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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3. 7. 19.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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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준에 따라서 나누어지는 경계를 지나 북쪽으로 넘어감. 또는 삼팔선 또는 휴전선의 북쪽으로 넘어감. 사전적 의미는 이렇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남한 사람이 자발적 의지로 북한에 영주를 목적으로 넘어가는 행위'를 뜻한다.

월북과 구별되는 개념들로는 외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입북(入北), 자유 의지가 아닌 납북(拉北), 북한에 잠깐 갔다 오는 방북(訪北) 등이 있다. 남한에선 당연히 국가보안법상 '반국가적 행위'로 간주되지만, 북한에서는 '의거입북'이라는 말로 미화된다고 한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이전까지는 공산주의에 대한 동경이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정치 탄압으로부터의 도피[4]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월북하는 사람이 조금 있었지만, 북한이 주체사상을 내건 사이비 종교에 가까운 국가가 된 1990년대부터는 정치적 탄압이나 사상적 신념을 이유로 월북하는 일은 거의 없다. 북한이 경제가 매우 나빠지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로는 월북하러 가도 그냥 남한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경우도 많다. 간혹 범죄를 저지르고 처벌 받기 싫어서 월북하거나 경제적 빈곤, 사회 비관으로 월북하는 등 북한에서 받아봐야 (북한 기준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 가면 특히 그렇다.

월북 특징

월북은 북한과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차이가 현저하게 벌어진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이해가 불가능하지만, 단독정부 수립 이전과 6.25 전쟁 도중 월북한 좌익 세력의 경우에는 대개 납득이 가는 행위였다. 해방 정국에서 공산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계열을 포함한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적인 영향력을 가진 정치 세력이었는데, 미군정은 고문 조작 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일으키며 좌익 탄압을 본격화한다. 분단 체제가 고착화된 후 한국 전쟁 중에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사건 등으로부터 살아남은 좌익은 월북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만 해도 북한은 갑산파, 연안파, 소련파 등 여러 파벌이 존재한 연립정부의 형태로 그럭저럭 권력의 균형이 잡혀 있었기에 반공주의 성향이 매우 강했던 이승만 정부에서 활동하기 어려웠던 그들은 이에 반감을 품고 북한으로 간 경우도 있었다. 거기에 6.25 전쟁 초기에 북한에게 사흘만에 서울이 점령당하자,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이나 기타 지역에 고립된 인사들이 '이제 대한민국은 끝났구나'라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월북하거나 이를 이용해서 북한이 '어차피 전쟁은 우리가 이길 텐데 이참에 우리한테 협력하시오'라는 식으로 회유한 경우도 많다. 이 시기에 월북한 사람들로는 문예봉, 이극로, 홍명희 등이 있다.

또한 미군정이 통치 3년 동안 행정에 있어서 인민위원회와 건준을 해체시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화폐 발행 남발로 물가 폭등도 일어나고 토지 개혁도 미루는 등 정무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무능하기 짝이 없던 데 반해 소군정 내지 김일성을 위시한 정치 세력은 이보다 훨씬 유능하거나 조직력이 뛰어나서 토지 개혁을 재빨리 단행하고[5] 인민위원회를 활용해서 행정의 안정화를 도모함과 동시에 강력한 물가 통제 정책으로 물가도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공업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따라서 남이든 북이든 초토화되었던 6.25 전쟁 시기를 제외해도 광복 후로부터 몇십 년간 북한 경제가 남한보다 안정세에 있었다는 것도 월북의 큰 동기였다. 아래의 민족주의자들이 월북한 것도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면서 혹한 것이 동기였다는 것이었다.

월북자들 가운데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들도 월북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주로 1948년 남북협상 때로 대표적인 인물로 이극로와 홍명희가 있다. 이들은 원래 민족주의자들이었지만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혀 오랫동안 언급 자체가 금기 취급되었다.

