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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에대해 알아보자

뤼케 2020. 7. 2.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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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연쇄강간/연쇄살인범. 1994년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 후에 살해하여 무기징역을 선고받은[2] 범죄자이며, 1980~90년대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다. 그가 검거된 이후 이 사건은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이름이 바뀐다.

DNA 분석기술 발달에 힘입어 2019년에 용의자로 특정되었는데, 그동안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은 총 10차에 이르렀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졌으나 10차의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인지 정확히 확인되지 못했고, 8차 사건은 모방범으로 부정확하게 수사가 종결 나는 등 당시 대한민국 과학 수사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미제 사건으로 분류되었었다. 그러나 2019년 10월 1일 모방범으로 확정되었던 8차 사건을 포함해 화성 연쇄살인 사건 10차 모두 이춘재 본인이 저질렀다고 자백하였으며, 그 외 5건의 살인 사건을 자백. 총 15건[3]의 연쇄 살인과 30여 건의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경찰에 자백했다. 현재 이춘재가 자백한 범죄 사건들에 대해서는 진위를 확인 중이다.

현재 화성 연쇄살인 사건 10건 중 이춘재의 DNA가 발견된 사건은 5건(3차, 4차, 5차, 7차, 9차)이다. 그 외 검사했으나 발견되지 않은 사건은 2건(2차, 10차), 증거물 부족 등의 이유로 검사가 불가능한 사건은 2건(1차, 6차), 유일하게 유력한 용의자가 잡힌 사건으로 알려졌으나, 후에 본인이 자백하여 재심 중인 사건이 1건(8차)이다.

 

생애

이춘재는 1963년 1월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1리[4]에서 태어나 30년간을 근방에서 살았다. 수원시 소재 S고등학교에 입학. 1983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1983년 중순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제1기갑여단에서 전차 조종수로 복무, 1986년 1월 23일 육군 병장 만기 전역했다. 그리고 화성군의 전기부품회사에 근무했다.

1990년 초여름경에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본사를 두고 있는 모 건설주식회사(건설하도급업체)에 들어가 포크레인 기사를 따라다니다가 운전을 배워 면허없이 포크레인 기사로 공사현장을 따라다녔다.[5]

1991년을 전후한 즈음에는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6]의 한 골재회사에서 포크레인 기사로 일했으며, 그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던 아내를 만나 1992년 4월에 결혼했다. 결혼 후, 다니던 회사가 망하자 아내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책임졌다고 한다. 처제 살인 사건으로 조사 받을 때 경찰 조서에는 "1993년 3월말 경 청원군 부용면에 있는 부강농공단지현장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고 현재까지 놀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후 그는 처제를 성폭행한 후 살해했지만, 경찰이 각고의 노력 끝에 이춘재의 집 세탁기 받침대에서 혈흔을 발견, 당시 최신 기술이던 DNA 분석/대조 기술을 근거로 그것이 처제의 피임을 밝혀냈다. 이후 검거 후 혐의 부인, 사건의 잔인성을 근거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현재 수원구치소에 수감중이다. 이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청주 처제 살인사건 항목 참고.

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착하고 조용한 아이로 기억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춘재를 "착하고 대답도 잘하고 성품도 좋은 아이"로 기억하고 있었다. 동창들 역시 이춘재를 "매우 착한 친구"로 기억하고 있었으며, "싹싹하고 인사성도 밝은 아이였다"고 기억했다. 부모와 남동생 역시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으며, 그런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이 때문에 가족들은 이춘재가 저지른 처제 살인사건도 '우발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처가와도 평소 원만한 관계였으며, 처가가 있는 청주시로 버스를 타고 가 벼농사를 하는 장인어른의 일손을 거들고, 처제들이 이 씨의 집에 반찬을 들고 찾아가는 등, 친족 간의 교류도 원활했다고 한다.#

