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정치인, 관료
1942년 6월 5일,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인 박종식(朴鍾殖, 1910년 ~ 1948년)으로 199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재미 사업가
1948년 아버지를 여의고 진도에서 목포로 이주해서 문태고등학교, 광주교육대학, 단국대학교 상학과를 졸업하였다. 1970년 대학 졸업 후 럭키금성상사[], 동서양행 등 기업에서 근무했다.[] 이후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피혁과 가발 수출 사업을 운영하면서 80년대 초 뉴욕 한인회장과 미주지역한인회 총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방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맨해튼에 투자를 해서 건물 5채를 매입할 정도의 자산가였고, 이 재산이 이후의 정치 생활 밑천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 박지원은 당시부터 정계 진출에 꿈이 있었는데, 그래서 만났던 사람이 놀랍게도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었다. 박지원은 전경환과 가깝게 지냈고, 실제로 1981년 11대 총선 당시 전경환의 도움으로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전국구(지금의 비례대표) 공천을 받으려고 했었으나 해외교포라는 결격 사유로 인해 좌절되었다.
그러던 중 1983년, 미국으로 망명한 김대중을 김경재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고, 박지원은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전해들은 뒤, 통렬하게 반성했고[], 그 후 김대중의 후원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지며 김대중이 사면되자, 박지원 역시 미국에서의 사업을 모두 정리한 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DJ의 오른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돼 등원하였다.[] 1996년에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는데, 그 당시 상대가 다름아닌 김문수였다.
하지만,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대변인으로 대언론 소통창구를 맡았으며, 김대중 정부 출범 후에는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중용돼, 기존의 동교동계 가신[]들이 관여하기 어려운 부분에[] 뛰어들어 틈을 메꾸는 역할을 맡았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 때는 북한 측이 조의화환과 함께 공개적으로 보내온 편지의[] 수신자 두 사람(임동원[], 박지원) 중 1인이었을 만큼 DJ의 최측근으로 간주되었다.[]
2019년 서거 전까지 이희호 여사의 병세를 가장 먼저 관심갖고 지켜보는 입장일 정도로, DJ 사후에도 10년째 완벽한 DJ의 심복임을 행동으로 자처하고 있다.
재기와 분당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목포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장장 16년 만에 국회에 복귀하였다. 이후 통합민주당에 복당했다. 그리고 복당 인사에 당시 고작 재선에 불과했음에도 2010년 5월, 원내대표에 당선되었다. 이후 2010년 7월 28일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자 당시 대표였던 정세균이 사퇴를 했고, 결국 임시로 다음 전당 대회까지 비상대책위원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 5월 민주통합당의 19대 첫 원내대표에 선출되었는데, 이때 초대 지도부가 총선 패배로 인해 모두 사퇴한 상황이었기에 임시로 다음 전당 대회까지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또) 역임하게 되었다. 전당 대회를 통해 새롭게 당선된 이해찬 대표와의 담합 의혹이 있기도 했었다. 그리고 대선 패배 이후 원내대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참패하자 김한길,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사임하고 뒤를 이었던 박영선 전 원내대표 겸 국민공감혁신위원장마저도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은 문희상 전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선거에 뛰어들었으나, 2015년 2월 8일에 열린 새정치민주연합의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상임고문과 맞서 2위로 석패했다.
2016년 1월 22일에 민주당을 탈당하고, 3월 2일 국민의당에 합류했다.박지원, 국민의당 입당키로…18번째 현역
국민의당 합류 이후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당선되어 4선의 중진이 되었다. 2016년 4월 27일, 경기도 양평군에서 열린 국민의당 20대 국회의원 당선인 워크숍에서 러닝메이트인 정책위의장에 추대된 김성식 당선인과 함께 원내대표로 만장일치 합의추대되었다. 이로써 박 의원은 2010년 민주당(18대 국회), 2012년 민주통합당(19대 국회)에 이어 2016년 국민의당(20대 국회)까지 이례적으로 3번이나 원내대표를 맡는 진기록을 세웠다. # 2016년 6월 29일 천정배, 안철수 공동대표가 사퇴하였고, 박지원은 만장일치로 원내대표를 겸하면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16년 12월 5일 부로 김동철에게 비상대책위원장을 이임하였다. 곧바로 국민의당 전당대회에 당대표로 출마하기 위해 원내대표직도 사임하였다.
