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
간도특설대 복무전력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어있는 반면 6.25 전쟁 중 다부동 전투 승리와 평양 선두 입성 등의 성과를 이룬 명장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등, 한국 현대사에서 명과 암을 동시에 지닌 대표적 인물이다.
광복이전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지냈다. 7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으며 약송소학교를 나온 이후 평양사범학교에 진학했다. 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교직에 종사했지만 군인의 꿈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1941년 12월 만주국 봉천의 봉천군관학교[4]에 진학하여 제9기로 졸업한 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 1943년에는 간도특설대로 전근, 3년 동안 이 부대에 배치되어 활약했다.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1938년부터 당시 만주 지역에서 활약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김일성, 강건, 김광협, 최용건 등이 가담한 동북항일연군[5] 및 팔로군 소속 게릴라 부대를 주로 상대하며 여러 차례의 잔혹한 토벌작전을 벌여 악명이 자자했다. 이 때문에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이 있는 백선엽도 기계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선엽이 배치되기 한참 전인 1940년에 이미 김일성 및 만주빨치산파 독립운동가들은 토벌을 견디다 못해 동북항일연군을 빠져나와 소련 연해주로 망명하여 소련군에 배속되었으므로, 실제 독립운동가들을 맞상대할 일은 없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6]
이러한 백선엽의 간도특설대 경력을 아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으나, 본인이 이를 구체적으로 시인한 것은 1983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対ゲリラ戦―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대게릴라전 ― 미국은 왜 졌는가?)』(하라쇼보(原書房) 출간)[7]에서였다.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게릴라 토벌 전술에 대한 책으로서, 백선엽은 광복 이전의 간도특설대 복무 경험과 6.25 전쟁 당시의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수행한 백(白)야전사령부를 이끈 경험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8] 이 책 초반부의 한 장(章)인 「間島特設隊の秘密(간도특설대의 비밀)」 본문에서 백선엽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주의주장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특설대에서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지고 토벌에 임하였다
白善燁 (1993). 『対ゲリラ戦―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原書房. (경향신문에서 재인용)
이후 출간된 한국어 자서전인 『군과 나』(1990년), 『실록 지리산』(1992년) 등에서도 간략하게나마 간도특설대 경력을 언급했다. 2005~2009년 활동한 대한민국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일본에서 2000년 출간된 백선엽의 회고록 『若き将軍の朝鮮戦争(젊은 장군의 한국전쟁)』(소시샤(草思社) 출간)[9]에 나온 간도특설대 활동 내역을 토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였다.
(전략) 봉천의 군관학교를 졸업한 것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였다. 나는 견습사관으로서 동부 만주의 寶淸(파오칭)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국군 보병 제28단(=연대)에서 근무하였다. (중략) 이어서 佳木斯(자무스)의 신병훈련소의 소대장으로 전임되었는데 (중략) 1943년 2월, 나는 만주 동부의 한반도에 접하는 간도성에 있던 간도특설대에 전임되었다. (중략)
간도성 연길현 명월진(明月鎭)에 설치되어 있던 간도특설대는 조래의 국경감시대를 모체로 하여 1938년 12월에 창설되었다. 당초에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 1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중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다. 부대장과 간부의 일부가 日系 軍官이고 나머지 전부는 한국계 군관이었는데, (중략)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10]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치안작전을 수행하느라 바빴는데 간도특설대의 본래의 임무는 잠입, 파괴공작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특수부대, 스페셜 포스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11] 만주국군 중에서 총검대회, 검도, 사격 대회가 열리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중략)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중에서도 항상 대서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특설대였다. (후략)
이들 문헌에서 백선엽 본인은 간도특설대 경력을 인정하고 부끄럽다는 정도의 언급은 하고 있으나, 이를 적극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12] 위에서 나타나듯 자신은 이미 동북항일연군 세력이 거의 소멸된 뒤에 간도특설대에 합류하였고, 결과적으로 상대한 적들도 후방 치안을 어지럽히던 팔로군 유격대 등 중국 공산당계 빨치산들이었기 때문에 크게 죄스럽지는 않다는 입장이다.
이 부분의 태도가 문제이기는 하나, 특별히 자신의 간도특설대 경력을 세탁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지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13] 사실 백선엽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솔직히 밝히지 않은 것은 5.16 군사정변을 전후한 시점에서의 군내 알력[14]에서의 그의 역할인데, 이 부분은 이례적으로 유난히 자기미화가 심한 편이다.
이후 만주군 중위을 지내다가 해방 직후 평양으로 돌아왔고, 동향 사람이기도 한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하다가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후 1945년 12월에 월남했다. 당시 조만식에게 함께 내려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월남 직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16] 국방경비대에 입대,1946년 2월 부산 제5연대 A중대장을 맡았다. 국방경비대가 정식 한국군이 된 이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복무하였으며, 이때 벌어진 여순사건 당시 공산 게릴라 소탕과 주동자 색출 및 처벌의 재판장이었다. 1950년 4월에 대령 계급으로 제1사단장이 되어 개성 지역을 담당하면서 6월 당시에는 경기도 시흥에서 고급 간부훈련을 받는 중이었다
박정희와의 인연
여순사건 이후 남로당 계열의 군인을 숙청하는 '숙군'과정에서 박정희는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이후 1949년 2월 '군병력 제공죄'로 사형을 구형받은 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백선엽은 육군본부에서 정보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김안일 방첩대 과장을 통해 직접 면담한 후 만주 시절 동료 20명으로부터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보증서를 제출받고 무죄 방면시켜줬다.
뿐만 아니라 백선엽은 불명예 제대한 박정희를 정보국에서 문관신분(현 군무원)의 북한반 상황실장으로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17] 당시 정보에서 예산 문제로 문관 월급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했지만 백선엽은 자신의 판공비 일부를 떼어서 박정희의 월급으로 지불했다.
1953년에 박정희[18]를 장군으로 만들어준 이도 백선엽이었다. 경무대에서는 남로당 전력을 문제삼아 제외하려 했으나 인사를 백선엽은 강행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타이페이에 있던 백선엽은 미국 대사와의 면담에서 박정희의 전력을 이유로 사상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발언했다.[19] 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에서 유럽/아프리카 총괄대사로 전임[20]되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유럽과 아프리카, 캐나다를 떠돌다가 모친 병환을 이유로 잠시 귀국했을 때 박정희를 면담하고 나서도 2년 뒤인 1969년 12월에야 교통부장관으로 임명되어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21] 그 후에는 교통부장관직 이후 전경련 이사와 한국종합화학 등 공기업체 사장을 두루 거치며 보상받았다.
여담으로 백선엽은 박정희보다 3살 어리지만 항렬로는 외할아버지뻘이다. 박정희의 모친 백남의는 수원 백씨 28세손으로 남(南)자 항렬이었고, 백선엽은 수원 백씨 27세손이다.
6.25전쟁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최고의 영웅으로 꼽히는 활약을 했다. 때문에 전쟁기간 중 최고의 속도로 진급을 거듭해 마침내 국군 최초의 4성 장군 및 꽤 젊은 나이에 육군참모총장 지위에 오르는 등 한국전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다.
개전초기 지연전
광주에 주둔한 제5사단장으로 복무하던 백선엽 대령은 1950년 4월 22일 개성을 포함한 38선의 경비를 담당하는 제1사단장으로 보직되었다.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발발 당시 그는 서울에 있다가 07시경[23] 부관으로부터 연락을 받고서야 전쟁을 인지했다.[24]
그들이 수색의 사단사령부에 도착했을땐 이미 개성은 함락되었고 12연대와의 연락도 두절된 상태로 임진강 철교를 폭파하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했다.
13연대 장병들이 전차를 상대로 육박공격을 감행하며 파평산에서 버티는 사이 임진강교를 건너온 적에 문산까지 밀린 11연대가 교도대의 증원을 받아 역습, 임진강교의 방어선 확보에 성공했지만 육군본부로부터 들려온 소식은 38선 전체에서 전면적인 공격이 가해져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일제히 후퇴중이며, 1사단도 퇴각하지 않으면 곧 포위될 것이니 퇴각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시점에서 북한군의 주공이 지향된 포천-동두천 접근로가 완전히 돌파당한 상황이었으므로 1사단이 진지를 고수하는 것은 더이상 의미가 없었다.
회고록에 따르면 부대를 유지하며 퇴각한 것은 아니었다.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무너져 버리자 포위를 우려하여 참모총장에게 후퇴를 건의했지만 패닉 상태에 있었던 지휘부는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못했다. 설상가상 인도교가 폭파되자 퇴로가 끊긴 1사단은 그제서야 시흥을 집결지로 선정하고 후퇴를 시작하지만 배도 구하기 어려운지라 몇명의 부관과 함께 행주에서 뗏목을 만들어 겨우 도하가 가능했다고 한다. 기적적으로 많은 장병이 도하에 성공하여 시흥에서 부대의 재편이 가능했으나 본인은 이 일로 상부의 후퇴명령을 어기고 부대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오해를 받아 많이 억울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나마 사단급 편제를 유지하고 멀쩡히 퇴각할 수 있던 부대는 1사단과 춘천의 6사단, 그리고 강릉의 8사단이 유일했다.
