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정보 유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1. 6. 11. 08:36
728x90
반응형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17시 57분에 발생한 대규모 건축물 붕괴 사고.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붕괴하여 사상자 약 1500명이 발생하였다. 세계 건물 붕괴 관련 참사 중 사망자가 10번째로 많은 참사로 기록되었다. 이는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이후 2개월 만이며,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후 8개월 만의 사고였다. 


원인이 비리와 갑질로 얼룩진 부실공사로 밝혀지자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함께 안전불감증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었고, 전국적인 건축물 안전실태 조사와 건축법의 강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매우 큰 충격을 주어 많은 작품들에서 소재로 삼기도 했다.

 

붕괴 이전의 삼풍백화점

삼풍백화점의 운영법인은 삼풍건설산업이며, 창업주 이준 회장은 1960년대, 중앙정보부의 인맥으로 강남 서초구의 군용지를 불하받았다. 이 땅은 1970~80년대 강남 개발 열풍에 급격히 발전하고 이준은 그동안 건설로 많은 돈을 벌었다. 이때 지은 건축물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이다. 이준은 그동안 모은 자금을 바탕으로 1980년대 후반 서초구 외인주택단지를 철거한 부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삼풍아파트를 건설하고 아파트 단지 내 근린상업지구 개념으로 삼풍백화점도 함께 건설하게 된다.[] 하지만 후술하다시피 단순 근린상업지구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매우 컸다.

 

어마어마한 규모

삼풍백화점은 1987년 5월 착공하여 1989년 12월 1일 개점했는데, 당시 전국 2위 규모 단일매장이었다.[10] 하얀색 바탕의 기존 백화점 건물 디자인을 탈피하여 외형 색상을 분홍색으로 채택했고[] 콘크리트와 유리가 조화되어 당시에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게다가 초호화 쇼핑몰 컨셉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삼풍백화점은 지금 기준으로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각종 명품 브랜드들을 대거 입점시켜 1980년대 신흥 부촌으로 떠오르던 강남구, 서초구 지역 고객들을 쓸어모았다. 현재의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도 당시에는 삼풍백화점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고 한다.[]당시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대치동의 그랜드백화점 강남본점[]과 함께 강남지역 3대 고급백화점으로 손꼽히는 백화점이었다.[]

심지어 당시 삼풍백화점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강남 한복판의 핵심 지역이었다. 위치 자체가 경부고속도로 반포IC가 매우 가까웠고, 2호선, 3호선[]의 환승역인 교대역과 가까웠을 뿐더러, 1993년 수립한 3기 지하철의 9호선 사평역 예정지 1블럭 거리,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근교라는 네임드급 입지를 자랑했다.[] 게다가 근교 강남에 (현재 신분당선 3단계의 전신인) 11호선 강남 구간까지도 예정된 핵심의 핵심이었다.

삼풍백화점은 이런 어마어마한 매장을 바탕으로 공격적으로 마케팅했다. 중앙홀 4층에 있던 아트홀은 서울 시내 유명 공연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MBC라디오 공개방송 등 다양한 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또 인테리어 또한 당시로서는 고급스러웠었다. 또 수입품과 사치품을 많이 판매했는데, 이 때문에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유명한 페라가모[]를 직수입해 판매하기도 했으며,[] 이외에도 다양한 직수입 브랜드들을 들여왔다. 물론 이 브랜드들은 붕괴 이후 국내를 떠난 경우가 많다.

또 B동에 수영장 같은 문화공간을 만들어 손님들을 끌어모으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 문화전과 이태리 문화전 같은 행사를 통해 해외 문화 및 브랜드들을 소개하는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붕괴 당시에는 프랑스 문화전을 준비 중이기도 했다. 그리고 94년에는 탤런트 최명길을 모델로 대대적인 광고[]에 나섰고[] 영국에서 욕실용품 브랜드인 넥타,# 이태리에서 의류 브랜드인 마리나리날디[]를 직수입해 별도의 매장을 직접 운영하는 사업을 시작했으며, 생활용품 전문점인 아프레미디를 자체 런칭해 백화점과 압구정동에 매장을 열기도 했다.[]

물론 백화점 붕괴이후, 마리나리날디[] 대리점 사업과 아프레미디사업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나마 '넥타'는 이후 다른 업체를 통해 매장운영을 재개했지만, 국내 매출부진으로 철수했다. 개점 초기에는 유통업 경험이 부진해서 상당히 부진한 성과를 보였고, 국내 메이저급 브랜드들이 입점을 꺼려하는 백화점이었다. 다만 이후 지속적인 개선과 해외브랜드 유치를 통해 고급화 백화점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층별 구성을 보면, 1층에는 로비와 수입품 매장, 화장품 매장이 있었는데, 삼풍이 당시 수입 브랜드 유치에 의욕적이었던지라[28] 일반인들은 이름도 못 들어봤을 브랜드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당시 입점했던 화장품 브랜드들 중에는 디올, 샤넬 등 명품 화장품 브랜드 부터 해서 에스티 로더, 겔랑, 랑콤, 시슬리 등 지금 기준으로도 고급인 브랜드들이 많았는데, 다시 말하지만 90년대 초반의 일이다.[29] 로비는 많은 사람들이 중앙홀이라고 불리던 공간에 있었는데, 정문 쪽에는 분수대와 연결통로가 있었고 후문 쪽에는 행사 매장과 지하로 연결되는 에스컬레이터가 위치해있었다고 한다. 또 중앙홀을 전망할 수 있는 유리관이 설치된 전망엘리베이터 8개[]도 있었다.

2층에는 여성복 매장이 있었는데 비싼 고급 디자이너 브랜드들과 메이저급 브랜드만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름 날리던 디자이너들은 웬만하면 이곳에 매장을 내었다고 한다. 3층은 남성복과 캐주얼, 스포츠 전문점[]이 있었는데, 이쪽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게스나 베네통만 입어도 잘 산다던 때에 구찌, 버버리, 페라가모, 베르사체, 겐조, 막스마라 등의 수입 명품 브랜드들이 대거 입점해서 '사치 1번지'[]라는 오명을 쓸 정도였다. 4층 가정용품 매장은 온갖 수입 가구와 장식품, 가전제품을 팔았으며, 심지어는 쓰레기통이나 수세미까지 비싼 수입품을 판매했다고 한다. 완구매장에는 레고 같은 요즘 기준으로도 만만치 않은 완구들을 판매했다고 한다.

5층에는 고급 식당들이 즐비했는데, 당시 방문해 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콩나물국밥집(춘원)이 유명했다고 한다.[] 당시 이태리 음식점(빌라파가니니)에서 근무했던 사람에 따르면, 인기 연예인이나 아나운서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지하 식품관도 비싼 식품들을 많이 팔았는데, 지하 빵집에서는 프랑스산 고급 버터와 같은 수입 홈베이킹 재료들까지 판매했었고, 나머지 음식들도 수입품이거나 대단히 비쌌다. 당시 국내에서 고급식품에 관심하는 사람이 적었음을 고려하면,[] 부유층이 많이 다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B동쪽 슈퍼마켓은 논외다.

지하에는 웬디스 햄버거 매장과 올리브 베이커리가 유명했다고 한다. 또한 여성 고객이 많이 몰리던 1층, 2층,[] 5층에는 고급 커피숍[]을 배치해 당시에는 드물었던 블루베리 치즈케이크 같은 각종 고급 디저트류도 취급했었다. 해마다 해외 명품을 집중적으로 판매하기도 했는데, 1994년 이태리 대전이란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건물 중앙에 고급 스포츠카 부가티 EB110를 전시하기도 했다. B동(레포츠동)은 '전생활관'이라는 개념으로 각종 레저시설 및 문화시설,편의시설이 위치했었다. 1~2층은 금융동을 비롯해 우체국,여행사 등이 있었고, 일반상가도 있었다. 3층에는 갤러리와 문화교실, 4~5층은 고급 스포츠센터인 '삼풍스포츠맥스'[]가 있었다.

삼풍은 당시 대중적인 이미지였던 뉴코아를 제외하면[] 서초동에서 거의 유일한 고급 백화점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거주하던 부자들은 자주 들르는 장소였다. 당시 스포츠센터 회원은 백화점 회원으로 자동 등록할 수 있었는데,[] 붕괴 이후 스포츠센터 회원 명단을 보니, 이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고위층들의 이름이 대거 포함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서초동 거주민들을 제외하고도 인근의 압구정동이나 송파쪽에서도 고객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 때문에 백화점 맞은편의 삼풍주유소가 전국 최고 매출을 달성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 삼풍이 이렇게 고가상품들을 많이 팔았던 것은 수요가 충분히 존재했기 때문이다.당시기사1 당시기사2 이런 영업으로 삼풍백화점의 매출 규모는 무섭게 성장했는데, 1991년 개점 2년만에 두배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고() 1994년에는 전국 백화점들 중 매출규모 7위권을 기록했다.

