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제27대 왕. 수나라의 침략을 이겨낸 전쟁 영웅이었지만, 재위기간 내내 당나라와의 친교 노선을 걸었고 이에 반발한 초강경 매파 연개소문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고구려 수 전쟁에서의 맹활약
영양왕의 이복 동생. 수양제가 대대적으로 일으킨 2차 침공에서는 직접 일선에서 군사들을 지휘하고 적들과 맞서 싸우면서 어마어마한 활약을 보인 인물이다. 그것도 보통 활약을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사서인 수서(隋書)에 을지문덕과 함께 고구려군 장수로는 유이하게 당당히 그 이름을 올렸을 정도. 평양성 전투에서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선봉에서 돌격해 내호아가 이끄는 별동대인 수나라 수군[4] 40,000명을 패퇴시키는 엄청난 활약을 선보인다.
수나라의 수군 중 살아돌아간 이들은 겨우 수천에 불과했으며 이마저도 부관이었던 주법상이 대오를 갖춘 뒤 처절하게 막아내서였다. 총 해군은 10만 명, 그중 정예로 훈련받았던 4만 명 거의 전부가 몰살당했으니....단단히 혼쭐 난 셈이다.
기록에 따르면 형과 함께 평양성 외곽에서 패배를 가장하여 내호아를 평양에 접근시켰다. 그리고 군사를 매복시킨 후 패배하는 척 수나라 군대를 안으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내호아의 군사들은 성 내에서 약탈에 몰두하다 대열이 흐트러졌고, 고건무가 지휘하는 500기는 이 때를 기다렸다가 일거에 치고나가 당황하는 수나라 군대를 섬멸시켰다고 한다.
그야말로 을지문덕과 함께 고구려-수 전쟁이 낳은 최고의 전쟁 영웅이자 명장 중 한 명이다. 살수대첩에 묻혀서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이지 한국사 대첩 중에 손에 꼽는다고 충분히 볼 수 있는 셈.
그러나 이때 통일된 대륙의 엄청난 파워를 상대하면서 영류왕은 전쟁에 대한 염증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통일국가 수나라를 상대로 대승한 고구려의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승리지만, 문제는 전쟁이 고구려 땅 한 복판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고구려 영토 깊숙한 곳에서 전쟁을 벌인 만큼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기더라도 그 피해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친당 정책
결국 고건무는 즉위하고 난 다음 태도를 바꿔, 수를 멸망시킨 당과의 화친 정책을 폈지만 당나라의 지나친 요구를 들어주면서 전승기념비에 해당하는 경관을 허무는가 하면 이전 시대에 비해 당나라 사신의 간첩 행위를 제어하지 못했으며[5]그럼에도 주변 세력 단속에는 무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이전에 비해 끌려다니는 외교를 하게 된다
비판
영류왕의 정책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과도하게 굴욕적인 의전과 내정 간섭[6]
승전기념물인 경관 철거.
당나라 사신에게 군사기밀 유출.
고구려에 소속된 거란, 말갈 부족 이탈시킴 .
인접국 백제, 신라는 적대.
당이 고구려가 본래 한사군 땅이라고 노골적인 도발.
여수전쟁에서 국력을 많이 소모했을 고구려로서는 무조건적인 강경책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안정책을 통해 다시 국력을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영류왕은 굴욕은 있는대로 겪으면서 그런 와중에서 내치를 안정시키거나, 후방을 안정시키고 대비를 하는 등의 실리는 챙기지 못하고 결국 급기야 영류왕 본인이 비참하게 시해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는 점에서 영양왕이나 연개소문과 비교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고구려의 국가적 위상 즉 주변 말갈 - 거란 - 실위 등 이민족들에 대한 영향력 행사와 한반도 역시 언제든지 영향력 행사와 팽창을 할 수 있는 입장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뿌리째 흔드는 일이었다. 강대국이라는 입장에서 또 다른 강대국이라는 당과의 외교 문제를 볼때 지나친 소극주의로 일관했고 결과적으로 주변 이민족들의 이탈과 분열 그리고 갈등이 이어진 끝에 고구려는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다.
한반도 남부의 백제 - 신라 등에 대해서는 강력한 당이라는 적을 앞두고 사실상 무의미한 소모전 형태를 치루는 상황이었던 것을 백제와 왜를 끌어들이고 남방 전선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 그것을 되찾아나간 것은 연개소문이었다.
