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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봉 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1. 9. 2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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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가수. 트로트와 발라드 그 중간의 간극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메운 트롯발라드의 선구자.

어린 시절부터 가수로 데뷔하기까지

1955년 7월 11일에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음악을 했던 집안이었고, 아버지, 큰아버지, 고모 등도 모두 음악을 했을 정도로 후덜덜한 음악가 집안이었다. 이런 집안의 환경 속에서 그녀도 음악인의 삶을 걷게 된다. 주 전공은 재즈였는데, 최고의 음악가들만 설수있다는 미8군 무대에 로큰롤 밴드 "논스톱"의 드러머로 서기도 했었다. 그녀를 트로트 가수로만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드럼을 치는 모습에 깜놀하기도 했는데 이런 뒷배경이 있었기 때문. '드럼을 치는 여성 보컬리스트'로 카펜터즈의 캐런 카펜터와 함께 이야기되기도 한다.

한편, 심수봉은 당초 서산초등학교를 다녔으나, 그녀의 어머니가 이혼[10] 후 이사하게 되자, 어머니를 따라 2학년 때 서울 은로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후, 영등포에 있던 여중에 입학했으나 입원 치료를 위해 또다시 2년 휴학을 했다. 뒷날 인천 인화여자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여 만 19세인 1974년에 고교 졸업을 했다.

1975년에 박정희가 청와대 연회에 심수봉을 불러서 노래를 시킨 일이 계기가 되어 음반을 내게 된다. 심수봉은 음악적인 재능이 매우 뛰어나서 여러 악기에 능통했으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일을 했는데, 청와대 연회는 이러한 일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심수봉은 그 연회에서 나훈아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을 가수 나훈아 본인[]이 듣고 감탄하여 음반작업을 주선해준다. 이듬해인 1975년에 신세계 레코드를 통한 음반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결국 음반 작업은 취소되었다.

심수봉은 같은 해 만 20세의 나이로 대입준비를 하여 숙명여자대학교 작곡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재수 끝에 명지대학교에 경영학과에 입학한다.

1978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 MBC 대학가요제에 참여했다.당시 영상 보기[12] 당시 대부분의 대학가요제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의 음악적 성향이 포크나 록이었던 시절에 심수봉은 자신의 주 전공인 재즈가 아닌 트로트로 도전장을 던졌으나 상을 받지는 못했다. 심사위원이 좋은 점수를 안 준 이유는 '너무 프로스러워서'였다. 지금이야 이해하기 힘든 평이지만 당시 대학가요제의 심사기준은 대학생의 풋풋함이었기 때문에 심수봉의 세련된 음악과는 상당히 간극이 컸던게 사실이다. 그런데 1회 대상 수상자 자격으로 게스트 출연을 했던 여병섭(샌드페블즈의 보컬리스트)이 수상 발표 때에 대기실에서 심수봉 옆에 있었기에 표정을 볼 수 있었는데, 금상까지 자신의 이름이 발표되지 않자 대상이라고 확신해서 오히려 더 기뻐했다고 한다.[]

음악을 들어보면 피아노와 보컬만으로 빅밴드를 압도할 뿐 아니라 악단은 화성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굴욕을 보인다. 여병섭에 따르면, 악단의 연주 실력 때문에 생긴 사고가 아니라 편곡 과정에서 생긴 불상사였다. 악단이 준비한 편곡이 불만이었던 심수봉이 공연 시작 전까지 악단장과 말싸움을 했다고 한다. 결국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각자 알아서 공연에 임하다 보니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 대학가요제에서 부른 《그때 그 사람》이 히트하면서 가수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때 그녀와 겨뤘던 출연자들이 후덜덜한데 임백천, 노사연, 배철수 등이다. 이들은 대상은 못 탔으나 다들 이후에 가수로 데뷔했다. 대상은 부산대학교 중창단 썰물이 수상했고, 노사연이 금상, 배철수가 소속된 그룹 활주로가 은상을 받았다.
"이 바닥이 어떤 곳인줄 알고 왔느냐.. 이 험한 곳에서 잘 버텨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가수 나훈아. 심수봉이 대학가요제에서 부른 노래가 인기를 끌며 정식으로 데뷔하자 건넨 말.

《그때 그 사람》이 히트를 하면서 그녀는 인기 연예인으로 발돋움했고 박정희도 그녀를 좋아해서 궁정동 안가에서 열던 술자리에 그녀를 불렀다.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박 대통령이 심수봉이 못 생겼다며 병풍 뒤에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썰. 허나 이후 본인이 90년대 초반 토크쇼에 게스트로 출연 했을 때 허무맹랑한 소문이라고 직접 해명하였다. 하지만 박정희와 만난 뒤부터, 심수봉은 온갖 시련에 휩싸인다

 

음악성

비음을 잘 쓰는 가수로 유명하다. 피아노 연주 실력이 상당하며, 방송에서도 곧잘 솜씨를 선보이곤 했다.

트로트 가수이지만 보기 드물게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도 가지고 있는 가수로 그녀의 히트곡들은 거의 대부분 그녀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들이다. 보통 유명한 트로트 가수더라도 자기 스스로가 곡을 써서 부르기 보다는 유명 작곡가의 곡을 받아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심수봉은 상술됐다시피 이미 악기를 다루는 능력부터 먼치킨스러우니 자기 스스로가 곡을 쓸 수 있는 능력이 된다. 그러다보니 심수봉의 곡은 단순 트로트 곡이 아닌 것이다. 여타 트로트 가수를 뛰어넘는 그야말로 '아티스트'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심수봉에 비견할만한 남자 트로트 싱어송라이터로는 설운도가 있다.)

11집에 수록된 '여자라서 웃어요'는 에픽하이와 같이 작업하기도 했다. 심수봉의 노래와 랩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편.

대표곡으로는《그때 그 사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사랑밖엔 난 몰라》, 《미워요》, 《비나리》, 《무궁화》 등이 있다. 후배가수들도 심수봉의 곡을 많이 리메이크 하지만, 아무리 다른 가수가 리메이크 해도 심수봉의 원곡을 뛰어넘는 것은 무리라는데에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또한 리메이크도 간혹 하는데, 《백만송이 장미》는 러시아 가요[17]를 번안하여 히트를 쳤고, 조성모의 히트곡인《후회》도 심수봉 특유의 스타일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10.26 사건 때 박정희와 술자리를 가졌던 이유로 80년대 정치적으로 탄압받으면서 그녀의 인생은 파란으로 점철되었고 그런 이유인지 그녀의 노래들은 애절하기 이를데 없는 노래들이 많다. 이런 이유인지 그녀의 애절한 노래들은 나올 때마다 히트하면서 그녀를 국민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불후의 명곡 2 첫방송때 첫번째 전설로 등장했다.[] 당시 이창민, 종현, 예성, 효린, 양요섭, 아이유가 리메이크에 도전했다.

이후 7년 동안 음반 활동을 간간히 하다가 2018 (내삶은 빛나기 시작했다)라는 신곡 앨범을 냈다. 그 앨범 중 "'엄마 사랑해요'''라는 곡이 있는데 그 곡을 발표하고 1년 후 심수봉의 친모가 돌아가셨다. 그 외 (알이랑 With god), (Love of to night), (울어라/헤세드), (아빠) 라는 곡을 선사하여 LP판은 333개 한정으로 신곡을 발매하였다.

2019년도에 유희열의 스케치북 성탄절 특집에 출연하였고 여전히 고운 목소리를 이용해 명불허전의 공연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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