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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회장 이건희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0. 10. 25.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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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기업인. 삼성전자 회장 겸 삼성그룹 총수였다. 대한민국 최고 부자였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의 셋째 아들로서, CJ그룹의 첫째 형 이맹희, 새한그룹의 둘째 형 이창희를 제치고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낙점되고 아버지 이병철이 사망한 1987년에 그룹 회장에 올라섰다. 1993년 6월 '신경영'을 주창하며 이후 자신의 모토로 삼아왔다.

2008년 김용철 전 법무팀장의 양심고백으로 드러난 비자금과 세금포탈 사건으로 인해 잠시 회장직에서 물러났으나, 2010년에 삼성전자 회장직으로 복귀했다. 2014년 5월에는 급성 심근경색이 와서 이후로는 사실상 코마상태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어 경영에서 물러난 상태로 직함만 유지하였으며, 그의 장남 이재용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실상 삼성 총수 역할을 승계하였다. 투병 6년인 2020년 10월 25일 별세하였다대한민국의 기업인. 삼성전자 회장 겸 삼성그룹 총수였다. 대한민국 최고 부자였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의 셋째 아들로서, CJ그룹의 첫째 형 이맹희, 새한그룹의 둘째 형 이창희를 제치고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낙점되고 아버지 이병철이 사망한 1987년에 그룹 회장에 올라섰다. 1993년 6월 '신경영'을 주창하며 이후 자신의 모토로 삼아왔다.

2008년 김용철 전 법무팀장의 양심고백으로 드러난 비자금과 세금포탈 사건으로 인해 잠시 회장직에서 물러났으나, 2010년에 삼성전자 회장직으로 복귀했다. 2014년 5월에는 급성 심근경색이 와서 이후로는 사실상 코마상태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어 경영에서 물러난 상태로 직함만 유지하였으며, 그의 장남 이재용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실상 삼성 총수 역할을 승계하였다. 투병 6년인 2020년 10월 25일 별세하였다.

 

학창 시절

1942년 1월 9일, 일제강점기 당시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얼마 안 가 어머니 품을 떠나 아버지 이병철의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군의 할머니댁에서 3살 때까지 자랐고, 이후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녔다. 이때도 형과 자취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실 이 시기 이건희 남매가 부모와 함께 모인 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 때문이었는지 이건희의 성격 또한 내성적이 되어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단 혼자서 놀고 사색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전란 중인 고학년 때 다시 한국으로 와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4, 5학년을 같이 다닌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사장 증언에 의하면 부자집 도련님이라 신기한 장난감을 많이 가지고 와 같이 놀긴 했는데, 말이 없고 장난도 잘 안 치던 아이라 그 외엔 기억이 잘 안 난다고(…). 딱히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던 모양.

그러다 고교시절엔 서울사대부고에 진학했는데, 당시 이건희 회장의 동창이었던 홍사덕 전 의원이 2001년 한 인터뷰에 따르면, 미국에서 차관을 많이 들여와야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 안보가 튼튼해진다는 둥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애국하는 길이라는 둥 1950년대 후반 고등학생이 생각하기 힘든 매우 독특한 사고를 가졌다고 한다.

이때도 이건희는 딱히 말이 없고 행동도 느릿느릿한 학생이었다고 하는데, 학과공부에도 별 뜻이 없어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사냐고 물어보면 “나는 사람공부를 제일 많이 한다”는 황당한 답을 했다고. 그게 그냥 하는 말은 아닌지 이후 삼성의 한 임원이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나서 쫓겨난 일이 있었는데, 고교생 이건희가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자 이병철이 두 말 하지 않고 그 임원을 다시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병철은 스스로의 인사관리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고등학생 이건희의 사람 보는 눈을 더 인정하고 있었다는 얘기.

또 이 시절 이건희가 홍사덕에게 느닷없이 일본 소학교 교과서 몇 권을 건네면서 “니 일본어 배워놔라. 니 정도면 두어 달만 해도 웬만큼 할끼다”고 했다. 먹물 좀 들었다는 고교생들에겐 반일감정이 팽배해있던 시절이라 홍사덕이 “그걸 뭐하러 배우노?” 하고 뜨악하게 물었더니 예의 그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봐야 그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고 하더라는 것.

사대부고 레슬링부에서도 활동했다고 한다. 공부에는 별 뜻이 없었던지 성적은 중간도 못 했다고 한다.

