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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3. 5. 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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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배우.

1990년대 중후반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기와 탁월한 작품 선택으로 한 시대를 평정하였고, 자신이 출연한 작품 중 그야말로 말이 필요없는 1990년대 흥행성과 작품성을 모두 사로 잡으면서 한국 영화 역사에 새겨넣은 유일한 배우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1980년대 안성기가 충무로의 황제로 영화계 전반을 장악하던 흐름이 90년대에 와서 문성근, 박중훈, 최민수, 이경영 등 신진의 등장으로 점차 파이가 분할되어지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다양성이 발화되던 영화판을 일시적으로 한석규 1인의 시대로 봉합했으니 그 위상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00년대로 가서는 이 파이가 다시 충무로 트로이카[6]로 나뉘게 되며 그 이후로 김윤석, 황정민, 이병헌, 하정우 등 후발주자들이 추가로 대거 등장하면서 춘추전국시대로 돌입한다.

2000년 이후로 흥행 부진을 겪었으나 사극, 블랙 코미디, 스릴러, 정치물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작품 선정과 더욱 원숙해진 연기력을 바탕으로 2010년대부터 다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석규는 한국과 해외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린 유명한 한국 배우입니다. 1964년 3월 17일 서울에서 태어난 한석규는 1980년대에 연기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후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배우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한석규는 처음에는 연극 배우로 시작해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로 전향했다. 1990년 영화 '달은...해의 꿈'으로 데뷔한 그는 1994년 영화 '3호'로 주연을 맡아 눈도장을 찍었다.


그동안 한석규는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줬다. 대표작으로는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시리'(1999), '텔미 썸'(1999), '나의 형제'(2004), '왕실 양복점'(2014), "금단의 꿈"(2019). 1994년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1999년 백상예술대상 등 다수의 연기상을 수상했다.


한석규의 연기는 깊이감과 강렬함으로 호평을 받기 일쑤다. 그는 복잡한 감정을 전달하고 뉘앙스와 미묘함으로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코미디와 드라마틱한 역할 사이를 쉽게 전환하고 항상 매력적이고 기억에 남는 공연을 제공하는 배우로서의 그의 범위로 유명합니다.


최근 한석규는 다수의 인기 TV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연예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또한 한국 연예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며 종종 후배 배우들의 멘토로 여겨진다.

한석규 성우 활동

지금은 배우로 유명하지만 한때는 가수였고 성우 활동도 한 적이 있다.[] 콧소리 섞인 미성에 성우 출신다운 정확한 발음과 발성이 트레이드마크.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그의 목소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다. 광고 내레이션으로 많이 노출된 탓도 있지만…

1984년 제5회 MBC 강변가요제에 동국대학교 동기들과 함께 '덧마루'라는 그룹을 짜서 '길 잃은 친구에게'라는 노래[]를 불러 장려상 입상도 하였다. 이후 육군 병으로 입대하여 제27보병사단에서 박격포 주특기로 복무하며 강변가요제 입상경력 덕분에 분기에 한번씩 문선대 단원으로 차출되었다가 허리부상으로 의병 전역을 하였다.

원래 배우가 꿈이었으나 얼굴에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다고.[] 1990년 KBS 성우로 입사했다가 이듬해 1991년 MBC 공채 탤런트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된다. 라디오 드라마에서 활약하던 성우 한석규를 기억하는 몇몇 오래된 성우팬들은 그를 ‘소년과 청년 역에 잘어울리는 높고 부드러운 미성을 가졌던 젊은 성우’로 회고하기도 한다. 1999년 씨네 21과의 인터뷰를 보면, 성우로 입사했을 당시 절친한 선배인 장세준 성우가 "넌 성우도 어울리지만 내가 보기엔 배우가 더 어울린다."는 말에 도전하여 배우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장세준은 TBC 공채 배우 출신이었다가 KBS 공채 성우로 전향한 케이스이다.[]

김승준 성우가 전속 시절 일화를 말하길(2019년 3월 30일 홍쇼), 정형식 PD가 '사랑으로 크는 나무' 배역에 김승준을 넣을려고 했다가 동기인 한석규를 넣었는데, 굉장히 잘해서 김승준이 놀랐다고 한다. 한석규는 작품 중에 MBC 탤런트 공채 시험이 붙고 성우를 그만두고 김승준 성우가 배역을 이어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홍쇼에서 홍시호가 언급하길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고, 자신이 이 길을 계속 가도 될지 등의 고민을 털어놓았다하며 문선희는 한석규에게 연기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는데 친절하게 잘 가르쳐줬다고 회고했다.

