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배우 겸 가수.
장국영의 한자 표기는 張國榮(간자체로는 张国荣). 영어로는 Leslie Cheung(레슬리 청)이었다.[] 레슬리 라는 이름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애슐리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레슬리 하워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중성적인 이름이라 마음에 들었다고. 광동어식 예명을 살려서 Leslie Cheung Kwok-wing(레슬리 청궉윙)이라 하기도 한다. 홍콩 영화계를 빛낸 여러 스타들의 동판이 있는 홍콩 스타의 거리에는 한자와 영어 이름만 있어서, 그의 영어 이름과 한자를 모른다면 못 알아보기도 한다. 레슬리(Leslie) 이전에는 바비(Bobby)라는 예명을 썼다. 언론에서는 표준중국어의 표기법을 따라 장궈룽이라고도 표현하는데, 대중들은 압도적으로 장국영 내지는 레슬리 청이라고 부른다
생전 중화권을 대표하는 미남 스타이다.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엄청난 동안이자 미중년이었으며, 실제로 설운도보다 나이가 2살 많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14]다. 현재 살아있다면 64세다. 손석희, 유동근, 톰 행크스와 동갑.
정식적으로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한 후 RTV(麗的電視, ATV의 전신)와 계약하지만, 방송국과 영 조합이 맞지 않았는지 그에게 약 6~7년 간 무명기간이 존재한다. 전 매니저인 '진숙분'은 TV에서 우연히 장국영을 보고, "귀엽고 잘생긴 청년이 열심히 하는 게 맘에 들어" 그에게 협업을 제안한다. 그렇게 소속을 TVB로 바꾸고, 화성레코드와 계약하여 1983년 <풍계속취>로 제대로 된 성공을 맛본다. 물론 이 성공이 '우연히 좋은 매니저 만나서 된 것'은 아니고, 당시 화성레코드 소속이었던 매염방을 포함한 가수들이 비행기 타고 각 국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스스로를 홍보한 결과이다.
매염방과 진숙분이 회고하기를, 당시에는 "행사 뛰는 것=밤무대"였고, 소속사는 하루에도 스케쥴을 마구잡이로 돌렸다고 한다. 덕분에 비행기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고소공포증이 있던 장국영은 국경을 넘나드는 그러한 스케쥴을 더욱 더 힘들어 했다고 한다. 매염방은 그런 그를 위해 비행기 의자 밑에서는 자신이 자고, 장국영은 의자 위에서 자는 배려를 했고, 장국영은 어둠과 혼자 있는 것을 무서워하는 매염방을 위해 방 두개가 뚫린 방을 예약하곤 스탠드를 약하게 켜서 그녀를 배려했다고 한다. 이렇게 밤낮으로 힘든 일정을 열심히 소화한 결과가 누적되어 홍보도 되고 실력 또한 높이게 된 것이다.
<풍계속취>는 가수로서 장국영을 메인으로 올려놓을 만큼 히트한 곡이지만, 우리나라의 '10대 가요제'와 같은 홍콩의 십대 경가금곡 시상식에서 11위를 하는 바람에 상을 타지는 못했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후술.
그렇게 하여 칼을 갈고 나온 노래가 1984년 <MONICA>. 진숙분이 상을 못타 분해하던 장국영을 위해 일본 원곡의 판권을 사서 그에게 어울리는 홍보활동을 하였고, 그렇게 초대박을 터트린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음악들은 가요 시상식에서 반드시 수상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었고, 특히 1987년 나온 《Summer Romance》의 판매량은 단일 앨범 기준으로 당시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라고 한다. 《천녀유혼》 삽입곡은 물론이거니와 <무심수면>이라는, 장국영 본인 입으로 '가장 히트한 곡'으로 언급한 곡도 포함되어 있다. 장국영 본인은 자신의 가장 궁극적 목표로 '가수로 성공하는 것'을 언급했고, 가장 이상적인 직업은 '가수'라고 하였을 만큼 장국영에게 음악은 메인이요, 배우는 당시 홍콩 분위기 상 해야하는 덤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가수 부문에서 후에 레전드를 찍는 장학우의 폭발적인 가창력을 부러워했고, 장학우 역시 장국영의 연기력을 부러워하여 금방 친해졌다고 한다. 장학우는 2002년 즈음부터 장국영 사망 직전까지, 우울증을 겪는 그를 위해 자주 그의 자택으로 가서 어울렸을 만큼 장국영에게 고마운 사람 중 한 명이다.
여튼 목표였던 가수로서는 레전드를 찍었고, 《영웅본색》의 OST인 '당년정', '분향미래일자'가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유명하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가수활동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만, 중화권에서는 80~90년대의 가왕 3인방으로 알란 탐, 매염방, 그리고 장국영을 꼽을 정도이다.
1985년부터 가수로서 안정된 성공을 보장받기 시작하자, 배우 쪽에도 신경쓰기 시작한다. 《(장국영의) 위니종정》은 장국영의 음악과 연기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히트한 작품이며, 제목에서 아예 (장국영의)라는 걸 붙여 온전히 그의 작품이라는 것으로 홍보를 할 정도였다. 후에 장국영은 <위니종정>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동업자와 함께 개업하였는데, 이곳은 장국영의 물건들, 팬들의 방문 흔적들로 장식이 되어있었거니와, 종종 장국영이 와서 팬들과 간이 팬미팅을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배우로서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연기력 자체도 제대로 인정 받기 시작했다. 이 두 작품을 장국영의 가수 성공 후 주욱 이어진 인기의 연장선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이 두 작품은 장국영이 '얻어 걸린 것'이기 보다는, 오우삼 감독이 장국영의 잠재력을 보고 1983년에 이미 《영웅본색》에 캐스팅이 된 상황이었고, 《천녀유혼》으로 인한 폭발적 인기 역시 9개월 간을 밤샘 촬영하여 고생하였던 것에 대해 보상받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상까지 탔으면 좋았겠지만, 그의 상복을 생각하면...오죽하면 1988년 콘서트에서 "혼자 상을 못받았다"며 약간 투정부리듯 했을까.
