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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베켄바워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4. 1. 9.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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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전 축구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센터백(리베로), 중앙 미드필더이다. 특유의 제왕적 리더십[]에서 기인한 '카이저(Der "Kaiser")'[]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기존 리베로의 역할을 개편한 독일식 리베로[]로 뛰면서 리베로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발롱도르를 다회 수상한 유일한 수비수[]이며, 1966 잉글랜드 월드컵 브론즈슈 및 신인상을 비롯해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에 2회, 월드 사커 올해의 팀에 11회 연속, 키커 올해의 팀에 12회 연속 선정되었다.

클럽에서는 바이에른 뮌헨의 주장을 맡아 분데스리가 4회 우승[], 유러피언컵 3연패[] 등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바이에른 뮌헨의 첫 번째 전성기를 이끌었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주장을 맡아 유로 1972와 1974 서독 월드컵 우승을 주도하며 서독 축구의 최전성기[]를 견인했다.

감독으로도 대성하여 서독 대표팀의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을 이끌면서 선수와 감독으로 월드컵을 모두 제패했다.[] 이후 독일축구연맹 부회장, 2006 독일 월드컵 조직위원장, FIFA 집행위원, 바이에른 회장 및 명예회장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행정가로서도 성공신화를 이어갔다.

프란츠 베켄바워 플레이 스타일

미드필더 시절의 베켄바워에게서 가장 돋보였던 능력은 볼 컨트롤 능력이다. 엄청나게 민첩했으며, 그런 가벼운 몸놀림으로 상대 선수를 따돌리고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에 능했다. 기술적인 역량이 매우 뛰어났기에 공을 빼앗기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압도적인 볼 컨트롤 능력과 스피드를 결합시켜 독특하면서도 파괴적인 드리블을 자주 시도했다. 기본적으로 다른 미드필더보다 처진 위치에 배치되었지만, 전방에 공간이 생기면 그 즉시 공을 몰고 상대 선수 여러 명을 제치며 순식간에 페널티 박스 부근까지 도달하곤 했다. 섬세한 개인 기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했고, 스피드 자체가 매우 빨랐기 때문에 상대팀에게 있어서 베켄바워의 드리블을 끊어내는 일이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대표적으로 1970년 월드컵 4강전 서독 vs 이탈리아 경기를 보면, 축지법을 쓰듯 순식간에 페널티 박스 부근로 이동하며 몇 번 씩이나 수비진을 모조리 뚫어내는 베켄바워를 볼 수 있다.

수비 능력도 뛰어났다. 온 몸을 사용한 적극적인 인터셉트가 특기였다. 인터셉트 뿐만 아니라 대인 수비 부분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빈 틈 없고 침착한 대인 마킹에 이은 저돌적인 태클로 상대의 공격 진행을 이른 타이밍에 끊어버리곤 했다.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듯 훌륭한 기량을 갖추었기에 수비적인 측면에서 눈에 띄는 약점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단점을 꼽아본다면, 태클이 다소 부정확했다는 점을 고를 수 있다. 저돌적으로 달려들거나 섣불리 슬라이딩 태클을 걸었다가 상대 선수의 플레이에 속아넘어가 막아야 할 상대를 완전히 놓쳐버리는 경우가 꽤 있었고, 무리한 태클 시도로 파울을 범한 적도 많았다.

수준급의 미드필더였던 만큼 패스는 당연히 잘했다. 정말 잘했다. 특히, 중앙에서 공을 가지고 배회하며 타이밍을 기다리다가 타이밍을 정확하게 포착한 뒤 슬쩍 띄워서 공격진으로 보내 주는 로빙 패스가 일품이었다. 주로 쓰는 발인 오른발로는 아웃프런트 킥 같은 기술도 자유자재로 구사하곤 했다. 베켄바워는 느긋느긋하게 공격을 전개하고 싶을 때, 아웃프런트 킥을 사용하여 측면의 선수에게 천천히 넘겨 주는 식으로 팀의 공격 속도를 조절했다. 오른발처럼 기술적으로 다루지는 못했지만, 왼발 패스 능력 역시 상당히 뛰어났다.

