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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환(축구 감독)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3. 10. 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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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박종환 선수 경력

황해 옹진 출신으로 월남해서 춘천에 정착하였다. 춘천고등학교를 3년간 다녔으나 대학 드래프트에 뽑히지 못해 1년 더 다녔는데 ], 이 때 청소년 대표팀에 뽑히면서[] 경희대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고 한다.[] 이후 경희대를 졸업한 후 석탄공사 실업팀에서 잠시 선수생활을 했다.

박종환 지도자 경력

청소년 대표팀에는 뽑혔으나 스타플레이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은퇴하고 당시 프로팀 역할을 했던 실업팀 지도자가 아니라 학교 체육부로 가서 단국공고에서 체육교사 겸 감독을 맡았다. 이때도 틈틈히 심판생활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프로팀 감독시절 심판판정에 불만을 품고 그라운드에서 난동을 부리다 수차례 퇴장당하거나 출전정지를 먹었다. 어쨌든 단국공고 이후 성남고, 유신고 감독을 거쳐 전남기공으로 실업계에 진입하고, 이후 서울시청을 맡는다. 서울시청 재임기간은 무려 14년(1975~1989)이나 된다.

서울시청 실업팀의 감독을 맡던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벌떼축구로 U-19 대표팀을 4강에 올려놓으면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당시 산소가 희박한 멕시코 고지대에 적응해야 한다면서 마스크를 씌우고 풀타임 연습 경기를 시켰다는 전설같은 일화가 전해지며, 결국 희박한 산소를 체험하며 훈련한 것이 적중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실업 강자인 기업은행 팀과의 연습 경기에서 9-2로 승리했는데,[] 프로선수들한테 2골 실점에 대한 벌로 경기 후 운동장 20바퀴[]를 돌게 했다고 한다.[] 소위 만화 외인구단을 방불케하는 지옥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해외 언론에서 대표팀을 표현할 때 쓴 'Red Furies'는 붉은 악마라는 명칭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때도 전반이 끝난 후 라커룸에서 플레이를 제대로 못한 선수들의 따귀를 때렸다는 후일담이 보도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엄청난 지도력을 인정받고 있었으나, 뒤에서 후술할 축협의 왕따논란이 좀 있었다. 당시 프로축구가 막 출범했고, 대중들은 이런 엄청난 업적을 세운 박종환도 당연히 프로팀 감독으로 영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박종환은 일화 천마가 창단될 때인 1989년까지도 프로에 코치로도 진입하지 못했다. 그와 동시대에 감독직을 맡았던 김정남(1940년생)은 그보다 3살 아래이며, 이회택(1946년생), 고재욱(1951년생)은 거의 한세대 차이가 난다. 이때문에 박종환 왕따설은 당시부터 널리 퍼져있었다. []사실상 U-20의 업적이 아니었으면 박종환은 수많은 무명 아마추어 지도자의 한 명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1989년 일화를 맡은 후에도 신인 위주의 신생팀을 특유의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지도했다. 당시 그의 불같은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1989년 8월 럭키금성 황소와의 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가 관중 난동 사태를 자초해 8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고, 9월 포항제철 아톰즈와의 경기에서 주장 김용세가 전반에 퇴장당하자, 화를 못 참고 경기장에 난입해 심판에게 쪼인트를 깠다.. 당시 그와 함께 항의하던 게 원흥재 수석코치[]와 이장수 트레이너..

이 사건 이후 인터뷰에서 반성은커녕 협회와 심판을 욕하는 등, 이로 인해 1년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아 원흥재 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일화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이회택 감독이 사임하자,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감독을 위해 징계가 9개월로 삭감돼 준결승에 이끌고 팀에 복귀했다.

1991년에는 팀 주장이었던 김용세와 훈련 중 갈등을 보이며 김용세를 은퇴시켜버리기도 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심판 판정에 물의를 일으키긴 했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줬다.

바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K리그 3연속 우승의 업적을 달성한 것이다. 소위 선진축구를 배웠다는 차범근 당시 현대 감독조차 박종환의 지도력에 대해 "대단하다"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일화 천마에서 안익수, 고정운, 신태용, 이상윤, 김경범, 이영진, 박남열, 한정국, 이기범, 박광현, 하성준, 이종화, 이태홍 등 유망주나 빛을 못 본 중고 신인들을 일약 전국구 스타로 끌어 올렸고, 이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재부임해 위의 선수들을 주축 선수로 기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승 포상금과 계약금 미지급, 감독의 동의 없이 선수 트레이드[]를 놓고 박규남 선수단장과 면담한 뒤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1996년 4월 시즌 첫 경기를 앞두고 감독직을 전격 사임한다.

박종환 지도자 스타일

공격적이고 다양한 전술로 재밌는 축구를 바탕으로 청소년 대표팀 4강 진출과 일화 천마[]의 리그 3연패의 성과를 거둔 명장이라는 평가와 강압적인 지도 스타일을 가진 구시대 지도자라는 명암이 공존하는 지도자이다.

현역 감독시절 경기 당일 쓸만한 수를 6가지 정도 강구해놓고 시합에 임했을 정도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며, 공격적이면서 재밌는 축구를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일례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축구 결승전 상대였던 일본팀 모리야스 감독이 발빠른 공격진 4~5명을 전방으로 보내 한국 수비진을 흔들었던 벌떼 공격전술은 이미 박종환 감독이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구사하며 준결승까지 진출한 성과를 거둔 검증된 작품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빠따" 라고 불릴만큼의 강압적인 지도 방식인데, 이에 상당수의 선수들의 반발을 사고, 일부 선수들의 고의 태업설 루머까지 내도는 등 상당히 악명 높다.

물론 이는 그의 나이를 감안해야 하는데, 과거 운동선수간의 위계질서가 엄격했고 폭력이 막연했던 것들을 보면 이러한 강압적인 지도방식과 체벌 등이 잘못된 일이라는 인식을 전혀 하지 않고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시대가 바뀌었고 그만큼 선수들과의 소통과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해진 만큼 이는 그의 지도자로서의 결함으로 봐야한다

박종환 은퇴 이후

이후 여주 FC를 떠난 뒤로는 근황이 알려지지 않으며 사실상 은퇴한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던 2022년 2월 TV조선의 스타다큐 마이웨이를 통해 근황이 알려졌는데, 주변 사람에게 빌려준 돈을 제대로 못받는 등 전재산을 사기 당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물론 떠돌이 생활을 하며 상당히 어렵게 생활하고 있으며, 생활고에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다고 한다.

노령 연금 30만원과 아들이 주는 용돈 30만원가지고 겨우 생활했고, 자존심이 세 신세지는 것도 싫어한 나머지 축구 후배들이 후원금을 모아줬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지인의 도움을 받아 한 여성 분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박종환 사망

2023년 10월 7일, 코로나 감염의 후유증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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