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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0. 12. 30.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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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인, 독재자. 2013년 3월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제6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군 통수권자) 겸 제7대 국가주석 겸 제5대 중국 공산당 총서기이다.

1인 독재와 종신집권을 위하여 반부패 정책[9]을 추진한 한편, 대대적인 개인 우상화 작업을 강하게 밀어붙인 덕분에 대중적인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데 성공하여 중국에서는 초창기에 시다다(习大大: 시 아저씨)[10]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11]

그리고 2018년, 결국 국가주석 임기 철폐 개헌으로 사실상의 종신 집권을 선언했으며, 이에 따라 마오쩌둥 이후 지도자들이 자제하던 1인 독재와 개인 우상화를 부활시켰고, 더불어 그나마 숨통 트일 정도만큼은 있었던 중국의 사회적 자유화 수준을 급격히 하락시키고 퇴보시켰다. 또한 편협함과 음험함이 역대 중국 지도자 중 최악이라서 자신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죽하면 시진핑을 비판하는 인민, 학자, 명사들이 은밀히 혹은 실시간으로 체포되거나 납치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당연히 이런 꼬라지를 보이니 중상류층들은 해외 이민을 떠나려는 모습들이 상당히 늘었다.[12] 시진핑을 싫어하는 중국 젊은이들은 중국이 북한을 닮아간다며 자신들의 조국을 서조선[13]이라 부른다. 그리고 시진핑의 취임 이후로 중국의 국제적인 인식이 상당히 나쁜 쪽으로 기울고 있으며, 이로 인해 중국은 러시아, 파키스탄, 북한, 중남미, 아프리카 등을 비롯한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던 국가들과 관계가 틀어지고 있다.

중국의 역대 최고 지도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건국 이후에 태어난 인물이기도 하다.

시진핑은 마오쩌둥, 덩샤오핑[14] 이후 25년 만에 중국에서 1인 독재를 하고 있는 인물이다.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중국 공산당이 1당 독재 체제여서 독재자가 됐다는 변명이라도 해볼 수 있지만,[15][16]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의 집단지도체제를 뒤엎고 1인 독재체제를 구축했기에 진짜배기 독재자가 맞다.

특히 총서기가 된 이후 절대 권력자가 된 것에는 시진핑의 정치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총서기가 된 2012년에는 사람들은 그가 강력한 지도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공청단이나 상하이방 계파 소속이 아니라서 2012년 당시에는 자기 세력이 없었고 온화한 이미지를 내세우며 몸을 낮춰 적을 만들지 않아 당내 계파들의 타협으로 총서기가 되었기 때문이다.[17] 공산당 서열 2위이자 국무원의 총리인 리커창은 사실 성격이 호탕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시진핑은 내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무색무취하고 안정지향적으로 보였다. 때문에 계파의 타협을 통해 총서기가 된 시진핑은 집단지도체제의 허수아비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임자였던 후진타오도 유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덩샤오핑이 죽기 전에 장쩌민의 후계자로 직접 지목했다는 정통성이 있었고 공청단이라는 지지 세력이 있었던 반면 그런 스토리와 뒷배경이 없었던 시진핑은 후진타오보다도 약한 지도자가 될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2011년~2012년 당시 기사들을 보면 시진핑은 '조심스럽다', '튀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고, 위키리크스에서는 중국 공산당 내부자들로부터 지도력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총서기 취임 이후에도 반부패 운동 초기에는 '권위를 세우기 위한 일시적인 백일 엄포로 고위직은 무사할 것'이라는 과소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자기 성격까지 숨기며 몸을 낮추던 시진핑은 총서기 취임 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내 생각에 나와 당신은 성격이 닮았다."고 말하며 절대 권력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랑이든 파리든 모조리 때려잡겠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반부패 정책을 펴기 시작해 자신의 정적들을 차례차례 숙청해 나가며 반대 세력을 일소했다. 물론 자기 밑에 있던 지지 세력들이 저지르는 부패 행위는 봐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8년 3월 11일에는 개헌을 통해 국가주석직은 세 번 이상 맡을 수 없다는 조항을 삭제하여 종신 집권으로 가는 문까지 열어버렸다.[18]

그리고 권력에 환장한 탓인지 패권주의를 추구하다가 여기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점과 그의 뻘짓으로 인해 중국의 이미지를 제대로 망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정치력 평가

시진핑이 주석 등극 이전까지 대권 후보로는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원래 성격 자체도 굉장히 조용한 인물이다. 후진타오 시대에 태자당의 선두주자였던 보시라이가 스스로 무리수를 범하다가 몰락하지 않았다면 시진핑은 절대 대권 주자로 발돋움할 수 없었다는 평이 있을 정도다.

