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9 11:17:17+0900 기준 아르메니아 전 지역에 계엄령과 총동원령이 선포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2020년 9월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국경 분쟁을 참고하십시오.
아르메니아는 서아시아 남캅카스에 위치한 내륙국으로, 수도는 예레반(Երևան, Yerevan)이다. 지리적으로는 서아시아에 속하지만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는 유럽에 가깝고 각종 국제기구에서 유럽 소속 회원국으로 활동중이기 때문에 동유럽으로 보기도 한다. 대한민국 외교부에서는 아르메니아를 유럽으로 분류하여 아르메니아와의 관계는 유럽 부서(유럽국)에서 맡고 있다. 옛 소련 구성국 간의 모임인 독립국가연합 회원국이고, 더불어 2014년 10월 9일 유라시아 연합에 가입했다.
국호
아르메니아어로 자국을 지칭하는 표현은 하야스탄(Հայաստան, Hayastan)이다. 고대 아르메니아어로 아르메니아를 뜻하는 하이크(Հայք, Hayk’), 혹은 하이(Հայ, Hay)와 땅을 의미하는 -아스탄(աստան, astan)[2]이 붙어 하야스탄이 된 것인데, 이는 아르메니아 신화에서 아르메니아 민족의 시조라고 전해지는 하이크 나하페트(Հայկ Նահապետ)[3]의 후손이라는 의미로 하이크(Հայկ)의 이름을 딴 것이다. 비슷하게 아르메니아어는 하예렌(Հայերեն, Hayeren)이라고 부른다.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고대 그리스어 혹은 라틴어 표기 Ἀρμενία/Armenia에서 따와 '아르메니아', 혹은 이 이름에서 파생된 이름을 쓴다. 이 이름은 페르시아인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을 "아르미나"라고 한 것을 따라한 것이다. 아카드, 바빌로니아 등 페르시아 이전의 고대 문명에서도 '아르미나'와 비슷한 이름들이 발견되는데, 이는 아마도 하이크의 후손 중 한 명인 아람(Արամ, Aram)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현대 페르시아어로는 '아르마네스턴(ارمنستان, armanestân)'이라 하며, 인접한 터키어와 쿠르드어로는 '에르메니스탄(Ermenistan)', 아제르바이잔어로는 '에르매니스탄(Ermənistan)'이라 한다.
인접한 언어권과 차이를 보이지만 '아르메니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는 아바르어[4] '차무크(ЦIамухъ, C̣amuq̄)', 오세트어 '소미흐(Сомих, Somix)', 조지아어 '솜헤티(სომხეთი, Somkhet'i)'가 있다.
국기
아르메니아 국기는 빨강, 파랑, 주황의 가로 삼색기이다. 아르메니아 헌법에 규정된 바에 따르면 국기의 빨간색은 아르메니아 고원과 아르메니아인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 아르메니아의 기독교에 대한 신념, 아르메니아의 독립 및 자유 등을 상징하고, 파란색은 평화로운 하늘 아래 살고 싶어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열망을, 주황색은 아르메니아인들의 창의적 능력과 근면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국기는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이 독립운동을 벌여 세워진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에서 처음 국기로 채택되었으며, 이후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이 붕괴하고 아르메니아가 소련 땅이 되면서 쓰이지 않게 되다가 1991년 소련 해체로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르메니아 공화국으로 독립함에 따라 다시 국기로 채택되었다.
국가
국가는 우리의 조국 (아르메니아어: Մեր Հայրենիք)이다.
언어
공용어는 아르메니아어이다. 아르메니아어는 러시아, 터키, 이란,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등 해외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쓰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러시아 지배의 영향으로 이곳은 러시아어가 널리 사용되며 소수의 쿠르드어 사용자도 있다.[5] 프랑코포니에 가입된 국가이기도 한데 이는 프랑스 영향력 및 지지를 이끌기 위해서 그런 것일 뿐.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한국도 프랑코포니 참관국 가입하려고 신청할 정도이다.
종교
원래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신앙인 아르메니아 신화를 믿었다. 그러다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와 접촉하면서 그들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받아들였다가, 서기 4세기인 301년에 아르샤쿠니 왕조의 트르다트 3세(Տրդատ Գ)가 계몽자 성 그레고리오(Սուրբ Գրիգոր Լուսավորիչ)로부터 세례를 받으면서 기독교가 국교화되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였다.
현재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종교는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도전승을 지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이다. 1세기에 바르톨로메오와 타대오 두 사도가 아르메니아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그리고 301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언한 세계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313년에서야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것은 392년이니 91년이나 빨랐다. 이렇다 보니 아르메니아 국민 90%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들이다. 이 밖에도 많지 않지만 가톨릭(주로 아르메니아 가톨릭), 정교회[6], 야지디교, 이슬람[7]도 소수 있다.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영향력 때문에 아르메니아의 크리스마스는 1월 6일이며 12월 25일은 그냥 평일이다.
군사
아르메니아군은 1988년 2월 당시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당시 아제르바이잔군에 대항해 아르메니아 민병대가 결집된 것으로 시작해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지 몇달 뒤인 1992년 1월 28일에 정식으로 창설했다. 현재 아르메니아는 해군은 없지만 육군과 공군은 존재하며 5만의 현역 군인과 20만의 예비역들을 보유하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징병제 국가로, 아르메니아 남성들은 2년간 군 복무를 한다. 2011년 기준으로 연 국방비 지출은 GDP의 4.2%를 차지한다.
2004년 12월 28일에 그리스 평화유지군 일환으로 코소보에 3개 분대 가량의 병력을 보냈으며, 2009년 7월에는 아프가니스탄전 마지막 해 끝바지에 병력들을 보내기도 했다.
주위의 강대국(러시아, 터키, 이란 등)이 있어서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안보위협이 꽤나 큰 나라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주범인 오스만 제국의 계승 국가 터키와 역사적으로 사이가 매우 안 좋다. 그러나 터키와 갈등은 과거사라고 할 정도[8]이며 오히려 이웃나라인 아제르바이잔과의 갈등이 현재진행형이다.
이때문에 아르메니아는 국가예산 중 국방비의 비중이 매우 높은데, 2018년에 책정된 국방비만 6억 달러인데 이는 아르메니아 GDP 대비 4.8%이며[9], 2019년의 국방비 증가율은 무려 25%, 2020년에도 14%의 매우 높은 수준으로 증액 예정이다. 이 때문에 국내외에서도 말이 많이 나오는 상황이다.[10] 이는 가상적군 1순위인 아제르바이잔군을 따라잡기 위한 무리수로 보이지만, 사실 아제르바이잔은 오일머니를 사용한 돈지랄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르메니아로서는 따라가기 힘든 실정이다.
