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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3. 12. 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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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36대 국무총리이자, 제3대 더불어민주당 대표이다.

2020년 8월 29일, 당대표 임기를 마치며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이해찬 정치 입문전

1952년 7월 10일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면(현 청양읍) 벽천리 180번지에서 아버지 이인용(李寅鎔)과 어머니 박양순 사이의 5남 2녀 중 3남이자 다섯째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부친 이인용이 청양면장 출신이기 때문. 이인용은 1941년 일본 주오대학 전문부를 졸업하고 귀국해 8.15 광복 후 청양군청 학무주임(學務主任), 청양수리조합장을 거쳐 32살의 나이로 청양면장을 맡아 4.19 혁명 때까지 면장을 지냈을 정도로 마을주민들에게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에 말기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야당 후보로 나서 면장에 당선 되었다고 하니, 지역 주민들의 신망이 투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자유당 정권하에서도 당선될 정도로 금품 살포 능력이 뛰어날 정도로 집안 재력이 대단했음을 알수 있는데, 본인 회고록에서도 어머니가 민주당 인사들이 선거 때 오면 100명 넘게 식사 대접할 정도 였다고 하며, 자신이 정치하는 것을 말렸다고 한다.

서울 덕수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맞지않아 자퇴하였고, 이듬해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로 재입학했다.[]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어[] 약 1년간 복역하고 출소했다. 이후 무역회사를 다니기도 했고,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을 하기도 했으며, 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일하는 등 재야 인사로 지냈다. 1979년에는 돌베개 출판사를 창업했다.

그러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복학하여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참고로 재밌는 에피소드가, 이 때 이해찬과 유시민이 멱살잡이 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1학년생들의 병영집체훈련 응소 문제를 두고 운동권 내부에서도 총학생회측과 복학생협의회 사이에 의견이 달라 노선 싸움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집회에서 총학생회 간부였던 유시민이 사회를 봤는데 복학생협의회측에 발언권을 주지 않고 집회를 끝내려 하자 복학생협의회장이었던 이해찬이 달려들어 유시민의 멱살을 잡은 뒤 욕설을 했고 이어서 주먹을 날리려던 찰나에 사람들이 말려서 다행히 주먹다짐으로 번지진 않았다고 한다. 그 뒤로 둘은 화해를 했고 절친한 운동권 선후배 사이로 남게 되었으며, 훗날 잘 알려졌다시피 이해찬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 유시민을 보좌관으로 영입하게 된다. 그로부터 30년 뒤, 유시민에게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하라고 요구한 것도 이해찬이다.

그해 6월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수감 2년 6개월 만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재야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여 1983년 민청련 상임위 부의장[]을 맡았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총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군사 독재 정권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삼아 감시했으나 굴하지 않고 반독재운동과 출판 활동 등에 종사했다. 1985년 서울대를 처음 입학한 지 14년 만에 졸업하였다. 1987년 말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해찬 정계입문

1988년 재야인사 98인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구 을 지역구로 공천을 받아 민주정의당 김종인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수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이곳에서 내리 5선을 지냈고 2012년 19대 총선 때 세종시로 지역구를 옮겨 20대까지 7선의 기록을 세웠다.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5공 청문회의 위원으로 참석해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발포 사건과 녹화사업 등을 추궁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꼬마 민주당의 노무현, 김정길, 이철과 같이 정치발전 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91년에 치러진 지방선거에 앞서 신민당을 탈당한 뒤 신동아 7월호에 인터뷰로 신민당을 두고 '공천을 돈 받고 하는 걸 봤다. 이렇게 부패한 야당으론 정권을 교체 할 수 없다. 국민들은 김대중이 권력욕이 강하다고 생각한다.'며 김대중을 비판하기도 했다. 몇몇 책에선 이해찬의 이 발언이 지선에 큰 영향을 끼쳤고 김대중의 정치 생명을 위협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발언의 영향력은 알 수 없으나 당시 60석 이상이 날아간 것도 사실이기도 하고.... 훗날 김대중은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 이해찬에게 비록 탈당한 뒤 당을 매도하고 선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나 '13대 국회의 의정활동이 좋았단 점'과 '경험이 부족했다며 잘못을 반성하고 있단 점'을 들어 젊은 사람에겐 기회를 한번 더 줘야 한다며 받아들여주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민주당 조순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고 조순이 당선되면서 1996년 초까지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했다. 제15대 국회가 출범하자마자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1997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을 맡았다.

