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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O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2. 6. 30.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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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서양 조약 기구(北大西洋條約機構)는 1949년 창설하여, 냉전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북미와 유럽 등 서방 국가들의 군사 동맹이다. 본부는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위치하며 수장은 노르웨이 前 총리인 옌스 스톨텐베르그.

소련 붕괴 이후에도 나토는 해체되지 않았다. 소련이 붕괴되긴 했으나 체제만 붕괴된 것인데다 일부 위성국가들이 독립국가를 선포하고 분리된 점만을 제외하고는 소련 국토 자체는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련은 러시아로 국명만 바뀐 채로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나토 존재의 필요성이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했다.

그리고 동구권 국가들을 회원국으로 수용하여 범위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특히 폴란드와 체코, 그리고 헝가리 같이 소련에 대해 이를 갈던 이들 국가들은 냉전이 종식된 이후 곧바로 나토에 가입한다. 여기에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그동안 중립을 표방해 비회원국으로 있던 스웨덴과 핀란드까지 가입을 추진하기로 했다.

흔히 쓰이는 두문자어인 NATO는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의 줄임말로,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등 게르만어군에 속한 나라에선 NATO로 읽지만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루마니아 등 로망스어군에 속한 나라에선 'Organisation du Traité de l'Atlantique Nord'를 줄인 OTAN으로 읽는다. 본래 게르만어군에서 문장을 '사과 두 개'라는 형식으로 읽는다면, 로망스어군에서는 '두 개의 사과'라는 형식으로 읽는다. 때문에 특정 국적이 아닌 나토군 소속으로 참전하는 병력이나 공동소유하는 기체의 경우 NATO-OTAN이라는 식별문을 써 넣기도 한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국방 선진국들 대부분이 NATO에 가입되어있다보니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군사 기구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수준의 강력한 국방력을 자랑한다

냉전과 창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소련의 물밑 작업으로 1~2년 사이에 동유럽이 모두 공산화되자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1948년 연합국이 4분할 점령하고 있던 패전국 독일에서 군정을 끝내고 총선을 통해 새로운 민주 정부를 만들어 독립시키는 방안에 대해 미, 영, 프 측과 소련의 대립으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이 독일의 화폐인 라이히스 마르크화를 일방적으로 평가절하시키자, 미, 영, 프는 서독 지역에서 마르크화라는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켰다.

미, 영, 프 3개국 점령 지역이 소련을 배제한 경제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이 마르크화가 서베를린에도 유통되자 소련은 이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서베를린을 모두 차지할 목적으로 베를린 봉쇄를 단행했다. 당시 서베를린은 동독 한복판에서 수십만명의 소련군과 동독군에 포위되어 있는 상태였으며, 소련은 서베를린에 대한 모든 물자 및 전기 공급을 중단함으로써 아사 위기에 처한 서베를린이 소련과 동독에 굴복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미국을 필두로 영국, 프랑스, 그리고 캐나다, 호주 등 서방 국가들은 베를린 공수작전을 펼치며 220만 서베를린 시민들을 위한 막대한 생필품을 수송기를 통해 실어날랐다.

베를린 봉쇄로 소련의 팽창주의와 군사적 위협이 서방으로까지 확대되자 위협을 느낀 서유럽 국가들은 군사적 동맹을 창설하기로 긴급히 합의하고, 이에 베를린 봉쇄가 진행 중이던 1949년 4월 4일, 북대서양 조약이 조인되어 나토가 창설되었다. 8월 24일부터 조약의 효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4월 4일을 창설일로 본다. NATO 창설 국가는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포르투갈 등이었다. 처음에는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북미와 중부 유럽 국가들 중심으로 협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베를린 봉쇄로 위기감을 느낀 북유럽과 남유럽 국가들도 대거 참여를 희망해오면서 창설국이 늘어나서 중립국(스위스, 오스트리아, 스웨덴)을 제외한 서유럽 국가 대부분이 NATO 창설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1952년 2월 18일 그리스와 터키가 가입했다. 터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대가 도래하자 역사적으로 앙숙이었던 소련의 강력해진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서구 진영에 편입되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50년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터지자 터키는 지체없이 UN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파병을 결정했다. 서구 사회로부터 한국전쟁 참전의 공로를 인정받은 터키는 지리적으로 아시아 국가임에도 NATO에 가입이 승인되었다.

