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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3. 2. 14.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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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검사 출신 정치인. 現 제35대 대구광역시장.

전직 5선 국회의원, 재선 경상남도지사, 한나라당 원내대표 및 대표, 자유한국당 19대 대선 후보, 자유한국당 대표를 역임한 거물 정치인으로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구광역시장에 당선되어 헌정사상 최초의 민선 복수 광역자치단체장의 타이틀을 얻었다

홍준표 초년시절

1953년 11월 20일(음력 10월 14일)[],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면 남지리 서동마을에서 2남 3녀 중 넷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홍판표(洪判杓). 그의 아버지[]는 무학에다 소작농으로 경제적으로 무능할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 군사정부가 고리채 정리조치를 발표했을 때, 어머니가 법에 따라 고리채를 신고했음에도 사채꾼에게 머리채를 잡혀 보복을 당하는 모습을 목도한 바가 있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창녕군과 합천군, 대구시 등지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 국민학교 시절에 6군데나 전학을 다닐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사귈 수 없어 공부에만 전념했다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고 항상 1등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영양 부실로 인해 국민학교 졸업 당시 키가 겨우 124cm에 불과할 정도로 왜소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도시에서 공부해 보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해서 합천군을 벗어나 대구시 영남중학교에 진학했다. 숙식은 대구 직물공장에 취직한 누나 방에 얹혀 살며 해결하기로 했다.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부친과 8km를 걸어 대구행 버스를 탔는데, 무거운 지게를 진 부친 뒤에서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절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대구 대명동 사글세방에서 누나들이 싸주는 꽁보리밥 도시락을 먹고 공부했다. 그나마 도시락도 없이 혼자 운동장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울 때도 많았다.

그러다 결국 홍준표 하나 때문에 결국 온 가족이 대구로 이사왔다. 비가 오면 물이 새는 셋방 단칸에 온 가족이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사과 행상을,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도 하루 4~5시간만 자고 공부해 영남중학교에서도 1등은 그의 차지였고 학교도 전액 장학생으로 다녀 수업료도 면제였으나, 대경권의 명문고인 경북고등학교가 아닌 영남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경북고는 장학금을 주지 않아서 영남고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영남고가 이른바 꼴통 학교는 아니고 그 지역에서는 나름 괜찮은 학교였다.[] 하지만 경북의 일류 명문고이며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본인에게 컴플렉스였고, 향후의 출세에도 핸디캡이 됐다.

심지어는 대학교 1학년 첫 미팅 자리에 경북여고[] 출신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이 나왔는데 그녀에게 자신도 대구 출신이라고 밝히니 "집이 대구면 경북고 몇 회 졸업생이냐"고 물어봤고 경북고가 아니라고 하자 (경북대)사대부고 출신이냐고 묻고 사대부고 출신도 아니라 하자 그럼 어느 학교냐고 묻자 "영남고등학교다" 그랬더니 답변이 끝나자 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이때 상처를 받은 이후로 미팅 같은 활동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출신 고등학교에 대한 컴플렉스는 검찰 생활까지 이어졌는데, 명문고등학교 출신들이 즐비한 검찰 조직 내에서도 멸시를 받았다고 한다. 중학교-고등학교 동문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는 문화가 만연하여 비주류의 설움을 느껴야만 했고, 법학과 졸업생도 아니었으며[빽 없고 가난한 흙수저 출신인 것까지 더해져서 검찰 내에서도 그야말로 개무시당했다고 한다. 그는 커리어 내내 아웃사이더 또는 비주류를 자처[]했는데, 그 원인으로 출신 고등학교에 대한 열등감, 자신의 가난했던 집안 배경 콤플렉스를 꼽는 사람이 있다.