6사단의 경우 후퇴하면서도 제대로 된 전투를 벌였는데 바로 춘천-홍천 전투다. 수도권을 치던 인민군보다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해 공격의 강도가 덜했던 데다[25], 6사단은 부대장 재량으로 병력의 외출, 외박을 제한했던 덕분에 비교적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6사단은 북한군 제2군단을 3일간이나 저지했고 이때문에 인민군 제2군단장 김광협은 해임당했다.
그리고 8사단의 경우 주문진 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혔음에도 강릉을 빼앗긴 그날 밤 기습공격을 하여 인민군에게 적잖은 패배를 주는등의 활약을 하고 3일간 방어하면서 태백산맥을 타고 안전히 후퇴할수 있었다. (강릉전투)
처음 이틀 동안 긴장과 긴박한 상황으로 인해 발에 못이 박히고도 다음 날에나 전투화를 벗었을 지경이었다고 전해지며, 1사단이 상태가 그나마 가장 양호한 부대였으므로 학도병과 신병들을 계속 보충받아 한강 방어선 전투를 시작해서 수많은 방어작전에 주력으로 투입된다. 그러나 전황이 계속 악화되어 결국 낙동강까지 후퇴하며, 이 와중에 병사들 속에 섞여 퇴각하던 중 북한군의 추격으로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후퇴와 재편과정에서 7월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다부동 전투
낙동강을 넘어서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한 인민군의 8월공세에 맞서 국군 1사단은 다부동 전투를 치르게 된다. 북한군은 인민군 제3사단, 제13사단, 그리고 제1사단의 1개 연대가 미군부대를 회피해 국군1사단을 집요하게 노렸다.
다부동 전투 항목에서도 나왔듯이 낙동강 방어선 구축이 늦어 이미 8월5일 인민군이 낙동강을 도하한 상황이었다. 이 전투에서 패했더라면 대구를 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8월 15일 미 25사단 27연대와 국군 8사단 10연대가 증원부대로 투입되어 육박전이 펼쳐졌고 8월 19일에는 미군 23연대가 뒤를 받쳤다. 그러나 8월 20일 미군 27연대가 국군 11연대 1대대[26]가 후퇴 중이라며 퇴로 확보를 위해 자신들도 철수하겠다는 통보가 오자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병력을 수습하고 2대대 선두에 서서 돌격, 488고지를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백선엽은 권총을 들고 병사들과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는데, 국내외적으로 사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사례 중의 하나. 일단 이 행동과 비슷한 사례로는 이오지마 전투 당시 일본군 수비대 최후의 돌격을 직접 이끈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 6.25 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 중 손원일 제독이 직접 소총을 들고 대한민국 해병대와 함께 진격한 경우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3세 준장이 노르망디 상륙을 최전선에서 함께 했던 것 정도.
돌격직전 병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27]
결국 8월 21일, 5시간 동안 모든 자원을 투입한 총력전이 펼쳐지고 8월 22일부터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 후 1사단은 다부동을 미국 제1기병사단에 이양하고 팔공산으로 이동했는데 다부동 전투에서 장교 56명을 포함, 2300명의 전사자를 낸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후, 부산에 미 1기병사단이 상륙함에 따라 1사단은 전력재건을 위해 임무를 교대했으나 미 1기병사단은 9월 즈음 북한군의 공격에 주저항선이 붕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인천 상륙작전이 실시되어 북한군에 막대한 혼란이 벌어지자, 반격부대로서 다시 1사단을 지휘해 다부동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평양전투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으로 역진공하던 때의 에피소드인데,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의 전투력을 의심하자 자신이 직접 영어로 설명하며 '1사단의 전투력과 사기가 매우 높아 UN군의 선두에서 평양을 향해 제일 빨리 전진할 수 있으며, 사단장인 자신은 평양에서 어렸을 때부터 살아와 길을 잘 안다. 단지 자신들에게는 미군과 같은 종합적인 화력이 없는 것뿐이라 만약 1사단에 미군 전차 1개대대를 지원해주면 이들과 함께 선두에서 진격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미군 장군이 '미군은 차량이 많고 기계화되어 이동속도가 빠른데, 보병뿐인 한국군이 어떻게 미군의 전진속도보다 빨리 갈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자 '잠을 자지 않고 야간에도 행군해가며 이동속도를 늘리겠다'라며 굳은 의지를 보인다. 그리하여 미군 전차대대를 배속받게 되며, 미 육군 부대가 다른 나라 지휘관의 지휘를 받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영국지휘관에게 맡겨진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게다가 약속대로, 실제 1사단 장병들은 야간에도 잠을 자지 않으며 맹행군을 계속해 차량으로 이동하는 미군들을 제치고 전군의 선두에 서게 된다.
나중에는 미군 전차대대 장교들이 '우리까지 밤에 잠도 안 자고 싸울 수는 없다. 전차는 야간에 사고를 일으킬 수 있고 적의 공격에도 취약하다'라고 하자 전차대대에는 숙면을 취하게 하며 '이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충분히 휴식을 취하게 협조하라'고 하며 배려해줬으며, 실제로 이들은 그 보답으로 주간에 속도를 올려 1사단의 최선두를 따라잡았다. 이때 당시 장교들이 한 말은 정확하게 "전차는 낮에는 호랑이지만 밤에는 고양이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막힌 대답이라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밝힌 바가 있다.
10월 19일 평양 점령에 성공했다. 이는 전쟁 당시 최초의 평양 점령이었는데, 1사단과 평양 점령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7사단 역시 다른 방향에서 같은 날 평양에 입성해 최초 입성부대라며 자랑하곤 한다. 평양 점령 후 김일성의 집무실에 1사단 지휘소를 차리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본인이 평양 출신이었던 덕분에 평양 점령 시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사단 통신참모가 북한군의 통신선을 발견해 도청을 하다 통신이 연결되어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이 통신참모는 평양 사투리를 못해 사단장인 백선엽에게 직접 해주십사 하고 요청을 했다. 백선엽은 유창한 평양 사투리로 현재 적이 유엔군의 전력에 눌려 사기가 바닥을 치고 후퇴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외에도 미군이 대동강을 도하하느라 진격을 못하고 있던 틈에 수심이 얕은 곳으로 병력을 도하시켜 가장 먼저 평양 중심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때 1사단의 고문관이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아느냐고 신기해 하자 "나는 어렸을 때 평양에서 수영을 배웠다. 물 위는 물론이고 물 아래까지 다 알고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계속해서 북진을 계속해 압록강변에 거의 다다랐지만, 10월 말부터는 중국군의 반격에 휘말리면서 12월 4일에는 통탄스럽게도 애써 점령했던 평양까지 철수하고, 38선 이남으로까지 밀려가게 된다.
중공군 1951년 춘계공세 저지
다부동 전투 및 평양 점령에 비해 덜 알려져있지만, 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 중 동부전선의 붕괴를 막아내는 데 공헌한 것도 중요한 전공이었다. 백선엽은 1.4 후퇴 기간 중공군의 맹공세를 맞아서도 그럭저럭 제1사단의 건제를 유지한 채 성공리에 퇴각작전을 마무리했으며, 이어지는 반격작전에서도 미군 제1군단 예하로 서울 탈환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러던 중 3월 28일에 제1군단 군단장이던 김백일 소장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백선엽이 후임으로 발령받아 4월부터 제1군단 군단장 직을 수행하게 된다.
당시 제1군단은 전선의 최동단(우익)인 설악산부터 동해안 대포리까지의 구간을 담당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좌익을 유재흥 소장의 제3군단이 맡고 있었던 것. 야심찬 1951년 춘계 공세에 나선 공산군은 서부전선을 노린 4월 공세에서 미군의 막강한 화력에 막혀 전혀 돌파구를 뚫지 못하게 되자, 5월에는 방향을 바꾸어 이곳 동부전선에 배치된 허약한 한국군 사단들을 노리게 된다. 이 공세에서 동부전선을 담당한 중공군 제9병단은 예하 중공군 3개 야전군(12·20·27군)을 주력으로 한국군 제3군단 및 미군 제10군단 우익에 위치한 한국군 4개 사단(3·5·7·9사단)을 통타할 계획이었다.
제1군단 전선은 주공축선은 아니었으나, 북한군 3개 군단(2·3·5군단)이 중요한 조공을 펴기로 했다. 이들 북한군 군단들이 수도사단 전선을 돌파하면, 속사리~하진부리로 진격하여 한국군 제3군단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 격멸하고 제1군단의 증원을 봉쇄할 예정이었다.
