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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희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4. 1. 16.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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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정치인, 외교관.

김정일 시대부터 북미외교에 통역사로 활약한 북한의 대미 외교 전문가이며, 외무성 제1부상을 거쳐 2023년 7월 현재 내각 외무상, 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을 역임하고 있다.

최선희 이력

1964년 8월 10일에 평양에서 태어났다. 어찌된 일인지 고아가 되어 북한의 내각 총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을 역임한 최영림에게 입양되었다.

북한에서 공부하다가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1976년 중국 유학을 갔는데 베이징 55중학교에 어거지로 편입은 됐으나 중국인 중학교에서 영어가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그러다 1978년, 중국 대사 전명수가 중국 외교부장 황화에게 유학생 중 한명인 허담의 딸 허영희까지 내세워서 부탁한 덕분에 베이징 외국어대학 부속 중학교로 전학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하지만 1978년 12월, 중국에서조차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은 과오라고 비판이 나오자 놀란 김일성은 1980년 2월에 중국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을 다 철수시키면서 돌아왔다. 이후 오스트리아, 몰타 등으로 유학을 다녀왔다고 한다. 몰타에 갈때 남녀 2명씩 4명이 파견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태영호였다고 한다. 남편은 조선로동당 간부 한용권이라고 하며, 결혼은 90년대에 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선희의 포악한 성격을 견디지 못하고 이후 이혼한 것으로 전해진다.

1988년 정무원 외교부에 입부, 1995년 경수로 협상에서 통역으로 등장했다. # 1998년 외교부가 외무성으로 개편된 이후 외무성에서 통역 및 외국어 담당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1999년 스위스에서 열린 남북미중 4자회담에서 외무성 연구원 직함으로 참석했다. #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 당시에 통역을 맡았다. 이후 2차 북핵위기가 시작되자 6자회담 당시 북한 대표단의 영어 통역으로 참석했으며 이후 김정은의 영어 통역 담당으로도 일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며 수준급이라고 한다. 6자회담에서 통역으로 출석하였을 당시 인상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다. 우선 입고 나온 옷이나 악세서리 등이 모든 서방 명품이었고, 2004년, 3차 6자회담 때 한국 측 수석대표가 김계관에게 인상이 참 좋으시다고 덕담하자 갑자기 인상을 쓰면서 인상만 좋으면 뭐하냐고 쏘아붙혀서 한국 측 대표들을 당황시켰다. 또 미국 측 통역사인 한국계 이민자 통 김의 통역을 듣더니 엉터리 통역이라며 난 이 자리에 필요없겠군!이라고 성을 내고 김계관도 무시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다른 통역들과는 급이 맞지 않아 얘기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어울리지 않는 등 매우 무례하고 오만방자한 모습을 보여서 고위관료의 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많았는데 나중에 사실로 드러났다. 다만 김계관이 미국을 보고 "쫓겨나는 며느리의 심정"이라고 조롱하는 등 지나치게 한국적 표현을 쓴 탓에 이 내용을 통역하는데는 가끔 실수했다고 한다. #

이후 외무성 북아메리카국에서 긍정적 성과를 보이며 승승장구하였고, 2009년, 빌 클린턴의 방북 당시에도 통역으로 나왔다. 2010년 10월, 김계관의 방중에 즈음하여 북아메리카국 부국장 승진이 확인되었으며, 2016년에 북아메리카국 국장 겸 미국연구소 소장으로 승진, 12월 13일부터 15일, 캐나다 외무성 대표단이 북한에서 국가전복음모죄로 투옥된 한국계 캐나다인 임현수를 면회하기 위해 찾아왔을때 외무성 부상 한성렬과 함께 면담하였다

