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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2. 10. 2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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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2003년부터 2013년까지 제6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재직한 인물이다. 이른바 "과학 발전관"과 "붉은 자본가", "8영 8치" 등의 아이디어를 당의 행동 강령에 집어넣으면서 명실상부한 4세대 중국 지도자로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과학 발전관은 인간을 근본으로 한 '지속 가능한 발전'을 내세운 발상이라고 한다.

2007년의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주요 전략 사상"으로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의 "삼개 대표 사상"과 나란히 당 규약 중에 명기되었다.[] 뒤의 두가지 아이디어보다 원자바오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보기도 한다.

후진타오 초기 이력

중화민국 장쑤성 타이저우에서 태어났다. 명나라 때 절강순무로 재직하며 왜구 토벌에 앞장섰던 호종헌의 직계 자손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찻집 주인 겸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으나 후진타오가 7살 때에 사망했다.

1962년 칭화대학 수리공정과에 입학했고, 1965년 졸업하고 건설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문화대혁명이 벌어졌지만, 하방(下放)[]되지 않고 1968년 간쑤성의 류자샤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 자원하여 베이징에서 벌어지는 문화대혁명의 폭풍을 피해갔다. 이후 간쑤성에서 계속 기술공무원으로 경력을 쌓다가 지방 시찰을 나온 후야오방의 눈에 띄어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발탁되었다.

1982년 9월, 1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85년 9월, 중국공산당 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1985년 구이저우성 당 서기로 임명되었는데, 구이저우가 깡촌 오브 깡촌인데다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후야오방도 1987년 1월 실각하면서, 사실상 여기가 그의 정치적 성장의 한계점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티베트 지역에서 달라이 라마 14세와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는 승려들의 반중 시위가 이어지자, 1988년 12월 당 중앙은 후진타오를 티베트 자치구 당서기로 임명하여 라싸로 급파하였다. 후진타오는 티베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단호하게 소요를 진압하면서 강하고 결단력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급부상했다. 직접 철모를 쓰고 강경 진압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에 덩샤오핑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은 크게 만족했고, 이것이 차세대 주자로 치고 올라가는 발판이 되었다.

덩샤오핑의 적극적 지지 속에 1992년 10월, 중국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파격 승진하면서 중앙 정계의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성장 배경을 가진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단원들을 자기 파벌로 삼아 세력을 키워 1998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되고, 2002년 장쩌민의 뒤를 이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맡은 데 이어 2003년 국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2004년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어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1992년, 덩샤오핑이 장쩌민에게 지위를 넘겨주는 대신 차기 국가 주석은 후진타오로 삼아달라고 요구했고, 장쩌민도 이를 받아들여 이때부터 국가 주석에 등극이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원래부터 본인의 적극적인 권력의지나 카리스마로 최고자리까지 오른 것이 아니라 덩샤오핑 등의 당지도부의 후원 및 계파간 합의에 의해 최고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에, 집권 내내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타협하는 자세로 임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반중 논객의 분석처럼 장쩌민이 뒤에서 수렴청정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다. 후진타오의 공청단은 상하이방 세력보다 당내에 뿌리가 매우 깊고, 특히 상하이방은 60년대생 이후의 세대가 거의 없는 상태로 대부분 노장이지만, 공청단은 공산당의 제도상 계속 충원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더 권력투쟁에서 유리해지게 되어 있다.

러닝메이트인 국무원 총리(정부수반)는 원자바오(온가보温家宝)로 2003년부터 10년간 계속 함께 한 것이 특징이다.

후진타오 동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후진타오는 동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겉으로는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경제적으로도 한국, 일본에게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며 좋은 이미지를 구축했다.

대한민국 정부와의 관계도 좋았다. 연평도 포격전에서 북한의 편을 들어준 것을 제외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시진핑과는 달리 당시 대만의 천수이볜 민진당 정권에 대해서도 유화책을 쓰려고 했으며 인도, 베트남과도 원만한 관계를 가지려 노력했다. 이러한 연유로 2002년에서 2012년 사이의 인도인과 베트남인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시진핑 집권기의 중국과 비교해 굉장히 좋았다.

후진타오 집권 시기 한국과 일본 내에서는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다소 모자란 동네 바보형과 같은 이미지까지 존재했다. 한국 커뮤니티에서는 흔히 대륙 시리즈라고 하여 중국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을 올리는 것이 굉장히 유행했던 적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후진타오 시기의 중국이 가진 이미지를 잘 보여줬던 대목이다. 후임 시진핑 주석의 오만한 행보로 한국과 일본에서 중국에 반감을 가지게 되어 짱깨, 지나 등의 비하적인 명칭으로 중국을 부르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졌지만 후진타오 시기에는 중국을 두고 스스로 대륙, 파트너라고 부르는 경우도 매우 많았다.