월북자들 중 정치인은 상당수가 뒤끝이 좋지 못했다. 박헌영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김일성은 월북한 남조선로동당 출신들을 정적으로 취급했다. 한국근현대사 공부를 열심히 해보면 알겠지만 북한 정치판은 창립 이후에 숙청을 거듭하여 김일성파(갑산파 중 강경파와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파 두 계파 모두)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비단 한국사뿐만 아니라 20세기 세계사 전반을 공부하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지만, 스탈린부터 마오쩌둥까지 소위 현실사회주의권의 지도자들은 막상 필요하면 트루먼, 닉슨 같은 양반들이랑 악수하고 '우리는 공존을 원한다' 따위 서방에 대한 립서비스는 잘만 하면서도 자기들 손이 닿는 비 코민테른, 트로츠키 주의자, 비 마오쩌둥 계열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같은 자기 말 안 들을 것 같은 다른 좌파들을 숙청하는 데 훨씬 더 열을 올렸다.

북한 정권에서 남로당파와 갑산파 숙청 같은 좌익 내 팀킬 작업 또한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무엇을 했으며, 얼마나 열성적인 좌익이었는지에 상관 없이 김원봉 같이 노선이 조금이라도 달랐거나 조금이라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려고 했던 사상적 월북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경우가 대다수다. 다만 이러한 경우와 별 상관이 없는 학술인, 예술인은 양극으로 갈리는데, 본업에 종사하면서 괜찮은 삶을 살거나 노동 지역으로 배정 받아 활동이 완전히 끊긴 채 심한 경우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반면 일부 월북한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 가운데 극진한 대접을 받은 사람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홍명희가 있다. 해방 직후 좌익으로 널리 알려진 문인들이 월북 이후 대부분 숙청 당한 데 반해, 홍명희는 종신토록 고위직을 지내며 북한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명망을 누렸다.

또한 몇몇 납북자들이 월북자로 오해 받아서 문제가 되었다. 특히 북한 쪽에서 납치해 놓고 "공화국을 동경하여 자진 월북하였다"라고 대외 선전을 하고, 여기에 한국 정부도 동조 내지는 착각을 해서 빨갱이 취급을 받은 경우가 있다. 실제로 60~80년대에는 몇몇 납북 당한 사람들이 한국으로 돌아온 뒤 간첩으로 몰리거나 심지어 공안 사건으로 조작되기도 했다. 문단계의 정지용 시인은 6.25 전쟁 중 실종되어[] 월북인지 납북인지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월북 작가로 낙인 찍혀 1988년 납·월북 문인 해금 조치[] 이전까지는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불온 시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영화계도 마찬가지였는데, 1948년 이규환 감독의 작품 <해연>은 개봉 당시 문교부 추천 영화였지만 출연진 및 스태프진 중에 박학, 김동규, 남미림 등의 월북자가 있다는 이유로 관계당국에 의해 압수당했지만, 당시에는 월북 영화 작품의 상영을 금지할 만한 법적 근거가 없어서 필름이 회수되어 부산, 광주 등지에서 상영을 재개한 바 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 뒤엔 월북 영화인들의 영화는 전부 상영이 막혀 있었으며, 광복 이후 최초로 개봉된 한국 영화 <자유만세(1946, 최인규 감독)>의 경우는 1975년 발견 당시 독은기, 박학 등 월북 영화인들의 이름을 지우고 대사마저 전부 재녹음했다. 또한 원로 영화인들의 회고록에서조차 월북 영화인들은 역할이 축소되거나 행적이 왜곡돼 있고, 1986년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북으로 간 여배우>에서도 반공 이데올로기를 위해 월북 영화인들의 행적을 암울하게 그려내기도 했다.