또한 영류왕의 친당 정책이 당의 침공 의지를 꺾은 막은 것도 아니다. 당시 당 태종은 우호적으로 나온 당 고조와는 달리 전쟁을 억제할 장애물들을 하나둘씩 치워나갔고 주변 국가들도 정리함으로서 고구려로 원정갈 준비를 꾸준하게 하고 있었다. 애초에 당 태종은 고구려를 정복해서 수나라 때의 뼈아픈 상처를 씻으려고 한 것이 사실이다. 영류왕의 친당 정책과 굴욕은 안보 위협을 막은 실리적인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고구려 침공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오히려 당 태종이나 당 고종으로 하여금 전쟁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게 하고 전쟁 포기 선언을 이끌어낸 것은 영류왕의 유화정책이 아니라. 연개소문에게 당한 비참한 패배였다.
631년에 있었던 경관 철거 사건 당시 사절로 온 장손사는 광주 도독부 사마다. 종5품하의 벼슬로 지방관 휘하의 보좌 쯤 되는 인물로 오늘날로 치면 시청에서 일하는 주사보 쯤 된다고 할 수 있다. 수나라와 전쟁이 끝난지 20년도 채 안 된 시점에 참전용사들이 두 눈 뜨고 시퍼렇게 살아 있었을 것이고 당장 그 정정히 살아있는 본인부터가 참전용사다. 현대로 치면 중국 정부가 우리 대한민국 정부에 한-중 양국의 우호 증진을 위해 현충원을 헐고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중공군의 위령제를 지내달라고 요청한 것과 마찬가지다.
640년에 있었던 태자 입조 사건은 굴욕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 태자가 입조하는 경우는 대개 상대국에 제압당한 상태거나 종속되는 경우에 해당한다.[7] 고구려 시대에는 심지어 다른 시대와 달리 중국이 보낸 사신이 임금과 대등한 의전을 받는다거나 국서에 절을 하는 등의 의전이 없던 시대였다. 심지어 답사로 온 당나라측 사절인 진대덕은 직방 낭중이었다. 고구려는 태자를 보냈는데 종5품, 군대로 치면 장군도 아니고 대대 작전과장 정도 되는 말단 관리가 왔고 태왕이나 대대로가 와서 하루 3번씩 의전해준 것이다. 여기에 더해 진대덕은 고구려 내부를 마음껏 정탐했고 고구려는 이를 막지 못했다.
정리하자면 영류왕은 기나긴 전쟁 끝에 시대적 과제인 국력 회복, 내치 안정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했고, 당의 침공의지를 무마하지도 못한 실패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옹호
영류왕이 초기 대당외교 노선에서 소극적 입장을 취한 것은 여수전쟁이 대규모로 4차에 걸쳐 무려 16년동안 지속된 상황에서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욱이 당은 내부적으로 반란의 연속과 돌궐의 침략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영류왕이 당나라와 화친 입장을 보인건 결국 상대적으로 여수전쟁에 대한 상호 적대심이 강한 상황에서 대등한 입장에서의 외교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게다가 당 고조역시 국내 사정과 국외적 입장에서 새로운 적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던 점이 결국 각자의 이익에 서로 부합하여 충분히 상호 온건 노선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영류왕의 초기 온건 외교 노선은 고구려 스스로가 자국의 생존과 국력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
물론 당 고조와 다르게 당 태종이 집권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지기는 했다. 당 태종 치세에 당도 내부적으로 안정되고 국력을 신장할 때였고 고구려 역시 웬만한 전후 복구를 다하고 국력을 회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에게 지도를 보낸 것은 당의 외교 노선이 변화한 것에 대해 평화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결국 영토를 분명히 하여 당으로 하여금 특정선 이상은 쳐들어 오지 말 것의 입장이 고구려에게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천리장성을 수축하는 형태로 고구려로서는 당과의 전선을 정비하는 노력을 하였다.