사실 장국영은 웬만한 메인 시상식에서는 한 번씩 상을 탔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수의 최고 명예인 금침상도 1999~2000년이 돼서야 받았고, 오죽하면 인터뷰에서 "당신의 금침상은 10년 전에 받았어야 했던 것 아닌가요?"라며 기자가 질문을 했을까. 더욱이 장국영은 2002년, <명보>사[16]에서 신설한 <연예동력대장> 시상식에서 《이도공간》으로 첫 수상자가 되었는데, 이 사실을 장국영에게 알리자 "나랑 친해서 준 거 아니냐?"라고 말하면서도 굉장히 기뻐했다고 한다.
여튼 당시에는 없었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가녀린 청년 이미지로 아시아 전역에서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엄청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장국영을 따라 5:5 가르마[]를 유행처럼 하고 다녔고,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며 빨간 물감 흐트리면서 공중전화에서 피를 흘리며 '송-호-연'을 외치다가 부스 담당이 오면 얼른 튀어버리던 학창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이종원의 <리복> CF와 함께 당시 남학생들이 가장 많이 따라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확 뜬 이후에는 본인이 좋아하는 시나리오를 고를 수 있어서 좋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데뷔작인 《홍루춘상춘》은 삼합회에 의해 강제적으로 찍었고, 그 뒤로 《갈채》, 《실업생》, 《연분》 등등으로 이어지는 청춘물은 본인이 이것저것 가릴 처지도 아니었거니와 돈이 필요했기에 들어오는 대로 받았다고 한다. 다만, 1980년 RTV에서 방영했던 이벽화(릴리안 리)[] 작가의 《아가적여인》과 홍콩에서 거장으로 추앙받는 담가명 감독의 1982년 작 《열화청춘》은 장국영 배우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갖는다. 바로 《아가적여인》을 보고 담가명 감독, 그리고 왕가위 감독이 장국영에게 팍 꽂혔다고 밝혔기 때문. 당시의 미남 기준으로는 좀 다른 방향으로 귀공자, 꽃미남 스타일에 연약한 느낌을 갖고 있기도 했고, 사실 장국영과 비슷한 느낌의 배우는 당시에는 아예 없었다고 봐도 된다. 《열화청춘》은 제 2회 홍콩 금상장 시상식에서 장국영을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게 해준, 장국영 배우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될 작품이다. 실제로도 장국영은 《열화청춘》을 실질적인 본인의 영화 데뷔작으로 언급한 바가 있다.
1990년 은퇴 선언을 했다가 다시 복귀한 이후에는 스케일이 큰 상업영화나 홍콩 느와르 영화보다 작가주의 색이 짙은 예술영화나 저예산 영화에 주로 출연하였다. 물론 왕가위 감독과 '천카이거' 감독이 만들어 준 길이긴 하나, 장국영 본인의 노력과 재능으로 왕가위 시리즈의 첫 도입을 《아비정전》으로 안정감있게 이끌어 주었으며《패왕별희》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으로 이끈 주역이기도 했다.
실제로 왕가위 감독은 항상 시나리오를 쓸 때 장국영을 주연으로 생각하고 집필한다고 밝혔는데 장국영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애증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 《해피투게더》 역시 사실 장국영이 연기한 '보영'의 시점에서 극을 이끌어나가려 하였는데, 장국영이 홍콩 콘서트 때문에 본인 분량을 먼저 찍고 가버려 보충이 안되는 상황. 분량의 모자람은 왕가위 특유의 질질 끌기 때문이었고, 결국 주연이 뒤바뀌어 버린다. 장국영은 홍콩 콘서트가 끝나고 아르헨티나에 다시 가서 약 열흘간 늘어진 자신의 분량을 연기한다.
여튼 이 애증의 관계에서 장국영 본인이 언급하기로, 《아비정전》 때 유덕화와의 추격씬을 위해 필리핀까지 날아가서 촬영을 하였는데, 갑자기 왕가위 감독이 촬영 직전 "연기할 때 지붕 조심하라고, 몇 군데 구멍이 있더라고" 웃으면서 말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땅에서 20미터 위면 낮은 것도 아닌데 말을 미리 했어야지 참 황당했다고. 또한 《동사서독》을 촬영할 땐 중국의 사막으로 가서 찍었는데, 투명한 어린 전갈이 장국영의 목 뒤에 붙어있더란다. 검은 전갈이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고. 그리고 《해피투게더》 촬영 당시엔, 남미의 위생이 그리 나쁜지 몰라서 예방접종도 안하고 그냥 갔는데, 도착 3일째부터 설사가 시작되고, 약먹을 때만 괜찮아지고 하면서 증세가 반복되기에 근 3주간을 죽과 계란 흰자만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해피투게더》를 보면 굉장히 말라보이는 장국영을 볼 수가 있다. 장국영은 웃으면서 왕가위 감독과 1번만 더 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는 왕가위 감독과 일하지 않겠다고 농담을 던졌는데 괜히 기레기들에게 떡밥만 제공한 꼴이 되어버렸다. 예정대로 《중경삼림》을 했다면 어찌 되었을지 소름.
천카이거 감독 역시 장국영 사망 뉴스를 접하고, "말도 안된다. 이건 완전히 (패왕별희의) 데이 아닌가." 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또한 장국영을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제작한 작품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 작품이 《무극》에서 사정봉 역할이 아닐까 팬들은 추측하고 있다. 물론 장국영이 받았을지는 의문이다. 그것은 《매란방》도 마찬가지. 한 번 했던 캐릭터는 웬만해서 다시 하지 않고 다양한 역할을 하려고 하는 장국영이기에 아마도 안 받았을 확률이 높다. 물론 장국영이 지인들이 제안하는 시나리오를 단칼에 거절하지는 못했기에 오랫동안 제작자 '황백명'의 작품[]에 불려다녔고, 결국 장국영이 '하세편'은 찍기 너무 힘들다라는 말 한마디로 더 이상 하세편에는 출연하지 않는다. 죽기 직전 그의 말기 3작품인 《색정남녀》, 《창왕》, 《이도공간》과 관련된 '이동승' 감독 혹은 제작의 작품을 거절하지 않고 찍은 것도 있다.