1989년 월북 예술인 해금 조치 이후에도 월북 영화인들은 1945년 8.15 광복 전에 제작된 작품들이 남아 있지 않아 논외 취급을 받았고, 1980년대 후반 이후 이효인, 변재란 등에 의해 북한 영화 연구가 진전되었다 해도 월북 영화인들이 활동한 1950~60년대 작품들은 자료가 미비해 잘 다뤄지지 못했다. 그나마 1990년에 한국필름보관소가 일본으로부터 <망루의 결사대(1942, 이마이 타다시 감독)> 등 일제 말기 영화 3편을 입수해내 월북 영화인들의 행적을 찾아냈다. 1992년 제작자 이강수가 프랑스에서 공개한 <마음의 고향(1949, 윤용규 감독)>도 있지만 이후 지지부진해지다가 2003년 이효인이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으로 취임한 뒤 중국과 러시아 등지의 영화자료원을 찾아다니면서 일제 말 영화들을 점차 발견해 문예봉 등의 월북 영화인들의 행적을 발굴했지만, 이들에 대해서 영화학계 등지에서 관심을 잘 가져주지 않았다. 이러한 사연은 영화연구가 한상언의 2019년 논문 <해금할 수 없는 것을 해금하기>에서 잘 다루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던 엄항섭, 조소앙, 김규식, 안재홍 등도 납북(납치되어 북한에 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 시대 때 자발적으로 월북했으며 북한 간첩으로 대대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식으로 알려져 버렸다. 그래서 대한민국에 거주하던 그들의 가족들은 연좌제의 피해를 봤다. 안재홍의 아들인 안정용은 혁신 계열 정치 활동을 했으나 납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어 생활하는 데 있어서 매우 곤궁했다고 한다. 이들은 6.25 전쟁 후 반공 성향이 강해진 국민들의 심적 안정과 정권의 정통성 홍보를 위해 자진 월북으로 결론 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자진 월북자와 납북자의 가족은 국가시험에 응시하거나 사관학교에 지원할 수도 없었고, 출국도 제한을 받았던 데다가 지독한 감시는 물론이고[] 거주지를 옮기는 것까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고문까지 당하거나 아예 간첩으로 조작되기도 했다. 사실 남한 정부는 남한에 비해 북한의 경제 성장과 주민 생활 수준이 높았던 데다가 북한의 도발이 지금보다 낮았던 60년대와 70년대 초 상황에서 '이북은 어떻더라'는 귀환 어부들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북한이 납북 어부에게 간첩 교육을 시킨 사례도 있었기에 의심은 더욱 깊었다고. 또 어부들의 잦은 납북, 귀환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의도적인 행위로 비쳐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분단 체제가 만든 비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반대로 자진 월북하려던 사람을 납북으로 둔갑시키는 경우도 있었는데,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의 윤태식이 그 예이다.

지금은 종북주의자가 아니고서야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는 일이 되고 말았다. 월북은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짓 중 손에 꼽히며 자신의 인생을 완전한 막장으로 끌고 가는 지름길로 사실상 그 위험성은 도박, 마약, 사채, 보증을 한 번에 하는 것보다 훨씬 높다. 선전해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북한으로 넘어가도 북한에서 도움 안 된다고 그냥 남한으로 되돌려 보내준다. 물론 1980년대까지야 그런 사람도 잘 받아주기는 했지만 북한도 국가에서 먹여 살리던 시대는 한참 전의 일이고 국가 재정의 빈곤화로 개개인이 알아서 장마당에서 벌어먹는 세상이라 그냥 포기하는 것이다. 범죄자 같은 사람이야 그냥 안 받아들이니만도 못한 작자들이기도 하고. 애초에 북한에서 일반인들에게 집 주고 쌀 주고 했던 것도 1990년대 초반까지지, 그 이후로 가면 식량 배급도 잘 못해줘서 서민들이 장마당에서 부업으로 벌이하는 것이 일상이 된 지도 이미 30년 가까이 되었다. 즉, 월북해도 돈 없으면 그냥 듣보잡 신세인 것이고 떵떵거릴 정도로 잘 먹고 잘 살려면 최소한 남한 돈 수천만 원 정도의 돈은 챙기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오랜 시간 동안 인프라 보수 같은 것도 제때 진행되지 못해서 철도는 낡아빠졌고, 도로는 비포장 천지에 수도나 전력 인프라도 낙후되어 있어 전기를 그나마 마음대로 쓰려면 비싼 돈 들여 태양열 전지를 사야 하고, 물도 깨끗한 거 마시려면 비싼 돈 들여서 정수기를 사든지 아니면 생수를 사다 마셔야 된다. 즉, 북한 물가가 싸다 해도 북한에서도 남한 중산층급의 생활을 하려면 생각보다 생활비가 많이 든다는 얘기이다. 비록 공공 요금이나 교통비는 매우 값싸고, 부동산도 남한에 비하면 월등히 싸기는 하지만 공산품은 수입품이 많아서 생각보다 싸지 않고, 공공 요금이 싸다고는 해도 인프라가 워낙에 낙후되어 있어서 추가로 돈이 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 드라마 등 서방 국가 대중매체도 잘못 보다 걸리면 며칠간 험하게 삽질을 할 각오도 해야 된다. 물론 1980년대 이전의 빈곤한 생활을 애써서 경험하고 싶으면 못할 것도 없기는 하지만(...) 북한 당국에서도 그런 사람은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며 그냥 남한으로 되돌려 보내준다.

