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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 골프선수에 대해 알아보자

뤼케 2020. 5. 23.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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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 골프 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선구자[5]이며 1990년대 말, 박찬호와 더불어 IMF 외환위기로 인한 국민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 주며 어루만져 주었던 국민 영웅이었다.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에서 활약한 대한민국의 여자 프로골퍼이다.

어렸을 때 육상을 시작으로 스포츠에 입문했다. 1989년, 초등학교 6학년 때 싱글 핸디캐퍼였던 골프광 아버지 박준철 씨에 이끌려 골프를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훈련장에서 새벽 2시까지 혼자 남아 훈련을 하는 등 쉬는 날 없이 엄격한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US Women`s Open에서 우승하며 국민적 스타 반열에 올랐으며 2000년대 중반까지 아니카 소렌스탐 - 캐리 웹과 함께 여자 골프 시장을 삼등분 하는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다. 현재 세계를 누비는 한국의 여성 골퍼들에게 영감을 준 선수이며, '상징적'인 면에서 앞으론 어떤 선수가 등장해도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2016년을 끝으로 프로 생활을 마무리했으며 현재는 SBS Golf 해설 위원이다.[6]

그리고 제31회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골프 국가대표팀 감독을 수행하였다. 2020 도쿄 올림픽의 여자 골프 국가대표팀 감독도 수행할 예정이다

 

KLPGA 시절

1996년에 프로로 전향했고, 당시 언론에서는 박세리를 "무서운 10대"로 불렀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인 박세리는, 1992년 중3 시절 초청 받은 KLPGA 대회 '라일앤스콧 여자오픈'에서 원재숙을 연장 전 끝에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아무리 LPGA - JLPGA 대비, 한 수 아래의 투어라고 해도 중 3이라는 나이에, 프로 선수와 연장에서 승리한 것 자체는 그야말로 쇼킹한 사건이다.

이듬해 1승을 추가한 뒤, 고3이었던 1995년에는 아마추어 신분으로 시즌 4승을 거두는 놀라운 성적을 보였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냐면, 당시의 KLPGA는 KPGA보다도 주목도가 떨어져[7] 연간 10개 대회 좀 넘게 운영되고 있었는데 아마추어가 1/3 이상을 우승으로 해 버렸으니 '프로 잡는 아마추어' 수준을 훨씬 뛰어 넘어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골프 팬들의 주목을 받으며 정식 프로로 데뷔한 박세리는 확실히 달랐다.

총 11경기 출전, 4승 - 2위 5회 - 6위 1회를 기록하였다. 출전 전 경기 TOP10에 가장 부진했던 것이 6위. 97년에 2승을 기록한 박세리는 더 이상 한국 무대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97년 1년간 세계 최고의 교습가 중 하나인 데이비드 레드베터[8]로부터 철저한 레슨을 받으며 훈련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열린 퀄리파잉스쿨에서 현재도 정상급 선수로 활동 중인 크리스티 커(미국)와 함께 공동 1위로 Q스쿨을 통과하며 화려하게 LPGA 무대에 데뷔했다.

 

LPGA 시절

1998년부터 LPGA 투어에 참가하여 투어 참가 첫 해에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과 U.S. 여자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신인상을 받았다.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성적이 좋지 않아서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이 우승을 시작으로 계속 활약하면서, 그 해에만 4승을 거두었다.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에서 첫 우승은 신인으로써는 역대 2번째에 해당하는 와이어 투 와이어[9]로 달성이라고 한다.

이 후 다시 메이저 대회인 'U.S.여자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를 살아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절대 잊히지 않을,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위의 사진의 그 경기가 바로 이 것. 양말을 벗고 연못에 들어갔을 때 까맣게 탄 종아리와 대비되는 하얀 발 역시 레전드급 장면으로 화제가 되었다.[10]
특히 1997년 12월에 대한민국을 어둠으로 몰아넣은 IMF 사건으로 큰 실의에 빠진 대한민국의 온 국민들에게 악전고투 끝에 우승하는 모습이 생중계되면서, 박찬호와 함께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특히 당시에 만들어진 공익광고[11]에 이 장면이 들어갔고, 상록수와 함께 엄청난 시너지를 냈다. 워낙 전설적인 장면인지라 예능 등지에서 골프가 소재일 때 기본적으로 양말을 벗으면서 그 장면을 패러디 하는 걸 간간이 볼 수 있었다. 상록수는 덤 그리고 그 해 LPGA '올해의 신인왕'을 수상했다.

 

USGA에서 "Leader of the Pak"라는 제목으로 재조명한 1998 여자오픈에서 우승했다.[12]

2001년 브리티시 여자 오픈 우승, 2002년 'L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함으로써 최연소 메이저 4승을 기록했다.

2006년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2007년 6월에는 꿈에도 그리던 LPGA 명예의 전당에 입회했다.[13] 또 7월에는 KLPGA 명예의 전당에도 입회하였다.

2011년 6월 스태이트팜클래식 오픈에서 5위에 오르며 아직 박세리는 죽지 않았음을 알렸다.