《색정남녀》는 베를린 영화제의 경쟁부문 후보였는데, 사실 영화 자체는 완벽하지도 않고 영화가 거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러한 거칠고 서툰 느낌나는 연출이 오히려 이 영화의 메인 줄거리인 '3급 영화 찍기'와 많이 어울렸으며, 예상할 수 없는 스토리와 적당한 유머 그리고 배우들의 호연으로 꽤나 괜찮은 작품이 탄생하였다. 당시 장국영 말고는 다들 신인이었고 심지어 촬영감독으로 나오는 분은 진짜 촬영감독이었다고. 지금은 중화권 대스타가 된 서기와 개성있는 연기자로 큰 막문위는 이 작품이 첫 데뷔작이었고. 한마디로 배우 쪽에서는 장국영이 모든 걸 이끌어야 하는 상황. 그는 감독 연습에 의의를 두어 촬영장에서도 연출부에서 할 법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의 인연으로 1996~1997년 콘서트에서는 서기와 막문위가 특별 게스트로 나와 섹시하면서도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영화 패왕별희로 칸 영화제에 초청되어, 칸의 상징인 선착장에서 천카이거 감독과 장국영이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를 하는 분이 장국영이 홍콩에서 얼마나 유명한 배우인지 모르고, 이런 훌륭한 배우를 어디서 발굴했는지 질문을 하는데, 아마도 이때 장국영은 헐리웃에 진출하더라도[21]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구나. 차라리 현재처럼 홍콩의 넘버원으로 남는게 낫다고 생각하였다고 밝힌 바있다.
참고로 《패왕별희》는 모든 것이 완벽했고, 연출진들, 스탭부터 경극 관련 장국영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까지 모두 신뢰할 만한 사람들로만 채워져 있어서 좋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 뒤로 북경에만 가면 패왕별희 스탭진들이 장국영의 초대로 모여 즐겁게 즐기다 갔다고 한다. 아니, 영화나 드라마를 오래 찍었으니 막내 스탭진들까지 챙기기는 힘들었을 텐데 장국영은 그런 막내진들까지 이름을 외우고 연락을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하겠다. 대스타 임에도 특별한 대우도 받지 않고 스탭들이 도시락을 먹고 있으면 같이 먹고 수다도 떨고 그러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부분이 나중에 장국영의 자살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바가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
또한 기자협회에서 만약 장국영이 예쁘지 않았다면 망했을 거라고 언급될 정도로 매우 아름답다. 실제로 장국영은 칸 황금종려상을 받고 자신의 메이크업과 북경어 지도 전담이자 중국의 경극단에서 1급 경극원으로 생활하던 '송소천'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덕분에 예쁘게 나와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아시아의 톱스타
'홍콩직물왕' 이라 불리는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말론 브란도, 알프레드 히치콕도 옷감을 주문할 정도의 명성을 자랑했지만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았고 첩도 있었다. 부모와의 나이차도 컸고 누나와 형들에게 치여 외롭게 자라면서 유모를 친부모보다 더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유모와는 평생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은 이런 성장환경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리즈 대학교에서 유학했으나 아버지의 건강악화로[] 중퇴하고 1976년부터 연예계의 문을 두드렸다. 정식 데뷔는 1977년 참가한 아시아 가요제였다. <American Pie>로 무려 2위에 오르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홍콩 RTV와 계약한 후 다양한 드라마에 출연하나 대중들에게 임팩트를 주진 못했다. 덕분에 1977, 78, 79년 한국 포함 아시아를 두루 다니며 인지도 향상을 꾀했다. 그가 치고 딱히 올라온 계기는 그를 처음 보고 잠재력을 느낀 매니저 진숙분과 의기투합한 이후이며, RTV에서 TVB로 이적하여 연기와 가수 활동 모두 주류로 올라섰다.
실제로 이때 즈음에 장국영은 정말 생각치도 않은 굴욕을 당한 바가 있다. 아직 장국영은 그냥 뜨지 못한 그저그런 무명 연예인이었고, 장국영과 비슷한 또래였고 인기도 훨씬 많았던 '진백강'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노래와 춤을 하였다. 문제는 한창 신이 난 장국영이 자신의 모자를 관객석으로 던진 것이다. 그렇다면 대다수가 싫어하더라도 수많은 관객들 중 한명쯤은 기념으로 가질만 한데 정작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 명도 그 모자를 갖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바로 무대 위로 모자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 때, 장국영은 다짐을 굳건히 하면서 꼭 성공해야 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983년, 홍콩 십대 경가금곡 시상식에서 장국영 본인은 스탭진이 알려준 대로 그냥 앞자리에 앉았을 뿐인데 앞자리에서 유일하게 상을 받지 못했던 장국영은 눈물까지 흘리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굴욕들을 발판삼아 그 다음 해부터 장국영은 <MONICA>로 기어이 가수로서 엄청난 성공을 맞게 된다. 또한 《백발마녀전》의 주제가 <홍안백발>과 《금지옥엽》의 주제가 <추>를 작곡하고 히트시켜 대만 금마장과 홍콩 금상장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후에도 될 수 있으면 본인이 직접 대부분을 작곡하려고 한단다. 그렇게 장국영은 가수로 먼저 성공한 탓에 중화권에서는 장국영을 가수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워낙 가수로서도 레전드고 배우로는 두 말 하면 입아플 정도.
가수로 성공한 후, 영화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게된 건 1986년 오우삼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과 1987년 정소동 감독의 《천녀유혼》에 출연하면서였다. 《천녀유혼》에서 왕조현과 물속에서 키스를 하던 장면은 홍콩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키스 씬으로 뽑히기도 했다.
