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9년까지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았다.
1990년 청소년 대표에 발탁됐으나 1991년 20세 이하 세계 청소년 대회에서는 남북단일팀을 이유로 탈락했다.[5]
1994년 3월 미국전에서 A매치에 데뷔한 후 2005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8강 한일전에서 동점골을 넣으며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했고, 이후 '한일전의 사나이'란 별명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6]
날아라 슛돌이 감독과 춘천기계공고 축구부 창단 감독과 대전 시티즌 감독을 지냈다.
2019년 11월 19일 췌장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임을 밝혔다.
현대 호랑이 /울산 현대 호랑이 1994~1998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 현대 호랑이에 입단했다.
당시 현대의 감독은 다름 아닌 차범근. 유상철을 눈여겨 보고 있던 차범근은 잘 다듬어서 분데스리가로 진출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하필 입단 첫 해였던 1994년 시즌 후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하지만 이 때부터 국가대표팀을 이끌 차세대 주자로 각광받게 되면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부터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8강전인 한일전 당시, 전반전에 미우라 카즈요시에게 실점하며 끌려가던 대한민국에 동점 골을 안겼다. 이후 2골을 넣은 황선홍과 함께 난타전 끝에 한일전 승리를 합작, 대한민국은 전년도에 도하에서 일본에 당한 패배를 설욕했다.
타고난 파이터 기질과 뛰어난 제공권 장악 능력을 가졌으며, 내구성도 좋아 꾸준히 국가대표팀의 한 자리를 도맡았다. 당시 국대급 미드필더로 거론되던 윤정환, 고종수 등은 부상이나 전술 상의 문제 탓에 국대에서 실제 활약하는 일이 드물었다. 더군다나 그의 투지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는데, 히딩크호 시절 전반전에 코 부상을 입었고 후반전을 뛰면서 코에 다시 충격을 강하게 입을 경우 생명에도 지장이 갈 수 있는 부상이라는 의료진의 판단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상철은 후반전도 뛰겠다고 강변하면서 출장해 골을 만들어 내는 무시무시한 투지를 보였다.[7]
그 외에도 갑작스런 부상으로 국대 라인업에 문제가 생기면 어김없이 최우선으로 땜빵이 가능한(...) 고마운 자원이었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는 네덜란드전 5-0 대패로 차범근 감독이 경질당하고 김평석 감독 대행이 지휘하던 마지막 경기인 벨기에전에서 홍명보 대신 주장 완장을 차고 왼쪽 윙백으로 선발 출전, 악으로 깡으로 뛰다가 기어이 하석주의 크로스를 받아 1-1 동점을 만드는 골을 넣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골로 벨기에는 예선 탈락. 그리고 20년 후 한국은 또 다시 물귀신을 재현했다
위키백과에 등재되어 있는 그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양쪽 윙백, 센터백(...). 한마디로 골키퍼 빼고는 안 뛰어 본 포지션이 없다.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A매치 경기에서 소화한 경험이 있으며[8] K리그 역사를 통틀어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부문에서 모두 베스트 11에 선정된 2명 중 하나다. 다른 한 명은 삼손 김주성.[9] 탁월한 하드웨어와 그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킥력, 거기에 덧붙여 뛰어난 임기응변, 경기의 맥을 짚는 능력과 위치 선정 등이 모두 국내 최고 수준이었다.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포지션에서 언제나 자기 몫을 해내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가 바로 유상철이었다.
1998 시즌 울산 현대 호랑이에서 23경기 15골이라는 경이적인 득점력을 과시했으며, 득점왕을 수상하고 베스트 11에는 미드필더로 들어갔다
요코하마 F 마리노스 1999~2000
1999년부터는 J리그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 여기서도 역시 팀 형편에 따라서 포지션 안 가리고 뛰었다. 2000년에는 김현석과 함께 J리그 득점왕 레이스를 벌였을 정도(...). 이 때 FC 바르셀로나에서 오퍼가 오기도 했다.
2002년 이후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울산 현대 호랑이로 돌아왔다가 2003년에 다시 요코하마로 이적, 2005년에 다시 울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후기리그부터 왼쪽 무릎 부상으로 선수단에서 이탈하여 재활 치료에 매진했으나 부상 회복이 더뎌지면서 결국 2006년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K리그 한정으로 울산 현대에서만 활동한 원클럽맨으로 남게 되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94 2005
1994년 3월 5일 미국과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에 데뷔하여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일본과의 8강전에서 동점골을 기록해 A매치 첫 골을 넣었다. 이후 대표팀의 주전급으로 성장하여 붙박이 선수로 자리잡았다.
