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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2. 9. 1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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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영연방 왕국의 국왕으로, 윈저 왕조 제4대 국왕. 선왕은 제3대 조지 6세이며, 다음 왕 자리는 제5대 국왕 찰스 3세에게 계승되었다.

25세이던 1952년 2월 6일부터 2022년 9월 8일까지 70년 214일간 재위한 군주로서,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국왕이며, 특히 여왕으로서는 전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하였다

직위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그 밖의 국가와 영토의 여왕, 영연방의 원수, 신앙의 수호자이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폐하(Her Majesty Elizabeth the Second,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and of Her Other Realms and Territories Queen, Head of the Commonwealth, Defender of the Faith)

왕위 계승 직후 여왕인 모든 나라에서 썼던 과거의 칭호는 다음과 같다.[]

Elizabeth the Second, by the Grace of God,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Queen, Defender of the Faith(라틴어: Elizabeth II, Dei Gratia Magnae Britanniae, Hiberniae et terrarum transmarinarum quae in ditione sunt Britannica Regina, Fidei Defensor)

그리고 다른 여러 칭호들을 한데 다 통합해서 부르는 비공식 칭호도 있었던 모양인데 그건 다음과 같다. 다만 정식 칭호는 아님에 주의.

'하느님의 은총으로 대브리튼, 아일랜드와 해외 영국 자치령의 여왕, 신앙의 수호자, (전)에든버러 공작부인, (전)메리오네스 백작부인, (전)그리니치 남작부인,[] 랭커스터 공작, 맨 섬의 영주, 노르망디 공작, 가장 영예로운 가터 훈장의 군주, 가장 영예로운 바스 훈장의 군주, 최고(古)이며 가장 고귀한 시슬 훈장의 군주, 가장 저명한 성 패트릭 훈장의 군주, 가장 기품있는 성 미카엘 훈장과 성 조지 훈장의 군주, 가장 훌륭한 대영제국 훈장의 군주, 무공 훈장의 군주, 제국 공로 훈장의 군주, 최고위 인도성 훈장의 군주, 가장 저명한 인도 제국 훈장의 군주, 영국령 인도 훈장의 군주, 인도 공로 훈장의 군주, 버마 훈장의 군주, 빅토리아&알버트 왕실 훈장의 군주, 에드워드 8세 왕가 훈장의 군주, 공로 훈장의 군주, 명예 훈위 훈장의 군주, 왕립 빅토리아 훈장의 군주, 가장 유서깊은 예루살렘의 성 조지 병원 훈장의 군주이신 엘리자베스 2세 폐하(Her Majesty Elizabeth the Second, by the Grace of God,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Queen, Defender of the Faith, Duchess of Edinburgh, Countess of Merioneth, Baroness Greenwich, Duke of Lancaster, Lord of Mann, Duke of Normandy, Sovereign of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Garter, Sovereign of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Bath, Sovereign of the 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 Sovereign of the Most Illustrious Order of Saint Patrick, Sovereign of the Most Distinguished Order of Saint Michael and Saint George, Sovereign of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 Sovereign of the Distinguished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Imperial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Most Exalted Order of the Star of India, Sovereign of the Most Eminent Order of the Indian Empire, Sovereign of the Order of British India, Sovereign of the Indian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Burma, Sovereign of the Royal Order of Victoria and Albert, Sovereign of the Royal Family Order of King Edward VII, Sovereign of the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Sovereign of the Royal Victorian Order, Sovereign of the Most Venerable Order of the Hospital of St John of Jerusalem)'

그런데 공식 칭호는 1953년 대관식을 맞으면서 그녀가 여왕으로 있는 나라마다 각각 칭호를 제정하게 되었는데 영국의 경우 아래와 같이 변경되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그 밖의 국가와 영토[15]의 여왕, 영연방의 원수[16], 신앙의 수호자이신 엘리자베스 2세 폐하(Her Majesty Elizabeth the Second,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and of Her Other Realms and Territories Queen, Head of the Commonwealth, Defender of the Faith)

영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의 칭호 및 쓰지 않는 과거의 칭호들은 영어 위키백과에 있는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1953년 이후 엘리자베스 2세가 국가원수로 있는 국가들은 각각 별도의 칭호를 제정해서 사용하고 있으나 영국의 칭호와 형태가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즉위 이후에 영연방 국가들이 새로 사용할 훈장을 제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사단장으로서의 칭호가 덧붙여졌다.