1951년 5월 16일 개시된 중공군의 공세는 이 의도대로 착착 맞아떨어졌다. 중공군 제20군은 한국군 제7사단 전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고, 특히 중공군 제60사단은 전선의 틈을 헤집고 후방 깊숙히 침투하여 만 하루 만에 제3군단의 후방 교통로 상의 요지인 오마치 고개에 도달한다. 이로 인해 한국군 제3군단은 완전히 패닉에 빠져 변변히 싸우지도 못한 채 군단 전체가 하루만에 붕괴되는데, 이것이 한국군 최악의 패배로 회자되는 현리 전투였다. 이 현리 전투에서 붕괴된 2개 사단 병력은 남쪽 오마치 고개 방향으로의 퇴각을 포기하고, 대부분의 장비를 유기한 채 동쪽 방태산 방향으로 무질서하게 퇴각했다. 여기서 공산군의 원래 계획대로 북한군 5군단과 2군단까지 전선을 돌파하여 동쪽 퇴로까지 차단했으면 한국군의 대병력이 꼼짝없이 전멸을 맞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백선엽의 제1군단은 원통 일대에서 시작된 북한군 제5군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다. 초반에 다소 밀리기는 했으나, 수도사단이 한계령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완강히 막아내었다. 이 사이에 한국군 제3군단은 조직이 와해되었음에도 병력 상당수가 어떻게든 방태산을 넘어 퇴각 행렬을 이어갔다. 중공군 병력 일부가 계속 제3군단을 추격해 창촌에서 오대산, 계방산을 거쳐 하진부리로 몰아 붙였지만, 북한군 조공이 적시에 따라붙지 못하는 바람에 병력이 부족해서 결정타를 날리지는 못했다. 5월 20일까지 제3군단 소속 제3사단이 3,621명(34%), 제9사단이 4,582명(40%)의 전력을 수습하면서 지연전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제1군단의 방어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 사이 백선엽은 군단 예비인 제11사단 제20연대를 긴급히 대관령에 투입하여, 중공군이 이를 장악하기 전에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대관령이 함락될 경우, 제1군단 전체의 보급로가 끊기는 것은 물론 전술지원을 톡톡히 해주고 있던 강릉비행장의 미 공군 항공전력도 제 기능을 못하는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한계령에서 대관령까지는 직선거리로만 55㎞에 이르는데, 제1군단은 이렇게 광범위한 좌측면이 노출되고도 일단 영동 지방으로의 관문을 틀어막아 반격의 기회를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좁은 영서 산악지역에서 충분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중공군은 보급난과 증원병력 부족으로 공세의 한계를 맞게 된다.
그러자 미군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반격의 기회를 포착하고 제8군 예비대인 미군 제3보병사단을 긴급히 횡성을 거쳐 장평, 속사로 투입한다. 그리고 5월 20일, 하진부리에서 백선엽 등 이 지구 야전 지휘관들을 소집해 미군 제3보병사단과 한국군 제1군단이 중심이 되어 반격할 것을 명령한다. 이후 다른 전선에서 미군이 공세로 돌입하는 한편, 제3보병사단이 5월 22일 운두령을 탈환하며 남하한 중공군의 보급로를 끊는 동시에 제1군단 병력이 역공을 펼치자 중공군의 춘계 공세는 완전히 종말을 맞게 되었다.
여기서 보듯 유재흥의 제3군단이 거듭된 졸전으로 밴 플리트로부터 군단 해체라는 초유의 치욕을 당한데 반해, 백선엽의 제1군단이 그나마 선전함으로써 한국군의 군단급 사령부가 존속할 수 있었다. 또한 제1군단이 동해안 지역의 방어선을 견고하게 유지한 탓에 이어진 반격전에서 한국군은 동부전선을 38도선 북쪽으로 한참 밀어올려 오늘날과 같이 진부령 이북 화진포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7월부터는 미국과 북한-중국 간의 정전회담이 시작되어 한국군 대표로 참가하게된다.
빨치산 토벌전
1950년 9월에 낙동강 전선에서 고착되어 전투를 치르던 조선인민군 병력들은 기습적인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해 핵심 교통로인 경부축선이 차단당하면서 퇴로를 잃게 된다. 다수 병력은 험준한 중부 산악지대를 따라 북으로 이동했지만, 퇴각 기회를 놓친 병력과 전라도의 공산주의자들은 잔류하여 빨치산 활동을 벌이도록 조치된다. 특히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의 경험을 살려 김일성에게 남한 후방에 4~5만 명의 조선인민군이 남아 후방 교란 임무를 계속 수행하면, 향후 중공군이 가세한 반격시 큰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이를 권고한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남한에 조직된 당 조직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별로 유격대를 조직해 활동하라고 명령한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 회문산, 불갑산, 백아산, 화학산 등 남부지역 각지의 험준한 산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이 후방 치안을 교란하며 큰 위협이 되자, 육군본부는 '작전명령 제216호'를 통해 빨치산 토벌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하고, 기존의 유격사령부(6개 유격대대로 구성), 제2사단, 제5사단과, 새로 편성 중인 제9사단, 제11사단을 배속시켰다. 1950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최덕신 준장의 제11사단이 호남지방에서 대대적인 토벌전을 벌였고, 최영희 준장의 제8사단은 1951년 2월 횡성지구 전투 이후 후방으로 이동해, 1951년 4월 제11사단을 교대해 5월까지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제2사단은 1951년 2~4월에 걸쳐 태백산 일대에 고립된 조선인민군 패잔병 중심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펼쳤다.
이러한 1951년 상반기의 작전을 통해 후방 빨치산 세력이 크게 위축되기는 하였으나, 문제점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자비한 토벌작전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이 많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51년 2월 발생한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다. 이는 제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이 과거 국민혁명군 시절 중국 공산당 유격대를 상대한 경험으로 무자비한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고집한 영향도 컸다. 여기서 살아남은 빨치산 세력들은 지리산 중심으로 재결집해 인근의 운봉, 곡성, 하동 및 전라선 철도를 교란했다.
결국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는 전방이 소강상태인 틈을 이용해 전방 야전사단 일부를 빼내 겨울 3개월 내에 후방을 완전히 정리할 계획을 세운다. 이는 산악지역에 은거한 빨치산 특성상 숲이 우거지는 봄~가을에는 색출이 어려운데 반해, 겨울에는 잎이 다 떨어지고 하얀 눈밭이 되므로 숨을 곳도 줄어들고 항공정찰로 수색도 용이했기 때문이다. 특히 밴 플리트 자신부터 그리스 내전에 미군 군사고문단장으로 투입되어 공산 게릴라에 대한 토벌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이러한 구상을 적극 밀어붙였다.
그는 백선엽이 제1군단 지휘에서 보여준 능력과 만주군에서 팔로군 게릴라 토벌 경험이 있다는 점을 높이 사서,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한 Task Force Paik, 즉 백(白)야전전투사령부를 창설해 이 대 토벌작전을 지휘할 것을 지시한다. 작전명은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이었다. 백야전사에는 2개 야전사단(수도사단과 제8사단), 서남지구전투사령부[30] 및 예하부대, 전투경찰부대를 배속시켰다. 백야전사는 2개 주력 야전사단 소속 6개 연대를 기동타격대로 운용하고, 서남지구전투사 소속 경비부대와 전투경찰부대를 저지부대 및 거점 수비대로 활용해 12월 2일부터 토벌작전에 돌입했다.
백야전사의 토벌전 제1기(1951년 12월 2~14일)는 지리산 포위전으로 전개되었다. 수도사단은 지리산 남부에, 제8사단은 지리산 북부에 배치되어 포위망을 좁혀간 것이다. 12월 6일까지 양 사단은 지리산 능선을 향해 올라가며 포위망을 좁혀 조우하고, 다시 향후 1주일간 하산하면서 중간에 고립된 빨치산을 색출, 섬멸하였다.
제2기(1951년 12월 16일 ~ 1952년 1월 4일)에서는 지리산 외부의 거점까지 대상을 넓혀 알려진 거점들에 대한 정밀 타격을 개시했다. 이 기간에는 각 연대들이 목표를 나누어 전주~무주 사이의 운장산, 함양 북쪽의 장안산, 정읍~순창 사이의 내장산, 회문산, 장군산, 순천 부근의 백운산 등 곳곳의 빨치산을 격멸하였다. 서남지구전투사는 계속 지리산에 남아 미처 소탕하지 못한 빨치산을 계속 소탕하였다.
이후 1월 말까지는 제1, 2기 작전구역을 재점검하며 제3기 작전을 펼쳐 잔적들을 더 철저하게 색출해냈다. 이때 지리산 대성골에 있었던 전투가 작전의 분기점이 되었다. 제1, 2기 작전에서 예봉을 피한 지리산 빨치산들은 1월 혹한기에 접어들어 더 이상의 공격은 없을 것이라 방심했으나, 수도사단이 다시 사단 전력을 동원해 남부능선에서 벽소령 및 세석평전 쪽으로 포위망을 짜고 밀어붙이자 대성골 방향으로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다. 17일 밤 ~ 18일에 걸쳐 진행된 이 포위망 돌파전에서 빨치산 약 300명이 사살되고, 251명이 포로가 되는 등 지리산 빨치산 전력의 약 반수가 궤멸되었다. 이를 계기로 남부군 전력은 크게 손상되어 후방부대 및 전투경찰부대 만으로 상대가 가능한 수준으로 위축되었다.