이렇게 후진타오 시대에 이루어진 폭발적인 중국의 성장은 대한민국에게 있어서도 중국으로의 수출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어 경제 안정의 토대가 되었고, 대외적으로도 한국을 존중하는 중국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비추어져 국가 이미지도 나쁘지 않았지만 동북공정이나 이어도와 같은 실제적 위협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다가오기도 했다.

후임 시진핑이 중국의 신세대이자 애국민족주의로 뭉친 소분홍 세대를 이끌고 노골적으로 한국을 상대로 동북공정과 문화공정을 진행한다면 후진타오는 한국을 상대로 온건하고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 중국에 호감을 가지게 하고 뒤에서 동북공정을 진행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따라서 후진타오 시대에 이미 고구려 역사 침탈이 본격화됐고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조선족을 앞세워 한복을 등장시켰음에도 당시 한국 대중은 크게 중국에 반감을 가지거나 분노하지 않았으며 가볍게 논란만 되었을 뿐이다.

일본, 북한의 경우도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센카쿠 열도에 대한 위협의 본격화가 대표적이다. 경제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의 최대 수출국 자리를 미국을 제치고 중국이 차지하였다.[] 일본의 최대 무역 흑자국이라는 입장을 이용한 후진타오는 무역과 자원을 무기로 일본을 외교적으로 굴복시키는 모습을 보여 당시 일본인들을 경악시키기도 했다.[] 북한은 김정일 시기 북핵에 의한 대북 제재로 사실상 후진타오 시대 중국에게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종속이 되어 위화도 황금평과 라진항을 50년간 임대해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듯 노골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전랑 외교를 펼치는 시진핑과 달리 후진타오는 겉으로는 유화정책을 펼치며 뒤에서 서서히 잠식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나 일본에서는 오히려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걷는 시진핑보다 후진타오가 장기적으로 훨씬 위험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후진타오 경제 성장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인권 문제

재임 10년(2002-2012)간 중국의 경제규모가 네 배 이상 성장했다. (2002년 1.4조달러, 2012 8.5조 달러) 대침체에도 끄떡 없었지만 그만큼 거품경제의 정도가 심해 부동산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았고 보다 심각해진 양극화와 계층 갈등도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구체적인 중국 경제의 현황은 중국/경제를 참조. 인구 성장은 10년간 1억(12억 → 13억)으로 성장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그만큼 눈앞에 다가온 고령화사회도 중국의 가장 큰 문제로 떠올랐다. 중국의 산아제한정책은 군사정권 시대 한국보다도 더한 수준으로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소득은 겨우 중진국 수준에 불과한 반면, 빠르게 동아시아의 선진국인 한국, 일본, 대만 수준의 초저출산, 초고령화 사회가 닥쳐온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후진타오의 시대에 중국인 평균 수명은 73세까지 올라갔다. 특히 상하이나 선전 같은 경우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중국 내에서는 이런 빠른 경제 성장에 정신없이 달려가는 신세대들이 천안문 사태 세대보다 더 약한 정치 의식을 가지게 됐다. 이른바 '80后(빠링허우)' 세대. 중국판 88만원 세대로 그만큼 현실지상주의의 성향도 강해졌다고 한다. 약간 한국과 10년, 미국과 20년 간격을 띄고 X세대같은 느낌도 난다. 또한 이 시기부터 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으며 쓰촨성 대지진 같은 악재도 있었다. 물론 원자바오 같은 인물이 수습을 했다.

후진타오 시대 경제의 성장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경제 자유화의 혜택을 누렸지만, 당시 1억 5,000만명이 최저 임금제의 보장을 받지 못하고 하루에 1,000원 미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다만 마오쩌둥 시대 문화대혁명 직후에는 중국의 1인당 소득이 인도보다도 더 낮았지만 후진타오 시대에 이르러 1인당 소득이 인도보다 4배 이상으로 뛰어올랐다. 여러모로 빈부격차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성장과 분배를 모두 잡기는 힘들다는 것을 감안하고 본다면 비판을 받더라도 경제적으로 무능하지는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후진타오 시기,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25만에서 30만명에 이르는 중국인이 판결도 받지 못하고 노동 재활 캠프에 감금되었고 범죄 판결 중 목격자를 확보한 경우가 5% 미만이며, 유죄 판결 비율이 99.7%에 육박했다. 정부는 우편물을 검열할 수 있으며, 전화, 팩스, e메일과 텍스트 메시지를 검사할 수 있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이면도 빼놓을 수 없다. 대규모의 올림픽 경기장을 건설하고 못사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공안까지 동원하여 베이징 내 빈곤층을 주거지에서 끌어내리는 강제 이주 조치가 있었다.[]

