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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베리아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2. 9. 26.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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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에 있는 공화국. 수도는 몬로비아. 공용어는 영어. 인접국가로는 시에라리온, 기니, 코트디부아르가 있다.

라이베리아 건국과 근대

원주민 역사에 대해서 대부분을 구전과 고고학에 의존해야되기 때문에 불분명한 점이 많으나, 원주민들의 상당수가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 서부와 북부에서 왔다고 추정된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과 접촉하면서 '후추 해안', '곡물 해안' 따위의 이름이 붙여진 지역 인근이다. 1602년에 네덜란드가 라이베리아 일대에 마을을 세운 적이 있지만 1년만에 관두었고 영국도 라이베리아 일대를 식민화 하려다가 중단했다. 이 나라가 세워지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아무래도 19세기 미국의 영향이 매우 강하다.

후에 남북전쟁을 불러 일으킨 흑인 노예 문제가 심각해지는 와중에 1821년 미국에서 미국식민협회 주도로 해방 노예들이 아프리카로 역이민했고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 식민지는 1847년 독립하여 라이베리아가 되었다. 사실 정착이 쉬운 일만은 아니라서 초기 해방노예들은 높은 사망률을 기록하면서 정착하는 데 고생했다고 한다.

라이베리아 초기에는 휘그당과 공화당간의 양당체제였지만, 1878년 이후로 1980년까지 휘그당 일당체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독재체제가 결국 라이베리아를 몰락시켜 아이티와 동급의 막장국가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그 옆의 메릴랜드 공화국[]은 1954년까지 식민지로 남아있다가 별개의 공화국으로 독립한 뒤 1857년에 라이베리아에 합병된다.

이 때문에 흔히 에티오피아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시대를 겪지 않은 둘뿐인 나라'로 소개되기도 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라이베리아 지방에 식민지 구조가 성립되지 않았다 뿐이지 '식민(植民)'이란 개념에서는 전형적, 태생적인 식민국가였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식민은 대항해시대 이후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배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례에서 이야기하는 식민은 고대 식민의 개념과 유사하다. 이런 고대 식민지의 대표적인 국가는 페니키아의 식민지였던 카르타고가 있다.

라이베리아라는 이름부터가 Liberia, 즉 해방(Liber, 라틴어)이라는 뜻이다. 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이라는 나름 영예로운 타이틀을 가지고 건국했으나, 정작 미국계 해방노예(Americo-Liberian)들은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에서 온 자신들이 야만스런 토착 원주민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고 미국식 노예제와 신분제도를 도입했다. 흑인 원주민들 중에서도 순진하거나 지적 장애가 있는 미국계 해방노예들을 속여서 다시 노예로 팔아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차별로 인해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라이베리아 당국과 토착민들의 갈등이 심했고, 1904년에 토착민 전원에게 시민권을 부여 철폐되었지만 그럼에도 미국계 라이베리아인들은 1970년대까지도 휘그당의 당권을 차지했으며 경제적으로 이권이 되는 사업에 손을 대고, 토착 부족의 족장 및 왕족 등 상층부와 통혼하며 기득권으로 군림했다. 아메리코 라이베리안들은 영어를 구사하면서 서양식 주택에서 살며 양복이나 바베큐, 잠발리아, 프라이드 치킨을 비롯한 미국 요리, 그리고 개신교를 비롯한 미국 문화와 문물들을 라이베리아에 대대적으로 들여놓았다. 이들은 토착신앙과 이슬람교를 여전히 신봉하고 토착언어를 제1언어로 구사하는 원주민들과[] 문화적으로 큰 차이점을 보였다.

사실 흑인들이 단일 집단도 아니었고,[] 라이베리아는 대다수 흑인 해방 노예들에게 연고지도 아닌 생판 처음 보는 땅이었다. 17~19세기 노예 무역으로 인한 노예 수 증가에 서구 국가들만큼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흑인들도 참여했다는 점은 학계에서도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19세기 노예 무역의 쇠퇴에도 아프리카 내부에서 장기간 존속되어 온 노예 제도는 바로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내부 발전을 위해 활용하기도 했다.[]

그나마 변명하자면 19세기 중엽은 아프리카의 농산물 플랜테이션 사업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노예를 비롯한 노동력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시기긴 했다. 라이베리아만이 돌출된 행동을 한건 아니라는 것. 애초에 본국이었던 미국도 아직 흑인 노예 제도가 폐지되지 않은 상황인데 사고의 전면적 변화를 기대하는게 넌센스일 수도 있고 물론 잘한 일은 절대 아니다. 최소한 본인들도 노예 생활을 했던 케이스기에 더 비판받을 부분이다.

