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프로 축구 클럽. 연고지는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 홈 구장은 안필드.
1892년에 창단되어 빌 샹클리와 밥 페이즐리 감독 시절, 붉은 제국이라 불리는 전성기를 보냈고[9]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인 이스탄불의 기적과 안필드의 기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부 리그 통산 19회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잉글랜드 클럽 중 UEFA 챔피언스 리그 최다 우승팀으로[10] 잉글랜드에서 유일하게 빅 이어를 영구 소장한[11] 명문 클럽이다.
역사
상당히 굴곡진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영광스런 시간만큼 내리막길도 분명 걸었던 팀이다. 1892년 팀의 창단 이후 영광스런 시절을 보냈다가 급격한 하락세로 오랜 좌절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데, 1959년 빌 샹클리가 부임하여 팀을 재정비하고 확실한 성적을 거두며 팀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될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명예롭게 은퇴하고 리버풀 감독직 바통을 자신을 보조했던 밥 페이즐리에게 넘겼다. 페이즐리는 전임 감독보다 팀을 더 성공적으로 이끌며 지금도 회자될 멋진 영광의 순간들을 만들어내었다.[13]
리버풀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70년대 중반 ~ 1980년대 중반 케니 달글리시, 이안 러쉬와 함께 스코틀랜드 축구 역사상 올타임 넘버원 레전드인 그레이엄 수네스를 앞세운 화끈한 공격축구로 유럽과 잉글랜드를 평정했다.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을 붉게 물들였다고 해서 붉은 제국이라는 이름이 이때 리버풀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후임 감독인 조 페이건과 감독이 된 케니 달글리시도 좋은 성적들을 거두었으나 1989년 일어난 힐스버러 참사로 인한 충격과 후유증으로 달글리시가 사임한 1991년 이후에는 왕좌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96명의 축구팬들이 비극적인 사고로 운명한 이 사고는 선수들, 감독, 리버풀 팬들까지 클럽 전체에 거대한 트라우마를 입혔으며, 이 때문에 빌 샹클리 때부터 공들여 만들어 왔던 영광스런 팀이 서서히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힐스버러 참사가 신호탄[14]이 되어 리그는 1992년에 프리미어 리그라는 이름으로 개편된 후, 리버풀은 오랜 시간 리그 우승 트로피와 인연을 맺지 못했었다. 결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가 2013년에 20회 리그 우승으로 리버풀의 우승 기록을 추월했으며, 리버풀의 리그 우승은 2019-20 시즌 전까지 18회 우승에 멈춰 있었다. 다만 유럽 무대에서는 두각을 보여[15] 유로파 리그 우승(2001년)과 두 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2005년, 2019년)를 들게 된다.
또 예전의 영광의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제라르 울리에 감독 시절, 2000-01 시즌에 FA컵, 리그컵, 유로파리그에서 3개의 트로피를 따내기도 하였다. 이후 라파엘 베니테스가 2004-05 시즌에 취임하고 4-2-3-1 포메이션을 기반으로 한 공수간격을 극단적으로 압축시킨 역습 축구로 돌풍을 일으키며 2004-05 시즌 5번째 UCL 우승, 2005-06 시즌 FA컵 우승, 2006-07 시즌 UCL 준우승, 2008-09 시즌 리그 준우승을 기록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팬들은 베니테즈 감독이 클럽 역사상 제 2의 전성기를 만들 것으로 기대했으나 전 시즌 리그 2위가 무색하게 2010년에 성적이 곤두박질치고 베니테즈는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리버풀은 이후 위르겐 클롭 감독이 부임할 때까지 프리미어리그 빅4의 위상에서 벗어난 본격적인 암흑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베니테즈는 분명 능력있는 명장이고 리그 준우승 당시 팀 퀄리티도 훌륭했지만 리버풀 침체의 모든 원인은 2007년에 리버풀을 인수한 톰 힉스와 질레트 구단주에게 있었다. 베니테즈에게 약속된 투자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으며 그렇잖아도 다른 빅클럽보다 얇은 스쿼드에서 오히려 월드클래스 선수들이 외부로 빠져나가버린 것. 질레트 - 힉스 구단주들은 분명 리버풀의 미래에 좋지 않은 운영 모습을 보여주었고 결국 2010년에 존 헨리[16] 구단주에게 인수되었다.