하지만 북한이탈주민의 월북 시도는 아직도 드물게 발생하는 편이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또 탈북자라는 좋지 않은 시선 때문에 남한 생활에 회의를 느끼거나, 북에 있는 가족과 고향이 그리워 재입북을 시도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심지어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가, 또 다시 북한을 탈출하여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엄청난 케이스도 드물게 있다.

의외로 간첩들은 합법적으로 제3국을 경유하면 그만이다. 북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상당수가 무역업이나 교역, 유학, 외화벌이 사업이나 식당 근무, 제조업체 근무 같은 해외 파견 근무, 친척과의 만남으로 중국에 출입국을 하는 경우가 상당한지라 이런 쪽 직업이나 관계를 한다고 적당히 신분세탁을 하면 되고, 남한 입국의 경우에는 중국에 진출한 남한 사람들이나 조선족들과 적당히 인맥 관계 만들어서 입국하거나 의심 받으면 몽골이나 베트남, 캄보디아 등으로 가면 된다. 중국에서도 간첩은 간첩이니 뭐 잡기야 하겠지만 일단 명목상 우호국인지라 무작정 잡는다고 난리를 치는 것은 모양새가 아니기 때문에 대만 간첩 잡는 것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잡지는 않는다. 그래서 번거롭게 땅굴을 파거나 휴전선을 넘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1990년대에 휴전선을 통해 무장 공비가 넘어온 경우는 있었다. 최근 간첩들은 예전처럼 도보 또는 잠수함 등을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어오지 않고 위조 여권을 가지고 조선족, 탈북자, 한국계 일본인 등의 행세를 하면서 몰래 들어온다.

월북 기준에 대한 논쟁

 

월북자를 해방 후 38선 이남에 살다가 이북으로 넘어간 이들, 그리고 휴전 후에는 휴전선 이남에 살다가 이북으로 넘어간 이들로 분류한다는 기준은 명확하다. 하지만 고향이나 활동 지역이 대한제국/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북부 지방이었으며,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간 이들을 월북자로 분류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물론 한국 입장에서 보면 북한으로 '가버린' 인물들이라 월북자로 분류할 수 있지만, '월북한' 이들 입장에서는 그냥 고향으로 돌아갔다고도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인 백석이나 작곡가 이면상 같은 경우에는 각각 평안북도 정주와 함경남도 함주 출신이지만, 남한에서는 일반적으로 월북자로 분류된다. 이 때문에 월북이라는 단어의 기준을 재정립하거나 북한 지방이 고향이었던 인물들에 대한 재분류용 단어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귀북이라든가...