게다가 당 태종과의 전쟁을 치루던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방기한 것 역시 고구려로서는 돌궐을 쉽게 신뢰하여 함께 연합 전선을 구축한다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내부적으로 고구려는 평원왕의 중흥 이후로 영양왕과 영류왕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강력한 왕권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왕권의 강화와 귀족 세력들의 균형을 맞추는 일도 중요했다. 여러가지로 얽혀있는 귀족 세력들의 권력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일을 영류왕도 한 것이다. 그런 정치술에서 연개소문의 가문이 활용되는 과정이었다고 봐야한다. 영류왕은 그것을 24년동안 집권하면서 나름 수행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고구려는 후기에 들어서면서 귀족연립정권의 성격을 띄었다[8]. 중흥군주 평원왕 시절과 영양왕 시절에는 그나마 귀족들의 지나친 힘이 어느정도 균형을 맞추는 모습을 보였으나, 영류왕 시대에는 연개소문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결국 영류왕이 연개소문을 먼저 치려다가 연개소문이 선수를 쳐서 살해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천리장성 축조의 경우 적군의 대규모 침공을 저지한다기보단 적군의 발목을 묶어 지연전을 강요하면서 그틈에 아군에게 적군의 침공 소식과 위치를 알리는 "경보" 역할을 해줄수 있다는 것이 장점으로 중국은 물론 페르시아 제국이나 로마 제국도 건설했었다. 만리장성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장성이 "경계"로서의 역할은 충실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9].
고구려의 방어선을 보면, 수백개의 성채와 각종 시설들을 연계한 거대한 기동 방어 시스템이었다[10]. 이러한 기동 방어 체제를 운용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적군의 침공 경로와 같은 정보이다. 적군의 방향을 알아야 제대로 요격하는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천리장성은 역사적으로 거론되는 장성들처럼 "경계"의 역할에 주력하며, 이미 구성된 요동지방의 요새망 네트워크와 연계한다면 적군의 침입 경로를 파악하고 그들을 지연시키는 동안 아군이 병력을 모으며 대비할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줄 수 있다. 비록 건설 비용과 인력 소모가 적지않지만, 장성을 쌓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확실히 있으며, 정치적 쇼도 아니었다.
경관의 경우 철거할 필요가 있었다. 적군의 시체를 쌓은 기념물을 그대로 두는 짓을 해서 당나라를 자극할 필요는 없기 때문. 연개소문이 당나라의 신라 침공 중지 요청을 거부한 일조차도 당태종의 침공에 명분을 줬는데, 그보다 더 수위가 높은 경관을 그대로 놔두는 행위는 당태종에게 더 확고한 명분을 줄 수 있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 연개소문의 침공 중지 거부 사건으로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을 이행했다는 건 단순히 설이 아니며, 중국 측 사서에도 나와있는 엄연한 사실(史實)이다.[11] 실제로 당태종은 그 전까지는 말로만 고구려를 침공한다고 얘기하거나 간첩만 보내는 등 고구려와 눈치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진대덕의 고구려 정탐 기록에서 고구려측에서 정탐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적혀있는 것은 어느 정도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서 남은 기록은 전부 중국 측 기록이고, 이에 관한 한국 측 사료인 삼국사기조차도 이 내용은 구당서나 신당서 등 중국 측 사료에서 긁어온 것이다. 이런 이유는 한국 측에는 관련 기록이 없었기 때문.
추가적인 영류왕의 옹호론적인 재평가 문제는 이곳에서 확인해볼수 있다.