'캐나다 기사단장, 오스트레일리아 기사단장, 뉴질랜드 기사단장, 바베이도스 기사단장, 파푸아뉴기니 밸러 기사단장, 캐나다 무공 기사단장, 캐나다 경찰 메리트 기사단장, 뉴질랜드 여왕 공로 기사단장, 뉴질랜드 메리트 기사단장, 바베이도스 성 앤드루 기사단장, 파푸아뉴기니 로거후 기사단장, 파푸아뉴기니 멜라네시아의 별 기사단장(Sovereign of the Order of Canada, Sovereign of the Order of Australia, Sovereign of the Order of New Zealand, Sovereign of the Order of Barbados, Sovereign of the Order of Valour, Sovereign of the Order of Military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Merit of the Police Forces, Sovereign of the Queen's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New Zealand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St. Andrew, Sovereign of the Order of Logohu, Sovereign of the Order of the Star of Melanesia)'

영국 왕립 해군의 사령장관, 노르망디 공작[], 랭커스터 공작,[18] 맨 섬의 영주[]이다. 한때 피지의 대추장(Paramount Chief)이었던 적도 있다.

더불어 영연방의 수장(Head of the Commonwealth)라는 명예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부왕인 조지 6세 재위 기간 중에 영연방에 영국 왕이 국가원수가 아닌 나라도 회원이 될 수 있게 바뀌었고, 그래서 '왕'과 별개로 '영연방의 수장'이라는 직함을 추가했는데, 이후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이 직위도 이어 받았다.[]

영국 언론에서는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Elizabeth Alexandra Mary)라는 그녀의 긴 이름을 직접 칭하는 일이 드물고, Her majesty나 Queen 등으로만 칭한다. 서양에서는 이게 왕에 대한 경칭이다.

어린시절

1926년 4월 21일 오전 2시 40분, 런던에 위치한 외가 메이페어에서 조지 5세의 둘째 아들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와 요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의 2녀 중 맏이이자 장녀로 제왕절개를 통해 태어났다.

태어났을 당시 조지 5세의 첫 손주이자 큰아버지 에드워드 왕세자, 아버지 요크 공작의 뒤를 이어 계승서열 3위였던 만큼 그녀의 탄생은 대중에게 화제가 되어 많은 축복을 받았다. 하지만 일개 왕자의 딸인 방계 왕족이였던데다, 미혼이긴 했지만 큰아버지 에드워드 왕세자의 나이가 아직 젊었기 때문에 훗날 그녀가 여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5월 29일, 생후 1개월에 버킹엄 궁전에서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라는 이름으로 성공회 유아세례를 받았다.

엘리자베스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으로부터, 알렉산드라와 메리는 각각 증조할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40]와 할머니 테크의 메리의 이름으로부터 따왔다. 원래 아버지 앨버트 왕자가 할아버지 조지 5세에게 아이의 이름을 빅토리아로 지어야 하냐고 걱정스럽게 물었으나, 원하는 데로 하라는 조지 5세의 뜻에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27년, 첫번째 생일을 맞이한 엘리자베스 2세.

런던 하이드파크 코너에 위치한 자택과 리치몬드 파크의 화이트 로드지, 윈저 성, 밸모럴 성, 샌드링엄 하우스, 글래미스 성을 비롯한 외갓집 등을 오가면서 지냈다.

어린시절부터 가족 및 주변인들에게 주로 ‘릴리벳(Lilibet)'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이는 자신의 이름인 '엘리자베스'를 발음하기 어려워 해 본인 스스로 릴리벳이라고 부른 것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1920년대에 들어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던 할아버지 조지 5세는 자주 병문안을 왔던 엘리자베스 공주를 매우 예뻐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조지 5세를 영국 할아버지(Grandpa England)라고 불렀다..


다섯살이 되던 1930년엔 여동생 마거릿 공주가 태어나면서 언니가 되었다.
당시 학교를 다니는 상류층 여식들이 늘고 있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여동생 마거릿과 함께 어머니와 가정교사 메리언 크로포드'[]에게 교육을 받았다. 크로포드는 "매우 예쁘지만, 고집세고 영악하다"고 그녀를 묘사했다. 수업은 주로 역사와 언어, 문학, 음악 위주였다.

크로포트가 저술한 책인 <The Little Princesses>에서 엘리자베스는 말[]과 개를 좋아했으며, 질서 있고 책임감 있는 성격이었다고 묘사됐다. 엘리자베스의 주변인들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2살 때의 그녀를 지켜 본 윈스턴 처칠은 아내에게 "어린 아이가 놀라운 권위를 가졌고 생각이 깊다"고, 이종사촌인 마거릿 로즈(Margaret Rhodes)는 "즐거운 어린 소녀이지만 근본적으로 분별 있고 예의 바르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비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 왕실에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33년 어느날, 엘리자베스가 여동생 마거릿에게 자신있는 말투로 "나는 3이고 너는 4야."라는 말을 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마거릿은 "아니야, 나는 3이고 언니는 7이야!"라고 반문했는데, 한참 뒤에서야 언니가 말했던 숫자가 자신들의 나이가 아닌 왕위 계승 서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당시 엘리자베스의 계승서열은 3위, 마거릿은 4위였다.

