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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3. 2. 16.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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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7년부터 2023년까지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아시아에서도 축구 약체로 분류되던 베트남 국가대표팀을 맡고 난 이후부터, 2018 AFC U-23 아시안컵(준우승)에 이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4위)에서도 마찬가지로 매 대회마다 팀의 역대 최고 성적을 경신, 베트남 남자 축구에서 역사에 남을 업적을 세웠다.

2018년 동남아 축구연맹 대회인 스즈키컵도 10년 만에 우승시켰고, 직후 2019 AFC 아시안컵에서는 8강에 올랐다. 2019년 동남아시안게임(축구팀은 22세 이하 대회. 각국 올림픽위원회 연합 주관)에서 60년만에 우승을 달성했다[]. 메인 전술은 5-4-1 카운터 어택으로 철저한 실리주의 축구를 추구한다. 2020년 4월 16일자 소식에 의하면 팀 전술의 변화를 시도하려고 한다

박항서 선수 경력

일본 유학생 출신인 아버지는 경찰 간부로 재직하다 부상으로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었고 어머니는 명문 진주여고를 나왔다. 부모는 고향에서 약방을 운영해서 크게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랐다. 축구를 굉장히 늦게 시작했는데 중학생때까지만 해도 장래희망이 군인이었고 축구는 논두렁에서 공차는 게 전부인 평범한 학생이었다.

부모의 높은 교육열에 서울로 상경했으나 처음 목표했던 배재고 진학에는 실패하고 경신고에 진학했다[8]. 배재고 낙방에 좌절하고 있을 때 교실에선 경신고 축구부원들이 공차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차범근이 이곳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이 운명을 갈랐다. 공부보다 축구에 대한 열망이 강해져 그들 사이에 들어가 함께 땀흘리고 싶었지만 신장 166cm에 비쩍 마른체격, 축구부 경력 조차 없는 범생이를 받아줄 축구부는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축구를 하고 싶었던 그는 이경이 당시 경신고 축구부 감독과 절친한 사이였던 자형의 빽으로 겨우 축구부에 들어갔다. 이런 무경력자에게 기회가 올리 없어 6개월간 후보선수로 지냈고, 운동선수 학사관리가 미흡했던 그 시절 관행을 따라 제때 졸업을 못하고 1년을 유급했다.

하지만 종일 축구공을 가지고 훈련하며 빠르게 실력을 키웠다. 1976년 고 3때 전국 청룡기 축구대회에서 결승골을 넣어 경신고에 우승컵을 안겼다. 한양대 2학년이였던 1978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청소년 대표팀 주장을 맡아 우승을 하였다.

이러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많은 언론들과 FC 코리아들이 박항서 감독의 선수 시절을 비주류라고 평가하지만, 정작 박항서는 김용식, 채금석, 차범근을 배출한 축구 명문 경신고에서 6개월만에 주전으로 발탁되었으며, 3대 축구 강호 중 하나인 한양대 축구부에 진학한 선수였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후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실업팀인 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하며 실업선수로서 데뷔하였으며, 곧바로 육군 축구단에서 군복무를 한 뒤 1984년 럭키금성 황소에 창단 멤버로 입단하며 프로 무대에 데뷔하였다. 등번호는 12번. 1985년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리그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86년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어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리고 호적상 만 29살, 실제론 만 31살이던 1988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축구를 늦게 시작했고, 리그 태동기라 실업과 군복무를 거쳤기 때문에 다른 역대 국가대표 감독들에 비해 짧은 4년의 프로선수 시절을 보냈다.[]

참고로 국가대표로 뛴 A매치는 단 1경기. 1981년 3월 한일정기전에서 전반 17분 교체 투입돼 73분간 뛴 게 전부다. 박항서가 지금도 가장 아쉬워하는 선수 시절 커리어라고 한다.

박항서 플레이 스타일

선수 시절 미드필더였으며, 짧으면서도 빠른 패스를 상당히 중요시한 선수였으며, 체력이 좋고 항상 전력을 다하는 근성이 있는 선수라는 의미에서 '악바리'와 밧데리, 대머리 링커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박항서 지도자 시절

은퇴 후 친정 팀 LG 치타스의 트레이너로 선임되어 1996년까지 LG의 트레이너와 코치로 활동했다. 1994년에는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 출전하는 국가대표팀 트레이너로 활동하며 김호 감독을 보좌하였으며,[]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 감독을 맡은 김호 감독을 따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코치로 합류하여 2000년(시즌 전)까지 활동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과 찍은 사진. []

허정무 감독이 사퇴하여 공석이 된 뒤, 후임 대표팀 감독을 보좌할 수석코치로 내정된 박항서는 2000년 12월 20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일본과의 한일 정기전에서 감독 대행 자격으로 경기를 지휘했고[, 이후 히딩크호의 수석코치로 합류하여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까지 대표팀 수석코치[]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했다.[] 그렇게 감독과 선수들 간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면서 한국 대표팀 선수단의 융화를 일구어내며 월드컵 4위의 성과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다.

황선홍이 조별 리그 첫 경기인 폴란드전 때 선취골을 넣고 안기러 간 사람이기도 하다. 진상은 게임 시작 전에 황선홍이 골을 넣으면 박항서 코치를 안아준다고 농담 삼아 말을 했는데 골을 넣어버려서... 옆에 있던 히딩크는 섭섭해 했다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16강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이 결승 골든 골을 넣은 뒤 환호하다가 이내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라운드로 향할 때 다가와서 격하게 환영해주기도 했다. 관련 영상 안정환은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이 장면을 보면서, 이 때 박항서의 키스를 받아 피부가 좋지 않다는 농담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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