여담으로, 현재 유튜브에서 '밀라논나'로 활동하고 있는 장명숙씨가 이곳의 해외 명품 담당 고문이었다.[] 장명숙씨는 삼풍백화점 명품 브랜드 구성 자문은 물론, 직접 기획부터 바잉 작업, 직영 브랜드 영업까지 참여했다고 한다. 당시 삼풍에 입점해있던 수입 브랜드들은 거의 장명숙씨가 입점시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붕괴된 날이 자신이 출근하는 날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고는 다행히 피했지만, 자신의 비서와 대학동기가 사망하는 등 주변 사람들이 많이 피해를 많이 당했고, 본인에게도 상당한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이라고 한다.

93년 경[]부터는 B동 옆 주차장 부지에 빌딩을 건설해 삼풍그룹 본사 건물 겸 저층부 백화점 건물을 추가로 지어서 백화점을 더 확장시킬 계획도 있었지만, 예정대로 추진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주차장 부지에 건물을 짓기 위해 터파기 공사까지 진행한 정황이 발견되었고,[]주차장 부지 밑에는 불법 건축물이 존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 주차장 부지는 공동주택부지여서 아파트만 지을 수 있었다. 때문에 백화점 부지처럼 상업시설 건설은 애초부터 지을 수 없었다. 백화점 확장이 불가능해지자 삼풍은 오피스텔을 지어 복합건물을 지으려고 했다고 한다. 다만 이 때 의외로 삼풍은 삼성, 현대, 롯데, 대우 등과는 달리 이 부지를 비롯한 강남 다른 곳에 마천루를 건설하고자 하는 뜻을 전혀 비치지 않았다. 물론 진짜 삼풍이 마천루를 지었으면 어떤 참사가 벌어졌을지...[]

다만, 이러한 고급화 전략과 단일매장 전략 때문에 타 백화점보다는 매출이 부진했고 유동인구를 제대로 흡수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원래는 수도권과 지방에도 지점을 추가로 내려고 했으나,[] 사업 과정에서 난관이 많아서 착수 기한을 미룬 상태였다. 그러나 아무리 부진한 경영 성과를 보였다고 해도 일단 타 계열 프랜차이즈 백화점들 사이에서 버젓하게 자리를 잡고 살아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 백화점의 경쟁력이 장난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만일 붕괴되지 않았으면 IMF 외환위기에 따른 도산 위기도 자력으로 극복하고 그 이후에 부도가 난 지방 백화점의 건물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추가 지점을 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붕괴 이후 들어온 억대급 어음들도 다 결제해냈을 만큼 삼풍백화점 자체의 재정도 안정적인 편이었다. 물론 모기업인 삼풍건설은 자본잠식 상태인데다가 유통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본업인 건설업에 투자를 너무 하지 않아서 재정상태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삼풍건설이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의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추후 부동산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현금 마련이 가능했다.

결론적으로 메이저 백화점과 비교했을 때 유동인구가 비교적 후달렸다는 것이지, 절대 파리 날리는 백화점은 아니었다. 즉 당시에 도떼기 시장마냥 사람들이 몰려든 롯데나 뉴코아랑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설령 삼풍그룹이 IMF 사태를 버티지 못해 파산했다 하더라도 삼풍백화점은 이후 다른 메이져 백화점에 인수되어 21세기까지도 럭셔리한 느낌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백화점에서 세일이나 경품 행사를 하면 주변 교통이 마비되던 시절이다. 교통 문제 때문에 세일 행사를 할 때는 대중교통 이용 권장 문구를 광고에 넣도록 하고, 지하철 승차권을 나누어주는 행사를 했어야 할 정도. 그런데 역설적으로 삼풍이 차라리 파리 날리는 백화점이었다면 이 정도로 인명 피해가 심각해지진 않았겠지만...

이렇게 외관이 크고 파격적인 강남 고급백화점인 삼풍백화점은 사실 최악의 부실건물이었다. 붕괴 이후 외국의 건축 전문가들은 이따위로 지어놓고도 5년 반이나 버텼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원래대로라면 1년 안에 무너져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 후술할 무량판 구조 공법의 강점 때문에 그나마 버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부지 용도

사고 원인에 앞서 설명할 것은 삼풍백화점 시공 계획이 세워지기 전 본래 이 부지는 주거용이었다는 사실이다. 본래 삼풍백화점이 들어선 부지는 삼풍건설산업에서 지었던 외인 주택 단지의 일부였고 주거용 건물만 세울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삼풍백화점은 본래 그 자리에 지어질 수 없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삼풍 측은 이 외인 단지를 허물고 삼풍아파트와 함께 백화점을 짓기 위해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부지 용도를 변경하여 공사를 하게 되었다. 때문에 바로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매우 가까운 거리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었고 까딱 잘못되면 아파트의 연쇄 붕괴로 인하여 수십 배의 사상자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부지 용도 비리를 두고 붕괴 직후에는[] 허약한 지반 때문[]에 건물이 붕괴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비록 삼풍백화점의 붕괴 원인은 지반이 아니었지만, 삼풍백화점이 건설 시작부터 철저하게 비리의 온상인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부실 공사

위 자료는 1987년 우원건축사무소에서 설계한 삼풍백화점의 초기 설계도이다.

원래 삼풍백화점은 '삼풍랜드'라는 이름으로[] 바로 옆에 있던 삼풍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대단지 종합상가[]로 설계되어 우성건설[]에서 시공을 맡는 것으로 최초 발주가 되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거의 완공에 가까워질 무렵 건축주인 이준 회장은 건물 용도를 백화점으로 변경하고 시공사에 원래 4층이었던 설계에 1층을 더 얹어 도합 5층으로 건물을 시공할 것을 요구했지만, 시공사인 우성건설 측은 붕괴 위험성을 이유로 증축을 거부했고,[] 이에 이준 회장은 결국 우성건설과의 시공 계약을 중도에 파기시키고 운영사인 삼풍건설산업이 시공을 이어가게끔 한다. 사실 백화점과 같은 복합 건물은 설계 변경 시에 구조 전문가의 검토가 필수적이나[] 이준 회장은 수익을 위하여 건물의 안전성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구조 설계를 변경한 것이다. 만일 건축 안전법을 준수하여 무리한 설계변경을 하지 않았더라면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삼풍백화점은 무량판(Flat-Slab) 구조로 대들보가 없이 바닥이 직접 기둥으로 하중을 전달하는 구조로 설계되었는데,[] 설계 상으로는 기둥과 위층 바닥 사이에 하중 전달을 보조하는 지판(Drop-Panal)이 하나 더 설치되어 바닥 철근과 기둥 철근이 잘 연결되도록 했으나 실제로는 지판 두께도 충분하지 않았으며, 일부 기둥은 지판 자체가 없어서 바닥과 기둥의 철근 연결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바닥 끝쪽 철근도 ㄴ자로 꺾인 형태로 시공해서 건물 상판의 침하로 연쇄붕괴가 일어나려고 해도 철근의 끝부분이 일종의 갈고리 역할을 하여 제동장치 역할을 하도록 해야 했으나, 삼풍백화점은 갈고리 없이 끝부분을 조금 더 연장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시공했다. 백화점이 붕괴할 당시 마치 발파 방법으로 철거될 때처럼 아무런 제동 없이 순식간에 무너졌던 것도 바로 이 철근의 끝부분을 ㄴ자로 꺾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 링크의 영상은 지판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 나무 젓가락 여러 개를 세운 뒤 그 젓가락 위에 둥근 종이 스티커를 붙이고, 위에 또 얇은 알루미늄 호일을 바닥으로 만든 층을 하나 얹은 뒤 위층에 물을 부어 하중을 가하는 실험이다. 여기서 나무 젓가락이 기둥, 종이 스티커가 지판 역할을 하는데, 물을 꽤 많이 부어도 호일 바닥이 뚫리지 않는다. 심지어 기둥을 하나 제거해도 잘 버틴다. 그러나 종이 스티커를 제거한 뒤에 다시 실험한 결과 이전 실험보다 물이 적게 투입되었음에도 바닥이 뚫린다.

게다가 이것도 모자랐는지 삼풍백화점은 기둥들의 지름을 25% 정도 깎기도 했으며 몇몇은 용도에 따라 없애기까지 했다. 본래 1987년 우원건축사무소(당시 대표이사 문정일)가 설계한 삼풍백화점 설계도에는 기둥이 32인치(81.3cm)였으나 실제로는 23인치(58.4cm)로 시공되었다.[] 또한 에스컬레이터에 방화벽을 설치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부분은 기둥의 4분의 1을 자르기도 하였다.