베니테즈 감독 이후 부임한 로이 호지슨, 케니 달글리시 체제에서는 심각한 부진을 면치못한 리버풀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다행히도 달글리시 감독이 2012년에 리그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것은 큰 소득이었다. 이후 부임한 브렌던 로저스[17] 역시 루이스 수아레스를 앞세운 공격축구로 2013-14 시즌에 반짝 돌풍을 일으켰지만 84점으로 리그 2위를 기록하며 리그 우승에 실패했고, 그 다음 시즌에 이적한 수아레스의 공백을 이겨내지 못한 로저스는 2년 후 경질됐다.
위르겐 클롭이 부임하고 나서는 게겐 프레싱을 기반으로 한 빠르고 역동적인 압박축구가 서서히 이식되어 2016-17 시즌 리그 4위, 2017-18 시즌 리그 4위 및 챔스 준우승, 2018-19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리그 준우승으로 몇 년간 리버풀을 괴롭혔던 암흑기를 청산하며 다시금 옛 위상을 되찾았고, 탄탄한 선수층을 바탕으로 2019-20 시즌 프리미어 리그 우승까지 차지하므로서 완벽하게 부활했다.
프리미어리그의 빅클럽들, 빅6 중 유럽 무대에서 유독 강한 면모를 보이는 팀이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준우승 1회 준결승 1회, 8강 1회를 기록했고 망했던 2009-10 시즌에도 유로파리그 준결승까지는 갔다. 베니테스가 떠난 이후엔 유럽대항전에서 저조한 성적만을 기록하다가 위르겐 클롭이 부임한 이후 다시 유럽대항전에서의 명성을 회복했다. 클롭이 시즌 중 부임했던 2015-16 시즌 리버풀은 완성이 덜 된 멤버들만 가지고도 유로파리그 결승에 올랐으며 2017-18 시즌 챔피언스 리그 8강 토너먼트에서 해당 시즌 프리미어리그 생태계 포식자였던 맨체스터 시티를 맞아 홈, 원정에서 모두 승리하고 4강에 진출했으며 결국 결승전까지 올라갔다. 2018-19 시즌에는 토트넘 핫스퍼 FC를 챔스 결승에서 맞아 2-0으로 꺾고 빅 이어를 들어올렸다. 결과물도 UEFA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 6개, UEFA 유로파 리그 트로피 3개로 잉글랜드에서 가장 독보적이다.
위르겐 클롭 부임 이전 공격수들의 영광과 불운
헤이젤 참사와 힐스버러 참사가 연이어 터지게 되고 그레이엄 수네스, 로이 에반스 감독 체제에서 리빌딩까지 실패했지만, 제라르 울리에 감독이 취임하며 부진이 어느정도 수습이 되는 듯 했다. 그것이 바로 2000-01 시즌 FA컵, 리그컵, UEFA컵[18], 커뮤니티 실드, UEFA 슈퍼컵의 5관왕으로 증명이 되었다. 프랜차이즈 스타 마이클 오언은 이때 발롱도르까지 수상했다. 리그에서도 3위를 기록했지만, 오언과 에밀 헤스키 조합은 30골을 합작하며 스트라이커가 약하다는 평가는 받는 팀이 아니었다. 오언은 다음 시즌에도 19골을 터뜨리며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었지만, 헤스키가 부진했고, 2위임에도 팀득점 67점으로 1위 아스날의 79득점, 3위 맨유의 87득점에 비하면 저조한 득점력을 보이기 시작하며, 리버풀의 스트라이커 잔혹사가 시작되었다.