이후 연세대학교 상학과(경영학과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자퇴하고 와세다대학 상학부에 진학해 졸업했다.

이 시절 군복무를 했는지에 대해선 이야기가 엇갈린다. 일전에 강용석은 이건희가 정신질환으로 면제받았다는 주장을 했으나 그 근거로 든 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한 얘기임이 드러났고(…), 한겨레 신문의 취재에서는 만기 전역은 아니지만 복무를 하긴 했었다는 보도가 있기도 했었다. 이래저래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군 복무를 회피한 것은 사실인 듯. 그런데 이에 대한 비판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한데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그런 부분이 거의 공개가 되지 않은 부분이 커보인다. 일단 삼성그룹 측의 공식적인 발표는 "이건희 회장님께서는 육군 현역병 출신으로 병장 만기전역을 하신 분이십니다."이다.

다만 이건희가 현역병 출신이 아니라 방위병 출신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건희가 방위병 전역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보통 라이벌 대기업인 현대그룹에서 나오는 말이다. 사실 지금도 '삼성가 남자라면 인생 낭비가 되는 군 복무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드는 게 낫다'는 소릴 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긴 하다. 다만 군대 다녀왔다고 기업을 못 만드는 것은 아니다

젊을 땐 술도 안 했다고 한다. 권근술 전 사장 말에 의하면 나이들어서는 하긴 하지만 잘 못 한다고. 와인은 좋아한다는데 정작 와인 얘기를 하자 무관심했다는 소리도 있다.

자동차 매니아인 그는 유학생 시절 중고차를 사서 샅샅이 뜯어보고 다시 조립하곤 했다. 4200달러에 중고차를 사서 3~4달쯤 타고다니며 분해해본 뒤 수리해서 판매한 결과 700달러의 이윤을 남겼다. 유학시절 동안 중고차 6대를 수리해서 팔았다.

 

삼성의 회장이 되기까지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66년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한 뒤[11] 1968년 주식회사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되었다.

이병철의 장남도 아니고 셋째 아들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물려받은 게 전통적인 재벌 구조에선 좀 의아할 수 있는데, 이는 1969년 말에 이건희 회장의 형들인 이맹희와 이창희가 아버지를 청와대에 고발하는 사건, 일명 왕자의 난을 터뜨리는 바람에 후계구도에서 쫓겨난 탓이 크다. 같이 왕자의 난이 일어난 현대에서는 정주영 회장의 사망 직전(2000년) 즉 정주영 회장의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상황에서 벌어져서 후계자들이 자신의 지분을 갈라 먹는 것에 성공, 현대그룹이 분열되었던 것이지만 삼성가에서의 왕자의 난은 이병철이 반란 따위 다 진압할 힘이 있었을 때[12] 벌어졌고 그 결과 이맹희와 이창희가 진압당해(…) 내쳐졌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물론 후술하겠지만 이건희 본인이 나름 능력을 보여준 덕도 있다.

사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이건희는 형이 두 명이나 있어서 삼성의 회장이 되리라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맹희의 무능과 이창희의 반란 등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이건희에게도 기회가 왔고 이건희는 두 형들과는 대조적으로 아버지인 이병철의 마음에 들 정도의 업무성과를 내면서 후계자로 굳어졌다. 특히, 동양방송을 전두환에게 뺏기기 전까지는 드라마 부문을 직접 챙겨서 키웠을 정도로[13] 의욕적이었고, 성과도 꽤 좋았다. 삼성그룹 내부 경영진의 반대에 개인 사재로 한국 반도체를 인수하고 지속적인 설득으로 이병철 회장의 삼성그룹 차원의 투자를 이끌어냈는데 이것이 현재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가 되었다.

