시켰습니다. 지지자들은 국가를 현대화하고 보수적 가치를 장려하려는 그의 노력을 칭찬하는 반면 반대자들은 민주적 퇴보와 시민 자유의 침식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2021년 9월 내 지식이 차단된 시점에서 에르도안은 계속해서 터키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은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 시점을 넘어서도 발전이 있었을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집권 이전

1954년 이스탄불 베이오을루(Beyoğlu)구 카슴파샤(Kasımpaşa)동에서 태어났으며, 양친은 튀르키예 동북부 흑해 연안의 리제(Rize)도의 귀네이수(Güneysu) 출신이다.[] 에르도안 가문은 원래 튀르키예 남동부의 대도시 가지안테프의 유지였으며 조부모때 리제로 이주했다고 한다.] 카슴파샤에서 자랐으며[3] 이스탄불 이맘 하티프 고등학교(İstanbul İmam Hatip Lisesi)[]와 악사라이 무역 전문학교(Aksaray Yüksek Ticaret Okulu, 현 이름은 이스탄불 경제 무역학 아카데미-İstanbul İktisadi ve Ticari İlimler Akademisi)에서 수학해 1981년에 졸업했으며, 18세부터 정치판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1969년부터 1982년 사이에는 카슴퍄샤에서 아마추어 축구선수로 뛰었다.[] 1978년에 현재 부인인 에미네 귈바란(Emine Gülbaran)과 결혼해 현재 2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두었다. 이들은 모두 미국에서 유학했거나, 현재 유학중이다. 이후 이슬람주의 정당인 민족구원당과 복지당(Refah Partisi) 소속으로 있다가 1994년 5월 27일에 이스탄불 민선도지사[]로 당선되었다.

1997년 12월 12일에 튀르키예 동부의 시이르트(Siirt)에서 시민들에게 한 연설이 "민중의 계급, 인종, 종교, 종파 혹은 지역차이를 선동하고 적대감을 심어주었다."라는 이유로 소송이 걸려 1999년 튀르키예 형법 312조 2항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4개월 후 그는 석방되었으며, 2001년 8월 14일, 정의개발당 창당멤버가 되었다.

총리 에르도안

2002년 정의개발당은 34.43%의 득표로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2003년 총리에 취임했다.

에르도안 정권은 유엔이 제시한 개발프로그램을 받아들였다. 튀르키예의 경제학자 케말 데르비시(Kemal Derviş)의 지휘 아래 일본의 경제 노하우를 베이스로 한 유엔 권고안을 잘 진행시켜, 2012년까지 10년간 64% GDP 증가, 43%의 1인당 GDP 증가를 이뤄낸다.(미국 달러의 인플레율 미반영)[] 연간 수치로 따지면 5% 정도로 개발도상국들 중에서 괜찮은 성적을 보였다[]. 경제 부총리 알리 바바잔(Ali Babacan)이 거시 경제를 맡아 통화 정책 등을 조율했다. 튀르키예 경제사정이 나아지고 연간 50%가 넘어가던 인플레이션도 진정되면서 튀르키예 국채 이자율은 1.17%에 거래될 정도로 경제가 안정됐다.

에르도안은 일단 신자유주의자로 보기는 어렵다. 그 증거로 에르도안은 2003년 집권하면서 노동법을 크게 강화했다. 주당 노동시간 기준을 45시간으로 하고, 연장근무를 연 270시간 이내로 제한해 노동자의 권익을 강화했다. 또 인종 차별(쿠르드인 등), 성별, 종교, 소속 정당에 따른 차별을 금하고,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금지시켰다.[] 이로서 점점 빈부격차도 완화됐고 중산층이 두꺼워졌다. 아울러 신자유주의는 개인주의와 세속성을 근간으로 하지만 에르도안은 이슬람교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튀르키예에 좀더 종교적인 색채를 가미하고자 한다.[

쿠르드 분쟁에도 일단 종지부를 찍었다. 다른 건 몰라도 1980년 케난 에브렌의 쿠데타 집권 이후 확산된 군부의 힘을 2003년 '발요즈(Balyoz, 대형망치)' 쿠데타 모의 진압사건'으로 완벽히 꺾고[],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동부지역의 PKK 영향력 확산 저지, 쿠르드 문화와 언어의 인정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에 따라 2007년과 2011년 총선에서 정의개발당은 46.6%, 49.8%의 지지율로 승리하면서[] 11년간 총리직을 지냈다.