종친에서 후계자로

1936년 조지 5세가 사망하여 에드워드 왕세자가 즉위하였으나 그해 말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남동생 앨버트 왕자에게 왕위를 넘겨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그의 장녀 엘리자베스가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어 이전보다 더더욱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추정 상속인이라 왕세녀에 해당하는 Princess of Wales(웨일스 여공) 작위를 받은 적이 없지만[] 실질적인 차기 왕위 계승자였다. 만약 조지 6세가 아들을 낳았더라면 계승 서열이 밀려 여왕이 되지 못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비가 두 공주를 모두 제왕절개로 낳아서 더 이상 출산하기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이튼 칼리지의 부총장 헨리 머튼으로부터 헌법사를 배웠고, 프랑스어는 원어민 가정교사를 통해 배웠다.

전쟁기간이던 1940년에는 안전을 위해 윈저 성에서 시간을 보냈다.

18세이던 1945년, 아버지 조지 6세의 허락을 받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둔 시기에 영국군 여군 부대인 ATS[]에 중위(subaltern)로 입대해 대위(junior commander)[]로 진급하였다. 임무는 보급차량 운행이었다. 이 때문에 여왕이 2차대전 때 일개 운전병으로 참전한 것으로 와전되기도 한다.[] 이후 얼마 뒤에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활동한건 약 3주 정도였지만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마지막 국가원수였다.

결혼과 가정

엘리자베스는 1934년에 숙부 켄트 공작 조지 왕자와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의 결혼식에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리포스 왕자[49]를 처음 만났고, 이후 1937년에 다시 만났다. 필리포스는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의 친손자로[] 두 사람은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 7촌, 빅토리아 여왕을 기준으로 8촌인 먼 친척이기도 하다.

이후 1939년에 조지 6세, 엘리자베스 왕비, 마거릿 공주와 함께 왕립 해군사관학교를 시찰했는데, 13세이던 엘리자베스 공주는 당시 18세이던 필리포스 왕자에게 반해 편지를 주고 받았다.

필리포스는 조지 6세에게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허락받으러 갔었으나, 1947년, 공주가 21세 생일을 맞을 때까지 기다리는 조건으로 비밀리에 약혼했다. 그리고 1947년 7월 9일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녀의 약혼은 몇몇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일단 필리포스 왕자는 사실상 망국의 왕자로[] 지지해 줄 재정적인 기반도 없었고, 그의 누나들은 나치당원과 결혼하였는데 당시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나치 및 독일에 대한 감정이 최악이었다.[] 실제로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필리포스와의 결혼을 반대하였고, 특히 필리포스가 독일 혈통[]인 걸 항상 의심했으며 그를 독일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결혼 전 필리포스는 그리스 왕국과 덴마크의 왕자 직위와 계승권을 포기하고 이름도 영어식인 필립으로 바꾸고, 외가의 성인 '마운트배튼'을 사용하여 '필립 마운트배튼'으로 개명하면서 상기된 논란거리를 정리했다. 이후 필립 마운트배튼은 장인어른 조지 6세에게 에든버러 공작, 메리오네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 작위를 받았다. 두 사람은 1947년 11월 20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반독 감정이 심했던 상황이었던지라 필립 공의 누나들은 아무도 참석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공의 결혼식 정보

결혼 후, 1년 만인 1948년에 첫자식이자 후계자인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손을 낳았고, 2년 뒤인 1950년에는 둘째이자 장녀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 공주를 낳았다. 둘째 앤 공주를 낳은지 10년만인 1960년에 차남이자 셋째인 앤드루 왕자를 낳았다. 앤드루는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 이후로 국왕이 즉위한 상태에서 태어난 자녀이기도 하다. 셋째를 낳은 지 4년 후에 막내 아들 에드워드 왕자를 출산했다.

그러나 결혼한 지 5년도 안 되어 조지 6세가 사망하면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찰스 왕세자와 앤 공주에게 많은 애정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1953년엔 아이들을 두고 남편과 함께 영연방으로 6개월에 걸친 순방을 떠났다. 엘리자베스 2세는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하며 눈물을 보였으며, 훗날 순방을 마친 후 궁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상봉하던 순간을 “아이들은 끔찍하게 예의가 발랐다. 나는 그애들이 우리가 누구인지 정말 몰랐다고 생각한다.’라고 회고했다.