후임 시진핑과 비교를 한다면 인권문제에 있어서 후진타오는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는 편이나 이것은 시진핑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며 후진타오의 행태 역시도 서방의 기준에선 정상적인 국가 지도자의 모습으로 보기 어렵다.

후진타오 미국과의 관계

후임 시진핑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여 세계 정세를 뒤흔들고 최악의 미중 관계를 만든 것과 달리 후진타오 중국 주석은 미국과 상당히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다. 사진 상단은 2006년 04월 21일, 후진타오 주석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공식방문하여 백악관에 초청받았을 때의 모습이다.

당시 후진타오 주석이 연설을 마치고 계단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부시 대통령이 후 주석의 왼쪽 팔 소매를 잡아끌었다. 부시 대통령은 후 주석을 준비된 계단으로 안내하려고 다른 계단으로 내려갈려는 후 주석의 소매를 잡아끈 것이나, 이때 후 주석이 짜증을 내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이 방영됐다. 소매를 잡아끄는 과정에서 후진타오가 입고 있었던 양복이 찢어졌는데, 알고보니 이게 또 짝퉁 이태리 양복임이 밝혀져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꼴이 되었다.

부시 대통령이 일부러 이러한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해서 별다른 의도 없는 행동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미국의 모든 방송사와 중국 국영 방송인 CC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 발생한 일이라서 말이 매우 많았다. 당연히 중국측에서는 미국의 외교적 결례라며 비판했고, 미국측은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해명했다.

한편 퇴임 전까지 오바마 미국 대통령하고도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이른바 G2라며 세계 양강으로 대우했고 대신 그만한 대국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했다. 이는 중동 문제에서 발을 빼는 대신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아시아 태평양 재균형 전략'의 일원이었다.

후진타오 퇴임

2012년 11월 중국 공산당 제18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 공산당 총서기 직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을 시진핑에게 넘겨주었으며, 국가주석 직에서도 2013년 3월 퇴임하였다.

후계로는 공청단(공산주의 청년단) 파벌인 리커창을 밀었으나, 결국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손을 잡은 태자당의 시진핑이 후임자가 되었다. 리커창은 2인자로 차기 국무원 총리 직을 맡는 것으로 타협했다. 많은 관측자들은 후진타오도 전임 장쩌민처럼 인민해방군 통수권을 가진 직책인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은 몇년 더 유지하면서 자기 세력을 확실히 심어놓을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군대로 인민해방군의 최고 통수권자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다. 마오쩌둥이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라고 설파했듯이, 중국의 최고권력자는 국가주석도 중국공산당 총서기도 아니고 바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다. 덩샤오핑 이후로는 보통 한 명이 세자리를 겸임하면서 당 / 정 / 군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지만, 그렇지 않을때에는 굉장히 미묘한 권력 투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후진타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중앙군사위 주석 직까지 시진핑에게 이양하고 퇴임했다. 여기에는 몇가지 추측이 있다.


자신이 첫 몇 년 간 장쩌민의 눈치를 보며 반쪽짜리 국가원수였던 설움을 후임자에게는 겪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이다. 즉 자신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퇴임함으로써 아직도 상당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장쩌민까지 함께 야인으로 돌아가라는 정치적 메시지로 보인다. 실제로 장쩌민은 18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도 후진타오 바로 옆자리를 항상 차지하는 등 아직 막강한 권력이 있음을 과시하였다.


'깨끗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바로 넘겨주었다는 관측이다.


중앙 군사위 주석 직을 바로 넘겨준 것 자체가 '빚지게 만든 것'이라는 의견이다. 즉 바로 넘겨주는 은혜를 베풀어 자신과 계파인 공청단을 해코지하는 것을 막은 의도라고 해석하는 쪽도 있다. 사실 둘 다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시진핑의 집권 자체가 후진타오의 장쩌민에 대한 대항 의식 때문이고 둘이 연계해 장쩌민을 공격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렇다. 아마도 진실은 후진타오 본인만 알 것이다. 그러나 상하이방 다음의 반부패 타겟은 공청단인게 확실해져가는 분위기이기에 시진핑에게 배신당했다는 의견도 있다.