 

한석규 배우 활동

데뷔는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이었는데 큰 비중은 아니었고 지금으로 치면 시즌 1 마지막 부분에 잠깐 나왔다.[]

그 후 여명의 눈동자에서 서북청년단 역으로 단역으로 잠깐 모습을 비춘 한석규는 1993년에 역대 최고 시청률 7위 (61.1%)를 기록한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부드러운 남자 이미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극중 여주인공 김희애에게 의지가 되는 역할로 큰 인기를 끌었고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아들과 딸 직후, 최수종, 채시라와 드라마 파일럿에 캐스팅, 이 드라마 역시 4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확실하게 최고 스타로 군림한다. 파일럿의 대성공 이후 당시 MBC의 가족극이었던 한지붕 세가족의 출연진들이 교체되면서 새로 투입되었고[] 다음 해 1994년, 학교 선배이자 한때는 최고의 파트너였던 최민식과 드라마 서울의 달에 캐스팅되어 자체 최고 시청률 48.7%를 기록, 연타석으로 성공하며 자리를 굳힌다.[]

그러는 도중 마지막 승부 후속드라마로 편성된 박형준, 이시은[]의 미니시리즈 '도전'의 시청률이 영 나오지 않자 오연수와 함께 시청률 상승 카드로 중간에 투입된다. 요즘 같으면 한석규, 오연수 같은 스타들이 시청률 상승을 위해 중간 투입되는 경우는 없으나, 이 때는 공채 시스템이었고 스타여도 방송국에서 하라고 하면 해야 하는 신세였다.

그 뒤에는 1994년 SBS의 모래시계에 대항하기 위해 제작된 까레이스키라는 드라마에 단역중에 단역으로 나왔다.[] 당시 한석규처럼 상한가를 쳤던 많은 스타들은 공채 시스템이라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투입됐다.

이후 호텔을 둘러싼 형제 간의 갈등을 그린 MBC 미니시리즈 호텔을 끝으로 한석규는 영화계로 진출한다. 영화계로 진출한 그가 한동안 드라마판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는 "닥터 봉을 호텔과 함께 찍으면서 체력적으로 상당히 힘들었고, 서로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게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 이전에도 주말극 서울의 달, 일요아침드라마 한지붕 세가족, 수목미니시리즈 도전에 출연하며 무려 3작품이나 겹치기 출연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

한국 영화계를 완벽하게 지배하면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한석규 덕분에 그동안 외면당하고 있었던 한국영화가 국민들의 관심을 되돌려놓게 되고 멀티플랙스에 보급과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크게 일으키게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때는 1950년대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충무로의 질서가 해체되고, 영화계 외부에서 수혈된 새로운 인력들과 대기업과 금융권의 참여로 제작과 유통환경이 개선되면서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모두 한국 영화가 한 단계 도약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 영화는 주먹구구식 가내수공업에서 문화 산업으로 환골탈태한다. 그리고 이 흐름의 최선두에 흥행과 비평 모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인 한석규가 있었다.

드라마의 연속 성공으로 충무로에서도 한석규한테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10여개의 시나리오가 한석규한테 전달되었다.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물인 닥터 봉을 영화 데뷔작으로 선택한 한석규는 홀아비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며 당시 서울 관객 기준 406,443명을 동원, 1995년, 한국영화 관객수 1위를 기록하며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고, 한석규는 이 영화로 그 해 춘사영화상 신인남우상과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신인연기상을 수상하면서 데뷔작 한편으로 90년대 중, 후반 흥행보증수표 한석규의 역사가 시작된게 이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 후에 뛰어난 진가를 발휘하였다.[] 한석규가 데뷔작을 가벼운 코미디로 선택한 까닭은 너무 심각한 주제보다 본인에게 맞는 장르로 무난하게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닥터봉'과 함께 출연을 검토했던 영화는 심혜진, 진희경이 출연하는 스릴러물 손톱이었다.[] 데뷔작 '닥터봉'의 대성공으로 한석규는 단숨에 충무로 최고의 흥행 배우로 떠오르면서 무려 40여 개의 시나리오가 그에게 몰린다.

그 다음해인 1996년, 배우 박성미의 남편인 강제규 감독의 데뷔작이자 CG 및 특수효과 ost가 화제로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그린 한국 최고의 판타지 영화 은행나무 침대에 출연하여 전국 관객 기준 185만 5천명을 동원하며 확실한 관객 동원력과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넓히게 되지만, 캐릭터의 화제성은 다른 배우에게 모두 빼앗긴, 유일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대성공으로 훗날 한국 영화 산업에 진출하게 되는 큰 발판이 되었다.

1997년에는 한석규 전성기의 최고의 해 라고 불리울 정도로 무려 세 작품에 출연하면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이창동 감독의 전설적인 느와르 데뷔작 초록물고기 [] (서울 기준 203,655명), 조폭연기가 인상적이었던 최고의 블랙 코미디이자 조폭 코미디물에 가히 원조로 손 꼽히는 넘버 3(서울 기준 307,617명), 당시 유행하던 PC통신 채팅을 소재로 꽤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던 97년 최고의 멜로 영화이자, 멜로 영화 역사에 교본이 되면서 신세대형 멜로 스타일로 엄청난 열풍을 이끌면서 한국 멜로 영화 부흥기의 서막을 연 접속(서울 기준 804,993명)을 연달아 히트시켰으며, 느와르(초록물고기), 블랙코미디(넘버 3), 멜로(접속)[]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캐릭터에 완벽히 녹아들면서, 역대급 캐릭터를 탄생시킨 것과 동시에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었다. 서울의 달 이후 슬럼프를 겪고 있던 학교 선배 최민식과 초록물고기에서 같이 출연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송강호를 넘버 3에 출연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는 등 능력있는 배우들을 밀어주기도 했다.[]

1998년에는 한석규가 출연한 최고의 작품이자 많은 영화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멜로작품으로 손 꼽히는 멜로 영화의 역대급 대걸작 8월의 크리스마스에 출연했다. 어찌 보면 뻔한 신파 멜로이지만 허진호 감독은 세련된 화법과 형식미로 신파조 멜로를 뛰어넘었다는 극찬을 받았고, 한석규의 연기력도 자연스럽게 잔잔한 일상을 표현하는 역대급 연기력에 많은 관객들의 찬사를 받으면서 큰 호평을 받았다. (네이버 영화 홍성진의 영화해설 인용) (서울 기준 452,930명) 참고로 한석규는 이 영화 OST 앨범에 들어가는 주제곡도 직접 불렀다. 여담으로 ost가 이 영화의 제목과 동일하며, 잔잔하고 큰 울림이 있는 주제곡으로 ost도 크게 호평을 받았다.