K리그 시절 이장관, 김대수 등과 폭력 사태, 그리고 대표팀에서 득점력이 있는 선수에게 으레 따라붙는 별명 홈런왕(...)[11] 등 그다지 이미지가 좋지 않았으나,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승점 1점을 가져오는 벨기에전 동점골로 한국의 체면을 살려놓았고,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계기로 일약 재조명받게 되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 부임 전 한국 축구인들과 팬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 축구는 체력과 정신력은 좋지만 기술이 별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문에 브라질 유학이나 게임 메이커[12] 같은 단어에 목을 맸다. 반면 히딩크는 부임 이후 "한국 선수들은 기술은 수준급인데[13], 체력과 정신력이 엉망이다"라는 정반대의 평가를 했다.[14][15]
사실 유상철은 요즘 대표팀 선수들에 비하자면 낯이 뜨거울 정도로 볼 터치[16] 및 드리블 능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런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장점들- 앞서 언급했던 탁월한 하드웨어[17]와 시야, 위치선정 능력으로 중원을 장악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의 대표선수들 중에서는 김남일, 박지성, 송종국 등과 함께 히딩크 축구에 가장 최적화된 선수 중 하나였다. 결국 "유럽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 기술을 연마하자"는 고정관념을 깨고 "대등한 힘으로 맞서싸운다"는 히딩크 축구의 핵심 멤버로 맹활약했다.
끝내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하여 대회 BEST 11에 선발되기도 했다. 당시 영국의 축구 평론가 앤드류 워쇼는 유럽축구연맹 홈페이지에 기고한 글에서 "유상철은 이번 월드컵에 참여한 수비형 미드필더 중 최고다. 그의 침착성과 탁월한 볼 배급 능력은 경이로운 수준"이라 평가했다. 그것도 모자라 "세계 축구팬들은 그의 등 번호(6)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홍명보, 황선홍이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고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 부임 이후 국가대표팀 주장이 되었다. K리그에서 공격수로 좋은 활약을 보여줬는데 당시 득점난에 시달리던 코엘류호에 안정환과 같이 투톱으로 기용되기도 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와일드카드로 선발되어 8강에 올랐고, 2005년 독일 월드컵 최종예선까지 출장했다. 내심 독일 월드컵 출전도 기대했으나 2005년 후반기부터 이어진 왼쪽 무릎 부상이 회복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2006년 은퇴하게 된다.
주요 개인 수상
K리그 베스트 11 선정 : 1994[18], 1998[19], 2002[20]
K리그 득점왕 수상 : 1998
FIFA 세계 올스타 선정 : 1998
체육훈장 맹호장 : 2002
FIFA 월드컵 올스타 선정 : 2002[21][22]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수상 : 2002
험멜코리아-스포츠투데이 선정 올해의 공격수 부문 선수상 수상 : 2002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MVP : 2003
제18회 올해의 프로축구 대상 프로스펙스 특별상 수상 : 2004
플레이 스타일
A매치 124경기 출전이 말해주듯 홍명보, 황선홍과 함께 199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이다. A매치 출전이 많다는 것은 국가대표 감독이 누구든, 전술이 어떻든 항상 국가대표로 뽑혔다는 뜻이고 그렇게 뛰면서도 35세까지 롱런했으니 내구성도 엄청나게 좋은 선수였다.
참고로 당시 축구협회의 적자라 불리는 학연은 바로 홍명보의 고려대이다. 황선홍과 유상철은 상대적으로 처지는 건국대 출신으로 청소년 대표부터 국가대표 선수, 코치, 감독, 축구협회 임원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홍명보와 다르게 순수하게 실력으로 국가대표 생활을 했다.[23] [24]
무엇보다 그의 큰 특색은 한국축구 역사상 김주성과 더불어 전무후무한 만능형 멀티 플레이어[25]라는 점이다. 프로 데뷔는 윙백으로 했으며, 대표팀 데뷔는 스위퍼로 했다. 최전방 공격수부터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최후방 수비수까지 모두 가능한 만능형 멀티플레이어다. K리그에서는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로 모두 올스타에 뽑혔고 특히 공격수로 뛰면서 득점왕까지 했으니 이 정도 수준의 멀티플레이어는 한국 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하며 해외 선수로 범위를 확대한다해도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이다.[26]
뛰어난 체력, 위치 선정, 많은 활동량으로 오프더볼 플레이가 굉장히 뛰어났고 몸싸움, 패스, 슈팅, 킥, 헤더, 태클, 수비 등 모든 부분에서 우수하여 어떤 포지션에서도 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이유로 국가대표 감독이 누구이든 유상철은 항상 주전으로 뛰었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오프더볼 플레이의 경우 카메라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감독은 유상철을 중용하지만 팬들은 잘 이해를 못할 때가 많았다.