이런 모호한 면은 냉전 시절에 위의 납북자를 자진 월북자로 왜곡한 것처럼 악용되기도 했다. 본인은 사회주의/공산주의와는 상관 없이 그냥 고향에 있고 싶었거나 혹은 다른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처 떠나지 못했을 뿐인데, 마치 공산주의자라서 북한에 협력하기 위해 남은 것으로 왜곡한 사례가 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자유 대한'으로 월남했어야 마땅한데[13] 북한에 남았으니 '빨갱이'라는 식. 위에 언급한 백석과 그의 작품들도 이런 식으로 다른 월북 작가와 함께 금지했었다. 리면상이 작곡한 유명한 노래가 있는데, 작곡자 생략하고 '민요'로 언급해서 남한에서 잘만 불렸다

월북자들의 결말

흔히 넘어가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귀빈 대접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건 북한 경제가 여유가 있던 1990년대 이전의 일이다. 북한의 경제가 급속히 빈곤화된 1990년대 이후로는, 상술하듯이 평범하게 경제적인 동기나 소속된 공동체에 대한 비관으로 인한 월북, 또는 범죄를 일으킨 다음에 북한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그냥 되돌려 보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고위급 인사 또는 탈북을 했다가 다시 북한으로 넘어간 재입북자 정도만 체제 선전용으로 쓸모 있으니 대접 받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자들도 얼마 가지 않아 대부분 말 그대로 증발하게 되는데,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월북자들은 따로 구역을 정해서 아파트처럼 살림집으로 관리되어 있는 곳에서 생활을 하며, 가끔씩 당국에서 월북한 고령자의 생일잔치를 할 때 장병들을 모아다가 생일 축하파티를 열어주곤 하는데, 월북한 군인을 동원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1961년에 소대원들을 데리고 월북한 당시 소위였던 이태복은 지난 2018년, 80세를 맞이하여 생일상을 차려주었는데, 그것이 대남선전전단을 통해 알려지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의 최신 사정에 능통하다는 이점 때문에 대남공작 관련 훈련 기관의 교관 내지는 대남방송 관련 업무에 배치하는 경우가 월북한 사람들 중 일부이다.[] 대외 선전 값어치가 높은 사람의 경우는 방송에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또한 소수이다. 조선일보 NK 리포트에 따르면, 고위직의 월북자를 제외한 그냥 월북자들 중에 적어도 2~3명 정도는 선전 잡지에 고정 출연한다고 한다. 또한 대남선전도 사실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에 이런 류의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왼쪽에서부터 차례로 설명을 하자면 이래성이라는 사람은 북한에서 공훈배우다. 한국전쟁 도중에 인민군에 투항한 사람이다. 두 번째에 있는 김세연의 경우 부대명이 안 나오고 머슴이라고 나왔는데, 1975년 대성동에서 납치된 농민으로 추정된다. 3번째는 석정현이라고 81년도 파주1사단 수색대 중대장으로 단기사관 12기출신 육군 대위로 월북을 했다. 4번째는 박현문이라는 사람으로 82년도 12사단에서 북한으로 월북했는데 저 사람은 너무 굶주려서 배고파서 참지 못하고 월북한 걸로 알려져 있으며 넘어갈 때 지뢰를 밟고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5번째는 이필우라는 사람인데 88여단출신이고 현재는 22사단이다. 81년 10월 분대장과 동기를 총으로 쏴죽이고 월북을 했고 이 때문에 북한에는 이필우계곡이라고 불리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필우의 소속 부대였던 88사는 88여단의 오기로 보이고, 윤치기의 소속 부대인 동경사는 동해경비사령부를 뜻한다. 또한 김종운의 소속 부대가 미 2사인데, 김종운은 카투사 출신이다. 참고로 김종운은 미2사단 보병A소대에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월북을 했다고 한다. "서울 마포출신 도시빈민인 내가 성공해봐야 얼마나 성공하겠나 나는 북한에 가서 성공할테니 나를 잊어주세요" 라는 편지를 쓰고 월북을 했다. 현재 평안북도 정주시 양정사업소 지도원으로 근무 중이라고 하는데 밝혀진 바가 없다. 이 사람은 한양대학교 운동권 출신이었다고 한다.