2012년 9월 23일 끝난 한국여자프로골프 2012 KDB대우증권 클래식에서 우승하면서 9년 만에 국내 대회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참고로 이 때는 너무 위상이 높은 대 선배의 우승이라 일반적으로 우승자에게 펼쳐 지는 세리머니인 동료들의 물 뿌리기가 일단 동료가 아니다. 새카만 후배들일 뿐... 어설퍼서 갤러리들의 장난 어린 비난을 받기로 했다.

어깨 부상의 여파로 2015년에는 거의 플레이하지 못하였고, 2016년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서 열린 LPGA JTBC 파운더스컵에 출전, 모처럼 만의 출전임에도 불구하고 12언더파 공동 42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무엇보다 의미있는 것은, '은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실질적인 은퇴 기자회견'을 가지며 그 간의 파란 만장했던 선수생활의 종지부를 선언하였다.

선수로는 사실상 은퇴하였지만, 이미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골프 대표팀의 감독으로 선임되는 등 은퇴 후의 활약이 더 주목받게 되었다. 부상 등의 이유로 계속 결과를 내기 쉽지 않음을 알았기에 아쉽지만 은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명예의 전당 멤버이므로 자기가 원하면 은퇴를 번복하고 원하는 대회에 다 출전할 수 있다. 하지만, 메이저 대회는 '전년도에 10경기 이상 출전'이라는 조건이 달려 있기에 기준 달성 전에는 출전이 불가능하다. 이때문에 ANA 인스퍼레이션(前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의 우승하여,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자 하는 꿈은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많은 우승에도 불구하고 여자 골프의 먼치킨급 레전드인 아니카 소렌스탐과 캐리 웹과 전성기를 같이하는 바람에 자신의 전성기에도 LPGA 공식 세계 랭킹 1위에 올라본 적이 없다. 참고로 한국인 골퍼로서 최초의 세계 랭킹 1위는 신지애이고, 박인비와 유소연이 세계랭킹 1위에 올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훌륭했던 커리어였음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은퇴이후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골프 국가대표팀의 여성 팀 감독으로서 새로운 길을 가게 되었다. 참고로 남성 팀 감독은 최경주가 선임되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한 기자회견에서 골프 국가대표팀의 목표는 금, 은, 동을 휩쓰는 것이라며 자신감을 표명하였다.

박세리의 지도의 덕분인지, 박인비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리고, 박인비의 금메달이 확정되자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박세리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박인비의 금메달을 이끌어내면서,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2016년 10월 13일, 인천 영종도 스카이72 오션코스에서 열린 'LPGA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대회에서 공식 은퇴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역시 1990년대말~2000년대 한국 스포츠의 개척자로서 함께 국민적 성원을 받았던 전(前) 메이저리거 야구선수 투머치토커 박찬호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다.

2017년 12월 1일 방영되는 정글의 법칙 in 쿡 아일랜드 편에 출연했다.

 

박세리 키즈

1998년 박세리가 LPGA 에 도전하며 상당한 성과를 내자, 이를 보고 골프에 입문했던 꼬마들에게 붙어 있는 이름이다.

일단, 박세리가 성공적으로 LPGA 에 데뷔하자, 라이벌 김미현을 비롯하여, 박지은, 한희원 등도 LPGA 에 도전하였고, 승리를 따내는 등 활약을 하였다. 박세리로 시작된 여러 한국인 여자 골퍼들의 활약은 골프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어린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골프의 인기가 크게 올랐다.

박세리 키즈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 어렵지만, 대략 박세리가 데뷔했을때 10살 정도의 나이였던 1988년생 근방에 태어난 여자 골프 선수들을 주로 지칭한다. 정확히 이 선수가 '박세리 키즈'이다 아니다를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박인비, 신지애, 최나연, 김송희, 김인경, 이선화, 오지영, 김하늘, 이보미, 안선주, 양희영 등이 박세리 키즈로 불리운다. 관련기사

박세리는 그런 후배들을 이끌고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얻어낸 것이기에 그 의미는 더욱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모저모

한때 박세리가 잘 나갈 때 박세리의 아버지가 박세리를 어떻게 골프신동으로 키웠는데 당당하게 얘기를 한 부분이 TV에 재연영상까지 더해서 나왔는데 그게 지금 수준으로는 가히 아동학대를 넘어, 심각한 범죄행동의 범주에 들어갈 정도로 도가 넘은 행동들이었다.

