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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트로트 가수)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3. 4. 5.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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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가수.

재즈풍 보컬을 통해 한국형 팝을 선도하였던 인물로, 1957년부터 현시스터즈로 데뷔한 뒤 1962년 <밤안개>[8]가 수록된 1집 앨범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주로 이봉조의 곡을 불렀다.

현미는 한국 가요계에 이름을 알린 실력파 트로트 가수다. 파워풀한 가창력과 에너지 넘치는 퍼포먼스로 국내는 물론 전 세계 많은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83년생인 현미는 뮤지컬 집안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노래를 시작했다. 각종 노래 대회에 참가하며 실력을 갈고 닦은 그녀는 결국 2006년 프로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현미는 다수의 히트곡과 앨범을 발표하며 대한민국 대표 트로트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녀의 음악은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경쾌한 리듬으로 유명하며 그녀의 공연은 항상 에너지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미의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An Old Lady'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가사와 현미의 감성적인 보컬이 리스너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트로트 대표 가수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현미는 음악 활동 외에도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활발하고 유쾌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소셜 미디어에서 큰 팬을 보유하고 있으며 라이브 방송 및 기타 이벤트를 통해 정기적으로 팬들과 소통합니다.


전반적으로 현미는 한국 음악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친 재능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가수입니다. 독보적인 스타일과 파워풀한 보이스로 전 세계 팬들을 사로잡으며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현미 활동


8남매 중 셋째로 1.4 후퇴 때 부모, 6남매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당시 평양의 집이 망가져 조부모댁에 두 여동생이 맡겨졌고 1.4 후퇴 당시 피난하지 못하고 북에 남았다. 휴전 직후 두 여동생은 조부모 슬하에서 컸다.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될 때 친오빠와 동행해서 중국 연변에서 한번 만났는데, 그 여동생들의 모습은 아주 불쌍했다. 당시 다큐멘터리

1957년 미8군 위문 공연 무대 칼춤 무용수였던 현미는 방송을 펑크낸 여가수 대신 무대에 오르면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1957년 미8군 SHOW 무대에서도 활동하였다. 당시는 드물게 있었던 여대생 가수라는 메리트를 살려 현 시스터즈라는 그룹으로 활동했고 그 중에서도 센터를 담당했다. 그 때 현미를 눈여겨봤던 작곡가 이봉조는 현미에게 '아, 목동아'라는 팝송 번안곡으로 음반을 만들어줬고 현미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상 데뷔곡인 셈. 당시 곡을 녹음하던 현미의 성량이 너무 커 다른 가수들과는 다르게 몇 발자국 떨어져서 곡을 녹음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1962년 이봉조와 1집을 작업하며 미국의 대가수 냇 킹 콜의 곡에 현미 본인이 직접 작사한 가사를 입혀 '밤안개'를 발표,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다. 사실 본래 '밤안개'가 타이틀곡이 아니었으나 '밤안개'가 타이틀 곡이었던 '당신의 행복을 빌겠어요'보다 인기가 많아지자 뒤늦게 교체하여 재발매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또한 작곡가 길옥윤의 데뷔곡으로 유명한 '내 사랑아'가 수록 되었다. 이후 60년대 대표적인 여가수로 자리매김하며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한명숙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1965년 김기덕 감독 연출,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의 주제곡을 불러서 연달아 히트작을 만들어냈다. 영화 또한 당대 최고의 제작진과 스타가 등장해 히트했고, 이봉조가 작곡한 '떠날 때는 말없이'도 이봉조와 현미의 협업으로 히트했다.

이는 당시 60년대의 히트 공식이었다.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를 이봉조-현미 음악이 어우러지면서 영화와 주제곡이 동시에 히트하면서 60년대의 스타 공식을 이어온 것이다. 실제로 이 곡은 이미자가 선정한 60년대를 대표하는 3곡 중 하나로 선정된 곡이다.

미군 무대 데뷔이래 60년대 연달아 재즈 팝을 불렀던 현미는 1968년 이봉조 작곡집 바람을 부르며 또다시 히트작을 내놓는다.

다만 이 시기에 빠른 템포와 재밌는 가사가 돋보이는 '몽땅 내 사랑'과 '두사람', '애인'도 연달아 히트했으며, 한국적인 엔카풍의 '무작정 좋았어요'도 부르며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며 60년대 초중반에 이어 후반까지도 최고의 스타 반열을 유지했다.

1968년 같은 해 '보고 싶은 얼굴'이란 곡을 발표해 이산가족의 아픔을 표현한 자신의 대표곡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당시 주로 이봉조가 만든 노래만 불렀던 현미는 여러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한국 가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 중에서도 이봉조가 해외 국제가요제 출전에 집중하던 때에 그리스 국제 가요제에 현미와 함께 출전해 '별'로 주요부문에 수상하며 국내외 중저음의 허스키한, 강한 성량의 보컬 능력도 인정 받았다.