다음 해인 1999년, 은행나무 침대 이후로 3년만에 강제규 감독과 재회한 영화 쉬리로 전성기의 최정점과 티켓파워의 최정점을 찍는다. 남북한을 소재로 순 제작비 24억원과 총 31억원의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서 4년만에 완성됐다.

최초로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겨냥하였고 각종 특수효과와 총격전 하드액션 등 많은 화제를 불러모은 이 영화는 98년 재난영화 타이타닉이 가지고 있던 대한민국 영화 관객 동원 1위의 기록을 깨면서 695만 관객[]을 동원, 110억원의 수익을 올리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1999년 한국영화 흥행 순위 1위의 신기록을 달성한 것 뿐만아니라 일본을 비롯하여 아시아 전역에서 쉬리 신드롬을 불러일으켰고 대작영화의 본격적인 탄생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영화의 대성공으로 세계 영화시장에서 한국 영화 진출의 가능성을 제시 해주었고, 그리고 한석규는 이 영화 쉬리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최초의 한국배우가 된 것과 동시에 최초로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한 한국영화 쉬리를 1999년 필모그래피에 채워넣었다.

여담으로 이 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1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1993년에 개봉한 서편제가 유일했으나 이 영화 쉬리가 등장한 이후 서울에서 245만 관객을 기록하면서 이제는 서울에서 100만이 아닌 전국 695만 관객 동원을 성취한 쉬리로 인해 한국영화 흥행순위 판도는 큰 변화의 조짐을 예고하였고, 이 영화 덕분에 한국영화가 본격적인 성장을 하는데 있어서 어마어마하게 기여를 한 작품이라는 평가와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이 영화 쉬리는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크게 일으키게된 최초의 한국영화인 것과 동시에 한국영화계에 최초로 1990년대 한국영화 전체를 대표하는 압도적인 흥행 열풍을 불러 일으켰고, 한국영화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면서 한국 영화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결정적인 방향을 내세우게 되었다. 그야말로 20세기 한국영화의 대표작이자, 쉬리가 한국 영화 역사에 큰 대기록을 남기게 되었고, 이 영화를 본 관객과 평론가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 라는 식의 좋은 반응을 보이게 되면서, 이로서 한석규 필모그래피에 큰 대표작으로 남게 되었다.

그 해 말,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호흡을 맞췄던 심은하와 함께 미스터리 고어 스릴러물이자, 한국 스릴러물에 최고의 수작으로 손 꼽히는 영화 텔 미 썸딩에 출연했다. 전국 관객 기준으로 20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은 성공시켰으나, 앞뒤가 뚝뚝 끊기는 스토리와 영상이 너무 형편없었다. 다만 석연치 않은 결말이 나름 당대에는 충격적인 반전인지라 결말에 대한 입소문이 좋았다.

그리고 이 작품의 평가는 관객과 평론가들의 호불호가 꽤나 갈리면서 극과 극으로 나뉘었고.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보고 난 후, 이게 뭐야? 라는 반응이었다. 그래도 평가면에서는 호불호가 갈렸지만 1990년대 한국영화가 한참 도약하던 시기와 당시 한국영화 중 스릴러라는 장르가 상당히 귀한시절을 감안하여서 당시 한국 스릴러물에 있어서 그동안 볼수없었던 자극적이고 파격적인 장면을 연출하면서 도시적이고 섬세한 스릴러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영화는 한국 스릴러 영화 역사상 걸작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념비적인 수작으로 손 꼽힌다고 봐도 충분할 정도의 가치가 있다. 그, 이유는 당시 한국영화에서 볼수없었던 장면들, 그리고 불친절하면서도 끝까지 관객들의 몰입을 이끌어가는 몰입의 힘도 상당하였다는 점, 나름 세기말에 상당히 흥미롭고도 최고의 반전을 탄생시켰다는 점, 등으로 볼때 매력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스토리를 이 영화에 크게 둿받침 해주면서 큰 화제가 되는등 이 영화의 장점이자 핵심이다.

여담으로 포스터에서 하드고어 스릴러라는 문구를 표방하고 있는데 하드고어는 잔인한 장면이 많이 연출된 것과 피혹은 선혈이라는 뜻을 의미하고 주로 사지절단이나 피하고 선혈이 난무하는 호러 영화에 쓰이는 용어이다. 참고로 하드고어의 목표는 보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당시 한국영화 가운데 중 미술도 상당히 좋은 평을 받았고 하드고어 스릴러라는 장르가 흔치 않았던 시절을 감안한다면 새로운 장르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당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다만 텔 미 썸딩 때문에 박하사탕 출연을 거절했다고 한다.

