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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3. 4. 2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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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한국 대중가요는 조용필과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며, 전통가요인 트로트부터 태생되어 다양한 장르로 분화되는 과정을 지켜봐온 한국 대중음악의 산증인이다. 데뷔 55년 동안 꾸준하게 현역 가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나이가 70세가 넘은 현재도 거의 매년 전국투어 콘서트를 진행 중이다.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태생이다. 경동고등학교[] 1969년 25회 졸업생이다.[] 1968년 고등학생 시절 활동을 시작했고[9], 1979년 "창밖의 여자"로 정식 데뷔했다.[]

국내 탑클래스 가수만이 도전할 수 있는 잠실 주경기장 콘서트에서 7회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콘서트 최다 관객 동원 타이틀도 당연히 조용필이 가지고 있다.[] 그의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0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을 보유하고 있다. LP, 테이프, CD, 음원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히트곡과 한국 내 최대 콘서트 인원 동원 기록, 예술의 전당 7년 연속 공연 기록을 가진 가수다. 말이 필요 없는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지상파 연말 가요대상을 전관왕 4회 및 4연패 두번을 포함해 총 11회를 수상한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1987년 더 나은 음악을 하고자 TV프로 대상 수상 거부를 선언한 결과다.

대한민국 가요계에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한 명이며, 동시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타공인 타종불허 가요계의 제왕이다] 그렇다면 왜 최정상급 가수들도 조용필은 소위 '논외'로 해둘만큼 치켜세울까? 그저 선배라서? 선배 가수가 한둘이 아닐텐데? 아래 영상을 보면 얼추 답이 나온다.

조용필의 음악적 재능, 음악성, 그리고 엄청난 업적도 있지만 그의 겸손함과 끊임없이 배우려는 마인드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다.[] 조용필은 저런 멘션을 그저 웃자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1980년대초부터 정규 19집을 낼 동안 끝없이 자신을 넘고 넘어왔다. 판소리와 락/팝의 접목, 오페라와 락의 접목 등, 장르를 초월한 가수가 그저 되는 게 아니다. 2013년 바운스가 히트할 때도 끝없이 배우고 도전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가왕이란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다름아닌 조용필 자신이다. 2011년 4월의 인터뷰에 따르면 '가왕', '국민가수'와 같은 별칭이 본인에겐 민망하다며 크게 마음에 담아두진 않는다고 한다. 그냥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 그대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한다.[]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가수이기도 하다.[] 당시 9시 뉴스에서 조용필을 따라다니는 오빠 부대 열성팬에 대한 보도를 이례적으로 내보낼 정도였다. 이 단어의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는지 '오빠부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

그리고, 사실상 미8군 출신의 마지막 히트가수이다. 미8군은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시발점이자 중심지였고 프로들의 무대였다. 장르 분화가 강해지고 언더그라운드-인디 개념이 나타나기 전에 바닥부터 올라온 마지막 가수. 전국구 방송이 아닌 지역 기반으로 전국구 스타가 된 마지막 가수다.

조용필은 60년 넘게 가요계에서 활동해온 전설적인 한국 가수다.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조의 음악은 팝, 록, 한국 전통 음악 등 다양한 장르가 혼합되어 있어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엄청난 추종자를 얻었습니다.

조용필은 1968년 앳킨스라는 밴드 멤버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1975년 히트 싱글 '돌아와요 부산항으로'로 가요계에서 인지도를 얻었다. 이 노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한국에서 즉석 클래식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조승희는 두 번째 앨범 '모나리자'를 발매했고 이 역시 대히트를 기록하며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수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1980년대에 조씨의 음악은 좀 더 전자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그는 전자 음악을 실험한 최초의 한국 가수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Woman Outside the Window"와 "Dear Friend"를 포함하여 여러 성공적인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 조씨는 가요계를 잠시 쉬고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했다.

조는 1990년대 초 한국 음악계로 돌아와 "노래를 찾아서"와 "첫 걸음"을 비롯한 여러 성공적인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계속해서 음악을 발표했으며 히트곡인 "Short Hair"와 "Bounce"로 새로운 세대의 팬을 확보했습니다.