그리고 2017년 1월 15일, 국민의당 전국당원대표자회의에서 1인 2표제, 당원 전체 투표로 200% 중 61.58%의 득표율, 국민의당의 2대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이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인생 중 처음으로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정식당 대표가 된 것이기도 했다. 과거 당 대표 직함은 비상대책위원장직이 전부였으니, 비록 국민의당이 원내 3당이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청년 시절 목표('야당 대표')를 이룬 원로의 정치인이 되었다.
2017년 5월 10일,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2기 지도부가 총사퇴를 결의하면서 박지원 본인 역시 당대표에서 물러났다.
문재인 정부 시기
2017년 9월 12일의 대정부질문에서는 무리한 주장을 펼치는 다른 야당 의원들과 달리, 이낙연 전 총리와 제대로 된 질의응답을 주고받아 그나마 좀 낫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사실, 이낙연 전 총리는 박지원의 후임 대변인으로 같이 한솥밥을 먹었고, 이 전 총리가 동교동 출입기자였을 때는 박지원 전 대변인이 자리를 종종 마련해 기자들과 만나곤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박지원이 민주당을 탈당한 후에도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날인 11일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로 인해 국민의당과 안철수 대표가 여론의 비판을 자초하고 있고, 박지원 본인도 언론 인터뷰에서 사태의 책임을 청와대와 여당에게 전가하는 발언을[]해서 그나마 훈훈한 이런 장면도 묻히고 있다.
2017년 추석 연휴 동안 전남 곳곳을 돌아보며 민생 행보를 펼쳤기 때문에 전남도지사 출마에 대한 마음을 굳힌 것 아니냐는 평가를 받았는데, 10월 10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국민의당이 지방선거에 승리하지 않으면 존폐가 의심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기왕에 말씀드린 대로 안철수, 손학규, 천정배, 정동영, 박지원. 이런 당대표급 인사들이 이번에는 전면에서 뛰는 것이 좋다. 그래서 한번 이끌고 가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다"며 강하게 출마 의사를 보였다. 그래서 민주평화당과 정의당의 공동교섭단체에도 부정적인 의사를 표출했는데, 교섭단체를 만들려면 자신이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 그러나 이후 입장을 선회해서 지사직에는 불출마하였다.
2018년 2월 민주평화당 창당 이후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문모닝을 보여주고 있는데, SNS나 인터뷰를 통해 문재인 정부의 정책, 특히 대북 정책에 든든하게 뒷받침 해주고 있다. 가끔가다 보면 남들 모르게 복당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남북정상회담이 합의되자 ”저래서 문재인이 대통령됐구나, 역시 나보다 낫다고 인정한다“고 누가보면 민주당 논평이 아니고 싶은 정도로 극찬했다. 물론, 박 전 의원이 대북 송금 사건으로 처벌 까지 받았는데도 지금도 자신의 정치 목표는 햇볕정책을 통한 한반도 평화 정착이라고 하는 사람이지만, 외부적으로 봤을 때는 차기 전남지사 출마를 위한 포석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압도적이다. 아무래도 호남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낮아도 80%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라...
실제로 문 전 대통령의 복심이자 최측근으로 알려진 양정철 전 비서관의 북콘서트 게스트로 등장해서 대놓고 민주당과의 연대를 말하며 민주당에 구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 의원의 이러한 행보에 넷상의 민주당 지지자들의 반응은 "응 안돼"로 종합 할 수 있겠다. 민주당 역시 내부적으로 일부를 제외하고는 합쳐서 재적 과반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과 당 지지율이 압도적인데 굳이... 하는 분위기로 알려졌다.
딴지일보 김어준 대표가 진행하는 TBS의 '김어준의 뉴스공장'과 TV조선의 시사프로그램인 강적들에 자주 게스트로 초빙되고 있다.
2019년 7월에 대안정치연대 소속 비당권파들과 민주평화당을 탈당하기로 했다. 2020년 1월 대안신당 창당일을 결정한 이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서는 대안신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이 합당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흩어져있는 옛 국민의당 세력들의 통합을 주장한 것이다.