또한 삼풍백화점은 준공검사도 무시하고 가사용 승인만으로 개점하였다. 준공 승인을 받기 전까지는 개점할 수 없는 것이 원칙임에도 삼풍건설은 이를 무시해버렸다. 심지어 4층과 5층은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이 층들은 90년 봄 새 단장을 맞아 오픈했다. 삼풍백화점이 정식으로 준공 승인을 받은 것은 개점 9개월이 지난 1990년 8월의 일이었다. 게다가 붕괴 8개월 전인 1994년 10월에는 기초 부분인 지하 1층에 구조 변경 공사를 했고[]다음 달인 11월에는 위법 건축물 판정을 받기도 했다.

부실관리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건축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더 많은 하중을 버틸 수 있게 설계하며, 삼풍백화점 역시 계획보다 2.5배의 하중을 버틸 수 있도록 지어졌다. 그러나 개장 이후부터 시행되어왔던 지나치게 잦은 용도 변경 때문에 건물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겨버리고 말았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20주년-우리는 죄인이 아니다" 편에서 인터뷰한 당시 청소부의 증언에 따르면 휴점일에도 매장을 재배치하고 공사를 하느라 쉬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부실공사도 문제였지만, 건물의 상가 배치는 그보다 더 심각했다.

불법 증축으로 추가된 5층은 개점 초기에는 비교적 바닥 하중이 가벼운 롤러장을 설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롤러장은 고급스러운 백화점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백화점의 입장 때문에 롤러장은 무산되고 식당가가 들어섰고[], 이 때문에 무게가 상당한 물건인 냉장고에 주방 기기들과 세라믹 식기들은 물론 '대한민국의 전통 식사 문화는 앉아서 밥을 먹는 것이다'라는 시대착오적 이유로 온돌 난방 시설까지 설치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식당가 설계를 할 경우 난방 장치의 중량만 해도 건물 3층 정도를 쌓는 정도의 큰 무게[]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백화점 한식당은 전통적인 난방장치 대신 전기패널을 설치하고, 온돌처럼 꾸미기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백화점 푸드코트들이 대부분 지하에 있는 이유도 다 이 삼풍백화점 사고 때문이다. 2010년대부터는 공법과 설계기준의 상발전소화와 동선분석의 변화로 푸드코트를 지하에, 고급식당가를 최고층에 놓고 있다.[]

게다가 여기에 건물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킨 사업이 또 있었다. 사고 1년 전인 1994년 1월, 삼풍백화점이 2층에 '삼풍문고'라는 이름의 서점을 입점시킨 것이다. 이사나 리모델링을 경험했거나, 서점 및 도서관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바로 체감할 수 있겠지만, 보통 종이 수백 ~ 수천장으로 구성된 책은 단위면적당 무게가 상당히 높은 물품에 속하며, 특히 대한민국 책들은 더 하얗게 하려고 종이에다 돌가루를 많이 넣고 표지도 두꺼운 골판지를 사용해서 외국 책보다 훨씬 더 무겁다. 2009년에 정해진 구조 설계 기준 백화점 2층 이상의 설계하중은 단위면적당 400kg, 서고는 750kg이다. 용도 변경으로 실하중이 초과한다면 반드시 진단 및 구조검토를 거쳐 보강 등 조치를 해야 하지만, 삼풍백화점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3월 서점은 철수해서 지하 1층으로 이사하지만, 가뜩이나 약했던 건물의 하중을 지지하던 구조물들에 가해진 서점의 무게는 건물의 붕괴를 앞당기게 했다. 참고로, 정부대전청사는 4동에 대해서는 특별히 강도를 높여 설계했는데, 특허청의 서류 양이 방대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건축 공법이 발전해서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많은 대형 서점은 대부분 건물 지하층이나 1층에 위치한다. NC웨이브 전주점이 그 예인데, 지하에 문구점인 핫트랙스와 교보문고가 있으며, 국내 최대 규모의 백화점인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은 본관 5층에 있던 교보문고를 철수시킨 후, 몰 지하 2층에 반디앤루니스를 입점시켰다. 그리고 멀리 안 가도 이 곳 근처에 있는 반디앤루디스 신세계강남점 역시 지하 1층에 있지만, 롯데백화점 센텀시티점 교보문고는 7층에, 롯데백화점 광복점은 영풍문고가 5층에 위치한다.[]

당시 무너지지 않은 B동은 물론 몇몇 건축물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용도 변경이 있긴 했지만[] A동과 비교하면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A동 붕괴의 결정적 원인이었던 후술할 에어컨 냉각탑이 그 쪽에는 없어서 옥상은 파손되지 않았고, 원래 용도 역시 사무실 및 레포츠 센터로 계획되어 A동과 달리 기둥을 깎아내거나 줄이는 등의 무리한 설계 변경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B동 건물도 기존 설계였던 4층과 달리 5층으로 멋대로 증축된 건물이었고, 바로 옆 A동 붕괴의 영향으로 안전성에 크게 영향을 받아 사고 반 년 뒤인 95년 12월 경에 B동도 철거하기로 결정되었고, 1999년 초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B동 고층 수영장의 존재는 A동 붕괴와 별개이지만, 당시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고층 수영장을 붕괴 원인으로 의심하는 경우도 있었고, 과민하게 대응할 만한 이유가 되기도 했기 때문에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옥상에 있던 수영장을 모조리 밑으로 내려보내거나 아예 없애버리는 일도 많았다. 이 전후로 해서 고층 수영장이 없어진 백화점들 중 이전부터 수영장과 관련해서 문제가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마산의 성안백화점에 있던 수영장은 이전부터 매장으로 수영장 물이 새는 등 자잘한 문제가 많이 발생해서 결국은 사라졌다. 성안백화점 자체도 이후 부도로 인해 폐업되었고, 건물 자체는 리모델링 공사 후 신세계백화점 마산점으로 새로이 개장했다. 백화점 수영장들이 없어진 이유는 삼풍의 영향보다는 누수 문제와 레저 문화의 대중화로 스포츠센터가 우후죽순 생겨버린 영향이 크고, 또 고층 수영시설은 고급 호텔 쪽으로도 많이 흡수되기도 했다. 호텔은 백화점보다 고층인 경우가 많으므로, 단순히 삼풍백화점 사고 때문에 고층 건물에서 고층 수영장이 사라졌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인 것.현대백화점 부산점과 갤러리아백화점 타임월드 수영장도 2010년 이후에나 없어졌고, 롯데백화점 동래점 수영장은 현재도 운영 중이다.

물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로 백화점들이 높은 하중의 시설들은 고층이 아닌 저층에 설치하게 되었다. 이 사고 이후 한동안 지어진 대한민국의 모든 백화점들은 물론 대다수 상가건물에서 푸드코트나 서점 등 하중이 무겁게 실릴 만한 시설들은 전부 지하에 설치하였다.[] 요즘은 건축 공법도 발전했고, 고급 식당가가 고층에 위치한다.[] 흔히 볼 수 있는 배치는 아예 몽땅 지하에 있거나, 지하에 푸드코트, 최상층부에 고급 식당가로 구성하는 식이다. 당연하지만, 이 상층부의 식당들은 좌식 문화인 요즘에는 굳이 온돌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사고의 결정적 원인 에어컨 냉각탑

삼풍백화점은 앞서 소개한 대로 여러 부실공사와 운영상의 문제점이 있었지만, 사실 이 원인들만으로는 불과 5년 만에 건물이 무너질 이유로 들기엔 부족하다. 사실, 사고의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백화점 옥상에 위치해 있던 에어컨 냉각탑이었다. 이 백화점의 잘못된 냉각탑 운용이 위 문제점들이 건물에 훨씬 치명적으로 작용하게 만들었고 결국 5년여 만에 붕괴사고로 이어지게 되었다.

