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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연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4. 4. 2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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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기업인. 한화의 회장이다.

1952년 2월 7일에 김종희와 강태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종희는 자식들에게 “남자는 술도 좀 마시고, 담배도 피워 보며 단 맛 쓴 맛 다 맛봐야 한다”, “어차피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나중에 훌륭한 인물이 되려면 쓸 데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며 호연지기를 키울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1981년에 김종희가 지병인 당뇨병 합병증과 신부전증으로 고생하다 유언도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함에 따라, 29세의 어린 나이에 한국화약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하고 재계서열 6위의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능력으로 유명하다. 이는 동생 김호연과의 상속 다툼을 하는 원인이 된다. 김종희가 세상을 떠날 당시 김호연은 공군 학사장교로 복무하고 있었기에 기업 경영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김승연이 홀로 한국화약그룹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남동생 김호연과 10여 년간 상속 다툼을 벌인 끝에, 결국 1990년대에 김호연이 빙그레를 가지고 독립했다. 빙그레 이글스가 한화 이글스로 바뀐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누나 김영혜도 1996년 제일화재를 이끌고 독립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에 제일화재의 사정이 나빠지면서 다시 한화그룹에서 인수하고 합병하였다.

김승연의 장인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서정화 국민의힘 상임고문. 큰아버지 김종철도 1980년대 한국국민당 총재를 지낸 고위 정치인이며, 작은아버지 김종식도 고위 정치인이다.

김승연 회장을 비롯한 범한화가는 꽤 독실한 모태 성공회 신자들이다. 아버지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어머니와 아내도 독실한 신자다. 국내에는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보다 인지도가 다소 밀리는 성공회에서 가장 유명한 신자일 듯. 소년 시절엔 성공회 성당에서 복사 활동을 했으며, 1997년에는 성공회대학교 이사장이었고, 성공회대에 일부 대금을 면제해 주는 형태로 대학본부 건물을 지어주어서, 건물 이름이 승연관이 되었다.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논란 때문에 한때 건물 이름을 바꾸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으나 흐지부지 되었다

김승연 강인한 의지와 실행력

 목표 달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행하는 리더


김승연 뛰어난 전략적 사고력

 미래 변화를 예측하고 적절한 전략을 수립하는 능력


김승연 탁월한 소통 능력

 직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능력


김승연 가치 중심 경영

 윤리와 책임을 중시하는 경영 철학

김승연 의리왕

언론에서 의리 있는 남자라고 자주 다룬다. 화끈한 성격으로 유명해서 사원과 고객에 대한 신용과 의리를 강조한다. 한화그룹의 가족적인 분위기나 그에 따른 회장님의 여러 일화를 봐도 그렇다. 이는 부전자전이다. 이리역 폭발사고 때 아버지 김종희는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기 재산 90억 전부를 피해자와 이재민들을 위하여 사용했다. 지금의 90억과 1977년 당시 90억의 가치가 천지차이임과 이후에 벌어진 다른 대형사고에서 사건 책임자들이 사과만 하고 물질적인 지원을 해준 적이 거의 없음을 생각하면 대단히 양심적인 케이스다. 참고로 1978년에 완공된 그 유명한 은마아파트의 분양가가 당시 돈으로 2,000만원이 조금 넘었다. 지금 시세로 비교해 보면 100배는 차이가 나나 대략 계산해도 50배 정도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서울 프라자호텔 전면 모델링 때문에 호텔 문을 3개월 동안 닫게 되자, 쿨하게 모든 직원(600여명)에게 60일 혹은 90일간 유급휴가를 줬다. 또한 IMF 외환위기 당시 한화에너지를 현대정유에 넘길 때 돈을 20~30억원 덜 받더라도 100% 고용승계를 반드시 지키라는 조건으로 매각협상을 하기도 했다.

한화그룹 밑에 있던 경향신문이 1998년 계열분리될 때 지분을 무상으로 우리사주조합에 넘겨주었고 경향신문의 부채 5천3백억원을 그대로 떠안았으며, 그 후로도 직간접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다. 진보적인 학회를 후원하기도 하고, 진보지(예를 들어 월간 말)에 꾸준히 그룹 광고를 내기도 했다. 진보적인 학풍으로 유명한 대학인 성공회대를 후원하고 있고 재단 이사장까지 지냈다. 재정지원 뿐만아니라 성공회대 학생들을 갤러리아 등 계열사에 인턴으로 고용해주고 정식 채용까지도 해준다. 아무리 성공회 신자라지만 재벌 총수가 학교 경영권이나 금전적 혜택을 기대하지 않고 이런 기부를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는 아니다.