백선엽은 이렇게 약 2개월 동안 예하 부대들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단기간에 빨치산 세력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특히 그는 '투항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절대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사면장에 자신의 사인을 넣어 비행기에서 살포한 덕에 수많은 유격대원들이 사면장을 들고 항복하게 만든다. 이는 제11사단장 최덕신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 방식이었다. 최덕신은 견벽청야작전을 실행하며 "100명의 공비를 사살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중에 상당한 부분이 양민일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하며 민간인의 희생을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했다. 백선엽은 이로 인해 남한 곳곳에서 군경에 대한 민심이 악화되던 상황에서 토벌전에 돌입해야 했다. 오죽하면 김성수 부통령이 백선엽에게 "주민들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 군경의 민폐가 심한 현실을 직시하고 부디 국민을 애호하여 민간에 폐를 끼치지 말고 치안을 확보해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서한을 보내기까지 했다. 백선엽은 이 때문에 토벌작전 중에 적성지역에서 발견되는 이들은 가급적 생포하여 일단 포로수용소로 보내고, 여기서 실제 빨치산과 양민을 구분해내도록 했다. 이 방식으로도 토벌대의 일부 잔혹 행위와 양민 학살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불필요한 희생을 많이 줄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에 국민혁명군 및 광복군 활동을 한 최덕신이 양민 학살의 오명을 남겼고, 간도특설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꼽히는 백선엽이 그나마 피해를 줄이며 성공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했다는 점이다.[31] 공과가 뒤섞인 한국 현대사 인물의 평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다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백선엽은 이 과정에서의 전과를 사살 5,009명, 생포 3,968명, 귀순 45명이라고 회고했다. 반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는 사살 6,606명, 포로 7,115명으로 집계했다.# 여러 기록간에 숫자상으로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작전 기간 및 참가 부대 포함 범위와, 후에 양민으로 판정된 포로들의 포함 여부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전공으로 백선엽은 1952년 1월 12일자로 중장으로 진급한다. 이후 백야전전투사령부는 토벌작전을 수도사단에게 인계하고, 다시 전방으로 이동하여 제2군단 재창설 작업을 맡게 된다.
전쟁후기
이후 미군 제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대장의 지원 하에 1952년에 새로 창설된 제2군단 군단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발췌 개헌 당시 계엄령을 거부한 이종찬을 대신해 1952년 7월에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953년 1월 31일에는 그 동안의 전공으로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불과 33세였다. 이후 한국군의 규모 확대와 급여, 복지문제 개선과 지원을 확대하는 데 애쓰는 가운데 종전을 맡게 되었다.
6.25 전쟁 기간 동안 백선엽은 상기한 수많은 활약과 더불어 전쟁 중 부대 궤멸이나 대패, 총퇴각 같은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고, 빨치산 토벌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등 큰 전공을 쌓으며 미군 장교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덕분에 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를 통해 미군은 한국군을 냉전 구도에서 공산 블럭의 남하를 저지하는 유용한 동맹군으로서 인정하게 된다.
이 사실이 상당히 중요한 것은 6.25 전쟁 초~중반까지만 해도 미군은 한국군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한국군을 정규군이라기 보다는 조잡한 민병대 정도로 폄하했고, 장비를 주면 잃어버려서 적이 오히려 노획한 장비로 중무장을 할거라며 한국군에 대한 지원에 인색한 장군들도 많았다.[32] 전쟁 후반으로 가며 많은 희생 끝에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게 되고, 한국군은 제한적이나마 자립의 기반을 닦게 된 것이다.
전후 활동
이승만 대통령은 노회한 정치가답게, 전쟁 경험을 통해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자 강력한 무력을 갖춘 세력으로 떠오른 육군 장교단을 내부 세력들이 상호 견제하게 만들어 쿠데타 가능성을 봉쇄했다. 그 핵심 세력이 ① 백선엽을 필두로 한 평안도계, ② 정일권을 필두로 한 함경도계, ③ 이형근을 필두로 한 일본육사계였다. 전후 1950년대 이승만 정권 내내 이들 3명의 대장들은 군내 요직을 돌아가며 맡았다. 이 영향으로 백선엽은 1953년 12월 15일에 한국군 최초로 탄생한 야전군급 부대인 제1야전군의 초대 사령관을 지냈으며, 1952년(7대)에 이어 1957년에 육군참모총장(10대)을 역임했고, 정권 말기인 1959년에는 합동참모의장(4대)에 부임했다.
이 세 군맥 가운데 가장 큰 조직은 정일권의 함경도계로, 전성기에는 김동하, 박창암 등을 비롯해 75명의 장성이 이 계파였다고 한다. 평안도계는 40명 정도의 장성이 속해 있었는데, 백선엽은 파벌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아 장도영이 평안도계의 리더 역할을 점차 맡게 된다. 그러나 이런 3대 파벌이 군내 인사를 과점하고 요직을 꿰어차며 각종 비리를 저지르자, 여기에 속하지 못한 장교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져갔다. 5·16 군사정변도 결국에는 이 파벌 구도에서 배제된 장교들(특히 김종필을 위시한 남한 출신 육사 8기생 그룹)이 박정희를 내세워 벌인 집단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선엽이 정일권만큼 노골적인 군내 정치를 벌이지 않았다 해도, 육군 내 최고위급 장군으로 이러한 내부 모순을 적극적으로 해소하지 못해 군사독재의 길을 열어준 책임은 일부 있다.
결국 백선엽은 4.19혁명 이후인 1960년 5월 31일 예편하고, 7월에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부임하였다. 그 사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33], 박정희를 위시한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여전히 군내 강한 영향력을 가진 백선엽의 개입을 막기 위해 계속 대사 직책을 주어 외국을 떠돌도록 한다. 1961년 7월에는 주 프랑스 대사(유럽 및 아프리카 13개국까지 관할)로 발령받아 멀리 유럽으로 보내버렸고, 1965년 7월에는 다시 주 캐나다 대사로 발령내어 다시 미주에 머무르게 했다.
그렇게 거의 10년이 지나 군내 인맥이 싹 박정희 충성파들로 교체되고 백선엽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뒤에야, 박정희는 백선엽을 불러들였다. 그래도 과거 남로당 활동 전력을 비호해준 은혜를 배려했는지, 1969년 10월에는 교통부장관(19대)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는 당시 대한민국의 몇 안 되는 핵심 화학기업이던 충주비료(1비) 사장을 맡았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호남비료(2비) 사장을 겸직하며 1973년에 한국종합화학공업으로 합병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종식된 1980년까지 장기간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지내다가 퇴임하였다.
그 이후에는 별다른 공직을 맡지 않고, 6.25 전쟁의 전쟁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여러 기념활동에 참가하였다. 특히 전쟁 시기 미군 장성들의 우호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주한미군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국군 지휘관들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던 미군들도 백선엽만큼은 실력으로도 대단히 유능했다고 공통적으로 평가했다.[34]
그러다 보니 주한미군 사령관은 이·취임식 때마다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으로 시작하는 게 전통이 되었으며, 현재 미 2사단 훈련평가원실 건물 이름이 '백선엽관'이다. 또한 미군 장성진급자 모임인 캡스톤 그룹(capstone group)이 한국에 오면 백선엽을 만나는 게 필수코스였다. 현재도 백선엽의 6·25전쟁 경험담 육성녹음은 미국 국립보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6·25전쟁 회고록 《군과 나》는 미군 주요 군사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 이후 2013년에는 미8군 명예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2016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8군 사령관 이•취임식에 초대되었다.
이렇듯 백 장군에 대해서는 한국군보다 오히려 미군들이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부르며 극진히 예우해왔다. 주한 미군은 2013년 그를 '명예 미8군사령관'으로 위촉해 각종 공식행사 때 주한 미8군사령관과 같은 예우를 해왔다. Living Legend 한국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이 백 장군에게 한국군 최초 원수 계급을 부여하려 했으나 간도특설대 경력 때문에 반대가 심해 무산되었다.
백선엽의 전투 활약상을 담은 ‘6·25 전쟁영웅의 투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가 2016년 5월부터 9월까지 육사 누리집에 30회가 연재되었다가 2017년 일반에도 공개되었는데, 당시 백선엽의 친일 행적은 언급하지 않고 전쟁 영웅으로 미화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다 2018년 육사 누리집에서 삭제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이는 문재인 정부 들어 국군의 뿌리를 광복군에서 찾으려는 노력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육군 관계자는 "백 장군 웹툰 삭제와 국군 역사 재조명은 무관하고, (새로운 웹툰 게재로 인해) 기존의 백 장군 웹툰이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 #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정부의 대북정책에 반대해왔으며 9.19선언에 반발해 기존의 성우회, 대한민국재향군인회와는 다른 대한민국 수호 예비역장성단이라는 단체를 조직,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폐기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망
2020년 7월 10일 오후 11시 35분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9세. #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인데,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박원순 전 시장의 빈소가 있는 영향으로 보인다. 장례식 후에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반응은 대체로 박원순 시장에 묻혔지만 갈리는 편이다. 사실 현역 서울특별시장이 임기 도중 실종되어 사망한 채 발견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박원순에 비해 백선엽 장군은 99세라는 고령에 사망한 것인 만큼 안 묻히는게 이상한 것.
간도 특설대 복무
백선엽의 대표적인 흑역사는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이다. 간도특설대의 주 임무가 만주 지역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게릴라들을 토벌하는 것이었기에[35],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다. 물론, 김백일, 신현준, 김석범 등 창설 초기부터 활동한 군인들에 비해 뒤늦게 합류하여 조선인 독립운동세력의 직접 토벌에 상대적으로 덜 참여한 점은 맞다. 간도특설대가 창설 초기에는 동북항일연군 등 간도 지역의 토벌을 담당하면서 조선인 상대의 잔혹행위를 다수 자행하였으나, 동북항일연군 세력이 거의 소멸된 1943년 무렵부터는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 주적이었기 때문이다. 백선엽 본인도 간도특설대 복무 사실 자체[36]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이런 이유를 들어 적극적인 친일 행위는 아니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친여 성향 인사들이 장악한 단체 등에서 '백선엽이 일제시대 항일 독립군 토벌에 나섰던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관련해 "독립군과 전투 행위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했다. 백 장군은 "내가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해 간 1943년 초 간도 지역은 항일 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1930년대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고 없을 때였다"고 했다.