2014년엔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국경 중 나고르노카라바흐 국경에서 아제르바이잔군과의 무력 충돌로 인해 아르메니아군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2016년 4월에도 아제르바이잔이 아르차흐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기습받은 아르메니아군은 일부 후퇴하였고, 아르메니아군은 88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물론 아제르바이잔군 또한 95명이 사망하였다.[11] 이후 4일 만에 양국간의 합의로 정전이 이루어졌다. 늘 벌어지는 국경 분쟁 충돌을 넘어, 22년 만에 경상남도 크기만 한 땅의 영유권을 놓고 전면전을 치른 것이다. 그나마 과거에는 아르메니아가 질적으로 우위였으나, 아제르바이잔군이 오일머니와 터키, 이스라엘 등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제 무기로 전력을 강화하기 시작하면서 아르메니아의 새로운 위협으로 다가왔다.[12] 게다가 아르메니아로선 난감해하는 게 이스라엘 관계를 중요시하는 미국이 과거와 달리 아르메니아보다 아제르바이잔을 편들기 시작한 것. 이러다보니 아르메니아로선 더더욱 친러시아적 외교 및 군사관계를 가지고 있다.[13]
2020년 7월 12일에 국경지역에서 아르메니아 군인들과 아제르바이잔 군인들이 교전을 벌였다. # 12일에 시작된 교전은 계속되었다.관련 기사. 양국에 동원령과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아르메니아가 구소련제 9K33 오사로 아제르바이잔의 공격헬기 2대를 격추시키고 아제르바이잔의 T-72 3대를 격파했다.# 그러자 아제르바이잔이 터키제 bayraktar 무인기로 아르메니아의 9K33 오사를 격파했다
현황
캅카스 3국 중에서는 모든 면에서 자원이 열악한 나라가 바로 아르메니아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경제 개발에 힘쓰고 있다. 아르메니아를 강타한 아르메니아 대지진 당시 안 그래도 부족했던 공업은 모두 작살났고, 자원도 부족하지만 수려한 자연환경과 서늘한 기후를 이용해 피서지 홍보와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이웃나라 아제르바이잔이 석유 생산 덕분에 '불의 나라'로 불리는 것과 대비되어 '돌의 나라(Քարաստան, Karastan)'로 칭해지고 있으며, 실제로 석재가 풍부해 많은 석조 성당들이 있다. 하지만, 이 나라를 들어오려면 러시아나 조지아를 거쳐서 오기 때문에 남오세티아 전쟁 당시에는 이 나라도 타격을 많이 받았다. 게다가 아제르바이잔과의 분쟁으로 해외 관광객들도 여행을 기피하는 나라가 되어버려서 아르메니아로서도 아제르바이잔과의 대립은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주는 문제이기도 하다.[14]
이 나라의 인구는 300만 명일 뿐이지만 정작 미국[15]과 이란, 터키[16], 아제르바이잔(아르차흐 공화국)과 러시아[17]을 포함해 해외 70개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은 600만 명이 넘어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해외 거주 인구가 본국 인구를 훨씬 초과한 나라다.[18] 이들이 보내는 달러 송금과 홍보가 아르메니아의 경제를 유지하고 국가를 알리는 데 그럭저럭 도움을 준다. 앙리 베르뇌유(Henri Verneuil)의 '나의 어머니(원제: Mayrig)'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원제: 588 rue paradis)'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들의 삶을 조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참고로 미국 정계에도 아르메니아계들이 자리잡아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 당시 미국이 아르메니아에 102억 달러 지원금을 보태줄 정도였다. 이로 인하여 아제르바이잔에선 반미 움직임이 거세져 친미 및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애뷜패즈 엘치배이 정권이 붕괴되었다. 이후 소련 시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서기장이자 독재자인 일함 알리예프가 권력을 물려받자, 친러 정책을 펼치고 대를 이어 집권하면서 지금도 미국과 거리를 두고 있다. 한편 아르메니아가 친러 정책을 실시하자 미국은 반발하며 지원금을 끊었다. 100억 달러가 넘던 차관을 제공케 한 아르메니아계 정치인들은 왜 미국의 돈으로 친러국가를 돕냐는 비난에 시달렸고 정치적 입지가 약화된데다, 터키에서도 반발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로버트 카플란같은 미국 기자는 아르메니아는 이스라엘, 아제르바이잔은 아랍과 같은 이미지라서 더 이상 미국이 아르메니아를 지원했다가는 아랍권/이슬람권 국가들이 반발한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완벽한 무지의 소치. 아르메니아 대학살 문제만 봐도 이 언론이나 저 언론이나 마치 당연한 사실인양 떠드는 단합된 이슬람권이란 환상이 박살나는 전형적인 국제 문제 중 하나이다.이슬람이 대다수인 시리아, 이라크, 신정국가인 이란은만 해도 예전부터 지금까지나 아르메니아인들의 피해를 인정하며 자국내 아르메니아 난민과 후손들을 돌봐주고 학살이라고 비난해왔다. 에르도안 정권 취임까지만 하더라도 세속국가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이슬람 정체성을 억누르려 했던 터키는 반대편에서 그런거 없다 혹은 과장되어 있다 대립각을 내세우는 '이슬람적' 문제가 있을까. 당장 그 이스라엘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나온 대외 성명이나 정책 행보만 보더라도 자기들 보기엔 완전하게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사건인 홀로코스트에 비견되는 점도 불편해하고, 몇안되는 중동권 내 우방국인 터키 눈치 본다고 아르메니아 학살 부인론에 가까운 스탠스를 취해왔고, 그 미국만 하더라도 무려 2019년 11월에서야 상원을 중심으로 아르메니아 학살을 공식 인정하는데 긴 세월이 걸렸던 반면 정치적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는 억압하더라도 공산국가 소련과 시아파 신정국가 이란을 일찍부터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추모하며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줬다. 애초에 선동가들에게 편리하기 짝이 없는 '이슬람권 vs 서방'이란 단순한 일차원적 대립구도가 한방에 박살나는 국제 이슈가 아르메니아 문제인데 안타깝게도 언론 매체의 얄팍함으로 인해 아르메니아 자체의 역사적 문맥에서 문제를 보지 않고 대충 자극적인 구도로 몰아가려는 어설픈 좆문가들이 많이 꼬이기도 하는 이슈이다.
더불어 미국이 아르메니아 편든 것도 옛날 이야기가 되었는데 아제르바이잔은 세속정책을 취하면서 이스라엘과 우호를 맺고 나아가 자국 석유를 이스라엘에 많이 수출하면서 달라졌다. 이젠 이스라엘군 전체 연료 40%를 아제르바이잔이 책임지면서 이스라엘로선 미국과 더불어 아제르바이잔이 중요한 우방이 되어버렸다! 이스라엘군이 아제르바이잔 군 공군기지를 임대해 훈련도 하고 양 군이 같이 군사훈련도 할 상황이 되면서 이스라엘 정치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들러 양국관계를 우호적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부정하는 상황까지 이르면서, 유태인 입김이 정계와 경제계에서 큰 미국이 친아제르바이잔 정책을 취하고 아제르바이잔도 미국과 친해지고자 노력하면서 미국내 아르메니아계 정치인들 입지도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와 갈수록 군사적, 외교적 우호를 크게 맺으며 미국에 맞서 반목할 상황이 되어버렸다. 위에 상술한 대로 아제르바이잔과 벌어진 국경분쟁에서도 미국은 입다물었다. 에르도안을 대놓고 독재자라고 비난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조차도 유엔상원 결의안 통과를 두고 나토 회원국인 터키와 척을 지는 짓이라고 일단 결의안은 통과하겠지만 더 배상을 요구하라느니 터키에 뭐라고 하지 못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사실, 이러자면 필리핀 침공 당시 미국이 벌인 필리핀인 학살이라든지 미국도 학살에 연루된 게 있어서....미국이 저지른 학살 결의안 이야기도 나오기 때문에. 프랑스만 해도 수십여년전부터 아르메니아학살 결의안 뭐라고 하다가 프랑스가 비슷한 학살을 저지른 알제리 반발을 듣고 있다.
이 열악한 경제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르메니아와 원수지간인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이 일부러 아르메니아를 비껴가는 철도선인 BTK(아제르바이잔 바쿠, 조지아 트빌리시, 터키 카르스 앞글자) 철도선을 부설하면서 아르메니아는 고립된다. 아르메니아의 저지 노력[19]이 터키의 극심한 반발과,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박살난 자국 경제 사정을 개선하고자 했었던 조지아의 반발로 무산되면서 아르메니아는 BTC 파이프 자원 라인에 이어 철도 수송같은 교통에서도 왕따이다.
한편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국경인 아할칼라키(Akhalkalaki) 지방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도 꽤 많은 편이라 이들의 분리 독립이 우려되었지만, 이들은 워낙 가난한 빈민가 지역이라 그런 여유가 없다. 행여나 그런 일 벌어지면 이들은 전적으로 아르메니아에게 기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안 그래도 압하스와 남오세티야를 털린(...) 조지아가 반발해 아르메니아 고립에 동참하면... 아르메니아는 이란을 제외한 나머지 주변국과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난다(...) 그나마 러시아가 있지만 상전마냥 간섭하는 처지.[20] 그래서인지 요 동네 사람들끼리 키배뜰 때 아제르바이잔 사람이 아르메니아 사람더러 '국제 왕따'라고 조롱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아할칼라키 지방을 다녀온 이들에 따르면, 그야말로 황무지의 절정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한다. 자원도 농작물도 절대적으로 모자란 이곳에 사는 20만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최빈민층이고, 전기도 하루에 3~5시간 정도만 나오며 극심한 겨울 추위에선 안 죽을 만큼의 땔감과 밀가루와 몇몇 기초 생필품을 배급하는 수준이었다. 소련 시절부터 그래왔고, 조지아 독립 이후에는 그 배급마저도 끊겨 러시아에 돈벌러 가는 이들이 보내주는 돈들로 겨우 먹고 사는 정도였다. BTK 철도선이 아할칼라키 지역을 지날 당시 여기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은 본국 아르메니아를 지나친다고 반발했지만, 조지아 정부는 불만을 다독이고자 아제르바이잔에서 공사비로 선불 지급한 돈으로 이곳에 도로를 놓고 전기도 24시간 내내 쓸 수 있게 했으며 도로 및 철도 공사로 대다수가 실업자인 이 곳에서 일자리가 창출되면서 반발은 사라지고 만다.
아르메니아로선 이들을 도울 경제력도 없기에 그냥 놔둬야 한다.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석유와 가스 자원과 같이 카스피 해를 넘어 카자흐스탄으로부터도 석유와 가스 자원을 조지아-터키로 건너 유럽으로 수출한 데 이어 화물 운송 및 교통까지도 얻는 셈이다.
그리고 조지아는 철도선(약 9,600만 달러 전망)과 자원 파이프라인 통과비(약 1억 달러 전망)로만 매해 2억 달러가 넘는 돈을 계속 얻을 전망이다. 러시아와 전쟁으로 개박살나면서 미국이 3억 달러 남짓한 군사지원을 해준다고 말로만 하곤 안 지키던 걸 생각하면 이 돈은 조지아에겐 엄청난 수익이다.
조지아로선 아르메니아가 터키, 아제르바이잔과 원수 사이라 이득으로 돌아오는 셈이다(내셔널 지오그래픽 2010년 8월호 참조). 아직은 미정이지만 카자흐스탄 이웃인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같이 석유와 가스자원이 넘치는 나라들까지 이 나부코 파이프 라인과 연결되면 터키의 입지는 더 단단해지고, 아르메니아는 여전히 손가락만 빨아야 한다. 일부 아르메니아 극우들이 테러라도 가하여 이걸 막아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까지 했을 만큼 아르메니아에선 반발이 엄청나다. 하긴 아르메니아가 철도선을 유치했더라면 터키에게 영향력도 과시했을 테고 자국에게 엄청난 경제적, 외교적 이득을 가져왔던 것을 놓치니 화가 날 법하다.