원래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고등학교 때 원래 이과생이었다. 경북대가 국립대라서 학비가 저렴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마저도 진학할 형편이 못 되어,[] 아버지가 학비와 생활비가 일절 들지 않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라고 해서 육사 시험을 보고 최종 합격 통지까지 받았다.#[] 그러나 어느 날 대구시 토박이가 아닌 아버지가 시장통에서 무시당하는 것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말도 못 하는 모습을 보고 힘없는 이들을 돕는 검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육사를 합격한 자연계생 홍판표가 갑자기 선생님에게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겠다고 입학원서를 써달라고 하자,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서 고대 법대를 보낸 적이 없는데, 1년에 한두 명 붙는 육사 붙었으면 그냥 거기 가지 그러냐, 내가 너 합격하면 장을 지진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설득 끝에 원서를 받아내고 뒤늦게 문과 공부를 시작했는데 진짜로 덜컥 고대에 합격을 해버린 것이었다. 꿈에 그리던 고대에 붙었지만 부모님은 당장 낼 등록금(5만 6천 원)이 없다보니 걱정부터 앞섰고, 아버지는 이웃집의 일을 해주는 대가로 7만 원을 빌려와 등록금을 내주고 남은 1만 4천 원은 한 달 하숙비로 쓰게 했다. 1972년 영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홍준표 고시 공부

대학생 시절에는 사법시험 공부와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등록금 5만 6천 원 + 한 달 하숙비 1만 4천 원 외에는 아무런 돈도 받지 못해 앞으로 쓸 돈은 모두 홍판표가 알아서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5층 여관집에 출퇴근 가정교사를 하면서 1살 많은 제자의 유혹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대학 생활 4년 중 고연전조차 딱 한 번밖에 참여하지 못했을 정도로 바빴다. 당시 고려대학교 동기로는 강희락 경찰청장, 주상용 서울지방경찰청장, 이승재 해양경찰청장, 김성곤 국회사무총장, 박계동 국회사무총장, 송하진 전라북도지사 등이 있다.

그가 대학생 시절 기거하던 종암동의 하숙집 동기들도 유명하다. 당시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이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지척인 현재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때여서, 하숙집 동기들이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이때 같이 친하게 지낸 이들이 박재완 전 기재부장관(서울대학교 경제학과 73학번),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서울대학교 무역학과 72학번), 서충일 전 STX 팬오션 부사장, 정해문 전 주태대사 등이었다.[]

그의 진학 후 더 이상 대구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데다, 뒷집에 불이 났는데 가족들 집까지 다 타서 가족들은 때마침 부친이 현대조선소의 경비원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울산시로 이사 갔다. 경상남도 울산시 중구 복산동(현재 울산광역시 중구 복산동)으로 울산이 당시 막 공업지역이 되어 사람들이 몰려들 때라 홍판표의 가족들 역시 일자리를 찾아 울산으로 이주한 것이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온 어느 겨울 밤, 일당 800원짜리 경비원 아버지[]가 목욕탕에나 봄직한 플라스틱 샤워의자에 앉아 칼바람 부는 바닷가 모래밭에 불을 쬐고 있던 모습을 봤는데[], 그때 "불공평한 세상 한 번 바꿔보자"고 다시금 결심했다고 한다. 대학교 2학년 당시 부친이 추운 모래밭에서 근무하니 회사에서 술이라도 먹고 버티라고 막소주를 줬다고 한다. 고된 노동과 무리한 음주로 몸이 상해서인지 부친은 10개월 만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역시도 "세상이 디비졌으면..." 하는 생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3학년 때인 1974년 동아일보 광고 사태 때 대자보를 써서 선후배들과 함께 성금을 모아 처음으로 동아일보 격려 광고를 낼 만큼 정의감이 강했고, 박정희 유신정권 반대 학생운동을 하며 총학생회 지하유인물을 작성하다가 글씨체로 추적당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8시간 동안 엄청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문제적 인간, 홍준표 그러나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가 남긴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마지막 유언을 따라 대학은 어떻게든 졸업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이상 시국 활동은 하지 못했다. 경찰서에서 풀려나면서 고시 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가게 된다.
사법시험 도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72학번인 그가 6년이나 병역도 미루고 졸업도 미뤄가면서 고시 공부를 이어가던 도중 고려대학교 앞 국민은행 안암동지점에서 일하던 군산여상 출신의 20세(55년생) 여자 은행원 이순삼에게 반했다. '전전반측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한 바 있다. 숫기는 물론 땡전 한푼 역시 없었지만, 같은 은행에 다니는 선배의 도움으로 겨우 데이트를 하고선 "나는 아가씨가 마음에 든다. 나와 앞으로 같은 집에서 살 생각이 있으면, 다음 주 수요일까지 도서관 4층으로 찾아와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월요일 저녁에 이순삼은 정말로 도서관으로 찾아왔고[] 홍판표는 첫 만남의 자리에서 불문곡직하고 "형편이 되는 대로 같이 살자"는 말로 프로포즈를 했다.