킥력이 우수해서 중거리 슛으로 인상적인 골도 여러번 기록했다. 경합능력이 우세하고 유럽선수들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피지컬을 가지고 있어 제공권 장악에 능하고 몸싸움과 태클 능력도 좋아 상대의 공격을 미드필드부터 압박하여 끊어내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본 포지션인 윙백에서 뛸 때 공수겸장의 센스와 막강한 피지컬이 환상적인 시너지를 연출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때는 윙백으로 뛰어 골을 넣기도 했다. 당시 대표팀 동료였던 김병지가 유상철은 윙백으로 할 때가 대단했다고 한다. 다른 포지션으로의 유상철도 훌륭했지만 윙백으로서의 유상철이 더 대단했고 적절한 포지션이였다고 한다[27].
단점은 시대적 한계로 인해 발밑이 부드러운 선수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강력한 킥력을 바탕으로 후방에서 길게 차주는 롱킥을 통한 공격 전개가 가능했음에도 홍명보를 대신할 빌드업 리더까진 되지 못했고 공이 어이없이 뜨는 경우가 잦았는데 볼 터치가 둔탁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을 보면 요즘 태어나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면 정말 완벽한 미드필더로 극강의 활용폭을 보여줬을지도 모를 선수다.
실제 경기를 진행하는 감독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선수였다. 즉, 카메라로 봤을 때는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기둥이 되는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다. 참고로 박지성이 국가대표에 갓 데뷔했을 때도 유상철과 비슷한 이미지였는데 특별히 기술이 뛰어나고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많이 뛰는 선수였다.[28]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활약 이후 축구 팬들의 축구를 보는 눈도 달라졌기 때문에 이후의 유상철의 평가 역시 올라갔다.
멀티플레이어로서의 활약은 특히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히딩크가 중용하며 두드러졌다.[29] 유상철 한 명으로 모든 멀티플레이가 가능하니 교체 선수에 따라 그만큼 전술의 폭이 넓었는데 백미는 바로 16강 이탈리아전이다. 0:1로 뒤지던 후반전에 수비수 3명을 빼고 황선홍, 이천수, 차두리 3명의 공격수를 투입했다. 특히 한국 수비의 핵인 홍명보까지 빼면서 공격수 5명[30]을 필드에 두는 초강수를 뒀는데 이런 전술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유상철과 박지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상철은 선발 때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뛰다가, 김태영이 황선홍으로 바뀌면서 김태영의 자리인 백3의 좌측 스토퍼로, 그 후 홍명보가 빠진 자리에 백4[31]의 중앙 수비수로 들어가서도 변함없는 수비의 안정이 가능했다.[32] 참고로 박지성은 윙에서 박스 투 박스,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이 변경됐다. 자세한 포지션 변화는 히딩크호/이탈리아전 문서 참조.
특히 교체 선수가 투입될 때마다 유상철의 포지션은 계속해서 바뀌었는데 이게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플레이가 아니다. 결국 유상철의 이러한 멀티 플레이 능력으로 2:1 역전승을 이룰 수 있었다. 히딩크 감독의 스타일이 멀티 플레이어를 중시했기 때문에 유상철의 활약이 크게 두드러졌으며 사실 그 어느 감독이든 유상철은 국가대표에서 항상 디폴트였다. 유상철 이후 대한민국 국가대표 미드필더 중 유상철과 완전히 비슷한 플레이를 했던 선수는 없다.[33]
승부욕이 매우 강해서 콧뼈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경기에 그대로 뛰면서 결승골을 터트린 적도 있지만, 한편으로 상대 선수들과 마찰을 벌인 적도 있었다. 2003년 K리그에 있을 때 당시 부산의 이장관의 백태클에 빡친 나머지 주먹다짐을 벌이다 5경기 출전 금지 징계와 벌금을 문 적도 있고, 2004년 J리그 요코하마 시절에는 아챔에서 만난 성남의 서혁수에게 비신사적인 보복행위를 했다 옐로카드를 받기도 했다
울산대학교 감독
다행히 2013년 12월 31일, 울산 현대를 운영하는 현대중공업그룹이 재단인 울산대학교의 축구부 감독을 맡는다는 보도가 나왔다.
울산대학교에 부임하자마자 2014년, 2015년 1,2학년 대학축구대회에서 2년 연속 준우승을 하는 쾌거를 이룬다. 하지만 2015년 전국체육대회 남자 축구 대학부에서 준우승, 2년 뒤 제48회 추계대학축구연맹전에서 단국대학교를 상대로 또 다시 준우승을 거뒀다. 유상철이 울산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총 4번의 준우승을 맛보게 됐다. 유상철은 결국 대한민국 축구계의 콩라인에 가입했다.[36][37] 특히 추계대학축구연맹전 결승전 직후 인터뷰에서 '굿이라도 해야 하나'라고 말할 정도였다.