하지만 조지아/경제 문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조지아의 무역 수출입 관련 1, 2, 3위가 바로 러시아, 터키, 아제르바이잔이다. 조지아로서는 러시아와 전쟁 및 영토 문제로 이가 갈리지만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에게는 그런 앙금이 없을 뿐더러 경제적으로도, 나아가 미래의 국가적 이득을 위해서라도 두 나라와는 원수질 일이 없게 해야하는 현실이기에 아르메니아와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적당하게 잘 지내는 이웃 나라로 지낼 수 밖에. 조지아도 아르메니아와 어느 만큼 무역 수출입이 중요하지만 이 세 나라 무역수출량을 더하면 조지아 전체 무역량 절반에 가깝다. 아르메니아도 조지아의 이런 현실을 알기에 조지아에게 화낼 수도 없고, 화내봐야 아르메니아 손해만 크다.
그리고 90년대부터 터키가 동부지역의 물 부족 현상을 풀고자 짓는 거대한 댐[21] 문제로 터키와 또다른 갈등이 있다. 이 댐이 완공되면 과거 아르메니아 왕국 시절 수도이던 아니를 비롯한 무수한 아르메니아의 유적들이 물에 잠기게 되기 때문. 이 문제를 두고 생존의 터전을 빼앗겨 반발하는 쿠르드족도 뜻이 통하여 양측이 이 문제에서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
2009년 10월 10일, 터키와 아르메니아가 일단은 국교 정상화 문서에 조인하였다. 뒤이어 악다마르 성당을 터키 측이 재건하고 2010년 95년 만에 예배 허용, 2013년부터는 매해 예배 및 아르메니아 청소년들에 대한 세례식을 허용하면서 터키와는 조금은 사이가 나아진 편이다. 물론 터키는 이를 허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의 반발과 자국 극우파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2011년 6월 24일, 아제르바이잔과의 분쟁 지역인 아르차흐 공화국 분쟁의 평화적 해결 원칙이 러시아와 프랑스의 중재에도 합의에 실패, 전쟁 위험이 한층 고조되고 있다.
2004년 2월 19일에 헝가리 부다페스트 군사학교에서 언어 연수[22]를 같이 받던 아르메니아군 장교인 구르겐 마르가랸 소령 (1978~2004, 사망 당시 중위로 26세)을 아제르바이잔군 대위였던 라밀 사파로프(Ramil Səfərov,1977~ )가 도끼로 살해한[23] 사건이 벌어졌는데. 사파로프 대위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가 헝가리 당국이 아제르바이잔 정부로부터 처벌한다는 약속을 받았다면서 2012년 8월 31일 수형자 이송 협약에 따라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송했고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사파로프 대위가 도착하자마자 즉시 석방시키고 소령으로 진급까지 시켜버리는 막장짓을 했다.
아르메니아 시위대가 들고 있는 저 사진에서 당연히 왼쪽이 가해자 사파로프. 오른쪽은 피해자 마르가랸. 사후 소령으로 진급되고 훈장을 받았다.
분노한 아르메니아의 세르지 사르키샨 대통령은 즉각 헝가리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으며,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양국 사이에 또 전운이 감돌고 있다. 이번 건은 하도 병크라 아제르바이잔과 헝가리를 편들어주는 나라는 없다고 봐도 좋을 듯. 하지만 아르메니아가 약소국이며 겨우 1명이 죽은 사건이라 그런지(...) 국제적으로 별다른 관심이 없다. 헝가리는 아르메니아가 국교단절을 해도 관심이 없는데다, 아제르바이잔은 헝가리 편을 들며 여전히 배째라 하고 있고 터키나 주변 나라들은 모른척하거나 별 반응이 없다. 미국은 일단 비난은 했다. 백악관안전보장회의 대변인 토미 비에터(Tommy Vietor)는 오바마 대통령은 알리예프 대통령이 라밀 사파로프가 본국으로 귀환하자마자 그를 사면해 준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했다며, 사파로프에 대한 사면 결정은 역내 긴장 완화와 화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현재의 노력에 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미국 측의 실망을 아제르바이잔 측에 전달하였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토미 비에터는 “미국 측은 헝가리 정부가 사파로프를 아제르바이잔으로 송환한 조치에 대한 해명을 요청한 상태” 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산하 민스크그룹의 공동 대표인 러시아와 프랑스는 이 사안을 두고 비난하지 않았으며 곧 미국에서도 유로마이단이나 다에쉬같은 문제로 묻혀져버렸다. 물론 유엔사무총장인 반기문도 이걸 비난하고 나토에서도 비난 성명을 냈지만 당시 국제 정세에서 더 큰 일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여기서도 더 길게 언급되지 못했다.
2013년 9월, 피해자 마르가랸의 아버지는 아들을 죽인 범인이 저렇게 잘만 살아있고 영웅화되었다는 것에 항의하여 칼로 배를 찔러 자살을 시도하다가 응급치료를 받아 목숨은 구했다. 그리고 2017년에는 새패로프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외교
우리나라: 아르메니아
형제: 아르차흐 공화국
부모: 우라르투
조상: 프리기아
숙적: 터키, 아제르바이잔
라이벌: 조지아
절친: 러시아
과거 적국: 사산조 페르시아
외교적으로 심각하게 고립되어 있다. 앞은 죄다 적대국이고 조지아, 이란과도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외에 우호적인 나라가 있냐면 그것도 아니다.[24]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친러지만 국민들은 아니다. [25][26]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에서 아르메니아 학살을 두고 옹호하지만 아르메니아를 확실히 지지할 수 없는 큰 이유가 아르메니아가 강력한 친러 국가라는 점도 있다. 근데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미국과 서구를 적대시하지는 않는다. 사실 아르메니아보다 훨씬 덩치가 큰 중동의 지역 강국인 터키에 대항하기 위한 점이 크다. 거기다 옆의 아제르바이잔은 그동안 터키 믿고 해온 짓거리 때문에 인간 말종 취급이다. 공식적인 외교관계도 없다. 그나마 2000년대 와서 터키와는 조금씩 외교 관계를 개선해서 현재 유혈 사태로 이어지는 분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과는 그런 거 전혀 없고 때때로 군대를 보내서 아제르바이잔과 교전을 벌이기도 한다. 전투 교환비는 아르메니아가 약간 높지만 아제르바이잔의 인구는 아르메니아의 3배나 돼서 큰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조지아나 아제르바이잔이 러시아와 약간씩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과 달리 독립한 뒤에도 아르메니아는 어쩔 수 없이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러시아군이 지금도 주둔하고 있고,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회원국이자 NATO 가입국인 터키와 대조적으로 아르메니아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 연합에 2015년 1월 2일 가입했다. 또한 에너지 관련 기업의 80%가 사실상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일례로 이란으로 통하는 가스 파이프라인을 2008년에 완공했지만, 국영 가스 회사의 지분 68%를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는 탓에 이란산 가스 수입량을 늘리지 못하고 있다.
다만 동유럽에서 벨라루스와 함께 보기 드물게 친러 정책을 고수하는 나라이긴 해도 아르메니아 국민들이 러시아에 가지는 감정은 상당히 부정적인 편이다. 이는 아르메니아가 워낙 오랜 기간 독자적인 역사, 문화를 고수해온 탓에 재정 러시아-소련 시기를 식민 지배로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1년에 실시된 소련 존속에 관한 전연방 국민투표에 사실상 기권했던 6개국 중 하나였고, 같은해 초에 열린 아르메니아 독립 투표에서 90% 이상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독립했었던 역사가 있다. 이 당시 존속여부 투표에 불참했던 나머지 5개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조지아, 몰도바) 모두 강력한 반러 성향을 띈 나라들이란 점을 생각하면, 아르메니아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강력한 친러 정책을 취한 것일 뿐, 국민들 정서상으로는 러시아에 대한 여론이 매우 부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2012, 13년 반러시아 시위도 있었고 2015년 1월 아르메니아의 러시아군 기지에서 근무하는 러시아 병사가 무장 탈영해 아르메니아인 일가족을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2015년 6월에는 아르메니아 정부가 전기료를 16% 인상하는 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아르메니아 국영 전력 기업과 발전소가 러시아인에 의해 운영되는 것에서 촉발된 반러 감정에서 촉발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인식과 달리 여전히 러시아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러시아가 손을 떼면 고립된 아르메니아를 노리고 공격하는 튀르크족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영토, 물량에서 싸움이 안되기 때문에 싫어도 붙잡고 있어야 한다. 아르메니아 대서방외교의 가장 큰 훼방꾼인 터키 때문에 정치/외교적으로 고립될 가능성도 매우 크다. 계속 말하지만 아르메니아에게 완전히 우호적인 나라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립 직후인 1990년대에는 강력한 친서방 정책을 취했었다. 미국에 사는 수많은 아르메니아계의 힘을 빌어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외교적으로 EU와 NATO에 가입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며 러시아 색을 최대한 빼려고 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적국인 터키가 이미 NATO 회원국으로 친미, 친서방 노선을 훨씬 오래전부터 걸어왔던 나라이기에, 미국 및 EU에서는 아르메니아보다 훨씬 강한 지역 강국인 터키의 눈치를 봐가며 아르메니아에 대한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고, 오히려 러시아 및 이란으로부터 강력한 견제를 당하여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될 위기에 처하자, 2000년대에 와서 급격히 노선을 바꿔 친러로 방향을 틀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아르메니아 시민들의 여론은 매우 싸늘한 편이었으나, 지리적, 경제적인 입지의 특성상 러시아에 대한 의존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기에 국민 여론에 반하는 친러 정책을 어쩔 수 없이 취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웃 나라 중에서 이란과는 사이가 꽤 좋다. 이란에 아르메니아인들이 꽤 많이 살기도 하고 근현대 와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이란에서 꽤 우호적으로 대우받았고, 호메이니도 아르메니아인에게 종교를 인정하며 자치구역까지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이 주도하던 이란 경제봉쇄에 난감해했지만 러시아가 이란과 경제 교류를 유지한 덕분에 같이 이란과 마찬가지로 경제교류를 한다. 그러다가 오바마 정부에서 이란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를 해제했을 때 아르메니아도 무척 기뻐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조지아는 서술한 대로 같은 이웃 작은 나라에서 같은 기독교 국가이고 역사적으로 두 나라 모두 바그라티온 왕조의 통치 아래 한 나라로 지낸 적도 있어서 등 친하게 지내지만, 조지아가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에 경제적 눈치를 많이 본 탓에 좀 서먹한 편. 그리고 조지아는 러시아와 교류를 하기는 하지만 전쟁을 겪은 이후 반러감정이 강한 편이라 러시아와 되도록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아르메니아와 약간 의견차랑 아르메니아 조지아 둘 다 카프카스에서 대표적인 기독교의 수호자란 자부심이 있으며, 믿는 교파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랑 조지아 정교회라 미묘한 경쟁감도 있다. 다만 아르메니아로서는 조지아와 적대관계가 되면 해안선이 없는 내륙국인 아르메니아의 특성상 흑해를 맞댄 조지아를 적국으로 만들면 바다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아르메니아는 조지아와는 사이 좋게 지내려고 하는 편이다. 물론 아르메니아의 주변국가들중 조지아 이외에도 흑해, 지중해, 카스피해, 페르시아 만 등 바다, 염호 등과 맞닿아 있는 국가들이 세 군데 더 있기는 한데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은 앞서 언급한데로 오스만 제국 시기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문제와 아르차흐 공화국을 둘러싼 영토 분쟁으로 견원지간이고, 이란은 페르시아만과 맞닿아 있으나 최근 미국 트럼프 행정부에게 다시 경제적 제재를 받고 있는데다 반다르아바스 등 페르시아만의 항구 도시까지 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고 이란 영토가 너무 방대해서, 지리적으로 거리가 가깝고 주변국들 중 아르메니아와 사이가 덜 나쁜 조지아의 흑해 항구들을 사용하며 대외 무역을 하고 있다.