1988년 등원 직후부터 5공 청문회에서 통일민주당의 노무현, 이인제 의원과 함께 송곳 질의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는 스타가 되었지만, 당내 활동에서는 DJP연합 당시 정책 공조 협상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면서 선거 전략가로 더 알려지게 된다. 확인되지 않은 카더라에 따르면 선거 운동 들어가기 직전에 이긴다고 말하며 예측한 백분율이 소수점까지 딱 맞아떨어져, 한동안 '선거의 제왕'이라 덕담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해찬 정계 은퇴 이후

2020년 8월 29일 당대표 임기를 모두 마치고, 32년간의 정치인 생활을 마무리짓고, 정계에서 떠나 비정부기구인 동북아평화경제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새 당대표는 이낙연 의원이 맡게되었다.

3월에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사적인 자리를 가졌다는 말이 나오면서 다음 대선에서 친이재명과 친문의 교두보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2021 재보궐선거에서 이해찬도 지원사격을 했으나 결국 더불어민주당이 참패를 거두면서 김종인처럼 다시 한번 비대위원장에 올라 정계복귀 썰이 있었지만 은퇴 선언을 했던지라 도종환 비대위 체제로 전환되었다.

친문계의 2인자 이낙연이 이명박, 박근혜 전대통령 사면론으로 시작된 하락세와 2021 재보궐선거 참패 이후 대선주자에서 멀어진 이후 대선주자로 떠오른 이재명 현 경기도지사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었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친이해찬 계열 인사들이 이재명 경기도지사 측에 붙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이재명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도 있었던 황교익 내정 논란 당시엔 황교익에게 직접 전화해 민주당 상임고문으로서 사과를 하고 황교익의 후보 사퇴를 이끌어낸 뒤 이재명과 함께 황교익을 위로하는 언사를 하며 논란을 정리했다.

이재명 대선후보자의 지지율 반등이 지지부진하고 윤석열 야당후보가 이준석 당대표와 극적화해와 원팀을 구성한 뒤 젠더갈등에서 2030남성들을 위한 공약들을 내세운 덕에 지지율이 비등비등해지고 설 연휴를 기점으로 윤석열 후보쪽이 오차범위 밖으로 우세하다는 평가에 대해 "세번의 대선에서 이기게 만든 경험으로써 자신이 보기에는 여론조사와는 달리 이재명 후보가 윤석열 후보를 너끈히 이길 것이다. 이재명 후보는 준비되고 검증되었지만 윤석열 후보는 아니다. 현명한 국민들이 이재명 후보를 투표할 것"이라며 여당 채널에 등장하여 지지층 결집 발언으로 지원해주고 있었으나 20대 대선은 결국 윤석열의 신승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해찬 그외정보들

정치사를 통틀어 민주진영에서 대통령을 제외하고 이만큼 정치력을 가졌던 정치인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국민의 정부 시절 교육부장관, 참여정부 시절 실세 총리, 문재인 정부 시절 집권 여당 대표를 맡았고 지역구 선거에서 7번을 도전하여 7번 모두 당선되었다. 정치인으로 살았던 30여 년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으며, 위기라 하면 김종인 비대위원장 재임시 공천을 받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마저도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이 되었고 결국 여당 대표까지 지냈다. 심지어는 정치 인생의 마지막에 다시 없을 총선 승리를 거두면서 은퇴했다. 30년 동안 운도 많이 따랐겠지만 본인이 엄청난 실력이 없다면 이룰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대단한 정치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민혁명당 사건의 영향을 받아, 정권에 의한 사법살인이 자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공식적으로 사형제를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림동에서 1978년부터 '광장서적'이라는 서점을 운영한 바 있다. 이 서점은 이해찬이 국회의원이 된 후에는 동생 이해만이 운영하였으며, 처음에는 인문사회과학 서점이었으나 이후 고시서적을 주로 취급하게 되었는데 비교적 가격이 비싼 고시서적을 할인 없이 판매해 괜찮은 수익을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유서가 깊고 규모가 큰 서점이어서, 신림동 고시서점 중 목이 좋고 가장 유명했던 '상원서적'과 함께 신림동 고시촌의 랜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으나, 법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되면서 여느 고시서점들과 마찬가지로 몰락하여 2012년 12월 31일 부도를 내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광장서적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북션' 서점이 들어서 있다.