……
백 장군은 1993년 일본어판 자서전에서 간도특설대 근무 시절 조선인 항일 독립군과의 전투가 있었던 것처럼 기술한 데 대해선 "1930년대 간도특설대 초기의 피할 수 없었던 동족 간의 전투와 희생 사례에 대해 같은 조선인으로서의 가슴 아픈 소회를 밝혔던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 6.25전쟁 발발 69주년 인터뷰 〈백선엽 "軍 간부들 정신 바짝 차려야"〉
사실 여기에는 순순히 책임을 인정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정도 있었다. 간도특설대 출신자들 다수가 대한민국 육군의 주요 창군멤버로서 활약했기 때문이다.[37] 게다가 당시 간도특설대의 토벌대상이었던 동북항일연군에는 이후 북한 정권의 핵심이 되는 소위 만주빨치산들이 있었다. 바로 김일성 그룹[38]이다. 이러니 분단 이후 한국전쟁을 치르고 체제 경쟁이 극심하던 상황에서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이는 백선엽이 다른 일본제국 육군, 만주군 출신자들과 달리 구 일본군식 가혹행위를 답습하지 않았고, 한국전쟁 시기에도 투항자, 민간인 학살에 비판적인 등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왔기에 매우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일부 정상을 참작한다 하더라도, 간도특설대가 친일반민족행위에 적극 가담한 부대로서 일정 부분 과오와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점은 한계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중에서는 몇 안되는 상식인은 맞다.
이런 점을 본인도 염두에 둔 것인지 박근혜 정부 시절 국가보훈처에서 공무원 대상 교육 의뢰가 들어오자 그건 독립운동가분들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상당히 거북해 했다고 한다
독립군 토벌 여부논란
친일 행위를 한 것 자체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백선엽이 직접 독립군을 토벌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백선엽 본인은 2009년 인터뷰에서 '독립군을 구경도 해보지 못했는데 무슨 토벌을 하느냐'며 독립군을 직접 토벌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일어판 저서에서는 '우리들이 쫓았던 게릴라 중에는 조선인이 섞여있다'는 식의 서술을 한 적은 있는데# 이에 대해 그는 "동족상잔의 사례를 같은 조선인으로서 가슴아픈 소회를 밝혔던 것"이라면서 자신이 직접 토벌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설명했다
친동생의 선인학원 비리 사건
친동생인 백인엽(白仁燁)이 저지른 선인학원 비리와 관련하여 인천시민들에게 욕을 먹고 있다. 백선엽 본인은 선인학원 운영이나 비리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친동생의 잘못을 덮어주려 한 행동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선인학원은 그의 친동생인 백인엽이 설립한 학원 재단으로 산하에 여러 중고교와 대학교를 두고 있었으나, 백인엽의 비리로 학원이 막장화되면서 인천 교육계에게 골치거리가 되었다. 오랜 진통 끝에 1990년대에 국가에서 선인재단 산하 학교를 백인엽으로부터 모두 몰수하여 국공립 학교로 전환되었다.
선인학원 비리로 백인엽이 구속되었으나 백선엽의 구명으로 풀려난 바 있다. 또 전두환 정권 당시 문교부 장관 이규호가 선인학원의 국·공립화를 추진했으나, 막판에 백선엽이 선인학원의 관선 이사가 되어 선인학원의 국·공립화가 무산된 바 있다.
부동산 투기 사건
백선엽은 평생 군인이었다는 이미지와 달리, 부동산으로 상당한 자산을 모으기도 했다. 대표적인 자산으로는 강남역 5번 출구 앞의 덕흥빌딩[40]이 있다. 이 건물은 땅값만 공시지가 기준으로 350억원이 넘고, 건물 전체 시세는 최소 2천억 원이 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태원의 자택만 해도 시가 5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만한 부를 축적한 것은 1970년대부터 부동산 요지에 계속 투자해왔기 때문이다. 백선엽은 1971년 교통부장관을 역임했으며, 이후에는 당시의 알짜 공기업이던 충주비료(1비) 사장을 맡았다. 이후에는 중화학 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호남비료(2비) 사장을 겸직하며 1973년 이 두 회사가 한국종합화학공업으로 합병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이렇게 장관과 공기업 사장을 하며 상당한 개발정보와 여유자금을 얻게 되자, 1972년부터 평택시 팽성읍 일대의 땅을 사들이기 시작한다.[41] 이어 1977년에는 강남구 역삼동의 임야, 1979년에는 강남구 삼성동의 토지[42], 1987년에는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1채 등 강남 부동산을 적극적으로 매입했다. 이 과정에서 백선엽 부부는 부인 노인숙 씨와 장남 백남혁 씨(1953년생)로 명의를 분산해 부동산을 구입했다.
알다시피 이렇게 투자한 강남과 평택의 부동산은 1980년대를 거치며 가치가 폭등하였다. 1986년에는 기존에 소유하던 역삼동 임야 464평을 서초동 땅 258평과 맞바꾸는데, 이 서초동 땅이 현재 덕흥빌딩 부지이다. 그러다가 당시 극심한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기 위해 1990년부터 토지초과이득세가 도입되자, 노인숙 씨는 세금 회피를 위해 이곳 강남역 땅을 1990년에 장남에게 명의신탁을 해버리고 1992년에는 오늘날의 덕흥빌딩을 신축했다.# 이후 장남이 이 건물을 독식하려고 들자, 백선엽 부부는 부인(노인숙)과 다른 3명의 자녀(장녀 백남희, 차녀 백남순, 차남 백남흥) 명의로 장남에게 소송을 걸어 소유권 절반을 되찾아왔다. 장남은 그 후 이 지분 절반을 약 400억 원을 지불하고 다시 구입했다고 한다.[43] 말하자면, 백선엽 부부는 부동산 투기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거부를 일구었고, 차명재산 분산 과정에서 스텝이 꼬여 자산가에서 흔히 일어나는 가족 내부의 골육상쟁 소송전까지 겪은 셈이다.#
이런 백선엽 부부의 축재 과정은 일견 운 좋은 부동산 투자로 보이기도 하나, 존경받던 군 원로의 부인이 복부인으로 활동하며 부동산 투기를 일삼았다는 비난도 상당하다. 특히 백선엽처럼 장관과 대형 공기업 사장을 역임했던 인사라면 상당한 개발정보를 미리 획득했을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당시에는 워낙 보편적이기는 했으나) 차명거래와 명의신탁을 통해 갖은 세금 회피를 시도하고, 나중에는 재산다툼으로 부모자식 간의 볼썽사나운 모습까지 보였다는 점을 옹호하기는 힘들 것이다.
참고로 백선엽의 사촌누나가 바로 명동 사채시장의 큰손 '백 할머니'로 이름을 떨친 백희엽이기도 했다. 전설의 '백 할머니' 백희엽은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사람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백선엽 부부의 남다른 축재에 백희엽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도 있으나, 명확히 확인된 바는 없다.
대한민국 국군최초 원수 추대논란
6.25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백선엽을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로 추대하자는 이야기는 성우회, 재향군인회 등의 예비역 단체들에서 상당히 오래 전부터 거론되어 왔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2월, 당시 국군기무사령부 사령관이던 김종태 중장은 예비역 장군들의 이러한 의견을 수렴하여 김태영 국방부 장관과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김종태 사령관은 추대 이유로 "명예원수 추대는 오성(五星) 장군에 준하는 장군 임명 건이기 때문에 이번에 추대를 하면 백선엽 장군이 개인적으로 국민적 영웅이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6·25전쟁 참전자들의 자긍심도 올라가고, 국민들의 안보의식도 높아질 것" 등을 꼽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긍정적으로 반응하며 청와대에서 직접 나서는 것보다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나서는 것이 모양새가 좋다는 의견을 추가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 국방부는 법률 검토에 착수하였다.#
시기상으로도 2010년은 6.25 전쟁 발발 60주년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민관 합동의 '6·25전쟁 60주년기념사업위원회'(한승수 당시 국무총리, 이홍구 전 국무총리 공동위원장)를 발족시켰고, 대한민국 국방부도 자체적으로 '6·25전쟁 60주년사업단'을 만들어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다. 백선엽의 원수 추대 및 회고록 발간도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가 기획한 사업안 중 하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방부의 법률검토 결과 정식 원수로 추대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당시 원수 계급에 대해 규정하고 있던 군인사법(軍人事法) 제27조는 다음과 같았다:
제27조(원수임명) ①원수는 국가에 대한 공적이 현저한 대장중에서 임명한다.
②원수의 임명은 국방부장관의 추천에 의하여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행한다.