시진핑은 푸젠성 위 부서기 출신으로 중국 공산당 중앙 후보 위원 150명 중에서 151등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진핑이 특채 위원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관례상 150명만 뽑는 중앙위 후보 위원 자리에 당 고위 간부들이 시진핑을 억지로 밀어넣어서 151위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 원로였던 아버지 시중쉰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은 불문가지다.

애초에 태자당 출신에 당 고위 간부들의 배후 지원까지 받는 중앙 후보 위원이면 승승장구하는 세습 엘리트의 전형이지 핸디캡을 논할 계제가 아니다.[19]

다만, 잘해봐야 말석으로나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할 수 있었던 사람이 대권을 잡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원래 금수저인 시진핑이 당 고위 간부에 진입하는 것은 쉬웠어도, 당 최고위직은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본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공산당 내부의 살벌한 경쟁을 뚫어야 하며, 이것을 뚫고 대권을 장악한 것은 아버지 덕이 아니라 혈통 외의 시대적 운이 따라줬고 본인이 이루어낸 것이다. 물론 보시라이의 자충수와 파벌 간 타협이 필요한 시대적 상황이라는 운이 따랐음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한마디로 운도 좋았지만 그 운이 다가왔을 때 놓치지 않고 거머쥘만큼 능력도 있긴 있었다는 것이다.

생애

1953년 베이징에서 혁명 원로로 부총리였던 시중쉰의 아들로 태어났다.태어나지 말았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원래 섬서성의 토착 공산주의자로 류즈단(劉志丹, 1903.10.4 - 1936.4.14)[20]과 함께 해방구를 건설했다. 이후 중국 최남단에 있던 장시 소비에트가 국민당군이 철저히 준비하여 추진한 제5차 초공작전으로 삽시간에 붕괴하면서 공산당 지도부가 대장정을 거쳐 섬서성으로 피신해 오자, 시중쉰은 혁명의 새로운 근거지를 건설했다는 공로로 일약 당고위직에 진입한다.

시중쉰은 동료 공산당원 하오밍주(郝明珠)와 결혼했다가 1남 2녀를 낳았다. 1943년 이혼하고 1944년 치심(齐心)과 재혼했다. 시중쉰은 치신과 2남 2녀를 두는데, 시진핑은 그 중 셋째이다. 그러니까 총 3남 4녀 중에서 6번째 자녀이다.

1962년 소설 류즈단 필화 사건[21]에서 시중쉰이 펑더화이파[22]로 몰려서 반당(反黨) 집단의 낙인이 찍혀 오지로 귀양갔고, 당시 16살이었던 시진핑도 아버지를 따라 산시 성 시골로 하방(추방)되어 불행한 시절을 보냈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 당시 시진핑이 토굴에서 7년간 힘겹게 살았다고 한다. 어렵게 산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가 실각해서 평민이 되었는 데다가,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아버지가 마오에게 대약진운동에 대해 항의하다가 실각해서 대역죄인으로 찍힌 펑더화이의 부하에다가 반동을 미화한 소설을 펴낸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에, 가족 전체가 박해를 받았다. 이때, 아버지가 전처와 낳은 이복 맏누나 시허핑(习和平)은 이때 '반동의 딸'로 홍위병에게 두들겨 맞다가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시진핑도 이 당시 상당히 힘든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싯적부터 리더십이 있었는지 하방 당한 곳에서 노동자들을 지도하여 최고의 생산량을 올렸다고 한다.[23] 아버지가 반동으로 찍혔기 때문에 입당 신청을 했으나, 여러 번 퇴짜를 맞다가 문화대혁명이 완화된 1973년에야 겨우 입당했다. 이어 베이징으로 올라와 1975년 칭화대학의 화공과에 입학했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화궈펑이 정권을 잡고 중앙군사위 주석, 당 총서기, 국무원 총리 세자리를 모두 장악했지만 화궈펑은 리더십이 모자랐기 때문에 결국 1979년 부총리였던 덩샤오핑에 의해 실각했고, 실권은 부총리이자 인민정치협상위원회(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全国委员会)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이 장악했다. 덩샤오핑은 부총리던 1978년 1962년 이래 16년간 죽 야인으로 지냈던 시중쉰을 정계로 복귀시켰고, 시중쉰은 1970년대 말부터 당고위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즈음 대학을 졸업하게된 시진핑도 당당히 태자당에 진입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3년 후인 1982년부터 허베이성의 정딩현의 당부서기를 맡는 것을 시작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이후 허베이성을 거쳤다가 1990년대부터는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보이는 남부로 전직했다. 그리하여 푸젠 성, 저장 성 등 동남부 지방 정부에서 지냈는데, 2007년 상하이시 당위서기를 지내면서 장쩌민과 주룽지의 파벌인 상하이방과도 관계를 맺게 되어 태자당과 상하이방 양쪽의 후원을 받는 거물로 성장했다. 2008년에는 국가 부주석 직에 올랐다. 하지만 이때까지 보시라이와 리커창에 비해 외국에 덜 알려졌으며 한국에서도 그가 중국의 주석에 오를 것으로 미리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부주석을 지냈던 쩡칭훙 외에도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지지와 후원 모두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주석 겸 정협의장으로 있다가 2010년에 당 중앙 군사위 부주석 직에 오르면서 후진타오를 이을 차기 지도자로 공인되었다.