1955년 5월 9일 그동안 가입 여부가 쭉 논의되어 오던 서독이 공식적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NATO는 소련에 대항하는 서방의 군사동맹이지만 초기에는 그러한 성격이 명확하지 않았다. 소련은 유럽의 안보에 이바지하고 싶다며 1954년 3월 나토 가입을 신청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일언지하에 거절된 것도 아닌 당시 회원국 간 격론 끝에 반려되었다.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한 후 소련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일단은 게오르기 말렌코프를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섰고 그 밑에서 스탈린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차기 후보들의 암투가 벌어졌다. 권력을 두고 경쟁관계인 이들이었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스탈린 시절에서 벗어나 억압적인 사회분위기도 풀고, 서방과의 긴장 관계도 풀고, 그동안 등한시했던 농업, 경공업도 양성해서 조금은 살만한 나라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굴라크 수용자들을 석방하고 북한, 중국을 압박해서 서둘러 6.25 전쟁 휴전협정을 체결하게 하는 등 여러모로 미국에게 화해의 손짓을 보냈다. 소련이 나토 가입 신청 의사를 내비친 것도 이러한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었으며 1954년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도 소련에 대한 변화와 개방에 대한 기대가 잠시 있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소련의 권력 암투는 베리야의 처형 이후 흐루쇼프가 후계자 자리를 이어받는 것으로 빠르게 정리되어 갔고, 이후 소련은 동유럽의 민주화 움직임을 탄압하고 군비를 증강하는 등 냉전이 더욱 첨예해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NATO는 1955년 5월 9일, 5년간 미뤄졌던 서독의 NATO 가입을 승인했고, 그러자 소련은 NATO가 반공 동맹을 형성했다고 맹비난하면서 불과 닷새 후인 5월 14일, 동유럽 위성국가들을 모아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창설했다. 이 바르샤바 조약기구 멤버 국가들 중 상당수가 소련 붕괴로 인한 냉전 체제 종식 이후 나토로 갈아타는 아이러니가 일어난다.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끝날 때까지 소련이 주도한 바르샤바 조약기구(WP)와 대립하는 사이였으나 양측이 직접적으로 충돌한 적은 다행히 한 번도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프랑코에 의해 중립국을 표방했던 스페인은 그의 사후 1981년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1982년 5월 30일 NATO에 가입하였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되었고, 당일부로 동독군이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탈퇴함과 동시에 서독의 독일연방군에 흡수 통합되어 NATO에 흡수되었다. 소련제 무기 일색인 구동독군이 NATO에 들어오면서 그동안 서방 국가들과 전세계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궁금해 하던 각종 소련제 무기들이 점차 베일을 벗고 실제 성능이 공개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적지 않은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실망하기도 했다.

NATO군의 실전 참전은 냉전 시기에는 일어나지 않았고, 냉전이 끝난 후 90년대 지옥도가 펼쳐졌던 유고 내전 당시 그중에서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던 코소보 전쟁 때 결국 NATO군이 개입했다.