전남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김현석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전남 드래곤즈 감독
2018 시즌을 앞두고 14경기 연속 무승으로 겨우 클래식에 잔류당한 전남이 노상래 감독을 경질하고 유상철을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대략 5년만에 프로 팀 감독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한편 대전 시티즌 7대 감독이였던 김인완이 전력강화실장으로 전남에 소속이 되어 있어 아이러니하게도 한 팀의 전임 감독과 후임 감독이 같은 한 팀에 소속되어 있는 상황 역시 되었다.[38]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리그 개막전에서 2:1 승리를 거두며 화려한 시작을 알렸다.
3월 11일 경기에서 포항 스틸러스에 3 : 2로 패하기는 했지만, 작년과는 확연히 다른 경기력을 보이면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 중이다.
하지만 그 후로는 8경기에서 겨우 5점, 특히 처음 수원과의 개막전을 승리한 이후 같은 강등권인 인천, 대구에 무승부를 거두며 상황이 매우 심각하며, 전술도 단조롭고 이미 파훼되어있음에도 새로운 대책을 들고 나오지 않아 비난이 커지고 있다. 급기야 7월 말에는 최하위였던 인천한테까지 지며 강등권까지 떨어지자 8월 16일 결국 구단에 사임 의사를 밝혀 감독직에서 내려왔다.
사임 이후에는 동정적인 분위기가 꽤 생성되고 김인완에 대한 불신을 보내는 이들로 인해 여론이 좋았지만, 김인완 감독이 대행으로 부임 후 6경기 동안 리그에서만 4승[39] 1무[40] 1패[41] 라는 돌풍에 가까운 성적을 내고 있어 오히려 유상철 감독은 안타깝게도 '이런 팀으로 어떤 싸움을 하고 있었느냐 ', ' 유상철 감독이 억제기였다.' 라는 식의 조롱받는 등 여론이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선수 시절 얻은 부상으로 수술이 필요한 것도 모자라 목발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임에도 팀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목발을 하지 않고 경기에 임하는 등, 열정 하나만큼은 매우 강렬했던 감독이기에 기대에 미치지 못한 성적 부진이 더욱 아쉽다는 축구팬들의 평가가 지배적이다. 결국 유상철 감독 사임 후 반전하는 듯했던 김인완 체제 하의 전남은 성적을 반등시키지 못하고 결국 강등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2019년 5월 14일 인천 유나이티드 9대 감독으로 선임되어 구단과 취임 인터뷰를 했다.#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42]이다. 선임 직전 언론 인터뷰에서 "실패한 감독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게 두렵다"는 말로 뭔가 현장 복귀를 암시하는듯한 얘기를 꺼내더니, 얼마 후 인천 계약이 떴다. 하지만 전남에서의 중도 경질과 이후 전남 강등 때문에 인천이나 여러 K리그 팬들 사이에서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유상철 본인 말마따나 이번에 인천이 강등당하면 진짜 실패한 감독이 되기 때문에 뭔짓을 해서든 강등은 막아야할 필요가 있다.
일단 전임 욘 안데르센 감독이 경질당한 제일 큰 이유가 고집스러운 전술 및 선수단 운영과 이로 인한 부진의 장기화였는데, 유상철은 그 전까지 굉장히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 감독이라 이런 면에서는 충분히 선임할 만한 스타일이기는 하다. 다만 유상철은 전남에서 포지션 파괴를 일으키는 등 오히려 과도한 실험이 문제가 되었고,[43] 전술 철학 등 몇몇 부분에서는 유상철도 변화보다는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편이라 우려가 남는 편. 그래도 대전에서는 괜찮은 지도력을 보여줬고, 본인에게는 정말 절박한 기회인데다, 인천 이적 후 계속 부진한 허용준을 전남에서 지도해 본 적이 있어서 허용준을 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받고 있다.[44] 초반 몇 경기에서 내는 성적에 따라 유상철에 대한 불확실한 여론의 방향이 정해질 듯하다.
인천 사령탑 첫 경기인 DGB대구은행 파크 원정에서 1 : 2로 패해 쓰라린 신고식을 치렀고, 이어 홈에서 상주 상무에게 또 다시 1 : 2로 패하였다. 첫 경기에서는 그래도 팀이 무언가 하려는 모습을 보여줘서 유상철 호의론이 생겼지만, 두 번째 경기는 일부 선수의 치명적인 부진이 두드러진 경기. 물론 유상철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만큼 전술이 큰 폭으로 바뀌기는 힘들어서 상황을 이해하는 팬도 많지만, 팀의 부진이 장기화되는 점이 문제.