아르메니아가 터키, 아제르바이잔과의 갈등 속에서 대체 외교 노선을 선택하게 되는 나라는 그리스와 키프로스, 몰타 등이 있다. 그리스와 키프로스는 오랜 기간동안 아르메니아와의 유대 관계가 매우 깊은 나라로 자리매김되어 있고, 심지어는 이스라엘과의 돈독한 관계가 매우 깊게 표방하고 있다. 몰타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정작 이스라엘과 아르메니아는 사이가 안 좋다. 위에 서술한 것을 참고하자. 반대로 아르메니아는 자국군 연료를 이스라엘과 갈등이 큰 이란이 책임져주는 만큼, 서로 사이가 좋아질 수 없다. 게다가 터키랑도 일단 외교관계가 있는 이스라엘이 이러다보니, 홀로코스트를 당한 피해자가 많은 이스라엘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하여 침묵한다.
발트 3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의 외교 관계는 어느 정도 있지만 상주공관은 리투아니아가 유일하며, 나머지 2개국은 트빌리시 주재 대사가 아르메니아를 겸임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도 언급됐지만 유라시아 연합에 가입한 친러 국가이지만 유럽연합에 대한 국민 감정도 나쁘지 않기때문에 아르메니아의 유럽연합 가입에 대한 지지도 꽤 높은 편이다. 2006년과 2007년의 여론조사에서 유럽연합 가입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60~70%에 육박했고 유라시아 연합 가입 후에도 유라시아 연합에 대한 호감은 36%, 유럽 연합에 대한 호감은 27%라는 결과가 나왔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기본적으로 자국을 유럽으로 인식하는데 아르메니아 역시 '유럽의 일원'으로서 유럽연합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 유럽연합 가입 찬성 측의 주장.
아르메니아는 유라시아 연합 가입 후에도 유럽연합의 동부 파트너쉽 대상 국가 자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유라시아 연합, 유럽 연합 동시 가입하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건 러시아가 놔둘 리 없기에 러시아에게 군사적,경제적으로 많은 걸 의존해야 하는 아르메니아로선 유럽연합 가입은 힘들 전망이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아르메니아는 이듬해인 1992년 2월 21일 대한민국과 수교에 합의했으며, 북한과는 이보다 며칠 앞선 2월 13일에 외교관계를 맺었다. 다른 캅카스 지역 국가들과는 달리 아직 대한민국과 상호 간에 상주 공관을 두고 있지 않다.(현재 대한민국은 주러대사관이, 아르메니아는 주일대사관이 겸임 중.) 다만 민간 차원에서 한국을 보는 시선은 나쁘지 않다. 2018년 3월 19일부터 대한민국 일반 여권 소지자의 무비자 입국(180일)을 허용했다.#[27]
최근에는 아르메니아가 아랍연맹의 참관국에 들어가면서 아랍계 국가들과도 외교를 긴밀하게 맺으려고 한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 당시 아르메니아군이 호잘르를 비롯한 아제르바이잔 곳곳에서 민간인을 학살했기에 아르메니아도 비난을 받고 있다. 물론 학살은 아제르바이잔이 먼저 벌였고 피해자 수로는 더 많긴 하지만 분풀이성으로 학살도 벌인 건 맞는 사실. 아제르바이잔과 전쟁 당시 학살 여부에 대해서는 미국도 유럽도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지 않고[28] 둘 다 학살자이자 가해자로서 중립을 지킨다.
터키의 유럽 연합가입을 지지한 영국에선 아제르바이잔 학살도 검토해야 한다고 아르메니아와 아르메니아를 지지한 프랑스와 그리스를 윽박지르기도 했다. 아제르바이잔 바쿠를 가보면 당시 죽은 아제르바이잔인 사진과 24시간 내내 꺼지지 않은 가스불을 켜놓은 거대 추모비가 있다. 아르메니아가 예레반에 설치한 추모비처럼.) 하지만 영국이 아제르바이잔을 편들어주는 건 아닌데 아르메니아 학살 이후 벌어진 쿠르드인 독가스 학살 주범인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영국이 저지른 학살에 얽매이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아르메니아 학살을 이야기하는 것도 있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곡창지대와 여러 지역에서 나오는 농작물로 굶주리진 않지만,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자본 투자가 완전히 막혀있기에 아르메니아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태. 앞서 언급했듯 아르메니아 본국은 경제적으로 그다지 풍족한 나라가 아니며, 나고르노 카라바흐로 가려면 육상으로만 가야하기에(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은 여길 인정하지 않기에 비행기로 절대로 못 간다.아제르바이잔은 비행기로 간다면 격추시킨다고 이를 갈고 있다.)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결국 해외 아르메니아인들이 대주는 투자금으로 겨우 버티는 실정이다. 오히려 아르메니아 문제 덕분에 이웃한 조지아가 유라시아 철도 및 운송과 자원 파이프 라인을 주워 먹어 덕을 봤다. 나아가 아르메니아로선 경제적으로 국제 투자가 부진한데 터키와 유라시아 튀르크권 나라들이란 막대한 시장을 외면할 수도 없기 때문에 다국적 기업들이 아르메니아에 투자하지 않고 있다.[29]
게다가 독립국이 되자 아르메니아는 옆나라인 터키에게 1차 대전 중의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요구했고 터키가 일부를 시인하긴 했으나 위에서도 언급한 논리들로 물타기하며 사실상 책임을 부정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결국 이런 민족감정이 대번에 양국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미국은 NATO 가맹국인 터키를 윽박지를 수도 없고 러시아 남쪽 요충에 자리잡은 아르메니아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러시아는 침묵하거나 그냥 아르메니아 편을 들었다. 현재 터키 측에서도 사과의 조짐이 보이고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소련 붕괴 이전부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및 나히체반 자치공화국 문제로 분위기가 매우 험악했다. 단지 소련 정부가 힘으로 억누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탈퇴를 선언하면서 소련-러시아는 아르메니아를 적극 지원해 아제르바이잔을 탈탈 털어버렸다. 그나마 나히체반 자치공화국의 경우, 전쟁을 나히체반 자치공화국으로 확대될 경우 터키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군사개입해 아르메니아를 박살낼 것이라고 협박 (실제 군대를 터키-아제르바이잔, 터키-아르메니아 국경으로 이동시켰다)해서 큰 문제 없었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은 아르메니아가 점령하고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이 전쟁은 아제르바이잔에 친러시아 성향의 헤이대르 앨리예프(Heydər Əliyev)가 집권하자 러시아의 중재로 일단 중지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도 아르메니아만 편들 수가 없었는데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보다 훨씬 경제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가일 뿐만 아니라 스탈린이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를 제거한답시고 아라라트산을 터키에 줘버렸기 때문이다. 터키는 친미 국가로 아랍과 유라시아를 둔 중요한 요충지로서 미국이 그동안 터키에서 벌어진 온갖 인권탄압과 쿠데타를 모른 척 했던 것도 터키의 친미정책 및 이스라엘 및 아랍과 유라시아 감시 및 세력권 유지라는 중요한 요충지로서 가치가 컸기 때문이었다. 즉 미국과 이스라엘이 터키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점[30], 게다가 아제르바이잔과 혈맹 관계이자 유라시아 앞마당에 온갖 자원이 가득하고 튀르크족 국가들이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주는 터키를 러시아가 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오세티아 전쟁때 조지아로 쳐들어간 러시아가 조지아 내에 있던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을 잇는 철도 및 도로 및 송유관은 일절 건드리지 않았던 것도 두 나라를 염두한 일이다. 또한 러시아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을 일절 인정하지 않으며 필요이상의 군장비 지원은 자제하고 조지아가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을 통하여 얻는 이득에 대하여 말을 아끼고 있다.
