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 Good
LG그룹 계열 종합 전자제품 제조 기업이며 한국에선 삼성전자와 라이벌 관계에 있다. 가전으로 유명하며 전세계 가전업체중 2019년 기준 매출 및 영업이익 세계 1위를 달성하였다.
기업의 체급상으로는 삼성전자의 매출이 LG전자의 대략 3.5배 정도, 시가총액으로는 20배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상대가 안되는 규모로 2위이긴 하지만 LG가 하지 않는 반도체 제조사업과 과거 여러가지 기술적인 에러로 브랜드 이미지가 추락하여 2020년 2분기 기준 21분기째 적자를 이어가는 스마트폰을 제외한 사업에서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편이다. 또한 LG전자가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계열사인 LG디스플레이와 LG이노텍의 광학솔루션 사업에서도 경쟁사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즉, 하고있는 사업에선 폰 빼고 경쟁사 대비 뒤지지 않는 편인데, 돈되는 사업은 어른의 사정으로 못 했다. 자세한 내용은 LG 문서의 반도체 잔혹사 참조.
본사는 마포대교 인근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대로 128 (여의도동) LG트윈타워 서관에 위치해 있다.
공장 및 연구소는 경북 구미시, 경남 창원시, 충북 청주시, 서울특별시 가산디지털단지, 서초 R&D 캠퍼스 등에 두고 있으며, 노조는 한국노총 금속노련 소속이다.
LG 전자의 역사
1958년 10월, 락희화학 사장 연암 구인회가 경상남도 부산시(현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연지동에 금성사라는 이름으로 전자 회사를 세우고 초대 사장을 겸했다. 1년 뒤 금성사는 최초의 국산 진공관식 5구 라디오 'A-501'을 개발, 생산했으며, 1960년에 최초로 6석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만들고[] 선풍기[]를 생산했다. 뒤이어 1961년에 최초로 국산 자동전화기도 생산했다.
1962년 동생 구정회가 사장직에 취임한 후 그해 라디오를 처음으로 미국 아이젠버그 사에 수출했고, 1963년 최초로 국산 적산전력량계도 개발해냈다. 1964년 부산 온천동에 종합전기기기공장을 개설하고[12] 연지동 시대를 마감했다. 1965년 4월 최초로 국산 냉장고를 만들고 실업기술원양성소를 세운 뒤, 그리고 1966년 8월 최초의 국산 19인치 흑백텔레비전 VD-191를 생산하며 일약 한국 우량 전자회사로 입지를 굳혔고, 이후 대한전선, 삼성 등 후발 업체들의 진출에 영향을 주었다. 그해 9월에 한국케이블공업(주)를 합병하고 1967년 본사를 서울 을지로 한일을지빌딩으로 이전한 후 가전-통신-전선 3개 사업부로 개편했다.
1968년에 금성판매(주)를 설립하고 최초로 국산 룸에어컨을 개발했고, 같은 해에 히타치와 제휴를 해서 국산 엘리베이터까지 제작했다.[] 1969년에 최초로 국산 펌프와 세탁기를 생산한 후 10월부터 통신기기 부문을 금성통신(주)으로, 전선 부문을 금성전선(주)로 각각 분리 시켰고, 1970년에 일본 알프스전기와 합작해 금성알프스전자(주)를 설립하였다.
1971년부터 락희화학에서 옮겨 온 4대 사장 박승찬(1926~1979)은 '금성 약진 3개년 계획'을 내세워 기업 발전과 기술 개발에 열을 올렸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1973년 기업공개 단행 후 1975년에 경북 구미공장, 1976년에 경남 창원공장을 각각 세웠고, 1977년 2월에 사업부제 및 본부장제로 개편 후 8월에 자사 첫 컬러TV 'CT-808'을 개발해냈다. 다른 한편으로 1974년부터 '전국 정밀도 경진대회'에서 3연패, 1977년부터 1978년까지 한국 최초로 국제기능올림픽 2연패 달성에 기여해 해외에서도 기술력을 인정 하게끔 했다. 1978년 8월에 컴퓨터사업부를 신설하고 12월에 매출 1천억 원 및 수출 1천억 불을 달성하였다.