하지만 재판기록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청주 처제 살인사건 당시 재판 기록에 따르면, 그는 2살배기 아들을 멍들 정도로 폭행하고, 아내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지고 아내가 하혈할 정도로 마구 폭행했다고 한다. 당시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이 씨에게 심한 성도착증도 있었으며, 아내를 강간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내가 훗날 울면서 이 사실을 형사에게 알렸을 정도였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아내는 1993년 12월 집을 나갔으며, 이 씨는 아내에게 협박 전화를 걸고 동서에게 "아내와 이혼은 하겠지만 다른 남자와 재혼할수 없게 문신을 새기겠다.[7]"는 말도 했다고 한다. 처제 살인사건 당시 재판 판결을 보면, '한번 화나면 부모가 말리지 못할 정도로 포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점들은 가족들이나 지인들의 진술과는 정반대 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가 교도소에 수감된 이후 말썽 한번 안 부리고 모범수로 지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위계질서에 철저히 순응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자신보다 명백히 위이거나 동등한 지위인 가족들과 지인, 경찰, 교도관들 앞에서는 얌전히 지냈지만, 자신보다 명백히 아래로 규정된 사람에게는 폭력적이고 무자비하게 대했다는 것. 주변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단순히 착한 사람이 화내면 무섭다 정도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경찰 관계자들이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지목한 점은, 이춘재는 범행 후에도 태연했으며, 잡힐 때마다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는 점이다. 처제의 시체를 유기한 다음 날 장인어른을 찾아가 "도와드릴 일 없냐"는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실종신고를 냈으며, 조사 과정에서도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다 혈액이 발견되고 범행을 자백했으나, 이후에 다시 "경찰관들이 고문해서 어쩔 수 없이 한 허위자백"이라고 말을 바꿔 재판을 3심까지 끌고 갔다. 강도 혐의로 체포됐을 당시에도 이춘재는 흉기와 목장갑을 들고 집안에 침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남자가 나를 갑자기 폭행했고 이 때문에 집에 우연히 들어갔지 강도질하려고 들어가지 않았다." 하고 억지스런 주장을 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2019년 9월 18일 경찰은 청주시에서 1994년에 처제를 강간 후 살해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춘재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라고 발표했다. 조사 결과 5차(1987년), 7차(1988년), 9차(1990년) 사건 증거물에서 나온 DNA가 이춘재의 것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구체적인 신상 공개를 하지 않았지만, 1994년 청주에서 위와 같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1명뿐이라 언론을 통해 그 실명과 정보가 공개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1일 자백을 하면서, 무려 30년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밝혀졌다. 그가 자백을 했던 시점,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이춘재를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건이 밝혀지기 전에 이미 다른 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에 처해졌던 만큼 영원히 가석방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의 처벌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2019년 10월 14일 기준 공소시효는 끝났지만, 경찰이 입건을 검토하여 향후 정식적으로 신상 공개를 검토 중에 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범인을 맞혔다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작중 용의자로 지목된 박현규(박해일 분)의 신상이 전부 상상에 기반했음에도 실제 이춘재와 비슷한 점이 많아 주목을 받았다. 닮은 점들은 다음과 같다.
작중 박현규의 주소는 진안1리. 실제 이춘재는 진안1리 출생.
'군대를 막 제대한 20대 초반의 청년'이라는 설정이 일치한다. 극중 서태윤 형사(김상경)가 박현규에게 "네가 군대 제대하고 이 동네 공장으로 온 뒤부터 여기서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난 셈이란 말이야"라고 말하는데 실제로 이춘재가 전역해 귀향한 직후 연쇄강간과 살인사건이 줄줄이 일어났다.
언덕 위에 사는 여자는 작중 범인이 본격적으로 살인을 시작하기 전 강간당했는데, 이춘재 역시 연쇄적으로 강간만 하다가 우발적으로 첫번째 살인[22]을 한 뒤로 연쇄살인을 시작했다.
인근 공장에 다닌다. 이춘재는 화성 소재의 전기 부품 제조 회사에 다녔다. 작중 박현규는 레미콘 공장에 근무하는 걸로 보이는데, 이춘재 회사 바로 옆에 레미콘 공장이 있었다. 다만 사건 당시에는 레미콘이 아니라 섬유산업 쪽 공장이었다.
이춘재는 6차 사건 이후인 1987년 탐문과 행적조사 등을 통해 용의자로 지목되어 수사지휘부에 불려갔으나, 혈액형과 발자국이 달랐기 때문에 수사 선상에서 제외됐다고 한다. 박현규가 수사대상에 오르고 제외되는 과정과 유사하다.
다만 진범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만든 영화다 보니, 영화에서 묘사한 박현규와 실제 이춘재와의 차이점도 당연히 상당수 있다. 차이점에 대해서는 살인의 추억 문서 참조.

그러나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에 의하면 박현규의 실제 모델이 된 사람은 이춘재가 아닌 다른 용의자였고, 1997년에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살인의 추억> 문서의 해당 단락 참조. 영화 내에서도, 박현규가 처음 수사를 받을 때 "당신들이 죄 없는 사람들 족치고 다니는 거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 난 절대로 그렇게 안 당해" 라고 하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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