장국영이 지금까지도 탑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다른 배우들에게 기대서 성공하지 않고 본인이 홍콩 영화의 붐을 이끌었다는 데 기여가 있어서이다. 실제로 다른 스타들보다 일찍 사망한 탓에 실적에서는 밀릴지 모르나 중화권, 그리고 범아시아적으로 장국영 본인이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홍콩 영화를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즐기면서 최고의 인기를 얻게 한 공신이기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쿄 콘서트에서 천안문 6.4 항쟁에 대해서 중국 정부를 비난하는 한편 삼합회의 영화계 진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발언을 한 것이 논란이 되었는데 실제로 원래부터 장국영의 성격은 매우 솔직한 편이었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전 매니저 진숙분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편이라 많은 오해와 적지 않은 문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매스컴과도 사이가 안 좋았다. 한 쪽만 적으로 만들어도 위험할 판에 그는 좌충우돌하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때마침 장국영의 콘서트에서 팬 중 하나가 알란 탐의 팬과 주먹다짐을 하다가 사망한다. 홍콩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 장국영 같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연예인은 연예계를 은퇴해야 한다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자기 편도 하나 없었을 뿐 더러 이미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장국영은[] 1990년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 은퇴 콘서트는 비디오로도 나와 있는데 무대를 옮겨 다니면서 사방을 둘러싼 팬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는 장국영을 볼 수 있다.
본래 장국영은 은퇴 콘서트 후 연예계 자체에서 발을 빼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매니저인 진숙분은 장국영이 이미 화려한 연예계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캐나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보도 자료를 배포할 때 완전 은퇴가 아닌 가수로서만 은퇴하는 내용으로 배포했고 계속 영화 스케쥴을 잡아줬다고 한다. 그녀의 예상대로 장국영은 곧 아무도 자신을 몰라주는 캐나다 생활에 지루함을 느꼈다고 한다.
가수 은퇴 이후, 장국영은 아이돌 태생의 배우라는 한계를 딛고 《아비정전》[], 《동사서독》, 《패왕별희》, 《춘광사설》 등 당시 홍콩 영화들 중에서도 굵직굵직한 작품들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선보임으로써 아시아 전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1995년에는 가수로도 복귀하여 《A Thousand Dreams Of You》[], 《추(追)》, 《유심인(有心人)》, 《좌우수(左右手)》, 《아(我)》 등의 히트곡을 내놓는다.
특히 가수로 복귀한 후 발매한 《총애 장국영》 앨범은 우리나라에서도 50만장 이상 팔렸던 엄청난 히트작이었다. 그래서 장국영은 콘서트 투어를 하거나 꼭 크게는 아니더라도 미니 콘서트처럼 한국에서 자신의 콘서트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당시에는 비싼 표를 사서 콘서트를 관람한다는 것에 낯선 한국인들이라 매니저 진숙분은 수익성이 없다며 2000년 열정 투어에서 빼버린다. 냉정할세
장국영은 대외적으로는 내성적이고 낯을 가렸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나 스태프들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매너가 좋은 데다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인격자' 그 자체로 통했다고 한다. 삼합회에 관련된 사람도 많고 각종 괴짜들이 넘쳐나는 홍콩 연예계인데 그런 사람들조차 기를 못 펴고 착하게 굴도록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다만 둘도 없는 절친이었던 진백강[]과는 데뷔 이후 서로 사이가 틀어져 한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촬영 당시 한 컷도 서로 같이 찍지 않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93년 진백강이 우울증으로 인한 약물 및 알콜 중독으로 고생할 때 화해했다. 이 일화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
장국영과 진백강은 서로 다양한 작품에서 같이 캐스팅되어 여러가지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친해졌는데, 문제는 장국영이 뭔 팩폭 할지 항상 두려운 토크쇼(...). 진백강과 장국영이 같이 토크쇼에 나갔을 때, 진백강이 자신의 피부는 타고났기에 관리하지 않고 화장품도 거의 안쓴다고 언급한다. 그러자 장국영이 아니라고, 진백강을 가까이서 보면 화장도 잘하고 매일 피부를 위해 케어를 받는다고 하자 진백강은 굉장히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났다고 한다. 장국영도 별거 아닌데 화를 내는 건 너무하는 거 아니냐. 라고 하면서 서로 절교했다고 한다. 심지어 진백강 주연, 장국영 조연으로 캐스팅되었던 《성탄쾌락》 때는 진백강이 여러가지 조건을 내달았다고 한다. 그 중에서는 "절대 두 사람의 모습을 동시에 잡지 말 것", "같이 찍는 것은 근거리든 원거리든 무조건 안 됨" 등등이 있었다고 한다. 여튼 《성탄쾌락》은 당해 가장 관객이 많이 든 히트작인데 이런 비하인드가 있었다.
1989년에 오리온제과에서 나온 초콜릿 '투유' 광고에 출연해서 수많은 소녀 팬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었다. 한국에서 투유 초콜릿 광고를 촬영할 때 촬영장을 방문하는 기자들이나 관계자들에게 손수 초콜릿을 나누어 주며 연습한 한국어로 열심히 인사를 하고 일일이 챙겨주고 배려하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당시 오리온에서는 초콜릿을 먹고 실제로 본인이 겪은 사랑의 사연을 보내주는 사람들에게 추첨을 통해 장국영의 마지막 콘서트 티켓을 주는 마케팅을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이 초콜릿은 불티나게 팔렸다. 투유 노래는 한국 한정 싱글이었지만 보통화와 광둥어 2가지 버전으로 발매됐다.
같은 해에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해 이선희와 합동 공연을 했고(풀버전 영상), 당시 인기 최정상을 달리던 쟈니 윤 쇼에도 출연했다.
사실 유명세를 얻기 이전인 1978년과 1979년에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아시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국제가요제를 개최하였는데, 한국의 MBC 주관 국제가요제에 2년 연속 출전했던 것.
커밍 아웃
장국영(오른쪽)과 그의 오랜 친구 당학덕(왼쪽).