2017년 춘절을 맞아 차세대 지도자 후보로 꼽히는 후춘화(胡春華) 광둥성 서기와 함께 공개 행보를 벌이기도 했다.

후진타오 퇴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 기념식에서, 장쩌민과 함께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매우 동안이었던 현직 시절[]과는 달리 백발에 노화한 모습이었다. 어느덧 7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들고, 당시 기준 권좌를 떠난지 7년 차의 모습이었다. 시진핑 옆자리 90대의 나이에 접어든 장쩌민보다도 더 늙어보이는 모습을 보였다.

2021년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100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했는데, 2년전과 마찬가지로 백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재임 기간과 달리 흑발 염색을 완전하게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

후진타오 고통과 수난의 10년 권좌

권좌를 차지한 10년 동안 전임자 장쩌민의 상왕 행세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002년, 당 총서기를 이양받았지만 장쩌민은 핵심 요직인 중앙 군사위 주석직을 장악한 상태에서, 기존의 7인 체제였던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의 정원을 9명으로 확대하고 해당 상무 위원에 무소불위의 권좌가 되어버린 정법위 서기[](당시 정법위 서기는 장쩌민의 측근인 뤄간이 역임하고 있었고 그 저우융캉은 공안 부장에 재직할 시절이다.)까지 편입시키면서, 상무위 9명 중 6명 가량을 상하이방으로 채워넣다시피했다.

결정적으로 장쩌민은 궈보슝과 쉬처이허우를 중앙 군사위 부주석으로 삼아, 군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게끔 만들었다. 일련의 과정들은 훗날 후진타오가 중앙 군사위 주석을 인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허수아비로 맴돌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궈보슝와 쉬처이허우가 매관 매직을 통하여 군부 내에 세력을 키우고 후진타오를 철저하게 배제시킨 까닭에, 후진타오 집권시절에 생긴 말이 정령불출 중남해(政令不出中南海, 정책이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 밖으로는 전해지지 않는다.)이었다.

당시 후진타오의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일화로 2004년, 상하이 당 서기였던 천량위가 당 중앙의 거시적 조절 통제가 상하이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면서 원자바오 총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일개 직할시 당 서기가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 위원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하극상이었지만, 정작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를 하지 못했다. 원자바오는 총리급인 상무위원인데 부총리급인 정치국원 천량위에 갈굼에 당할 정도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광역시장겸 시도당위원장이 국무총리에게 대드는 꼴이다.

이렇듯 사방이 장쩌민에게 포위당해, 후진타오가 본인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하던 기류는 2006년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가 부패 혐의로 인해 낙마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후계자 리커창을 지원하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장쩌민과의 권력암투 끝에 두 사람은 상하이방도 공청단도 아닌 태자당의 시진핑을 차기 최고지도자로 합의했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 모두 속내가 달랐던터라, 후진타오는 리커창, 장쩌민은 자신의 절친 보이보의 아들 보시라이를 후계자로 앉힐 생각이었는데, 보시라이가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을 대형사고를 저지르면서 후진타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리커창이 최고지도자가 되고 후진타오계가 상무위원회를 장악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던 장쩌민은 후진타오의 심복 링지화 중앙판공청 주임(쉽게 말해 대통령비서실장) 아들이 페라리를 몰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을 이용, 링지화의 대규모 부정축재를 공론화시켜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회 다수를 장악하려던 후진타오의 계획을 무산시킨 결과, 상무 위원회 7명 중 후진타오계인 공청단은 2명 만이 진출하였고 최고지도자도 리커창이 아닌 시진핑으로 확정되었다.[]

이에 후진타오는 시진핑에게 국가 주석과 중앙 군사위 주석을 한 번에 넘겨주어 상왕정치를 하지않는 대신, 장쩌민도 함께 은퇴시킬 것을 조건으로 내건다. 소위 동귀어진 작전. 그래도 상하이방의 위세가 있으니 장쩌민의 영향력은 쉽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시진핑은 취임하자마자 당과 군의 장쩌민 측근들은 물론 아들까지 부정부패 혐의로 처벌하며 장쩌민을 순식간에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다. 후진타오로서는 매우 통쾌했겠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공청단도 숙청과 좌천을 당하면서 시진핑 1인 독재체제가 굳어졌다. 결국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완전히 실권을 잃고 전직 국가원수의 예우만 받으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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