1995년 닥터 봉을 시작으로 1996년 은행나무 침대, 1997년 초록물고기, 넘버 3, 접속,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1999년 쉬리와 텔 미 썸딩까지 8편 연속 대흥행을 기록하면서 1990년대 중, 후반 한국영화계를 완벽하게 지배했던 한석규는 그러나 1990년대 마지막 작품인 텔 미 썸딩을 끝으로 서서히 하락세를 타게 되었다. 전성기는 짧았으나, 그 장악력과 영향력은 한국 영화 역사상 길이 남을 정도로 전무후무한 수준. 현재의 탑배우들의 존재감을 오롯이 혼자 보유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한석규가 한때 하락세를 겪었던 원인은, 본인의 행실이 나빴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었다. 충무로 진출 이후 단 한 번도 실패작에 출연하지 않았고, 비평에서도 실패한 작품[30]이 거의 없다시피 하여 1990년대 중, 후반은 독보적인 원탑이었다.

1996년 ~ 1999년 씨네21에서 조사한 '충무로 파워 50인'에서도 한석규는 최소 10위권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최고 순위는 1998년에 조사한 2위. 웬만한 유명 제작자와 감독도 한석규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그가 영화계에 끼친 영향력은 2000년대 탑배우들 중에서도 전무후무할 정도로 엄청났다. 이 때 대한민국의 모든 시나리오의 99%가 한석규에게 맨 먼저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 시기 왕성한 활동을 했던 탑배우들보다 한석규에게 먼저 시나리오가 갔고, 그가 거절하면 다음 순서로 다른 배우들이 받아 보는 경향이 업계에서도 당연시 여겨졌다.[] 물론 배우가 시나리오를 선별하는 능력은 중요하지만, 그 까다로움이 너무 지나친 것은 문제였다. 거기다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CF에 전념하는 모습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게 되자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개봉하는 1998년부터 한석규 자체를 고깝게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그의 사소한 행동마저 조금씩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매니저를 맡은 친형 한선규 때문이었는데, 한석규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1차 검토하는 역할도 맡았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판단하는 역할만 했으면 좋으련만, 본인의 능력을 넘어선 영화 제작에까지 관여하다 보니 정작 한석규 본인이 하고 싶었던 작품은 시나리오 선별 작업에서 퇴짜를 놓거나[] 충무로 입성 초기 닥터봉이 크게 성공하여 수많은 시나리오가 들어올 무렵에는 사전에 한석규와 상의 없이 무조건 출연한다고 했다가 나중에 출연 번복을 하거나 개런티가 적다며 퇴짜를 놓기도 했다. 이 당시 발매된 영화잡지와 각종 신문들에 실린 한석규 관련 기사들의 제목은 죄다 "어느 영화에 출연 확정" 이런 식이었다. 한석규에 대한 기자들의 평이 안 좋게 나온 시기가 1996년 무렵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심지어 그 동안 한석규가 벌어 준 돈 수십억 원으로 영화사를 차려서 제작까지 했으나 손익분기를 못 넘겨서 손실도 많았다.[] 1990년대 후반 영화잡지 월간 스크린에서 주최한 핸드프린팅 행사 제의도 단칼에 거절하는 등[] 오지라퍼 행동으로 한석규를 기피하는 제작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동안 한석규의 공백기가 길어지면서 하락세가 되자, 빛을 못 보던 다른 배우들의 도약이 조금씩 시작되었다. 그 결과 굳이 한석규가 아니더라도 연기나 흥행 면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만한 배우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한석규로서는 조금씩 설 자리를 잃게 된 셈이다.

다만 훗날의 한선규의 인터뷰를 들어본다면, 단순히 한선규가 혈연으로 한석규의 매니저를 맡아서 말아먹었다기엔 나름대로의 고충도 심했던듯 하다. 이미 드라마로도 커리어를 나타냈고, 닥터봉, 은행나무 침대를 이어 초록물고기에 캐스팅될때도 매니지를 하는 송강호를 추천해줘서 그의 커리어를 이어나갔고, 나름대로 소속 배우 관리도 잘했으나, 충무로 내에서는 이때까지도 "한석규가 영화 몇편 찍었다고 무슨 배우냐? 쟤는 탤런트지."라고 영화판에서 은근히 깔보는[]상황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작품을 흥행시키며 몸값이 올라가자 역으로 갑질하던 영화제작사들 속에서 을질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한석규의 계약에서 쉬리의 러닝개런티 역시도 한선규의 아이디어여서 수많은 돈을 받았다는 것을 들어보면, 마냥 형때문에 커리어가 망가졌다고는 보기 힘들다.

2003년 1월 영화 이중간첩으로 복귀하기까지 3년 2개월 이라는 공백기를 지난다. 하지만 3년 2개월 동안 마냥 쉰 것만은 아니었다. 신약 개발과 관련된 SF물인 <제노사이드>[39],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광우>에 캐스팅되어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광우의 경우 제작사에 문제가 있어서, 제노사이드는 시나리오 수정이 되지 않아서 영화가 무산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

그 3년 2개월 동안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가 한석규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송강호는 반칙왕으로 씬 스틸러 조연급을 넘어 주연 데뷔에 성공적으로 안착, 공동경비구역 JSA로 자리를 확실하게 잡았으며 최민식은 쉬리를 통해 슬럼프를 완전히 씻어내고 해피 엔드와 파이란으로 정상의 자리를 공고히 다졌다. 설경구는 99년 박하사탕으로 혜성같이 등장하여, 2002년에는 1997년의 한석규처럼 공공의 적, 오아시스, 광복절 특사를 연속으로 히트시킨다. 3년 2개월의 공백기 동안 세대교체가 순식간에 이뤄지게 된것이다.