2002-03 시즌을 앞두고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펼친 세네갈의 연쇄살인마라는 별명을 가진 공격수 엘 하지 디우프를 1000만 파운드에 영입을 했다. 전 소속팀인 리그앙의 RC 랑스에서도 두 시즌 동안 18골을 뽑아낸 검증된 공격수였고, 월드컵에서 세네갈을 8강으로 이끈 맹활약을 했기에, 기대를 모은 영입이었으나, 두 시즌 동안 리그 55경기에 나와서 3골, 리그컵 7경기 나와서 3골 총 79경기에 출전해서 6골을 넣는 최악의 부진을 선보이며,[19] 결국 2004-05 시즌에 볼튼 원더러스로 임대를 떠났고, 거기서는 리그 9골을 터뜨리며 완전이적을 해버린다. 400만 파운드에...리버풀은 5위로 추락하여 다음 시즌 챔스도 못나갈뻔 했으나 그 시즌 챔스를 우승해버려서 챔스 티켓을 놓치지는 않았다. 유스출신인 오언 꾸준히 19골, 16골을 기록해주고 있었고, 2001-02 시즌에 320만 파운드에 영입했던 밀란 바로시가 2002-03 시즌 총 12골을 넣어주었다. 그런데, 원더보이 마이클 오언마저도 시즌 종료 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게 된다. 퇴물 취급받던 에밀 헤스키마저 버밍엄 시티로 이적하게 되면서 리버풀의 공격진은 그야말로 멸망하게 되었다.
오언과 디우프가 사라진 2004-05 시즌 리버풀은 드디어 라파엘 베니테스가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나, 이미 공격진이 멸망된 상황. 바로시 혼자 분투한 시즌이었다. 지브릴 시세를 당시 리버풀 클럽 레코드인 1450만 파운드에 영입은 했지만, 영입한지 얼마 안 돼서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게 되었고, 두 시즌 동안 리그 13골의 그냥 그런 활약을 보였다. 유로 2004에서 맹활약하며 득점왕에 오른 바로시가 간신히 9득점을 올렸을뿐. 이스탄불의 기적이 아니었으면 진짜 멸망한 시즌이었다. 그러나 밀란 바로시 조차 다음 시즌인 2005-06 시즌을 부상으로 통채로 날려버렸다. 2004-05 시즌 때 닐 멜러라는 반짝 스타가 갑툭튀 하긴 했지만, 그야말로 반짝 스타였을뿐.
2006-07 시즌 팀의 득점력 강화를 위해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서 한창 물이 올랐던 상태의 디르크 카윗을 900만 파운드라는, 당시 리버풀의 재정 상황을 고려하면 꽤 큰 금액으로 영입했다. 카윗의 활동량이나 팀 플레이는 수준급이었으나 정작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리그 12골로, 득점랭킹 9위에 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리버풀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기에 실패한 영입이라고는 볼 수 없다. 리버풀을 떠난 지 오래된 지금도 마치 맨유의 박지성처럼 팀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어주는 스타일인 그를 많은 콥들이 진심으로 좋아하며 레전드로 칭송하고 있다. 같은 시즌 60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뉴캐슬에서 크레이그 벨라미도 영입했지만 리그 7골로 빈곤한 득점력은 해결해주지 못했다. 대신, 바르셀로나와의 챔스 경기에서 맹활약하며 바르셀로나를 탈락시키긴 했다. 활약과 별개로 좋지 않은 인성과 말썽으로 시끄러웠던 인물이었던 그도 결국 다음 시즌 바로 팀을 떠났다.
결국 2007-08 시즌 이적시장에서 2000만 파운드라는 클럽 레코드를 기록하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페르난도 토레스를 영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토레스의 이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크레이그 벨라미, 지브릴 시세, 마르크 곤살레스, 루이스 가르시아, 플로랑 시나마-퐁골 등 준주전급 자원 여러 명을 이적시켜야 했고, 이는 당시 선두권 경쟁을 벌이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FC, 아스날 FC에 비해 얇던 스쿼드 두께를 더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시 초신성 공격수 토레스와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로 손꼽히는 스티븐 제라드 조합은 '제-토 라인'이라는 이름으로 프리미어리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페르난도 토레스에게도 이때가 자신의 축구 경력에서 가장 최고의 전성기 시절이었다. 네덜란드의 신성 라이언 바벨 역시 1150만 파운드의 거금을 들여 영입했지만, 기대치에 비해 2007-08 시즌 전반기에 반짝 활약한 것 이외에는 이적료값을 하지 못한 영입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토트넘 핫스퍼에서 로비 킨을 데려왔으나 구단주와 감독 사이의 알력 등 클럽 내부적인 사정으로 인해 6개월만에 반송 처리했고, 첼시에 토레스를 5000만 파운드에 넘기고 무려 3500만 파운드라는 패닉바이로 영입한 앤디 캐롤 역시 실패했다. 다만 AFC 아약스에서 2650만 파운드로 사온 루이스 수아레스가 월드 클래스의 기량을 보여주며 리버풀의 스트라이커 잔혹사는 여기서 사라지는 듯 했으나 수아레스를 FC 바르셀로나로 보내고 대체자로 영입한 마리오 발로텔리, 리키 램버트, 크리스티안 벤테케가 죄다 실패하며 잔혹사는 계속 되었다. 더 문제인 것는 저 셋의 활약도를 다 합쳐도 다니엘 스터리지의 발 끝에도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었다.[20] 그러나 그런 스터리지마저도 잦은 부상에 발목이 잡힌다.