그러다가 바로 다음 경기인 제주 원정에서 2 : 1 승리를 거두며 유상철의 인천 첫 승이 이루어졌다. 이 경기는 유상철이 시도한 전략적 카드가 모두 먹혀들어갔으며, 유상철의 과감한 실험을 하는 모습이 빛을 발한 경기이기도 하다. 지언학, 이우혁, 김동민, 정훈성, 이준석 등 주전급으로는 보기 힘든 선수들을 한번에 선발에 넣으며 기존 주전 선수들을 대거 벤치로 보냈고, 투입된 선수들이 멋진 활약을 보여주면서 승점을 따냈다. 특히 지언학과 이우혁은 이 경기가 2019년 첫 리그 출전이었는데, 유상철의 기대에 부응했다. 선수들의 활동량이 살아나면서 '인천다운 모습'이 다시 보인 점도 긍정적.
위기에서 한 차례 벗어난 인천이었지만, 유상철호의 핵심인 이우혁이 부상으로 빠지고 중원 파트너 임은수까지 시즌아웃을 당하면서 중원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는 최악의 부진을 면치 못했고, 중원의 공백을 채우려고 기용한 최범경과 박세직의 부진으로 인해 신인 김강국-이제호를 주전으로 올리는 선택까지 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남준재-김호남 이적 파동으로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힘든 여름을 보내고 있었지만, 이적시장 막판에 폭풍 영입이 이뤄지면서 풀백 이지훈, 센터백 여성해, 윙어 김호남, 명준재, 서재민, 미드필더 장윤호, 라시드 마하지, 스트라이커 란레 케힌데까지 전 포지션에 걸쳐서 보강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전술을 바꾸고 중원 조합이 탄탄해지면서 성적도 한결 나아졌다. 잠시 개선되다가 수비진의 집중력이 붕괴되는 바람에 다시 부진하기도 했지만, 그 기간동안 같이 강등권 생존경쟁중인 제주는 더욱 더 헤매면서 최하위까지 추락하고, 경남도 선수들의 집단 부상과 20경기 무승행진을 기록했기에 상대적으로 인천은 이들을 지속적으로 쫓아갈 수 있었다. 거기에 부상에서 돌아온 지언학을 중심으로 다시 전술 변화를 주면서 무패 행진으로 접어들기도 했다. 결국 10월 19일 파이널 라운드 B 1차전에서 성남을 1:0으로 잡는 데 성공, 마침내 10위에 올라 간만에 강등권에서 탈출했다.
경기 후에 인천 선수들, 프런트 직원들이 모두 오열하는 모습이 포착되었고, 이천수 전력강화실장마저 눈물을 흘렸으며, 선수들은 인터뷰를 거절하거나 운 이유에 대해서 돌려 말하는 등 안 좋은 낌새가 감지되었다. 그리고 이게 강등권 이탈로 인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란 추측이 축구 커뮤니티들에서 돌았고, 유상철 감독이 황달 증상을 앓고있는 모습이 포착되면서, 유상철 감독의 건강 이상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많아졌다. 모두 쉬쉬하며 걱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경남도민일보 정성인 기자가 독단적으로 개인 블로그에 병에 걸렸다는 글을 올리고 한 술 더 떠서 태그에 췌장암을 달아 올려서 공개적으로 알려졌다.[45] 경기 이후부터 다음날까지 '유상철'이 실시간 검색어 5위 이내로 계속 유지되었다.
10월 20일, 인천 구단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유상철 감독이 건강이 악화되어서 입원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후 시술로 독소를 제거했으며 퇴원 후 10월 27일 경기에 벤치에 앉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원전은 막판 동점골로 간신히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10위를 유지했다.[46] 경기 후에는 "대표이사님, 구단 모두 성적은 중요하지 않으니 신경쓰지 말고 쉬라고 만류했지만, 내가 제일 중요한 때라 경기에 나오겠다고 밀어붙였다. 누워서 쉬는 것보다 나와서 경기를 지휘하는게 더 병이 가라앉는 기분이다. 난 인천과 끝까지 갈것이다"며 책임감과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결국 2019년 11월 19일,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구단 SNS을 통해 밝혔다. 이전부터 췌장암 투병 중이라는 설이 나왔는데, 결국 구단 공식 발표로 이것이 사실이었음이 밝혀졌다.[47] 거기다 스포츠조선에서는 기자가 유상철에게 전화를 건 내용을 토대로 암이 이미 다른 장기로도 전이가 되어 버렸다고 보도했다.[48] #
사랑하는 인천 팬 여러분, 한국 축구를 사랑해 주시는 모든 축구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천유나이티드 감독 유상철입니다.
먼저, 항상 저희 인천 유나이티드를 아껴 주시고 선수들에게 크나큰 성원을 보내주시는 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 올립니다.