2013년 조승희는 콘서트 투어로 가요계 데뷔 50주년을 맞았고 티켓 판매 시작 몇 분 만에 매진됐다. 조씨의 인기는 수년 동안 시들지 않았으며 여전히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수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의 음악은 수많은 아티스트에 의해 다루어졌으며 음악 산업에 대한 공헌으로 수많은 상을 수상했습니다.

조용필 경력

조용필은 경기 화성에서 염전업을 하던 부유한 집안의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학창시절 음악에 푹 빠져 지냈고 결국 고3때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와 심하게 갈등을 겪으며 가출을 하게 된다.[] 이후 1968년에 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출발했다. 미8군이라 하면 현재의 나이트클럽 밤무대같은 걸로 연상한다든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을텐데,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모든 시작이 이루어진 곳이라 할 수 있다. 1960~1980년대의 모든 대중음악 활동의 큰 장이었다.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에서 활동하다가 곧 "파이브핑거스"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주로 미8군 무대에 올랐다. 그러다 1971년 5월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트리오는 드러머이자 타악기 연주자였던 김대환(드럼)[], 조용필,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1972년에는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라는 연주 음반도 발매하였다.[] 이때 발표한 곡 "Lead Me On"이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학생을 위한 뮤지컬 '사랑의 일기'라는 음반에 "님이여", "사랑의 자장가", "케사라", "하얀 모래의 꿈"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게 사실상 조용필의 노래가 들어간 첫 음반이다. 이 때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도 녹음했다. 직후 1972년 스테레오 힛트 앨범 제 1집을 발매하면서 본격적으로 음반을 내는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72년 "그룹 25시"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1973년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복무기간 중에도 퇴근 후 음악 활동을 계속하면서 1974년에는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면서 이 곡과 함께 전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재일교포 고국 방문과 맞물려 발표된 이 노래는 부산에서부터 인기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졌고, 조용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다. 그리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금도 롯데 자이언츠의 1순위 응원가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1979년까지 활동이 금지되었다. 사실 이 대마초 사건은 당시 대마초에 느슨했던 대중예술계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으며 조용필만 연루된 것이 아니라 연예계 전반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조용필 본인은 대마초 파동 이전 활동 및 음반에 대해서 습작 성향이 짙고 부족한게 많아서 부끄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때 조용필은 붙잡혀서 고문까지 당했고 채혈까지 했지만 대마초 성분이 검출되지 않아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애초에 잡혀간 이유가 이 때로부터 거의 10년전에 미군 공연 초창기 시절에 조용필이 친해진 미군의 권유로 대마초를 한번 피웠다가 몸에 안 맞아서 다시는 안 피웠다는 이야기를 과거에 동료들에게 했던 것이, 당시 연예계를 조지려고 들던 검사와 형사들의 조사로 그들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태어나서 딱 한번 피우고 몇 년동안 안 피운 대마초 성분이 몸에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부터 10년이면 중금속도 검출이 안 된다.

1979년 지금의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년 뒤인 1980년에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앨범은 100만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고,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히트하면서 1980년대 최고의 히트 가수가 되었다.

조용필 창업 예술력

한창 활동할 당시엔 노래부터 작곡, 편집, 무대연출까지 못하는 게 없는 초인이었다. 사운드, 공연 퀄리티도 당시 기준으론 압도적이었다. 데뷔곡 '창밖의 여자'는 드라마 주제곡 하나 써 달라는 라디오 PD 주문에 즉석에서 5분만에 작곡한 노래라는 말도 있는데 실제로는 15~20분 정도 걸렸다고 한다. 나는 가수다에서 본인이 직접 밝힌 부분.[] 창법의 경우 현시대의 (믹스보이스적인) 발성과 창법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애초에 창법에 우위 논쟁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 발성이나 창법 자체에 대한 지식이 지금보다 못하던 당시 사정을 생각해보면 이해가는 부분도 있다.