볼 때 당시에도, "저건 좀 아닌거 같은데....?" 라고 생각하는 수준이었지만 공동묘지에 연습을 하게 하는 등.... 현재에서는 아동학대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말이 없을 지경. 심지어 그 TV 재연영상을 보고, "나도 내 딸을 저렇게 키워야겠어!"라는 아둔한 아버지들도 많이 양산되어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단 공동묘지 훈련에 대해서는 박세리가 직접 루머라고 말한 적이 있다. 관련기사 밤 늦게 연습이 끝나고 귀가하는 길에 공동묘지 비슷한 것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적응을 했다, 라는 얘기가 와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찬희이니 차주혁이니 자칭 조폭의 아들이라 뻐기는 놈들과는 달리 박세리의 아버지는 진짜 조직폭력배인 박준철이었다.# 그러나 박준철은 아내(박세리의 어머니)를 만난 이후 조직에서 무단이탈 후 대전광역시의 유성교 밑에 살림을 차리고 생활하며 그 상태로 결혼하고 박세리를 낳아서 길렀다.# 공동묘지에서 박세리를 연습시킨 이유라고 하면 자신이 조폭시절에 받은 담력훈련을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박세리의 미국 진출 이후 대한민국 선수들의 LPGA 진출이 본격화됐다. 박세리의 영원한 라이벌 김미현은 물론이고, KLPGA 출신의 상위 랭커들이 LPGA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1998년 박세리의 US오픈 우승을 보고 수많은 여자 어린이들이 그녀를 동경하여 골프클럽을 잡았는데, 이들은 박세리 키즈 또는 줄여서 세리 키즈로 불리며 각종 골프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대표적인 선수들이 신지애, 최나연, 박인비. 그리고 박세리 또한 LPGA에 진출한 대한민국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면서 본인이 주도하여 모임을 한다.

대한민국 여자 골프에서 박세리가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은 누구보다도 크다. LPGA 25승, 메이저 투어 5승, 연장전 6전 6승의 기록은 아직 후배들이 근접하지 못 했다.[14] 다만, 메이저 5승 중에서 이상하게 나비스코 챔피언십에 약한 탓에, 커리어 그랜드슬램은 이루지 못했다.[15]

박세리의 이름 영문 표기는 Pak Se Ri이다. 당시 유행했던 음담패설로 '박찬호는 Park인데 박세리는 왜 Pak일까? 정답은 알(R)이 없어서'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때 사용하던 문교부안 로마자표기법에 따르면 '박'은 박세리처럼 Pak으로 적는 것이 옳다. 박 씨의 99%가 사용하는 Park은 관용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 사이에선 "여권을 처음 만들 때 박세리의 아버지 박준철 씨가 영어를 잘 몰라서 딸 이름을 박세리가 아니라 팩세리 만들어 버렸다."라고 놀리듯 말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아마도 어린 딸을 공동묘지에 내려놓고 담력훈련아동학대 돋네을 시켰다는 소문 등, 뭔가 막무가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 듯하다. 참고로 공동묘지에서 담력훈련으로 대표되는 '박세리 아버지의 스파르타식 훈련'은 뜬소문이었다.[16] 박세리 아버지는 훗날 인터뷰에서 "함께 라운드를 하면서 골프에 취미를 가질 수 있도록 유도했어요."라고 이야기했다.

1990년대 당시 방송 활동 매니지먼트 사가, 젝키와 핑클로 유명한 대성기획(현 DSP)이었다.# 박세리의 아버지가 이호연 사장의 고향(대전) 선배인 것을 계기로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당시 박세리와 핑클이 의자매를 맺고, 이효리와 박세리가 절친이라며 언플기사가 나오곤 했는데 괜히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강일홍 기자의 말에 따르면, 당시 이호연 사장이 박세리를 친조카 같이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맨발 투혼 일화를 기자들한테 많이 홍보하고 다녔고, 해외 특파원들도 직접 초대해서 홍보했다.
1998년 성균관대학교 체육특기생으로 합격하여 1999년 입학을 앞둔 상태였으나, 미국에서 프로 활동을 하면서 학업을 병행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입학을 포기하였다. 2007년에 와서야 숙명여자대학교 2007학년도 정시모집 ‘숙명글로벌리더' 전형에 지원해 10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합격하여, 정치행정학부에서 4년간 장학금을 받고 학사 학위를 받았다.

2014년 4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Korean Heritage Night 행사차 시구를 했는데,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노란 리본을 달고 시구를 했다.

2015년 9월 2일부터 아빠를 부탁해에 출연했는데, 아버지 박준철 씨와 연탄불고기 5인분을 먹어 치우는 먹방을 선보였다![17]

세계 순위는 최고 10위까지 기록해 봤다. 이는 시대를 잘못 난 탓인데, 여성 프로의 세계 순위가 공식적으로 발표 된 것이 2006년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이면 박세리는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하나에서 한 발 물러난 시절이었다. 비공식적이지만 상금랭킹으로 따지면 데뷔한 1998년과 전성기였던 2001, 2002, 2003년에 연속해서 상금 2위를 기록한 바 있다. 2위밖에 못한 이유는 저 4번 모두 1위가 골프여제라고 불리는 아니카 소렌스탐이었기 때문이다. 은근히 콩라인.

투니버스에서 방영한 명탐정 코난 6기 24화 '연인은 봄의 환상' 편에서 박세리 역의 조연이 등장했다. 집앞 명패에 떡하니 박세리라고 기재되어있는데 수 많은 이름 중 굳이 박세리로 로컬화 한걸 보면 관계자가 박세리 팬 인 듯 하다.

2019년 11월 8일 SBS 나이트라인에 출연하여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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