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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루스코니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3. 6. 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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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기업인 겸 정치인. 정치 권력(총리)+경제 권력(재벌)+언론 권력(최대의 언론기업 소유주)을 한 손에 틀어쥔 바 있던 이태리 정계의 한때 거물이었고, 독특한 정치철학으로 베를루스코니주의라는 용어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수많은 부정부패, 반대 세력에 대한 각종 흑색 선전 및 여성편력 스캔들로 점철된 인물임에도, 3차례 총리 역임에 성공하며 도합 약 9년간 집권해 개인으로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장기 집권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 동시에 한때 세계 GDP 5위를 기록했던 이탈리아의 경제를 침체기에 빠뜨린 원흉으로 평가받는다.

유럽축구 팬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좀 유명한데, 과거 이탈리아의 명문축구구단 AC 밀란의 구단주였다.[1] 허나 여자에 미쳐(...) 주축선수들을 다 팔아 버려서 팀을 망하게 할 뻔한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는 AC 몬차의 구단주로 4년만에 세리에 C에서 세리에 A 승격을 이뤄냈다.

2023년 6월 12일, 백혈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향년 86세.

베를루스코니 초기 생활 및 비즈니스 벤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1936년 9월 29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초기 기업가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Berlusconi는 건설 업계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으며 결국 부동산, 금융 및 미디어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로 확장했습니다. 그는 텔레비전 네트워크, 출판사 및 영화 제작을 망라하는 이탈리아 최대의 미디어 회사 중 하나로 성장한 미디어 대기업 Mediaset을 설립했습니다.


베를루스코니 정치 입문

베를루스코니는 1990년대 초에 그의 미디어 영향력과 광범위한 인기를 이용하여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1994년에 그는 보수와 자유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당 Forza Italia(Go Italy)를 결성했습니다. Berlusconi의 매력은 그의 성공적인 사업 배경, 포퓰리즘 수사, 경제 개혁 약속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 임기 및 정책 의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1994년부터 1995년까지, 2001년부터 2006년까지,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이탈리아 총리를 역임했습니다. 베를루스코니의 정책은 경제 자유화, 관료주의 감소, 감세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는 또한 새로운 고속도로 및 고속철도 건설을 포함한 인프라 개발을 우선시했습니다.


베를루스코니 논쟁 및 법적 문제

Berlusconi의 재임 기간은 수많은 스캔들과 법적 문제로 인해 손상되었으며 이는 여론을 더욱 양극화했습니다. 그는 부패, 뇌물 수수, 탈세 및 불법 관계에 대한 혐의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Berlusconi는 주로 그의 미디어 영향력과 카리스마 덕분에 강력한 지원 기반을 유지했습니다.


베를루스코니 레거시 및 영향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탈리아 정치에 미친 영향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은 기성 정당과 연합에 도전하면서 정치 지형을 재편했습니다. 베를루스코니의 카리스마와 미디어에 대한 정통성은 특히 전통적인 정치 엘리트에 불만을 품은 유권자들과 폭넓은 스펙트럼의 유권자들과 연결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논란이 많은 사생활과 법적 다툼은 이탈리아 민주주의 상태와 미디어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도 불러일으켰습니다.

게다가 베를루스코니의 경제 정책은 엇갈린 결과를 낳았다. 일부에서는 경제 활성화와 기업가 정신 장려를 위한 그의 노력을 칭찬했지만, 다른 일부에서는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포괄적인 구조 개혁이 부족하다고 비판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부패 문제를 해결하고 공공 기관의 효율성을 개선하는 데 있어 제한적인 진전을 보였습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되기까지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으며 병역기피를 한 것과 크루즈선에서 가수일을 한 걸 제외하면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건설업에 뛰어들어 밀라노 교외에 밀라노2라는 이름으로 아파트 분양을 했는데 이것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재벌이 되는 길을 열었고, 베티노 크락시 당시 밀라노 시장과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자유라디오 운동에 영감을 받아서 방송 진출이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불법으로[] 1973년 텔레밀라노라는 케이블 방송사를 차렸고, 1977년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판결로 민영방송 금지조항이 폐지되자 방송사업을 더욱 확장해서 지상파 방송사를 차렸다.

사업 확장 과정에서 자금을 어떻게 조달했는지에 대해서 마피아 연루설, 정경유착설 등 말이 많았지만, 지주회사 핀인베스트의 복잡한 지분관계로 제대로 된 수사 없이 넘어갔고, 타 군소 민영방송사(Rete4, Italia1)들의 지분을 구입하여 최종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 자신의 방송이 송출되는 광활한 방송망을 가지게 되었다. 1983년 베티노 크락시가 총리가 되자 베를루스코니는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하여 방송 규제 완화를 이끌어냈고, 그로 인해 더욱 큰 돈을 벌게 되었다. 방송 규제 완화 규정 중 일부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세확장에 잠시 지장이 있었지만, 기민당과 사회당에 정치자금을 적절하게 제공했고 1990년 생방송 뉴스 프로그램 방영까지 할 수 있게 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거머쥐게 된다.

1992년 마니 풀리테 작전[]으로 줄리오 안드레오티나 베티노 크락시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이 줄줄이 몰락하면서, 1994년 총선에서 공산당계(좌익민주당)[]의 집권이 유력해진다. 이때 베를루스코니는 전진이탈리아당(포르자이탈리아)을 창당하고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 비디오 민주주의라는 평이 나올 정도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방송망과 신문들을 총동원해서 기존 사회당[]과 기민당 지지층을 대거 확보했고, 성공한 기업가 겸 구단주로서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총선에서 승리, 우파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총리에 취임한다.

베를루스코니 사망

2023년 6월 12일, 86세로 사망했다.# 백혈병 투병 중이었기 때문에 노환에 병세가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후임자인 마테오 렌치 전 총리는 상대당임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평가를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고, 또 미워했다. 하지만 그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스포츠, 텔레비전 등 이탈리아인의 삶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인정해야 한다."

베를루스코니 결론

Silvio Berlusconi의 정치 경력은 여전히 ​​매혹과 논란의 대상입니다. 기업가에서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인 중 한 명으로 부상한 것은 이탈리아 사회의 복잡성과 미디어 및 정치와의 관계를 반영합니다. 베를루스코니의 유산은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 국가의 정치 지형에 미칠 수 있는 지속적인 영향을 상기시켜줍니다. 찬사를 받든 비판을 받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탈리아 정치에 미친 영향은 이탈리아의 최근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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