강성 성향에 직설적인 언어로 인해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리는 정치인이다. 그렇다 보니 별명도 크게 갈리는데 지지자들 사이의 애칭은 '해찬들'[], '찬들이형', '해찬옹' 또는 '대장부엉이'라 불리며, 비토 세력들에게는 '해골'[], '해골바가지', '해골찬'[17], '카서스', '사케찬', '이해골' 등의 멸칭들로 불린다.


국무총리 시절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자발적인 역할 분담으로 행정부 2인자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역대 국무총리 중 JP와 더불어 실세 총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유이한 사람이 됐다. 세종특별자치시의 설계 및 추진 또한 이해찬이 총리로 일할 때 이루어졌다.


민주당에서 문재인과 함께 친노의 인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래서 보통 언론에 '친노의 좌장'[]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붙는 편이다. 문재인도 깍듯하게 형님이라 부르면서 선배로 대우한 사람이다.


이해찬 본인이 김어준의 파파 이스에 나와서 한 말에 의하면 "정치를 안 한다던 문재인을 정치권으로 끌어들인 일등 공신이 바로 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어준으로부터 '나쁜 일을 했군요'란 소리는 덤으로 들었을 정도. 김어준의 파파 이스 135화에서 나온 말이다.


당선되었을 때 캡처된 사진처럼 무표정인 모습이 많아서 포커 페이스 이미지로도 유명하다. 깐깐해 보이는 분위기까지 맞물려서 더욱 그럴싸하다

민주당 의원들 중 인상파로 분류된다고 하며 이는 문희상과도 비슷하다. 그래도 살집이 좀 있어 웃을 때 밝은 표정이 묻어나는 문희상과는 다르게 까칠함이 많이 나오는 편으로 실제 성격도 어느 정도 대치된다고 한다.


사드 배치 논란에 대해서는 배치 반대 쪽인 걸로 보인다 


20대 국회의원들 중 유일하게 총리 경력이 있는 의원이었지만 이후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국무총리가 되면서 유일하지 않게 되었다.


2010년대 들어 민주화 운동 시절에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보이는 증상을 자주 보이고 있다. 2017년 김어준의 파파 이스와 같은 공개석상에서 나온 모습을 보면 가끔씩 손을 떨거나 말이 끊기는데, 이는 젊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모습으로 예전에는 말을 날카롭고 빨리 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여러모로 고문 후유증이 생긴 게 아니냐는 얘기가 있다. 특히 2018년 7월 20일 민주당 당대표 선거 출마 기자회견에서는 몸을 떨고 코를 훔치는 등 건강에 문제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도 건강이 상당히 악화되어서 3월 27일 병원에 입원했고, 이후엔 이낙연 공동선대위원장에게 선거 관련 업무를 일임하기로 했다. 민주당과 시민당의 공동 출정식 날에는 겨우 퇴원하여 연설을 했는데, 연설 내내 입이 떨리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계 정당의 대표적인 선거 전략가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조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서 선거 전략을 담당하면서 조순 후보를 당선으로 이끌어 처음 선거 기획 능력을 인정받았고, 만 43세에 정무부시장까지 지냈다. 그 후 자신이 선거 전략에 관여하면서 대통령 세 명을 배출[], '킹 메이커'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런 능력을 인정받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요직을 지냈다. 지금까지 배출된 민주당계 정당 대통령들은 전부 이 사람의 손을 거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모친인 박양순 여사는 2017년 10월 30일, 향년 100세에 사망했다. #


2018년 6월 15일 TBS <장윤선의 이슈파이터> 와 한 인터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개혁세력이긴 하지만 진보는 아니다. 중도우파에 가깝다고 평가했으며 한편으로는 더불어민주당보다 왼쪽에 있는 정당들은 우리나라의 사회 구조상, 깊이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21대 총선이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이해찬 대표 역시 추미애 대표처럼 당 대표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치고 물러날 수 있게 됐다. 재야에서 시작해서 국무총리, 7선 의원까지 할 만큼 다 한 정치 인생이 된 셈.