조용필의 가창력은 최정상의 실력이다. 50주년 콘서트 당시 2시간 내내 20여 곡[]을 라이브로 소화했을만큼 그의 목 내구도는 수준급이다.[] 원래 데뷔 초기[]에는 선천적인 미성으로 노래를 했으나, 이후 대마초 파동 당시 자숙하던 도중에 판소리에 매료되어 공부하기 시작하고, 로드 스튜어트와 조 카커 등 허스키한 보컬들의 음악도 참고하면서 지금의 창법이 되었다.[] 한 기자가 '어느 정도의 음역까지 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기타를 만지며 '이게 낼 수 있는 소리 정도는 뭐든지'라고 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보컬 트레이닝과 발성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많은 성대모사에서 볼 수 있듯 고도로 앞쪽에 집중된 비음이 듣기 불편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조용필만의 개성이라고 느끼는 청중 또한 많다. 한편으로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중반까지 상당히 두터운 탁성을 구사한 바도 있는데 이때의 가창스타일이 조용필 커리어의 정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판소리를 연마한 이후로 벨팅스러운 창법을 활용하는데, 특유의 개성있는 톤과 어울려 댐핑감을 선사한다. 다만 입을 벌리는 크기가 작고 상, 하악의 움직임이 큰 편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인 골라도 포함한다.

특이점으로는 저음, 중음, 고음에서의 파장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인데, 보통 파사지오를 넘겨 고음으로 치솟을수록 소리가 커지는 것과 달리 조용필의 경우 세기가 상당히 일정하게 나타난다. 이는 초창기의 발성과 중후반기의 발성이 바뀌면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는데, 9집까지의 발성이 흔히 그 시대 어른들이 말하는 지르는 방식으로 감정 조절보다는 후련하게 내뱉는 판소리식 발성에 가까웠다면, 10집 이후로 앨범에 직접 참여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자신이 만드는 곡에 보컬을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흔히들 생각하는 비음이 강조된 보컬은 바로 이 10집 때부터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원래 밴드 기타리스트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리듬을 굉장히 잘 탄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살펴보면, 특히 중후반기의 앨범의 경우 베이스를 중심으로 꽤 펑키하거나 재즈풍 리듬의 곡(10집-I Love you/모나리자, 12집-내 모습, 13집-어젯밤 꿈속에서, 14집-Jungle City) 이나 뉴웨이브 스타일의 록 음악(13집-꿈꾸던 사랑), 심지어 트립합 (14집-흔들리는 나무)까지 종종 등장하는데, 미묘하게 싱코페이션을 음마다 컨트롤 하는 게 장난이 아니다.

사실 발성으로 따졌을 때 자음을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된소리로 강조하는 방식이 이런 리듬웍과 묘하게 상성이 맞으면서 생기는 효과 중 하나. 이런 점 때문에 단순히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보컬에 맞게 곡을 쓰고 편곡하는 레벨이 상당히 높다고 인정받는다. 라이브를 할 때와 스튜디오에서의 음색이 조금 차이가 있는데, 음반에서는 주로 더블링[]으로 녹음하기 때문에 보컬이 보다 두껍게 들리는 편이다. 라이브에서의 목소리는 그에 비해 가늘지만 커다란 성량으로 이를 어느정도 커버한다.

의외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인데, 본인 노래의 대부분에 코러스까지 다 해먹는(...) 몇 안되는 보컬리스트 중 하나다. 소리 자체가 가늘지만 워낙 다각도로 활용도 잘하고 음정까지 정확하게 딱딱 들어맞는 보컬이라 주멜로디의 화음을 자기 보컬로 다 채워넣으면서 곡을 더 맛깔나게 하는 데에 있어서 초고수다.[] 보통 이런 방식은 주로 블랙 뮤직을 장기로 하는 보컬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이를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킨 부분에 대해서 뮤지션들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활동 초기에는 가창력에 대해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것은 미8군 시절 패티김, 조영남 등의 스탠더드 팝류의 보컬이 트렌드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가늘고 흐느끼는 듯한 느낌의 조용필은 마치 트로트를 연상시켜서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메이저로의 진출 전까지는 감정 표현이 부족한 가수라는 평가도 받았었다. 단지 시대가 만든 편견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그 시대의 전설적인 세시봉 출신이자 가창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송창식이 거의 그 시대 유일하게 그를 꿰뚫어 보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를 단 한명만 꼽아보라는 말에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조용필을 지목했던 일화도 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조용필은 1980년대 음반 뽑아내기에만 급급한 소속 레코드 사와의 갈등 속에서 음악적 퀄리티에 대한 성찰과 고뇌를 이어간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표현하는 자신의 창법[]이 듣기에 과하다고 생각하여 절제하는 창법을 이어가게 된다. 실제로 조용필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식으로 길게 끄는 느낌으로 부르는 게 아니라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의 딱딱 끊는 느낌으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유의 창법은 조용필을 다른 가수들과 구분짓는 특징이 되어 많은 연예인들의 성대모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조용필의 노래를 듣지못한 채 성대모사만 들은 젊은 층들은 조용필을 '특이하게 노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앨범이나 라이브 영상을 보면 노래의 특징마다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재능과 감각이 타고났으나 그뿐만 아니라 그만의 목소리를 만드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있었다. 득음을 하기 위해 노래 연습하다가 각혈이 나오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래 연습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지만 2013년 SBS에서 방영된 조용필 스페셜에서 인터뷰어였던 이승기가 "득음하다가 목에서 피가 나셨다는 일화가 진짜인가요?"라는 질문에 "아니에요. 목에서 피가 나면 죽지요."라며 웃으며 대답했다.[] 재능과 노력이 지금의 명성으로 이어진 것. 이런 창법이 불을 뿜는 대표곡들을 꼽자면 한오백년, 자존심, 한강 등 민요풍 노래 외에도 창밖의 여자, 촛불 등 다른 장르도 가리지 않는다.