월북자들은 보다시피 1980년대까지는 이런 삐라에 출연했었다. 현재 정보가 없기 때문에 저 삐라에 출연한 저 사람들의 생사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2018년 대남선전방송에 사진에 있는 사람들 중 80%는 모두 조선인민군 군관복을 입고 출연했기 때문에 살아있는 걸로 보여진다. 여담으로 윤치기라는 사람은 북한에서 윤혁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했고 이 사람에 대해 어느 사람이 댓글을 남긴 바 있는데, 70년대 후반에 눈길을 뚫고 플라스틱 통을 이용해 월북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다른 곳에서는 윤치기라는 사람은 1970~1980년대쯤 탈북을 했다는 말도 있다. # 6.25 전쟁 직후부터 70년대까지는 대한민국 내 사정에 정통하거나 친척과 같은 연고자가 있는 것을 이용하여 남파 간첩으로 훈련시켜 역침투를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순재가 주연한 고영남 감독의 영화 '탈출' 이 바로 이런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 모 국군 하사가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정 하사가 북에 가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지만 적어도 그 영화에서는 이순재가 연기한 정 하사는 자진 월북이 아니라 비무장지대에서 납치되어서 자진 월북으로 위장되었었다. 그가 간첩훈련소에서 만나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진 월북자이다. 결국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거듭난 척 연기를 하여 북한의 신뢰를 받고 남파 간첩으로 대한민국에 돌아오자마자 동료들을 모두 쏴죽이고 국군 부대에 투항한다. 남과 북 모두 연좌제라는 것을 했던 이유가 사실 이런 인간 관계를 염두에 두고 첩보 활동을 방지하고자 실행했던 방침이었다.

2013년 10월에는 월북자 6명과 시신 1구를 돌려보냈는데, 이 때 송환된 사람들은 월북한 이후 2~3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남쪽으로 송환되었고[] 여기에 한 명은 부부 불화로 살해한 사실까지 확인되어 모두 남한에서 처벌 받았다.[] 이것은 대한민국 당국에 '우리도 월북자 돌려보낼 테니까 탈북자 문제로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북한 입장에서도 돈이 없는 채로 월북하면 뭘 뜯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문제를 일으킬 이유도 없다. 위에서 월북 시도를 하다가 거절 당한 이야기처럼 본인이 북한의 기준으로 대한민국에서 거물이라든가 소수의 특기를 지닌 사람이 아닌 이상 북한에서도 월북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부분 돌려보낸다. 그리고 국정원에서 인수해 간다. 2010년대 이후에는 북한에서 월북을 받아들인 것은 최덕신의 아들로 상징성이 있는 최인국 정도이다.

월북했다가 기적적으로 탈북해 살아서 남한으로 돌아오게 되면 가장 먼저 가는 곳은 시도경찰청 보안수사대, 방첩사, 검찰청 공공수사부 조사실, 국정원일 것이다. 대한민국으로 돌아와도 몇 년 정도 교도소에서 지내야 할 수도 있다. 사안에 따라 국가보안법상으로는 무죄가 될지는 몰라도[] 최소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처벌된다.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모르고 월북하더라도 북한에 방문하려면 반드시 통일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남북교류협력법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이 되면 아주 운이 좋아서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 내지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는데, 바꿔서 말하면 인생에 빨간 줄 그이는 건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에 자진해서 온 외국인들 중에서 한국인보다는 미국인이 더 좋은 대접을 받을 것이다. 예를 들면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처럼. 그들의 자칭 '원수 미제놈들이 어버이 수령님의 은혜를 깨우치고 귀순했다'는 등으로 온갖 선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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