상징
지금이야 리버풀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클럽의 상징과도 같은 붉은색이고, 100년이 넘는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러했으나, 19세기 말 갓 창단한 리버풀의 유니폼은 초창기 에버튼의 그것과 유사한 파랑-하양 디자인을 따랐다.[22] 물론 이 유니폼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폐기되었으며, 1894년에 리버풀 시의 상징색이기도 한 빨강을 처음으로 유니폼 디자인에 채용하였다. 이때부터 1964년까지, 오늘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니폼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는 빨강(상의)-하양(하의) 디자인을 고수하던 리버풀은 당시 감독이던 빌 샹클리의 제안으로 하의와 스타킹까지 붉은색으로 물들인다.
"그(샹클리)는 온몸을 붉은색으로 물들이는 게 상대에게 위압감을 가져다줄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 그는 드레싱 룸으로 들어와서 로니 예이츠에게 빨간색 하의 한 벌을 건네더니, "이거 한 번 입어봐라. 어떤지 좀 보자." 라고 했다. 로니가 빨간 바지를 건네 받고 챙겨 입자 그는 "오, 로니, 장난 아니게 멋진데? 놀라워. 키가 2미터는 돼 보이네."라고 했다. 그 모습을 본 내가 제안하길, "아예 양말도 빨간색으로 해 버리죠? 모두 빨간색으로 하고 나가요." 샹클리는 찬성했고, 그것이 리버풀의 새로운 상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안 세인트 존,[23] 그의 자서전에서.
리버풀은 유니폼 상의에 메인 스폰서 로고를 부착하고 경기에 나선 잉글랜드 최초의 클럽이라는 독특한 기록도 보유하고 있는데, 1979년 히타치와 계약을 맺으면서였다. 그 후 리버풀은 크라운 페인트, 칼스버그 등을 거쳐 현재는 가슴에 스탠다드차타드의 로고를 새기고 있다. 한편 칼스버그와의 스폰서십 계약은 1992년부터 2011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는 잉글랜드 프로축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계약이라고 한다.
공식 구단 엠블럼 윗면에는 그 유명한 YNWA 문구가, 방패 안에는 리버풀 시의 문장인 라이버 버드가 자리해 있으며, 양쪽의 불꽃은 안필드 밖에 위치한 힐스보로 참사 기념비에 있는 성화를 표현한 것이다.
위의 샹클리 게이트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리버풀의 전설적인 명장, 빌 샹클리를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1982년 그의 사후, 부인이던 네시가 개회식을 하여 지금까지 안필드 홈구장을 지키고 있다. 그의 모습을 본뜬 청동상도 1997년에 안필드에 세워졌다. '리버풀은 나를 위해, 나는 리버풀을 위해 만들어졌다.'라는 명언을 남긴 감독답게 그는 비록 모두의 곁을 떠났지만 말 그대로 리버풀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THE KOP
콥(Kop)은 리버풀 FC의 서포터즈를 통칭해 부르는 단어이다.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를 가득 메운 콥들의 열정적인 응원은 리버풀에겐 큰 힘을, 상대편에겐 상당한 부담감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25] 클럽에 대한 자부심과 충성심이 유별난 것으로 유명한데 비록 리버풀에게 힘든 시련이 없지 않았지만 과거 오랫동안 유럽 최강팀으로 군림했던 영광스런 역사가 있기에 그 시절이 다시 재현될 수 있다는 믿음을 항상 가지고 있다. 리버풀 홈에서 열리는 경기는 거의 매진이 될 정도로 현지 콥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리버풀 서포터들이 정말 많이 홈구장을 찾아오며 리버풀 입장에선 든든한 서포터즈이지만 과거에 콥 출신의 훌리건들이 원인이 된 헤이젤 참사로 빈축을 사기도 했고 힐스버러 참사로 인해 많은 리버풀 서포터들이 희생되는 어둡고 아픈 역사와 관련되기도 하였다.