음악적으로 시도한 장르도 매우 다양했다. 록 음악(미지의 세계), 팝(Jungle City), 발라드(슬픈 베아트리체), 재즈(단발머리), 일렉트로니카(아하! 그렇지), 블루스(대전 블루스), 민요(자존심), 트로트(허공), 동요(난 아니야), 오페라(도시의 Opera).[] 더 무서운건 저렇게 시도를 하고 대부분 다 성공을 했다는데 있다. 18집에서 안토닌 드보르작의 9번 교향곡(신세계 교향곡)에 가사를 붙인 '내일을 위해'라는 곡에서 오페라가 아닌 클래식, 19집의 타이틀곡인 Hello의 경우엔 버벌진트의 피처링으로 Rap까지 섭렵했다.[]

이러한 수많은 노력과 그의 천재성으로 공존하기 어려워 보이는 장르들이 대중가요라는 하나의 용광로처럼 녹아든 것은 상당수가 그의 공헌이다. 또한 고령의 나이가 무색하게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고, 젊은 트렌드에 맞춰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인데[], 평소 케이티 페리, 브루노 마스, 마룬 5, Imagine Dragons와 같은 음악도 즐겨 듣고[] 19집 작업의 모토를 아예 '음악의 깊이' 보다는 '편안함'과 '세대 간의 융합'으로 잡았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 있다. 그 결과 Hello와 Bounce라는 젊은 가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촌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곡들이 나왔다.

그의 콘서트가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리면, 지하철 배차 간격이 바뀌며, 막차시간이 2시간 연장되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김정일도 조용필의 '허공'을 애청했다고 한다. 물론 남북정상회담 당시였으니 립서비스였을 수도 있지만, 탈북자들이 쓰는 대북 관련 책자들에서도 북한 고위층 자제들이 조용필 노래를 몰래 듣고 다닌다고 하는 얘기 정도는 훨씬 이전부터 나왔었다. 또한 진짜 립서비스였다 하더라도 그 많은 가수 중 조용필을 언급했다는 데서 그의 위용을 알 수 있는 게 된다. 2011년 문화일보가 실시한 창간 20주년 '대중음악사 20년 최고의 가수와 노래' 조사에서 당당하게 가수와 노래 부문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2위는 이승철, 3위가 서태지, 4위가 김건모, 5위가 소녀시대다.

조용필 평가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며, 후배 가수들의 꿈 같은 존재다. 지금은 고인이 된 마왕 신해철이 롤모델로 추앙했던 인물 중 하나.[] 과거 '김혜수의 플러스 유'라는 방송에 출연했을 당시 "마왕으로 불리던 후배 신해철을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질문에 귀여운 후배로 평가해서 진행자 김혜수를 비롯해서 관객들이 뜨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고스트스테이션에선 신해철이 조용필의 히트곡들을 직접 리마스터해서 특집으로 튼 적이 있었는데 혹시라도 혼날까봐 조용필이 곯아 떨어질 것이 확실한 공연날 밤을 골라서 방송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흑역사가 된 서세원쇼에서 N.EX.T가 나왔을 때 조용필과 전화가 연결되었는데 이때 신해철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일어서며 예의를 갖췄다. 그 외 이승철이나 이은미조차도 조용필 앞에서는 고개를 못 든다고 한다. 물론 조용필이 군기반장이란 소리는 아니고[] 존경심에서 하는 소리다.