3년 2개월 간의 공백 끝에 2003년 1월 영화 이중간첩으로 복귀한다. 사실상 한석규라는 이름은 한국 배우 중 최초로 흥행불패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에 굉장한 주목을 받았지만... 한석규는 배우 데뷔 이래 최초로 쓰라린 실패를 맛보게 된다. 69억이라는 제작비가 들었으나 흥행 기록은 서울 361,580명 전국 1,025,928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사실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형편없는 것은 아니라서 차후 어느 정도 재평가되긴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상대 여배우인 고소영의 연기력이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부족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아무리 발연기한다고 욕먹는 배우들도 연기 연습만큼은 어떻게든 단단하 시키고 나오는 시대인지라, 연기력이 부족하다고는 느낄 수 있어도 아주 수준 이하라고 느끼는 경우는 드문데 이 작품에서 고소영이 한 연기는 2010년대에 본다면 정말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형편없었다. 여주인공이라는 사람의 연기가 극악한 수준이니 영화가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것도 욕심이었을 듯.

흥미로운 인터뷰, 이중간첩 복귀 전 공백 기간 동안 한 기자는 왜 공백기를 가졌냐고 묻자, 지금은 한국영화의 거대한 거품이 낀 시기고 이 거품이 다 빠져나간 후에서나 진짜 작품 활동을 해야 할 것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001년 ~ 2003년은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 가는 감독, 작품, 배우들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나온 시기였다(…). 특히 2003년은 박찬욱의 올드보이,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의 장화, 홍련이 한꺼번에 출현했던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황금기였다. 그리고 2014년 12월 손석희 사장과의 인터뷰에서는 부흥기였지만 거품이 굉장히 많은 시기였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지만 영 틀린 말도 아닌 것이 봉준호, 박찬욱을 위시한 몇몇 한국 영화계의 대표적인 거장들과 많은 걸작들이 탄생한 시기였지만 사실 2000년대 초반은 이 감독들의 전성기가 아니라 그들이 그제서야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한국 영화의 명작들 중에서는 정작 개봉 당시에는 그저 그런 흥행과 평가를 받았다가 훗날 재평가된, 시대를 앞서간 작품들도 있다. 다시 말해 당시만 해도 그들의 존재는 한국 영화계에서 지극히 일부였고 오히려 메인스트림에서는 오직 수익만 노리는 개그 + 신파 + 조폭이라는 코드로 묶을 수 있는 2000년대 초중반의 B급 이하의 영화들이 무더기로 양산된 시기이기도 했다.[] 개그+조폭+신파라는 장르마저 새로 만들어도 될 정도로 영화들이 양산되었고 이런 작품의 주연들이 온갖 예능에 출연해서 개봉 1~2주간 후딱 벌어먹고 빠지는 식의 쓰레기스러운 현상이 지속되었던 시기였다. 특히 상술한 명작들도 많았지만, 망작의 대명사인 긴급조치 19호,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주글래 살래, 클레멘타인 모두가 한석규의 휴식기 ~ 복귀 시점인 2002년 ~ 2004년에 나온 작품이다.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현재 2010년대에도 이러한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는게 문제.[]

여튼 한석규는 결국 2003년 프리미어에 손예진과 함께 과대평가된 배우에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는다. #[43] 아이러니하게도 1996년 6월 프리미어에서 선정한 한국 배우 평가에서는 한석규가 당시 최고의 배우로 평가를 받았던 안성기, 박중훈, 문성근, 이경영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이후 형과는 결별했는지 과작(寡作)의 대표적인 배우였던 한석규는 다작(多作) 배우로 거듭나게 된다. 2004년에는 스릴러 영화 주홍글씨, 2005년에는 정치 블랙 코미디 작품인 그때 그 사람들에 출연한다. 주홍글씨의 경우 첫 주에 흥행 1위를 기록하는데 초반의 흥행을 이어나가지 못하면서 하락세가 대폭 심해졌고, 영화 역시 흥미진진한 초반과는 다르게 후반으로 갈수록 뚝뚝 끊기면서 작품성이나 흥행이나 용두사미적인 작품으로 끝났다. 서울 489,254명, 전국 1,437,549명으로 겨우 손익분기점은 넘긴 수준. 한 때의 흥행의 제왕이었던 한석규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대중들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흥행 실패에 가까웠다. 이런 이유로 주홍글씨 개봉시기에 평론가 하재봉은 이제 한석규의 시대는 갔다. 그는 한물 간 배우가 되었다고 대놓고 깠다.

그때 그 사람들은 좋은 소재를 제대로 끌고 나가지 못한 면이 있었고[] 서울 338,025명, 전국 1,083,962명(제작비 60억)을 동원하는 데 그치면서 두번째 영화 실패작으로 남게 된다.

