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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가수)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3. 5. 1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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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록 가수이며 특유의 굵은 미성과 시원한 고음, 폭발적인 샤우팅, 압도적인 성량, 그리고 멋진 무대매너와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한 라이브로 유명하며 1990년대 말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극찬을 받았던 최정상의 가창력을 지닌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록 보컬리스트'이다. 또 록 가수로서는 정말 드물게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 1위 곡[]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히트곡들도 많은 대중가수이며,[] 현재까지도 인기가 많은 편이다. 김종서와 더불어 대한민국 록 역사의 산 증인이며 데뷔 30주년을 앞둔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록 음악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김경호는 파워풀한 보컬과 짜릿한 퍼포먼스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록 가수이다. 그는 1990년대에 명성을 얻었고 이후 한국 록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1971년 대한민국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김경호는 어린 나이에 음악에 대한 열정을 키웠습니다. 그는 10살 때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 첫 밴드를 결성했습니다. 졸업 후 그는 음악 경력을 쌓기 위해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김경호의 돌파구는 1995년 데뷔 앨범 '김경호 1'로 찾아왔다. 앨범에는 히트곡 "Forbidden Love"가 포함되어 차트 1위를 차지하고 수많은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앨범은 그의 파워풀한 보컬과 록과 한국 전통 음악을 혼합하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김경호는 수많은 앨범과 싱글을 발표하며 아티스트로서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한국 음악 산업에서 가장 큰 이름들과 협력했으며 그의 작업으로 수많은 상을 수상했습니다.


김경호는 자선활동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앨범 판매 수익금을 대한적십자사에 기부하고 자연재해 피해자를 위한 자선 콘서트를 주최하는 등 수년 동안 다양한 자선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김경호는 음악 활동 외에도 다양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과 팬들과 소통하는 능력으로 유명합니다.


김경호는 25년 넘게 업계에 몸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의 음악은 계속해서 관객들에게 영감을 주고 사로잡으며 한국 록씬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는 진정한 살아있는 전설이자 전 세계의 음악가 지망생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입니다.

김경호 데뷔전

어릴 때부터 아나운서였던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인해 이사를 많이 다녀서 학교 생활에 어려움이 있었고, 왜소한 몸집과 하얀 얼굴, 내성적인 성격 등으로 인해 학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해왔다고 한다. 학교폭력으로부터 지켜주던 친형을 존경해 오다가 축제에서 기타 치고 노래하던 형의 모습을 보고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된다. 락 외에도 이선희, 조용필, 해바라기의 곡도 좋아해서 여성 가수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 변성기가 거의 없었던 덕에 가능한 일.[] 락밴드가 한순간에 좌중을 휘어잡는 모습을 보고 락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89년 KBS 제2회 청소년 창작가요제에서 <꿈 그리고 사랑>으로 동상을 받았으며, 청소년 프로그램 <비바청춘>에서도 얼굴을 내밀었다. 1991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긴 이별>이라는 곡으로 동상을 차지했다. 그때만 해도 감성적인 발라드를 불렀기 때문에 머리를 흔들고 샤우팅을 구사하는 지금과는 매우 다르다. 후에 <긴 이별>은 1집 앨범에 편곡되어 실렸다.

의외지만 KBS 개그맨 공채 시험을 봤었다.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역시 수준급의 입담이 여기서 온 것이다.

김경호 활동

세션을 잘 해주지 않기로 유명한 이현석이 김경호만큼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할 정도로 전폭적으로 지원한 첫 시작 <마지막 기도>.[] 그 후 1994년 1집 <마지막 기도>로 정말 충격적인 데뷔를 했다. 이 앨범은 비록 본인에게는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망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상업적으로 실패한 앨범이지만, 무지막지한 고음과 파괴력 있는 목소리로 매니아들의 기억에 김경호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여러가지 악재가 겹쳐서 그의 1집은 처참히 망했지만 이는 대박을 향한 전조였다. 김경호는 2집을 준비하면서 머리를 기르고[] 의상과 액션을 다듬어 2년 뒤 2집을 발표했고 그렇게 나온 타이틀곡이 이경섭이 작곡하고 강은경이 작사한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아는 김경호의 이미지는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데뷔하고 처음 나온 KBS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이소라는 "우리나라에도 이제 저런 록 보컬이 TV에 나왔구나..." 하며 감탄했다고 한다. 비록 1집이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이승철이나 N.EX.T, 기타리스트 이현석 등의 콘서트 게스트 등으로 활동하며 조금씩 라이브 경험을 쌓아나갔다. 그리고 1997년 발매한 2집 타이틀곡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곡은 장르의 한계를 가지고도 88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는 2주간 1위를 차지했고 당시 락커들에게는 금기(?)의 구역이었던 <KBS 가요톱10>에서는 DJ DOC, H.O.T., 임창정과 함께 1위 후보까지 오르고 <SBS TV 가요 20>에서도 1위 후보에 오르는 등 선전하면서 히트를 쳤다. 특히 골든컵을 차지하게 되는 임창정의 <결혼해 줘>와 대결했을 때는 한 표(1892:1891) 차이의 접전을 펼쳤다


김경호의 첫 뮤직비디오이다. 이 뮤직비디오에서 그의 이미지는 록 그 자체였다. 장발과 마른 몸매의 록커가 홀로 나와 웃통을 벗고 열창하는 흑백 영상은 '록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듯하다


1997년 가을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윤도현 밴드의 콘서트에서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을 열창하는 김경호의 모습이다. 20여년 전에 그 당시에 저런 무대가 있었는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만들었다.