2020년 1월 9일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의 윤석열 라인을 겨냥한 검찰인사에 대해서 "역시 추미애답게 통쾌[23]하게 했더라."면서 후속 인사는 차장, 부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제 (정권을 겨냥한) 수사 라인 차장, 부장들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했다.# 다음날인 10일에는 추 장관의 "(윤 총장이) 내 명을 거역했다"라는 발언에 대해 "왕조시대도 아니고 지나친 표현이다."며 비판했고, "수사라인을 좌천성 승진이나 좌천시킨 것은 조금 무리가 아니었나"라고 평가했으며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해서는 대해서는 "버텨야 되고, 버티리라 본다"고 전망했다.# 앞선 2019년 12월에는 유재수·김기현 의혹 수사, 검찰 수사관 사망과 관련해 "마치 '제2의 국정원 댓글 사건'이 되는 것 같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어서는 안 될, 특히 청와대 사정 기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아니냐, 쉽게 간과될 일은 아니다", "감찰 무마 의혹은 조국 사태보다 더 중요한 문제로 갈 것"[24]이라며 "현재 검찰이 수사중이니까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말한바 있다.# 또한 자신도 많은 의혹을 받았지만 무죄로 밝혀진 경험이 있다며, 실체가 있는 의혹인지 검증이 필요하다고도 하였다.#
2020년 1월 안철수가 귀국해서 신당 창당을 선언하자 " 안철수는 새로운 인물이 아니다 " 라고 비판했다. #
21대 총선에서 민생당 후보로 다시 목포에 출마했으나 민주당 김원이 후보에게 패하며 결국 낙선했다. 아직도 화제성이 뛰어나긴 하지만 나이도 너무 많고 민생당 후보들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은퇴 수순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낙선후
고령의 나이인지라 다음 총선 출마도 불투명하고 민생당도 원외정당으로 전락했기에 사실상 정계 은퇴 수순이라는 추측이 돌았으나 일단 박지원은 '영원한 현역'을 선언하며 정계에 간접적으로나마 남아있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 워낙 언변이 좋고 유머가 뛰어나서 의원 시절에도 방송 출연이 잦았던 터라 방송 출연과 SNS 활동을 계속 진행할 것으로 보이고, 상황에 따라서 유튜브를 개설하여 원로 정치인으로서 할 말은 하고 살겠다고 한다.
실제로 낙선 후 지상파와 종편을 가리지 않고 정치 및 시사프로그램에 계속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전반적으로는 문재인 정부를 옹호하는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민주당 윤미향 당선인과 관련하여 발생한 정의기억연대 위안부 피해자 이용 논란에서는 윤미향 당선자와 민주당을 비판하기도 했다.[]
2020년 6월 1일 자로, 모교인 단국대학교 석좌교수에 임명되었다. 대북관계, 국제정세, 국내정치문제를 강의한다고 페이스북을 통해 밝혔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 이후 6월 17일 꽉 막힌 남북관계 해법을 논의하기 위해 문정인 특보, 고유환 통일연구원장, 임동원·박재규·정세현·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박지원 교수 등 원로들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오찬을 가졌다고 한다. #
이후, 일각에선 사의를 표명한 김연철 장관의 후임 통일부장관으로 임명하라는 목소리가 나왔고 총선 직후부터 입각설이 제기되었다. 추미애 법무부장관처럼 국회의원 선수나 그동안의 경력을 보았을 때, 진짜 남북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최후의 카드로 쓸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정치력과 처세술
오랜 정치 경력으로 인해 정치 9단, 족집게, 꾀돌이 등의 별명이 있는 노련한 수완가로 평가된다. MBC의 21대 총선 개표방송인 MBC 선택 2020에서는 아예 8선 같은 4선이라고 표현했다. 깔끔하고 명쾌한 메시지와 능수능란한 정치적인 감각, 상대방의 약점과 흠결을 타격할 수 있는 정보력을 갖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국민의당 시절, 당대표는 안철수, 천정배였지만 국민의당이 제20대 총선에서 호남권의 표를 싹쓸이하고 제대로 된 정당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원내대표로 활약하던 박지원의 공이라는 평이 많다.
실제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거대야당은 더불어민주당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싱크탱크 역할을 하며 정국을 이끌었다. 권력의 곁에 있어보기도, 권력을 가져보기도 한 정치인으로써 그 생리를 잘 알고, 고령이지만 여전히 빠르고 맥을 잘 짚는 상황판단을 보여주고 있다. 2016년 12월 9일 헌정 사상 2번째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진행돼 가결된 후, SBS에서 박지원을 초청해 의견을 묻기도 했다.