공식적으로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힌 적은 없지만, 인터뷰 중 연예인의 양성애에 대한 질문을 받자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나도 그 상대방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중요치 않다. 만일 남녀 모두 ok라면, 기회는 두 배가 되는데 뭐가 안 좋다는 것인가"라고 한 발언과 2000년 《타임》지에 본인이 "나는 '양성적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등의 발언들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커밍아웃했다.
공연을 할 때 빨간 하이힐을 신고 나온 적이 있다. 본인은 데이비드 보위의 퍼포먼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으나 정작 보위는 훗날 자신의 양성애가 사실 컨셉이었고 흑역사라고까지 밝혔다. 하지만 장국영은 의상 디자이너가 컨셉을 잡아주자 "이런 걸 해봐도 괜찮을 듯? 이라 생각하였다고 한다."
커밍아웃 반론
그는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서 확연하게 동성애자다, 양성애자다라고 확정지어 말한 적이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남녀를 떠나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이 엄청나다는 점을 세간에서 상업적으로 이용했으며 그로 인해 판매부수를 늘린 찌라시 언론사가 많다는 점이다. 이는 매염방이 장국영 사후 <명보>와 가졌던 인터뷰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황색언론이 과도하게 집착하는 그의 성 지향성은 단순 가십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이며 사후에도 여전히 그에 대한 논란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또한, 데이빗 보위의 퍼포먼스를 따라한 것도 그냥 겉모습만 따라한 것일 수도 있기에 모호하다. 데이빗 보위 특유의 인터섹슈얼한 이미지는 장국영뿐만 아니라 일본의 사와다 켄지도 시도한 적 있었다. 게다가 보위는 실제 양성애를 컨셉으로 잡은 적은 있으나 젊은 시절 한때 일이고 행적을 보면 이성애자에 가까웠다. 상술했듯 말년에는 심지어 "양성애는 음악 활동을 위한 컨셉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장국영은 당학덕을 연인으로 인정한 적이 없고 항상 부정했으며 동성연애는 모두 당학덕이 언급한 것들이다. 당학덕은 1983년 1월 초부터 연인관계가 시작되었다고 추도사에서 밝혔으나 장국영은 당시 꾸준히 여자친구가 있었으며, 모순균 이외에도 프로포즈를 한 여성도 더 있었다.
실제로 연예계 데뷔 후 첫사랑이자 짝사랑인 '모순균'은 장국영에게 사랑의 열병과 함께 아픔을 준 여인이다. RTV에서 1977년 방영한 《애정고사지: 19세》에 서로의 파트너로 연기를 펼쳤고 장국영이 모순균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다. 장국영 20세, 모순균 17세 때의 일인데, 장국영은 어떻게든 만남을 지속하기 위해 드라마 고위간부 찬스를 써서 그녀의 연락처와 취향 등을 알아내고는 프로포즈 성공을 위해 열심히 물밑 작업을 한다. 모순균의 가족들에게도 온갖 정성을 보였고 특히 남동생이나 아버님을 집중 공략하여 프로포즈 성공률을 높이려 하였다. 하지만 친해진 지 몇개월 되지 않아 바로 프로포즈 모드로 들어갔고, 모순균이 "우린 아직 어리다"는 말로 프로포즈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땐 정말 죽고 싶었다고.
2001년, 모순균의 토크쇼에 출연해 만일 당신이 내 프로포즈를 허락했다면 지금쯤 내 삶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다.참고로 장국영뿐만 아니라 모순균도 또한 2번의 이혼과 3번의 결혼으로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았다.
그리고 홍콩 언론지였던 '명보'에서 1980년, 장국영과 '설이'의 스캔들을 직접 취재한 적이 있다. 솔직한 장국영은 당연히 쿨하게 인정했다.
그 후, RTV에서 대놓고 커플로 밀고 나가서 화제성을 잡으려고 했던 모델 출신 배우 '예시배'와 약 2년 간 사귄 적도 있다. 예시배와는 《요철신탐》, 《첨첨입사미》, 《대대호》에서 호흡을 맞추었으며, 그 드라마들이 끝나서 애정이 식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헤어진 후엔 예시배가 다른 에이전시와 계약하여 대만으로 갔다. 그런데 그 후 장국영이 《영웅본색》 시상식 참가 때문에 대만으로 가서 기자회견을 하였을 때, 어떤 기자가 "예시배와 헤어진 후 연락을 주고 받은 적이 있냐?"고 물었고, 장국영은 연락하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내심 본인에게 아직도 미련이 있다는 식의 말을 해줬으면 하였으나 위의 단호한 인터뷰 때문에 그가 본인에게 미련이 없다고 느끼자 예시배는 자살시도를 하였다. 다행히도 실패.
또한 장국영이 은퇴하고 캐나다로 간 것도 좋아하던 이성이 미국에서 유학한다고 하자 그쪽에서 잘해서 결혼까지 하기 위해 따라갔던 게 큰 이유. 이 부분은 고별콘서트 당시 한국 기자와 인터뷰하며 드러난 사실이다.[30] 아마 진숙분이 그가 연예계로 돌아올 거라고 확신한 것도 그 여성과 장국영이 잘못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당학덕 말대로 진짜 둘이 연인 관계였다고 하면 그것은 꾸준히 장국영의 여자친구였던 사람들을 물먹이는 행동밖에 되지 않는다. 분명한 건 당학덕과 장국영이 연인 사이라는 증거 자체가 없으며 2000년 열정 투어를 위해 외국으로 나가기 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한 기자가 "당학덕도 같이 가는 거냐?"라고 물었을 때, 장국영은 여러번 관계를 부정했음에도 또 이런 질문이 나오자 "나는 당선생 말고도 친한 친구가 많다."며 크게 화낸 부분도 있다.
거짓말 같은 바보
感情所困 無心戀愛世
마음이 피곤해 세상을 사랑할 마음이 없다.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은 자신이 머물던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香港文華東方酒店) 24층 객실에서 몸을 던져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향년 46세.