최선희 외무상 시절

그러다가 2022년 6월 8기 5중전회에서 외무상으로 승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다시 북한의 외교정책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외무성 입성 34년만에 장관인 상이 된 것이다. 또 북한 최초의 여성 외무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022년 7월 1일, 중국 왕이 외교부장에게 홍콩반환 축전을 보냄으로서 첫 공식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외무상 자격으로 북한의 친선국들에게 축전을 보내는 활동을 주로 하다가 7월 28일, 전승절 행사에서도 최영림을 수행하며 나타났다. 9월에 개최될 최고인민회의 14기 7차 회의에서 국무위원회 위원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높아졌으나 정작 14기 7차 회의에서 국무위원회 인선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국무위원회 재입성은 미뤄졌다. 9월 7일, 최고인민회의 14기 7차 회의 주석단에 포함되었다. 10월 10일,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 11월 17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담화를 발표, 한미일의 북한 도발에 대한 공동대응에 대해서 격렬히 반발, "미국이 동맹국들에 대한 《확장억제력제공강화》에 집념하면 할수록,조선반도와 지역에서 도발적이며 허세적인 군사적활동들을 강화하면 할수록 그에 정비례하여 우리의 군사적대응은 더욱 맹렬해질것이며 그것은 미국과 추종세력들에게 보다 엄중하고 현실적이며 불가피한 위협으로 다가설것이다. 미국은 반드시 후회하게 될 도박을 하고있다는것을 깨닫게 될것이다."라고 위협했다. 12월 17일, 내각 각료들과 함께 금수산 태양궁전을 참배했다. 12월 26일, 사회주의헌법 제정 50주년 기념보고대회에 김덕훈, 조용원, 최룡해, 박정천, 리병철, 리일환, 김재룡, 전현철, 박태성, 박정근, 김영철, 오일정, 박태덕, 김형식, 조춘룡, 한광상, 리철만, 김성남, 김여정, 리선권, 양승호, 주철규, 리창대, 박수일, 우상철, 김영환, 리영길, 정경택, 리태섭과 함께 참석하였다. 정치국 후보위원 중 서열 1위로 부상하는 등 서열이 급상승하였다. 이후 8기 6중전회에 참석, 28일부터 리선권, 김성남과 함께 외교분과 협의회에 참석했다. 12월 31일, 방사포 증정식에 참석했다. 2023년 2월 8일 열병식에 다른 정치국 위원들과 함께 참석했다. 2월 17일, 내각-국방성 체육경기에 내각 대표로 참석했다. 2월 26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7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 참석했다.

5월 8일, 의례방문해 온 왕야쥔 중국대사와 회담을 가지고 연회를 베풀었다. 5월 16일, 러시아 전승절을 기념하여 러시아 대사관 성원들을 상대로 친선모임을 조직하였다. 5월 19일, 현철해 서거 1돐 추모대회에 참석했다. 정치국 후보위원 신분임에도 국방상 강순남과 함께 정치국 상무위원들 좌우에 착석하는 등 상당히 높은 의전서열을 보여주었다. 2023년 6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8차 전원회의 확대회의 및, 6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5차 정치국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같이 높은 의전을 받던 강순남이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한 것과 달리 외교적으로 할일이 없어서인지 여전히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남았다. 7월 25일, 김정은을 수행하여 중국인민지원군렬사릉원을 참배했다. 7월 27일, 김정은과 쇼이구의 무장장비전람회 참관에 동행했으며, 조국해방전쟁승리 70돐경축 대공연에 참석했다. 8월 27일, 해군절 기념연회에 참석했다. 9월 6일 김군옥영웅함 진수식에 김정은을 수행하고 참석하였으며, 샴페인병을 깨는 여성 주빈 역할을 불참한 리설주 대신 맡았다. 이후 9.9절 열병식에 참석했다. 9월 10일, 김정은과 함께 러시아로 출발했다. 9월 19일 귀국했다. 9월 2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6차 정치국회의에 참석했다. 9월 27일, 최고인민회의 14기 9차 회의에 참석했다. 10월 10일, 만수대 언덕의 김일성, 김정일 동상에 화환을 진정했다. 10월 18일, 북한을 방문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영접, 그를 환영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11월 23일, 만리경 1호 발사 기념 축하연회에 참석했다. 11월 26일, 선거에 참여했다. 12월 1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7차 정치국회의에 참석했다. 12월 16일, 김정일 사망 12주기를 맞이하여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 12월 26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 참석, 이후 대남, 외교분과 협의회를 지도했다. 12월 3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8차 정치국회의에 참석했으며 12월 31일, 신년경축공연을 관람했다.