2집 발매 이후 출연하게 된 프로그램 KBS <이소라의 프로포즈> 신인 가수 소개 코너에서 타이틀곡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과 스키드로우의 <Youth Gone Wild>를 열창했는데 바로 다음날 아침부터 2집 앨범 선 주문만 50만 장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날 소속사에서 난리가 났다고 했다


김경호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게 바뀌어 있었어요' 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더불어 무명탈출과 지옥같은 스케줄이 시작되었다.

이후 후속곡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2집 수록곡 <금지된 사랑>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고[] 3집 <나의 사랑 천상(天上)에서도>(60만장), 4집 <비정>(30만장), 5집 <와인>(30만장) 등이 히트하면서 최정상급 록커이자 대중 가수로 거듭나게 된다.

김경호는 1997년 2집 앨범으로 유명인사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린 해부터 5집 활동기인 2000년까지 수많은 콘서트와 행사, 그리고 방송활동을 하며 90년대에 댄스음악과 힙합, 발라드에 묻혀 죽어가던 록씬을 다시 이끌어냈다는 평을 받음과 동시에 록 보컬리스트로서 자신이 가진 기량을 완전히 내뿜는 최전성기를 누린다.

그의 활약은 특히 자신의 단독 콘서트에서 폭발적인 무대 매너와 지치지 않는 고음으로 동시대 가장 많은 관객을 모았고 대학 축제, 그리고 자신의 데뷔 무대였던 MBC 대학가요제에서는 거의 매년 게스트로 나올 정도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당시 기사를 봐도 라이브 잘하는 가수 1위는 단연 김경호이다.[] 1999년 기사에서 2위로는 김현정과 박정현이 꼽혔다. 여담이지만 김경호와 박정현은 나가수에서도 1위를 가장 많이 기록한 가수들이기도 하다.

특히 1999년 3월에 일본의 유명 록 잡지인 'Burrn' 이라는 잡지에 김경호의 3집 앨범이 소개되었는데, 세계적인 록 밴드들도 85점을 넘기기 힘들다는 정도로 점수를 짜게주는 Burrn에서 김경호의 3집 앨범이 무려 91점을 받으며 수입음반부분 1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과 영국에서 꾸준히 러브콜을 받아왔다. 김경호의 소속사는 신중한 입장이라며 4집 활동 이후 해외 진출을 원했고, 실제로 99년 하반기에 일본과 영국에서 콘서트를 열려는 계획도 있었다.[]

그러나 4집 활동 전부터 있었던 소속사와의 불화로 인하여 소속사를 나와 개인 회사를 차리고 본인이 모든 것을 감독하며 발매한 6집 앨범이 대중적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2001년 당시, 공연 연습을 하던 도중 목이 너무 아파서 찾아간 병원에서 성대결절이라는, 가수로서 치명적인 진단을 받게 된다.[]

김경호는 1997년, 당시 소속사 측과 3년간의 전속 계약을 채결하였는데 이 시절에 비인간적인 스케줄로 인해 목을 많이 혹사하게 되었고, 2000년에 계약의 만료와 전 소속사와의 불화로 인해 새 소속사로 옮긴 5집 이후에도 한동안 이러한 상황이 지속됐으며 당시의 스케줄이 얼마나 빡빡했냐 하면 97년 이소라의 프로포즈 출연 전 유명인사가 되기 전부터 그는 대학로 소극장에서 라이브 활동을 뛰고 있었으며, 99년 4집 발매콘서트에서 그의 오피셜에 따르면 콘서트 횟수만 192회째를 맞는다고 직접 언급하였다. 방송출연과 비공식 행사무대까지 포함하면 그는 5년의 전성기 시절동안 총 1,000회가 넘는 라이브 활동을 뛰어왔다고 한다.

거기에 잦은 샤우팅 구사, 지나치게 높은 음역대로 구성된 앨범 수록곡들[39] 등의 부차적인 요소들이 맞물리면서 성대결절로 이어지게 되며 올드 팬들조차 4집에 비해 5집 활동시기는 컨디션 기복이 극심했다고 회고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자신이 회사를 직접차려 냈던 6집의 실패와 성대결절 이후, 그에게는 당연히도 휴식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악재가 겹쳤다. 당시 소속사 관계자들이 음악활동에 써야했던 자금을 사치와 유흥에 탕진하고 도망치는 바람에 그는 빚을 어마어마하게 져야했고 활동을 중단할 수가 없었다. 결국 다시 새로운 소속사와 만나 매니아들만의 음악이 아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락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걸그룹 핑클의 <Now>를 리메이크하여 2003년 7집 앨범을 발표한다.[]

데뷔 이래 고수해 오던 록커의 상징인 긴 머리를 자르고 음악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예능에도 출연하며 자신의 상황과도 타협하여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자 변화를 시도했지만 일부에선 변절자, 배신자, 자존심까지 버린 락커라는 비난을 했고 또한 2003년 7집 활동사이 두번째 성대결절[]과 가성구의 손상까지 겪음으로 인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자 결국 김경호는 평단에서의 외면과 앨범 실패 등으로 인해 퇴물이라는 혹평을 받으며 점점 잊혀져 갔다.