그래도 유럽 및 미국과의 커넥션을 통해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 중에서는 무역이나 교육 등의 면에서 유리한 점을 차지하고 있었고, 국내외적으로 어느 정도 산업화에 성공하기만 했으면 최소한 남아메리카 국가들 정도의 경제력은 갖출 수 있었을 것이나, 내부의 마찰은 결국 10여 년 간의 내전을 부르게 된다. 독립을 하긴 했으나 말이 좋아 독립국이지, 미국의 괴뢰국이나 마찬가지다. 덕분에 독립 이후 미군이 주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을 등에 업고 유럽 아프리카 국가들을 무시하는 라이베리아에 대해, 유럽 열강들과 우간다를 비롯한 여타 아프리카 국가들은 안좋게 봤다. 그리고 라이베리아에서 내전이 터지자 곧장 반군 쪽에 무기를 지원하며 친미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 정권 타도에 힘을 보탰다. 이 시기는 상당히 혼란스러워 심지어 장교도 아닌 상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는 전쟁 발발 일주일만에 미국보다 먼저(1917년 선전포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라이베리아 현대 제 1차 라이베리아 내전


1944년부터 1971년까지 윌리엄 터브먼이 집권하면서 라이베리아는 안정기를 맞게 되었다. 1944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터브먼은 미국계 라이베리아인들과 라이베리아 현지 원주민들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통치를 모색했고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내주는 등 원주민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나마 해소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다졌고, 미국과는 혈맹관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외국자본을 끌여들였다. 그 결과 1950년대에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정도로 고도성장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27년에 걸쳐서 집권했다는 부분에서 어렴풋이 알 수 있듯이 그는 1955년 암살미수사건이 터진 이후로는 야당의 발을 묶고 독재적인 정치를 폈으며 경제성장이 되고 있음에도 교육에 대한 투자는 저조하여 라이베리아의 문맹률은 여전히 높은 수준에 머물게 된다. 이 때문에 근본적인 빈부격차는 해소되지 않아 경제적 부분에서도 명과 암이 뚜렷이 엇갈린다. 하지만 이후의 참상에 비하면 그나마 경제적으로 풍족했고 평화로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라이베리아 장노년층들은 현재와 비교해 이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여튼 1970년대 중반부터 고무와 철광석 가격이 떨어지는 바람에 경제성장도 한계를 맞으며 라이베리아는 현지인들과 이주민간의 갈등이 심화된다.

쿠데타를 일으키며 라이베리아 내전의 막을 연 새뮤얼 케니언 도(Samuel Kanyon Doe, 1951년 5월 6일 ~ 1990년 9월 9일)

결국에는 1980년 하사관들의 쿠데타가 벌어져 토착 원주민계인 크란족 출신의 새뮤얼 케니언 도가 대통령으로 집권한 뒤 미국 출신의 흑인들과 덤으로 기타 부족들까지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쿠데타군은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의 윌리엄 톨버트 대통령 및 톨버트 밑에서 일하던 고관을 살해하여 아메리코 라이베리안 정권을 무너뜨렸고 도 장군은 정권을 획득한 후 독재정치를 실시하여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이에 1985년 11월 12일에는 기오족 출신으로 1980년 도의 쿠데타에 가담했던 토머스 키옹파 장군이 이끄는 기오족과 마노족의 병사들이 도 정권에 반발하여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실패하여 키옹파 및 사무엘 도 정권에 반기를 든 기오족과 마노족의 일원들은 11월 15일 처형되었다. 그 후 도는 자신의 출신부족인 크란족만으로 구성된 라이베리아군(AFL)을 기오족과 마노족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파병하여 보복으로 기오족과 마노족을 학살했다. 1986년 선거에서 도는 대규모 부정 선거를 저질러서 불법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당연히 이에 반발한 미국계 흑인들인 '아메리코 라이베리안'들은 크란족 정권의 박해를 받던 기오족, 마노족까지 총규합하여 찰스 테일러를 중심으로 1989년부터 라이베리아 민족애국전선(NPFL)을 조직하고 저항했다. 이미 1987년에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의 테일러가 새뮤얼 도의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리비아에서 라이베리아 국민애국전선(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을 결성하여 게릴라전의 군사훈련을 받았다.