탈냉전

1990년대 초에 냉전은 끝났고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1991년 7월 1일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했다. 냉전이 끝나가면서 동독이 소멸하고 독일이 통일될 때, 미국과 소련은 NATO의 영역을 당시(1990년 수준)에서 확장하지 않는다는, 명문화되지 않은 약속을 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NATO는 동유럽으로 확장되어갔다. 미국이 처음부터 NATO 확장에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임기 초인 1993년 6월 10일 NATO 외무장관들과 개최된 회의에서 미국의 대표로 나온 국무장관 워렌 크리스토퍼(Warren Christopher)는 "언젠가 적절한 시기에 나토를 확장시킬 수는 있지만 현재의 의제는 아니다("In appropriate time, we may choose to enlarge NATO membership. But this is not now on the agenda.”)라면서 나토의 확장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나토의 확장보다 우크라이나의 비핵화가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발언하였다. 나토의 확장은 자동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나토와 러시아간 완충지대(buffer)로 설정시키는데 이로 인하여 우크라이나의 비핵화가 무산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1994년 1월 11일에 개최된 백악관 각료들과 중부 유럽 외무장관들과의 회의에서, 러시아의 팽창에 큰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외무장관이 나토에 즉각적으로 가입하고 싶다고 요청하였지만 백악관 각료들은 이에 대해 러시아가 개혁에 성공해서 좋은 곰(good bear)이 될지, 아니면 팽창주의적인 나쁜 곰(bad bear)이 될지 지켜보자'면서 이들 국가의 나토 가입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입장을 바꾸고 NATO를 동유럽으로 확장했다. 빌 클린턴 정부가 나토 확장론으로 급격히 기울게 된 원인으로는 다음이 있다.
폴란드나 체코, 헝가리 등 이미 소련 시절 러시아에 호되게 당한 중부 유럽 및 동유럽국들이 러시아의 팽창주의에 대해서 엄청난 염증을 느끼며 끈질기게 NATO가입을 요구했다. 이들 나라가 소련(러시아)에 원한을 가지게 된 계기는 큰 사건만 대충 살펴봐도 카틴 학살, 프라하의 봄, 부다페스트 공방전, 헝가리 혁명 같은 것들이 있다.
보스니아 전쟁처럼 NATO가 아닌 나라에서 전쟁과 대량학살 사태가 벌어졌을 때 미국과 NATO가 무력하게 아무런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없었다.
소련이 무너지고 세워진 러시아 연방의 혼란도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체첸 전쟁처럼 러시아와 그 주변국과의 갈등이 현실화되었는데 러시아가 이 갈등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또한 1993년 12월 거행된 러시아 총선거에서 러시아 극우주의 정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이 최대 의석을 차지했다.
1994년 12월 실시된 미국 상원, 하원 선거에서 나토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하던 공화당이 상원과 하원을 싹쓸이함으로써 나토 확장 정책을 펼치는 것은 미국 국내에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이런 미국의 요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했던 것은 독일의 수상 헬무트 콜이었다. 재밌는 점은 헬무트 콜 역시 처음에는 나토 확장론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94년 1월 개최된 나토 회의에서 헬무트 콜은 "동유럽국들에게 지원은 해줄 수 있지만 나토 가입은 허용할 수는 없다#"면서 공개적으로 나토 확장에 반대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도 찬성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 이유는 다음이 있다.
보스니아 전쟁으로 인한 대량 인종학살과 그로 인한 난민 발생이 독일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에도 보스니아 난민이 쏟아졌기 때문. 1994년 12월 5일 헬무트 콜과 빌 클린턴 사이의 진행된 회담에 따르면 보스니아 전쟁 등 유고슬라비아에서 촉발된 분쟁과 민족학살로 인하여 독일에는 이미 40만명의 난민이 온 상태였다고 한다. #
콜은 친서방파인 당시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 군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헬무트 콜이 빌 클린턴과의 회담에서 얘기한 에피소드로, 러시아가 분쟁중인 국가에 폭격을 계속하자 헬무트 콜은 보리스 옐친에게 전화를 걸어 폭격을 중지하라고 요청한다. 보리스 옐친은 이에 응하여 폭격을 당장 멈추었지만 24시간이 지나자 폭격은 다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때 헬무트 콜은 보리스 옐친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러시아 군부가 보리스 옐친의 통제를 점차 이탈하는 것이 명백해 보였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헬무트 콜 역시 빌 클린턴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나토 동진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1999년 3월(체코, 헝가리, 폴란드)과 2004년 3월(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두 차례에 걸쳐 구 동구권 국가들이 NATO에 합류했다.

2009년에는 크로아티아와 알바니아가 NATO에 가입했으며, 2017년 몬테네그로, 2020년에 북마케도니아가 NATO에 가입했다.

활동 상황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은 공식적으로 UN군이 참전한 전쟁이지만 UN군의 주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 NATO 회원국들이었고, 실질적으로 NATO가 참전했다고 봐도 어느 정도 무방했다. 당시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NATO 가입을 희망해 오던 터키는 6.25에 파병했고, 덕분에 6.25가 진행 중이던 1952년 NATO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6.25전쟁은 창설된 지 1년 밖에 안된 나토군의 체제를 정비하는 기회가 되었다.

1961년 인도가 포르투갈령 인도 식민지인 고아, 디우, 다만을 돌려받기 위해 무력침공을 강행했을 때 이를 막아낼 역량이 없었던 포르투갈은 NATO의 회원국이므로 NATO의 공동대응을 역설하며 지원 요청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미국과 영국이 중심이 되어 그 지역은 NATO 관할이 아니라고 했고 포르투갈은 끝내 인도 식민지를 모두 버려야 했다.

