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정보 유머

원희룡 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2. 3. 4.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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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법조인 출신 정치인으로, 제16~18대 국회의원과 제37~38대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세계지방정부연합 아시아태평양지부(UCLG ASPAC)의 대표 회장을 지냈다.

제17대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 박근혜에 이어 3위를 하는 기록을 세우는 등 끊임없이 대권 잠룡으로 여겨져 왔다.

출생 학창 시절

1964년 2월 14일, 제주도 서귀포(당시 남제주군)에서 14대째 살고 있는 토박이 집안인 원응두의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학창시절은 제주도에서 지내왔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집안에 전기불이 안 들어왔다고 한다. 1년에 쌀밥이나 고기는 구경조차 못 해봤고, 찢어진 고무신을 신고 다녀야 할 만큼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이었다. 원희룡의 부친은 과자가게, 배추장사, 농약상, 신발가게, 책방 등 여러 사업을 전전했지만 잘 안 되어서 온 가족이 빚쟁이들한테 시달리기도 했고 같은 동네에서 이사만 10번 넘게 다녀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서점을 하다가 관둔 덕에, 집 한켠에 쌓인 재고서적을 원없이 많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은 술 취한 빚쟁이가 집에 들이 닥쳐서 마루에 칼을 꽂고 부모님을 독촉하고 협박하는 모습을 훔쳐 봐야 했다. 그때 가난이란 게 무엇인지 처음 실감하게 되었으며, 이를 극복해 보고자 공부를 시작하였다. 서귀포 중문초등학교, 중문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는 제주 시내로 진학하게 돼서 긴 거리를 통학해야 했다.

 

제주도 제주제일고등학교에서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더불어 전국적으로 치른 12차례의 시험에서 모두 수석을 차지하며 기대를 모으던 중 1982년도 제1회 대입 학력고사까지 수석을 차지한 것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더욱 대단한 것은 그가 살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동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낙후된 곳이었단 점이다. 대도시의 내로라하는 명문가의 학생들이 우수한 인프라 속에서 공부하는 상황에서 원희룡은 과외 한번 받아보지 않고 스스로 노력해서 우수한 결과를 얻었다. 전국 수석의 단골소감 유행어가 된 "학교 수업에 충실하고,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했습니다"라는 말을 최초로 발언한[] 원조 공부의 신이자 제주도가 낳은 천재라고 불린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으로 진학하면서 "장차 대한민국을 위해 막스 베버와 같은 법사회학자가 되고 싶다" 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력고사 전국 수석까지 가히 개천에서 용났다 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82년 대학진학 이후 신군부 독재의 폭압적 정치현실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깨닫게 되었다. 대학 1학년 때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이 중심이 된 지하서클 '사회복지연구회'에 가입해 체계적으로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사회의식에 더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다 서울대 구내에서 전경들의 여학생 추행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분노하여 항의시위에 참가하게 되었고, 호주머니에서 시위 관련 유인물이 발견되어 관악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며칠 구금되었다가 훈방 조치가 되긴 했지만 학교로부터 유기정학을 받게 된다. 당시 서울대 수석 입학생의 유기정학 조치는 대학가에서도 매우 충격적인 소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8년간 본격적인 운동권의 길을 가게 되는데, 1984년에는 대학 동기 4명과 함께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오거리에서 노학연대 데모를 위한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남부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구속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며, 당국의 주목 대상이 되어 몇 차례 경찰 수배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 무렵 야학과 노동운동에도 뛰어들었는데, 구로공단의 한 교회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했으며, 인천의 금속공장 등지에서 노동자로 위장취업을 하여 하루 일당 2,900원을 받으며 삶을 살아갔다. #

"주체사상이 아닌, 노동자들 입장에서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하며 살겠다"고 결심하고 야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지만, 1989년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을 보고 사상적으로 전환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 #

제적과 복학을 반복하며 졸업할 시기에 이르자 사회인으로 일해보기 위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법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1990년 말에 시작해 2년밖에 안 되는 준비기간 동안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패스했다.[] 그리고 사법연수원(24기)에서 최상위권인 5등의 성적으로 수료했다

 

군 복무는 면제를 받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잠시 논란이 되었으나, 자신의 발가락을 인증하며 해명했다. 5살 무렵 부모님이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실던 리어카에 올라 타다가 리어카 바퀴에 발가락이 끼어 들어가면서 오른발 2번째 발가락이 거의 절단되었다. 그리고 잘라진 발가락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괴이한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집안에서는 아들이 다치자 황급히 동네 시골의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게 했지만, 당시 제주도 중문 지역의 낙후된 의료시설로는 제대로 된 진료가 어려워서 결국 기형으로 남게 되었다.