우선 여기서 1항의 대장은 현역 대장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예비역 대장인 백선엽은 해당이 안 된다. 또한 군인에게 있어 현저한 공적이란 당연히 전공(戰功)을 의미하므로, 이 조항의 취지를 따져보면 원수 진급은 전시에만 가능하다. 결국 이는 부담스러운 법률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이 때문에 김태영 국방장관은 부담이 덜한 명예원수 계급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하지만 이 역시 법률적인 문제가 있었다. 당시 진급을 규정한 군인사법 제24조와 '예비역의 진급 및 장교 임용에 관한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군인사법]
제24조의4(명예진급) ①복무중 공적이 특히 현저한 자가 제53조의2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명예전역하는 때에는 명예진급시킬 수 있다.
②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명예진급된 자의 연금, 명예전역수당등 각종 급여의 지급은 명예진급전의 계급으로 하고, 기타 예우는 명예진급된 계급으로 한다.
③명예진급의 요건 기타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예비역의 진급 및 장교 임용에 관한 규정]
제2조(진급대상자) 예비역의 장교·부사관 또는 병으로서 제3조의 규정에 의한 진급에 필요한최저복무기간을 경과하고 120일의 범위안에서 국방부장관이 정하는 기간의교육소집을 마친 자에 대하여는 그 원에 의하여 진급시킬 수 있다.
제3조(진급최저복무기간) ① 예비역장교의 진급에 필요한 최저복무기간은 다음과 같다.
진급될 계급
최저복무기간
대령
중령으로서 7년
중령
소령으로서 7년
소령
대위로서 7년
대위
중위로서 6년
중위
소위로서 2년
이들 조문을 살펴보면 예비역은 대령까지만 진급이 가능했다. 명예원수로 추대하려고 해도 법적 근거가 없던 것이었다. 결국 대한민국 국방부는 입법부 차원에서의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군 출신 국회의원들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김장수 의원(전직 제40대 국방장관), 황진하 의원(전직 유엔 키프로스 평화유지군 사령관, 하나회 출신) 등이 나서서 백선엽의 명예원수 추대를 위한 제도 정비를 역설했다.
그런데 문제는 법률적 부분에만 그치지 않았다. 백선엽의 명예원수 추대 소식이 알려지자, 군 원로들 가운데서도 백선엽의 원수 추대를 극력 반대하는 목소리가 공공연히 터져나왔다. 예컨대 역시 6.25 전쟁 영웅이자 주월 한국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채명신[44] 장군이 그러했다.
채명신 : 큰일 낼 사람들이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 의식이 희박한지 모를 일이오. 건국 이후의 첫 명예 원수 추대는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중요하오. 만약 일본군·만주군 출신에다 독립군 토벌 작전의 지휘관 경력자가 명예 원수로 추대된다면 우리나라 건국사와 국군사는 하루 아침에 북한 역사관에 종속될 거요.
박경석 : 제 생각도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령관님을 뵙자고 한 것입니다. 지금 일반 국민들의 상당수가 백선엽 자신에 의해 과장된 6·25 전쟁사를 통해 (백선엽을) 낙동강에서 조국을 구한 유일한 영웅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일반인 뿐만 아닙니다. 국방장관을 역임한 예비역 장성과 중앙일보 등 일부 보수 일간신문도 백선엽이 우리나라 제일의 전쟁 영웅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내용 상당량이 과장된 것이지요.
박경석, 《불후의 명장 채명신》, 460쪽
이 증언을 채록한 박경석[45] 예비역 준장도 격렬한 반대자였다. 박경석은 본인의 홈페이지에 '백선엽이 일본국 괴뢰정부인 만주국 간도특설대의 육군중위 계급으로 독립군 소탕작전을 지휘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는 점, 낙동강 전선에서 활약이 과장 평가되었다는 점, 북한이 남한에 대해 건군 과정을 헐뜯는 내용이 일본군과 만주군에 의한 건군인데 백선엽이 건국 첫 명예원수가 된다면 그들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는 점'을 담은 성명서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는 세기의 난센스다〉를 게재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이름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은 군 원로들도 대한민국 국방부와 청와대에 반대 의사를 전달했다. 이들은 다른 장교들도 백선엽 못지 않게 많은 고생을 하며 전공을 세웠는데, 유독 백선엽만이 영웅시되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46] 특히 다부동 전투 이전 개전 초기에는 경험 부족으로 상당한 실책도 연발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모 장군은 "백선엽 장군은 간도특설대 출신인데 대장 되었다고 자랑하지만 제대로 한 것이 뭐가 있는지 궁금하다"면서 "6사단장이었던 김종오(金鍾五) 장군(작고·예비역 대장)은 잘 싸웠기 때문에 서울 진격을 지연시켰지만,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개성을 무방비 상태로 점령당하고, 봉일천에서 사단사령부가 기습당해 무기를 버리고 도망했는데, 무슨 영웅이고 원수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일부 창군 원로는 청와대 안보특보실에 자필 편지를 보내 "비열했던 백 장군의 과거까지 까겠다"고 극언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군 원로들의 반발, 간도특설대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광복회의 반발 등이 겹쳐지자 대통령과 국방장관은 명예원수 추대 사업에 대한 의지를 꺾게 된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6.25 전쟁 60주년 기념사업에서도 백선엽 회고록 출간 정도로 관련 사업을 축소하여 진행한다. 이어 전쟁 발발 60주년이라는 상징적인 시기가 지나고 그해(2010년) 11월 23일에 연평도 포격 도발이 이어지며 명예원수 추대 사업은 완전히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국립서울현충원 안장 논란
2020년 5월 24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회가 개최한 '2020 친일과 항일의 현장, 현충원 역사 바로 세우기' 행사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이수진 국회의원(서울 동작구 을)과 김병기 국회의원(서울 동작구 갑)의 발언으로 촉발된 논란이다. 이 자리에서 이수진 의원은 "친일파 묘역을 파묘(破墓)하는 운동과 함께 법률안도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밝혔고, 김병기 의원은 한술 더 떠 "지금까지 묻힌 자들도 문제지만 앞으로, 예를 들면 백선엽의 경우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47] 고 발언하였다.
이렇게 백선엽을 비롯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된 인물들을 국립현충원에서 내몰거나, 그 사실을 적시하려는 시도는 광복회 등 독립운동 기념 단체들을 중심으로 그간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광복회는 일제강점기를 미화하는 자를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친일찬양금지법의 제정과,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반민족 인사의 묘지에 친일행적비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국립묘지법 개정을 추진해왔다. 이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입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하자 논란이 수면 위로 불거진 것이다.
그러자 반대 여론도 즉시 격렬하게 제기되었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는 입장문을 통해 "정치권을 중심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워 국립현충원에서 친일파 무덤을 파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론분열을 조장하는 무책임한 행위"라면서, 백선엽이 6.25 전쟁에서 헌신한 공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친일로 매도하는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
일단 현행 국립묘지법 상으로 백선엽이 국립현충원 안장 대상임은 명백하다. 국립묘지법에는 국립서울현충원 및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대상자를 규정(제5조 1항)하고 있는데, 백선엽은 다음 2개 요건에 해당된다:
라. 「상훈법」 제13조에 따른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사람으로서 사망한 사람
마. 장성급(將星級) 장교 또는 20년 이상 군에 복무(복무기간 계산은 「군인연금법」 제5조를 준용하되, 사관학교 등 군 양성교육기간을 포함한다)한 사람 중 전역ㆍ퇴역 또는 면역된 후 사망한 사람
백선엽은 무공훈장 중 최고 1등급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으며, 역시 대한민국 국군 최고 계급인 대장으로 전역했기 때문이다. 박삼득 국가보훈처장도 "백 장군은 현행법상 현충원 안장 대상이 맞다"며 "다른 의견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이를 재차 확인하였다.
다만 국가보훈처도 국립서울현충원은 장군 묘역이 포화된 상태라 불가능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는게 합당하다는 방침이다. 이는 과거 이명박 정부 및 박근혜 정부 시절의 입장에서 다소 변화한 것이다. 당시에는 6.25 전쟁 최고의 공적을 세운 백선엽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해 예우하자는 의견에 호의적이어서, 위의 두 요건 대신에 국립묘지법 상의 국가유공자 요건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파. 국가나 사회에 현저하게 공헌한 사람(외국인을 포함한다) 중 사망한 사람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춘 사람
이는 빈 자리가 없는 장군 묘역 대신에 약간 여유가 있는 국가유공자 묘역을 이용하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겠다는 방안이었다. 백선엽은 무공훈장 이외에도 산업훈장 중 역시 최고 1등급인 금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으므로,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이 규정을 적용받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가보훈처 및 국방부는 특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이 방안을 적용할 수 없다는 방침을 백선엽 측에 전달했다고 한다.