아르메니아 극우들에겐 마치 한국의 환빠처럼 터키 동북부 지역의 상당수 영토가 옛 아르메니아 땅이기에 되찾을 땅으로 여긴다. 옛 아르메니아 왕국 수도인 아니를 비롯하여 성지인 아라라트 산과 많은 땅을 터키 안에 가지고 있기에 영토를 찾지 못하면 그 안에 남은 조상들의 문화재나 유물들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경제적으로 가난한 아르메니아로선 무리인 상황. 다만 현실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라는 점에서야 마찬가지지만 고구려, 발해 왕조 멸망 이후 만주, 요동 지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지 1,000년이 넘은 한국과는 달리 당장 터키는 아나톨리아 내륙과 동부 조금으로만 들어가도 당장 백년 전까지만 해도 잘만 돌아가다가 대학살 이후 텅텅 비어 방치와 훼손, 풍화 속에 썩어 무너져 가는 옛 아르메니아 교회, 수도원, 주택 같은 유물들이 카이세리 부터 카르스, 디야바키르, 반 지방 까지 쫙 널려 있기에 사회 전반에 걸쳐 감정이 훨씬 심한 편이다. 사실 문화, 사회사적 측면에서 아르메니아 민족, 문화 공동체의 역사의 중심지는 현 아르메니아 본토 지역이 아닌 아니가 위치한 옛 바스부라간[31] 일대, 즉 현대 터키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 일대였으며, 관련 역사적 유물과 문화적 활동의 중심지도 대학살로 쓸려나간 아나톨리아 동북부와 내륙지방이었다. 그 동네의 정치적 지배 세력은 로마/동로마와 페르시아, 이슬람 제국, 몽골, 셀주크/오스만 튀르크, 러시아 사이에 왔다갔다 했다 한들 해당 지방에서 아르메니아인이 계속 살아 왔으며 문화적,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해 왔던 지역들이 100년 만에 아르메니아인들의 존재 자체가 멸균실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청소당해 버리고, 그나마 남아 있는, 문화예술사적 관점에서 연구 보존되어야 할 유물들은 죄다 터키군 사격 연습 타겟으로 쓰인다든지, 인근 농부들의 헛간 재료로 무너지고 있다든지 하는 꼴을 수십 년간 눈 뜨고 지켜봐야 했으니 아르메니아인들 입장에서 복창이 뒤집히는 건 당연지사.
2007년에는 터키가 화해의 제스쳐로 악다마르 섬 아르메니아 교회를 일부 고쳐준 일이 있는데, 이게 되려 아르메니아에서 문제가 되었다. 당시 아르메니아 극우들은 악다마르가 아닌 악타마르 섬이라는 아르메니아어로 섬 이름을 바꾸고 이 섬 교회나 터키 전역에 있는 아르메니아 교회 유적지들 소유관리권을 양도하라는 요구를 더하게 된다. 그러자 터키 극우들도 울컥하면서 화해 분위기를 작살나버렸다고 한다. 이때, 터키 카르스시에선 거대한 손조각을 조각하면서 평화의 손이란 이름으로 아르메니아와 평화를 기념하는 걸 만들었더니만 극우들이 와서 반발하는 통(카르스 학살 당시 피해자 유족 후손들까지 와서 이 조각가를 죽인다고 분노했다)에 미처 완성을 못하고 조각가가 한동안 피해있어서 몇 달이나 방치되기도 했었다. 나중에 완성은 했지만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며 쓸쓸히 방치되어 있다.
더불어 몇몇 터키 극우들이나 쿠르드족이나 극단적인 이슬람인들이 보란듯이 아르메니아 교회(터키 전역에 이런 버려진 채 관리되지 않는 교회들이 꽤 많다)에 총질을 하거나 훼손하는 일이 벌어졌고 쿠르드인 저항세력이 이런 곳에 숨어드는 통에 터키군 전차가 아예 교회를 포격하던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동부 지방에 가득남은 기독교 유적 훼손을 터키 정부가 막은 게 90년대부터였다. 교회 유적이 쏠쏠한 관광자원이라 그런 면도 있지만... 터키 전역에 워낙에 많은 기독교 유적 덕에 알려지지 않은 시골 교회 유적들은 이슬람 차미(Çami, 모스크 또는 마스지드라고 불리우는 이슬람 성원)가 된 곳이 많다.(예수나 인물 그림만 지우고 십자가가 새겨진 벽을 놔두고 그 모습 그대로 이슬람 성원으로 쓴다.) 덕분에 이런 곳 관리양도 요구에 터키 극우들이 화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나라가 없는 쿠르드인들과도 사이가 나빴다. 오스만 제국 말기 아르메니아인들이 정치적으로 준동할 무렵 오스만 제국 정부는 인근 쿠르드 부족들을 준동 시켜 아르메니아계 마을들을 학살, 약탈하여 겁 주는 일이 많았고, 역으로 쿠르드 부족들이 정부 말 안 듣고 러시아 측과 내통하든가 할 경우 인근 아르메니아인들을 보내 찍어 누르는 일도 많았다. 이러다가 결국 1915년 봉기와 대학살 당시 주된 현지 진압/테러 겸 시리아 사막행 죽음의 행진 도중 간수로 쿠르드 부족들이 집중 참가한 것으로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쿠르드 측도 당장 본인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을 사막에서 죽음으로 내모는 도중 영 미심쩍다고 분류 된 다른 부족들도 같이 강제 이주 당했고,[32] 무엇보다 그 이후 터키 공화국이 수립 된 후 데르심 학살을 대표적으로 본격적으로 터키 측에게 탄압 당하기 시작했다.
이런 막장 사이클을 돌고 돌며 결국 20세기 중후반쯤 되면 남부 카프카스/동부 아나톨리아의 터줏대감 격 양대 민족이었던 아르메니아인들과 쿠르드인들은 전자는 아예 그 존재가 사라져버렸고, 후자는 고향 땅에서 2등 시민 취급 받으며 살아야 하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이러다 보니 현대 들어와 이라크, 시리아, 터키 현지의 쿠르드계 정치 단체들은 게릴라 반군인 PKK던, 기존 의회 정치 내에서 쿠르드인들의 권리와 터키 전반의 정치적 자유화를 주장하는 인민민주당 측이든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실체와 그 과정에 있었던 쿠르드인들의 참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반성한다는 입장이다. 아르메니아 측에서도 아르메니아 공화국 당국이든, 아르메니아 혁명동맹을 비롯한 해외에 거점을 둔 디아스포라계 정치 집단이든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고 터키 당국을 공적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나마 이슬람 나라이면서 이란과는 터키를 두고 사이가 안 좋은 점은 비슷해서 협력하는 게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매우 싫어하는데 터키가 그 이스라엘에 많은 도움을 주기에 당연히 터키도 매우 질색한다.게다가 터키와도 국경 분쟁 문제와 같이 과거부터 역사적으로 앙금이 컸기 때문에 이를 갈아왔다. (하지만 웃기게도 터키 맥주가 이란에 많이 수출된다(...) 그렇지만 최근 터키랑 이스라엘이랑 사이가 나빠지면서 이란과 터키의 관계개선도 이루어지고 있어 참 아이러니한 상황...
하지만 이란과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둘이 원수질 일이 없고(물론 전쟁이나 갈등이야 있었지만 이웃나라끼리 흔하디 흔한 일이었고 되려 아르메니아에선 이란에 대해 역사적으로 매우 좋게 봐줄 일이 꽤 있었다.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샤인 아바스 1세(1571~1629)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우대하여 수도인 이스파한에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허락했다. 그것도 종전에 이슬람 성원을 특별히 사도 교회로 만들게 해줘서 지금도 이스파한에 가면 거대한 이슬람형 돔 위에 십자가가 걸려있는 특이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반크 교회도 이때 내 준 것이다. 특히 사파비 왕조 시절 왕조 설립의 주축인 튀르크계 시아파 전사 집단인 키질바시의 정치적 영향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이들을 영향력을 축소 시키고자 사파비 왕조의 샤들은 이웃 오스만 제국의 데브셰르메 정책을 벤치마킹하여 전통적인 속주였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카프카스 기독교인 출신 개종자들을 집중적으로 천거하는 정책을 폈고, 이 덕분에 페르시아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입지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반크 성당(1603년부터 2년 동안 지어진 성당) 참고로 이 교회 안에는 1915년 아르메니아 학살을 추모하는 추모비도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권에서 서로 전쟁을 벌이면서 서로가 전쟁을 이겨 차지한 땅에 있던 성당이나 모스크를 자기들 종교 건물로 만드는 경우는 수두룩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물론 이스탄불을 차지한 메흐메트 2세도 정교회 건물을 허락했지만 아야 소피아를 비롯한 거대한 정교회 성당을 죄다 모스크로 바꾸고 허락받은 정교회 성당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덕분에 지금도 이스탄불에 남은 정교회 성당들을 보면 그리스나 다른 정교회 나라의 성당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규모가 초라하다. 더불어 그리스 본토에 많은 섬에 남은 정교회 성당들도 엄청 작은데 크게 짓지 못하게 해서 궁여지책으로 일반 가정집 수준 성당을 많이 만들었다.) 즉, 큼직한 모스크를 줘서 마음껏 너희들 종교 건물로 고치게 만들어 내준 게 대단한 셈이다. 뭐 그만큼 아르메니아인들이 가진 경제적 수완이 줄 이득을 위한 점이 컸겠지만 말이다.