과거 학생운동, 민주화운동 경력이 있었지만,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임관하여 재개발조합사기사건, 딱지어음사건, 다단계 피라미드 범죄 등 주로 경제사범 소탕에 열중하였으며 부산지검 강력부에 있을 때는 무술합계만 도합 40단이 넘는 검찰 수사관 18명을 데리고 지역 내 조직폭력 및 마약사범과 매일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사투를 벌여야 했다. 또한 아가동산 사건의 수사팀이기도 했다. 그러다 1998년 8월 검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그리고 1999년 당시 젊은 피 수혈에 열을 올리던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보수를 이루겠다"고 천명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보수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가게 되었다.

제주 출신 중에서 별다른 배경없이 오직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정계 핵심인물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제주도민들 사이에서 명망이 대단히 높다는 의견이 있다. (출처 등 내용 보완 바람) 제주도 토박이 중·장년층 기준으로는 사실이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대구, 경북을 제외한 다른 모든 지역에서 보수후보가 참패를 기록했는데 제주에서는 원희룡이 11.71% 격차로 승리하는 데 한 요인이 되었다. 실제로 제주도에서 1980~90년대 이전에 고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시피 했었을 만큼 유명했다. 이는 제주도가 좁고 인구가 적어서 전국 수석이 나올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희룡과 동갑내기였던 당시 제주시내 여고에는 원희룡의 이름이 원'일용'으로 잘못 소문나기도 했었다.

현재 제주도지사로서 지역 내 중국 자본에 대한 일부 언론의 악의적 왜곡과 과장보도로 수많은 대중들의 오해를 받고 있지만 사실관계를 바로 잡기 위한 별도의 대응은 하지 않고 있고, 묵묵히 제주도내 부동산 투기규제 강화 정책과 중국을 비롯한 외국자본 투자유치 제동에 전념하고 있다.[]

취임 직후 그동안 진행 중이던 대규모 투자개발을 대부분 중단하였고. 2018년 3월 현재까지 단 한 건의 신규 외국 자본 투자유치를 받지 않았음에도 사실관계를 착각하고 있는 일부 네티즌들로부터 고의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제주도 땅 다 팔아먹는다"는 식의 악성 허위사실 유포와 누명을 뒤집어 쓰고 있다. 반면, 중국 현지 언론으로부터는 "지사가 새로 바뀌니 볜롄(变脸/變臉, 변검)[]하느냐"며 "한국 행정에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을 받고 있다. 

한편 그가 추진 중인 서민 주택난 해소를 위한 공공임대주택 보급정책과 제주 신공항 건립사업은 입지선정과 관련하여 지역에서 찬반 논란이 뜨겁다. 지역 여론과 민심에 더 민감하게 대처하고 소통하는 자세가 더욱 필요할 듯하다.[]

이외에도 제주 대중교통체계 전면 개편 추진, 쓰레기처리 문제, 하수종말 처리장 시설개선 및 공급 확대 등 지역사회에 해결해야 할 현안이 많아서 "도정에 전념하겠다"는 이유로 2017년 1월 31일에는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도지사 취임 초인 2014년만 해도 국민권익위원회에서 발표한 공공기관 청렴도 평가에서 제주도는 전국 17개 시.도 중에 16위로 전국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 하에 정경유착을 근절하고 행정의 투명성 제고 및 부패유발유인 제거를 위한 제도개선을 과감하게 추진한 결과, 취임 1년차인 2015년 청렴도 지수가 14위로 상승하였고, 취임 2년차인 2016년 12위로 상승하였으며, 취임 3년차인 2017년에는 4위로 급상승하였다. #

또한 채무감축으로 인한 건전재정 구현을 위하여 2015년 1월 절감예산, 효과중심예산, 참여확대예산을 3대 예산개혁 기본원칙으로 천명하고 재정개혁을 지속해서 추진해온 결과, 4,000억원이 넘는 지방부채가 취임 1년차인 2015년 말 2,477억원으로 감소하였고, 취임 2년차인 2016년 말 1,321억원으로 감소하였으며, 취임 3년차인 2017년 12월 20일에는 남은 외부차입금 1,321억 원을 모두 상환함으로써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경남에 이어 채무감축률 순위 2위(45%)를 기록하며 ‘지방채무 제로’를 달성하였다. #

이런 개혁에 기반하여 지난 4년간 제주도의 경제성장률은 꾸준히 연 5% 이상을 유지하였고, 2016년부터는 경제성장률 7.3%대를 기록하며 2년 연속 전국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같은 해 지역내총생산(GRDP)은 16조 9,000억 원으로 전국 1%대로 진입하였다. #

위와 같은 지역경제 호황으로 제주도의 재정자립도는 2018년 기준 42.52%로 전년 대비 상승하였고, 재정자주도는 유사자치단체 평균(50.20%)를 크게 상회하는 74.85%를 기록하며 2022년에는 세입예산 7조 원을 돌파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세입예산 규모 역시 2018년 기준 5조 7,761억 원으로 전년 예산대비 6,719억 원이나 증가하였고, 이에 비례하여 도민의 사회복지를 위한 세출예산 또한 사상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 참고로 그 사이 인구는 8만 명(12%)이나 늘었고, 외국인 관광객은 2013년 233만 명에서 2016년 260만 명까지 늘었다.