리비아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테일러는 크란족의 도 정권에 고생하던 기오족과 마노족과 손을 잡고 1989년 12월 24일에 NPFL은 코트디부아르 측에서 국경을 넘어 라이베리아의 님바 군 부토오 마을로 침입하여 체류중이던 크란족 주체의 라이베리아군을 기습해 250명 전원을 죽이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1990년에 접어들며 내전은 라이베리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1990년 1월 4일 새뮤얼 도 정권에 비판적이였다고 알려진 로버트 필립스가 몬로비아에서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그 후 님바 군에서 라이베리아군에 의해 기오족과 마노족 주민 500명이 처형당하자 보복으로 NPFL도 부토오 마을에서 200명을 학살했다. 2월에 친미파이던 프린스 존슨[]이 동료인 기오족과 함께 리비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찰스 테일러의 방법에 반발하여 NPFL에서 이탈하여 라이베리아 독립국민애국전선(INPEL)을 결성하자 찰스 테일러는 존슨을 반역죄로 체포하여 처형한다고 선언했다.

이윽고 수도인 몬로비아를 제외하곤 도 정권과 라이베리아군만으로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미국 국무차관보 아프리카 담당도 새뮤얼 도 정권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고 발언했다. 도 정권 내부에서도 해리 모니바 부통령이 도에게 사임을 요구하는 등, 도 정권은 이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5월에 미국 해병대가 라이베리아 주재 미국대사관의 미국인 구출을 위해 라이베리아에 도착했다. 6월 14일에 몬로비아의 기독교회 관계자가 미국에 내전종결을 위한 미군개입 데모를 몬로비아 주재 미국대사관 앞에서 벌였다. 사무엘 도는 자신의 라이베리아군 간부와 함께 미군의 호휘하에 고향인 그랜드 게데 군까지 안전하게 복귀한다면 금방이라도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에 망명원조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미국은 도 정권의 뒤를 봐주고 있었지만 라이베리아 내전의 근본 원인이 사무엘 도의 독재 정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INPEL의 존슨이 친미적인 성향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존슨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사실상 포기해버린 도는 대통령 관저에서 농성했지만 답이 없다는 것을 판단했는지 당시 나이지리아의 국가원수이던 이브라힘 바방기다 장군에게 서아프리카 각국경제공동체 감시단(ECOMOG)의 중재로 INPEL과의 동맹협의에 나서, 몬로비아의 ECOMOG 본부에 부하 90명을 대동하고 방문하러 나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INPEL의 존슨은 도를 붙잡기 위해 도와 대화하고 싶다고 ECOMOG측에 전했다. 이 말은 도에게 전달되어 존슨을 신뢰한 도는 ECOMOG 본부에서 존슨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존슨은 도의 뒷통수를 쳤다. 그는 도를 체포하기 위해 지프차에 무기를 숨기고 부하 20명을 ECOMOG 본부로 보냈다.

ECOMOG 본부에 들어온 INPEL 병사들은 참모본부에 있던 도의 호위병 90명을 모두 죽인 후 도가 있던 참모본부 2층으로 침입했다. 가나 출신인 ECOMOG 사령관인 아널드 쿠아이노는 저항을 막을 수 없어 도를 INPEL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도는 존슨이 기다리던 INPEL 진지로 연행되어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도는 필사적으로 대화하고 싶다고 애원했지만 존슨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부하에게 명령하여 도의 귀와 코, 손가락을 잘라내는 가혹한 고문을 가한 후에 총살형에 처해버렸다. 이리하여 새뮤얼 도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도가 사망한 후 반테일러의 기치를 내건 만딩고족의 알하지 크로마가 이끄는 무슬림 조직인 라이베리아 민주통일 해방운동(ULIMO)이 무장봉기하여 아모스 소여가 몬로비아만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렇게 끈질긴 내전 끝에 1990년 새뮤얼 케니언 도 대통령이 집권 10년 만에 암살당하고 그 뒤를 이어 아모스 소여의 임시정부가 출범하였지만 내전상황은 정부군과 테일러 측의 갈등으로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찰스 테일러의 NPFL과 존슨의 INPFL은 소여를 인정하지 않았고 1992년이 되자 라이베리아는 사우어파와 테일러파, 존슨파의 3개 세력으로 나뉘어져 분쟁을 벌이 시작했고 여기에 ULIMO에서 분리된 도 대통령 밑에서 일하던 크란족 출신의 루스벨트 존슨의 ULIMO-J파, 같은 크란족인 크로마파 등의 무장세력이 가세하면서 싸움이 더욱 격렬해졌다. 또 NPFL에는 5세 이상의 "차일드 솔저 유닛"이라 불리는 소년병 부대가 있었으며, 다른 무장세력도 동일한 소년병이 있었다. 또 테일러는 인접국인 시에라리온의 반란군 혁명통일전선(RUF)의 리더인 아흐메드 포다이 산코와 연대하여 NPEL은 국경을 넘어 시에라리온에서 RUF와 함께 전투를 벌여 댔다. 1993년에 일시 평화협정에 합의했지만 그 후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이후 7년간의 내전끝에 간신히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찰스 테일러는 대통령에 집권했으나, 이 양반도 곧 독재자가 되어 독재자답게 막장스런 행보를 자랑하였다.