집권 초반에는 반세속주의를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아흐메트 네지데트 세제르(Ahmet Necdet Sezer) 대통령[]이 물러난 이후 부터 반 세속주의적 정책을 펼쳤다. 정의개발당 초기에는 아흐메트 네지데트 세제르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반세속주의 법안을 내도 거부당했기 때문에 에르도안은 세제르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2000년대 초반에는 대통령이 세속주의자였기 때문에 쿠데타가 나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에르도안이 세제르로 인해 고통받았다고 후에 이야기할 정도이다. 에르도안은 세제르 재임 기간에 세속주의를 약화 시키려고 벼르고 있었고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의 갈등이 폭발한 히잡착용 문제는 2008년에 발생한 것이다. 사실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의 갈등은 2006년 후반부터 나타났다. 세제르의 임기 만기가 얼마 안 남았을 때, 튀르키예 대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지만 전통적으로 튀르키예의 대통령은 세속주의의 수호자라는 인식이 강했기에 야당들은 죄다 베토를 행사하여 선거에 불참하여 선출을 지연했다. 야샤르 뷔윅아느트(Yaşar Büyükanıt) 전 튀르키예군 참모총장은 인터넷으로 성명을 발표해 "군대는 세속주의의 수호자로서 필요한 조치를 행할 수도 있다"라는 식의 성명을 인터넷으로 2007년에 튀르키예군 홈페이지에 게시하며 군부와 야당은 압둘라 귈을 견제했지만 결국에는 압둘라 귈은 3차 투표까지 가서 대통령이 되었다. 세속주의자들은 압둘라 귈은 나의 대통령이 아니라면서 반정부시위를 벌였지만 결국 압둘라 귈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세속주의자의 대항은 정의개발당 해산 시도로 나타났다. 그러나 재판관 1명 차이로 해산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에르도안은 이 때를 기점으로 권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사법계, 군부, 경찰, 교육계를 숙청하고 자기편을 임명하면서 튀르키예 정부는 점차 에르도안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세속주의는 약해져 갔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지지가 높아지면서 언론통제를 가하고 은근슬쩍 이슬람주의적인 정책을 편다는 것. 사실 에르도안 집권 초기에는 언론자유도 향상되었지만 그는 권력을 위해서 점차 언론을 탄압한다. 게지 공원 개발을 계기로 세계적으로도 꽤 주목을 끌었던 2013 터키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에르도안을 둘러싼 부패 스캔들이 터지기도 하였다.

대통령 에르도안

총리 임기가 끝나가자 에르도안은 2010년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꿔 실제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바꿨다. 그리고 2014년 대선에 나가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으로 선출되고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과거 아타튀르크 이후 역대 대통령 관저로 이용되었던 찬카야(Çankaya) 관저를 신임 총리 아흐메트 다우트오을루에게 줘버리고 본인이 총리 시절에 만들기 시작한 총리 관저의 명칭을 하얀 궁전(Ak saray)라고 지었다. 반 에르도안 성향의 매체에서는 Ak saray의 앞에 kaç를 붙여 Kaçak Saray(밀수 궁전)이라고 부르는 중이다. 또 튀르키예 SNS에서는 "미국은 백악관이 있지만, 우리에겐 백악궁이 있다."라는 자조섞인 조롱도 빈번하다. 참고로 튀르키예 네티즌들의 성향은 커뮤니티마다 다르지만 Ekşi sözlük, Uludağ sözlük을 비롯한 거대 커뮤니티들은 대다수가 세속주의 혹은 케말주의를 띄고 있다. 괜히 에르도안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제하려 하는것이 아니다.