흔히 대통령 빼고는 다 해본 사람 이라는 별명은 김종필이나 이회창의 일생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지만, 이해찬의 행적 역시 그런 별명이 붙어도 괜찮아보일 정도로 화려하다. 일단 국회의원 7선에 국무위원으로써는 주요부처인 교육부 장관 및 국무총리(그것도 책임 총리) 경력이 있고, 당직 역시 원내부총무에서 당무기획실장을 거쳐 선거기획단장, 최고위원, 당대표까지 요직 테크트리를 차근차근 다 밟아온 것. 심지어 정무부시장 경력도 있으니 지방행정 경력도 일단 모양새는 갖추고 있다. 다만 두 사람과 차이를 찾아본다면 정치인 이력 이외의 부분에서 법조인 출신으로 판사, 대법관을 거쳐 감사원, 선관위 등 감사/감시기관 경력을 가진 이회창이나 군인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장 경력을 가진 김종필에 비해 이해찬의 경우는 순수한 정치인 이외의 공직경력은 사실상 없어 공직 경력이 단조로운 편이다. 그 대신 두 사람에게는 없는 재야 시민사회운동 경력이 있으니 나름의 색깔은 있다 할 수도 있겠다.


아무래도 최근 지역구였던 곳이 세종특별자치시라서 그런지 세종역 설치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20대 국회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국회의원은 아니기 때문에 향후에 이 대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귀추가 주목된다.


역대 국무총리들 중에서 정원식, 김부겸과 더불어서 아들이 없는 세 명의 국무총리 중 하나다. 단, 정원식은 딸만 넷을 두었고, 김부겸은 딸만 셋이고, 이 이해찬은 무남독녀 외동딸[]만 있다. 아들이고 딸이고 자녀가 아예 없는 한덕수는 논외이다. 이해찬은 지극한 딸바보로 유명하다. 수감 중에도 당시 글을 모르는 아기인 딸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썼고, 부인이 임신 중 감옥에 가서 딸이 태어나는 것을 못 보고 있다가 출소한 것을 부인과 딸에게 평생 미안해했다고 한다. 이해찬의 부인이 신문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남에게 차가워도 부인인 본인에게는 부드럽고 자상한 걸 느끼지만, 딸 앞에서는 본인에게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껌뻑 죽는 모습을 보여왔는데, 딸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평생 보였다고 한다.


정치인 중 담배를 즐겨 피우는 골초로 유명하다. 사실 민주당계 정당 소속 정치인들이 다른 정치인들보다 유독 담배를 많이 태우지만[] 이해찬은 그 중에서도 골초로 김한길[], 박상천 등과 함께 당 회의실 내에서 즐겨피던 걸로 유명하고, 2012년 민주통합당 대표 시절에는 사무실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물론 현재는 고령인 데다 건강 문제로 인해 금연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른 정계 은퇴로 인해서 상당한 원로 나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1952년 생으로써 만 나이로 이제 70세 밖에 안 됐다. 전 대통령인 문재인과 겨우 1살 차이고, 현 대통령인 윤석열과는 8살 차이, 자신의 후임인 전 당 대표인 이낙연과는 동갑내기며, 그리고 같은 원로 정치인으로 여겨지는 김종인보다는 무려 12살이나 어리다. 워낙 노안에 은둔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현역 정치인 나이대이고, 고령이라 말하기에도 애매하다.


사회학 기초 교과서 중 하나인 C. 라이트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공역한 적이 있다.


이름 때문에 이회창과 헷갈리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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