1979년 6월 6일에 박승찬 사장이 교통사고로 급사하자, 허신구가 사장직을 이어받아 그해 8월에 금성통신, 금성전기 등과 합작해 대한전선으로 부터 대한반도체(주) 지분 49%를 인수했고, 1980년대부터 해외진출에 적극 나섰다. 1980년에 서독에 첫 현지법인을 설립했고, 1982년, 한국 최초 VCR 및 컬러 비디오카메라를 개발하고 미국 앨라배마 주 헌츠빌에 한국 기업으로서 처음으로 현지공장을 개설하였다. 1983년에 디자인 종합연구소 및 제품시험연구소를 개설했고, 1984년에 한국 최초로 음성다중 TV를 개발한 후 평택공장과 김해공장[14]을 개설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매출 1조 원을 돌파했다. 1987년부터 부문별 대표이사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금성은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노동운동이 확대됨에 따라 노사분규가 격렬해져 위기에 봉착했다. 특히 1987년과 1989년에 터진 파업으로 매출손실 6천억 원, 근로손실일수 50여 일로 회사를 창사이래 최대의 경영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89년부터 이헌조가 가전부문 사장직에 취임하여 '노사관계' 대신 '노경관계'를 강조한 신경영 및 '종합생산성관리(TPC) 운동' 등을 전개해 개혁을 시작했다.
1991년 '사업문화단위(CU)'제 실시로 금성통신, 금성알프스전자, 금성포스타 등 자회사들과 '가전정보통신CU'를 구축하며 고객감동 서비스와 해외시장 진출에 주력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 현지법인 및 공장을 잇따라 세웠고, 1992년 금성부품, 1995년 금성통신을 각각 합병하였다. 그 외에 1980년 초반에 닌텐도와 계약해 게임 & 워치를 현지생산하고 1994년 게임기 '3DO 얼라이브'를 내놓아 게임사업에 손을 댔다.
금성사는 럭키그룹과 함께 럭키금성그룹으로 불렸는데, 이것은 설립자가 같은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다.
럭키그룹에 대해 간단히 서술하면, 럭키그룹은 1947년 구인회에 의해 설립한 락희화학공업사로 출발한 기업으로, 럭키크림과 한국 최초의 치약인 럭키치약으로 유명하다.[] 락희화학공업사는 1974년 주식회사 럭키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이후 금성사가 커지면서 1983년 럭키금성그룹으로 그룹명을 바꾸었다.
1995년 럭키금성그룹은 럭키(Lucky)의 L과 금성(Goldstar)의 G를 따온 LG그룹으로 이름을 변경한다.[] 그룹명에 맞추어 금성사도 사명을 지금의 LG전자로 바꾼다.
다만 이런 변경에는 숨겨진 사연이 있었으니, 1990년대에 들어와서 금성사가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제작한 후 수출하는 단계를 벗어나 해외에 법인을 세우고 현지생산, 현지판매 체제를 세우려고 하니 이미 Goldstar의 상표가 유명해져서 세계 각국(당연히 해외공장설립이 그렇지만 인건비가 싼 개발도상국)의 잔머리 돌아가는 놈들이 각자 자국에 Goldstar 혹은 비슷한 이름으로 유령회사를 등록 시켜놓고 상표권의 사용 대가를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다가 아예 회사이름을 새로 만들고 그걸 전세계에 등록하는 방법으로 진드기들을 퇴치한 것. 또한 미국에서는 ‘골드스타’가 해외의 전장에 나간 전사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어서 Lucky Gold Star는 전사자에게 ‘잘 죽었다’는 조롱처럼 들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2005년 LG그룹의 일부 회사가 GS그룹, LS그룹, LIG로 분리 되었는데, 전자 쪽은 LG그룹에 남아 현재에 이른다
1995년 사명 변경 후 금성통신을 합병하는 한편, 유아용 CD-I 플레이어 '멀티스쿨', 일체형 멀티미디어 PC '심포니 홈'을 각각 만들고 미국 유명 가전업체 제니스를 인수하였다. 1996년에 카오스세탁기의 후속으로 '통돌이'를 출시[23]하였으며, 같은 해 IBM과 전략적 기술제휴를 맺어 LG-IBM PC(주)를 설립했다. 1998년에 완전평면 TV '플라톤'을 출시하고 1999년에 필립스와 합작해 훗날 LG 디스플레이가 되는 LG-Philips LCD를 설립하는 등 거침없이 사세를 확장해나갔다.