여기에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실제로 이봉조는 국제가요제에 출전할 때마다, 사실상 부인이었던 현미와 출전하기 보다는 주로 정훈희와의 파트너로 출전해 주요 상을 수상했다. 국제가요제는 음정의 피치가 높아야 수상에 유리하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현미의 허스키하고 저음이 강한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해서 다른 가수들과 협업을 하다 현미에게 "니도 가요제 한번 안나가야겠나?"라고 물었고, "나가도 노래가 있어야 나가지!"라고 대답한 현미에게 건낸 노래가 '별'이라고 한다. 사실상 이봉조가 최초로 도전하는 서구권 가요제였기 때문에 수상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실제론 수상에 성공했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에 힘 입어 미국 레이건 대통령 취임 파티에 초청받아 한국 대표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인지도가 전무했던 동양인 중년 가수가 미국의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부르자 연달아 기립박수와 앵콜이 이어져 계획했던 것보다 더 다양한 곡들을 선보일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공연은 주로 가스펠 위주로 불렀다고 한다.

70년대 후반부터는 가수 생활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는 이봉조와의 별거로 생활비를 위해서 국내 최초로 '현미 노래교실'을 만들어 연달아서 성공가도를 달렸고 예능 출연을 통해서 재치있는 입담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사실상 이봉조의 유작인 '왜 사느냐고 묻거든'과 2001년 '아내'를 발표하며 히트시켜 현미 독자적으로 가수로서 실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에는 재즈, 팝 풍의 보컬로 한국가요, 팝을 불러 히트쳤다면 90년대 이후부터는 성인가요 트로트로 전향한 것으로 보인다.

2007년 데뷔 50주년 앨범을 발매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고 한국 최초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50주년 기념 앨범과 공연을 발표하자 실제로 패티김이 전화를 걸어 "형님은 노래하는 게 질리지 않냐?"며 "대단하다"고 축하했다고 한다. 현미 자신은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노래를 부를 생각이라 밝혔으며, 2023년 사망하기 전까지도 특유의 입담과 재치로 주로 외부 행사 및 예능 위주로 활동했다.

현미 사망

2023년 4월 4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37분경 서울 용산구 이촌동 본인의 자택에 현미가 쓰러져 있는 것을 팬클럽 회장 김모 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 판정을 받았다. 시신은 중앙대학교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겼다. 

촬영차 미국에 있던 조카 한상진은 인터뷰에서 "이모가 어제까지 정정하셨다고 한다. 건강하게 지방 공연도 다녀오셨는데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셨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사시는 이모가 그렇게 쓰러져, 병원치료도 받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라고 밝혔다

현미 결혼생활

작곡가 이봉조와의 연인관계로 유명했으나, 어느 시기 이후에 이 둘의 관계가 파경을 맞으면서 사실혼이었다는 사실로 밝혀졌다. 현미 측은 이봉조와의 만날 당시부터 이봉조에게 자녀가 있다는 사실은 몰랐으나, 임신 후 결혼까지 약속한 이후에 본처가 찾아와서 알았다고 한다. 실제로 결혼을 약속하고 시댁에도 찾아갔는데, 시어머니라는 분이 참 복스럽게 이쁘게 생겼다면서 가족들 모두가 현미를 좋아해줬다고 한다. 이봉조는 이혼서류까지 보여주며 현미를 안심시키고 살림을 차렸으나 이후에 본처와의 자녀와 자신과의 자녀들의 나이차이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두 집 살림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관계를 정리하자고 요구했다고한다. 그러자 이봉조가 같이 죽자며 칼을 들고 쫓아왔다고 한다. 분위기를 봐서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쳐 엄앵란 집으로 피하자 그 곳까지 쫓아왔는데 이 과정에서 신성일과의 물리적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현미가 관계를 정리하고 본처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몇년간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시누이가 이봉조의 사망 직전 건강이 악화되어 꼭 한번만 찾아가 봐달라는 연락을 받고 현미가 찾아왔는데 이가 다 빠지고 상당히 심각한 상태임에도 본처와의 재결합을 거부하고, 틀니를 낀 상태로 색소폰을 부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서로 오열했다고 한다. 그 결과 다시 재결합을 약속했는데 재결합 직전에 돌연사로 사망했다고 한다. 생전에 이봉조는 본처와의 합장을 원하지 않았다고한다. 실제로 이봉조측의 가족들이 평생 이봉조가 본처와의 합장을 원하지 않았다며 합장을 거부하자, 본처 자식들의 요구와 현미측의 배려로 합장했다고 한다.

현미 그외정보들

2014년 12월 19일 건강보험공단이 공개한 상습 고액체납자 명단에 올랐다. # 사람들을 잘 믿어 돈을 빌려주었다가 못 받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하며 2015년엔 빚이 7억 정도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 집에 도둑이 드는 등 악재가 겹쳐 경제상황이 힘들어지자 난생 처음 고속버스를 타고 행사를 뛰기도 하며, 조카인 매니저가 투잡을 뛰는 바람에 운전면허 취득에 도전하기도 했다.


CNN의 취재에 따르면, 정부와 협업하는 VR전문 회사 Tekton Space의 도움으로, 가상현실로나마 어릴 적 살던 고향을 체험하는 기회를 받았다고 한다. 현미 본인도 6.25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인지라 감회가 새로운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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