2021년 4월 9일 남편 필립 공이 99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74년간의 결혼생활이 끝났다. 국왕의 배우자 자리가 비어있는 것은 빅토리아 여왕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군주로서의 삶

국왕 조지 6세의 건강이 나빠져 가자, 1951년 11월 14일에 엘리자베스 공주 부부가 섭정으로 임명되어 1952년 1월, 영연방 순방을 떠났다. 그러나 케냐를 방문 중이던 1952년 2월 6일, 아버지 조지 6세가 암투병 도중 사망해 추정상속인이었던 공주가 해외에 나간 상태에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묵었던 트리탑 호텔(Treetop Hotel)[]은 유명한 관광지이다.[] 주변에 야생동물이 많아서 전설적 사냥꾼이자 자연보호운동가 짐 코벳 영국군 대령이 밤새 잠도 안 자고 경호를 서준 것도 유명한 일화. 부부는 이 소식을 트리탑 호텔에서 사가나 롯지(Sagana Lodge)로 이동했을 때 전해 들었다. 여왕에게는 남편인 필립이 수행원들을 물리치고 직접 소식을 전해주었다고. 엘리자베스는 영국과 영연방 전방에 여왕으로 선포되었고, 출국 할 때 공주였던 그녀는 여왕 신분으로 귀국했다.

암흑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엘리자베스 1세와 빅토리아 여왕을 잇는 새로운 젊은 여왕의 시대가 열리자 여왕은 사람들의 기대와 지지를 한몸에 받으며 "동화 속 여왕"으로 묘사되었다.

관습대로라면, 여왕이 즉위할 때는 부군의 가문으로 왕조명이 바뀌었었기 때문에 윈저 왕조의 왕가가 마운트배튼 왕가로 바뀌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 메리 대왕대비가 왕조명을 정할 당시의 합의사항으로 인해 "영국의 왕가는 앞으로 계속 윈저로 고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여왕은 1952년 4월 2일에 "왕조명은 윈저로 계속 한다"고 발표했다.

1953년, 7개월간 여왕 부부는 영연방 포함 13개국을 순방했다. 처음 방문한 나라는 호주와 뉴질랜드로, 투어 기간 동안 군중의 수는 엄청났는데, 호주 인구의 3/4 정도가 몰려든 것으로 추정된다.

1953년 6월 2일, 3달 전 메리 대왕대비가 사망했음에도 그녀의 뜻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14개월 동안 준비해 온 대관식이 지체되지 않고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 대관식은 유럽 왕실 최초로 TV로 중계 된 대관식으로, 당시 대관식의 TV 중계에 대해서 영국 내각 내에서 상당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그중에서도 윈스턴 처칠은 이에 반대했지만, 여왕은 그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이는 최초로 TV로 중계되는 세계적인 주요 행사였다. 많은 가정집이 여왕의 대관식을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구입했다.[] 중계 당시 전 세계 시청자는 2억 7,700만명으로 추산되었다.[] 대관식에서 여왕이 쓰고 있는 왕관은 영국의 공식 왕관인 성 에드워드 왕관이다. 무게가 2.2kg에 달할 정도로 엄청나게 무거워 여왕은 "목뼈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라며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 당시를 회고했다. 대관식 후 런던을 드라이브했고,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를 방문했다.

입헌군주제가 이미 확립되어 근대 정치가 다 잡힌 상태에서 즉위하였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정치 권력은 전무함에 가깝다. 게다가 본인도 이 점을 생각해서 정치에 관해서는 발언 한마디 하지 않아 현대 왕가의 귀감이 되고 있다. 심지어 1965년에 거행된 윈스턴 처칠의 국장 이외에는 50년 가까이 영국 총리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다가, 2013년에 거행된 마가렛 대처의 장례식에 간만에 참석하기도 할 정도. 그래서 그런지 영국인들의 평가가 매우 좋은 편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공개적인 정치 불화가 없는 선에서는 국정에도 일부 관여하고 있어, 실은 영국을 움직이는 흑막이 아닐까 싶은 모습도 보여주곤 한다. 예를 들면 내각불신임으로 인해 총리가 사퇴했을 때 국왕의 특권으로 총리를 2번 임명한 경력이 있고, 브렉시트 국민 투표에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막판에 탈퇴파들이 뒤집기에 성공하도록 개입했다는 의혹도 있다.[]

이처럼 정치에 일부 개입하는가 하면, 전쟁 등의 민감한 사안의 경우 여왕의 승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물론 여왕이 이를 거부한 적은 한번도 없긴 했지만, 불만을 표시한 적은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마가렛 대처의 포클랜드 전쟁 개전선언인 아르헨티나 선전포고 결의안에 대해 엘리자베스 2세는 "불만족스럽다"고 거부권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불만 의사를 표현한 적이 있다. "부적절하다"고 했으면 거부권 행사인데, 당시 영국 여론이 전쟁 여론으로 기울어졌던 상황이라 포클랜드 전쟁을 막지는 않는 선에서 불만 의사를 표시했다.