이 대통령궁 건설 자체도 아타튀르크 색채 지우기와 연관이 있다는 의혹이 있다. Ak saray의 부지는 아타튀르크 농장(Atatürk Çiftlik Ormanı)의 부지를 일부 차지해서 지었다. 이 땅은 아타튀르크가 말년에 취미 삼아 농사를 지으며 휴식하던 곳으로, 그의 고향인 테살로니키의 생가를 본따서 지은 집도 남아 있다. 아타튀르크 사후에 유언에 따라 튀르키예 정부에 기증해서 국영농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그 일부를 에르도안이 침범한 것. []

자신의 재집권이 헌법에 의해 가로막히자 바지사장을 앉혀 놓고 권력을 유지하는 데서 알 수 있듯, 반대파들에게 '튀르키예판 푸틴'이라며 조롱받고 있다.[] 실제로 2016년 튀르키예 쿠데타 미수 이후 서방세력의 간섭에 대항해 친러 행보를 하려고 하고 있다.# 2021년 현재 와서 보면 튀르키예에게 유리한 면이 있으면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을 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독일 정부 기밀 문서에 에르도안이 IS 등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지원한다는 글이 써있다.#

2015년 총선에서 에르도안은 정의개발당이 승리해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얻으면 헌법을 개정해[] 튀르키예를 대통령제로 바꾸고 자신이 대통령으로 장기집권을 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 놓았지만 막상 결과를 보니 정의개발당의 득표율은 40.9%에 불과했으며, 2002년 총선과 달리 군소 정당이 난립하지 않아[] 정의개발당은 의석의 3분의 2는커녕 과반의석 득표에도 실패하면서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CHP), 민족행동당(MHP), 인민민주당(HDP)에게 연정을 제안하려고 들겠지만 이 세 당 모두 다 웃기지 마라고 할 게 뻔하고 그렇다고 에르도안이 의회해산권을 사용해서 조기총선을 할 경우 지지율은 또 멜트다운할게 뻔하다. 그렇다고 이 선거결과를 승복할 시 에르도안은 임기내내 손발잘린 아무 실권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고 대통령에 올라선 보람도 없어진다. 진퇴양난. 결국 선거 참패로 인해 총리 이하 내각이 총사퇴하는 형식으로 내각이 붕괴해버렸다! 이후 정부가 구성되지 않으면서 결국 조기총선 확정.

내각 붕괴로 튀르키예 여론상에서 에르도안은 이로서 정말 손발이 잘려나갔다. 일단 그가 강력하게 주장하던 22시 이후 길거리 노점 술판매 금지도 어물쩍 야당이 없던 일로 했다. 사실 이런 문제로 그가 스스로 지지표를 갉아먹었다고 보는 분석이 많은데 세계적인 관광국가 튀르키예에서 이런 술판매 금지로 인하여 많은 자영업자들이 이를 갈아왔기에 자업자득이다.

에르도안 정부의 성향

현재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정부가 어떤 성향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학자들 간에도 논란이 분분하다.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를 배격하며, 이슬람주의 성향을 드러내는가 하면 어떤 부분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서구식 다원주의[]를 법제화하는가 하면, 직접민주주의를 이용하여 시민들의 지지 속에 군부와 연관된 귈렌주의와 세속주의자를 숙청하는 독재 정치를 대놓고 하는 중이기도 하다. 시리아 등의 주변국에는 마치 서방 열강마냥 행동하면서 정작 서방 열강을 상대로는 바나나 공화국, 나치, 딸라 대신 알라가 있다. 등의 망언을 일삼으며 나토의 일원이면서 친러 반서방 국가마냥 행동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의 패권주의를 위해 소련시절 초강대국의 기억과 러시아 정교와의 유착관계, 조지아와 크림 반도, 돈바스 전쟁, 시리아 내전에 러시아군 투입을 통한 대외세력투사, 서방세력이 러시아의 붕괴를 위해 경제제재를 조장했다는 프로파간다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블라디미르 푸틴과 상당히 흡사한 방식이기도 하다.