정계의 원로로 이 나이까지 살아남은 여의도의 정치 9단이라는 이름은 결코 허풍이 아닌지라 시세를 파악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그 때문에 프로에서 초청되면 차분하지만 매우 예리한 면모를 보인다. 자유한국당/2.27 전당대회에서 모든 선거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기 때문에 당대표 선거 2위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일 것이라고 예측했고 실제로 맞아떨어졌다.
바른정당과 국민의당의 합당후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으며 이후 바른정당이 국민의당에 이어 2차로 자유한국당과 합당하려 할 것이라고 예측을 내놓았다. 이후 바른미래당의 합당 결과가 그리 신통치 않으면서[] 박지원의 예측이 맞았다는 것에 고무되어 이후 바른미래당이 과연 자유한국당과 합쳐질 것도 맞을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쏠렸는데, 결국 그 바른미래당에서 친유계가 새로운보수당 분당 후 21대 총선국면에서 자유한국당과 합당하여 미래통합당이 되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맞춘 셈.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야당 총재 시절부터 대언론소통을 맡아, 기자들과의 접촉이 잦았으며, 정동영전 의원이 갓 정계입문 후 DJ에게 아침보고를 올리고자 출근하면, 전날까지 기자들과 만난 박지원 전 원장 차 안에서 운전사와 졸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고 한다. 또한 기자들과도 곧잘 친근하게 지냈기 때문에, 일설에 따르면 당시 뉴스 기사에서 "야권의 한 고위 관계자"라는 지칭이 나오면, 사람들이 대체로 박지원이라 간주한다고 할 정도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존경해서 그런지 MB정부 시절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공작으로 추정되는 혐의가 생기자 이명박을 공격하는 말을 쏟아내었다. MB정부의 국정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있는지 뒷조사를 하고,[] 노벨평화상 수상 취소 청원을 모의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자신의 SNS에 즉각적으로 "천하의 못된 짓은 다 모아 자행한 MB와 MB정부 주동자, 가담자는 철저히 발본색원, 처벌해야 한다"며 "이미 수상한 DJ 노벨평화상을 취소시키려 모의했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극렬한 반응을 쏟아냈다. 게다가 2017년 국정감사에선 "다스는 MB 거"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하며, 11월 1일에 출연한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선 "내가 미워하는 MB가 곧 구속되게 생기니 기분이 좋다"는 발언으로 대놓고 확인사살. 다만 그러면서도 김 전 대통령의 3남인 김홍걸의 "MB가 아버지의 국장을 마지못해 결정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전면부정하며 "MB가 국장에 적극 협조해줬으며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는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
한때 같은 정당에 몸담았던 문재인 전 대통령과도 사뭇 노선이 달랐다. 민주당 분당과 대북송금 특검 등으로 참여정부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영향이 있는 듯. 2017년 19대 대선 시기에는 '문모닝'으로 대변될만큼 대립각을 세웠고, 후일에 스스로도 "반문의 괴수"였다고 시인할 정도. 19대 대선 당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유세중에 느닷없이 '문재인이 되어야 호남의 정치적 몫을 가져올 수 있다'라며 말실수를 해서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만큼 문 전 대통령을 매우 의식해서 나온 실수라고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는 때로는 지지, 때로는 비판을 하고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지지하는 모습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는 튼튼한 안보와 한미 동맹, 한미일 공조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다."#, "DJ였다면 대일문제(강제징용)를 이렇게 악화시키지 않고 국익을 위해 결단을 내렸을 것."#, 최저임금 인상이나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기조에 대해서는 "한국 경제는 항공모함인데 정부가 고무보트처럼 획 돌려 좌초될 위기."#라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일자리 문제에 대한 정부 대응에 대해서도 비판한바 있다.# #
2017년 4월 북한이 한반도 긴장상황에도 불구하고 열병식을 하면서 ICBM을 공개하자 "제 정신인 거냐"고 비판했다. # 앞선 2월에는 IRBM(중거리 탄도미사일), 3월초에는 사거리로 보아 ICBM(대륙간,장거리)으로 추정되는 미사일을 4발 시험발사하였다. 이에 3월31일 트럼프 정부의 첫 무더기 대북제재 법안이 발효됐으며 같은날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북한은 이란보다 시급한 위협.”이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햇볕정책을 기본으로 한 대북 문제에 대해선 상당한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민주당 시절에는 물론이고 국민의당-민주평화당으로 당적을 옮긴 후에도 이 분야에서 박지원 전 원장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후에도 야당 유력 인사 중에서는 이 대북 문제와 관련해 정부 및 여당과 밀접하게 접촉하는 인사이기도 하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DJ는 외교 강화론자이며 늘 국익을 생각하라 하셨다. DJ는 주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5년)한일회담 찬성, 일본 대중문화 개방, 비난을 감수하며 4대국 보장론을 주장하고 대만과 단교하고 중공과 외교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주창했다. 대중문화 개방으로 한류가 시작됐으며 중국과 외교관계 시작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기여했고, 튼튼한 안보, 한미 동맹, 한미일 공조, 중러의 협력으로 햇볕정책을 이끌었다." 고 그를 회상했다.#
2010년 초 김정일 건강이상설이 대두되며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북한 붕괴 가능성이 제기되었는데, 언론인터뷰에서 박지원은 "북한 붕괴는 잘못된 판단이고, 북한이 붕괴되더라도 누군가는 북한을 이끌고 간다"고 주장했다. 이어 "남북 경제협력 경색으로 남한기업의 손실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중국의 입지"라며 북한이 중국과의 경협을 늘려가는 것에 대해 우려하며 당시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했다.# 12월에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직접 “머지않아 통일이 가까운 것을 느낀다.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며 북한 붕괴와 흡수통일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이후 2011년 12월 김정일의 사망에 이어 김정은이 등장하였다.