현재까지의 실전은 코소보 전쟁이 한참이던 1998년 유고 공습 작전(Operation Allied Force)과 2011년 1차 리비아 내전 때의 공습 작전(Operation Unified Protector)뿐이다. 특히 코소보 개입은 NATO의 힘을 여실히 증명하면서도 오히려 NATO, 나아가 유럽 역내에서의 미국의 비중을 극명히 드러내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소련 해체 이후 정치기구 성향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NATO의 군사적 기능에만 주목하던 미국 정치학계의 견해로 인해 크게 부각되는 것일 뿐, 실은 유럽 정치학계에서는 1950년대부터 NATO의 정치적 기능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것은 정치적 기구인 북대서양위원회의 의장을 겸직하는 NATO 사무총장(Seceretary General)이 모두 유럽에서 나왔으나 NATO군의 군령권을 쥐고 있는 유럽동맹군최고사령관은 죄다 미군 장성이 차지했다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2011년 3월에는 리비아 내전에 개입하면서 카다피 정부군을 공격했다. 2012년에는 시리아 내전의 와중에 터키 공군 전투기가 격추당하고 터키 영내에 포탄이 떨어지자 NATO 차원에서 대응, 동맹국들이 터키에 방공부대를 파병하기도 했다. 이후 시리아 정부군은 터키 영내에 대한 공격을 일제히 멈추며 NATO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냈다.

전 세계적인 경제불황 때문에 NATO 주요국들 다 국방에 신경쓰지 못하고 있는 터라 예전만큼의 위세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단적으로 2012~2014년 동안 세계에서 국방예산을 많이 감축시킨 20개국 중에 13개 국가가 NATO 가입국이었다.# 더욱이 가입국끼리의 동조도 예전같지 않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영어 약자를 비꼬아서 북대서양 이빨 빠진 기구(North Atlantic Toothless Organization)라고 풍자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유럽지역의 나토 회원국들에서 국방비 지출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창설 67년 만에 대변혁을 예고하고 있다.#

나토 '반러시아 대동단결'…"가맹국 속사정 많이 달라"

그러나 NATO 회원국의 무임승차 발언과 NATO 동맹국이 공격 받을 때 미국의 자동개입 조항을 재검토하겠다고 시사하는 등 NATO의 역할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던 도널드 트럼프가 2016년 11월 미합중국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NATO의 미래가 불분명한 상황이 됐다. 당장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NATO 회원국과 유럽연합이 긴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NATO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었던 냉전 시기에는 미국과 그 외 가맹국의 나토 방위분담이 50대 50에 가까웠지만 리비아 폭격 때쯤에는 방위분담이 75대 25 수준으로 떨어졌다. 심지어 냉전시기에는 (경제력이 서유럽국가에 비해 매우 낮음을 감안해도) 동유럽국가들은 NATO가 아닌 WP 소속이었음에도 말이다. NATO에서는 GDP 대비 국방비를 2% 정도 부담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를 지킨 나라는 미국, 그리스, 영국, 에스토니아, 폴란드뿐이었다.# 에스토니아는 바로 코앞이 러시아 제2의 도시이자 해군의 요충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이며, 폴란드는 칼리닌그라드를 통해 러시아, 친러 국가인 벨라루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다. 그리스는 같은 NATO 회원국인 터키와 갈등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경제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방비는 제대로 지출하고 있다.

즉 미국 입장에서는 특별한 관계인 영국을 제외하면 서유럽 국가들이 국가안보 및 NATO에 대한 의무를 자신들보다 가난한 동유럽국가에 떠넘기거나 미국에 의지한다는 시각을 가질 수 있으며, 트럼프는 이런 불균등한 방위의무 참여에 대한 미군 장성진의 불만을 제대로 캐치한 셈이다.

2019년 12월 3일,4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창설 70주년 기념 정상회담은 미국의 나토 운영비를 22%에서 16%로 삭감하고, 독일은 15%에서 16%로 미국과 같은 수준으로 증액하기로 합의했다. 추가적으로 독일과 프랑스는 GDP 대비 방위비 예산을 2%로 끌어올린다는데 합의했다. 그런데 정상회담 개최 전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과 나토 동맹국 사이의 불화, 터키의 불확실성(S-400 도입과 같은 친러시아 정책)을 이야기하며 나토가 뇌사상태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또한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나토가 쿠르드 민병대(YPG)를 테러단체로 지정하지 않는다면 폴란드 및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대한 집단방어 계획을 반대하겠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에 이란과 중동 지역의 긴장을 고려해 나토가 중동으로 확장하여야 하며 이에 따른 차원에서 'NATO ME'로 개명까지 주장했다.#

중국, 러시아 군사위성에 대응하여 독일에 우주센터를 세운다.#

2021년 3월부터 기후변화를 '안보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한 대응을 집단 안보 전략의 핵심 중 하나로 설정한다.#

옌스 스톨렌베르크 사무총장은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협력강화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또,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 4개국과의 협력을 언급했다.#

2021년 6월 14일, NATO 정상회의에서 러시아, 중국과 벌일 수 있는 '우주전'에서도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합의했다.