콥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1906년 리버풀이 두 번째 1부 리그 우승을 한 후 구단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새로 만든 스탠드에 보어 전쟁 때 많은 리버풀 출신 병사들이 전사한 곳의 지명인 스피온 콥(Spion Kop)을 추모의 의미로 붙인 것에서 유래한다. 1960-61 시즌에 2부 리그로 강등되었던 리버풀이 우승을 하며 1부 리그로 승격된 후 1962-63 시즌 블랙풀 FC와 시즌 첫 경기를 치렀는데, 이 당시 안필드에 입장한 5만 여명의 팬들 중 절반이 넘는 수의 관중이 골대 뒤의 스피온 콥 스탠드에 모여 리버풀을 외쳤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당시 최고의 인기인 비틀즈[26]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덩달아 옆에 있던 다른 팬들도 같이 노래를 부르며 열정적으로 응원했고, 이런 열정적인 응원을 본 사람들이 스탠드의 이름을 따 리버풀의 서포터즈를 콥이라고 통칭하게 되었다.
리버풀 서포터즈, 콥들의 열정적인 응원의 대표적인 예시는 UEFA 챔피언스 리그/2018-19 시즌/4강 2경기 2차전 경기가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경기 킥오프부터 90분 추가시간 지나서 경기 끝날 때까지 바르샤 선수들이 공을 잡을 때마다 맹렬한 야유를 퍼부었고, 리버풀 선수들이 공을 잡게 되면 열렬한 환호와 응원 함성을 보내주었다. 경기의 분위기를 거의 콥들의 응원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리버풀은 이들의 용광로같은 기운에 힘입어 상대편에는 메시가 버티고 있고 3-0으로 열세에 빠져있던 상황을 4골을 집어넣어 역전시켜 버린다. 결국 그 시즌 마지막에 리버풀은 빅 이어를 들 수 있었고 리버풀 선수들은 이 영광을 이루게 해준 콥들에게 바친다는 뜻으로 리버풀 관중 앞에 빅 이어를 내려놓고 선수들과 콥 모두 <You'll never walk alone> 응원가를 부르는 감동적인 순간을 만들었다.
국내 서포터즈 펍 봉황당
국내 콥들이 모여 같이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서울 연남동 홍대 부근에 위치한 리버풀 FC를 테마로 한 펍 <봉황당>이 그곳이다. 역시 리버풀의 오랜 팬인 김성민 대표[27]가 이곳을 운영 중이다. 펍 내부에는 스티븐 제라드, 제이미 캐러거, 루이스 수아레스 등의 사인 유니폼과 감독 위르겐 클롭의 사인 액자도 비치되어 있다. 그 외에도 펍 내부 인테리어, 소소한 장식까지 리버풀 클럽의 테마를 하고 있다. 안에서 음식과 술을 먹으며 리버풀 경기를 시청할 수 있다. 리버풀 경기 때 뿐만 아니라 다른 해외축구 중계, 한국 국가대표 경기도 시청할 수 있다.
2015-16 시즌 리버풀의 유로파리그 결승전 때 60여명의 국내 콥들이 펍에 모여서 응원전을 가졌으며, 2017-18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때는 주최를 맡아 700여명의 콥들이 서울 용산에 모여 단체 응원전을 펼쳤다
인기
자국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은데, 특히 동남아 쪽의 인기가 폭발적이다. 태국 전직 총리이던 탁신 친나왓이 리버풀 구단을 사려다가 실패[28]하여 맨체스터 시티 FC를 대신 샀던 일화도 유명하다.