2021년 2월 더 가디언 지가 여왕의 동의권(Queen's Consent)에 관한 보도를 내놓았다. 동의권이란 국왕의 권한이나 사적 권리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법안이 입안될 경우 국왕이 동의해야 비로소 의회에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절차를 말한다. 이미 의회를 통과한 법안을 여왕의 이름으로 승인해 법적 효력을 갖도록 하는 국왕 재가(Royal Assent)와는 다르다.[] 총리실 문서가 기밀해제되면서 여왕 또는 찰스 왕세자가 동의권을 행사하여 1952년부터 1,063건의 법안을 입법 절차 전에 검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디언>의 주장은 여왕이 왕실과 관련이 없거나 적은 법안에 대해서도 사전에 검토하는 행위 그 자체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1986년 연어법[]이나 2019년 주차 관련 법 등. 그리고 이 중 최소 4건의 법안은 왕실 측이 불만을 표시하여 수정되었다.[] 또,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통과된 신재생에너지 사용 촉진법을 사전에 검토하여 신재생에너지 사용 의무에서 국가원수를 면제하는 조항을 추가시켰다는 보도가 나왔다. 찰스와 윌리엄 왕세손이 탄소배출 절감 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여왕이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왕실 측 대변인은 "여왕은 한 번도 동의 거부를 통해 법안을 거부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또 "동의권 행사 여부는 여왕의 요청이 아닌 의회의 결정으로, 해당 정부 부처가 왕실에 의견을 묻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실질적인 권력 행사는 표면과 달리,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영국은 전세계 역사상 통치 전략이 가장 교묘하게 뛰어난 국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의 조항이 아닌, 영국인들의 심리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하다. 영국인들은 귀족과 평민이 법적으로 평등한 신분제를 인정하고,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사회적으로 부여된 의무를 이행한다면 그들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들은 자격이 있기에 우리와는 다르다."라는 주의인 것이다. 이런 개념 탓과 제2차 세계대전을 성공적으로 치루어낸 핏줄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여전히 영국 대중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법적으로 보장받는 권한과 별개로 초월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영국 총리들의 중요한 정치적 업무 중 하나가 바로 여왕을 알현하여 보고서를 올리는 것인데, 이 역시도 에피소드가 많다. 첫 총리인 윈스턴 처칠은 친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시가를 피우면서 대담하는가 하면, 마가렛 대처가 왔을 때는 대처가 자신을 존경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15분쯤 기다리게 했다. 포클랜드 전쟁 때 마가렛 대처의 전쟁 준비안을 승인한 뒤에 "내 아들이 이번 전쟁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솔직히 내키지는 않았다. 그녀(대처 총리)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말하지 않았다."라고 전했다.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는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장면. 야사 같은 이야기지만, 대처의 신자유주의정책 등 정책 전반이 내키지가 않아 아침마다 "오늘은 그녀가 얼마나 내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는가?"[]라고 씹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래도 미운정이라고, 2013년 4월 17일 엄수된 대처의 장례식에 처칠 이후 처음으로 왕실 자격으로 참석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처음으로 여왕을 알현했을 때 "총리직을 맡게 된 걸 축하하오. 과인은 12명의 영국 총리를 만났소만."이라고 말해 캐머런을 쑥스럽게 만들었다.

상술한 여군부대에 입대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2009년에 열린 노르망디 상륙작전 65주년 기념식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초대하지 않아 여왕이 격노하고 국민적인 분노가 일어나는 등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노르망디에서 죽어나간 건 미군과 영국군이었다. 당시 국가원수 중 유일한 참전용사이자 영국군의 총사령관인 엘리자베스 2세를 초대하지 않는 행위는 그야말로 큰 결례. 비난받는 가운데에도 사르코지는 정신 못 차리고 "여왕이 오는 건 환영하지만, 노르망디 기념식은 전통적으로 미국-프랑스 간의 행사다"라는 발언을 해서 더욱 어그로를 끌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중재해서 어쩌어찌 넘어가긴 했지만, 여왕은 자신이 가는 대신 장남 찰스 왕세자를 보냈다. 일단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집권기인 2014년의 D-Day 70주년 기념식에서는 참석했다. 2019년 75주년 기념식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고령인 점을 감안해, 영국-프랑스 간 합의를 통해 프랑스와 영국에서 나눠서 시행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프랑스 쪽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영국쪽 행사에만 참석했다