아바스 1세는 시아파 골수 신도로서 순니파를 비롯한 다른 이슬람 종파나 천주교를 비롯한 기독교를 가혹하게 탄압했던 반면, 딱 하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에게만은 매우 관대하게 대해주었다. 종전 오스만 제국이나 다른 이슬람 나라들에서 자주 벌이던 기독교 및 비이슬람교 신도들에게 세금을 더 받던 것도 없애고 당당한 페르시아인으로 인정하며 세금도 더 받지 않았고 이들을 경제직이긴 해도 주요 무역 담당 같은 일을 맡기며 등용했다. 그래서인지 이주해온 아르메니아인들이 얼마나 고마웠으면 그의 생일에는 금을 가득 선물했던 적도 있다.
물론 그도 아르메니아인들의 상업성을 높이 사서 그들을 페르시아의 이득에 써먹으려 하고자 받아준 점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 덕에 아르메니아인들은 꽤 관대하게 살아갔으며 아예 수도인 이스파한에 떡하니 졸파라는 아르메니아인 특별 자치 거주지역까지 하사받아 여기서 모여 살아갔었고 지금도 아르메니아인 10만 이상이 여기서 살고 있다.여담인데 크리스티아노포비아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이란이 성지 이스파한에 이렇게 아르메니아 기독교인 자치구역이나 성당을 인정하는 것도 엄청 관대한 거다. 다른 종파는 예외없이 박살내버렸다.
이러다 보니 역사적으로 보면 당연히 터키와 차원이 다른 긍정적인 역사적 친밀감까지 있고 조지아보다 훨씬 경제적 규모도 더 크고 자원으로 도움이 되며(러시아도 막대한 자원이 있지만 여긴 애증의 관계이며 러시아가 아르메니아에게 하도 이래라 저래라 하기에 반발도 있다) 최근 현대사에서도 이란에 사는 아르메니아계들이 본국과 이란의 관계 우호에 기여하고자 사회 기부 및 이란 정계에 로비도 하기 때문이다.덕분에 호메이니 시절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이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다. 당시 이란 곳곳에서 천주교나 여러 기독교 성직자들이 살해[33]당하고 집단 폭행에 성당들이 불태워진 반면,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성당들에 대한 약탈이나 테러는 호메이니 정부가 강력하게 금지했는데 되려 팔라비 왕조 시절에는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상업적 견제(팔레비 왕조는 유대인들을 우대했다)가 워낙 심했기에 이들이 호메이니를 은근히 지지해 비밀리에 상당한 돈을 지원했던 점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에 군비도 제공하면서 아르메니아계의 입지는 제법 크게 인정받게 된다.
그야말로 수백여 년 세월에 걸쳐 압바스 1세와 호메이니라는 골수 신앙인들이 지도자로서 자국에서 시아파만 고집했던 반면, 딱 하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관대했다는 공통점을 봐도 아르메니아에선 그나마 이웃나라에선 이란이 좋게 남을 수 있었던 것(물론 서로가 이득 때문에 그런 게 있었지만 그야말로 상부상조했다).
2009년 터키에서 다시 화해를 시도하고 2010 월드컵 예선전에서 터키와 아르메니아가 맞붙게 되자 터키 총리가 아르메니아를 방문하기도 하며 학살도 일부 인정했다. 하지만 터키에서도 학살을 조금 인정해왔던 것도 있기에(앞서 언급하듯이 학살이 아예 없었다고 하진 않는다. 그 수가 부풀려졌다는 것과 아르메니아도 학살했다고 따지는 게 있다) 아르메니아에서 반응은 그리 환영하는 게 아니었다. 터키의 아르메니아 원정 예선경기에서 아르메니아 극우들은 터키를 비난하는 시위도 벌인 바 있는데 경기는 터키의 2:0 승리라서 아르메니아의 기분은(...) 그래도 터키랑 이렇게 공식적인 축구경기를 가지는 거랑 달리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아예 경기를 치루지 않을 정도로 더 사이가 나쁘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에서도 아르메니아인들이 1915년 발생한 터키인 학살 사건(반 사건,사실 터키인보다 쿠르드인들이 더 많이 죽은 사건이라 이들이 격분하여 아르메니아 학살에 뛰어든 원인 중 하나)을 인정 및 사죄하는 등 일부 양보하면서 약간 분위기가 좋아질 듯했고 2010년 9월 19일 터키 악다마르 섬에선 95년 만에 추방된 아르메니아인들의 입국을 허락하며 악마다르 섬 대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허용했다. 이 자리에는 5천 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참석했으며 200명이 넘는 내외신 기자들이 취재했다.
아르메니아 악다마르 대성당
사실 이 예배는 2010년 4월 24일에 가질 예정이었으나 아르메니아에서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일로 기리는 날짜라서 터키 극우들과 아제르바이잔이 반발하여 무기한 연장된 끝에 9월에서야 이뤄진 거였다.
921년 경 아르메니아 왕 기가크 1세가 세우게 했다는 이 대성당은 아르메니아에서 손꼽는 성당으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1915년 이후로 아르메니아인 추방으로 오랫동안 버려져왔다. 이후로 이곳에서 쿠르드인들과 독립 문제로 벌어진 총격전으로 성당 여기저기에 총탄 자국이 가득했으며 문이 없고 벽 한 곳이 큰 구멍이 뚫려있었으며 아예 천장 한 쪽은 폭발하여 뻥 뚫린 상태로 훼손이 심했었다. 게다가 1951년에는 터키 측이 아예 박살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걸 결사반대하며 막은 인물들이 아르메니아인이 아닌 동부에 거주하던 쿠르드인 지식인이라는 사실. 그중 하나인 쿠르드계 터키 소설가인 야샤르 케말(Yaşar Kemal, 1923~2015)은 [34] 문화와 역사를 파괴하는 건 인류 역사에 둘도 없는 죄악이라며 이 성당의 파괴를 반대했다.
참고로 이 케말은 군부를 비난하고 쿠르드인 차별과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하여 독설을 퍼부으며 온갖 풍자소설을 쓰다가 오랫동안 투옥당하고 무척 시달림을 받았지만 양심있는 작가로 터키 진보층의 격찬을 받았다.
어쨌든 겨우 파괴는 막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가 지난 2007년에서야 터키 측이 수리했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갈등으로 다시 교회 예배는 불허되었다가 3년 만에 예배문제를 허용한 것이다. 아르메니아 극우들은 악다마르 섬(Akdamar Island-터키어는 Akdamar Adası)이 터키 이름이니 아르메니아 이름인 악타마르 섬 (Aghtamar,Akhtamar 아르메니아어는 Աղթամար [ɑʁtʰɑˈmɑɾ])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가 터키 측에게 그런 헛소리라면 앞으로 아르메니아인 출입금지하겠다는 엄포에 굴복해야 했다.
아르메니아에선 서로들 오려고 난리가 나면서 3만여 명이 신청했으나 터키 측은 수를 줄여서 예배를 보게 했다. 그리고 교회에 십자가를 일절 세우지 않게 했는데 이에 실망하는 아르메니아에게 터키는 예배를 망치고 싶냐고 못박았는데, 이 섬 주변은 쿠르드인들이 가득하며 터키인들도 보수적인 이슬람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기 때문에 3백명이 넘는 터키 군경이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터키 극우들과 쿠르드인들의 분노 어린 반발이 가득했고 무엇보다 아제르바이잔도 그런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남겨진 이슬람 사원을 멋대로 교회로 개조한 주제에 터키에게 무슨 염치로 요구하냐면서 분노했다. 아예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당시 터키 대사를 소환하여 실망이라는 뜻을 보여서 터키 안에서도 아제르바이잔 기분을 생각하자는 의견도 엄청났다. 이런 가운데,아르메니아 정교회 주교는 이 예배를 매해 볼 수 없냐고 간청했으나 터키 측은 장담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기에 결국 화해 제스처라고 하기에는 여러 말이 많은 예배였다. 그렇긴 해도 2011년 터키에서 아르메니아 측 요구대로 이 교회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워주었다. 물론 자국 극우들과 아제르바이잔의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2013년부터 터키가 매해 예배를 허용하면서 거의 100년 만에 아르메니아 소년들이 와서 세례식을 이 성당에서 한 바 있다. 2014년도 예배가 허용됐다. 물론 아제르바이잔과 극우파 반발이 여전히 거셌지만 말이다.
그리고 위에 서술한 대로 디야르비크르에 있는 수르프 기라고스 아르메니아 성당도 2013년에 복원됐다.