조용필은 대중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현역 시절의 수많은 음악적 시도의 성공 덕에 대중성과 다양성을 오랜 기간 동안 잡아낸 보기 드문 가수이기 때문. 조선일보의 대한민국의 최고 가수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으며, 2위는 이미자, 3위는 나훈아, 4위는 서태지가 되었다. 조용필이 2위를 하는 경우는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더불어, 방송국이 굽혀주는 몇 안 되는 가수 중 하나로 가요계 배분과 위상이 높은 점에 기인한다.[] 보통 PD들이 가수를 지칭할 때 '~씨'라는 호칭으로 큐시트를 주는데 조용필은 방송국에 떴다 하면 최고위급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사실 조용필만 선생님이라 불리는 건 아니고 이 정도 연배의 배우나 가수들은 모두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당장에 패티김이나 이미자가 방송국에 떴는데 "패티김 씨, 이미자 씨" 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실제로, 2013년 기준으로 각 방송국 예능국장급은 다 조용필과 같은 시대 인물이거나 그 아랫세대다. 이승철이 회상하기로는, 자신의 신인 시절은 PD들의 힘이 워낙 세던 시절이라 어린 가수들이 지각을 하거나 하면 '저기 가서 손 들고 서 있어!' 라고 윽박지르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시절임에도 조용필이 방송국으로 찾아오면 반드시 국장급 이상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이승철의 신인 시절이면 조용필이 중견가수이긴 해도 30대 후반일텐데 이미 그 시절에도 위상이 엄청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국내 역사상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가수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가수이기도 하다. 80년대는 음악 평론이란 것 자체가 거의 전무한 시기였기 때문에 조용필의 크로스오버적인 실험들이 9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조금씩 이야기가 되기 시작했다.

단독 공연으로는 2003년 잠실 주경기장에서 데뷔 35주년 콘서트를 하였으며, 자신의 데뷔 00주년 공연 중 마지막으로 게스트를 초청한 35주년 콘서트에는 신승훈, 신해철, god, 이은미, 장나라, 유열이 출연하였다.[] 이후 수차례 잠실에서 더 공연을 하게 되는데 만석은 기본이었다. 그 중 2003, 2005년, 2018년 공연은 우천 속에서도 매진된 것은 주목할 점이다. 이후 잠실 공연에 도전한 이승환도 우천을 만나며 객석이 비게 되었고, 이후 이문세, 싸이 등도 도전했지만 잠실 주경기장은 쉽사리 만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조용필은 괜히 가왕이 아니다.[]

또한 1999년 말 대중가수 중 처음으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였으며 향후 몇 년간 연말 투어로 그곳에서 마무리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국내 공연문화(콘서트)에 있어서도 선구자이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계속 이끌어오고 있고 현재진행형이다. 해외 아티스트들도 아무나 시도하지 못하는 무빙스테이지를 2010년 국내에 도입했다. 너비 120m, 높이 33m의 초대형 무대는 잠실 주경기장을 80m나 움직였다. 이 2010년 Love in Love 콘서트때 이틀간 10만 관객을 동원했다.

2018 50주년 콘서트도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규모, 조명, 폭죽 모든 게 넘사벽이다. 모든 활동은 전속 밴드 '위대한 탄생'과 같이 하고 있는데 그의 위상과 걸맞는, 대한민국에서는 전설급이라 할 수 있는 세션들만 거쳐갔다. 대표적인 예가 김광민, 송홍섭, 정원영, 유재하, 김종진, 전태관 등이 있다.

2018년 4월 1일과 3일 평양에서 공연된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 평양공연에도 합류했고, 1차 공연에선 출연자 중 가장 많은 4곡을 불렀다

조용필 결론

결론적으로 조용필은 한국 가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전설적인 가수다. 그의 음악은 수백만 명의 삶에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조용필의 음악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고 최고의 자아가 되도록 영감을 주는 음악의 힘에 대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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