공교롭게도 이 날이 만우절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처음엔 거짓말로 여기고 그의 사망 소식을 믿지 않다가 뒤늦게 사실임을 알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31] 또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9시간 만에 홍콩에서 6명의 팬이 그를 따라서 투신했고 그 중 5명이 사망했다. 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권의 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 사스(SARS)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4월 5일 열린 추도식에는 전 세계에서 수많은 팬들이 찾아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특히 함께 《영웅본색》에서 호흡을 맞추었던 주윤발은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와서 장례식에 참석했다.
국내에서도 송광사에서 49재를 치르려고 했으나 SARS 확산 우려의 이유로 무산되었으며, 5월 2일에 일산에서 국내 장국영 팬들이 모인 가운데 천도재(遷度齋)가 열렸다.
4월 1일 기일과, 9월 12일 그의 생일에는 많은 팬들이 영상회나 파티를 열고 장국영을 응원하고 있다. 장국영은 일본팬도 많았기에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할 수 있는 동력이 되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만 사진집 3권, 패션투어 콘서트, 희귀작 DVD 발매, 등이 이루어졌다.
의문점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무성한 소문들이 떠돌았는데, 삼합회에서 살해했다는 음모론부터 천안문 발언 등 공산당에 비판적이었던 탓에 중국 정부가 살해했다는 설, 그의 동성 애인이라고 알려진 당학덕(唐鶴德)이 유산을 노리고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실제로 캐나다 정부에서 홍콩 영화배우들을 삼합회와 연관이 있다며 이민을 거부했다는 루머가 돌 때도 장국영만은 유일하게 이민 허가가 내려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삼합회가 영화판에 뛰어드는 것에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장국영이 삼합회에 치를 떤 이유는 그의 영화 데뷔작 《홍루춘상춘》이 중국 고전 《홍루몽》의 에로 버젼이었는데, 영화 수준도 조악했지만 삼합회 관련 스탭들이 가수로 활동하고 있던 장국영을 협박하다시피해서 영화를 찍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은퇴번복 후 처음 출연한 《가유희사》는 필름탈취를 겪기도 했고, 생전 인터뷰에서 삼합회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장국영이 감독 데뷔를 하려해도 삼합회와 연결되어 있는 대다수의 홍콩 영화 투자자들이 투자를 하지 않아 계속 제작이 미뤄지다가 막판에 겨우 중국의 사업가인 '석설'에게 투자를 받아 준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국영의 죽음으로 그의 재산 460억을 물려받은 당학덕은 평소 삼합회의 행사에 모습을 자주 드러냈었다.
실제로도 수상한 점이 상당히 많다. #
경찰은 '장국영의 유서가 발견되었다'라고 밝혔지만, 이 유서는 현재까지 전문(全文)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장국영은 심한 고소공포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24층에서 투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국영을 아는 사람들과 팬들은 모두 믿지 않았다. 실제로 장국영은 비행기를 탈 때가 가장 무섭다고 언급한 적도 있고, 실제로 같이 탔던 사람들은 장국영이 이 정도로 심한 고소공포증인가 싶어 놀랐다고 한다. 또한 2~3층 높이의 바닷가 바위나 나즈막한 옥상에서도 촬영하는 걸 힘들어했다.
장국영이 24층에서 투신한 호텔은 중간 부분이 튀어 나온 구조라서 정상적으로 떨어져 죽은 것이라면 호텔 앞에서 시신이 발견돼야 정상이지만 장국영의 시신은 마치 멀리뛰기라도 한 듯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아스팔트 위에서 발견되었다.
반박: 법의학에 대한 지식 부족 때문에 생겨난 오류이다. 각종 법의학 교양 서적들 때문에 제법 알려진 사실인데, 자살자가 투신할 때 드라마나 영화처럼 아래를 보면서 그대로 몸을 던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땅을 보면서 그대로 몸을 던지는 일은 엄청난 공포를 유발하기 때문에 제정신으로는 실행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대부분의 투신자살자는 추락지점 한참 뒤에서 달려와서 앞으로 점프하듯이 뛰어내리기 때문에, 이 항목에 적힌 장국영의 사례처럼 ‘마치 멀리뛰기라도 한 듯 건물에서 멀리 떨어져’ 추락사 하는 쪽이 오히려 정상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의혹이라고 할 수 없다.
재반박: 실제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을 보면, 튕겨나갈 부분이 헬스장 창문 열고 나오면 24층 바로 아래 넓은 공간이 하나 있고, 또 떨어지다보면 3층 높이에 카페 발코니가 하나 있으며, 그 아래는 택시가 모여있거나 하는 블로킹 구역이 하나 더 나온다. 그런데도 추락사 후에도 30여분간 호흡이 붙어있었고, 피가 적게 쏟아졌고, 추락사의 경우, 몸에서 무거운 머리가 먼저 떨어지며 큰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아니, 모두 다 뇌수와 함께 많은 피들이 터진다. 상대적으로 머리가 온전했다는 점은 의심할 만 하다.
사람이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굉장히 큰 소리가 나야 하는데, 정작 호텔 현관 앞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현관 도어맨은 아무 소리도 못 들어서 신원이 불분명한 행인이 시신을 최초로 발견했다.
투신해서 죽은 것 치고는 혈흔이 너무 적었다. 다만 의사나 전문가들의 의견에 의하면 투신해서 죽어도 혈흔이 꼭 많지는 않다고 한다.
24층 정도의 높은 높이에서 낙하하면 보통 신체에서 가장 무거운 부분인 머리로 떨어지게 되는데,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이 TV에 중계되었을 때 잠시 노출된 장국영의 시신은 머리 부분에 외상이 거의 없었다. 이에 논란이 일자 당시 경찰은 기자회견에서 발부터 떨어져서 그렇다고 밝혔다.
그의 매니저였던 진숙분 역시 "장국영은 사망 전 스케줄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라며 보통 자살할 사람의 행적이 아닌 평상시와 다름없는 행동을 했다고 밝혔다.
