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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자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5. 1. 25.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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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희대의 경제사범이자 사기꾼.

1944년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태어났다. 장영자 사건 당시 김대중,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인척관계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김주승의 前 장모로도 알려졌으나 김주승은 생전에 그녀의 딸과 이혼하였다

1944년 10월 25일 전라도 목포시 죽교동에서 장병준과 이화섭 사이에서 3남 4녀 중 3녀로 태어나 1953년 서울특별시로 올라왔다.# 명동성당 옆에 있던 계성여자중학교와 계성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기실업초급대학 보육학과에 다니다가 숙명여자대학교 교육학과로 편입학하여 졸업하였다.

대학생 시절 결혼을 두 번 하였으나 모두 이혼하였고 부유한 집안의 내력을 앞세워 이철희[8]와 호화로운 결혼식을 치렀던 것으로 알려져 사회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1982년 남편을 앞세우며 고위층을 대상으로 한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 사기사건인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을 주도해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1991년 가석방된 후에도 용인술, 처신에 대한 자신감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언론 보도를 내는가 하면 다시 시중 은행의 주요 간부들을 자신있게 찾아다녔다. 하지만 1994년에 다시 140억원대 어음사기 사건을 저질러서 4년간 복역하게 되었다. 일명 '2차 장영자 사건'으로 여기에 연루된 동화은행과 서울신탁은행에도 불똥이 튀어 은행장들이 사임하고 이들 기관들도 징계를 받았다.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8년에 8.15 특사로 석방되었으나 2000년 구권 화폐 사기사건으로 교도소에 재수감되었다. 2016년 출소 예정인 줄 알았는데 2015년 1월 22일 출소했다. 2018년 12월 20일자 언론 보도를 통해 출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15년 7월부터 2017년까지 4차례에 걸쳐 사기죄를 저지른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결국 2020년 4월 9일 대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면서 4번째 실형이 선고되어 사람은 고쳐 쓸수 없다는 말을 그대로 보여주는 산증인이 되었다. "사업 자금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지인을 갈취하고 "남편 이철희의 삼성전자와 에버랜드 관련 증권을 현금화한다"고 사람들을 속였다고 한다.

남편 이철희 역시 그 사건의 공범으로 몰리며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

2025년 1월 24일, 154억짜리 위조수표를 쓴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 이로써 장영자는 총 5회, 도합 34년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장영자 화려한 시작과 파란만장한 인생



장영자는 뛰어난 미모와 재치를 바탕으로 사회 상류층에 진출하며 화려한 삶을 누렸습니다. 부유한 집안의 자제와 결혼하며 사회적 지위를 얻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장영자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사기 사건



그러나 장영자의 화려한 삶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82년, 남편 이철희와 함께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어음 사기 사건을 저지르며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7,0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 쳐 대한민국 경제를 흔들었고, 정치권까지 연루되면서 사회적 파장이 매우 컸습니다.



장영자 끊임없는 사기 행각과 법의 심판



장영자는 첫 번째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했지만, 출소 후에도 자신의 범죄 사실을 반성하기보다는 또다시 사기 행각을 이어갔습니다. 여러 차례 추가로 사기 혐의로 기소되어 수감과 출소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장영자 사건이 남긴 교훈



장영자 사건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일탈 행위를 넘어, 우리 사회의 허점과 부조리를 드러냈습니다. 탐욕과 허영심이 만든 비극이었으며, 사회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든 대형 사기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화려한 외모나 말솜씨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며, 투자나 금융 거래 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장영자 끊임없는 논란과 궁금증



장영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입니다. 그의 화려한 삶과 범죄 행각, 그리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의혹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과연 그는 어떤 동기로 범죄를 저질렀을까요? 그의 인생은 성공과 실패, 화려함과 추락을 모두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이야기입니다.

장영자 가족 및 친인척 관계

가족 및 친인척 관계가 여러모로 복잡하면서도 화려하다.