미드필더 시절에는 득점력도 매우 출중했다.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슈팅을 뽐냈으며, 왼발, 오른발, 머리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득점 패턴을 가져가며 꾸준히 골을 집어넣었다. 대표적으로 1966년 월드컵에서 우베 젤러를 제치고 팀 내 최다 득점자에 오르며 대회 최다 득점 공동 3위에도 오르는 등 어마어마한 득점력을 과시했다.

즉, 미드필더 시기의 베켄바워는 필드 플레이어로서의 모든 플레이에 능했던 유틸리티 플레이어이다.

프란츠 베켄바워 지도자 행정가  경력

1983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유프 데어발의 후임으로 서독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임명되었다. 수석코치가 후임 감독이 되는 전례를 깨고 최초로 감독에 임명된 사례였다. 단지 그정도가 아니라 베켄바워는 지도자로서 경력이 전무한 상태였다. 전임자였던 데어발 감독은 유로 1980 우승, 1982 스페인 월드컵 준우승 등 분명한 결과물을 일궈내 왔으나 월드컵 우승이 목표였던 서독축구협회는 데어발로는 부족함을 느낀 듯 하다. 사실 데어발은 그 이전 감독들인 제프 헤르베르거나 헬무트 쇤처럼 선수 시절부터 대표팀을 휘어잡아왔던 카리스마형 지도자는 아니었다. 데어발은 나름 인화력이 있어서 선수단을 잘 이끌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은 1982 월드컵 1차 조별 리그 첫 경기 알제리전에서 어딘지 모르게 나사 빠진 모습을 보인다거나 2차 조별 리그로 진출하기 위해 승부조작성 플레이를 한다거나 결승 이탈리아전에서 참패하는 등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데어발 감독은 1982 월드컵 직후 과감한 세대 교체에 돌입하여 유로 1984 본선에 임했으나 결과는 조별 리그 탈락이었다. 이에 축구협회는 2% 부족해 보이는 데어발을 경질하고 베켄바워를 신임 감독으로 앉힌 것. 베켄바워는 지도자 경력이 없었지만 예전의 쇤, 헤르베르거 감독처럼 독일 축구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레전드였기 때문에 선수단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베켄바워는 지도자 라이선스 없이 감독이 되었기 때문에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호칭인 Bundestrainer(분데스트레이너, 연방감독)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못하고, Teamchef(팀셰프, 팀 지도자)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유로 1984 직후 감독을 맡은 베켄바워는 데어발 때 시작된 세대 교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자신의 첫 메이저 대회인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한다. 사실 1986 월드컵 때 서독은 세대 교체 직후였기에 주장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를 제외하면 젊은 스쿼드로 구성되어 있었고, 명목상 우승 후보로 꼽히긴 했었지만,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플라티니의 프랑스,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 지쿠의 브라질 만큼 주목받는 팀은 아니었다. 베켄바워가 이끄는 젊은 서독은 데어발 시절의 대표팀보다 이름 값도 떨어졌고, 대회 초반에는 다소 자신감이 없어 보였으나 토너먼트가 진행되면서 조직력이 탄탄해지고 체력적으로도 뛰어난 모습을 보이며 결승까지 진출했다. 결국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에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이 스쿼드를 기반으로 다음 대회에서 다시 한 번 우승을 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유로 1988 4강에서는 오렌지 삼총사가 활약하던 네덜란드에 패했지만,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마침내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이로써 베켄바워는 선수와 감독으로 월드컵을 모두 제패한 두 번째 축구인으로 그 이름을 올렸다.[] 사실 1986년이나 1990년이나 독일 국대 스쿼드가 결코 압도적이라는 평은 듣지 못한 때라는 걸 감안하면 베켄바워의 통솔력이 얼마나, 어떻게 작용했는지 감히 짐작할 수 있다.[] 1990년에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감독으로 부임해 디비지옹 1 우승을 이끈다.