또한 진숙분은 사망 당일 그가 사망하기 10분 전인 오후 6시 30분에 장국영과 통화했는데, 그는 주차장에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 말이 맞다면 장국영은 차를 주차한 뒤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계단을 이용해 24층까지 뛰어 올라간 뒤 바로 투신했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장국영과 비슷한 체형을 가진 남자가 실험해봤는데, 주차장에서 지하도를 거쳐서 호텔 입구까지 오는 데만 9분이 걸렸다고 한다. 항간에는 호텔 주변에 있는 스타페리 주차장이면 10분 안에 도착할 확률이 높아진다고는 한다. 물론 장국영이 주차장에 있다고 거짓말을 했을 확률이 더 높아보인다만.
사건 당일 그의 친구이자 유산상속인이었던 당학덕의 행적 또한 여러 점에서 의문을 갖게 했다. 장국영 사망 당시 당학덕은 그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장국영이 사망하던 날 그와 배드민턴을 치기로 약속했었다고 알리바이를 댔지만 그가 말한 시간은 이미 장국영과 매니저가 2004년 장학우 콘서트 게스트 출연에 관한 내용을 상의하기 위한 약속을 잡아 놓고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의 관리인이나 응급 구조요원의 말을 종합해보면, 장국영의 첫째 누나인 장녹평이나 당학덕이 병원에 왔었다는 건 사실이 아니며, 어디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응급 구조요원은 3명이 병원에 왔었는데, 한 명은 장국영의 로드매니저 격인 '케네스', 그리고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보낸 책임자, 그리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성 한 명이 왔었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 여성은 진숙분일 가능성이 크다. 여튼 장국영이 사망하기 얼마 전에는 당학덕과 장국영 두 사람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장국영의 죽기 전 마지막 생일파티에 진숙분과 함께 참여하지 않은 사실도 있고.[36] 장국영 사망 며칠 전 당학덕과 장국영이 심하게 싸우는 걸 봤다는 목격자도 나타났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과 증거들로 보아, 어떤 법의학자는 "누군가 장국영을 둔기로 살해한 뒤, 현장에 시신을 유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장국영의 사망 직후 장국영의 조카 알리사가 '평소 장국영이 우울증을 앓아 왔고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 라고 밝혔고, 장국영이 사망한 당일 점심을 함께 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막화병에게 "죽고 싶을 땐 수면제보다는 뛰어내리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오전 중에 운전을 하다가 어디론가 확 부딪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살 이유가 우울증이었다고 하면 의외로 간단해지는데, 자살은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이며, 사람들 앞에서는 끝까지 평상시와 다름 없이 행동하려 하기 때문에 일정이나 다른 것을 자살을 대비해서 정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37] 그래서 자살 직전까지도 주위 사람이 평소 알아차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고통스러운 일로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은 주변에 자살의 위험 신호를 많이 보내지만, 만성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다들 '원래 저런 사람인가 보다' 하는 면도 없지 않고, 또 이렇게 일상 생활을 잘 영위하다 갑자기 죽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자살의 징후가 나타나긴 하지만 주변에서 알아차릴 만큼이 못 되는 편. 국내에서도 모 대학 학생이 수업 중인 학교의 건물에서 투신자살을 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해당 학생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자살 당일에도 학교에 수업을 받으러 왔었다.
문제는 "왜 우울증이 생겼는가?"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중국 대륙출신의 사업가 '석설' 이 장국영이 오랫동안 염원하던 자신의 영화 감독[]의 꿈을 이뤄줄거라 생각했고, 석설 또한 돈은 문제가 아니니 열심히 제작해보라며 장국영을 응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장국영은 알려졌다시피 본인에게 잘해주는 사람이거나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한없이 사랑을 주는 타입인데, 석설 역시 장국영에게 (적어도 그의 눈에 보이기에는) 무한한 신뢰를 주는 사람이었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알게 된지 2년이나 지났음에도 별 독촉없이 기다려주고, 장국영의 오랜 팬을 자처했으며, 본인 일에 관해서는 바쁜 와중에도 항상 큰 금액을 쏟아부으며 식사도 하고 장소물색도 같이 하는 그런 사람을 장국영이 싫어했을리 만무하다. 그런데 이 석설이란 인간이 웬만한 사기꾼들도 혀를 내두를만 한 스케일 큰 사기꾼이었다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었을 것이다.
2002년 2월 중순, 홍콩중문대학에서 이벽화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강의에 특별 초대되어 《아가적여인》, 《연지구》, 《패왕별희》의 이야기들을 진짜 교수처럼 술술 이야기하던 모습, 그리고 3월 초순에 곧 이루어질 자신의 감독 입봉에 대해 들떠서 이야기하고 자신감을 내보였던 인터뷰, 3월 중후반 《이도공간》에 관한 무대인사와 인터뷰에 관한 스케쥴 조정 등에서 보여주었던 장국영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또한 이 즈음 장국영은 홍콩에서 제작을 돕겠다는 제작사를 만나지만, 이미 대부분 크랭크인 준비가 끝난 시점이고 너무 막판이라 석설의 투자를 믿고 거부하였다. 또한 석설은 차기작까지 지원을 약속했으니 얼마나 장국영 입장에서 든든해 했을지는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다양한 문제로[39] 계속 영화 제작이 미뤄지다가 어찌저찌 봉합이 되어 4월 초부터 크랭크인이 가능했던 부분이었고, 이번만큼은 확실하다 싶어 모든 배우들과 스탭진들이 스탠바이 상태였는데, 바로 그때 석설이 구속되는 바람에 영화 제작이 아예 물거품이 된것이다. 석설의 구속은 2002년 3월 30일에 걸려 들어가서 세간에서 <3.30 사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어쩜 타이밍이 이리 완벽한지. 여튼 이 비리사건에 연루되어 투자를 중단하여 영화 제작이 사실상 취소되었다. 그 자존심 강하고 자존감이 높던 장국영은 홍콩 제작사를 다시 찾아가나, 이미 그 제작사는 다른 영화에 투자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받기까지 했다. 결국 이에 크게 실망한 장국영이 자살을 선택했다고 결론이 모아지고 있다.