삼풍백화점 옥상에는 에어컨 냉각탑이 3대 있었는데, 이 냉각탑들의 무게만 해도 36톤이며, 냉각수까지 채우면 무려 87톤인데, 이는 옥상이 견뎌낼 수 있는 하중의 4배가 넘는 엄청난 무게였다.[82] 이 때문에 개장 초기부터 미세한 진동과 물이 새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건설 초기에 냉각탑은 삼풍백화점 옥상 동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냉각탑의 소음 때문에 인근의 삼풍아파트 주민들로부터 민원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백화점 측은 89년 12월부터 90년 정식 개장 전까지 이 냉각탑들을 반대편 우면로 측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백화점 측은 중대한 실책을 저질렀다. 이런 무거운 물건은 건물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크레인을 사용하여 옮겨야 하지만, 백화점 측은 이동 비용을 줄이겠다며 크레인을 사용하지 않고, 냉각탑 아래에 롤러를 장착하여 옥상 상판 위에서 천천히 끌어가며 반대쪽으로 옮기는 그야말로 정신나간 방법을 썼다. 결국 1대당 12톤이나 되는 냉각탑을 옮기는 과정에서 옥상 바닥과 지지 구조물에 엄청난 압력을 줬고, 특히 건물 붕괴의 단초 부분이었던 5E 지주 부분에 큰 충격이 가해졌다(위 첫 번째, 두 번째 사진). 또한 개장 이후 냉각탑에서 발생한 진동은 옥상을 비롯한 5층 구조물에 지속적으로 전달되어 균열을 발생시켰다(위 세 번째 사진). 이것은 5층은 물론 건물 전체의 기둥까지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전조 현상

사실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붕괴 전부터 건물 전반에 위험 신호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설계 후 초기 단계에서도 건물 내부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고 미세한 균열이 보이는 등 붕괴의 징후를 여러 차례 보였다. 붕괴 2년 전인 1993년에는 삼풍백화점 옆 레포츠 센터 2층에 있었던 금융동[]을 1층으로 옮기고 내부 공사를 한 후 삼풍문고라는 대형 서점을 들여놓은 뒤에 1994년 1월 5일부터 영업을 개시했다.

그러나 대형 서점의 특성상 무게 괴물인 책장에다 또 엄청나게 많은 권 수의 그 무거운 책들이 들어차는 바람에 건물이 버틸 수 있는 한계점을 초과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레포츠센터와 중앙홀 지역에서도 균열이 1995년 여름에 사고가 발생할 때까지 1년 동안 셀 수도 없이 늘었다. 결국, 삼풍백화점 총관리부는 서점을 입점한지 1년 2개월 만인 1995년 3월 2일에 지상에 있던 삼풍문고를 철수시키고 대신 지하로 옮겼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균열은 점점 심각해졌다. 중앙홀과 B동의 건물까지 균열과 뼈대 구부러짐 현상이 일어나면서 백화점 건물 전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으며, 붕괴 당일까지 지속되었다.

또 붕괴 2개월 전인 1995년 4월에는 5층 북관 식당가 천장에 균열이 발생했다. 5월부터 이 균열에서 미세한 콘크리트 알갱이와 골재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5층 바닥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삼풍백화점 관계자들을 비롯해 상당수가 이러한 붕괴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변변한 자가진단조차 없었다. 5월 들어 균열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자 관리자는 5층을 폐쇄하고 토목 공학자들을 불러 기본적인 검사를 한 결과 '건물 붕괴 위험이 있다.'는 당연한 결론이 나왔다. 상식적으로 이쯤 되면 건물 전체를 폐쇄하고 접근 금지령을 내려야 정상인데, 이준 일당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위의 사진은 1995년 6월 28일, 즉 붕괴사고 하루 전에 촬영된 것으로, 펀칭(뚫림 전단)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백화점 옥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펀칭은 무량판 구조의 건물에서 바닥과 지판이 기둥으로 전달할 수 있는 하중을 넘어서면서 바닥이 처지고 기둥이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현상으로, 건물 기둥과 지판의 결속 구조가 무량판 구조물 안전성의 핵심임을 감안하자면, 당시 삼풍백화점 건물은 구조적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황이었고 이는 다시 말해서 건물이 본격적으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위의 실험에서 나무젓가락이 알루미늄 포일을 이미 뚫었음을 생각하면 된다.

사고 하루 전에 촬영된 균열이 발생한 천장과 바닥이 침하된 5층 식당가의 사진이다. 탁자가 기울어진 현상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바닥이 기울어져있다. 이미 이 시점부터 붕괴가 시작되었다는 의미로,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챙길 수 있는 것만 챙기고 즉시 대피시켰어야 했다.

붕괴 당일 오전

사고 전날부터 이미 지붕에 철근이 올라오는 펀칭 현상이 목격되면서 사실상 이 때부터 붕괴는 시작되었다. 이한상 삼풍백화점 대표이사를 비롯한 경영진들이 이에 대한 '대책'이라도 짜려고 했던 때는 사고 당일인 6월 29일이었다. 그들은 이날 5층에 있었던 일을 보고 비상사태임을 직감했다.

오전 9시, 5층 식당가 춘원 전주비빔밥 전문점 주인 김서정이 긴급전화를 했는데, '춘원 전주비빔밥 전문점 바닥에 돌출 부분이 2cm 정도 생겼고 천장이 조금 내려왔다. 빨리 와서 보라.'는 내용이었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니 5층 기둥에 무려 20 cm나 되는 균열이 발견되었고 천장이 뒤틀려 내려앉아 있었다. 9시 40분, 백화점측은 바닥침하현상을 직접 확인했고, 시설부의 권유로 춘원 식당은 휴업에 들어간다.

오전 10시, A동(북관) 4층 상품의류부 직원(당시 31세)도 건물 4-5층에서 들려오는 '뚝뚝, 드르륵' 소리와 함께 약 3분간 무거운 진동을 느꼈다. 이한상 사장은 오전 11시쯤 이영길 시설이사 및 건축과 이완수 차장과 함께 5층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1시간쯤 뒤 우동 전문점 '현지'와 냉면 전문점 '미전'의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고[85] 바닥이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바닥이 기울면서 주방조리대가 넘어지는 일도 있었고 균열로 인해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음식에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낮 12시 무렵, 백화점 측은 건물 설계 감리 회사인 우원건축에 연락하는 한편, 옥상의 에어컨 가동과 5층 입주업소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지시켰다. 또한 5층 행사 매장의 도자기, 가구들을 각각 4층, 지하 3층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식당가와 같이 있던 상품권 매장도 1층 로비로 이동시켰다.

붕괴 약 5시간 30분 전인 12시 30분 경, 이한상 사장, 이영길 이사등이 5층의 균열현장을 둘러보면서 5층의 뒤틀림으로 많게는 약 10cm까지 침하된 곳도 발견했다. 수행중인 건축설계사는 5층 식당가와 4층 귀금속 코너의 대피를 건의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백화점 측은 5층 대부분의 점포와 4층 귀금속코너의 영업을 중단시켰다. 또한 무게와 진동 때문에 균열의 원인으로 지목된 옥상의 냉각탑 작동도 중단되었으며, 이때부터 오후 2시까지 냉각탑의 배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사고 당일이었던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위치했었던 서초구에서 관측된 일최고기온은 29.0℃였으며 안개까지 껴서 체감온도 및 불쾌지수가 높았다. 더구나 냉각탑 작동이 중단되는 바람에 백화점 안은 1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열기로 인해 순식간에 찜통이 되었다. 붕괴 당일 삼풍백화점을 방문한 쇼핑객들은 백화점에 들어서면서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고 발생 직전에 너무 더워서 견디지 못해 쇼핑을 그만두고 백화점을 미리 빠져나가 참사를 피한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개그맨 이상해와 국악인 김영임 부부.

이와 관련된 일화로 당시 상품권 매장[]직원의 후일 증언에 따르면, 지하 사무실에서 쉬다가 굉음소리를 듣고,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연기가 가득해서 에어컨이 폭발한줄 알고, 다른 직원들과 함께 비상구를 통해 B동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때 로비매장에 있던 친구가 생각나 로비쪽을 보는 순간, 탁 트여있었던 로비가 잔해들로 막혀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고 한다.

대책 회의와 영업 강행

붕괴 약 3시간 전인 오후 3시경, 구조기술사 이학수가 도착하였고 백화점 임원진과 대동하여 안전 진단을 실시하였다. 이학수 기술사의 지시로 5층의 기둥과 바닥을 파보니 균열이 더욱 커져 주먹이 들어갈 정도가 되었다. 오후 4시에 임원회의실(당시 삼풍백화점 남관 3층)에서 이준 회장 주재로 2차로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임형재, 이학수 등은 해당 건물의 설계법이었던 무량판 공법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며 원인 분석을 브리핑했다. 임형재 소장은 건물 안전에 중대한 이상이 발견되었고, 속히 영업을 중단하고 긴급보수를 해야 한다고 경영진에게 권했다.