그리고 1994년. 카이저는 자신의 고향인 뮌헨으로 돌아와 바이에른 뮌헨 회장직에 취임한다. 그러더니 바이에른 뮌헨 감독을 맡기도 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감독 재직 중에 커리어에 분데스리가 우승과 UEFA컵 우승을 추가시켰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트로피가 이 사람을 부르는 것인가, 이 사람이 트로피를 부르는 것인가 궁금해진다. 다만 1995-96 시즌 UEFA컵 우승의 경우, 해당 시즌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이었던 오토 레하겔이 팀과 선수들과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팀을 결승까지 올려놓고 사퇴했기 때문에 베켄바워는 임시감독으로 결승전 단 2경기만 지휘하고 UEFA컵 우승감독에 이름을 올린 케이스라서 베켄바워의 업적으로 쳐주기는 어렵다. 물론 남는 건 기록이니까.

1998년에는 독일축구연맹 부회장을 역임하고,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대회 조직위원장 직을 맡아 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즉 선수, 감독, 행정가 등 가는 곳마다 성공대로를 달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이야 그 인식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긴 하지만,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은 성공하기 어렵다라는 말은 거의 불문율 수준으로 작용하던 때이고, 심지어 스타플레이어 출신 행정가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 생각되던 때였다. 그런데 이 양반은 이 두 가지를 죄다 해냈다. 영웅신화라고까지 칭하면 다소 비약적인 찬사겠지만, 그야말로 은퇴 전후를 통틀어 축구판의 황제라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더 쉽게 비교해보자면, 축구 황제 펠레 역시 현재 세계축구계에 나름대로 영향을 끼치고 있으나 펠레는 따지고 보면 명예직에 앉아 있을 뿐이지만, 베켄바워는 스스로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와 경력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 오죽했으면 前 FIFA 회장 제프 블래터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시절 블래터와 맞장을 뜰 수 있는 유일한 축구인이라는 말까지 들을정도다. 1인자인 블래터가 1인자라 이거저거 해먹는 탓인지 여기저기 적이 많지만, 그와 대비되게 베켄바워는 축구실력과 국력 양면에서 뛰어난 독일을 등에 업고 유연한 대응을 바탕으로 적을 만들지 않고 실익을 잘 챙겨간다.

프란츠 베켄바워 수비수 시절

베켄바워는 매우 공격 지향적인 스타일의 레프트백 자친토 파케티를 보고 '센터백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는 없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때마침 유로 1972가 열렸고, 베켄바워는 이 대회에서 스위퍼 역할을 맡은 것를 기점으로 스위퍼 포지션에 완전히 정착했다. 좀 더 낮은 위치에 기용된 베켄바워는 더 적은 압박 속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을 가져갈 수 있게 되었다. 헬무트 쇤 감독으로부터 '프리 롤 스위퍼'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베켄바워는 파케티를 보고 떠올렸던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베켄바워는 미드필더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간결한 볼 컨트롤 능력을 사용하여 공간을 확보한 뒤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 스위퍼의 기본 소양인 '패스'에 있어서 매우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짧은 패스와 긴 패스를 가리지 않고 훌륭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베켄바워는 이른바 '찍어 차기'의 달인이었다. 공을 찍어 차며 원하는 방향으로 띄워 보내는 기술이 정말 뛰어났다. 또한 자유자재로 공을 감아 찰 수 있었기에, 엄청난 궤적을 그리며 휘어 날아가는 롱패스를 자주 구사했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 기존의 수비수들과 차별화되는 공격 전개를 보여줄 수 있었다. 베켄바워는 단지 패스를 잘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공을 몰고 나가 공격형 미드필더처럼 플레이하며 공격 전개를 총지휘했다.