2024년 1월 1일, 대남부서 정리를 위한 협의회를 지도하였다. 1월 5일, 중앙연구토론회에 참석했다. 이후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상의 초청에 따라 러시아를 방문하기로 했으며 1월 15일에 도착한 것이 14시에 속보로 방영되었다.

최선희 그외정보들

김일성의 모든 활동을 기획, 보좌한 책임서기, 조선로동당 평양시당 책임비서, 북한의 총리를 지낸 최영림의 수양딸이다. 실력 뿐만 아니라 출신 배경 자체가 넘사벽인 인물.


6자 회담 당시 최선희가 단순 통역이 아닌 실세라는 평가가 많았다. 이는 북한 협상단은 전형적인 소련식으로 "대표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고, 그를 감시하는 사람이 또 있고" 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회담 당시 최선희는 대표에게 눈질을 주던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간다던가 하는 행동을 보였는데 그래서 최선희는 통역은 간판이고 본업은 중앙의 실세 감시역이었다라는 말이 나왔다.


중앙위원회 부부장 김여정, 모란봉악단 단장 현송월을 비롯해 언론에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북한의 여성 고위인사이다.
동아일보의 새터민 출신 북한 전문 기자인 주성하 기자가 2019년 11월 18일 최선희의 비리 의혹에 관련된 보도를 내놓았다. 주 기자의 주장에 따르면, 최선희의 오빠의 딸, 그러니까 최선희의 조카인 최수경이란 여자가 있는데, 이 인물은 원래 중국에 석탄을 수출하는 북한 무역기관에서 일하다가 대북 제재로 석탄 수출길이 막혀 일거리가 없어지자 일종의 중재 브로커로 변신했다고 한다.

그녀가 하는 일은 북한 기업들이 중국 사업가들과 거래를 하다 돈을 떼먹으면 고모인 최선희의 힘을 빌려 북한 기업들을 압박해 그들이 떼먹은 돈을 다시 갚게끔 만드는 일이라고 한다. 원래 이런 일은 중앙당 해외사업부라는 곳에서 전담한다고 하는데, 최선희가 제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김정은 정권의 실세 중 한 사람으로 급부상하면서, 북한 기업에게 돈을 떼먹힌 중국 사업가들에게는 최선희의 조카인 최수경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해결사로 손꼽히는 모양이다.

최수경은 그렇게 해서 받아낸 돈의 30∼50%를 수수료 명목으로 챙긴 뒤 상당 부분을 최선희에게도 챙겨준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최선희가 챙긴 뒷돈만 약 수십만 달러(약 수억 원대)에 이른다고. 그런데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북한 기업들이 중국 기업들과 거래를 하다가 제때 돈을 지불 못하는 건 대개 대북 제재 때문인 경우가 많은 듯하다. 그래서 주성하 기자는 최선희의 전임자였던 한성렬 전 외무성 부상도 뇌물죄로 처형됐다고 언급하며 최선희가 자꾸 남한을 디스해서 빡친 것도 있지만 대북 제재 덕분에 뒷돈을 수월찮게 챙기고 있는 사람이 미국과 협상을 해서 제재를 풀어야 하는 임무를 띄고 있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최선희의 존재 자체가 남북 관계 개선의 엄청난 장애물이라고도 표현하기도. 


2차 북핵위기의 단초였던 강석주-켈리 회담 때 북측 통역사로 동석했기 때문에 외무성 제1부상 임명 이전에도 많은 북핵위기 관련 도서에 심상치 않은 통역사로 남긴 인상 덕분에 자주 언급되곤 했다. 하지만 유명하지 않았던 관계로 前 CNN기자로 서방의 대표적 북한통인 마이크 치노이 기자의 북핵 롤러코스터의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채순희'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오역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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