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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동 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1. 5. 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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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33대 국무총리.

 

1934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현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에서 아버지 이정호(李貞鎬)[4]와 어머니 평강 채씨 채병숙(蔡秉淑)[] 사이의 4남 4녀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복고등학교(29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58년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이후 판사, 검사로 근무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계에 입문하였고 1981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연천군-포천군-가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홍성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이후 총재비서실장,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한국국민당 김용채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6년 원내총무에 임명되었다. 1987년 대한민국 국회 운영위원장이 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경기도 연천군-포천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정책위의장이 되었다. 또한 같은 해 12월부터 1989년 7월까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자 민자당 소속 정치인이 되었다. 민정당 출신이라 민정계 인사로 분류되기는 했으나, 민주계 인사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등 계파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정치 행보를 보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4년에는 민주자유당 원내총무에 임명되었고, 이춘구의 국회부의장 사임으로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제14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대선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 출마하여 제법 세몰이를 했으나, 1차 투표에서 정확히 8표차이로 2위 이인제에 밀린 3위를 차지하며 후보가 되지 못했다.[6][7]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 총재 체제에 반기를 들고 한나라당을 탈당[8]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고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5월 국무총리에 지명되었고 헌정사상 첫 인사청문회를 거쳐 정식으로 총리에 취임했다.

2001년 9월에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로 DJP연합이 붕괴되자 고심 끝에 내각에 잔류해 국무총리직에 전념할 것을 발표했다. 이에 자민련은 당의 총재이자 국무총리인 이한동을 당에서 제명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듬해 7월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이후 무소속 의원으로 있다가, 2002년 9월에 하나로국민연합을 창당하여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0.3%의 지지율을 기록하면서 낙선하였다. 이후 국회의원임기 종료를 앞두고, 2004년 2월에 다시 자민련에 복당했다. 이후 비례대표 출마를 결심했으나, 이내 포기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정계를 은퇴하고, 법무법인 남명 대표변호사로 근무하다가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에 복당하여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였다. 이후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자유한국당을 거쳐 미래통합당 소속 이후 2021년 별세하기 전까지 국민의힘 상임고문이었다.

 

사망

2021년 5월 8일 낮 12시 30분 쯤,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이며 빈소는 건국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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