라이베리아 찰스 테일러의 집권과 제2차 라이베라아 내전

찰스 테일러가 선거에서 자신이 지면 다시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사실상 공갈 협박을 대놓고 하며 어찌어찌 대통령으로 집권했지만, 라이베리아 내전은 해결되지 못한 채 결국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이 터졌고 라이베리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되어버렸다. 자세한 내막은 찰스 테일러 문서 참고.

테일러는 집권한 지 1년만에 UN 평화유지군을 추방시켰는데 그 이유는 내전이 끝났으니 평화유지군이 필요 없다는 논리였다. 이에 임무 완료를 선언했던 UN은 이의 없이 철수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테일러의 미친 짓이 시작된다. 1999년 테일러는 시에라리온에 ‘혁명연합전선(Revolutionary United Front)’이라는 이름의 무장 집단을 조직하여 시에라리온 내전이 일어나게 만들었고 여기에 테일러는 라이베리아 전사들을 이 혁명 연합 전선에 보내서 용병으로 참여하게 하여 시에라리온의 도시를 파괴하고, 약탈하거나 민간인 살해를 자행했는데 이 일들을 벌인 이유는 테일러가 시에라리온 내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기 위한 것이였다. 물론 반군을 훈련시키고 지원하는 데에도 역시 다이아몬드 밀무역을 통해 얻은 자금이 투입되었다.

한편 대통령이 된 찰스 테일러가 대통령이 된 이후 공권력을 이용해서 인권 유린을 자행하고 정적을 탄압하는 폭압정치를 펼치자, 새뮤얼 도랑 다를 바가 없다며 테일러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져 갔고, 무엇보다도 테일러가 시에라리온 내전에까지 개입하며 무자비한 전쟁범죄를 저지르자 국제사회에서도 그에 대한 비난여론이 갈수록 거세져갔다. 결국 라이베리아 내 불만세력들이 2000년 2월에 시에라리온에서 ‘화해와 민주주의를 위한 라이베리아인 연합(Liberians United for Reconciliation and Democracy, LURD)’을 결성하며 내전을 재개했는데 이를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시작된 내전은 2001년부터 정부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혀 서서히 테일러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반군들도 막장이 따로 없어서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 국경지대는 반군에 의한 무자비한 강간과 약탈 그리고 온갖 잔학행위가 벌어지며 황폐화되었다. 한편 반군은 여러 지역을 장악해나가며 2003년에 이르러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까지 공격하였고, 이즈음 새로운 반군집단 ‘라이베리아 민주 운동(Movement for Democracy in Liberia, MODEL)’이 출현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이에 2003년 6월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잉크가 채 마르기 전에 다시 내전이 일어났고 LURD는 몬로비아에 대한 무차별 포격을 감행해 1,000여 명이 사망하고 45만 여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특히 2002년과 2003년에 벌어진 2차 라이베리아 내전은 가장 치열한 상황으로 전개되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수많은 아이들에게 마약을 주고 총을 쏘게 하였고, 반군들은 길에서 눈에 띄는 대로 사람들을 사살했다. 정부군 혹은 반군이 되어도 같은 편이 아니면 언젠가는 총을 겨누기 때문에 내전에 참여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다 죽였다. 내전 중반 군이 항구를 점령하면서 도시로 양식이 반입되는 것을 막아 몬로비아 시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고, 차와 설탕으로 끼니를 때웠다. 찰스 테일러가 몰락하기 전인 2003년에는 의사회 본부에서 보내 온 구호품을 통째로 약탈당하고, 임시로 지은 진료소에서 쫓겨나는 일은 다반사였으며, 진료소에는 늘 환자와 강간으로 인해 생긴 사생아가 넘쳐 화장실은커녕 전염병 환자 격리실도 마련할 공간이 없었다. 당시의 참상을 전한 한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의 한 서방국가 출신의 의사는 “유산탄에 등을 맞은 사람이 사지를 모두 잃은 채 실려와서는 이미 숨진 나머지 가족들을 애타게 찾을 때가 가장 가슴 아팠다”고 이야기 했다.