이후 1992년에 발생한 윈저성 대화재의 복구사업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 추산되어 국민들의 반발이 있자 스스로 왕실이 가진 면세 특권을 포기했다. 때문에 그 이후로 영국 왕실은 지금까지 계속 납세의 의무를 지고 있다. 왕권신수설이 횡행하던 시대나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던 무렵과 이것을 비교하면 정말 엄청난 변화인 셈이다. 즉, '같은 국민이지만 직업이 왕인 것'이라고 직접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2017년 11월 여왕이 본인 사유 재산을 관리하는 랭커스터 공국을 통해서 일부 자산을 조세피난처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파라다이스 페이퍼스 폭로로 밝혀지자, 그녀의 대인배라는 이미지에 타격이 가고 말았다. 랭커스터 공국은 "두 피난처 모두 영국의 해외 영토며 투자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맏며느리였던 다이애나 스펜서와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나라 안팎에서 여왕을 비난하는 여론이 종종 나왔고,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직후 차가울 정도로 무관심하게 대응하자 급기야는 왕실 폐지를 주장하는 소리까지 터져나오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잠잠한 상황이지만 이때의 불씨가 아직도 잠복 중이라서, 영국의 공화주의자들도 여왕이 타계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999년 영연방 왕국의 일원이자 영연방 주요 회원국인 호주에서 여왕을 '호주의 군주'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헌법을 바꿔 공화정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운동 끝에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는 54.87% vs 45.13%로, 과반수의 호주 국민들이 왕정 존속을 선택해 호주의 군주직을 유지하게 됐다. 당시 공화정 전환 운동의 지도자였던 맬컴 턴불은 이후 공화정 전환 운동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여러 정치활동을 거쳐 2015년 결국 호주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됐다. 호주 국민들의 여왕에 대한 애정이 크기 때문에 총리 당선 이후 계속되는 공화주의자들의 압박에도 공화정 전환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여왕이 만약 가까운 시일 안에 타계할 경우 맬컴 턴불 총리가 호주 왕정 유지에 불안 요소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많았다.[] 2022년 또 다른 공화주의자 앤서니 앨버니지가 총리가 되면서 또 모르게 되었다.[] 또한 호주의 공화정 국민 투표의 여파가 캐나다, 뉴질랜드, 자메이카 등 다른 영연방 왕국들로 퍼졌다. 해당 국가들의 여론 조사 등을 봤을 때 여왕 사후 왕위 계승의 향방에 따라 영연방 왕국들의 군주제 폐지 여부가 결정될 확률이 높다.[]

이와는 별도로 2010년대 들어 스코틀랜드가 분리독립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400년간 이어온 연합왕국의 왕관이 나의 대에서 끝날지도 모른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2년 10월, 영국 정부와 스코틀랜드가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를 시행하기로 합의하면서 여왕의 우려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2014년 투표를 앞두고 영국 정가에서는 스코틀랜드 국민들에게 "앞으로 잘해줄 테니까 제발 남아줘요"하며 읍소하고 있으며 여러 정치인들은 여왕에게 "폐하! 한마디라도 해주세요."라고 호소하였다. 하지만 개인적인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립 문제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선택에 따라야 한다"며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더 선>의 주장에 따르면 브렉시트 투표 직전 식사 자리에서 유럽연합 잔류에 대한 회의적인 뉘앙스의 발언이 있었다고 하며, 탈퇴파에서 이를 막판 캠페인에 활용하기도 했다. 여왕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영국이 유럽의 일부여야만 하는 이유 3가지를 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여왕이 브렉시트를 두둔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배경이다. 이에 언론 규제 단체인 IPSO는 "<더 선>의 기사 제목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misleading)"고 발표했지만, <더 선>은 2명의 소식통을 통해서 "여왕이 당시 부총리였던 닉 클레그한테 말했다"고 주장했다.### 닉 클레그는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마이클 고브가 <더 선>에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한 소식통 중 한 명이다"라고 지적했으나, 마이클 고브는 대답하기를 거절했다. 닉 클레그는 "여왕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일개 부총리한테 이런 중대한 사건에 대해 논평을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고 대답하면서, <더 선>의 주장을 보증해주기를 거절했다.