영국 주재 대사의 딸이었던 첫 아내와는 성격 차이로 이혼했고, 재혼한 현 부인 펑리위안은 중국 인민해방군 예술단 소속의 가수[24]로 중국의 국민 가수로 불리는 사람인데, 펑리위안의 인기도 시진핑의 권력 상승에 도움이 되었다.

 

집권

시진핑의 집권은 이전 주석들인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미묘한 권력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날 상하이방의 장쩌민이 공청단의 후진타오에게 정권을 양도한 것은 본인이 원해서 양도해 준 것이 아니었다. 덩샤오핑이 생전에 장쩌민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되 후진타오를 장쩌민의 후계자로 하는 조건으로 정권을 인수인계해줬기 때문이었다.

이에 장쩌민은 정권 자체는 후진타오에게 인계해주었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들은 대부분 상하이방으로 채우는 꼼수를 썼고 결국, 후진타오를 반쪽짜리 주석으로 만들어 버리는 데 성공했다. 4세대 지도부가 출범할때 이 4세대 지도부의 9명중 6명이 전부 상하이방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2006년 장쩌민이 차기 주석으로 밀던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가 비리 문제로 낙마해 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말하자면 후진타오의 공청단이 일격을 가한 것이다. 천량위의 비리 수준은 장쩌민조차도 실드를 쳐주지 못할 정도였기에 그로서도 이 숙청을 막기는 불가항력이었다.

후진타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해 2007년에 17차 공산당 대회에서 기회를 놓칠새라 자기가 후계자로 밀던 공청단의 리커창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리커창을 주석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쩌민과 상하이방으로서는 리커창의 집권만은 막아야 했기 때문. 결국 상하이방도, 공청단도 아닌 태자당의 시진핑이 대안으로 올라오고, 리커창은 주석이 되지 못하고 총리로 만족해야 했다.[26]

시진핑의 빠른 부상엔 후진타오의 협조도 한몫 했다. 후진타오 주석은 주석직에는 2003년에 올랐으나, 장쩌민이 권력을 내놓지 않겠다고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바람에 5년 동안 반쪽짜리 권력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시진핑은 2013년 중국 공산당 제18회 당 대회 때 후진타오로부터 당 총서기와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주석 자리를 동시에 이양받았고, 2013년 3월 후진타오의 국가 주석 임기가 끝나면서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국가 주석 직도 승계하였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2013년 3월 14일부터 다른 일이 없는 한 2018년 3월 14일의 연임을 거쳐서 2023년 3월 14일까지 중국과 중국 공산당 전체를 이끌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조용하고 관리형 주석으로 보였던 시진핑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며 10년 임기는 물론이고 종신임기까지 바라보는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는 후술한다.

어록

각급 지도간부들은 모두 자신을 엄격히 단속하고 권력을 엄격히 사용하며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고 또한 일함에 있어 실속이 있고 착실하게 창업하며 성실해야 한다.
2014년 3월 9일 안휘대표단 심의 참가 때.
신형의 정부와 기업가 관계를 총화하면 바로 ‘친(亲)’과 ‘청(清)’ 두 글자이다.
2016년 3월 4일 중국민주건국회, 공상업연합회 위원 방문 때.
자신의 눈을 아끼듯이 민족단결을 아끼고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듯이 민족단결을 소중히 여기며 석류알처럼 굳게 뭉쳐야 한다.
2017년 3월 10일 신강대표단 심의 참가 때.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했다.
2017년 8월 1일 인민해방군 건군 90주년을 맞아 국영 매체로 생중계된 베이징 인민대회당 기념식 연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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