3년이 공백의 무색하도록 2005년에는 또 다른 작품에 출연했는데 초심을 찾기 위한 것인지 안전해보여서 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닥터 봉 이후 10년만에 코미디 영화 미스터 주부퀴즈왕에 출연했다. 하지만 배급사에서도 버린 카드라고 생각했던지 제대로 홍보도 안 되었고[] 개봉 얼마 후에 케이블에서 볼 수 있었다. 서울과 전국 합해 50만 명도 기록 못한 처참한 실패작.

복귀 이후 세 작품을 실패했지만, 그래도 한석규라는 이름에 기대를 많이 했는지 절치부심하는 심정으로 도전했는지 2006년에는 세 작품에 연달아 출연한다. 그것도 단독주연이 아닌 공동주연으로..

영화 스캔들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던 김대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음란서생'은 서울 868,692명, 전국 2,576,022명을 동원했으며, 관객들로부터 작품성 역시 인정받았다. 이로써 그도 침체기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다음 작품인 영화 구타유발자들은 서울과 전국 관객 합쳐 20만 명도 기록하지 못하여 역대 한석규 출연작들 중 최저의 흥행스코어를 기록한 영화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구타유발자들은 상영한지 10여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숨겨진 명작으로 회자되고 있다. 다만 구타유발자들의 경우 영화를 실제 보면 알겠지만 포스터에 한석규가 나올 뿐 실제 한석규는 특별출연에 가까운 느낌이다.[] 원래 제안받은 역할은 이문식이 맡았던 봉연 역할이었지만 시나리오를 곰곰히 검토한 한석규는 문재 역할이 자신에게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고 역으로 제안한다. 다만 한석규 외의 다른 출연배우들의 이름값이 조연에 불과했던 이문식이나 당시에는 올드보이의 감옥사장 정도로나 기억되던 오달수나 신인이었던 차예련, 김시후 등이었기 때문에 크레딧이나 포스터에 얼굴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영화 전체의 흐름을 보면 초반과 막판을 제외하고는 한석규는 얼굴조차 안 비친다. 그런 영향이 흥행에 영향을 준 것도 적지 않다.

그 해 가을 개봉한 8년만의 멜로작품인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은 현실적이고 공감이 간다는 평과 지나치게 밋밋했다는 평 두 가지가 크게 갈리는 작품이었고, 흥행에 실패했다.

2006년에 세 작품이나 출연하며 다작을 했던 한석규는 2007년에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2008년 영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컴백했다. 당초 감독을 맡기로 했던 안권태 감독이 촬영 중반 곽경택 감독으로 교체되면서 대본이 수정되었고, 비중 문제로 안 좋은 말이 나왔던 작품으로 촬영 자체가 험난한 작품이었다. 더구나 같이 개봉했던 작품이 다크 나이트,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미이라 3: 황제의 무덤으로 상당히 불리한 게임이었다. 하지만 그 틈바구니 속에서도 나름 선전, 2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고, 손익분기점도 간신히 넘기고 그나마 중박은 쳤다.

2009년에는 주연으로 영화 백야행에 출연한다. 원작소설도 3권씩이나 되고,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로 나왔어야 할 분량을 2시간 짜리로 압축했으니. --작품 완성도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2010년, 한석규는 코미디 영화인 이층의 악당을 통해 다시 도전했다. 특히 닥터봉을 통해 서로에게 윈윈이었던 김혜수와의 합작이어서 많이 기대했고 그 전과는 달리 이번엔 2005년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한 손재곤 감독과의 작품이었는데 촬영 전부터 좋은 시나리오라며 호평을 들었고 또 평론가들 역시 호평을 아끼지 않으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기대도 컸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한석규는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위상이 확연히 다르다. 이렇게 몰락하게 된 이유는 4년간의 공백으로 한석규의 역할을 대신 할 배우들인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 황정민 등이 급성장했고, 한석규 역시 2000년대 선택한 작품들이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며 많이 밀리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선구안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사실 선구안도 문제지만 한석규 외에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들이 많이 생겨났고, 굳이 그 개런티 줘가면서 한석규를 쓸 이유가 없으니 21세기 들어서는 시나리오가 애초에 잘 안 가게 되었다.[]

한석규의 부진에 대해 너무 검증되지 않은 신인감독과 작품을 한다는 것을 원인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어느 정도 타당한 이야기. 대부분의 흥행배우들을 보면 감독과 배우들이 인맥으로 같이 가는 경우가 많은데, 한석규의 경우 신인감독과의 작품을 고집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박찬욱, 김지운, 이창동, 봉준호 감독 등 검증된 감독과 작품을 하는 최민식, 송강호라든지, 강우석, 윤제균 감독 및 그 연출부 출신들과 작업을 하는 설경구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한석규의 경우 데뷔작을 같이 했던 이광훈 감독은 닥터 봉 이후 패자부활전, 자귀모, 천년호라는 영화 팬들은 알만한 최악의 작품을 연속으로 연출하며 2003년을 끝으로 영화계에서 자취를 감췄고 현재 뉴욕에 거주중이다. 그리고 은행나무 침대와 쉬리를 같이했던 강제규는 현재 제작에만 전념하며 가뭄에 콩 나듯 연출하다가 마이웨이의 실패와 한중합작영화 제작 실패 등등의 악운이 겹쳤으나 다시 영화연출을 하게 되었다. 한편 초록물고기의 이창동 감독과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감독은 활발하게 작업을 하는 감독이 아니고 접속과 텔 미 썸딩을 같이 했던 장윤현 감독은 그 후 썸, 황진이, 가비가 연속으로 실패해버렸다. 거기에 넘버 3의 송능한 감독은 아예 영화계를 떠났다. 즉, 8편 연속 흥행으로 1990년대 전성기를 가져다 준 감독 중 현재에도 활발하게 작업을 하고 있는 감독들이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이층의 악당까지 실패하자 한석규는 15년 간 하지 않았던 TV 드라마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된다. 2011년 하반기 SBS 수목 드라마인 뿌리깊은 나무에 세종 역으로 복귀. 욕쟁이 세종(…)장난끼,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리고 진지한 역할을 깊이 있게 선보이면서 열연하여 역시 한석규 어디 가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명실상부한 배우의 입지를 다시금 드러내 보인 것.