이렇듯 아르메니아는 주변 나라들과 계속 분쟁거리를 만들거나 떠안고 있는데, 실제로 터키와 분쟁이 터지거나 아제르바이잔과 또 전쟁을 할 것을 고려했는지 러시아 군대가 자국에 주둔했는데도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러시아에 많은 걸 의존하면서 또한 친러시아 극우들도 생기는 과정에 과거에 소련이 벌인 민족주의 및 반소 지도자들을 학살하고 역시 소련 시절에 벌인 학살 및 탄압을 침묵하는 러시아에게 반감도 크기에 애증이 교차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현대 와서도 정치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처했다. 2008년 2월 19일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세르브 사르키샨 총리가 당선되자 현재 가택연금 상태인 테르 페트로시안 초대 대통령을 지지하는 야당 세력이 이를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며 시위를 벌여왔다. 사실상 유럽 국가들 중에서 이런 막장 국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러시아에게 경제적으로 많이 얽매이는 상황에서 2013년 12월,러시아와의 천연가스 협정에 비준했다. 야당의 거센 저항으로 교착 상태에 놓여 있던 협정이 23일 의회에서 승인을 받았지만 당시 예레반에서 시위대가 반대시위를 벌였다. 갈수록 러시아 입김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그 반대 이유인데 그만큼 러시아 눈치를 많이 봐야하는 것도 현실이다. 물론 여론적으로는 러시아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이 많아서 2015년 초중반에도 예레반에서 연이어 반러시아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주둔 러시아군들이 민간인 아르메니아 여성을 성폭행하고 이를 막으려던 남성을 쏴죽인 사건이 터졌음에도 러시아 측이 대충 해당 군인 일부만 몇 년 징역형을 살게하고 부대에 관련한 처벌은 없고 대충 감추는 사건도 터졌음에도 아르메니아 정계는 러시아 눈치를 보며 덮어야 했다.
아르메니아 정계가 러시아에게 대들지 못하고 굽신거릴 수 밖에 없는 건 러시아가 떠나면 아르메니아로선 그야말로 사면초가가 되기 때문이다. 터키는 상당한 군사강국이며 주변 유라시아 튀르크계 나라들이 지지하고 있고 아제르바이잔과 튀르크계 나라로서 이들과 우호국이다. 조지아는 위에 나오듯이 경제적으로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에게 의존도가 높으니 아르메니아를 지지하지 못하며 그나마 이란이 있지만 악의 축으로 미국에게 허구헌날 까이는 이란을 의존하기에도 그런 상황. 그나마 2015년에 미국이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풀면서 이란에 의존도가 차츰 높아지긴 했다. 아무튼 지리적 위치라든지 러시아 입김으로 미국이나 서구권 나라들은 도와줄 수도 없다. 터키 아니면 러시아를 통해 와야 하고 조지아는 터키와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러시아에게 경제,정치적으로 많이 얽혀있으니 행여나 아르메니아가 터키랑 전쟁이라도 붙어서 신나게 두들겨맞아도 물질적으로 도와준다고 해도 도와줄 길이 아예 없다. 터키는 당연하고 러시아가 만일 나몰랑하고 바라보는데 조지아도 길을 열어주긴 불가능이고 이란은 어찌 편들어준다고 해도 무력적으로는 돕기 어려우니 말할 것도 없다. 이러니 아르메니아로서는 열터져도 러시아에게 꼭 붙을 수밖에 없으니 결국 이런 현실 속에서 아르메니아에선 유로마이단과 같은 일은 벌어지기 어렵다.
게다가 아르메니아로선 위기에 빠진 게 이젠 터키가 아닌 그동안 만만하게 보던 아제르바이잔도 무시못하게 되었다.
2016년 아제르바이잔과 또 다시 국경분쟁으로 양측 다 수백여명 사상자를 냈다. 하지만, 며칠동안 벌어진 국경분쟁이지만 국제적 인지도에서 아르메니아가 밀렸다는 분석이다. 사상자는 아제르바이잔 측이 7명(아르메니아군 전사자 88명, 아제르바이잔군 95명) 더 많았지만 피해 규모에서는 아르메니아 국경 수비대가 상당한 타격을 받아 장비 손상 및 군요충지 피해가 더 컸다고 한다. 이전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이 친미 정책을 취하고 이스라엘과 매우 우호적이 되면서 이스라엘군과 군사훈련도 하면서 이스라엘제 군사장비까지 사오면서 이젠 아제르바이잔군도 무시못하게 되었다. 거기에 이란을 견제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공군기지를 이스라엘군에게 임대하고 이스라엘군에 막대한 연료 수출(이스라엘군 40%나 되는 연료를 책임지면서 부동의 1위인 미국 못지 않은 기여를 한다.)까지 하면서 이젠 미국도 이스라엘 눈치를 보면서도 세속적으로 나서고 친미정책을 취하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아르메니아로선 울며 겨자먹기로 러시아와 나날이 외교 및 경제, 군사적인 우호가 커질 수 밖에 없다.
2020년 7월 12일에 국경지역에서 아르메니아 군인들과 아제르바이잔 군인들이 교전을 벌였다. # 12일에 시작된 교전은 계속되었다.관련 기사.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고 양국이 계엄령과 동원령을 선포했다.
여행
한국인한테는 잘 알려져있지 않고 국토도 작지만, 사실 러시아 등 옛 공산권에서는 예전부터 관광지, 휴양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캅카스 산맥 지역답게 옆나라 조지아처럼 스위스 뺨치는 웅장한 자연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고 오랜 역사답게 에치미아진, 노라방크, 코르비랍, 게그하드 등 그런 자연과 어우러진 기독교 유적지도 매우 많다.
그리고 내륙국인 아르메니아에 있어서는 바다나 다름없는 세반 호수가 있다. 원래는 1416 km²로 서울특별시의 2배를 넘어가는 큰 호수였지만 스탈린 시절 호수의 물을 관개공사에 쓴다고 호숫물을 마구 퍼가는 통에 면적과 수량이 많이 줄어들었다. 다행히 아랄해처럼 되지 않도록 보존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아르메니아 브랜디가 유명하며, 물이 깨끗한 청정국가다. 조지아처럼 장수촌으로도 유명한 편이다.
비슷한 처지였던 조지아가 먼저 적극적인 한국인 360일 무비자와 적극적인 홍보로 그나마 캅카스 국가 중에서 한국 관광객을 많이 유치하고 인지도가 올라간 반면 아르메니아는 이 쪽에 좀 늦는 편이었는데 2018년 드디어 한국인 180일 무비자를 시행하게 되었다.
미승인국인 아르차흐 공화국을 여행하려 할 경우 비자를 발급받아 갈 수 있으나 이후 아제르바이잔에 입국 시 이 지역을 여행한 사실이 드러나면 입국을 거부당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 아르메니아 본토를 방문하더라도 문제가 될 수 있어 보통 아제르바이잔을 여행한 후 아르메니아를 여행하는 것이 좋다
스포츠
축구가 가장 인기가 많지만 유럽축구에서 늘 하위권. 그러나 2010년대 들어서 종종 강호들을 상대로 1승을 거두는 저력을 보이고 있다. 참고로 AS 로마의 미드필더 헨리크 미키타리안이 아르메니아 출신 최고의 축구 스타이다. 자세한 건 아르메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참고할 것. 하지만 아직 자국 리그 실력은 여전히 부진한데 2013년 5월자 유럽리그 랭킹에선 아르메니아 리그는 50위라는 굴욕적인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그 아래가 안도라, 페로 제도, 산마리노같은 유럽 최약체 나라 리그들이니 말 다했다.(여담인데 역사적 라이벌인 이웃 아제르바이잔 리그는 37위) 이후 2017년에는 44위로 오르긴 했지만 라이벌 아제르바이잔 리그는 25위까지 순위가 올라갔다...거기에 2020년에는 아르메니아 2부리그에서 승부조작이 걸렸다. 연루되어 처발받은 팀만 해도 5개팀이나 될 정도로 대대적인 승부조작이라고 한다.
올림픽에선 이웃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레슬링, 유도, 역도에서 꾸준한 성적을 낸다. 옆동네 아제르바이잔이 레슬링또는 배구 쪽이라면 이쪽은 유도가 조금 더 강한 느낌. 하지만 나머지 종목 모두가 안습인 점은 아제르바이잔과 똑같다.
WWE 챔피언 세스 롤린스는 시카고 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친아버지가 아르메니아인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어릴때 멕시코계인 양아버지의 성을 따라 로페즈로 성을 바꾸었다. 세스 롤린스의 실제 이름은 콜비 로페즈이다.
종합격투기 관련 선수중에도 게가드 무사시(본명은 게가르트 모프세스얀), 다니엘 사라피안, 카로 파리시안, 매니 감부리안 같은 선수들이 있다. 그리고 유명한 테니스 스타인 앤드리 애거시의 부친도 아르메니아계 이란인이다.
문화
지리는 서아시아 북부지만 동유럽과도 지리적으로 꽤 가까운 만큼 유럽 문화의 영향도 있으며, 정교회 및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 종교가 아르메니아에서 나타나기 전에는 사산 제국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 외 오스만 제국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었고 근현대에는 러시아와 소련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또한 소련의 정책으로 강제이주된 일부 중앙아시아 일대 이주민들이 정착하기도 하면서 이들과도 같이 공존하면서 영향을 받았다. 그 외 주변 캅카스 제족들과도 여러 왕래 및 교류를 했었다. 식문화도 역시 서아시아와 유럽의 영향으로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이 존재하는데, 돌마, 라바쉬가 대표적인 요리이다. 그 외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 사이에 있는 만큼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과도 비슷한 의식주 문화들이 보인다. 조지아, 아제르바이잔만큼은 아니지만 여기도 이들 못지 않게 와인이 발달되었다.
