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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1. 8. 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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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

경상남도 합천군 출생으로, 육사 11기로 입교하였다. 후에 이 기수가 주축이 되어 하나회를 결성한다. 5.16 군사정변 때 박정희를 지지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얻게 된다. 1979년 3월 국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는데, 10.26 사건 이후 계엄법에 의거 보안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자동 보직되었고 이때 수사본부장이라는 직책과 하나회를 통한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았다. 1980년에는 5.17 내란을 일으키고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최규하 대통령을 사임시킨 후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임기가 거의 만료되어갈 때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6.10 민주 항쟁이 일어나 국민의 불만이 점점 거세지자,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및 단임제로 개헌을 마치고 만기 퇴임하였다.

퇴임 후 1995년 노태우와 함께 구속 기소되었으며, 반란 수괴죄 및 살인, 뇌물 수수 등으로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노태우에 이어 헌정사상 두 번째로 구속된 전직 대통령이 되었으나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선 이 둘에 대한 사면 여론이 생기면서 김대중만이 아닌 이회창, 이인제 모두 사면을 공약으로 들고나왔으며, 결국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으로 인해 사면되었다. 

2021년 기준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 중 최고령(90세)이며, 동시에 퇴임 후 지낸 기간(33년)이 가장 긴 대통령이다.

 

전두환은 하나회 소속 대한민국의 장성이었다. 그러던 중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계엄법에 의거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은 10.26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다. 이후 김재규의 궁정동 사건과 전혀 관계없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으로 체포, 군권을 장악하고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서울의 봄,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집권기 동안 삼청교육대, 땡전뉴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평화의 댐, 형제복지원 사건,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등 각종 반민주, 반인권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6.29 선언으로 노태우 등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1997년 12월에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운 대선 후보들과 김영삼 정부에 의해 사면되었다. 이때문에 사면권 남용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집권하자마자 삼청교육대 등 인권 유린 사건이 줄을 이었고, 사법적 측면에서 볼 때 엄격한 판결 및 국민 통제가 있었고 국민들에게는 가혹한 고문과 체벌 등이 일어나곤 했다.

박정희와 다르게 전두환은 본인이 군인 출신인 만큼 경제는 김재익 등 전문 관료에게 맡기는 경향이 강했다. 전두환은 국보위 시절부터 유명한 경제 관료들에게 개인 과외를 받을 정도로 경제 공부에 열중했으며 당시 경제에 대해 가르쳐 준 인물 중 한 명이 김재익이다. 과외를 받으며 그의 식견에 감탄한 전두환은 김재익의 정권 참여를 권했다. 그러자 김재익은 자신이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불간섭과 외부 압력에 대한 보호를 요구했고 그러면서 나온 유명한 말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였다. 그렇게 김재익이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알기 쉽게 밑그림을 그려 전두환의 머리에 넣어준 것이 전두환 집권기 내내 큰 영향을 끼쳤다. 상기한 경제의 김재익, 외교의 노신영, 이범석, 과학 기술의 오명 등.[15] 중공업 과잉 투자가 대대적으로 정리되었고 3저호황을 통해 80년대 전 세계에서 눈에 띄게 빠르고 안정적인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김재익이 정말 온전히 "경제 대통령"이었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당시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이루어진 중화학 공업 분야에 대한 막대한 산업 투자를 정리하는 임무가 전두환 정권에게 주어졌는데, 전두환은 김재익의 의견을 온전히 따르진 않았기 때문이다. 김재익은 농업이나 자동차 산업 포기를 외칠 정도의 안정화론자였다. 이런 김재익을 위시로 한 안정화론자들과 발전주의자들의 싸움에서 최종 결정에 관한 사항은 결국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김재익은 정권 초기의 기초만 다지는 역할을 했을 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사공일 등 경제 보좌관들이 중용되었다. 김재익이 적극 지지한 이른바 금융실명제에 대해서 전두환도 도입 의지를 보였으나, 1977년 부가가치세 실시되어 큰 혼란 끝에 겨우 정착된 마당에,[] 또 다시 큰 경제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정책 시행에 부담을 느낀 일부 경제 관료들과 학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표적인 반대론자가 그 유명한 김종인이다. 그가 전두환 앞에서 평소 친한 김재익과 설전을 벌여가며 전두환을 설득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일각에서는 자신의 비자금을 위해 시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80년대는 한국 상류층 사회의 엘리트화가 진행된 시기로 전두환은 소수의 재벌 및 상위 관료로 나라를 재편한 시기라는 평가까지 있다. 물론 실효적인 재벌 견제와 수많은 중소기업 육성책이 지원되었으나, 소위 엘리트주의와 한국에 고질적인 일류 대학교 학벌 선호 문제도 이 시기에 고착화되었다. 이러한 특권층 사회화 부작용은 다음 대통령인 노태우, 김영삼 시기에 한꺼번에 터져나와, 지존파 사건 등 이른바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회에 대한 극단적 반감으로 이어진다.

 

각종 타이틀

박정희에 이어 2번째 군인 출신 대통령[]
간선제로 당선된 마지막 대통령[]
이승만과 함께 학살 전적이 있는 둘 뿐인 대통령
임기를 모두 끝마치고 만기 퇴임한 최초의 대통령[]
가장 높은 형량을 선고받은 대통령[]
박정희에 이어 2번째 경상도 출신 대통령
최초의 경남 지역 출신 대통령
최초의 정보기관장 출신 대통령(중앙정보부장)
전임 대통령에 이어 자와 호 두 가지를 다 가진 대통령
예복 차림으로 취임식을 거행한 마지막 대통령[]
최연소(57세)의 나이로 퇴임한 대통령이자, 유일하게 50대에 퇴임한 대통령
국내 최초, 유일무이한 대머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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