제가 이렇게 팬 여러분께 인사를 올리게 된 이유는, 여러 말과 소문이 무성한 저의 건강 상태에 대해 이제는 제가 직접 팬 여러분께 말씀을 드려야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10월 중순경 몸에 황달 증상이 나타나는 등 이상 징후가 발생하였고, 곧바로 병원을 찾아 정밀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검사 결과 췌장암 4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저에게 있어 받아들이기 힘든 진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를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저 때문에 선수들과 팀에게 피해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곳 인천의 감독으로 부임할 때 저는 인천 팬 여러분께 ‘반드시 K리그 1 무대에 잔류하겠다’라는 약속을 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남원정을 마치고 병원으로 향하기 전 선수들에게 ‘빨리 치료를 마치고서 그라운드에 다시 돌아오겠다’라는 약속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저는 1차 치료를 마치고 다시 그라운드에 돌아와 선수들에게 ‘나는 약속을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병원에 있으면서 역시 현장에 있을 때가 가장 좋았다는 걸 느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계속해서 치료를 병행해야 합니다. 제가 맡은 바 임무를 다함과 동시에 우리 선수들, 스태프들과 함께 그라운드 안에서 어울리며 저 자신도 긍정의 힘을 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팬 여러분과 했던 약속을 지키고자 합니다. 남은 2경기에 사활을 걸어 팬 여러분이 보내주신 성원과 관심에 보답하고자 감독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을 다시 한번 약속드립니다.
축구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우리 인천의 올 시즌 K리그 1 잔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또한, 팬 여러분께서 끝까지 우리 인천을 믿고 응원해주시듯이 저 또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또 버티겠습니다. ‘할 수 있다’는 긍정의 힘으로 병마와 싸워 이겨내겠습니다.
저를 걱정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모든 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이만 인사말을 줄이겠습니다. 팬 여러분의 건강과 행운이 항상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팬들은 2002년의 그 기적처럼, 유상철 감독의 인생에 또 한 번의 기적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49]
유상철 감독은 수원 이임생 감독을 만나 “임생아, 나 이 나이에 지금 가야 되냐?”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이임생 감독은 유상철 감독을 안아주면서 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김도훈 울산 현대 감독, 김기동 포항 스틸러스 감독, 최용수 FC 서울 감독, 이임생 수원 삼성 감독, 조제 모라이스 전북 현대 감독, 김학범 올림픽 대표팀 감독, 파울루 벤투 국가대표팀 감독 등이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 외에도 제자 김진야, 개그맨 조윤호, 감스트 등이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K리그 연맹과 전 구단이 쾌유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는데 뜻을 모으고, 11월 23~24일 열린 K리그 1 37라운드 전 경기와 K리그2 준PO 때 경기 전 입장곡을 생략하는 대신 30초간 쾌유를 기원하는 박수를 보내기로 했고, 실제 전 경기장에서 유상철의 이름이 연호되었다.
J리그에서도 응원이 이어졌다. 유상철이 현역 시절 몸담았던 가시와 레이솔, 요코하마 F. 마리노스가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유상철과 선수 시절 리그 2연패를 함께한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팬들은 경기 중 응원 걸개를 걸었다. 요코하마 시절 유상철의 별명은 상철아니키(형). 이걸 그대로 한국어로 할 수 있다, 유상철형이라고 걸개에 써서 올리며 그의 이름을 연호하였다. 2019년 12월 18일 한일전이 열린 2019년 동아시안컵 결승전에서도 일본 관중들이 이 유상철을 응원하는 걸개를 걸었다.
경남 FC와의 리그 폐막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될 경기임에도 라인을 내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줬고, 0:0 무승부를 거두며 인천의 극적인 1부 리그 잔류를 이끌어냈다. 이제 감히 그를 실패한 감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어졌다. 이 와중 인천 서포터스의 마지막 약속도 꼭 지켜 줘라는 걸개가 여러 사람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시즌 종료 후 구단 오피셜로 2020 시즌에도 유상철 감독 체제를 그대로 유지한다고 나왔다. 하지만 이 결정이 축구계 안팎과 인천 팬들 사이에서도 지나친 무리수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아무리 선수단에서 감독을 따르고, 프런트가 유상철 감독의 의지를 존중해도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고 구단도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9년 12월 28일, 유상철 감독 본인이 구단에 치료를 위한 사의를 표명하면서 유상철 감독 체제는 2020 시즌부터 종료된다. 구단은 2020년의 남은 잔여 연봉을 지급하는 한편, 명예 감독으로 선임하기로 결정했다.
FC바르셀로나 이적설
유상철과 관련한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가 FC 바르셀로나 이적설이다. 주된 줄거리는 '1998~1999년에 바르셀로나로 이적할 수 있었는데 구단의 반대로 실패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축구계 사정을 모르는 일부 축구팬들은 이를 루머 또는 거짓으로 치부하거나 유상철의 에이전트가 몸값을 올리기 위해 했던 일종의 언론플레이로 보기도 한다.