칼스버그가 유니폼 스폰서를 하던 시절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를 여행한 이의 경험을 들어 보면 맨유보다 리버풀 서포터를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이 두 나라에선 이슬람 율법 때문에 주류 관련 광고를 금지하는 터라 덩달아 칼스버그가 가슴팍에 새겨진 유니폼도 판매 금지가 되어 칼스버그가 스폰서를 하기 전 유니폼이 아직도 나와 팔리고 있다며 투덜거리던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전술했듯이 동남아쪽 인기가 많은 편이라 프리시즌 친선경기도 동남아에서 많이 가졌는데, 클롭 부임 이후 시즌 전 선수단 컨디션 관리를 위해 장거리 비행을 자제하는 쪽으로 방침이 세워져 동남아쪽 팬들의 아쉬움이 커질 전망이다.
참고로 이런 인기를 방증이라도 하듯이, 구단 공식 스폰서 9개사 중 2개사가 동남아시아 쪽에 뿌리를 둔 회사[29]이다.
이집트 국가대표 에이스, 모하메드 살라가 리버풀에서 맹활약 하면서 이집트에서의 위상은 가히 국민 클럽 그 이상이라 할 수 있다. 박지성이 한창 뛰던 맨유 클럽이 우리나라에서 가졌던 위상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미국에서는 아일랜드계가 많은 보스턴에서 인기가 많다. 당장 공식팬클럽이 당당히 보스턴에 있는 건 물론이요, 펜웨이 스포츠 그룹이 소유한 보스턴 레드삭스 전담 방송사 NESN에서도 리버풀 카테고리가 따로 있을 정도. 레드삭스 트윗 계정에서도 2018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전에 리버풀 응원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트윗
우리나라에서도 이스탄불의 기적 이후로[30] 입문한 팬들이 많은 편이다. 온,오프라인으로 팬클럽들이 형성되어 있으며 규모도 작지 않다. 2018년 9월에 'LFC 월드'란 이름으로 리버풀 공식 팬미팅 및 리버풀 경기 단체관람이 롯데월드타워에서 개최되었다. 리버풀 레전드인 루이스 가르시아, 사미 히피아, 제이슨 맥아티어가 내한했으며 잔디광장에 대형스크린을 설치해 리버풀 대 토트넘전을 중계하였다. 2000명 정도가 관람했으며 열렬한 응원 탓에 주변 아파트에서 소음 신고가 들어오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날 리버풀은 토트넘을 2대1로 이겼으며 롯데타워는 이날 행사를 기념해서 리버풀 응원 문구와 리버풀 레전드 이름이 담긴 레이저쇼를 벌여 큰 환호를 받았다
우승기록
한때 1부 리그 우승 18회로 오랜 기간 리그 최다 타이틀을 유지하였다. 허나 이후 맨유가 2012-13 시즌까지 1부 리그 우승을 20회로 늘린 반면 리버풀은 한동안 장기간의 리그 우승 실패로 인해 놀림받는 처지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다 2019-20 시즌, 리버풀은 프리미어 리그 출범 후 첫 우승을 차지하면서 30년 만에 1부 리그 통산 우승 횟수를 19회로 늘리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자국 컵 대회에서는 FA컵 7회 우승을 차지한 바 있으며, EFL컵 8회 우승으로 최다 우승 클럽 선두를 달리고 있다.
유럽 대항전에서는 더욱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유하고 있는데 먼저 UEFA 챔피언스 리그 통산 6회 우승으로, 유럽 전체를 통틀어 3번째로 우승을 많이 한 팀[61]이자, 잉글랜드 클럽 중에서 독보적인 1위이다.[62] 게다가 잉글랜드에서는 유일하게 빅 이어를 영구 소장한 클럽이기도 하다.
그 다음, UEFA 유로파 리그 3회 우승으로 역시나 잉글랜드에서 우승 횟수가 가장 많고, 이 외에도 UEFA 슈퍼컵 4회 우승과 FIFA 클럽 월드컵 1회 우승을 달성한 바 있다.[63]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리버풀의 역대 메이저 대회 우승은 통산 48회로, 라이벌 맨유의 45회를 제치고 현재 잉글랜드 최다 우승팀이 되었다.[64]# 그리고 리버풀의 역대 메이저 대회 트로피 획득 현황은 홈구장 안필드와 훈련장 커크비 & 멜우드의 "The Champions Wall"에 부착되어 있다.