이건희는 두 명의 스승으로 선친 이병철과 장인 홍진기를 꼽았다.
“선친은 경영일선에 항상 나를 동반하셨고 많은 일을 내게 직접 해보라고 주문하셨다. 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으셨다. 현장에 부딪치며 스스로 익히도록 하셨다. 이런 시간이 쌓이면서 ‘경영은 이론이 아닌 실제이며 감이다’는 체험적 교훈을 배웠다…한편 장인은 기업 경영과 관련된 정치, 경제, 법률, 행정 등의 지식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며, 이 지식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문답식으로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다. 결국 나는 두 분의 가르침을 통해 경영에 관한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배운 셈이다…”

이건희는 퇴근 후에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놀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주로 기술 관련 서적을 탐독하거나 전자제품, 각종 기계류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연구를 거듭했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관련 전문가들을 집으로 불러다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삼성 부회장 시절 사석에서 “주말에 우리집으로 초청해 한수 배운 일본 기술자만도 수백 명이 넘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NEC, 도시바, GM, 휴렛팩커드 등 세계 유수 기업의 CEO들도 방한 시 이회장 자택을 주요 방문지로 잡는다.

그의 한남동 자택을 자주 찾는 한 재계 인사는 “이회장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반면 미래과학,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공학 등 이·공학 관련서적이 즐비하게 꽂혀 있는데, 전집류가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그 책들은 이회장이 직접 한 권 한 권 골라 읽은 것 같았다.”고 전한다.

웬만한 전자제품은 콩알만한 부품의 기능 차이까지 꿴다고 한다. 국산 제품과 외국산 제품을 갖다놓고 부품 하나하나를 비교하며 품질 격차의 원인이 된 부품을 밝혀낸 뒤 계열사 기술담당 임원을 불러 그것을 쥐어주기도 했다고...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데, 아무래도 회장님이니 말대꾸를 못 한 거 아닐까?

 

회장으로의 활동

극단적으로 얘기해.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봐.

회장이 된 뒤 이듬해이자 삼성그룹 창업 50주년이 되는 1988년에 삼성의 제2창업을 선언하고, 인간중심·기술중시·자율경영·사회공헌을 경영의 축으로 삼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그룹의 21세기 비전으로 정하였다. 일본인 고문인 후쿠다에게서 받은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아 1993년 6월 위로부터의 적극적인 혁신을 시작하여,[14] 그는 이러한 '신경영'을 통해 획기적인 경영혁신을 추진해 나갔고 삼성전자를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시켰다. 후쿠다 고문에게는 매우 두둑히 챙겨줬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들을 다 제치게 도와줬다면서 욕을 먹기도 했다고.

그룹 회의에서 심심하면 위기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매출이 100조를 넘어도 시장 흐름이 바뀔지 모르니 걱정, 매출이 줄면 줄었다고 걱정. 이렇게 항상 경각심을 늦추지 않는 게 여러 CEO들의 특징이기도 하고, 삼성 성장의 비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인텔의 前 CEO도 일본 업체에게 메모리반도체 분야를 추월당한 다음엔 맨날 위기론에 빠져 있었다고. 다만 항상 그러는 건 아니라 2010년대 초반쯤엔 중국이 우릴 쫓아오려면 아직 멀었고, 일본은 힘이 빠졌다는 뉘앙스로 낙관론을 내놓기도 해 이목을 끌기도 했다. 다만 몇 년 안 가 또 위기론 펼치다 병원에 입원한 게 함정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답게 경영 방식 또한 철두철미하고 세세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前 삼성그룹 법무팀에서 일했던 김용철 변호사가 쓴 책인 <삼성을 생각한다>에 나오는 지시사항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와 관련된 수많은 저서 중에는 제3자인 작가가 쓴 평전인 「이건희 스토리」라는 책이 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이미지와 다른 그의 삶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관리의 삼성이라는 면에서 '자율경영'이 안 된다는 비판도 있다. 신경영만 봐도 당시 선언의 상징적 조치로 받아들여진 7-4제(7시 출근, 4시 퇴근)는 90년대 후반에 벌써 사라졌다. 또 신경영 당시 이건희 회장은 직원들에게 "회장이 잘못하거나 틀렸으면 '그게 아니라 이겁니다'라고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다. 사장, 비서실장이 회장한테 지적을 안 하는데 어떻게 과장, 부장이 이사, 상무한테 지적하느냐. 이것부터 고쳐라"고 강도 높게 주문했지만, 이 역시 사라졌다.