전라북도 부안군에 살고 있는 장인, 장모될 분들을 만나러 둘이 내려가서는 인사를 드렸는데, 홍준표가 마음에 안 들었던 장인은 뒤에서 딸에게 "그거 구름잡는 놈이다. 택도 아닌 놈이다. 그런 놈이 고시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했다고. 장모는 "사람 착해 보이니 잘 해봐라"라고 했고, "어떠셨대?" 하고 묻는 그에게 이순삼이 솔직히 털어놨단다. 때문에 용돈은 장모에게만 드리고, 장인어른은 용돈은 커녕 26년간 집에 발도 못 붙이게 했을 정도로 장서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장모에게는 '장인 영감이랑 용돈 나눠 쓰면 다음부턴 장모도 안 드린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쩌다 가끔 장인이 딸을 만나러 집에 온다고 해도 홍준표는 장인이 집에 돌아갈 때까지 일부러 자리를 피했고, 그 사이에 끼어서 이순삼 여사가 가슴앓이를 가장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마지막에는 홍준표가 장인을 모시고 병 수발도 하고, 임종까지 지켰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장인이 "옛날에 잘못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라고 사과하자, 이에 홍준표는 "잘못한 줄 이제 알았습니까. 편하게 가십시오." 라고 하면서 응어리를 풀었다. 그러나 홍준표는 아직도 장인에게 악감정이 있었는지 장인에게 '그 영감탱이' 라고 비하하는 발언까지 했었을 정도였다.

사실, 홍준표가 장인과 갈등이 심했던 것은 비단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홍준표의 어머니 역시 자신의 귀한 아들을 사시 못 붙은 한량이라고 괄시한 바깥사돈에 매우 분노했고, 홍준표가 어머니에게 장인어른을 용서해달라고 빌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별세하기 직전까지도 바깥사돈을 끝내 용서하지를 않았다. 어머니가 용서하지 않은 장인을 아들 홍준표로서도 용서하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동서도 "20년이다. 살인죄도 15년이면 공소시효 끝나는데[] 아직도 그러나..."라고 유감을 표했으나 홍준표는 "어머니께서도 용서하시지 못한 장인을 아들로서 용서하기가 어렵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바깥사돈이 홍준표를 반대한 것처럼 홍준표의 어머니도 역시 명문대 법대생 아들과 달리 며느리 이순삼이 상고밖에 못 나온 것이 눈에 차지 않아서 며느리를 반대해서 결혼 과정이 순탄치가 못했다고 한다. 사실 당시는 대학 진학률이 지금보다 더 낮아서 여자는 고졸에 은행원만 돼도 충분히 능력 있다는 소리를 듣는 시절이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마흔둥이 귀한 아들을 힘들게 고생하고 빚져가면서 법대, 그것도 그냥 법대가 아니라 명문대 법대를 보낸 어머니인지라 아들에 대한 강한 자부심, 그리고 당신은 그런 아들을 둔 어머니라는 자부심이 정말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순삼이 전라도 출신 여자인데다 영호남 간의 지역감정이 지금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하면 심했고 덜하지는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영호남 출신 부모들끼리 결혼을 반대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정말 얼마 안 가서 홍준표는 그녀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신접 살림은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7동 지하 단칸 셋방이었다. 신혼여행은 아산 도고온천으로 갔는데, 고급 호텔에 처음 들어간 신혼부부는 새벽 1시가 되도록 이불도 없이 히터도 되지 않는 방에서 덜덜 떨었다고 한다. 화가 나서 프런트에 항의하자, "경대 앞 버튼을 누르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장난 삼아 눌렀던 버튼이 히터 차단 버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도 사법시험에는 계속 떨어졌고, 결국 군복무를 시작했다. 당시 몸무게가 48kg으로 워낙 말랐기 때문에 보충역 판정을 받고 방위병으로 복무하게 됐는데, 사법시험에 붙지 못해 고향에 가기 부끄러웠던 그는 처가가 있는 전라북도 부안군의 해안초소에서 복무하였다.[]