1995년 교통사고로 하반신 척수마비가 되어 제대로 일을 못하게 된 이 모 직원을 임원으로 승진시키고 계속 근무하도록 미국 지사로 보내주었다. 또 징역형을 마치고 출소한 후에는 그 동안 심려끼쳐 죄송하다며 한화 전 직원에게 보너스를 지급하기도 했다. 최말단 갤러리아백화점 캐셔가 받은 돈이 무려 50만원.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북한의 잠수함의 경로를 한국에 유출해 간첩 혐의로 처벌받았던 재미동포 로버트 김은 한국 정부도 선을 그어서 생활이 어려운 상태였는데 딱히 인연도 없던 김승연이 생활비를 대주었다고 한다#.(당시 북한 잠수함에 대한 정보는 기밀로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로버트 김은 자신의 행동이 간첩죄가 될 줄 몰랐을 것이다. 당시 냉랭했던 한미관계 때문에 처벌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지금은 대전의 자랑이 된 대덕테크노밸리가 세워진 것도 김승연의 결단 덕분이었다. 한화 이글스의 우승 축하 파티에서, 홍선기 당시 대전시장으로부터 산업단지로 개발하려는데 한화가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았다. 사업성이 낮다며 그룹 내부에선 난색을 표했지만, 김승연은 대전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사업 분석과 시행을 지시했다. 그 결과 2018년 기준 연매출 18조원, 임직원 35,000명에 이를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2003년 6월 30일 전 한화 이글스의 투수였던 진정필이 백혈병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등지자 그 동안 누적되었던 치료비와 장례비까지 모두 지원했다고 한다.

2009년 4월 예술의전당은 한화그룹의 후원 10주년을 맞아 감사의 뜻으로 종신회원증을 전달했다. 후원에 어려움을 겪은 예술의전당 ‘교향악 축제’를 위해 10년 동안 단독으로 후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기관지 파열로 8강전을 포기한 복싱 선수 백종섭에게 위로금 3,000만원을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발생한 후 1년 지난 2011년 3월 20일 천안함 승조원 유가족을 한화그룹 계열사에 우선 채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에 46명의 천안함 희생자 중 36명의 유족이 희망했으며, 이중 2010년도에 취업을 희망한 가족 5명 전원이 입사해 다니고 있으며, 2021년 현재 7명이 한화그룹에 근무하고 있다. 2015년 2월 총 12명이 각 계열사에서 근무중이며, 2월 초에 2명을 추가채용하였다. 즉 5년 동안 꾸준히 채용 중이라는 것. 여기까지만 해도 정말 개념찬 행보인데, 한화 이글스 경기에 천안함 유가족을 초청하여 시구, 시타 행사도 진행하고 초등학생, 중학생을 대상으로 천안함 견학도 하고임직원들이 천안함 묘역을 찾아가기도 한다.천안함 묘역 찾은 한화임직원도 역시나 유가족들을 초대해 격려했다. 천안함을 잊지 않고, 그 유족들을 확실히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1년 9월 14일,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있었던 최동원이 지병으로 사망하자, 지병으로 수 년 전에 팀을 떠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비는 물론 그룹 차원에서 장례식 비용 지원을 지시했다. 이 모습은 최동원의 친정팀이던 롯데의 행태와 그야말로 극과 극의 비교가 되며 야구 팬들과 여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한편 팀이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당시에는 전 직원들에게 수십만원씩 특별 포상금을 준 바 있다. 그것도 정직원뿐만 아니라 협력직이며 미화직이며 한화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줬다.

2014년 한화건설의 이라크 공사 현장을 방문하면서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광어회 600인분을 떠 가지고 비행기로 실어갔다고 한다. 사막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가장 먹고 싶은 게 뭐냐고 하니 사막이라 회를 먹고 싶어한다는 말에 "그럼 여기서 떠 가지고 가지."했다고 한다.

2015년 7월 3일 울산광역시 소재 한화케미칼 폭발 사고로 협력업체 직원 6명이 숨지자, 한화그룹 임직원에 준하는 보상을 지시했다. 비슷한 사례에서 협력업체 직원들은 보상에서도 차별받는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그래도 이번에도 의리있게 대처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아래에 서술할 무지막지한 흑역사들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게 잊혀지지 않고 이미지의 일부로 강하게 자리잡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보 때문인지 다른 재벌가에 비해서 그렇게까지 이미지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상술한 사례 이외에도 긍정적인 미담들이 여럿 나오기 때문에, 돈만 많고 개념없는 졸부가 아니라, 자기만의 특이한 원칙에 따라 어느 방향으로든지 튈 수 있는 복잡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이 가장 크다.

김승연이 이렇게 의리를 강조하는 성향을 지니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이자 한화그룹 창업주인 김종희의 영향이 크다.

마무리

김승연 회장은 앞으로도 한화그룹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사회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할 핵심 기술 개발과 해외 시장 진출 확대에 힘쓰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으로서 사회공헌 활동을 강화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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