영연방 수장을 찰스 왕세자에게 물려줬으면 하는 발언을 하였다.#

2018년 12월 29일, 엘리자베스 여왕이 비밀리에 새로운 요트를 구매하기 위해서 로비를 진행한 것이 밝혀졌다. 버킹엄 수석 비서는 내각에 보내는 편지에 "여왕은 새로운 요트를 구매하고 싶지만, '대중들에게 공개되면 왕실 이미지에 큰 타격이 갈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고 적었다. 지금까지 다른 왕족들이면 몰라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내각에 압력을 가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이 편지의 폭로로, 여왕도 사사로운 이유로 내각에 압력을 가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2019년 1월 25일,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례적으로 중립적이지만 정치와 관련하여 의원들에게 합의점을 찾기를 촉구했다. 브렉시트가 노딜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모두 모여서 합의점을 찾읍시다"라고 의원들에게 부탁했다.# 일각에서는 "총리인 테레사 메이가 아니라 의원들에게 직접 말한 것은, 여왕이 총리와 내각을 더 이상 신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2019년 2월 2일, 브렉시트가 노딜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영국 정부는 여왕과 왕족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는 계획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 내각 관계자는 "이 계획은 냉전 시기부터 있던 것으로, 노딜 브렉시트로 시민들의 소요사태가 일어나면 대비하기 위해서 다시 고려 중이다"라고 대답했다. 영국의 재계와 경제 전문가들은 "노딜로 갑자기 관세가 생기면 식약품을 수입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고 여러 차례 경고했었다. 이에 하드 브렉시트 지지자인 제이콥 리스-모그는 "내각이 노딜 브렉시트에 불필요하게 긴장한다. 영국 왕실은 2차 세계대전 때도 런던에 남아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던 중 독일 슈피겔이 1988년 11월 이임 인사를 하러 엘리자베스 2세를 만난 뤼디거 베히마어 주영 독일대사가 본국에 보고한 전문의 요약에서 “영국의 미래는 유럽에 달렸다”고 했다는 내용의 외교전문이 공개됐다.#

일본의 아키히토가 물러나고 나루히토가 즉위하면서, 영국 내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의 양위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물론 여왕 본인이나 왕실 및 정치권에서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은 아직 없다.

2019년 8월 11일 영국 일간 타임즈에서 여왕이 브렉시트 문제로 혼돈을 겪고 있는 영국의 정치 현실과 관련해 현 집권 세력에 대해 "inability to govern(제대로 통치를 못 한다, 통치 능력이 없다)"며 답답한 심경을 드러냈다고 보도했다.기사1 기사2

2019년 9월에는 스코틀랜드의 왕실 별장인 발모랄 성에서 휴가를 보내던 도중, 성을 방문한 미국인 관광객들에게 장난을 쳤다는 기사가 나왔다. 여왕을 몰라본 관광객들이 "이곳에 사시냐"고 질문하자 엘리자베스는 "인근에 집이 있다"고 대답하고, "여왕을 만나본 적이 있냐"는 관광객들의 질문에 대해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라고 답하고 옆에 있던 수행원을 가리키며 "저 사람은 여왕을 만나 본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관광객들은 끝까지 여왕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거짓말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관광객들을 속인 것이다. 

2020년 1월에 해리 왕자의 독립과 관련해서 왕실 고위직 회의를 가졌으며, 독립을 승인하였다.#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영국에서도 확진자 4만여 명, 사망자 4천여 명이 넘어가고 보건장관, 보건차관이 감염되고 보리스 존슨 총리마저 감염되어 자가격리를 하던 중 입원하게 되면서 리더십에 큰 공백이 생기자 여왕이 직접 나섰다. 4월 5일, 각종 매체를 통해 발표한 대국민 특별담화에서 여왕은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해 일선 의료진들을 칭찬하고 국민들을 격려했다.#

2020년 6월 25일에는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서 다른 참전국 국가원수들과 함께 추념 메시지를 보냈다. 다만 영상으로 직접 출연한 다른 국가원수들과는 달리 엘리자베스 2세는 출연하지 않고 사이먼 스미스 주한영국대사가 메시지를 대독했다. 메시지 전문

2020년 10월 15일. 7개월 만에 윌리엄 왕세손과 함께 외출하였는데, 노마스크라서 논란이 나왔다.# 하지만 다시 코로나19가 퍼지자 원저 성으로 들어갔다. #

2021년 4월 9일, 70년 넘게 해로한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 공과 사별하였다.# 왕실 성명에 따르면 여왕은 부군을 기리기 위해 당분간 윈저 성에 남아있겠다고 밝혔다. 2020년에도 코로나 때문에 윈저 성에서 보낸 시간이 많었으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일각에선 여왕의 처소가 윈저 성으로 고착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74] 그리고 2022년 3월 6일, 여왕은 "앞으로 버킹엄 궁전을 떠나 남은 여생을 윈저 성에서 보낼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2022년 2월 6일. 즉위 70주년을 맞았다. 기념 케이크를 자르는 등 조촐한 기념행사를 했다. 여왕의 70주년(플래티넘 주빌리) 공식 기념행사는 6월 2∼5일 연휴에 대대적으로 개최된다. 거리 파티, 군 퍼레이드, 팝 콘서트 등 다양한 축하 행사가 진행되었다. 다만 여왕은 모든 행사에 참여하지는 못했고, 참여하지 못한 행사에서는 대신 영상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2022년 9월 6일, 리즈 트러스가 여왕이 머물고 있는 스코틀랜드 발모랄 성으로 향해 신임 영국 총리로서 알현하였는데, 이 모습이 대중에게 공개된 여왕 생전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사망