정계 입문 국회의원까지

사법시험 합격 이후 검사 및 변호사로 지내오다가 한나라당의 당내 혁신 차원에서 이회창 총재의 이른바 '젊은 피 수혈'로 1999년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2000년에는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양천구 갑 지역구에 공천되어 새천년민주당 박범진 후보를 꺾고 당선에 성공, 젊은 피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개혁적이고 소신있는 언행들로 유명해졌는데, 미래연대[17]의 주축 멤버로서 보수 일색이던 당 내부에 이때부터 젊은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이후 남경필, 정병국과 함께 한나라당의 개혁을 주도하는 소장개혁파 운동을 이끌었고, 당 지도부와 부딪히면서 정치이력을 이어왔다

탄핵 역풍 이후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생존한 몇 안 되는 서울권 야당 의원이었을 정도로 당 지도부의 결정에 동요하지 않았고 잘못된 방식을 지속적으로 문제 삼았다. 이 과정에서 당 안팎의 거센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양천구 목동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역구 관리에 소홀히 하지 않고 민심을 살피며 기반을 다져나갔다.

2004년 17대 총선 직후에 치러진 한나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는 박근혜 대표에 이어 2위로 당 최연소 최고위원에 선출되며 당 지도부에 입성하였고,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에서는 이명박, 박근혜에 이어 3위를 차지하며 대통령 경선을 완주하게 된다. 이때 대통령 경선에서는 떨어졌지만 페이스메이커로서 보수층의 격려와 함께 40대 대권주자로서 신선한 입지를 구축하게 된다.

이후 양천구 갑에서 국회의원 내리 3선에 성공하게 되고, 2009년 한나라당 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당내 쇄신 바람을 주도하였다. 

2010년 3월에는 출향 28년, 정치인생 10년을 내걸고 "6.2 지방선거에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하였는데, "디자인에 올인하는 겉치레 행정이 아닌 일자리, 교육, 집 문제 해결에 주력하는 행정 하겠다"며 당내 경선 경쟁자였던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을 정면 비판하였고. 당시 지방선거 최대 이슈로 부각되던 '초.중교 무상급식'에 대해 야당의 전면 실시 주장과 비슷한 '친환경 의무급식'을 주장하여 오세훈 시장과 견해를 달리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세훈 후보에 맞서기 위한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경선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나경원 의원한테 근소한 차이로 패하며 인지도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후 2010년 7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한나라당 사무총장과 공천심사위원장, 최고위원을 두루 역임하며 대중적 정치 행보를 걸어왔다.

2011년에는 한국 정당정치의 비정상적 공천시스템 개혁과 선진 정치를 위한 선거구 개편 문제를 거론하며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였다. "친서민 정책의 확대"를 주장하면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는 등 나름 배수의 진을 치고 당 대표에 도전했지만 4위로 낙선하게 되어 이에 책임을 지고, 2012년 5월을 끝으로 여의도 중앙정치무대를 떠났다.

현실정치를 떠나 1년여간 정치적 휴식을 취하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독일 아데나워 재단, 중국 베이징대 등에서 방문학자(visiting scholar) 자격으로 수학하면서 국외 선진 정치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2013년 말에 국내로 돌아오게 된다.


2014년 2월에는 NH농협은행카드, KB국민카드, 롯데 카드 등 '금융 3사 고객정보 유출 사태'가 발생하자 사법연수원을 갓 수료한 젊고 유능한 변호사들과 함께 ‘개인정보유출 국민변호인단’을 꾸려 국내 피해자 5만여 명을 대리하여 무료 공익소송을 사회적으로 주도해 나갔다

제20 대선 출마

2021년 8월 9일, 아직 제주도지사인 상태로 제 1호 공약 교육 국가찬스 공약을 발표했다. AI 튜터를 두어서 기초학력을 진단하고 맞춤형 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평균 학습능력을 높이고 AI 교육 시장을 집중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또 만18세 청년들에게 2천만원 한도의 카드를 발급하여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8월 15일 조국 전 장관을 안중근에 빗댄 추미애 전 법무장관과 SNS상 설전을 했다. 