여기서 이학수 구조기술자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붕괴 위험은 없다.'고 보고하고 "보강 방법으로 철제 빔으로 슬래브를 받치는 방법, 기둥 주위에 철제 빔을 받치고 철제 와이어로 기둥과 기둥 사이를 받쳐주는 포스텐션 공법이 있다."라고, 임형재 소장이 '빨리 긴급보수를 해야 하며 고객들을 대피시키라.'는 조언과는 상반되이 제안한 것이다. 이준 회장은 이학수의 의견을 지지했고 영업중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사태를 심각하게 바라봤던 이영길 이사는 나머지 이사들과 함께 다시 이준 회장에게 즉각 고객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오히려 이준 회장이 경제적 피해를 생각하여 노발대발하며 반대했고, 나머지 경영진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책회의는 백화점의 영업중지 없이 보수공사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결론이 났고, 사고의 피해를 최소화할 골든 타임은 떠나버리고 말았다. 만일 이 때라도 영업을 중단하고 고객과 직원들의 대피를 실시하고 백화점 주변의 통행을 전면 통제시켰다면 건물과 기자재만 손해보고 인명피해는 거의 없는 선에서 피해가 최소화 됐을지도 모른다.

당시 삼풍백화점 경영진들의 행적 중 미리 붕괴사실을 알고도 자신들만 백화점을 빠져나갔다는 설이 여전히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는 언론의 오보로 인해 퍼진 루머로 사실이 아니다. 청문회에 따르면, 삼풍의 임원들은 붕괴 바로 직전까지 건물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수급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붕괴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반증. 이처럼 경영진 모두 붕괴시점에도 대책회의를 하느라 백화점 건물에 있었음에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회의실이 붕괴가 된 A동이 아니라 B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연에 의해 목숨을 건진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다. 삼풍백화점 이한상 사장은 붕괴 현장을 확인하고 넋이 나간 채 서있다가 그 자리에서 구속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KBS 아카이브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시대유감, 삼풍>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미리 빠져나간 게 아니며, 보수공사에 여념이 없었다.'는 사실이 삼풍 경영진의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애시당초 백화점이 붕괴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그들 경영진의 부도덕하고 방만한 지시(부실공사 및 부실관리)였으니까.

경영진들의 보수 계획에 대한 논의가 1시간이 넘는 한편, 임 소장은 설계 도면을 찾으러 서초동에 있던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후 중앙홀 2층의 행사전을 모두 스포츠센터 1층으로 옮기고 2층은 통행을 금지했다.

한편 백화점측은 이런 위급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고객들에게 전화를 돌려 행사를 안내하면서 백화점 방문을 권유하고 있었다. 하필 이 날은 세일 시작 전 우수고객들을 상대로 사전세일을 하는 날이었다. 물론 이 사전 세일도 불법에 해당한다.  실제로 백화점의 전화를 받고 백화점을 방문했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후의 행보를 보면 알겠지만, 결국 삼풍건설과 이준은 티끌만큼 작은 이익에 집착하는 바람에 사소한 안전을 등한시한 대가로 영원히 파멸되고 말았다. 차라리 돈이 약간 깨지더라도 안전을 감안했더라면 이준 말대로 경제적 손해는 조금 볼 수 있었을지라도 그 정도 손해는 얼마 안 가서 곧 메꿔졌을 것이다. 또한 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나마 그런 전조에 대해서 이런저런 잡음이 있었겠지만, 최소한 이렇게까지 파멸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붕괴

붕괴 약 1시간 전인 오후 5시, 4층의 천장까지 가라앉기 시작하자 백화점측은 고객들이 4층으로 가는 것을 막았다.

붕괴 27분 전인 오후 5시 30분, 임원실 회의장에서는 야간보수공사 준비를 위해 떠난 일부 임원들을 제외하고 회의를 계속 하고 있었다. 이때 A동으로부터 "탕" 하는 소리가 났다.

오후 5시 40분, 4층 천장이 "뚝" 소리를 내며 움직였고, 5층 천장에서 시멘트가 떨어졌다.

오후 5시 47분, 다시 "뚜둑" 하는 소리가 들려 4층에 있던 사람들은 비상구와 B동 방향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오후 5시 50분, 삼풍백화점에서 비상벨이 울렸다. 이 때 A동 5층에 있던 이영철 부장은 야간보수공사를 준비중인 이완수 차장에게 전화로 현재 붕괴가 진행중인 것 같다고 다급하게 알렸다. 그리고 전화 1분 뒤, 건물 전체에 굉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오후 5시 52분, 옥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5층의 뒤틀림이 가속화되어 균열이 실시간으로 번지고 곳곳에서 흙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5층 직원들은 비상계단을 통해 탈출하기 시작했다.

다른 지상층에서는 다소 늦었지만 직원들이 도망가라고 소리치며 고객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비상계단으로 탈출할 타이밍을 놓친 사람들은 B동으로 대피하기도 하였고 일부는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하에 있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이를 듣지 못해 탈출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완전 붕괴 20초 전, 옥상의 하중을 못버티고 뒤틀린 5층 슬래브가 4층 바닥으로 완전히 주저앉았고,[88] 이 충격으로 4층부터 지하 3층까지 연쇄적으로 붕괴하는 수직붕괴가 일어났다

결국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삼풍백화점은 옥상으로부터의 붕괴 시작 5분 만에 땅을 향해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다.[]

지하 4층은 A동쪽에는 없고 B동쪽에만 있기에 붕괴되지 않았다. 부상자들은 붕괴 초기에는 뿌드등 하며 건물이 한 쪽으로 쏠리다 갑자기 밑으로 떨어졌으며, 이에 놀란 쇼핑객들이 여기저기서 "악!", "사람 살려!"라고 소리쳤다고 하며 사고의 순간을 전했다.[]

부상자의 상당수는 붕괴전 또는 직후에 자력으로 탈출하였다. 붕괴 당일 밤 사상자 집계치는 사망 22명, 부상 696명이었는데, 당일의 구조체계는 구조 작업 항목에 나오듯 매우 허술했다. 이런 구조환경 아래 당일 저녁 순식간에 700명을 모두 구하는 것은 말도 안 되니 부상자는 상당수 붕괴 직전 또는 직후에 자력으로 탈출하였거나 행인, 인근 건물에 있던 사람들이었다고 보면 된다. 처음 집계치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이 탈출한 줄 알고 안도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이후 날이 갈수록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사망자수를 보며 충격에 빠져버렸다.

희생자수는 총 502명이었는데 그중 직원이 306명, 그들 중 파견직원이 221명이었다.[] 희생자 중에 직원의 비중이 높은 이유는 우선 냉각탑 정지로 상당수 고객들이 사고 직전에 쇼핑을 포기하고 빠져나갔고, 사고 순간에도 쉽게 자리를 피하기 어려운 직원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행인들과 인근 건물에 있던 사람들까지 무너진 콘크리트에 깔렸다. 주변에 있던 일부 사람들은 몇 년 후 일어난 미국 9.11 테러에 휘말린 사람들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호흡기에 심각한 손상을 입고 후유증을 겪었다. 특히 호흡기 문제 부분에서 석면 문제도 심각하였는데 2009년 이전에 건설된 건물은 거의 100% 석면이 함유된 건축 자재를 상당히 많이 사용한 건물이었고, 이는 삼풍백화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상자, 구조대, 시민, 기자 등 수많은 사람이 상당량의 석면을 호흡기로 마신 것이다. 붕괴 당시 뉴스를 보면 사고 현장에 석면 먼지가 가득하다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이다. (당시 국내 기준으로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없었다.) 생존자는 대부분 지상 1~2층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그때 당시에 지하 1층 식품관에 있었던 사람이 상당히 많아서 그 사람들이 거의 사망했다고 보면 된다.[94] 지하 2층과 3층은 주차장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

거대한 먼지 구름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서초구, 강남구 전체와 잠실 일대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저 때가 하필 초저녁 시간대라서 놀이터에 아이들이 많이 나와 있었는데, 하늘 멀리서 웬 먼지 폭풍이 날아오더니 아파트 단지 전체를 휩쓸자 놀란 엄마들이 황급히 달려나와 아이들을 도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도 했다.[]

생존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작성된 당시 기사에서 붕괴 직전의 긴박함을 알 수 있다. 기사 링크.

B동은 건물 자체는 멀쩡했지만, 붕괴 당시 먼지와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이 뒤섞여서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당시 B동에 있던 시민의 증언 붕괴의 충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B동 1층[]

사진 속에서 보이듯 A동이 완전히 붕괴된 마당에 B동은 멀쩡했으나, 역시 붕괴의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폐쇄조치한 후 98년 10월에 철거 공사에 들어가 이듬해 1월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 붕괴 사고 사흘 후 실시된 현장조사 결과 B동도 마찬가지로 설계강도보다 모자라게 시공되었음을 확인했다.

붕괴 직후

붕괴 사고 직후 지상파 3사인 KBS, SBS, MBC의 뉴스속보다.