현지시각 2022년 9월 8일 오후 6시 30분, 위의 전문과 같이 버킹엄 궁은 "여왕이 발모랄 성에서 평온히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사망 당시 여왕의 곁은 장남 찰스 3세와 장녀 앤 공주가 지켰다고 한다.[] 이어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버킹엄 궁 정문에 종이로 여왕의 사망 성명을 게시 하였다. 따라서 여왕의 스코틀랜드 체류 중 사망 시나리오를 상정한 장례 프로토콜인 유니콘 작전이 실행되었다.

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여왕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흑백의 뉴스 대기 화면을 17초간 띄운 뒤 뉴스를 진행하던 앵커 휴 에드워즈(Huw Edwards)가[] 사망을 알리고 그 뒤 여왕의 존영과 함께 God Save the Queen의 1절까지의 반주를 재생하였으며[], 이어 앵커가 고인의 일생과 업적을 기리는 멘트를 하였다.[]

이 날 버킹엄 궁전과 윈저 성에서는 비가 오다가 부고가 나기 몇시간 전에 쌍무지개가 떴다.#

차기 국왕이 된 찰스 3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성명문을 발표하였다

오늘 왕관은 천 년이 넘은 것처럼 우리의 새로운 군주이자 국가 원수인 찰스 3세 폐하께 넘어갑니다. 왕의 가족과 함께 우리는 그의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느끼고 함께 모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우리에게 많은 것을 바친 것처럼 우리는 그에게 충성과 헌신을 바칩니다. 하느님 국왕 폐하를 보우하소서

리즈 트러스 총리는 9월 6일에 취임하였는데, 취임한 지 불과 이틀만에 '여왕의 사망 및 장례'라는 국가 중대사를 겪게 되었다.[] 이후 언론에서는 트러스 총리는 공식 발표가 나오기 2시간 전인 16시 30분 (대한민국 시각 다음날 0시 30분)에 사망 소식을 접했다고 보도하였다. #

역대 영국 왕실 일원 중 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 왕자비(102년 309일), 엘리자베스 왕대비(101년 238일),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99년 303일), 올버니의 앨리스 공녀[](97년 313일)에 이어 5번째로 장수했다.(96년 140일)

사망하기 이틀 전까지 총리를 임명하는 등, 끝까지 여왕으로서 임무를 다했다. 1947년 연설에서 "내 삶이 길든 짧든 평생토록 국민을 섬기는 데 헌신할 것임을 여러분 모두 앞에 선언합니다.(I declare before you all that my whole life whether it be long or short shall be devoted to your service)"라고 말한 것을 마지막까지 지킨 것.

그녀의 사망은 의료진과 가족 모두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비록 임종 전날 모든 일정이 취소되었지만 자주 있는 일이었다. 임종 당일에도 윌리엄 왕세손 가족들은 등교 행사를 하고 있었다. # 그러다가 찰스를 비롯한 직계 자손들이 모두 급히 발모랄로 간 것을 보면, 예상치 못한 급격한 건강의 악화가 있었던 걸로 보인다. 바로 이틀 전인 9월 6일 총리 임명 추인을 위한 리즈 총리와의 대면식에만 해도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고, 얼굴에도 세월로 인해 주름만 도드라졌을 뿐 또렷한 정신이었고 그 외 뚜렷하게 병색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틀동안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진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기업은 아니지만 Apple도 홈페이지에 추모 사진을 게재했다.[]

영국과 악연이나 갈등이 있거나, 원한이 있는 국가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 일에 대한 각종 고인드립과 악플이 넘쳐나고 있다. 한국의 커뮤니티에서도 일부 네티즌들이 거기에 동조하는 정황이 있으나,[] 한국은 영국과 그 정도로 갈등의 역사가 있지는 않았고[] 오히려 영국에 큰 도움[]을 받은 적도 있는 만큼, 자제하자는 발언도 있다[]. 다이애나 스펜서 스캔들로 물의를 빚었다 왕비가 된 카밀라 파커 보울스를 비난하면서 우유부단했던 여왕의 태도도 에둘러 비판하는 여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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