그렇게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해 철강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사법시험에 대한 미련이 남아 퇴사를 하고 다시 도전했는데, 결국 아내의 5년에 걸친 헌신적인 뒷바라지 끝에 30세, 호적상으로는 29세인 1982년, 드디어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오랜 낙방으로 마음을 내려놓고 기대하지 않았던 마지막 시험에서 합격했는데 마지막 시험도 당연히 불합격인 줄 알고 시험이 끝나자마자 취직을 알아보고 있었고 그게 잘 여의치 않았었는데, 시험 합격 발표일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확인했던 거라고 한다. 같이 합격한 사법연수원 동기(14기)생으로는 추미애, 주호영, 신기남, 정종섭, 권순일, 이기택, 이석태, 채동욱, 김진태 등이 있다.

홍준표 검사 임관

1985년 1월 27일, 홍준표(당시 홍판표)는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청주지방검찰청에서 초임 검사로 임관했다. 이때 같은 청주지검에서 근무하던 황교안 전 총리와도 인연을 맺는다[]. 당시까지는 아명인 홍판표가 본명이었는데, 윤영오 당시 청주지방법원장이 개명을 권유했고[], 그렇게 지금의 이름인 홍준표가 탄생했다.

이 때 부터 홍판표는 홍준표라는 이름을 본명으로 검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공무원 비리, 가짜 녹즙기 사건 수사, 경찰관 뇌물수수, 물 먹인 소고기 납품업자 등의 수사를 진행했다.

당시 청주에서 김석휘 법무부장관의 사돈이 행패를 부리자 검찰간부들이 없는 토요일 밤에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할 정도로 초임 검사 시절부터 소신이 있는 검사였다고 한다.

1987년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으로 부임했다. 울산에 어머니 집이 있었기 때문에 울산 근무를 자처했다. 울산에 내려가서 예전에 아버지가 일한 현대조선소 간부들을 만나 예전에 홍씨 성을 가진 경비원이 있었으니 그 기록을 찾아봐달라고 했지만 홍준표의 아버지는 정식으로 고용되지도 않은 무명의 임시직이라서 끝내 찾아내지를 못했다고 한다.

이 때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 골재 채취와 관련된 동업 사기 사건을 수사하면서 이것이 단순한 사기 사건이 아니라 전두환 대통령의 누나인 전명렬에게 뇌물을 주고 진주시장에게 압력을 넣어 골재 채취권을 따내려 했는데 진척이 더디면서 고소된 권력형 비리임을 확인했다. 내사 과정에서 서울 상계동 일대의 그린벨트를 해제해주거나 서울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 부지를 불하해 주겠다고 하는 등의 혐의까지 드러났다.

홍준표는 전명렬을 조사하기 위해 소환하려 했으나 안기부 간부들이 압력을 가하는데 이어 담당 지청장마저 제지해 포기했다. 이때를 회고하는 홍준표는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는 방법을 먼저 연구하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홍준표 남부지정 특수부 시절

1988년 노태우 정부 출범 후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현 서울남부지방검찰청) 특수부 검사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군부 정권에 대한 비리를 수사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의 매부가 투자한 회사가 부도가 나려 하자 당시 청와대 대통령 친인척관리팀장인 서정희 치안본부 정보분실장이 해당 회사의 부동산을 가치보다 더 높은 값으로 강매하게 하고 받을 수익금보다 더 많이 지급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사실을 적발해 구속 기소했다. 전두환의 외조카인 김영도가 사기죄로 구속된 피의자의 사건을 무마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돈을 받은 사실을 적발해 구속 기소했다.

홍준표 노량진수산시장 사건수사

전두환의 형 전기환이 전두환 대통령 재임 시절 이학봉 민정수석을 통해 당시 노량진수산시장의 사건사고를 빌미로 서울시, 치안본부, 국세청, 감사원 등을 움직여 원 경영주에게 협박, 세무 조사, 보고서 조작 등의 수법으로 노량진수산시장의 경영권을 강탈한 사실을 적발하고 구속 기소했다.