하지만 영화 제작 무산 하나로 이유를 대기엔 더욱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실제로 영화 제작이 좌절되자, 《아가적여인》, 《연지구》를 같이 작업했고, 《패왕별희》 제작시, 다른 이들이 존 론[]을 외칠 때, 실제로도 장국영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패왕별희》를 집필하였기에 장국영을 강력히 원했고, 결국 성사시킨 이벽화 작가는 장국영이 감독의 꿈이 크다는 걸 알고, 시카고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은 《아가적여인》 리메이크의 감독으로 활동하길 바랬다. 그걸 도와주기 위해 본 시나리오를 1년여간 수정하여 2003년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또한 서극 감독은 몇 번 다른 시나리오 등을 수집하여 보내다가, 장국영이 1년 이상 전부터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읽지도 않는다는 걸 알고, 장국영을 위해 직접 감독 시나리오를 호텔로 가져가서는 부인이자 영화 제작자 시남생, 콜롬비아 영화사 아시아 배급 담당자와 함께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결국 본인이 선택한 시나리오가 물거품 되었다는 상처가 있긴 하나, 그의 감독 활동이 완전히 막혔던 건 아니었던 것이다. 실질적 무명 생활을 8년이나 겪고선, 온갖 굴욕에도 당당하게 활동하던 장국영과도 캐릭터가 맞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제작 무산의 가장 큰 이유였던 석설의 구속과(이 사건으로 석설은 2008년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와 관련된 약 20여명의 구속 및 처벌. 장국영 영화에 투자하고자 했던 약 300억원의 자금이 실제로는 비리 사기사건의 비자금이었던 것들이 나름의 선을 지키며 도덕적으로 살아왔던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책임감으로 다가와 우울증을 확대시켰다고 보는 게 맞을 수 있다.
또한 석설의 구속 이후, 그 사기꾼의 행보가 그날 이후부터 줄줄 나오기 시작한 것이 장국영에게는 큰 상실감이었을 것이다. 그 사기꾼을 2년 이상 믿었고, 인간적으로 좋아했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도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도 슬픈 에피소드가 있는데, 아직 투자 무산이 되기 전, 본인의 지인들에게 석설을 소개시켜준 적이 있다. 그런데 장국영이 영화 이야기를 하면, 석설이 호언장담하며 자신이 그 꿈을 이뤄주겠다고 하는 부분이 지인들에게는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다고 한다. 제작 및 투자자의 입장에서야 이미 석설이 관금붕 감독, 장예모 감독과 같이 일한 적이 있으니 그 지인들도 자금적인 부분이나 비리사건까지는 몰랐겠지만,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를 두고자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더란다. 그런데 드디어 제대로 된 감독을 하게 되어 항상 기분이 업되어 있던 장국영에게 "정확하게 알아보라고" 말하기 힘들었던 모양. 그리고 결국 일이 터진 것이다.
후에 막화병의 인터뷰에서 장국영이 "악마에 홀렸다"라고 본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는데, 이 악마가 무엇이었는지는 장국영의 사망과 유서 전문 비공개로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정황상 석설로 추측된다. 장국영에게만은 한없이 잔인했던 홍콩 언론측이 이 좋은 먹잇감을 놓칠리도 없거니와, 워낙 큰 비리사건이었는지라 장국영이 전혀 몰랐다 하더라도 일종의 비토와 도덕적 책임론이 대두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주요 캐스팅(영정[41], 호군[], 심전하[])을 해놓고, 스탭들도 《패왕별희》 스탭진 뿐만 아니라 각 국에서 유명한 정예 군단으로 정해놓고 촬영하려 하였으나, 영화의 크랭크인이 자꾸 밀리면서 그들이 다른 작품을 못하게 되었다거나 하는 스케쥴적인 부분 역시 장국영이 괴로워했던 부분일 것이다. 본인 때문에 적어도 50여명의 스탭진, 캐스팅된 배우들에게 민폐를 끼친 부분이니 말이다. 또한 가수의 입장에서는 유니버셜에서 계약한 대로 1장의 앨범을 마지막으로 내야 했던 것도 스트레스의 요인. 실제로 '황요명'과의 공동 작업이라 어떻게든 둘의 스케쥴이 맞을 때 녹음을 했어야 하나, 장국영의 몸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녹음이 자꾸 미뤄지기도 하였다. 심지어 정작 가장 중요했던 남자 주인공의 경우 아직 시나리오가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의를 한 배우들로부터 죄다 거절을 당했는데, 이 남주인공 역할의 물망에 오른 배우들 중에는 의외로 한국 배우 송승헌도 있었다. 송승헌의 경우 직접 캐스팅제의를 하기 위해 장국영 본인이 2002년경 한국을 방문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송승헌 측에서 스케줄과 불투명한 시나리오때문에 결국 거절했다고 한다. 이 당시 송승헌은 <일단 뛰어>라는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는데 장국영이 직접 송승헌을 보기 위해 <일단 뛰어> 촬영 현장을 방문했었다고 한다.
완벽주의자였던 장국영은 이것저것 문제들은 자꾸 늘어나고, 그 일들을 수습도 못하고 계속 혼자 삭히면서 고민을 하였고, 결국 돌아오지 못할 선택을 해버린 건 아닌지. 덧붙여서 장국영은 대부분의 친목 활동에서 본인이 주도하였고, 그의 완벽함도 《패왕별희》처럼 좋은 시너지로 나올 수도 있으나, 잘 되지 않는 일이 있어 얼른 포기하는 게 나은 문제에도 끝까지 자기가 해결하기 위해 집착을 보여왔던 것도 이러한 성격 때문은 아닌지 조심스럽다. 이 부분은 송소천과 막화병의 인터뷰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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