당시엔 저렇게 큰 건물이 부실공사로 그대로 무너졌음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사고가 발생한 직후 부실공사가 원인임을 알기 전까진 모든 건축가들이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다. 외부의 충격이 없이 붕괴된 모습이 이렇게도 처참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사고 직후 영국 언론에서는 외부의 충격 없이 건물이 저런 형태로 완전히 붕괴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북한에 의한 테러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결국 원인이 부실공사로 밝혀져 여러모로 더욱 충격을 주었다.[]

이 참사와 가장 비슷한 유형이었던 1993년에 발생한 청주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도 부실공사가 근본 원인이긴 하지만 LPG가스 폭발이 건물 붕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삼풍 참사로부터 불과 2개월 전에는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4월 19일)와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4월 28일)와 광주남구 봉선동 대화아파트 붕괴사고 (2월 6일)도 발생했기에 참사 직후 초기에만 해도 테러 혹은 가스 폭발로 인한 충격으로 건물이 붕괴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대세였다. 하지만 건설 전문가들은 붕괴 당시에도 부실 공사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그러나 이는 곧 MBC의 김은혜 기자[]가 119 구조원 옷을 빌려입고 붕괴 현장에 들어가 건물의 설계도를 꺼내 와서# 부실공사로 인한 붕괴#였음이 드러나자 곧 대한민국 전체가 분노했다. 사실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처럼 대한민국의 부실공사로 인한 폐단이 하루이틀의 문제도 아니었지만, 삼풍백화점은 그 정점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자라도 공무집행 중인 경찰관도 소방관도 아닌 일반인이 붕괴현장에 무단으로 진입하여 물건을 절취한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옷까지 갖춰입은 것은 이를 모면하기 위해 구조대를 사칭했다고 의심해볼 수 있다.

반면 사고에 직접적으로 휘말리지 않은 지나가던 시민들은 그냥 삼풍이 무너졌다는 투로 무덤덤하게 말하고 의료진과 구조진 그리고 취재진들이 출동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태연히 근처 마켓에서 쇼핑을 했다는 목격담이 있다고 한다. 피해 규모를 잘 몰랐고, 이 때까지만 해도 사망자가 수백 명이 나오리라고는 예상도 못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당시 미국에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났기에, 붕괴 직후에는 북한[101]의 폭탄 테러라고 생각한 주민들도 많았으며, 저 큰 건물이 저절로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 주민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사고 당시 현장에서 약 400 m 떨어진 아파트 주민들은 땅이 울리는 느낌에 지진이 났다고 착각해서 경비실에 연락했다고 한다.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충격적인 말에 설마하며 그저 '백화점 공사 현장에서 골재들이 무너졌나 보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고 직후 강남소방서, 서초경찰서 등 관내 관공서의 전화는 시민들의 신고 전화가 폭주하면서 불통이 됐다. 관공서 관계자는 물론 기자들조차 이 소식을 못 믿고 '건물에 금 정도 갔겠지.' 했으나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한 뒤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임기 마지막 날이라 송별파티를 열고 있다가 소식을 들은 최병렬 서울시장과 이틀 전 지방선거로 당선된 조순 서울시장 당선인도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그들이 아무리 고위공직자라 한들 그 현장에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넋을 놓고 펼쳐진 지옥도를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오죽하면 최병렬 시장은 한동안 너무 기가 막힌 듯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하기사, 자신의 임기에 도대체 무슨 마가 끼었는지 작년에 서울 한복판에서 성수대교가 무너진 데 이어, 이제는 대형백화점까지 주저앉았다. 글자 그대로 마지막의 마지막 날까지도 유종의 미는커녕 목불인견의 대형참사가 일어났으니 울음이 터져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처참한 심정이 어련했겠는가.

붕괴된 A동 중 앞쪽 일부는 무너지지 않았기에, 서둘러 대형 크레인들이 와서 쓰러지지 않도록 노력을 했다.

붕괴 후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고, 이런 참사에 대하여 사전에 마련된 대응수칙도 없었기에 초기 단계에서 사고 현장의 통제는 불가능했다. 당시의 붕괴 현장을 찍은 CCTV나 취재 동영상들에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이런 분위기를 틈타 붕괴 현장에서 무너지지 않은 B동의 슈퍼마켓 계산대를 털거나 A동의 무너진 잔해 더미 속을 파내며 희생자들의 소지품이나 매몰된 상품들을 훔치는 등,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헤매는 추태를 보이는 장면이 나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사진이자 많은 사람들이 '악마의 미소'로 기억하는 이 사진은 많은 커뮤니티에서 언급되었다. 이 외에도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 저 사람처럼 백화점 물건을 도둑질하는 사람이 제법 많아서 이를 개탄하는 기사나 사설도 쏟아졌다.

백화점 위치가 부촌인 서초구에 있고 주 고객 중 부유층이나 법조인도 있어서 대기업들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 삼성 측은 박영운 삼성건설 고문과 이윤우 삼성전자 공동대표 부인, 입점업체 제일모직 직원 3명을 잃고, 김경태 삼성자동차 고문 부부도 부상을 당해 인명 피해만 35여 명에 달했다. LG 측은 입점업체 LG반도패션 점장[] 및 구본무 회장 숙모를 잃었다. 대우 측은 김태구 대우자동차 회장 부인이 사망했다. 반면 김영원 진도그룹 회장은 목숨을 건졌다.[] 대기업들 중 유일하게 인명피해가 없던 곳이 현대그룹인데, 임직원들 대부분이 계열사인 현대백화점을 자주 이용했기 때문에 인명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법조인 중 정광진 변호사는 세 딸을 잃었으며, 윤연수 서울지검 형사6부 검사도 부인과 두 자녀를 잃었다. 고위층 집안 중 서석준 전 경제부총리[]의 딸 역시 변을 당했다. 이렇게 사회 상류층들마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고위층이라 해도 같은 고위층이라는 이유만으로 삼풍그룹 총수 일가를 옹호하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구조 작업

이런 대형사고에서 조심스럽고 효율적이어야 할 구조작업이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이런 사고에는 초기 구조가 중요하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붕괴 사태가 일어날 줄 미처 몰랐고, 대규모 구조작업을 체계적으로 한다는 개념 역시 부족하여 구조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후속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해 허점까지 많이 드러났다. 당시에는 이런 대형긴급사고에 대비한 매뉴얼도 전혀 없었다. 물론 그 이전에 대형긴급사고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나 그만큼 대응 체계가 후진적이었다. 사고 이후 소방서와 경찰과 인근의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및 육군특수전사령부 예하 부대들을 비롯하여 지역주민과 민간 자원봉사자, 해병대 전우회, 심지어는 주한미군 육군까지 수많은 기관과 인원들이 사고 현장에 몰렸고, 이 와중에 소방본부와 경찰과 서울시 그리고 중앙재해대책본부 등이 서로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체계적인 지휘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청와대가 개입해서 소방본부가 현장지휘를 하기로 합의하였으나, 여러 기관들과 유족들, 그리고 민간자원봉사자들 사이에 각종 불협화음이 속출했다. 아래에 서술된 각종 앞뒤 막힌 뜨뜻미지근한 상황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구조대 인원 통제나 운영 등이 거의 주먹구구였고, 구조장비나 절단기 등 기본장비가 미리 확보하지 않아 구조가 지연되는 등 우왕좌왕하였다. 이 사고를 계기로 국가적 재난에 대비해 1995년 중앙 119 구조대를 창설하였다.

게다가 사고 당일 매몰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소방차로 불을 끄고자 하였는데, 붕괴 사고로 수도가 끊기는 바람에 주변 옥외 소화전이 작동을 하지 않아 진화작업이 지체되기도 했다. 사실 이 불은 자동차 엔진오일과 휘발유에서 난 불로 판명되어 구조대의 잘못된 대응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진 속 구조 현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건물이 붕괴되면 어디에서 어떤 이유로 불이 났는지 확실히 알아낼 수는 없다. 눈 앞에서 불이 나고 있는데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무작정 구조대를 비난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 사람들도 당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셈이므로. 당시 실제로 붕괴된 A동의 북쪽 엘리베이터 타워가 서서히 붕괴된 A동 파편 위로 기울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이 때문에 안전을 위해 H빔을 설치하느라 활발했던 구조작업도 잠시 지연되었다. 매몰 52시간 만에 환경미화원 24명이 구출되었다.