비극적인 최후
왕위에 오른지 24년이 흐른 642년 10월,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이를 알게 되어 분노한 연개소문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역으로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 때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시신을 다섯 갈래로 나눠 구덩이에 넣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정변 및 집권시의 행적은 중국 측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는데 특히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대놓고 비난하기 위해 부정적인 면모만 골라 서술한 만큼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그외
아들로 태자 고환권(高桓權)이 있었는데, 영류왕 23년(640년) 2월의 기록 외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서 행적을 알 수가 없다. 그 외에 신찬성씨록에서 고복덕이 영류왕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상반된 기록도 가지고 있어서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九月 영류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당에 조공하다
二年夏四月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二年夏五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四年秋七月 당에 조공하다
五年 고구려 내에 흩어져 있던 중국인들을 모아 돌려보내다
六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七年春二月 당에서 도교가 전래되다
七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八年 당에 가서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우기 시작하다
九年 신라와 백제가 당에 가서 고구려의 침략 행위를 호소하다
十一年秋九月 당에 봉역도를 바치다
十二年秋八月 신라 김유신이 낭비성을 쳐부수다
十二年秋九月 당에 조공하다
十四年 당이 고구려가 세운 경관을 허물어버리다
十四年春二月 천리장성이 완성되다
二十一年冬十月 신라 칠중성 공격에 실패하다
二十三年春二月 세자 환권을 당에 보내 조공하다 [12]
二十三年春二月 당에 자제의 국학 입학을 청하다
二十三年秋九月 태양이 3일간 빛을 잃다
二十四年 당 사신 진대덕이 고구려의 허실을 탐지하고 돌아가다
二十五年春一月 당에 조공하다
二十五年春一月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를 감독하게 하다
二十五年冬十月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다
二十五年冬十一月 당 태종이 사신을 보내 조문하다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연개소문에서의 연기자는 최종환. 고수전쟁을 총지휘하고 수나라 수군을 모조리 섬멸하는 큰 공을 세운 명장 출신의 왕으로, 당시 고구려의 국력에 한계를 느껴 수나라에게 상대적으로 유화적으로 나왔고, 당과 화친 정책을 펴는 건 드라마에서도 동일하게 나오지만 당과 맞서야 한다는 연개소문과는 달리 당과는 화친하면서 가장 큰 위험을 신라로 지목하고 신라를 멸망시키려는 걸로 나온다. 당나라 초기 돌궐이 함께 당을 치자고 하지만 거절하는데 그 후 연태수와 술을 마시면서 많은 유혹을 느꼈다는 진심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최악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고구려가 완벽하게 세워지고 나서 돌궐도 서토도 그 다음이라고 말한다. [13] 결국 당에게 굽실거린다고 태학 박사 이문진과 고구려의 장수들(강이식, 온사문)의 불만을 산다. 나중에는 연개소문의 쿠데타 후 독주를 마시고 자결한다.[14] 그래도 실제론 처참하게 살해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제작진이 영류왕을 꽤 배려해 준 장면. 사실 이건 연개소문의 미화로 봐야 되지 않을까 죽으면서 한 마지막 말인 "우리는 가는 길은 달랐으나 똑같은 마음으로 고구려를 사랑했다"는 명대사라고 부를만 하다. 작중 연개소문도 이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드라마에서도 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러나 후대에 연개소문을 깎아내리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으므로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작중 고건무는 뛰어난 명장이며 강대하고 위대한 고구려를 꿈꾸고 원한다. 또한 서토의 꿈도 가지고 있다. 단지 연개소문과 그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연개소문이 전쟁을 통해 위대한 고구려를 만들려고 했다면 고건무는 외교를 통해 최대한 전쟁을 막고 이를 통해 힘을 키워 강대한 고구려를 만들어 서토를 도모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유현종의 소설 연개소문[15]에서는 당과의 평화 정책을 펼치는 것 외에도 가화[16]라는 첩에게 홀려 암군으로 전락하고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끔살 당한다. 이 소설에서는 연개소문이 고건무의 부하로 여수전쟁에 종군했었고, 연개소문이 고건무를 굉장히 존경했었다는 설정
2013년 KBS 사극 칼과 꽃에서는 김영철이 연기. 당에 대해서 화친 정책을 취하는등 고구려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으로 나왔다. 당에 대해 화친 정책을 펼치는 것은 같으나, 만만한 신라를 공격하는 드라마 연개소문의 영류왕과는 달리 고구려의 평화 그 자체가 목적인 모습으로 나온다. 중반부에 이르러 연개소문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 칼과 꽃 자체가 근래에 나온 사극 중에 보기 드물게 연개소문을 악역으로 그리고 있는만큼 그 대척점에 서있는 영류왕을 선역으로 그리면서 생겨난 캐릭터인 듯하다.
매한작 장편소설 '홍익대제 고건무'에서도 등장한다. 현대의 고건무가 죽어서 과거의 영류왕으로 환생하게 되는데, 비록 비현실적인 요소도 있지만 나름 실존인물들과 허구의 인물들을 잘 섞은 대체역사소설로서 호평받고 있다. 고수대전, 고당대전, 삼국통일, 왜 정복 등 고구려를 강국으로 탈바꿈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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