뿌리깊은 나무 15회에서 밀본의 하수인이자 집현전 학사들을 의문사시킨 윤평(이수혁 분)을 직접 추궁하며 강직, 비굴, 냉소를 담은 3단 폭풍열연을 펼쳤다. 

눈물을 머금은 채 "광평과 소이의 털끝이라도 건드린다면 의금부, 내금위, 우림위, 별시위, 겸사복뿐 아니라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여 네놈들을 모조리 소탕하고, 저자거리, 모든 백성들 앞에서 사지를 거열한 뒤, 그 시신을 조선 팔도에 나눠 걸어 국본을 바로 세우겠다"며 강직한 모습을 선보였다.

그러다 이내 그는 "제발 알려다오. 우리 광평만 살려다오. 내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야"라는 대사와 함께 비굴한 모습으로 변신했다. 이도 잠시, 그는 "둘 다 아니다. 난 네 놈들이 누군지 관심 없다. 또한, 네 놈들이 뭘 원하건 상관치 않는다. 너희들이 뭘 원하건, 네 놈들은 원하는 걸 하나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라며 "반드시 그리 만들 것이다. 하여 네 따위 놈들과 협상은 없다. 또한! 네 놈들에게 피로써 되갚지도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어찌 실패하게 되는지 똑똑히 두고 보거라"라며 냉소적이면서도 힘주어 말하는 3단 열연을 선보였다.

방송 직후 시청자의견 게시판은 "명불허전, 카리스마 연기란 바로 이런 것. 한석규씨의 연기에 전율이 느껴졌다", "실제 세종대왕도 이런 상황이면 한석규처럼 말하고 행동하셨을 것 같다" "SBS 연기대상은 맡아놨다" 한석규 연기 보고 있으면 숨이 멎는 것 같다"며 호평 일색이었다. 신들린 연기력에 만장일치의 찬사가 쏟아졌다.

그 결과, 예상대로 2011 SBS 연기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 전에 드라마 스페셜 남자 최우수상 후보에도 올랐으나, 정작 상을 타게 된 건 젊은 두 후배들. 제작진이 노렸는지 소감 발표 중 수상자와 전혀 상관없는 한석규에게 잠깐 카메라 단독샷이 잡혔다. 이에 본인은 그저 대인배의 뿌듯한 미소만 지을 뿐. 최우수상은, 지랄. 곧 나의 대상 소식은 온 국민들에게… 그래, 역병처럼 퍼져나갈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의 성공으로 화려한 부활을 하면서 모처럼 CF를 2편이나 계약했고, 많은 시나리오를 받으며 다시 영화에서 명예 회복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2013년 류승완 감독과 하정우, 전지현과 함께한 영화 베를린이 개봉 3일 만에 100만, 개봉 14일 만에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 450만 명을 넘기면서 710만 명을 동원하는데 성공, 영화 쪽에서도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했다. 현재 이 수치는 2000년대 이후 한석규의 최고 흥행성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아니라서 최고 흥행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뒤이어 개봉한 파파로티도 이제훈의 군입대 및 7번방의 선물의 흥행 호조 등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주연배우로서 성실하게(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예능 출연 혹은 언론 노출 등) 홍보한 덕에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넘기게 되었다. 전성기처럼 원톱 주연으로 나오기는 힘들어졌지만, 선후배 배우와의 투톱으로 출연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주조연급으로 수요가 많을 것으로 전망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출연 제의가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라 한다.

덤으로 베를린에서 필모그래피 사상 최초로 크레딧 둘째 줄에 이름을 올렸다. 데뷔작 닥터봉부터 시작해서 한 번도 크레딧 첫째 줄을 놓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하다. 그만큼 한석규가 극의 중심이 아니어도 극이 돌아가게 하는 배우들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한석규 스스로도 주연만 고집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2012년 11월 영화 파파로티 촬영 이후 휴식을 취하던 한석규는 황우석 교수 사건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제보자에 출연을 제의받았으나 검토 후 거절하였다. 그리고 2013년 11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집필했던 김영현 작가의 제의를 받아 드라마 파천황에서 정도전 역을 제의 받았다. 2014년 4월 경에 방영 예정이었으나 KBS 드라마 정도전과 시기가 비슷하고, 정도전의 경우 먼저 방영한 데다가 오랜만에 정통 사극이라는 점에서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받은 반면, 파천황은 퓨전 사극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MBC가 편성을 보류했다. 이후 파천황은 SBS로 이동하여 육룡이 나르샤로 방영되었다.