8월 16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청년 자영업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원희룡은 점포를 운영하면 고정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현 시점같은 때에는 적자가 커지게 되므로 정부 차원에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8월 17일 국가 주택찬스 공약을 발표했다. 건축물 재개발, 재건축 연한 30년을 폐지하고 재개발, 재건축을 쉽게 해서 주택 공급을 원활하게 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같은 날인 17일 부동산 공약 발표 후 기자들 앞에서 지난 12일에 이준석 당대표와 통화중 윤석열 후보는 곧 후보로서의 지속성이 정리될 것이다. 라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윤석열 캠프가 반발했고 18일 예정되었던 당내 예비후보 토론회가 취소되었다. 파문이 크게 일자, 이준석 대표는 당내 예비후보들 간의 갈등 양상이 정리될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라고 밝히고 8월 17일 오후 11시 20분에 통화 녹취록을 공개했다.

8월 18일 오전 9시에 원희룡이 이 통화 녹취록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서 원희룡은 "허락없이 대권후보와의 사적 통화를 녹취하고 공개한 도의적 책임은 여기서 따지지 않고 국민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다 , 진실을 밝히는 일과 당내 갈등을 증폭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대의 사이에서 많이 고민했다. 이준석이 여의도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윤석열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원희룡의 지지율이 오르고 있다며 축하한다고 덕담을 했다. 행간에 내가 윤석열이 후보로서 정리된다고 알아들은 분위기와 맥락이 있는데 이것은 이준석의 주장처럼 후보들 간의 갈등 양상이 정리된다는 맥락이 아니다. 공개를 하려면 8월 12일 오후 2시에 이루어졌던 18분 7초간의 통화 녹취록 전부를 오늘 오후 6시까지 공개하라"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준석은 이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18일 JTBC 썰전 라이브, KBS 더라이브 등에 출연해서 "통화 18분 중 15분정도는 당 운영에 대한 조언과 스몰토크였다. 이준석 대표는 윤석열 후보 측에서 자신을 공격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당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해서 이야기한 조언에는 반응하지 않고 갑자기 여의도연구원 조사를 끌어 얘기를 하다니 공정경선 원칙에 위배되는 것 아닌가 , 18분 7초 녹취록을 공개하면 의혹을 국민들이 직접 판단하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끝까지 갈 생각은 없다. 지금이라도 정신차려서 공정경선 이룩했으면 좋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8월 19일에는 만일 대통령에 당선되면 윤석열 총장을 법무부장관으로 기용하겠다고 밝혔다. # 전언도 아니고 야권의 압도적 1위 후보인 윤석열을 지칭하며 ' 나중에는 그가 무릎을 꿇고 협조를 해야 하는 위치로 올 것 '라고 발언하였다.

컷오프 전 윤석열, 홍준표, 유승민 까지 3명은 무난히 컷오프를 통과 할 것이라고 예상을 했다. 님은 건 결국 마지막 4위 자리. 4위 한자리를 두고 원희룡, 황교안, 최재형 후보가 경쟁하는 구도로 잡혔다.

컷오프 며칠 전 대장동 게이트와 관련하여 1타 강사처럼 쉽게 설명하는 것이 화제가 되면서 흐름을 탔다.

10월 8일 컷오프를 통과했다. 정식 순위가 발표된 것은 아니나 그동안의 여론조사로 미루어볼 때 그가 4위로 막차를 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어쨌든 컷오프 통과를 했으니 원희룡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경선 패배 이후

2021년 11월 05일 치러진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최종 득표율 4위로 낙선했다. 4위로 낙선하였으나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의 연대설까지 제기될만큼 끈끈한 사이를 보이며 당원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였고 인지도를 올렸다.

이후 살리는 선대위에서 정책총괄본부장이라는 차기 정권의 밑그림을 그리는 직책을 맡았기에 만약 윤석열 정부가 탄생한다면 국무총리나 주요부처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등 입각 내지 청와대 입성이 유력시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2022년 1월 3일, 점차 나락으로 치닫는 지지율로 인해 살리는 선대위 정책총괄본부장에서 강판당하였으나 2022년 1월 5일 후신 조직인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의 정책본부장에 다시 임명되었다.

2022년 3월 재보궐선거 종로구 국회의원 출마설이 돌고 있었지만 원희룡 본인은 정책본부장으로서 대선 후 입각을 염두에 두고 있는듯한 뉘앙스를 풍겼고, 이후 종로는 원희룡 못지 않게 이름이 오르내리던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전략공천 되었다. 결국, 윤석열이 당선된다면 윤석열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나 입각할 가능성이 높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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