공격에 가담했을 때에는 미드필더 시절과 별 차이 없을 정도로 위력적인 드리블을 보여주었다. 상대 진영의 깊은 곳까지 뛰어들어가 공을 받았고, 지체 없이 다음 플레이로 연결했다. 때로는 날렵한 드리블을 통해 좋은 위치에서 파울을 얻어내거나 아예 골을 넣어버리기도 했다. 미드필더로 활약하던 시기에 비하면 득점력이 확실히 줄긴 했다. 그러나 수비수 시절에도 당대의 수비수 중에서는 최고 수준의 득점력을 가진 선수였다.

프리킥마저 잘 찼다. 매우 영리하게 킥을 처리했는데, 아웃프런트 킥과 인프런트 킥을 선택적으로 구사하며 골키퍼의 타이밍을 빼앗곤 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1973-74 시즌 뒤스부르크와의 리그 경기에서 나온 프리킥. 오른발 아웃프런트로 찍어 찼다.

당연하게도, 베켄바워의 능력은 공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수비 포지션에 정착한 후 많은 경험을 쌓았고, 관록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비에 관련하여 베켄바워가 가진 최고의 능력은 상대의 플레이를 읽어내고 공을 가로채는 능력이다. 베켄바워의 인터셉트 능력은 이 능력을 통해 세계 최고의 수비수라는 타이틀을 얻은 잉글랜드의 바비 무어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탁월한 운동 능력 덕에 클리어링도 뛰어났다. 베켄바워의 클리어링은 정말 아크로바틱했다. 점프력이 좋았으므로 헤더 클리어링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다리도 유연했기 때문에 어떤 자세에서든 상대의 흐름을 끊어낼 수 있었다. 공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인정사정없이 걷어냈다. 공을 걷어내는 데에 바이시클 킥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미드필더 시절 베켄바워의 태클은 과감함과 동시에 미숙함도 있었다. 그러나 수비수로 활동하며 관록이 쌓인 후에는 태클 실력 또한 상당히 발전하여 미숙한 면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베켄바워는 적재적소에 나타나 높은 완성도의 태클을 통해 상대 공격수를 틀어막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슬라이딩 태클을 서슴없이 시도했지만, 1:1 상황에서의 대인 수비가 훨씬 침착해졌고 그 결과 태클이 매우 정확해졌다. 파울을 범하는 일도 훨씬 드물어졌다. 피지컬이 준수했고 발도 빨랐기 때문에, 정말 진공 청소기가 따로 없었다.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주장직을 수행하며 어마어마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베켄바워가 카이저(Der Kaiser), 즉 황제란 별명을 얻게 된 것은 그가 뿜어내는 특유의 사령관적인 기질 덕분이었다. 경기 중 실수가 정말 드물었고 아주 침착했다.

프란츠 베켄바워 선수 평가

시대를 아울러 각종 매체에서 내놓은 올타임 랭킹 자료에 따르면, 호날두, 크루이프, 디 스테파노, 지단 등과 경합되며 독일 선수나 수비수 포지션으로 한정할 경우 그를 능가하는 선수는 없다.[] '수비수' 포지션에서 절대적인 위상을 갖고 있으며, 각종 랭킹을 종합할 경우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이자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TOP 10에 고정적으로 포함되는 선'다.[] 수비수에 있어선 커리어를 능가하는건 차치하고 비슷하게나마 갖춘 동포지션의 선수조차 찾을 수 없다.

프란츠 베켄바워 사망

몇년 전부터 건강 상태가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 의료진의 말에 따르면 2019년 4월부터 건강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으며 판단력과 기억력이 매우 안 좋아졌고 개선될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베켄바워는 두 번의 심장 수술과 골반 인공 관절 수술을 받았으며 자신의 골프 대회에서 한쪽 눈이 실명 상태임을 밝혔다. #

결국 현지시각 2024년 1월 7일 일요일, 가족들 곁에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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