예산 갈등 및 내분

나토 예산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다. 미국 혼자서 나머지 국가들 다 합친 거보다 더 많이 쓰고 있다. 하지만,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이니만큼 유럽-대서양 방면에 투입되는 예산과 나머지 지역에 투입되는 예산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특이하게 나토에 부정적이고 친러적이었다. 트럼프는 미국이 세계 각지의 분쟁에 너무 개입하지 말고 미국 내부 문제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유럽 일은 유럽이 자기 돈과 힘으로 알아서 하게 하자는 입장이니 러시아와 죽이 잘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취임 이후에는 후보시절 내뱉던 강경한 발언들이 많이 줄긴 했다. 트럼프 자체도 러시아 게이트가 있고, 유럽 극우들도 고립주의를 추구하면서 친러 성향을 띈다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 이상하진 않다.

결국 2019년 터키 쿠르드 침공으로 인해서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정체성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상황으로, 엄연한 NATO 회원국의 군대인 터키군이 같은 NATO 회원국의 군대들인 프랑스군의 특수부대들이 주둔하고 있던 기지와 미군의 기지의 근방에 포 사격을 가하였고, 특히 전자의 경우에는 부상자까지 나온 상황이다. 같은 NATO 회원국인 그리스와의 마찰이 있긴 하였으나 이번에 발생한 사태의 경우에는 외교 및 역사적으로 크게 문제 없는 국가의 군대들 사이에서 발생한 사태인지라 더욱 충격이 크다.

그리고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NATO 국가인 터키와 헝가리, 알바니아가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NATO 국가 대부분(영국, 프랑스, 캐나다,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가 아르메니아를 지지하면서 또다시 분열의 양상이 보였다. 다만 아제르바이잔의 승전으로 전쟁이 마무리된 이후 잠잠한 상태. 그렇지만 헝가리는 아르메니아랑 국민 감정이 있고 터키는 중국, 러시아에 기울었다는 게 문제다.

2021년에는 회담을 거치면서 다시 안정적인 방향으로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관계 문제가 커지고, 연말에는 아예 우크라이나 동부를 침공해 무력화시킬 모습이 보이자 미국이 무조건 개입한단 보장이 없다는 나토의 문제점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한편 우크라이나-러시아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프랑스의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이 자신이 집권하면 NATO를 다시 탈퇴할것 이라는 공약을 내세웠다. 마린 르펜은 "프랑스 군대로 자국 국방과 국익을 지키고 먼 곳에서 일어나는 분쟁에 휘말리면 안된다."라며 트럼프와 똑같은 고립주의 정책을 내세우는등 각 국가의 우파세력의 대두로 NATO의 내분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NATO 내분은 간혹 가다 나왔던 얘기지만 항상 NATO 회원국들 간의 회담으로 원만하게 잘 해결되는 편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태가 전면전으로 확대되자 NATO 회원국들은 심각한 위기의식 속에서 그간의 조별 과제 같았던 지리멸렬함을 벗어던지고 대 러시아 제재, 우크라이나 군사지원 등에서 냉전 이후로 오랜만에 단합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독일을 시작으로 각국이 그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던 고질적인 유럽의 국방 문제를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며 보완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간 약해진 유럽의 전력과 통합되지 않은 시스템, 직접적 군사개입이 불가능한 정치상황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이 효력을 발휘하며 가망이 없어보이던 우크라이나군이 점차 미약하게나마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점칠 수 있을 정도로까지 개선되며 지원 노력의 효능감을 증명해내기 시작하며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가속될 전망이다.

정치적으로도 그간 자국 독자노선을 주장하며 친러 성향을 보였던 유럽 각국의 정치세력들이 급격히 몰락하고 있다. 전술한 마린 르펜 역시 이번 전쟁의 영향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다. 앙겔라 메르켈이 십수년간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통합은 커녕 해체가 목전에 보인다는 지경까지 악화되었던 유럽인들 사이의 반목을 푸틴은 단 한 달만에 해소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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