선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이긴 하지만 노조를 허용하지 않는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는 것도 주요 비판거리다. 다만 2010년대 이후부턴 원체 기업규모가 커져서 그런지 노조가 사실상 허용됐다는 말도 있다. 이는 삼성 본사에서 설립된 노조가 아니라 삼성이 합병하는 과정에서 합병당하는 회사에 있던 노조가 존속한 것이다. 실용성은 의문이다만

 

입원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해 자택에서 가장 가까운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는데, 심장이 멎는 급박한 사태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심폐소생술로 심장기능이 돌아온 후 삼성그룹 산하인 삼성서울병원에 이송됐다. 스텐트 시술을 받고나서 VIP병실에 입원했다. 그리고 몇 년째 계속 입원해있다. 덕분에 주기적으로 그의 사망설이 도는 중이다. 참고로 삼성병원 x층에 이건희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층이 있다고 한다.

투병생활 1년차 조금 넘어서서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 파동이 일어났고 3차 감염자 태풍의 눈으로 삼성서울병원이 주목받는 와중에도 계속 자리를 지켰다. 병원 측에서도 이건희 회장의 병실이동계획은 없고 입원수술상황 역시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밝혔다. 애초에 이때 당시만 해도 이 회장이 입원한 이후부터 삼성 경영권은 이미 이재용으로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였다. 2015년 5월에는 삼성문화재단,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직을 아들에게 넘겨주었다.[15]

관련 기사. 반 식물인간 상태에서 눈을 뜨고 감는 등의 반사적인 행동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재활치료도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이는데 자기 구단에서 뛰고 있는 야구선수 이승엽의 홈런 소식에 눈을 번쩍 뜨기도 했다고 한다.

2016년 6월 30일경 이건희 회장이 사망했고 오후 3시에 발표한다는 루머가 돌아 삼성주가가 폭등하는 해프닝이 벌이지기도 했으나 삼성은 사실 무근이라고 일축했다. 그리고 이 사망설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일베저장소가 압수수색을 당했다는 보도가 났었지만 후에 오보로 밝혀졌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에는 관세음보살상 중앙에 이건희 앞으로 건강 발원을 빌며 가장 큰 초가 하나 공양이 되어 있는데, 아마도 아들 이재용이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8월 1일, 한겨레는 '그룹 사정을 잘 아는 핵심 관계자'가 “이건희 회장의 건강 상태가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양호하다. 건강한 상태다”라고 밝혔다. 또 “침대에만 누워 있지 않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병실 복도를 오가기도 한다"는 말을 했다고 단독 보도했다.

2017년 8월 2일, 이재용이 재판 도중 언급하였는데, 표현이 눈에 띈다.
이재용은 "회장님이 살아계실 때부터"라고 말했다가 다급히 "회장님이 건재하실 때부터"라고 말을 정정했다.
박근혜에게 자신이, '홍석현이 이건희의 말을 안 듣는다'는 얘기를 했다고 설명하는 도중에 나온 표현으로 당시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2017년 11월 6일, 2년만에 TV조선 종합뉴스 9에서 이건희 회장의 근황을 취재한 영상이 보도되었다. 이건희 회장이 영화를 보면서 간호사와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이건희가 보고 있던 영화가 일본 유학파답게 목소리의 형태였다고 한다(...). 링크 앞서 말했지만 이건희는 일본 유학파에 영화광이어서 이 영화를 관람하는 덴 큰 무리가 없다.

 

사망

2020년 10월 25일 3시 59분, 지속된 건강 악화(급성 심근경색)로 인해 6년간의 투병 끝에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 장례는 고인과 유족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하며, 삼성 사장단의 조문은 26일에 진행될 예정이다. #

부인 홍라희 관장과 장남 이재용 부회장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했다고 밝혔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7, 18, 19호에 마련되었다. 일반인의 조문은 받지 않는 듯.

선친 이병철 회장 때처럼 장례가 끝난 후 고인은 경기 용인시 에버랜드 부지 내에 속한 선영(선산)에 안장될 것으로 보인다.

경력및 약력

2012. 6.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
2011. 10. 2018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고문
2010. 3. ~ 2020. 10. 삼성전자 회장
2010. 2.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2005. 대한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
1998. 8.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1998. 4. ~ 2008. 4.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
1996. 7. ~ 2008. 8.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1993. 3.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
1989.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1987. 11. ~ 1998. 4. 삼성그룹 회장
1987. 2.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1982. ~ 1993. 2.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1982. 3. ~ 1997. 3.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
1981. 2.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1980. 중앙일보 이사
1979. 2. ~ 1987. 11. 삼성그룹 부회장
1979. 2. 삼성물산 부회장
1966. 10. 동양방송 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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