막상 따지고보면 에르도안이 이슬람 극단주의쪽으로 강력하게 드라이브한 건 별로 없다. 사실 이란마냥 이슬람 극단주의쪽으로 가려면 아예 헌법자체를 뜯어 고쳐야하며, 세속주의 지지세력이 강한 튀르키예 서부 해안도시의 국민들의 반대에 맞서야 한다. 사실 미국, 서방 군사작전에 의해 튀르키예 국토가 초토화되고 국민 모두가 반서방 감정을 공유해야 이슬람 극단주의로 돌아설 초석이 생기는 것이지, 사실 튀르키예 엘리트층 대부분 자녀들은 유럽이나 미국에 유학을 하고 또는 그곳에서 거주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이들이 딱히 이란 혁명 직후 이란 마냥 이슬람 근본주의로 돌아선다고 이득볼 것이 없다. 그리고 튀르키예의 최대 교역국이 유럽연합 국가들이기 때문에, 에르도안이 이 점을 마냥 무시하고 100년 가까히 공화정을 유지한 정치형태를 하루아침에 이슬람 극단주의 공화국으로 선회하는 것은 너무나도 본인에게도 위험한 발상이다. 그렇다고 현재 에르도안이 집권 중인 튀르키예가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 러시아처럼 자신을 대체할 정치세력이 없는 나라도 아니다.[], 이미 2019년에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은 이스탄불 시장을 야당에게 내줬으며[] 2018년에 있었던 대통령 재선투표에서도 51.8% 대 48.2% 로 겨우 당선이 되었기 때문에, 튀르키예내에서 에르도안이 뭘 바꿔 볼 수 있는 상황이 절대로 아니다. 어차피 국정을 유지하려면 엘리트층과 유착관계는 피할 수 없다. 다만 교육받지 못하고 종교적 성향이 심한 지역과 계층만 공략해서 자신의 입지만 다지면 그만이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걱정하는 튀르키예가 미국,서방을 버리고 이란화(化) 될 것이라는 주장은 튀르키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에르도안은 "우리 정권은 아타튀르크의 유지를 계속 이어나갈꺼다."라고 말이나마 꺼냈다. 하는 행동은 의심이 가지만.

거기다 튀르키예는 30세 미만인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할정도로 젊은 국가이다.[] 튀르키예의 Z세대라고 불리우는 젊은층[]은 이슬람에 대해서 관심 조차도 없으며, 여타 유럽, 미국, 한국 등 처럼 SNS에 본인들의 패션,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고 새로운 트렌드에 따라 사는 것에 관심이 많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전 세대와 달리 튀르키예 Z세대의 87.5%는 부모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고 한다. 거기다 에르도안의 핵심 지지층인 튀르키예 동남부 내륙 도시 혹은 시골지역에 경우 젊은이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등 도시로 이동으로 인해 인구가 줄고 있으며, 농촌의 고령화 역시 피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과연 에르도안의 권위주의식 이슬람표퓰리즘 정치스타일이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며, 오히려 한국인들의 튀르키예의 이란 화에 대한 걱정보다는 에르도안 정부 본인들이 더 걱정해야할 판이다. 에르도안도 변화된 여론을 의식하는 듯 그동안 EU, 미국과 여러 갈등을 일으키다가 2021년 3월, 앙카라 대통령궁에 EU 대사 등을 초대해 '인권 행동 계획'을 발표했다고 한다.[]

에르도안의 정치 스타일은 굳이 따지면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과 비슷한데 푸틴 역시 소련 시절의 반종교적 입장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인들의 전통문화, 정체성으로 러시아 정교회를 강하게 밀어주고 있으며, 군사적인 세력투사를 주로 벌이는 공통점에서 에르도안의 통치는 푸틴의 방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푸틴은 그냥 눈치보지 않고 반대파를 사정없이 찍어 누른다면 에르도안은 좀 더 갖출건 갖춘 정도? 푸틴은 어차피 우리식 민주주의에 러시아의 강력한 국력을 토대로 서방 눈치 안보고 '강한 러시아'를 제창하면서 그냥 서방쪽 압박을 대놓고 무시하는 거고, 에르도안은 속내는 어떻건 무늬는 친서방 민주주의고 너무 막나가면 미국이 지원할 명분이 없어지니까 그나마 좀 더 온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선 에르도안은 반 케말주의자처럼 보여도 실제론 제2의 케말을 노리는 인물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가족

슬하 2남 2녀가 있다. 아들 둘과 막내딸은 사업가이고 첫째딸은 인디애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UC 버클리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마친 뒤 사회학자로 활동중이다.


2004년 첫째딸이 결혼했다. 사돈은 기자 출신 작가이며 맏사위는 경영학박사에 교육사업가인 베라트 알바이라크이다. 2015년 이스탄불 1구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시키고 재무부 장관과 천연자원부 장관을 시켰기에 인기가 좋지 못하다.


2016년 둘째딸이 결혼을 했는데 사위는 셀추크 바이락타르로 2세대 경영인이며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 MIT를 졸업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바이락타르 TB2 무장 드론을 개발한 튀르키예 항공우주-방위산업 회사 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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