예외로는 2013년 작고한 채명신 장군(전 주월 한국군 총사령관)이 생전에 "내가 장군이 된 것은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니 내가 죽으면 나를 국립묘지의 장군묘역에 묻지 말고 월남에서 전사한 사병들의 묘역에 묻어달라"며 장군으로서의 특혜[48]를 포기함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 사병 묘역에 특별히 자리를 마련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사병 묘역에 안장되려면 공간이 협소하여 화장이 불가피한데, 백선엽 본인이 매장을 원하고 있어 이 전례를 따를 가능성은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방침에 대해 보수 정치권 및 퇴역군인 단체를 중심으로 여전히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을 주장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윤상현 국회의원은 "서울현충원에 자리가 부족해도 없는 자리를 어떻게든 만들어서라도 모시는 게 나라다운 책무이고 예의이고 품격"이라고 지적했고, 원희룡 제주도지사도 "백 장군을 위한 자리는 서울현충원에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립서울현충원 안장 논란에 대한 백선엽 및 가족의 의사는 유동적이다. 표면적으로는 국가가 정하는대로 따른다는 입장만을 내세우고 있다. 특별히 국립서울현충원을 고집하지 않고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묘역 안장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로 해석된다. 다만, 이번 논란이 초래된 바와 같이 정치권에서 파묘 또는 친일행적 적시 등을 명문화하는 법을 통과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경우, 그런 모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국립현충원에 안장되고 싶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비하여 가족과 측근들은 다부동 전투 전적지 주변에 따로 땅을 마련해놓았다고 한다. 관련하여 백선기 칠곡군수는 "4~5년 전 백 장군을 찾아뵈었을 때 ‘다부동 인근에 땅을 사둔 게 있다’며 ‘전우들의 넋은 다부동 산하에 누워있는데 내가 국립묘지로 간들 편히 발을 뻗을 수 있겠나’는 말을 하시더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2020년 7월 10일 별세 후 장지는 일단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정해졌다고 발표가 나왔다.
김광진 의원 논란
국방부는 2012년,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백선엽을 모델로 한 '더 프로미스'라는 뮤지컬에 수 억원을 투자했는데 이것이 국정감사때 문제가 되었고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은 "잘못된 ‘과’를 가지고 있는 이 민족반역자를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잘못을 청산하지 못하고 우리가 그 사람을 칭송해야 된다는 현실이 참 부끄럽다"라는 발언을 하여 군과 새누리당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새누리당 측에서 전쟁 영웅에 대한 모독으로 사과하라고 요구했지만 김광진 의원은 "백 장군은 법률이 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에서 규정한 것으로 논쟁할 필요성이 전혀 없다.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으면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해야 할 것”이라며 사과를 거부했다. ###
그러자 국방부 사이버사령부는 김광진 의원에 대한 여론조작을 실시하여 그 성과를 청와대에 보고하는 걸로 보복하였다.
2013년 6월 문화재청이 백선엽이 6.25 전쟁 당시 입었던 군복을 '대한민국 근현대사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공고를 냈다. 민주당 김광진 국회의원의 반대 운동과 여러 독립운동 단체의 격렬한 항의에 밀려 취소됐다.
사생아 자녀 논란
2016년 자신에게 사생아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60년만에 인정했는데 이후 자신을 호적에 올려 달라는 사생아 자녀의 호소를 거부하고 다시는 나에게 연락하지 말라는 통보를 해 논란을 일으켰다
KBS 다큐멘터리 논란
2011년 06월 24일 KBS에서 6.25 전쟁 당시 그를 주목하는 방송을 해 논란이 되었다. # 6.25 전쟁 61주년 특집다큐였으나 백선엽의 기억과 코멘트를 중심으로 해서 그의 활약상만을 조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지민원의 주장
2013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악의적인 왜곡을 일삼은 지만원이 백선엽이 자신을 존경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걸러들어야 하는데 지씨에게 백장군을 소개시켜줬다는 박경석 장군은 정작 지만원이 5.18을 왜곡하자 인연을 끊었다고 인터뷰를 한바 있다. 지만원 자신의 주장 외에는 어디에도 교차검증을 할만한 증언도 없다. 지씨가 자신을 미화하기 위해 4성 장군이 대령 출신한테 허리굽혀 인사를 했다고 뻥튀기를 할 수도 있는 일이다.
군과 나
6.25 전쟁 개전부터 종전에 이르기까지 전후방 곳곳에서 격전을 치룬 고위 지휘관의 입장에서 6.25 전쟁 경험을 중심으로 서술한 회고록이다. 경향신문에서 1988년 6월 24일부터 1989년 5월 11일까지 약 1년간 매주 1회씩 총 42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지면 1면을 통째로 할애한 비중 있는 연재물이었다. 내용은 6.25 전쟁 시기에 집중되어 있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뒤에는 휴전 이후 한국군 증강과 전후 복구, 개전 이전의 여수·순천 10.19 사건과 숙군 등에 대한 이야기를 실었다. 자유당 정권 말기 이승만 대통령에 얽힌 기억, 민주당 정권 등장 이후 예편과 박정희와의 인연 등에 대해서는 마지막회(42회)에 한꺼번에 몰아 서술되어 있다.
이 연재물을 엮어 대륙연구소에서 1989년에 단행본을 출판했다. 앞에 말한 이유뿐 아니라 문장이 수려해서 가독력이 좋아 6.25 전쟁에 대해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작품이다. 대륙연구소 판본이 절판된 뒤에도 여러 차례 다른 출판사에서 재판되었다. 1999년에는 『길고 긴 여름날 1950년 6월 25일』(지구촌)이란 이름으로 나왔으며, 이후 시대정신에서도 2009년, 2016년에 개정판을 내놓았다. 2000년에는 오세영의 작업으로 만화화되어 3권 짜리 『한국전쟁』(지구촌)으로 나오기도 했다. 영어로도 번역되어 1992년에 《From Pusan to Panmunjom (부산에서 판문점까지)》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이 영역판에는 무려 당시까지 생존해있던(!) 리지웨이 및 밴 플리트 장군[49]이 서문을 쓰기도 했다.[50] 일역판은 『若き将軍の朝鮮戦争 (젊은 장군의 한국전쟁)』(2000년 소시샤(草思社) 출간) 등으로 나온 바 있다.[51]
이전에도 6.25 전쟁 회고록, 수기는 많이 나왔지만, 공산권 자료의 미비, 일제 치하 전력이라든가 작전 실패, 민간인 학살 관련 등 여러 문제에 대한 당사자들의 증언 회피, 어른의 사정 등으로 객관성이 떨어졌다. 반면 이 연재물은 1987년 6.10 민주 항쟁 이후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객관적이고 거시적으로 6.25 전쟁을 바라보기 시작된 시기에 나온 최초의 회고록이라는데서 의의가 있다. 당시까지도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던 현리 전투, 사창리 전투 등의 참패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것이 그 예이다. 본인의 간도특설대 경력에 대해서도 김백일 장군의 사망 사건을 언급하며 '그는 나와 각별한 사이였다. 간도특설대에서 같이 근무했었고, 해방후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으며 나란히 군문에 투신했었다'는 식으로 건조하게 적고 넘어갔다.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이형근, 정일권이 회고록을 냈지만 자신이 비판받을 부분은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에 비해 진일보된 자세라 할 수 있다.
실록 지리산
이태의 『남부군』 출간 이후 동아일보 연재로 토벌대의 입장에서 대국적으로 그린 빨치산 기록이다. 저자 자신이 백야전사 작전에 참가했던 기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이태의 남부군이 자신이 겪은 이야기 → 남한 빨치산 약사 → 자신이 겪은 이야기 후기의 형식인 반면에 이 작품은 백야전사 작전 → 남한 빨치산 약사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단행본은 고려원 출간.
백야전사 부분을 제외하고는 빨치산 종군기자였던 이태의 『남부군』에 대한 토벌대의 입장이기 때문에 『남부군』을 읽지 않으면 갑툭튀한 서술이 좀 이상할 정도이다. 사실 『남부군』은 이후 나온 모든 빨치산 관련 작품(전향한 빨치산 작품)들이 인용하거나 비판하는(비전향 종북주의자 작품) 가장 중요한 텍스트인데, 『실록 지리산』 역시 국군 토벌대의 입장을 반영한 매우 중요한 텍스트로, 전투경찰대 연대장인 차일혁 총경의 아들이 쓴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와 함께 가장 많이 빨치산 문학에서 인용된다.[52] 『실록 지리산』에 워낙 중요한 내용이 많아 이태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대폭 수정하여 개정판 『남부군』을 집필하고, 남부군만 집중적으로 다룬 후속작 『여순병란』에서도 『실록 지리산』을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쓴다.
즉 이태의 『남부군』이 나오자 이를 반박하기 위해 백선엽의 『실록 지리산』이 나왔고, 이태를 이를 보고 자신의 작품을 보강하여 개정판 『남부군』이 나온 것이다.[53]
여담으로 차일혁 총경은 만주에서 팔로군계 항일유격대에 소속되어 일본군, 만주군과 목숨걸고 싸운 독립군이었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갈 기회가 있었지만 "좌파들과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득세"한다는 소리를 듣고 입교를 포기한다. 다시 말해 만주에서 백선엽의 만주군과 싸우던 독립군이 바로 차일혁으로, 백선엽 같은 일본군 출신자들이 군사영어학교에 득실거린다는 소리를 듣고 안간 것이다.
토벌대 사령관 입장으로 썼기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볼 수 있겠지만 의외로 객관적이다. 자료 조사를 위해 지리산 곳곳을 다녔고 구빨치산 출신의 참전자들을 일일히 인터뷰했다. 토벌에 참가했던 국군의 잔학행위 증언도 빠짐없이 실어주었다. 이를테면 생포한 여자 빨치산을 바세린을 발라가면서 집단으로 강간하는 류의 이야기가 버젓이 나온다.