장영자는 대학생 시절 2차례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 나중에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인 이철희와 재혼했다. 이 사람은 대북 작전 쪽에서 활동한 전문가이며, 김대중 납치 사건을 비롯한 대규모 공안사건에도 개입한 인물이다. 장영자가 유명해지게 된 1982년의 사기 사건도 이 남편과 함께 저질러서 부부가 나란히 교도소에 들어갔다.

자녀는 1남 1녀가 있는데 모두 이철희와 결혼하기 전에 얻은 자식들이다. 이 남매는 부모가 이혼한 후 아버지 밑에서 컸고 아버지가 크게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유학생이 드물었던 80년대에 유학을 다녀오는 등 경제적으로 유복하게 자랐다. 하지만 남매 모두 어머니 장영자와 얽히며 구설수에 오르고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남매 중 첫째인 딸은 배우인 김주승과 결혼해서 외동딸을 낳고 잘 살았는데 장영자가 출소하고 다시 사기 사건을 일으켰을 때 김주승이 연루되면서 김주승의 연예계 제작사가 부도나고 김주승은 한동안 미국으로 도피했다. 이 일과 그 밖의 여러 사정으로 부부는 결국 이혼했고 2007년에 김주승은 지병으로 사망했다. 남매 중 둘째인 아들은 어머니 장영자가 2000년에 구권 사기로 구속될 때 함께 잡혀갔다가 풀려났는데 그 후에 뺑소니 사고를 치고 외국으로 도망쳤다. 몇 년 후 희귀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이 된 상태로 귀국했다가 외국 도피 전에 사귀다가 헤어졌던 여배우 차주옥이 자신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장영자의 아들은 차주옥과 혼인신고를 해서 법률상 부부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 그런데 장영자의 아들이 생전에 아버지의 유산을 두고 누나에게 소송을 걸었는데 소송 중에 사망하면서 유족인 차주옥이 그 소송을 계속하게 되었다. 즉, 장영자의 딸과 며느리 사이에서 재산분쟁이 터진 것. 장영자 가족 잔혹사 3탄 이번엔 재산분쟁

한편 장영자의 친언니는 전두환의 처삼촌(즉, 이순자의 삼촌) 이규광과 결혼했다. 장영자가 1982년에 단군 이래 최고 수준이라는 대규모 사기사건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의 영부인인 이순자가 자기 친언니의 시조카라는 점을 어필했던 것도 있다. 장영자가 전두환 처가 쪽으로 인척관계이며 평소에 청와대 이름을 팔고 다녔다는 점 때문에 사기 사건이 터진 후 전두환과 이순자 일가가 이 사건의 배후세력이라는 소문이 시중에 떠돌기도 했다.

그리고 장영자의 고종사촌 언니는 공교롭게도 전두환 정권에 맞서던 김대중과 결혼했다. 다만 장영자의 고종사촌 언니는 김대중의 부인으로 널리 알려진 이희호가 아니라 김대중의 첫 부인이며 김대중의 첫째 아들 김홍일 및 둘째 아들 김홍업을 낳고 일찍 사망한 차용애다.

이런 사실 때문에 김대중과 전두환이 친척 관계라는 이야기가 떠돌아 다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김대중과 장영자는 혼인으로 연결된 인척관계인데 인척관계는 혼인관계의 소멸(이혼, 혼인의 취소, 배우자의 사망 후 생존배우자의 재혼)으로 소멸한다. 차용애 사후 김대중이 이희호와 재혼했기 때문에 기존의 처가와의 인척관계는 소멸된다. 김대중과 이희호의 결혼이 1962년이었으니 김대중과 장영자는 1962년부터 법적으로 완전 남남이었다. 따라서 김대중은 이규광이나 전두환과 법적으로 인척 관계가 없다. 한마디로 호사가들이 어거지로 끼워맞춘 것에 불과하다.

마무리

장영자는 우리 사회에 큰 상처를 남긴 인물이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돈과 명예, 그리고 인간의 욕망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장영자 사건은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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