풍선골 사건
2009년 10월 16일 뜻밖의 일이 일어나 축구계를 달궜다. 선덜랜드와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소년 콥이 비치볼을 던졌는데 선덜랜드의 공격수인 대런 벤트의 슈팅이 비치볼에 맞고 굴절되어 축구공이 골문으로 들어갔다. 사실 FIFA 경기 규칙에 따르면 이 경기는 그때 중단되었어야 하지만 주심이었던 Mike Jones가 이를 보지 못해 오심으로 득점으로 인정되었다. 이 경기는 0-1로 리버풀의 패로 끝나게 되는데 이 사건 이후 리버풀은 총 7경기에서 1승 3무 3패로 부진을 계속했으며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올림피크 리옹에 패하여 22년만의 4연패를 기록하게 된다.
참고로 그 꼬마 콥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칼럼 퍼거슨이었다고 하며 그 비치볼을 던진 소년 리버풀 팬은 같은 리버풀 팬으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았다. 이 사건을 한국에서는 풍선골 사건이라고 보통 칭하고 있다.
고양이 난입
11-12 시즌 안필드에서 열린 리버풀과 토트넘의 EPL 경기 도중에 갑자기 고양이가 난입했다. 약 1분 동안 경기가 진행되지 못하여 안전요원들이 바깥으로 내보냈는데, 안필드 측에서 고양이를 맡으면서 빌 샹클리 감독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이름인 샹크스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 고양이는 전세계적으로 이목을 끌게 되어 트위터 계정까지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공식 마스코트로 사용하길 원했지만 구단 측에서는 돌봐주다가 동물 보호소로 보냈다. 그리고 입양되었다고 한다.
빡빡풀
2010-11 시즌부터 2012-13 시즌까지 리버풀에 빡빡 민 선수들이 많아 빡빡풀이라는 옛날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현재 펩 과르디올라 감독의 맨시티와 비슷했던 수준이다. 특히 2010-11 시즌은 당시 '예능 골키퍼'였던 페페 레이나를 포함하여 글렌 존슨, 마르틴 스크르텔, 폴 콘체스키, 하울 메이렐레스, 제이 스피어링, 존조 셸비, 조 콜, 라이언 바벨, 다비드 은고그 등 18명의 출전 선수 명단 중 대부분이 빡빡이 선수들이었고 이들은 예능 축구팀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영화화
리버풀과 이스탄불의 기적을 소재로 한 영화가 있다. 영화 제목은 <WILL>이라고 하며 주인공인 어린 아이 '윌'은 부모님이 없어 시설에서 지내지만 누구보다도 리버풀에 대한 열정은 남다른 꼬마이다. 어느날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친아빠가 시설로 찾아오고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주인공을 위해 친아빠는 이스탄불로 가는 챔스 결승 티켓을 구해 온다. 친아빠와 주인공은 You'll Never Walk Alone을 같이 부르고 주인공은 조금씩 아빠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러던 얼마후 친아빠가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사고를 당하고 주인공은 홀로 시설을 뛰쳐나와 아버지와 약속했던 챔스 결승을 직관하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인상적인 부분은 어린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나이 먹은 리버풀 콥들보다 리버풀 역사에 대해 빠삭하다는 점. 성인인 콥들에게 리버풀 역사를 되려 가르쳐 주는 수준이다. 진정한 성콥. 이 영화 후반부에 케니 달글리시, 제이미 캐러거, 스티븐 제라드가 직접 출연하며 결국 리버풀이 AC밀란을 승부차기 끝에 꺾고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영상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힐스버러 참사를 배경으로 한 단편 영화도 있다. 힐즈버러 축구장의 참사를 배경으로 머지사이드에 살고 있건 한 가족에게 찾아온 일화를 가상으로 재구성한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꼬마 리암이 친구들과 축구를 하러 나가는데, 리암의 친구들, 장벽을 넘어온 아이들의 장난으로 리암은 코피를 쏟으며 느끼는 위협감을 시청자에게 전달하며 시작되는데, 당시의 비극적인 순간을 영화의 입장에서 각색하여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타 정보 유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성채용에 대해알아보자 (0) | 2020.10.07 |
---|---|
빅히트 에 대해알아보자 (0) | 2020.10.06 |
개천절에 대해알아보자 (0) | 2020.10.03 |
도널드 트럼프에 대해알아보자 (0) | 2020.10.02 |
제사에 대해알아보자 (0) | 2020.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