이렇게 내전이 격화되자 UN은 반군들이 항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고, 반군은 테일러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기 때문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테일러에게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고 여러가지 제재조치들이 가해지자 찰스 테일러가 나이지리아로 망명하면서 라이베리아 내전은 막을 내렸다. 테일러가 2003년 8월 "나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연설한 후 라이베리아 대통령직은 모지스 블라가 승계를 하기는 했지만 반군이 이미 수도인 몬로비아를 공격하였고 결국 반군들의 공격으로 테일러 정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UN에서 라이베리아에 50,000여 명의 인력을 파견해 국가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1989년부터 2003년까지 15년의 내전이 끝났다. 2003년 10월에 미국이 동원한 서아프리카 연합군 3,500명이 치안을 담당하면서 라이베리아 정권을 앞으로 책임지는 위원회를 만들고 브라이언트를 의장으로 세웠다. 브라이언트 의장은 미국과 UN의 절대적인 지시와 후원 하에 여러 종파들이 지금까지 친미 흑인 정권과 싸운 반정부 게릴라 10만명 이상의 반군들에 대하여 무장해제를 강행하여 성공했다. 2005년 10월 11일 UN과 서아프리카 연합군의 평화유지 활동에 힘입어 드디어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엘런 존슨 설리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내전은 끝났지만 내전에서 벌어진 잔학행위는 처참하기 짝이 없다. 이 내전에서 약 1백만 명 가량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전투의 진행에 따라서 이웃나라인 시에라리온, 코트디부아르를 전전하며 피난을 해야했지만 문제는 시에라리온과 코트디부아르 이 두 나라 또한 모두 내전에 휩싸인 상태기 때문에 정착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였다, 게다가 국제단체의 구호물자는 무장집단에 의해 약탈당하는 탓에 제대로 된 지원이 되지 않았으며, 정부군이고 반군이고 할 것 없이 자기측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은 부역자로 몰아 살해하고, 고작 10살이 된 어린이까지 징집해 무기를 쥐어주고 전선에 투입시켰다. 민간인에 대한 강간은 물론이고 젊은 여성이나 소녀들을 납치하여 성노예로 끌고 다녔는데, 이런 식으로 라이베리아 내전에 투입된 청소년들이 유니세프가 추산하기로는 전체 청소년 인구의 10%, 강간으로 양산된 사생아들이 1% 였다고 한다. 특히 반군들은 UN군 배치를 앞두고 마지막 기회라며 대대적인 약탈과 징병, 살해, 강간 등을 자행하였다. 고문과 납치도 행해졌다 또한 라이베리아 정부군은 이웃 시에라리온 국민들까지 납치했다.

이러한 이유로 찰스 테일러는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에 반군을 도와준 혐의로 기소되어 UN 국제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결국 형이 확정되었다.

라이베리아 이후

엘런 존슨 설리프(Ellen Johnson-Sirleaf, 1938년 10월 29일 ~ ) (83세)

2005년 10월 11일 대통령 선거 1차 투표가 치러졌다.

1차 투표에서는 22명의 후보가 출마해 조지 웨아 후보가 29.8%, 엘런 존슨 설리프 후보가 19.7%를 득표했다. 1차 투표의 득표율만으로 볼 때는 결선투표에서 웨아가 당선될 것이 유력해 보였고 많은 해외 언론이 그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2005년 11월 8일 2차 투표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10월 11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의 결선투표였다. 1차 투표에서는 과반수 득표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거는 매우 평온하게 진행되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전국 3,000여개 투표소마다 유엔 평화유지군이 배치되었지만 우려할 만한 사태는 없었다.

통신시설과 도로부족으로 선거결과가 확정되려면 1주일은 걸린 것이라는 예측이었으나 라이베리아인들이 높은 관심을 반영한 듯, 선거후 이틀이 지나자 존슨설리프의 당선이 유력하다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지 웨아 측에서는 즉시 부정선거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일부 투표함에서 유권자수보다 많은 투표용지가 나왔다는 것이 웨아측의 주장이었으나 사람들은 대체로 무관심했고 대세에는 지장 없다는 반응이었다. 유엔이나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의 선거감시단도 이번 선거가 투명하고 공정한 선거라는 성명을 내놓았다.

최종결과는 존슨설리프 59.4%, 웨아 40.6%

라이베리아는 2006년 중도 자유주의 성향인 통일당(Unity Party) 소속 엘런 존슨 설리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아프리카의 첫 여성 대통령인 설리프는 기초교육 보급, 평화 정착 등의 성과를 낸 공로로 201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같은 해 재선에 성공했다. 물론 내전으로 인해 GDP는 여전히 세계 최하위에 워낙 장기간에 걸친 내전의 결과로 국가가 피폐해지고 사회적 손실이 막대한데다 지역 여성단체에 따르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현재도 심각한 상태로 매춘을 하는 여성들은 여전히 많다. 게다가 부룬디처럼 무장해제를 거부한 채 버티는 일부 집단들이 다시 들고일어날 가능성도 있어서 아직은 갈길이 멀다.