당시 노태우는 5공 청산이라는 시대적인 상황과 상왕 노릇[]을 하려는 전두환에 대한 거부감으로 전두환의 권력형 비리를 어느 정도 척결할 필요가 있었다. 홍준표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타고 크게 활약했지만, 노량진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 중에 전두환 정권 인사인 이학봉 뿐만 아니라 노태우 정권의 실세들도 포함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자칫 현 정권까지 위험하게 된다고 우려한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는 사건을 적당히 덮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홍준표는 이러한 권부의 요구를 무시하고 수사를 강행했다. 통제가 되지 않자 수뇌부에서는 홍준표를 남부지청 특수부에 부임한 지 4개월 만에 형사부로 좌천시켰다.[] 사건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로 이첩되어 이학봉 전 민정수석과 전기환이 구속 기소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홍준표는 검사 동일체 원칙을 어긴 이른바 통제불능 검사로 찍혀 출세길에서 멀어졌다. 원래 명문고 출신도 아니었고, 고려대 안에서도 주류인 법학과가 아니라 비주류인 행정학과 출신이라 특수부나 공안부 발령은 힘들었지만 그 한계를 뚫고 남부지청 특수부에 발령받았고 깨끗한 검사 이미지로 이름을 알리면서 출세의 희망이 보였던 홍준표로서는 뼈아픈 결과였다. 하지만 검찰 엘리트 코스 가운데 하나였던 공안 검사를 하지 않게 되어 당시의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사건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정치인으로서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홍준표 광주지점 강력부 시절

남부지청 특수부에서 형사부로 좌천된 데 이어 1991년에는 아예 광주지검 강력부로 좌천됐다.[] 홍준표는 낙담하지 않고 곧바로 광주의 조폭 국제 PJ파 수사에 착수한다. 전년도 1990년 10월 13일 부로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즈음이었다.

1991년 5월에는 강경대군 구타 치사 사건 이후 일어난 강경대의 광주 노제에서 전경들이 시민을 구타한 사건을 강력 처리했고, 7월에는 조직폭력배들이 지역 건설 업체들에게 개입해 공사 입찰을 담합하게 하고 낙찰가의 일부를 챙기는 사실을 적발해 관련자들을 전부 구속 기소했다. 12월에는 국제 PJ파와 일본 야쿠자의 연대를 포착, 12월 4일 현장을 덮쳐 일망타진하고 32명을 구속시켰다. 홍준표의 광주지검에서의 활약으로 10년 동안 광주 전남 지역에서 성장해 오던 조직폭력배들이 말끔히 청소되었고 광주지검 강력부장은 법무부로 영전하기에 이른다

홍준표 서울지검 강력부 시절

광주지검 강력부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1992년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 검사로 발령됐다.
홍준표는 파키스탄인 폭력조직 주비파 두목 임란 사자드 외 13명을 적발, 체포해 그해 9월 22일 임란 사자드 외 3명에게 사형, 나머지 10명에게는 징역 15년형을 구형했다. 이 사건은 '최초의 외국인 사형구형 사례'로서 각 일간지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당시 이태원을 중심으로 '비키파'와 '주비파'라는 파키스탄 폭력조직이 활동했는데 비키파 조직원이 위조지폐로 귀금속을 사려다 적발되자 주비파 이름을 팔았다. 일명 '주비' 임란은 문제가 커질까봐 귀금속 값을 대신 치르고 비키파를 벼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비파 조직원 일명 고고가 린치를 당해 살해되자 이를 빌미로 비키파 두목 비키(모크테르 아흐메드)와 나나(아흐산 주베르)를 납치해 성남 야산에서 살해한 사건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주비파 조직원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사형, 임란은 15년 형을 최종 선고받고 각각 광주교도소와 안동교도소에 수감됐다. 조직원 중 셋은 5년형, 나머지 일곱 명은 방면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1996년 가을 문제가 된다. 사형수로 5년 째 복역중이던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탄원서를 썼다. 실은 자기들이 한국에 온 지 한 달밖에 안 됐고 조직원도 아니며, 범행 날짜로 알려진 날은 파키스탄 명절로 취업 브로커도 겸하던 임란을 찾아갔다가 얼떨결에 성남 야산에 같이 있었을 뿐인데 임란이 자기들에게 누명을 씌웠다라는 거였다. 그들의 주장으로는 수사팀이 그나마 한국어가 통한다는 이유로 임란의 진술에만 의존해 수사했고, 통역은 엉터리였으며, 심지어 심문 과정에서 경찰이 각목에 젖은 천을 감아 구타하고, 성기에 전기 고문을 가하는 등 13일 간 모진 고문을 했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은 고통에 못 이겨 자백을 강요당했고, 자신과 조직원을 보호하려는 임란의 거짓 진술에 의해 졸지에 사형수가 됐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97년 3월 유엔 인권위원회는 한국 검찰 수사에 문제를 제기하고 한국 정부 측에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 한국 당국은 위원회의 자료 요청에 대해 즉각 응하는 대신, 희생자 및 증인 보호 등을 위해 해당 종결 사건의 기록에 대한 숙독, 촬영, 무단 전제는 제한했다(인권위원회 보고서 10.5항).[]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비록 공판 당시 속기록이 제공되지 않아 사건에 대해 모든 것을 검토할 수 없었다는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한국 사법당국에서 보내온 구속기간 중 신체검사내역서 및 통역인들의 증언을 비롯한 각종 자료, 또한 1심과 2심의 판결 모두 고려한 결과, 위원회는 한국의 법체계(jurisprudence)에 따른 1심과 2심의 판결을 받아들이며, 두 사람에 대한 처우 및 판결에 대해 임의적이거나 사법정의가 부정됐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인권위원회 보고서 14.2항).[] 동년 5월, 5년 형을 마친 나머지 세 조직원은 강제 출국됐고 사형수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98년 2월 자로 종신형으로 감형됐다가 김대중 정부 시절인 99년 2월 '주비' 임란 사자드와 삼일절 특사로 사면을 받아 강제추방됐다.