결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다. 1998년 여름 FC 바르셀로나의 루이 반 할 감독은 아약스의 로날드 데 부어, 프랑크 데 부어를 영입하고 싶어했으나 성사되지 않아서 그 대안으로 유상철을 테스트하고 싶어했다.당시 네덜란드 기사 2002년 유상철을 소개하는 스페인 언론 기사 하지만 유상철은 어떤 이유에선지 테스트를 받지 않았다. 2019년 5월 유상철이 직접 언론과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즉시 영입이 아니라 입단 테스트여서 스스로 거부했고, 에이전트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점도 있다고 했다. 관련기사
특히 FC 바르셀로나의 수석 코치였던 로날드 쿠만 은 유상철에게 관심이 많았다. 로날드 쿠만은 2000년 피테서 아른험의 감독이 되었을때 이미 영입을 시도했으나 유상철의 갑작스러운 부상 때문에 불발되고 만다.[50]
당시 한국 축구계는 해외 축구 사정에 눈이 어두운 탓에 재능있는 선수들이 유럽에 진출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한국 선수들의 몸값이 지나치게 높았으며, 국가대표로서의 자존심을 앞세워 입단 테스트도 거부했었다.[51] 국내팀들은 해외 리그 이적을 국부유출이라고 생각해서 달갑게 보지 않았으며, 몇 안되는 국내 에이전트들은 J리그 구단과 주로 연결되어 있었다.[52]
물론 유상철이 FC 바르셀로나의 테스트에서 탈락했을 수도 있고, 입단을 했더라도 반드시 성공할 수 있었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유상철의 FC 바르셀로나 진출 실패 사례는 1990년대 우리나라에 세계적인 명문팀이 주목할 정도로 실력을 갖춘 중앙 미드필더가 있었다는 사실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외
과거에 감독으로 있었던 대전 시티즌, 전남드래곤즈와 선수시절을 보냈던 울산 현대 축구단이 유상철 감독의 쾌유를 바라는 이미지를 구단 SNS에 올리기도 하였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 SBS에서 해설을 맡았으며, 2013년 EAFF 동아시안컵 당시 JTBC에서 해설을 맡았다. 해설 능력은 이영표나 현영민처럼 유려한 달변가는 아닌지라 그저 그렇다고 보면 된다.
차구차구에서는 유상춘이라는 가명으로 뜬다. 그리고 감독 유상철 카드와 선수 유상춘 카드를 동시에 쓰는 게 가능하다. 답답하니 차라리 내가 뛸란다!
2002 국가대표팀 선수들 중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패러디되어 망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홈런왕 유상철이라는 별명부터 수직상승 로켓슛까지... 결국 이를 소재로 한 '돌아온 홈런왕 유상철'이라는 제목의 플래시 게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유상철 본인도 그 게임을 직접 해봤다고. 그래서 이 게임 제작자가 사과하는 마음에서 후속작으로 히딩크를 구하는 게임[54][55][56]을 만들었다. 마지막 보스전에서 특정 조건(공을 일정 각도 이상으로, 거의 수직에 가깝게 차며 시속 150km로 막타를 날리는 경우.) 일반적인 엔딩이 아니라 수직상승 로켓슛 엔딩으로 연결된다. 다만, 모든 플래시게임의 특성상 '재생' 혹은 '앞으로' 버튼을 이용하여 플래시 파일 속에 들어있는 각종 영상(각종 엔딩 및 각종 진행과정)을 볼 수 있기는 하다. 그런데 게임을 깨면 나오는 엔딩에 유상철 Forver라고 썼다(...). 돌아온 홈런왕 유상철 플래시 게임, 홈런왕 유상철 히딩크를 구해줘 플래시 게임
'이순신 장군 게임'으로 알려진 너구리알 제작의 불멸의 이순신에도 '유상철의 가호', '유상철의 분노'라는 이름의 아이템으로 등장하는데, 전자는 죽었을 때 이순신 앞에 등장해서 여기서 쓰러지지 말라고 하고는 체력을 모두 회복시켜 주고, 후자는 최종 보스의 체력을 좀 깎고 난 다음에 나오는데 자기한테 맡겨달라고 하고는 "이놈들! 너희들이 감히 독도를 넘봐? 살고 싶지 않나 보구나! 내 오늘은 도저히 이 분노를 참을 수 없구나! 너희들을 모두 대기권 밖으로 날려버려주마!! 사라져랏! 이 쓰레기같은 놈들!!"이라고 외치고는 필살기 수직상승 로켓슛으로 잡몹과 최종 보스까지 다 날려버린다![57][58] 이순신보다 유상철이 더 세보인다.