이러던 와중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치고 나서 이듬해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재벌들의 과잉 중복투자와 소모성 경쟁이 경제위기를 불어왔다면서 각 분야별로 그룹 간 빅딜을 제안했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현대전자와 LG전자가 대상으로 떠올랐는데, 기업 평가를 맡았던 외국계 전략컨설팅 업체 ADL이 현대전자에 후한 평가를 하는 바람에[] LG그룹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LG반도체(투자한 규모와 인력, 시간, 수익성 면에서 그룹 차원의 애착이 크고 깊었던 기업이었다.)를 넘겨야 했다. 이것이 바로 하이닉스다.
이렇게 피눈물을 흘리면서 반도체를 강제로 빼앗겼지만, 그 이후에도 2000년 휘센 에어컨을 출시해 세계시장 1위를 석권했고, 10월에 LG정보통신(주)를 합병시켰다. 뒤이어 2002년 4월 1일부터 기존 법인을 지주회사 'LGEI'로 개편하면서 물적분할했으며, 11월에는 세계 최초 홈네트워크 시스템 'LG홈넷'을 출범시켰다. 2005년에 싸이언 초콜릿폰을 출시하여 1,000만 대를 판매해냈다. 그 외에도 백색가전과 피처폰 그리고 디스플레이 시장을 중심으로 상당한 실적을 기록해 왔다.
2005년 1월에는 통신장비 부문을 분할하여 캐나다 통신장비업체인 노텔과 합작해 LG노텔(주)라는 합작사를 설립했다. 이후 2010년에 노텔이 파산함에 따라 에릭슨이 노텔의 지분을 인수해 LG에릭슨이 되었다가, 2012년에 에릭슨이 LG 측 지분 25%를 더 인수하여 사명도 거꾸로 에릭슨-LG로 변경됐다. 현재 LG의 가정용 유무선 전화기는 에릭슨-LG를 통해 나오고 있다.
그러던 중 2007년 LG텔레콤 사장 출신 남용 부회장[25]이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글로벌 회사로 도약 한답시고 부사장급 임원들을 전부 외국인으로 바꾼다든가, 20년 이상 근무한 내부 직원보다 외국인 직원의 의견을 더 듣는다든가, 업무 비용을 줄인답시고 5분단위의 업무계획 장표를 지시한다든가, 기술 개발 비용을 줄이고 마케팅 비용을 늘리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다. 때문에 외국인 임원과 한국 직원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고, 신기술 개발 속도가 느려졌으며 변화하는 시장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전략컨설팅 업체인 맥킨지 앤 컴퍼니의 말을 듣고 스마트폰 시장을 내버리고 피처폰 시장에만 투자한 결과는... 이것은 초콜릿폰과 LCD TV로 존재감을 드러내던 2009년까지 그 충격이 크지 않았지만, 스마트폰 시대가 더 본격화되는데도 기존 피처폰의 마케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쭉 나아간 결과 2010년대 이후 헬지로 불리며 실적이 크게 악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LG전자에서는 이때를 흑역사로 여기는 듯. SK텔레시스도 이 짓을 했다가 망했지
결국 이를 보다 못한 구본무 회장이 친정을 선포하고 남용 부회장 및 그가 영입한 C 레벨 이하 모든 외국인 임직원들이 퇴출당했고, 구본무 회장의 둘째 동생인 구본준 부회장이 대표이사로 취임 하면서 오너 일가 중심 체제가 선포됐다. 그리고 2011년 11월,약 1조 원 가량의 유상증자를 실시했다.[26] 현행법상 지주회사는 자회사 주식 최소 30% 이상을 보유해야 하는데 유상증자 액수가 당시 시총의 10%에 육박했고, 이로 인해 보유 지분율이 30%대 초반으로 떨어짐에도 유상증자라는 초강수를 둔 것. 이후 스마트폰 시장 등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헬지 시절을 떨쳐내는 듯했으나...
2014년 2월 무디스 사는 모바일 부문의 경쟁 심화, 전분야의 평균판매단가(ASP) 압박, 시장점유율 유지를 위해 늘어나는 마케팅 비용 등을 고려하면 영업이익률이 3~4% 수준을 밑돌 것이라며 LG전자의 신용등급을 Lower Medium Grade(낮은 중간 등급)에서 최하위인 Baa3로 하향 조정하였다. 이는 Non-Investment Grade Speculative(투자 부적격) 등급인 소니와도 불과 한등급 차이다. 무디스 사는 또한 LG전자가 가격 압박과 모바일 관련 높은 수준의 마케팅 비용 등으로 수익성이 수년 동안 둔화될 것이며 중국 제조업체가 성장하면서 향후 경쟁자로 등장하여 LG전자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LG전자의 다른 사업은 비교적 양호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신용등급 하락은 스마트폰의 실패가 주된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같은 해부터 미국 환경보호청으로부터 '에너지스타 어워드'를 2016년까지 3년 연속 수상하였다.