그 이후 2013년 12월, 영화 '상의원' 출연을 확정지었다. # 동시에 비밀의 문에도 캐스팅되자 한석규가 사극만 너무 고집한다는 평이 조금씩 나왔다. 물론 '상의원'과 비밀의 문 모두에서 한석규는 그야말로 절정의 연기력을 선보였지만, 그러한 평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은 시청률과 관객수에서 모두 참패를 거두었다. 영조 임금을 연기하고 싶어서 출연한 비밀의 문에서조차 초반에는 발음 문제까지 지적받은 데다 '뿌리깊은 나무'에 이어 또 왕 역할을 맡아 질린다는 혹평도 받은지라 당분간 사극 출연은 자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살펴보면 한석규의 연기력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지만 두 작품 모두 다 각본에 크게 하자가 있었다. 특히 비밀의 문은 과연 2010년대의 작품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지루한 전개와 밋밋한 연출로 2010년대의 배우와 장비를 가지고 만든 80~90년대 KBS 대하드라마 느낌이었으니 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예로 드라마 내용은 어쩄건 한석규가 나오는 하이라이트 부분만 편집된 영상들의 댓글에는 한석규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자자하다. 12 보면 알겠지만 비밀의 문에서도 한석규의 연기 실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2015년 두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김훈 중위의 의문사 문제를 다룬 '아버지의 전쟁'은 투자자가 없어서 제작이 엎어졌고, 김래원과 함께 출연하는 영화 '프리즌'은 2016년 3월에 제작에 들어가 어느정도 흥행에 성공했다.(총관객 293만명)

2017년 1월까지 방영됐던 SBS 월화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21화까지 방영된 이 드라마는 첫방부터 막방까지 전체 월화드라마 중 시청률 1위를 차지하고, 최고 시청률 27.6%를 기록하며 2016년 SBS 드라마 시청률 1위[52]에 등극했기에 '뿌리깊은 나무' 이후 또 다른 그의 히트작이 되었다. 극중에서 타이틀롤 김사부 역을 맡아 명실상부한 연기력과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드라마로 5년만에 다시 2016 SBS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뿌리깊은 나무부터 시작해서 드라마에서 맡는 캐릭터가 전부 비슷비슷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세종부터 김사부까지 모두 뛰어난 능력을 갖췄고 심지도 굳지만 아웃사이더 기질로 이해자가 적고 입이 걸은 캐릭터다.

2019년 3월 20일 개봉한 우상에서는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는 유력 도지사 후보이지만, 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위기에 몰리자 정치적 야욕을 위해 폭주하는 정치인을 연기했다. 시민들 앞에서는 온화하지만, 궁지에 몰리자 비겁하게 변하는 야누스적인 연기를 보였다. 영화의 작품성은 호불호가 갈리고, 특히 대사가 안 들린다는 불만이 상당히 많이 제기되었다.

2019년 7월 OCN 드라마 WATCHER에 출연하면서 3년만에 드라마로 복귀했다. 감찰반이라는 공간을 무대로 한 수사물이며,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인생이 무너진 세 남녀가 경찰 내부 비리조사팀이 되어 권력의 실체를 파헤치는 심리스릴러 드라마다. 누구를 믿어야할지 분간할 수 없게 치밀하고 짜임새 있는 스릴러적 구성을 보여주어, 시청률 6.6%로 보이스 2에 이어 OCN 역대 시청률 2위를 기록했다.

2019년 12월 26일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 개봉되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과 관노로 태어나 종3품 대호군이 된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행간을 채운 영화로 관객 200만명을 불러들였다. 쉬리 이후 최민식과 20년 만에 호흡을 맞추었다

2020년 낭만닥터 김사부 2에 출연했다. 시청률 20%를 뛰어넘으면서 호평받고 있다. 여기서도 무르익은 연기를 펼쳐주고 있다. 13회에서 돈 때문에 다리를 포기하고 수술 의지가 없는 환자를 향해 "돈 때문에 다리를 포기하나. 그렇게 알아서 포기해 주는 사람은 세상도 별로 관심이 없어. 당신 아들도 그렇게 보고 기억하고 배운다. 팔자 탓, 재수 탓이나 하고, 자포자기하는 아버지로 그렇게!"라며 환자를 질타하며 설득했다.

14회에서는 불법 시술을 하는 병원에 스카우트 하려는 박종환에게 "돈 때문에 가족도 팔고 양심도 팔고 이제 동료의사까지 팔아먹느냐, 그래도 절대 타협하지 말아야 할게 있어. 그게 바로 양심이야"라며 분기탱천하는 흡인력 있는 연기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돈 때문에 시리즈를 화통하게 완성했다

첫 방송을 시작한 이후 연일 자체 최고 시청률 행진을 이어가며 시청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최종회는 닐슨코리아 기준, 수도권 시청률 27.2%, 전국 시청률 27.1%, 2049 시청률 11%를 기록했고, 순간 최고 시청률 28.4%를 돌파하며, 또 다시 자체 최고 시청률을 다시 썼다.

 

한석규 결론

결론적으로 한석규는 한국 연예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재능 있고 다재다능한 배우다. 그는 경력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으며 한국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으로서 그의 유산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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