이런 증언을 소개하면서 토벌작전 책임자로서 사과문을 올리기도 했다.
내가 물러서면 면 나를 쏴라
경향신문 연재를 토대로 발간된 『군과 나』 이후 22년 만에 중앙일보에서 6.25 전쟁 경험을 회고하는 연재를 한 번 더 진행하였다. 이는 6.25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2010년 1월 4일부터 2011년 2월 28일까지 〈6·25 전쟁, 1128일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총 277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연재물은 전작과 달리 1월 4일부터 진행된 관계로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과 1.4 후퇴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1988년과 비교하여 남북화해가 모색되고 훨씬 더 자유로와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여 중국 인민지원군의 엄정한 군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과거의 패배를 좀 더 상술하는 등의 내용 변화가 있었다. 이 연재물은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128일의 기억』(중앙북스)라는 제목의 3권 짜리 단행본으로 정리되어 출간되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뿐이다
이전에 내놓은 회고록들이 모두 현역 군인으로 있던 6.25 전쟁과 자유당 정권 시기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면, 이 회고록은 그 이후 1960~70년대의 행적을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4.19 혁명과 예편, 그 이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각국 대사를 지내던 시절, 귀국 후에 교통부 장관과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지내던 시절까지 서술되어 있다. 역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저술에 참여한 유광종[54]이 정리하여 책밭에서 출간되었다.
백선엽의 6.25전쟁 징비록
조선일보는 2013년 11월 온라인 뉴스 사이트 '프리미엄조선'을 출범시키며 내놓은 5대 특별기획의 하나로 백선엽의 〈6·25 징비록〉 연재를 시작했다. 2013년 11월 8일부터 2015년 11월 26일까지 2년 여에 걸쳐 총 184회로 연재되었다. 이 시리즈는 과거 경향신문, 중앙일보에서 연재된 회고들과는 조금 결을 달리 한다. 이는 남북화해 이후 안보의식이 이완되어 전쟁과 같은 국난에 대한 이해와 극복 노하우가 사장되고 있다는 보수진영의 인식을 대변하고 있다. 따라서 내용 면에서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의 약점과 실책들에 대해 더 노골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이와 대비되는 미군 및 유엔군, 중공군의 강점도 강조하고 있다. 전반적인 내용은 이전의 회고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부분들이 많으나, 중간중간에 숨은 비화나 새로 드러난 사실들도 언급하고 있다. 이 역시 유광종이 정리하여 『백선엽의 6.25전쟁 징비록』(책밭)이라는 제목의 3권 짜리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비슷비슷한 자서전을 하도 많이 출판하다 보니 본인도 서문에 "내가 이미 펴낸 회고록은 6권이 넘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다시 펴내기로 했다."라고 사정 설명을 하며 '(책의) 성격이 대우 달라서다'라고 밝히고 있다.
1권은 중공군 개입부터 서술하는데 연대기식 서술이 아니라, 중공군의 강력함이라는 주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에피소드 소개인지라 시점이 과거로 갔다, 미래로 갔다 한다. "6.25 전쟁의 80%는 중공군과의 싸움이었다.", "한국군은 용문산 전투를 제외하면 중공군을 이겨 본 적이 없다."라는 파격적인 전재가 돋보인다.
2권의 전반부는 6.25 당시 미 8군 사령관인 월튼 워커, 매튜 B. 리지웨이, 제임스 밴 플리트와의 일화와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다루고 있는데 징비록 시리즈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이야깃거리가 떨어졌는지 2권의 후반부부터는 6.25 개전부터 다루는데 과거의 회고록을 조금 압축시켜 놓은 것 같다.
3권 전반부도 과거의 개인 회고록 내용과 겹치는데, 문제는 징비록 시리즈의 1권 내용과도 겹치는 중공군 개입 이후 부분이다. 3권 후반부는 백선엽이 직접 격지 않은 장진호 전투, 현리 전투, 용문산 전투를 다루며 별다른 마무리 없이 끝난다. 딱히 백선엽의 관점에서 쓴 게 아니라 그냥 사건을 평면적으로 요약한 수준.
서문에 나온 것처럼 이미 회고록을 6권이나 펴내신 이력이 있어서, 대부분의 내용이 이전에 출판한 내용과 겹친다. 징비록만의 특징은 중공군이 강력함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였고, 미 8군 사령관과의 일화가 좀 더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백선엽 장군의 특징이 적을 만드는 성격이 아니라, 책 서술에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라도 절대로 다른 한국군 장성이나 정치인을 비판하지 않거나 가명 처리한다. 이번 징비록에도 이런 성향을 유지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문제가 있는 개별 사건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에 반해 2권 후반부부터는 그냥 과거 회고록의 자기 복제에 불과하고, 3권 후반부는 누가 대신 써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평면적이다. 또한 6.25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순서대로 다루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에 주제에 맞는 내용을 쓰다 보니 1~3권 전체적으로 보면 같은 내용이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온다.[55] 조선일보와 계약으로 중간까지는 야심 차게 연재하였지만, 후반부터는 할 얘기가 떨어져 그냥 과거 회고록 복제로 나간 게 아닌지 생각 드는 다소 아쉬운 작품.
그외
뉴욕에서 어느 기자가 동양 사람들은 대개 키가 작고 안경을 쓰면서 금니를 했는데, 당신은 왜 그런 모습이 아니냐[56]라고 묻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에 백선엽이 그런 질문엔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자 기자가 머쓱하게 물러났다고.
6.25 전쟁 때 여러 차례 만남을 계기로 알레이 버크 제독과 절친이 되었다. 버크 제독이 사망했을 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해상자위대 대표들에게 버크 제독이 자위대 창설에 크게 기여했음을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예비역이 된 지 오래지만 대한민국 육군에서는 지금도 각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 육군본부 방문시에 군악대와 의장대가 동원된 공식적인 의전도 받는다. 현역 육군참모총장이 예비역 백선엽에게 경례를 하는 모습이 나올 정도다.
상당한 노년까지도 대식가였다고 한다. 2009년 2월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육군협회 관련 행사에 참석한 이의 증언으로는, 계속 꾸벅대다가 만찬이 시작되자마자 접시를 순식간에 비워낸 어르신이 백선엽인 걸 나중에 알고 황당했다고 한다. 사실 군인 출신인걸 감안하면 크게 이상할 건 없다.[57]
2013년 9월 민주당 김광진 국회의원이 국방부 등으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백선엽은 지난 2003년 11월부터 지난해까지 근 10년간 업무용 에쿠스 차량 1대와 운전병, 그리고 4급 상당의 개인 보좌관 등을 국방부로부터 지원받아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그가 세운 공 덕택에 상당한 예우를 받았던 편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공산화를 막은 아주 나쁜 놈
육군사관학교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육사를 방문해 생도들에게 자신의 저서를 나눠주거나 장학금을 기탁하기도 했다.
6.25 전쟁 당시 백선엽이 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육군 1사단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노신영 전 국무총리와 같은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바로 옆마을 출신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연 덕분인지 2019년, 노 전 총리의 사망 직전까지 자주 연락했다.
2013년 9월, 한미동맹 60주년을 맞아 그의 이름을 따 '백선엽 한미 동맹상'이 제정되었다.
친일 행보에 대해 논란이 있는 백선엽이지만[58], 한국전쟁 내의 학살과 부패에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국방일보 노병이 걸어온 길 칼럼에서는 인민공화국 치하 마을을 약탈한 병사를 즉결처형한다고 일부러 빗맞춰서 돌려보낸다던지, 빨치산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긍정하는 내용을 쓴다던지... 그중에서 백선엽도 가장 안타깝다는 어조로 서술한 내용이 있는데, 본인은 다만 전후에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24세의 수도사단 김 대위가 지리산에서 작전중 오양수라는 이름의 20살 여성 빨치산 포로에 한눈에 반하여 주변의 시비를 물리치고 군인가족증명을 만들어줘서 본가로 보냈는데 결국 둘다 방첩대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오양수는 심문에 답하지 않고 다만 김대위의 안부를 묻다가 감시병의 총으로 자살했고 김대위는 남원감방에 있다가 백야전부대의 작전이 끝나고 떠난뒤 후임사단장의 특사로 원대복귀하여 오양수의 유해를 찾으려고 노력하다가 73년 중령으로 예편하였다고....
2017년에는 주한 미 육군의 평택 이전 행사에 초청받았는데, 모두 휠체어를 탄 모습이었다. 하기야 그도 어느덧 100세를 바라보는 백전노장이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애초에 백선엽과 비슷한 시기에 군생활을 했던 이들은 물론이고 한국전쟁시기 백선엽보다 10년 가랑 어린 10대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참전용사들도 대부분 늙어서 사망한 상태이다.
2018년 11월 21일에 98세 생일을 맞이했다. 이날 잔치에는 정경두 국방부 장관,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 로버트 에이브람스 주한미군 사령관 등 한미 양국의 군사 및 외교 주요 당국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2018년에도 활동하고 있는데 비상국민회의에 이름을 올렸다.
육사 학술정보원(원장 오경두 대령)은 육군사관학교 교내 포털사이트에 자서전 '군과 나'를 기초로 한 웹툰을 올렸다. 그림은 현역병 차출###
슬하에 2남 2녀를 뒀으며, 2020년 기준 한국 나이로 101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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