화재의 열기와 소방수 때문에 생존자들의 희비도 엇갈렸다. 지하 1층에서 70여 시간 만에 구조되었다가 이송 도중 사망한 이은영은 몸에 2~4도 화상을 입고 왼쪽눈이 파열되어 청색증에 시달린 채 발견되었고, 그 다음에 발견된 생존자인 최명석의 근처에 있던 다른 생존자들 중 한 사람은 안타깝게도 구조대원들이 뿌린 물 때문에 익사하였으며, 유지환과 박승현은 화재로 인한 열기로 초기에는 상당히 견디기 힘들었다가 위에서 떨어지는 소방수 덕분에 수분을 섭취하며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과 더불어 사고 당시 줄기차게 나왔던 1967년 9월에 발생했던 충남 청양의 갱도 붕괴사고에서 열엿새 만에 구출된 생존자 광부 양창신의 인터뷰가 계속 방송되었다. 이터뷰 내용은 그가 무너진 갱도 안에서 물만 마시며 16일을 버텄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소방수 덕분에 11일차에 발견된 최명석이나 13일차에 발견된 유지환 씨 그리고 17일차에 발견된 박승현이 생존할 수 있었다.

소방수(水)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당시 지하주차장까지 붕괴되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지하에 붕괴된 콘크리트 더미 어딘가에 있는 차량의 화재로 발생하는 연기를 소화하기 위한 목적과 매몰자들의 생존을 위한 식수, 그리고 당시 여름의 더위로 인해 혹시나 있을 생존자의 탈진을 막기 위한 온도 조절용으로 사용되었다. 단순히 철거시 발생한 먼지를 줄이겠다고 소방수를 뿌리지는 않았다. 당시 지하 3층 구조물까지 모두 붕괴된 상황에서 철거작업을 하겠다고 사람이나 장비를 집어넣지는 않았다. 모든 작업은 구조 위주였고, 철거작업은 그 와중에서 행한 부수적 결과일 뿐이었다. 당시 이러한 논쟁 사항 중에는 포크레인 투입 여부도 있었다. 포크레인으로 작업하다가 혹시나 있을 생존자가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굴삭기가 작동할 때 굴삭기의 삽 부근에서 구조대원들이 생존자 및 희생자의 확인도 병행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최명석도 굴삭기로 해체하다가 발견되었다.[115]

당시 몇몇 가지 구조 장비와 행위를 열거하자면, 모든 구조행위를 일시 멈추고 실종자들의 삐삐 번호로 일괄적으로 전화를 해서 삐삐 소리로 생존자 구조 시도를 여러 차례 했다. 미군이 생존자 발견에 사용된다는 음파를 이용한 구조장비 스톨스(STOLS)를 하와이에서 공수했지만, 붕괴현장에선 잡다한 소음이 너무 많은 탓에 이 장비 덕분에 발견된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방송 및 구조자 탐색을 위해서 직경 5 cm 정도 되는 시추공 탐지카메라를 다수 투입하였다.

붕괴사고 며칠 후 자원봉사자들이 지하 3층으로 내려가 생존자를 찾아봤지만 철수했고, 구조대원들은 건물 붕괴 위험으로 생존자 수색조차 잠정 중단했다. 사고 초기 서울시는 실종자를 200여 명으로 집계하다 결국 400여 명으로 2배 정정하는 어처구니없는 행정을 하였다. 붕괴사고가 단일 사고 최다 인명피해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종자 접수 하나 제대로 못하는 서울시에 국민들은 크게 실망했다. 더하여 팔다리가 잘려 나간 시신들이 건축 잔해물과 뒤섞여서 유가족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당국은 팔 2개+다리 2개+머리+몸통=시체 1구로 피해자 인원을 추산하여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겨우 찾아낸 시신의 팔다리가 맞지 않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자 그제야 잔해를 갖다버린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뒤져서 시신 142구를 추가로 수습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사망자의 시신이 제대로 수습되지 못하고 쓰레기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이다.(이러한 불상사는 대구 지하철 참사 때도 반복되었다.)

유가족들은 격노하여 거리 시위를 하기도 했다. 특전사와 민간인 그리고 유가족 등 50여 명이 사비로 절단기 등을 구입해 생존자 구조에 박차를 가했으나, 현장 지휘소에서는 이들에게 철수하라고 했으며 재진입을 허가하지 않았다.[]

초기에 우왕좌왕하던 구조본부도 시일이 지나며 체계를 갖추어 삼풍백화점 건너편 삼풍주유소를 구조본부로 삼고 구조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구조본부는 자원봉사자를 모두 철수시키고 전문 구조대원만으로 구조활동을 한다는 방침을 정한 뒤 전문인력으로 구성된 구조대를 구성했다. 이런 방침이 내려온 이유는 자원봉사를 핑계로 범죄를 일삼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일부 자원봉사자들이 봉사를 한다는 핑계로 봉사자들에게 나눠주는 물품을 취득하고 백화점 안에 있는 물건들을 무단으로 절도하는 사례가 발견된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유족들에게 접근하여 시체 발굴을 이유로 금품을 요구하는 사람까지 나온것이다. 이들은 나중에 모든 혐의가 들통나서 구속됐다.

이런 대형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는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인력과 장비를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인력/장비 이동 등에 충돌이 발생하면서 작업에 지장이 생긴다. 자원봉사자 등 일반인은 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한 것 같다.

이와 다르게 사회 각 계층에서 온정이 전해졌다. 근처 군부대 장병들은 혈액이 모자란다는 소식을 듣고 헌혈을 했고 위에도 서술 되어 있듯이 건너편 삼풍주유소는 영업을 중단하고 사무실을 서초구 재해대책본부로 내놓았으며 인근 부녀회원들이 컵라면과 빵 등을 작업자에게 배식했다. 경쟁업체였던 현대백화점도 직원 30~50명을 사고 즉시 파견해 구조대원들에게 커피와 라면을 제공하면서 '비록 경쟁업체이지만 같은 백화점 업계끼리 이럴 때 서로 도와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고 한다. 당시 코미디언 조정현은 운영하던 뷔페 직원들과 사고현장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리고 한 외국계 호텔에서도 음식을 내놓았다. 또한 용접도구가 필요하다는 방송을 듣고 용접공 수십명이 달려왔고, 한 업체에서는 최신식 조명도구를 설치하여 현장을 밝혔다. 그 외에도 부상자 응급처치를 도와주기 위해 수녀들이 왔었고, 한 상인은 우의 수백 장을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나누어 주었다.

한편 미국, 러시아, 프랑스가 사고 현장에 구조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으나, 정부에서는 자체 수습이 가능하다고 판단, 이들의 제의를 사양했고 위에 나와 있듯 일부 주한미군 병력과 하와이에서 음파 탐색 장비와 함께 온 소수의 미군 지원 병력이 구조를 돕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사고현장에서 발견된 시신들은 시내 병원들로 후송되었는데, 잔해에 깔리거나 늦게 발견된 시신일수록 더위 등으로 부패되어 타버리거나, 백골화가 진행되기도 하여 종전처럼 인상착의나 지문만으론 신원확보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서울교대에서 실종자 가족 150명의 혈액을 채취해 당대 최첨단 기술 'DNA 감식기법'을 시도했다

최후의 생존자3인

최명석(남, 1975년생, 사고 발생 11일 만에 구조)
상당히 운이 좋은 편에 속했는데, 차차 구조 열기가 식어가면서 물도 뿌리지 않아 갈증에 시달리던 중 장대비가 쏟아져 빗물을 마셔 연명할 수 있었고, 그 다음날 에스컬레이터를 철거하던 중에 굴착기 기사가 발견하였다. 삼풍백화점에는 비정규직으로 근무하였으며, 하청 직원으로 파견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구조 이후에는 해병대에 입대했다. 원래는 군면제였지만, 스스로 자원입대했다.[119] 이후 박승현의 고교동창을 소개받아 결혼을 했으며 대학에서 공부한 전공을 살려 GS건설에 재직중이다. 답답하고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갇혀 있는 동안 자기 주변에 떨어져 있던 장난감 기차를 발견하고는 이를 가지고 놀면서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말이 가지고 노는 거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대한 고통을 잊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하게 해준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의 옆에는 두 명의 여성도 갇혀 있어서 같이 살아나가자고 서로를 위로했지만 25세 직원 이승연과 다른 한명의 중년 여성은 콘크리트에 깔려 부상이 심해 모두 목숨을 잃었다.