실제로 2007년 3월 존슨설리프 정부는 정부기금을 횡령한 혐의로 과도정부 대통령 브라이언트를 체포하여 기소했으며, 2007년 7월 17일 브라이언트 과도정부에서 국회의장을 지낸 조지 쿠쿠(George Koukou)와 새뮤얼 도 정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찰스 줄루(Charles Julue)를 중심으로 한 전직 장교들의 쿠데타 기도가 있었으나 사전에 적발되어 실패했다. 여담으로 줄루는 1994년에도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ECOMOG에 의해 진압된 적이 있다.

한편 존슨설리프는 대통령 임기를 2번 연임하며 12년 임기를 모두 채웠다. 이후 유럽에서 축구 선수로 활약한 바 있는, 지난 대선에서 존슨설리프에게 패한 조지 웨아가 2017년 10월 10일 치뤄진 대선에 출마했고, 스포츠 스타의 명성 등에 힘입어 1차 투표에서 39.0%를 받아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 그런데 문제는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로 전직 독재자 찰스 테일러의 전 부인 주얼 하워드를 선택하고 옥중의 테일러 본인과도 통화해서 논란이 되었다.# 실제 선거에서 테일러의 정당이었던 극우 국민애국당과 연합을 해서 이겼는데, 웨아 본인부터가 우파 진영 소속이라 이쪽 지지자들의 기반을 다지려는 목적인 듯하다.

하여튼 이러저러한 논란 끝에 조지 웨아는 결선 투표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018년 1월 22일에 취임했다. # 그리고 찰스 테일러의 전 부인 주얼 하워드 역시 부통령이 되었다. 전 부인이라고 보기도 뭐한게, 찰스 테일러는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면, 내 전 부인 주얼 하워드 테일러에게 투표하라. 주얼이 당선되면 나도 감옥에서 나갈 수 있다”라는 음성을 녹음해 뿌릴 만큼 그녀를 정치적 동지로 여기고 있으며, 덕분에 그의 근거지인 '봉 카운티'에서 주얼 하워드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될 만큼 테일러의 대리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때문에 그와 그녀의 세력을 흡수한 조지 웨아 역시 테일러에게 포섭되어 라이베리아 정치에 다시 테일러가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2019년 6월 7일 조지 웨아 정권의 경제 부진과 고물가에 항의하는 시위가 몬로비아에서 발생했다. #

2021년 7월 18일에 라이베리아 앞바다에서 선박이 침몰해 최소 15명이 실종됐다

라이베리아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

라이베리아 내전이 끝나고 라이베리아에서는 전쟁범죄를 심판하자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세워졌지만 처벌을 받은 사람은 많지 않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범죄 조사 임무만 부여받았고, 집단살해 등 국제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재판소가 창설된 2002년 이후 사건에 대해서만 관할권을 갖고 있다. 또한 라이베리아에서는 르완다, 캄보디아,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처럼 국제재판소가 설립되지도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만약 처벌을 한다면 모든 사람이 살인으로 기소받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극악무도한데다 교화가능성도 전혀 없는 사람 빼고는 사회차원의 제재 및 교정으로 끝내자고 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악명높은 찰스 테일러 및 소수의 전범만 처벌받고 나머지 사람들은 법적 처벌을 면하고 그냥 잘 살아가고 있다.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에 새뮤얼 케니언 도의 귀를 잘라내 출혈로 죽게 내버려둔 군벌 지도자 프린스 존슨이 상원의석에 앉아 있을 정도로 전쟁범죄에 완전한 면책을 준 게 바로 라이베리아다.

프린스 존슨은 이후 기독교인 목사로 변신했으며, 2005년 선거에서 자신의 지역 기반인 님바 지역에서 상원의원으로 출마해서 선출되기 까지 했다. 특히 그는 2010년 9월 BBC와의 인터뷰에서 "'누구도 자신이 특정인을 고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뻔뻔스러운 개드립을 날렸으며, 자신은 압제적인 체제에 맞서 국민을 해방시키려 싸웠다는 점을 강조하고 다만 내전 기간 주민들이 고통을 입었다면 그에 대해 사과한다고 말하며 별로 잘못한 것이 없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또 다른 미치광이 장성 한 명은 한때 수백 명의 민간인을 밧줄로 묶어놓은 채 강물에 빠뜨려 익사시킨 죄가 있었음에도 현재 버젓이 라이베리아의 상원의원을 지내고 있다.