2015년 들어 LG전자의 주가가 신저가를 기록하면서 암울한 전망이 드리우고 있다. -그러니까 지주사 지분율이 낮아져도 실탄을 마련해서 하이닉스를 먹었어야지!!! 2015년 2분기 스마트폰 관련 영업이익이 겨우 2억 원 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 그나마의 이익도 블루투스 헤드셋이 80억 원 매출을 달성하는 대기업답지 않은 일이 벌어져서 그렇지... LG 스마트폰은 다단계 영업까지 했는데도 78억 적자를 기록한 셈.
급기야 2015년 8월 21일, 주가가 39,800원으로 떨어졌다. 리즈 시절이었던 15만 8000원에 비하면 30% 수준도 못 되는 수치.
전반적으로 봤을 때 21세기 들어서는 한때는 라이벌 이었던 삼성전자에 밀려 만년 콩라인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10년 10월 구본준 부회장이 취임한 이후 사내 구호가 1등 합시다이니 말 다했다. 참고로 2016년 1월 언론에 보도된 것에 따르면 2015년 삼성전자의 실적은 매출 200조 6500억, 영업이익 26조 4100억 인데 반해서, LG전자는 매출액은 56조 5,090억 원 영업이익은 1조1923억 원에 불과하다. 매출액은 4배 이상, 영업이익은 25배 이상이니 라이벌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
그중에서도 MC사업본부의 적자는 정말로 심각한데 적자 5분기간 연속 되면서 누적적자가 무려 1조에 가까워 졌고, 2016년 3분기에만 자그마치 4,300억의 적자를 기록하였다.[27] 2017년 4분기에는 누적 적자액이 2조 1,500억에 달한다고 한다.
1990년대까지는 치열하게 경쟁하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지금처럼 격차가 어마어마하게 벌어진 것에는 1998년 소위 빅딜로 메모리반도체를 빼앗긴 것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그룹 차원에서 엄청난 자금과 연구인력을 투자했던 메모리반도체를 허무하게 뺏기고 나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못 찾았다는 것. 게다가 정권이 강제한 빅딜이 소문만 무성했지 결국 LG반도체 달랑 한 건으로 종료 되면서, LG만 더욱 억울하게 된 셈이다.
그렇게 LG반도체를 강제로 집어삼킨 현대전자도 얼마 못 가서 자멸했고, 반도체 분야는 하이닉스로 독립 했다가 2012년 3월 23일 부로 SK그룹의 자회사가 됐다. 이때도 LG의 재인수 소문이 파다했지만, 남용 부회장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하이닉스의 인수는 없다고 못박았다.
반도체를 빼앗긴 뒤에도 백색가전과 피처폰, 디스플레이 위주로 한동안 잘 나가긴 했지만, 시장진입 장벽이 낮은 이런 제품군에 중국 업체들이 끼어들면서 말리기 시작했고, 스마트폰 등 새롭게 떠오르는 분야에서는 남용 부회장의 잘못된 예측으로 전혀 준비가 안 되어있었다. 더구나 잘 나간다고 했을 때도 반도체를 가진 삼성과의 격차는 압도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LG전자의 여러 문제점은 MC사업본부에서 불거져 나왔는데, 위의 남용 사장의 전횡에 대한 반론도 있다.
2017년에는 전년 대비 주가가 2배 가량 올랐다. 저점 대비로는 2.5배 이상. 연간 영업이익이 2조 5천억에 육박하여 작년 대비 2배 가량 낸 성과에 의한 것. MC사업본부가 손해만 안 냈어도 영업이익이 3조를 훨씬 넘었을 것이다.
2018년 4월에는 LG그룹 역사상 역대 최고 인수합병 금액인 1조4440억원에 오스트리아의 자동차 조명 제조사인 ZKW를 인수했다. 이로써 LG전자는 자동차 관련 '전장사업' 역량을 더욱 강화 할 수 있게 되었다. LG전자, ZKW 인수... 전장사업 강화 이로써 자율주행 연구로 돈을 왕창 까먹고 있는 VS본부의 자금줄이 어느정도 확보된 상황.