훗날 사고 당시의 일을 술회했는데, 매몰되어 있느라 깜깜해서 보이는 게 없었기에 자신의 기억은 청각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살아 있어서, 얘기도 나누고 서로서로 힘내라고 응원도 했지만 점점 그 소리가 줄어들어 갔다고.. 전술한 소방수 때문에 익사한 사람의 마지막 말을 들었는데, 그의 유언은 "물이 차올라와요...허리까지 찼어요...그쪽은 꼭 살아 나가세요..안녕."이었고 그 다음엔 '꼬르륵, 꼬르륵' 물속에서 사람이 숨이 막혀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 소리는 평생 못 잊을 거라고..일반인과 함께 외국을 여행하는 형식의 어느 TV프로그램에 이스라엘 지역 여행자로 섭외되어 출연한 적이 있는데, 주변 지인들을 테러나 전쟁으로 여럿 잃은 경험이 있는 이스라엘 현지 청년이 ‘나는 죽음을 항상 곁에 두고 산다’고 말하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 말하더니 그날 밤 프로그램 PD에게 들려준 이야기다.(출처: 김형민, <접속 1990>)


유지환(여, 1977년생, 사고 발생 13일 만에 구조)
구조 후에 상당히 유쾌한 모습을 보였는데 구조된 직후의 소감으로 "구조대원 오빠랑 데이트하고 싶다."하며 아이스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약간 엉뚱한 말을 해서 소소하게 웃음을 남기기도 했다. 결혼 후에 조용히 가정주부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후 2021년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에 생존자 중 한 사람으로 출연하여 그 날의 비극을 다시 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프로그램에 가명처리가 되지 않고 본명 그대로 출연을 한 드문 사례.


박승현(여, 1976년생, 사고 발생 17일 만에 구조)
1967년 청양 구봉광산 매몰사고에서 외부 연락이 가능했던 반면[120] 박승현은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끊긴 고립 상태에서 17일간 생존했다. 사고 직후 근로복지공단에 특채되어 '삼풍 참사 최후의 생존자' 라는 타이틀로 산업재해 지원을 담당했으나, IMF 사태 때문에 계약직으로 전환당하면서 2000년부터 그만두었다

재판과 손해배상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참사에 국민들은 분노를 쏟아내며 관련자들에 대한 엄정한 처벌을 요구했다. 그 전해인 1994년 10월 21일에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그 해인 1995년 4월 28일에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가 터지는 등 근래에 유사한 대형참사가 이미 두 번이나 있었던 데다 이번 사고는 그 둘보다도 압도적으로 참담했다. 또한 앞의 두 사고와는 달리 건물 붕괴 조짐이 사전에 감지된 데다 고객들을 대피시킬 기회 또한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화점 경영진들이 경제적 피해로 사실을 묵살하고 영업을 강행하다가 일어난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준 회장을 비롯한 백화점 경영진들에 대한 당시 국민들의 분노와 비난의 수준은 연쇄살인범에 대한 비난 수준 이상[]으로 엄청났으며, 철저하게 진상규명을 하고 엄중한 처벌을 하라는 시위를 벌였을 정도였다.

앞서 말했듯이 경영진이 붕괴 직전 백화점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이들은 백화점 건물 내에서 보수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붕괴 사실을 인지했다면 그 순간까지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들을 수급할 필요도 없었을 터. 특히나 전문가인 구조기술사 이학수 씨가 붕괴의 가능성을 일축했기 때문에 경영진들은 그의 말을 믿고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과실이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잘못 알려진 사실은 바로잡힐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KBS아카이브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시대유감, 삼풍>을 통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이후 1996년 8월 23일, 대법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이 확정되었다. 삼풍백화점 회장 이준에게는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하여 징역 7년 6개월이 확정되었으며, 삼풍백화점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설계변경 등을 승인해 준 전 서초구청장 이충우, 황철민에게는 각각 징역 10월에 추징금 3백만원과 징역 10월에 추징금 2백만 원이 확정되었다. 전 서울특별시청 상정계장 정상기, 우성건설 형틀반장 김수익, 전 서초구청 주택과장 김재근 등 피고인 10명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과 추징금 3백만 원에서 선고유예 및 추징금 1백만 원으로 원심형량이 확정되었다. 2심에서 징역 7년형을 받은 삼풍백화점 사장 이한상(회장 이준의 차남) 등 12명은 상고를 포기하여 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당초에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를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검찰은 수사 결과 고의성을 입증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포기했다. 당시 이 사고의 살인죄에 대한 미필적 고의 여부를 증언해줄 수 있었던 시설부장이 삼풍백화점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그것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저것만 입증될 수 있었다면 그 설계를 승인해준 구청장까지 살인죄로 넣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무죄추정의 원칙과 형사소송법에 의해 여러 죄로 해석될 수 있는 사고에서 특별히 중한 죄가 된다는 사실을 행위자가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수사기관이 직접 밝혀내지 못하면 중한 죄로 처벌을 못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업무상 과실치사죄(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가 적용되었다. 판단 기준에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지만 쉽게 말하면 '사람이 죽을 가능성이 있다지만, 정말로 사람이 죽는다고 해도 뭐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했다면 미필적 고의, '사람이 죽을 가능성이 있다지만, 정말로 사람이 죽지야 않겠지.'라고 생각했다면 인식 있는 과실, 즉 과실범이다.

거기에 뇌물공여죄까지 적용되었으므로 경합범 가중(1/2배 가중)하면 사실 이준이 선고받은 징역 7년 6개월은 원칙하에서 법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처벌이었다. 이후 그는 2003년 4월에 만기출소했고, 그 해 10월 4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한편 삼풍백화점의 사장이었던 이한상은 그보다 앞선 2002년 10월 출소했다. 2000년 당시 이준 회장의 부인, 그러니까 이한상의 모친이 대한민국 법무부에다 가석방을 탄원했지만, 당연히 시민단체 등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법률의 한계로 인해 이준 일가에 내려진 형벌은 솜방망이에 가까웠지만 벌금은 매우 강했는데, 여론의 질타에 떠밀려 이준 일가는 전재산을 추징금 + α 손해배상금 명목으로 서울특별시청에 헌납하고 손해배상 처리를 서울특별시청에 일임했다. 징역의 기간이나 벌금의 액수는 형벌이라 법에 써 있는 만큼만 부과해야 하지만 손해배상금은 민사재판의 영역이라 '불법행위로 인해 피해를 끼쳤음'이란 사실만 인정되면 법관의 판단 하에 일정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부과할 수 있다.

사상자가 너무 많아서 손해배상액은 재벌인 이씨 일가 전재산으로도 부족했으므로 결국 서울특별시청에서 모자란 금액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사망자 1인당 3억 8천만 원씩 지급되었으며, 배상금 총액은 3317억 원에 달했다.

그래도 금융권 부채를 탕감하고 난 후 추정되는 삼풍그룹의 나머지 자산이 3천억 원 정도는 되어서 보상액의 거의 대부분을 책임진 셈이기에 무임승차로 나 몰라라 한 것까지는 아니었고, 삼풍의 부실공사를 눈 감아준 정부와 서울특별시청의 책임도 일정 부분 있음은 사실이기에 서울특별시청 입장에서는 부족분을 책임지는 게 억울하다고도 할 수 없다. 다만 정부가 부담하는 그 결손액은 엄밀히 말하자면 세금으로 충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국민들에게 책임을 물린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돼버렸다.

붕괴사고가 발생할 당시까지만 해도 지방자치제가 아닌 관선 체제였기에 서초구청 공무원이 뇌물을 받아먹었으면 서초구청장만의 책임으로 한정 짓지 않고 정부와 서울시의 직접적인 책임까지도 성립될 수 있었다. 그런 놈을 중앙정부가 직접 서울시장으로 앉힌 거니까... 관선제 시절의 전임 서울특별시장과 서초구청장이 싸지른 똥 때문에 민선으로 선출된 후임 서울특별시장과 서초구청장이 고생하게 된 것이긴 하지만, 당시 서초구청장이었던 조남호는 유족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KBS, MBC[].

그가 서울특별시청에 헌납한 재산 목록 중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중문관광단지에 위치한 여미지 식물원[130]이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제주도에 소재한 관광 명소를 서울특별시시설관리공단에서 경영하는 괴상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후 2005년 부국개발에 인수됐으나 2007~2017년까지 정리해고 문제로 노사갈등이 빚어졌다. 게다가 학교법인 숭의학원 역시 관선이사 체제를 거쳐 1999년 영안모자에 매각됐다.

이 사고 이후로 1996년 대기업이던 삼풍건설산업은 흑역사를 남긴 뒤 사실상 공중분해됐으며, 사고와 그로 인한 후폭풍으로 인해 중소기업 1100여 곳이 부도 처리되어, 사고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삼풍에서 일했던 직원, 관련 중소기업 직원 등도 하루 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해 길바닥에 내몰려야 했다. 특히 삼풍건설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은 일반 직원은 물론 고위직들마저도 이 사고로 인해 얼마 가지 않아 직장을 잃어버린 또 다른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니던 회사 자체가 국민들에게 악의 축으로 찍히는 바람에 사회의 따가운 시선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후 닥쳐 온 1997년 외환 위기와 함께 삼중고를 겪으며 다른 곳에 가서 취직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여러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도 모자라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도 못살게 만든 셈이 된 것이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