심지어 라이베리아에서 손꼽히는 최악의 학살자가 목회자로 변신하기도 했다.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 반군 지도자로 2만명 이상을 학살한 조슈아 밀턴 블라히인데, 그는 옷을 다 벗은 채 적에게 돌격을 하기도 해서 이른바 "엉덩이 깐 장군(general butt naked)"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목사로 활동하며 과거 피해자들을 찾아 용서를 구하고 있다. 그런데 기가 막힌 사실은 밀턴 블라히는 자신이 목사가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이런 미친 발언을 일삼으며 자신을 정당화하다가 지난 2008년 1월 15일,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에서는 내전 당시 군벌들의 범죄행위를 조사하기 위한 진실화해위원회 청문회가 열렸는데, 블라히는 신발부터 바지, 셔츠까지 모두 하얗게 차려입은 채 청문회에 출석했다. 이 청문회에 증거사진들이 제출되었는데 블라히가 이끌던 ‘벌거벗은 엉덩이 연대’의 소년병들이 사람의 심장을 먹고 있는 모습, 거리 교차로를 사람의 뼈로 장식하는 모습, 처녀 소녀들을 윤간하고 있는 모습들이 찍혀 있었다. 블라히는 자신의 나신이 탄환을 보호해준다고 믿어서 소년병들도 신발만 신은 나체로 전투에 임하게 했다. 심지어 조슈아 밀턴 블라히가 사람의 심장을 먹기도 했다는 잔학행위가 드러나기도 했지만 그는 현재까지도 목회자로 살아가고 있다. 사실 라이베리아 정부가 의도한 측면이 있는게 어지간해선 이런 식으로 죄를 드러내 사회적 응징을 받게 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범죄자들이 득시글거림에도 라이베리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과거의 비극을 들춰내지 말고 그냥 묻어두자는 여론이 더 강하다고 한다. 심지어 헤이그 재판을 받고 있을 당시의 인물들 가운데 우두머리 격인 찰스 테일러 대통령을 지지하는 간판이 몬로비아 거리 곳곳에 걸려 있고 심지어는 테일러를 사랑하는 모임이 운영하는 웹사이트까지 만들어졌다. 사실 이 정도의 헬게이트라면 우리가 소위 문명사회에서 배우고 지켜오는 도덕률 자체가 의미를 잃게 되는 아노미현상이 벌어질 법도 하다. 이를테면 문명사회에서라면 사람 한명을 죽여도 죄책감을 크게 느끼고 자수하거나 PTSD에 시달리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애들도 사람을 킥킥대면서 죽이는 것이다.

또한 테일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라이베리아에서 전범 재판을 해야 한다면 라이베리아 국민 모두가 피고석에 앉아 있어야 한다.", "우리들 중에 손에 피 묻히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냐?"라는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관광시키는 논리를 펼치면서 전범 재판에 반대를 하기도 했다.[19]

흠좀무한 사실은 라이베리아의 많은 가정에서는 강간을 당한 딸을 갖고 있는 동시에 군대에 끌려나가 남의 집 딸을 강간 살해한 아들을 두고 있는 집안이 숱하게 많이 있는 까닭이 있을 정도로 처벌 받을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쉽게 범죄자 처벌을 주장할 수 없는 난감한 처지에 있긴 하다. 그렇게 보면 여성과 어린이들이 가장 두드러지는, 진정한 피해자인 참극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차피 가해자 본인이 평생 고통받을 테니 법적으로는 가능한 용서하고 잊자는 모양이다.

나아가서 라이베리아 역시 칠레 같은 다른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확산은커녕 자국의 이익만 따져가며 필요에 따라 독재자나 전범들도 지원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1973년 칠레 쿠데타 당시 미국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지원했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 정치인들이 하급 전범으로라도 처벌받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라이베리아의 반군 사령관 출신 인사가 이례적으로 스위스에서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 그리고 스위스 법원측은 반군 사령관 출신 인사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라이베리아 경제

오랫동안 내전의 아픔에 시달려 경제가 심각하게 황폐화 된 나라지만, 파나마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제 2위의 선박보유국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단, 이 중 외국 소유 선박이 90%, 아니 99%가 넘는다. 그냥 연안 어업용 통통배를 빼면 전부 다 외국 선박들이라고 보면 된다. 외국 소유 선박이 라이베리아 선적으로 등록하는 이유는 세금이 싸고 규제가 약하니까. 편의치적(FOC) 목적으로 등록하는 것이다. 선박 보유 1위는 파나마이며 역시 같은 이유로 외국 선박이 잔뜩 등록되어 있다. 가끔씩 국내 뉴스 선박 관련 사고를 보면 한국 영해에서 파나마 선적 **호가 라이베리아 선적 **호와 충돌했다 이런 기사를 보게 되는데, 뜬금없이 이역만리 먼 나라의 배들이 왜 한국 영해에 있나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게 다 이런 이유 때문. 전세계 배의 40%는 파나마, 라이베리아, 마셜 제도에 등록되어 있다. 참고로 2019년 기준으로 '실제' 선박보유국 1위는 그리스이다. 그 뒤로 일본, 중국이 있으며 한국은 8위.#