2002년 10월 국내 무대에 복귀했다. 복귀 후 인터뷰에서 남은 경기 전승과 경기당 1골을 공언, 8경기 9골 기록하였으며, 경기당 1골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마지막 경기에서 스트라이커로 나와 헤딩으로만 해트트릭을 기록해 괴물같은 활약을 보인적 있다.
한쪽 눈의 시력을 사실상 잃었다. 2006년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왼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고 사실상 오른쪽 눈으로만 뛰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뒤이어 2010년 6월 8일자 토크쇼 강심장에서 사실 왼쪽 눈이 시력저하가 아닌 실명 상태라고 밝혔다. 아무에게도 얘기한 적 없고(감독, 심지어 가족까지) 여태 혼자서만 알고 그만큼 몇백배 노력을 쏟아부었다고. 참고로 곽태휘도 유상철과 마찬가지로 한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도 국가대표까지 올라온 인간승리 케이스.
2002년 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에서 크리스티안 비에리에게 팔꿈치 어택을 맞고 코뼈가 부러진 김태영 선수에게 타이거 마스크를 가져다 준 주인공. 일본 쪽 마스크 제작업자들과 인맥이 있어 다리를 놓아 줬다고.
2002년 월드컵 때 폴란드와의 예선전 첫경기 1,2호골은 당시 건국대 선후배 황선홍과 유상철이 녛었다. 이때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는데 그들의 뒤에는 정종덕 감독이 있었다. 정감독이 이끌던 당시에는 대학축구의 정상을 이끌었다. 당시의 주축이 황선홍, 유상철, 이영표, 현영민, 고정운, 유승관, 이상윤, 공문배, 유영록, 권우진, 신병호, 노규영등이 국가대표였다.
인맥관리를 굉장히 잘한다. 워낙 유명한 짤이다보니 여러 축구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알려지면서 유상철을 대표하는 짤이 되었고 심지어 궁민남편에 유상철이 출연했을 때 이 짤을 직접 본인에게 보여주었다! 유상철이 말하길 너무나 당연하지만 악마의 편집이라고 하며 실제로는 다른 후배들에게도 박지성과 같이 대했다고 한다.
은퇴 이후, 드라마에 2편이나 카메오로 출연하면서 연기에 눈을 돌린 적도 있다. 물론 본인은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게 있다면 연기라고 할 정도로 흑역사 취급하는 중.
2019년 5월 12일 인천 드림파크컨트리클럽 파크 코스(파72·7104야드)에서 열린 한국프로골프(KPGA)투어 제2회 휴온스 엘라비에 셀러브리티 프로암(총상금 6억원·우승상금 1억 2000만 원) 최종 라운드 17번 홀(파3)에서 홀인원을 기록했다.# 홀인원 이틀 뒤에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에 선임됐다.
선수 시절과 이후 고교 감독 시절, 대전 시티즌 감독 시절만 해도 갈색 곱슬 장발머리를 자랑하는 풍성충 이었건만, 40대 이후 특히 전남-인천 감독 부임 이후 정수리 탈모가 급격히 진행되어 심각한 수준이라는게 드러났다. 라디오스타에서 김병지가 "유상철, 김태영이 내 머리를 보고 너무 부러워한다."는 말로 확인사살.
날아라 슛돌이 감독으로 있던 시절 꼬꼬마 이강인을 지도한 이력이 있다. 이강인이 대활약 할 때마다 스승인 유상철도 끊임없이 조명되고 있는데, 유상철 본인은 이강인을 어렸을 때부터 기술적으로 완성된 선수라고 표현하며[59] 세계적 유망주가 될 것이라 예견했고,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정작 유상철 본인은 이 질문에 대해 자신이 가르쳐 준 건 별로 없고 이강인이 스스로 잘 성장한 것이라면서 말을 아꼈다. 나중에 이강인이 유명해져서 돌아와 인사를 하니 표정이...
유상철의 이모가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복길엄마 역할로 나왔던 배우 김혜정이다.
체육훈장 맹호장 수훈자이다. 사유는 당연히 이거.
췌장암으로 투병하는 도중 2020년 2월 23일 자신의 쾌유를 응원해 준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홈경기를 방문했다. 췌장암 말기로 고생하는데도 처음보다 건강을 많이 회복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힘을 내겠다." 며 자신을 응원한 요코하마 팬들에게 응답하였다.
총 12차로 예정된 항암치료 중 8차까지 마친 상황이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현재까진 경과가 매우 좋다고 한다. 확실히 감독직에서 있을 때보다 안색도 밝아지고 아픈 기운도 덜하다.
2020년 3월 31일 모친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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