홍준표는 훗날 2017년 4월 27일 서산 유세 때 유력 대선 주자로서 사형제 부활을 강력히 주장한 바 있다. 흉악범은 반드시 사형시켜야 하며,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인권도 중요하다가 주요 논지인데, 폭력집단과 지속적으로 씨름해온 그의 법조계 이력이 사형제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불러온 것으로 여겨진다. 사형제는 세계적으로도 뜨거운 논란거리이므로 홍준표가 사형제 부활의 당위를 어떻게 주장해 나갈 것인지는 지켜보아야 할 듯.

한편 1992년 사건 당시 사형수 두 사람이 소명 기회도 제대로 갖지 못한 상태는 아니었나 하는 2017년 미디어투데이의 문제제기도 있는 상태다. 김영삼 정부 마지막 3개월만을 남긴 97년 12월 30일 한꺼번에 사형수 23명이 형집행됐을 당시 두 사람은 죽을 수도 있었다. 다만 링크된 기사는 변호사 측 의견만을 기반으로 작성돼 가해자들이 '진범이 아니다'라거나, 유엔 인권위원회의 조사결과와 모순된 그들의 진술을 진실처럼 소개하는 등, 단정적인 태도로 접근한다는 점은 감안하고 판단하길 권한다. 인권위원회의 보고서에는 그들이 주장한 엉터리 통역 가능성에 대해 한국 사법당국이 통역 뿐 아니라 파키스탄 인을 따로 참고인으로 불러 진술 내용을 확인하는 등 충분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고, 고문 주장에 대해서도 사건 종결 전 법정에서 피고와 그 변호인은 고문 등을 입증하지 못했으며 고문 때문에 다쳤다는 귀도 원래 중이염을 앓고 있었음을 밝혔다. 또한 한국 사법체계는 고문자를 엄벌함은 물론 고문으로 인한 자백에 대해 증거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도 보고서에서 다루고 있다(인권위원회 보고서 10.3).[]

1992년 10월 21일에는 보험금 7억 원을 노리고 자기 지하 나이트클럽에 방화한 목포파 부두목 유인호와 행동대장 홍동표 외 6명을 체포, 구속했다.