미국, 미얀마와 함께 미터법 단위계 같은 것을 쓰지 않는 나라다. 오죽하면 이 문제로 미터법 좀 쓰라고 해외에서 봉사까지 오겠나. 물론 이는 미국의 강한 영향력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과 깊은 우호관계를 맺음에도 라이베리아가 아프리카에서도 그리 큰 나라가 아니라서 지원금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고 부패문제도 걸려있기도 하며, 세계에서 제2위의 선박보유국 타이틀을 달고 있음에도 인구가 별로 많지 않은데다가 자원이 많음에도 오랜 내전의 여파로 산업은 낙후되었으며 제대로 된 기업도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라이베리아는 전세계 실업률의 하드캐리를 담당하는 곳이며, 실업률 통계가 보통 실제 실업 문제를 축소화해서 나타내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액면적인 실업률 자체가 70%에 인접하는 곳이었다. 2008년발 경제위기로 아프리카까지 영향을 받게 되자 라이베리아의 실업률이 곧 70%의 장막을 뛰어넘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는데 결국 2011년에 CIA에서는 라이베리아의 실업률이 70%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 사실상 실업률 추계를 포기해버렸다. 이 정도 단계에서는 실업률 통계가 실질적 의미를 거의 상실할 정도가 된다. 고용 창출을 논하기 이전에 이미 정부는 그냥 호구가 된 지 오래다. 거기다 암시장의 활성화 등으로 완벽한 헬게이트가 열려있기 때문에 이 정도 단계에선 정확한 수치를 내는 것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이다. 물론 공식실업률이 아닌 비공식실업률은 70%보다는 낮다.

라이베리아 스포츠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장비상의 애로사항으로 인해서 미식축구와 야구는 인기가 별로 없고 주로 축구와 농구가 인기가 많다. AC 밀란과 첼시 FC에서 뛰었던 전설적인 축구선수 조지 웨아가 이 나라 출신이다. 웨아는 200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그리고, 2017년 대권에 다시 재도전하면서 11월 25일까지 2차 결선투표의 결과를 기다린다고 한다. 그리고, 2017년 12월 28일 2차 결선투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자신이 사비까지 들여가면서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FIFA 월드컵에도 도전했으나 2002년 한일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나이지리아에게 승점 단 1점 차이로 밀려서 아깝게 탈락했던 적도 있다.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뛰고 있는 캐나다인 알폰소 데이비스가 라이베리아 출신이다.

2018년 K리그 2 소속의 안산 그리너스 FC가 이 국가 출신의 공격수인 세쿠 코네를 영입했다.

라이베리아의 현 상황

라이베리아는 20여년에 걸친 내전을 거쳐 2006년 민선 대통령의 취임 이후 정치적으로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으나, 경제적으로는 처참하기 짝이 없으며 공권력과 치안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다. 현재 국가 경찰의 재편 및 능력 향상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어 치안유지는 거의 전적으로 UN 평화유지군(UNMIL)에 의존하고 있으나, UN에 의한 민생 치안 유지에도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생계형 범죄가 빈민가를 중심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강도와 강간과 같은 강력범죄가 매우 심각하며 백인을 비롯한 외국인 여인들이 강간을 당해 임신하는 경우가 잦으며 범죄자들은 총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특히 택시안에서 강도를 당하는 사례가 많은데, 특히 다른 승객이 먼저 타고 있는 경우에는 운전자와 승객이 한패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타지 말아야 한다.

아직도 아메리카 라이베리아인과 원주민, 원주민 종족 사이의 갈등과 반목은 종종 집단간의 충돌로 나타나 폭동과 인민재판이 벌어지거나 관공서를 습격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높은 청년층 실업률과 라이베리아의 주수입원인 고무농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폭동 그리고 국가 행정력의 부재를 이유로 불법적인 자원을 팔아넘기거나 마약을 거래하는 범죄의 증가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약 7,200명에 이르는 전직 정부군의 군인과 무장단체 전투원의 사회복귀도 상당히 해결이 어려워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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