2016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북한의 5차 핵실험 직후 북핵문제에 대한 '햇볕정책 책임론'을 제기하자 "이명박, 박근혜 정권 동안 4번의 북한 핵실험이 있었고, 북한 미사일 기술의 진전을 알면서도 속수무책이던 대통령께서 '대화 위해 북에 준 돈이 핵개발 자금 됐다'며 햇볕정책에 책임을 떠 넘기고 있다.", "정부 말대로 하면 북한은 이미 망했거나 오늘 망해야 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동안 준 돈이 없는데 북이 핵 SLBM 미사일 핵잠수함까지 건조해서 실험을 하는건 무엇인가. 경부고속도로에서 사고나면 동작동 국립묘지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로 가서 항의하냐"고 반박한 바 있다.#
2017년 19대 대선을 앞두고 JTBC 인터뷰에서 앵커가 "햇볕정책은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차원에서 시작했던 것 아니었습니까?"라고 묻자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튼튼한 한미 동맹에서 출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후 미국에 가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대북정책을 이렇게 하자고 설득해서 그 결과를 가지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클린턴 메시지를 가지고 6.15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에게 전달했던 겁니다. 그리고 북한의 핵문제는 남북 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북미 간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지금도 주도권이 다시 미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클린턴 대통령 때는 클린턴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설득돼서 이제 대북정책의 운전석에 김대중 대통령이 앉고 자기는 조수석에 앉겠다, 이렇게 합의되어서 한 겁니다. 현재 햇볕정책의 추진이 별로 가능해 보이지는 않지만 미국 정책도 늘 고착되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하는 거죠. 계속 우리는 미국에 대해서 설득을 해야 되고 북한에 대해서도 설득해야죠. 우리는 한미 동맹 속에서 북한과 전쟁을 막고 어떤 무력도발보다는 대화로 해결하자 하는겁니다. 남북 관계 개선은 2000년 6.15 정상회담 정신으로, 북한의 핵 문제는 6자회담 9.19 합의 정신으로 돌아가면 해결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2018년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사안인 페미니즘 문제에 대해서는 '워마드를 이해해야 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또한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의 비하적인 내용이 담긴 악질적 문자 테러를 받았고,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하성 문자 테러를 중단할 것을 경고했다.#
국정원장이 된 이후로도 이 정치력은 어디 가질 않은 모양인지,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와의 만남 이후 일본의 언론들은 "일본 총리 관저의 오산이었다" 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고 한다. # 보통 해외국가정보기관과는 몰래 만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근데 박지원 원장은 아주 대놓고 총리관저 정문으로 들어가 기자들과도 만났다. 아예 '일본 총리를 만나러 간다' 라고 언론에 방일 일정과 취지를 공개까지 했다. 이로 인해 일본 정부는 정보 관리도 제대로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일본의 정부 관계자들은 "어째서 벌써 언론 보도가 나갔는가" 라는 식으로 당황스러워 했다고 한다. 마이니치의 보도에 따르면 일본 총리실 관계자는 박지원 국정원장을 보고 "약았다" 라고 표현을 했다고 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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