대검찰청으로 파견된 중, 1993년 4월에는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을 조사했다. 이 때 김종인으로부터 20분만에 뇌물 수수 자백을 받아낸 적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주임검사는 함승희였고[] 홍준표는 당시 슬롯머신 사건을 담당했기에 큰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다만 홍준표가 이 시기에 함승희와 친분을 가지고 있던 점을 감안하면 아예 무관하지는 않은 듯 하다

 

홍준표 평가

법조계에서 부적절한 왕따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홍준표 검사는 매우 올곧고 맡은 바에 충실하고 시대정신이 투철한 정의로운 검사였다. 그만큼 예전의 검찰이 얼마나 부패해서 썩어있었고, 권력에 기생하여 살아왔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권력에 유착하려는 기회주의자들이 그를 왕따시킨 것이다.

홍준표가 자신의 검사 시절을 회고한 저서인 '홍검사 당신 지금 실수하는거요' 의 수기 등을 보면,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온갖 협박에 시달렸다. 권력형 비리 범죄를 파고들다가 사건에 연루된 정부 고위 관료, 선배 법조인들, 안기부(현 국정원)를 비롯한 고위 인사에게 압력을 받았으며, 지역 토착 조폭집단을 소탕하다가 조폭들, 유지들, 또 그들이 로비한 정치인까지 소위 말하는 다구리를 치면서 홍준표를 협박했다. '당신과 당신 가족들을 모두 죽이겠다', '석궁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보내버릴 수도 있다' 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준표는 부당한 강압에 굴하지 않고 권력형 비리와 조폭들의 범죄를 성역없이 수사했다. 자신의 상관이라 할지라도 혐의점이 발견되면 어김없이 구속수사를 해서 죄를 물었고 이런 검사로서의 소명을 끝내 버리지 않았기에 미움을 샀다. 전두환의 친인척들을 수사하여 진작부터 밉보였던 홍준표는 서울지검 남부지청 특수부 발령 4개월만에 전보되어 이후 강력부와 형사부를 전전[]했다. 결국 슬롯머신 비리사건 수사로 노태우 정권의 실세 박철언을 구속하며 그 화룡점정을 찍고 법복을 벗었다.

이 때문에 홍준표는 본인과 가족들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서 김영삼의 제의를 받아 정계에 입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계에 입문했어도 언제나 스스로 비주류를 자처했던 것은 그의 정치성향과 맞지 않게 보수정당에서는 시대를 대표하는 부패한 인물들이 항상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신념에 따라서 거물급 인사들에게 줄서기도 하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래서 홍준표의 정치 인생을 되돌아보면 보수정당과의 정체성과는 결이 다르고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부분도 보여준다.

정치인 홍준표에 대해서는 판단이 각자 다를 수 있겠다. 허나 검사 홍준표는 비리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고, 정의와 법치를 지키려고 들었기 때문에 후배 법조인에게 귀감으로 남았으며 이 부분은 높게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권력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 검사 커리어 동안 젊은 검사 홍준표는 온갖 살해협박과 갖은 권력의 압박을 받았고 검찰조직에게 왕따당했지만, 정치인 홍준표에게는 이것이 상당한 재산이 되었다. 전직 고위 검사였던 홍만표가 연루된 정운호 게이트, 현직 검사장이었던 진경준이 연루된 넥슨 게이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돈봉투 만찬 사건같은 법조계 인사들과 고위 정치인들의 비리가 하나하나 발각되고, 이것들을 청산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시점이기 때문에, '검사 홍준표'로서 보여준 업적은 더욱 대단하다.

이 당시 검찰에 쫓겨나다시피 했던지라 훗날 19대 대선 당시 강력한 검찰 조직 개혁 공약을 내걸었었다. 검찰 조직의 썩어빠진 면모를 지긋지긋하게 겪으며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일부는 홍준표가 법조계 권력을 잡으면 검사 출신이었기 때문에 법조계를 감쌀 거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럴 수가 없는 것이, 홍준표는 검사 시절 대단히 정력적으로 일했음에도 주변의 견제를 받아서 물러난 케이스다. 홍준표가 권력을 잡았으면 정치검사나 줄서기 검사는 타작날 것이 불 보듯 뻔했었다. 따라서 홍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검찰 조직을 문재인 정부처럼 장관을 통해서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권력자로서 직접 개혁할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이명박 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을 약속 받았음에도 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홍준표의 지나친 개혁 의지 때문이었다.[]

최근에 와서 홍준표의 이러한 과거가 다시 발굴되어 유튜브 등지에서 화제가 되자 2030 지지층의 유입을 이끄는 데에 더욱 도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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