삼성 바라기
LG전자가 끝도 없이 추락하던 2011년 8월 한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LG전자를 떠나며 CEO에게 남긴 글이 몇달 동안 인터넷을 강타 하였고 몇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재발굴된다, 주요 언론에도 기사로 올라왔다.
글이 파문을 일으킨 뒤에 수많은 전현직 LG직원들의 유사한 이야기가 봇물터지듯 흘러나왔다.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는 상명하달식의 군대식 조직문화와 지나친 짠돌이 경영 그리고 무조건 삼성따라하기. 대체로 사람들의 반응은 망할 만하네. 특히 LG를 가리켜서 어느 순간 2등도 썩 나쁘지 않구나라고 만족하는 2등주의 기업이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참고로 저 글을 쓴 사람은 끝내 CEO 구본준 부회장의 답장을 받지 못했고, 역시나 LG전자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하다 못 해 이걸로 노이즈마케팅이라도 해보지... 몇몇 LG인들은 회사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한다느니, 당신같이 발목잡는 사람이 없는 게 오히려 회사가 잘 된다느니, 회사 욕하고 나가는 인성으로 재취업이 되는가 보자며 비아냥거렸으나, 해당 개발자는 카카오에 이른 시기 들어간 결과 직장생활 대박을 쳤고 2019년 즈음에는 스타트업 CTO로 이직할 때마다 신문 나올 정도의 벤처기업계 거물이 되었다. 역시 될놈은 싹수가 다르다..
LG 전자 제품 특징
금성사 시절부터 LG 제품은 국민 생활에 혁명을 가져왔으며 기실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전자제품 시장은 금성사가 거의 다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도 모자라 금성제와 LG 가전제품은 보통 더럽게 오래 간다. 내구성이 꽤 있는 편이라 10년째 쓴다는 사연 정도는 그냥 기본이고, 1988 서울올림픽 때 산 선풍기가 아직도 현역이라는 케이스도 있으며, 심하면 냉장고나 전자레인지, TV, 세탁기가 20년을 넘어간다는 말도 있다. 성인 자녀가 있는 집에 자녀보다 더 나이 많은 제품이 있는 경우도 꽤 있다. 심지어 1976년에 나와서 1980년대 초반에 단종된 히트상품 청풍, 역풍, 설풍 선풍기는 2020년 현재도 중고거래가 이뤄질 정도.
이제 골동품 수준이라 드물지만 냉장고나 선풍기 등은 45년 이상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거기다가 2017년 기준 결혼 15년째 맞은 부부가 혼수로 구매한 LG 냉장고가 아직도 쌩쌩히 돌아가고 있으며 에어컨도 자주 썼는데 9년째 쌩쌩하다는 경우까지 있다.35년 된 금성 에어컨, LG전자로 돌아온 사연[] 25년 된 '금성사' 세탁기, "여전히 쌩쌩!" 또 23년된 의류 건조기가 여전히 잘 작동하는 사례도 발견되었다."또 LG…" 23년 된 건조기 아직도 '쌩쌩' 이런 제품들은 LG전자 측에서 기부를 받고 신형 제품으로 무료 교환해주기도 한다. LG전자 입장에서도 그만큼 좋은 홍보 효과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복잡하고 고장이 날 구석이 많아서이기도 하고 옛날에는 그냥 무식하게 튼튼하게 만들다가 이제는 더 작은 크기에 고밀도화된 칩셋, 기판 등이 들어가기 때문에 내구성이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세탁기, 냉장고 등 온갖 전자제품에다가 와이파이를 때려넣는 중이다(!).참고로 Windows 10(...)을 때려박은 냉장고도 CES에 출품한 전적이 있다. IoT 버전이 아니다! 물론 현재의 LG전자 제품은 그 정도로 심각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남아공에 토네이도가 몰아 쳤는데 이에 LG 냉장고가 내동댕이 쳐 졌지만 외관이 훼손된 것 외에는 작동에 문제가 없어 내구성이 탱크임을 입증한 기사가 있었다. LG전자의 가전 제품은 예전 금성사 시절 때보다는 아니지만 여전히 내구성은 괜찮은 듯하다. 관련 기사냉장고에도 밀스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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