그외
국명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어로 '하야스탄'이다. 즉 '스탄'으로 끝나는 국가는 원래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렇게 7개가 아니라 8개인 것.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피해 각지로 흩어졌는데 그 결과 해외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르메니아 내부의 아르메니아인들보다 많을 지경. 그리고 근면한 국민성 덕에 성공한 경우가 많아, 캘리포니아 같은 경우 "아르메니아인=부유층"의 공식이 성립할 정도. 이렇게 성공한 동포들이 송금한 돈으로 국가도 운영하고, 동포들이 각국의 의회에 로비해서 아르메니아 학살도 알리는 등 이스라엘 닮은꼴이라 할 만하다.
여담이지만 이런 해외 아르메니아인들이 보낸 돈 덕에 아르메니아가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는데, 아르메니아인들이 해외로 뜬 까닭이 아르메니아 대학살 때문이므로, 끝내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의 원인을 제공한 터키는 아제르바이잔에게 은근슬쩍 빅엿을 먹인 셈이다.(...)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부정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미묘한 사실.
아르메니아 독립 이후 현재까지의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아르메니아 태생이 아니다. 초대 대통령 레본 테르페트로샨은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계로 한 살 때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주했고, 2,3대 대통령 로베르트 코차랸과 세르지 사르키샨은 아르차흐 공화국 스테파나케르트 출신이다.
타라 덩컨 시리즈를 집필한 소피 오두인 마미코니안이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이다.[35] 프랑스의 전총리인 에두아르 발라뒤르(Édouard Balladur), 유명 샹송가수인 샤를 아즈나부르(Charles Aznavour, 본명은 샤흐누르 아즈나부랸), 실비 바르탕(Sylvie Vartan, 본명은 실비 조르주 바르타니안), 배우 아시니 칸지안도 아르메니아계이다.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영화감독 아톰 에고얀(Atom Egoyan, 애텀 이고이언)도 이 나라 혈통이다.(정확히는 아르메니아-이집트인) 감독 자신도 이 혈통에 대해 상당히 의식하고 있어 1993년 아르메니아를 방문한 경험을 담은 '캘린더'나 [36] 2001년 아르메니아 역사를 다룬 (위의 산 이름에서 따온) '아라라트'라는 영화도 찍었다.[37] 영국 배우 앤디 서키스(Andy Serkis)도 이 나라 혈통이다. 러시아의 외교부 장관인 세르게이 라브로프도 아르메니아계 혈통이며 우크라이나의 전 총리 율리야 티모셴코도 부계가 아르메니아 혈통이다.
러시아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 선수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의 아버지가 아르메니아인이다.
아르메니아인의 성씨는 끝에 '얀(-յան; 영어로는 -yan)'이라는 접사가 붙는데 이는 '~의 자식'이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자면 마미코니안(Մամիկոնյան), 에고얀(Էգոյան), 하차트리안(Խաչատրյան)같은 식이다. 'ев'나 'ов' 돌림의 성을 쓰는 러시아 혹은 ‘-son’으로 끝나는 영미권 성씨(Jackson, Thompson, Johnson 등.)과 비슷한 식이다. 이 성씨를 지녔다면 100% 아르메니아인 혹은 아르메니아계 혈통이 섞인 사람이라고 보면 좋다. 이외에도 '죽음의 의사'로 잘 알려진 미국의 의사인 잭 키보키언(Jack Kevorkian)이나 미국의 메탈 밴드인 시스템 오브 어 다운의 멤버인 다론 말라키안(Daron Malakian)[38] 등이 있다. 그리고 미국 최고의 어그로꾼 카다시안 가족도 아르메니아계. 아버지 로버트 카다시안도 유명했다.[39]
이 나라에서 생산하는 브랜디가 소련 시절에 꽤 인기있는 상품이었다. 지금도 세계 25개국에 수출하고, 국빈 방문 때 꼭 들르는 곳 하나에 브랜디 제조장일 정도라고.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과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도 방문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이 윈스턴 처칠에게 아르메니아 브랜디를 1년 동안 음미하라며 300병을 보냈다고 한다. 더구나 아르메니아가 이란과의 관계개선을 위하여 비밀리에 브랜디를 선물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술을 엄히 금하는 이란 고위 성직자들이 이런 선물에 환장한다는 이야긴 이란에서도 유명하다! 참고로 아르메니아 브랜디는 우리나라에서도 동대문 인근에서 구입할 수 있다. 출처
사용언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아르메니아어로 인상적인 독자 문자가 있다. 언어학자들은 이 언어를 조지아어와 함께, 고대 그리스어와 굉장히 비슷하다고 평가한다.
앞서 말한 대로 세계 최초 기독교 나라임을 자부하는 아르메니아이지만, 가톨릭에게도 개신교에게도 이단시받으면서 이슬람과 더불어 다른 기독교 종파들에게 오랫동안 시달려왔다. 그래서인지 자국 정교회인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국교화 요구까지 있었다. 급기야 지난 2006년에는 자국 종교인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제1종교로, 그리고 이슬람을 제2종교로 인정하며 나머지 기독교 종파와 다른 종교들을 금지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큰 반발을 부른 외국 선교사들의 아르메니아 입국 및 선교 활동 탓이 컸다. 그러나 사실상 지금도 타 소수종파의 아르메니아 선교는 이뤄지고 있으며, 정부의 법령도 해석이 애매한 편이고[40] 타종파 선교가 팍팍할 지언정 일단 공식 헌법상으로 종교의 자유는 보장하고 있다.
그 밖에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을 빼면 아랍권 이슬람 국가들도 터키에게 지배를 겪어 지금도 이를 가는 역사가 있기 때문에 조금은 사이가 좋은 편이다. 다만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 당시에는 미국이 옹호하기도 했고 기독교 국가 아르메니아가 이슬람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에서 학살을 저질렀다는 점 때문에 아르메니아를 비난하는 의견들도 종종 나오기도 했다.
그렇긴 해도 터키보단 낫다는 시각도 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 학살 당시 같이 오스만 제국군에게 최대 10여만이 학살당한 시리아도 아르메니아 학살에 아르메니아 편을 들며 터키에 항의할 정도. 이런 사정으로 이슬람에 대한 종교적 탄압은 없다. 다만 아르메니아에서 이슬람의 비중은 낮다.[41]
이웃나라인 터키와 이란에서도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살아간다. 터키같은 경우는 5~7만, 이란 거주 아르메니아인은 10만~50만 정도. 부정확한 숫자인 것은 두 나라 모두 소수민족 문제에 민감한데다 자세한 조사를 안 해서(...)
미수다에는 한국남편과 결혼한 슈샨 하콥얀(Shushan Hakobyan)이라는 아르메니아인 여성이 출연했다.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 여파로 쿠르드족의 독립 요구에 굉장히 민감해 한다. 당장 독립 실현 가능성은 없지만 이 여파로 쿠르드족의 결집 강화도 우려한다. 쿠르드족의 독립은 지역에 새로운 예측 불가능의 변수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터키의 동부 거대 댐공사 계획으로 쿠르드족과 힘을 모아야 하는 또다른 현실이 있다. 거기에 시리아 북부에서는 IS 등에 대항해 쿠르드족과 아르메니아인이 연합 전선을 형성하기까지 하고 있다. 일단 원론적으로 1차대전 이후 터키 공화국에게 억압 받았다는 역사를 공유하므로 PKK, 인민 민주당, 이라크령 자치지구 같은 쿠르드족 독립 단체들과는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쿠르드족 독립 단체들은 대학살 인정과 학살 당시 쿠르드족의 참여에 대한 사과 같은 과거사 문제는 문제시하지 않고 넘어갔다. 사실 쿠드르인들도 이 학살 당시 무수히 학살되면서 피해자이자 가해자였지만 쿠르드족 항목에 나오듯이 여러 곳으로 분열되어 벌어진 상황이다. 이들이 오스만 제국 편들어 학살한 것도 있으나 이들도 그러지 않았더라면 학살당했다는 의견도 있고 또한 이들에게 사죄배상을 하라고 해도 나라도 없는 이들에게 이런 요구를 듣어줄 수도 없다. 결정적으로 그렇게 해봐야 터키에 이를 가는 반터키 쿠르드 세력을 적으로 만들어버릴 셈이니 차라리 아군으로 만드는게 낫다. 문제는 쿠르드인들도 아라라트산을 성지로 받아들이기에 이들이 독립국가를 세운다면 아르메니아로서도 좋을 일이 아니라는 점.
콜롬비아에 아르메니아라는 이름의 도시가 있다. 콜롬비아 킨디오 주에 위치한 곳으로 인구는 약 29만 2천 명. 콜롬비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3개 도시(보고타, 메데인, 칼리) 사이에 있다. 이름이 위의 나라 이름과 똑같은 까닭은, 아르메니아 학살을 추모하는 뜻[42]으로 원래의 비야 올긴(Villa Holguin)이라는 이름에서 바꾸었다고 한다.
카프카스 산맥에 있어서 산들이 많고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래서 "카프카스의 알프스"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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