2004년에 데뷔 10주년 7.5집을 발매했으나 별다른 활동 없이 일을 중단하고 집에서 칩거 생활을 하다가, 2006년에 8집 앨범을 발매하고 공연과 콘서트 무대 활동을 시작하며 재기를 꿈꿨다. 그러나 여기서 김경호에게 또한번의 시련이 찾아오는데 뮤직 비디오 촬영 도중 쓰러지는 바람에 입원한 병원에서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증'이라는 희귀병 진단을 받게 되면서 앨범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2004~2008년 시기에는 <금지된 사랑>을 F키[]로 소화하거나 성대결절 후 부르지 못했던 넘버들도 다시 부르게 되어 목 상태가 꽤 호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8집, 9집 활동시기인 2006년~2008년 사이 감성가득한 발라드곡을 많이 부른 이때의 목소리를 사랑하는 팬들도 은근히 많다.

이 시기에 그가 그토록 원했던 해외 공연을 조금씩 시작했다. 유튜브에 2006~2008년 사이 일본에서 한 공연 영상들을 찾을 수 있다.[]
2008년 4월부터 다시 컨디션 기복이 심해졌고, 2009년 9.5집을 발표를 기점으로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본인의 보컬에 대해 고심하며 전성기때의 발성법과는 다르게 중고음 중심으로 초점을 바꿔 지금 현재에 우리에게 익숙한 목소리로 정립되어 간것으로 보인다. []

2009년~2010년대 초반엔 보통 남자들 정도의 음계로 노래를 불렀으나[] 이후 중고음대의 공격적인 창법을 이용하며 음역대를 회복해갔다. 2014년 6월 26일 엠넷의 <音담패설>에 출연하여 보여준 창법이 그 예다
2011년엔 그의 인생에 새로운 기운의 바람이 불었는데, 과거에 명성을 떨쳤던 그를 기억하는 팬들이 MBC 게시판에 청원하여 당시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음악 프로그램인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였고 맹활약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아 2012년 초 명예졸업에 성공, 2014년 8월부터는 KBS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참가 가수로서 간간히 출연 중이며 2015년도에 펼쳐진 MBC 나는 가수다 3 경연에도 참여했다.

나는 가수다의 인기에 힘입어 2012년초~중반에는 2000년이후 최고의 라이브를 보여주며 매우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모든 콘서트에서 3옥타브레를 진성으로 매우 깔끔하게 냈고 진성 애드립으로 3옥타브레#까지 보여줬었다.

2014년 말부터는 전성기 시절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샤우팅이 부활하여[] 2014년 돌발 콘서트 즈음, 방송으로는 KBS 불후의 명곡에서 <고추잠자리> 무대부터 샤우팅을 구사하여 무대를 펼치기 시작했다. 비록 전성기와 같은 초고음을 바라는 건 무리지만 전성기 시절의 진성+샤우팅 조합이 부활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불후의 명곡>에서 김경호가 출연한 방송회차를 살펴보면 샤우팅 음역대를 회복할 때 단기간에 이룬것이 아니라, 경연 무대를 준비할 때 마다 꾸준히 확보해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회복해나가다가 2016년에 들어 243회 경연곡 <초우>의 무대에서는 편곡에 매쉬업한 <영원의 성> 후반부의 샤우팅 최고음으로 '3옥타브 파♯(F♯)'를 구사하였다.

2015년 10월에는 중국에서 공연 활동을 갖기도 했으며, 이 시기 출연한 중국판 복면가왕인 몽면가왕에 출연한 이후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15년 말 락크리스마스 콘서트와 2016년 3월 19일 돌발콘에서의 모습을 보며 전성기가 다시 찾아온 것이라 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탈출>을 현 시점에서 지속적으로 셋리스트에 추가하며 특히 2016년 3월 돌발콘에서의 <탈출>은 전성기 못지않다는 평. [] 성대결절에 시달리는 이유로 인해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이러한 곡들을 셋리스트에 올릴 수 밖에 없게 되겠지만 과거보다는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게 되었다. 최근에는 현재 자신의 역량에 따라서 전성기 시절의 메탈곡 뿐만 아니라 가능한한 소화할 수 있는 록 발라드들 또한 부른다. []

2016년 복면가왕에 출연해서 마그마의 해야를 불렀고,샤우팅으로 3옥타브 미(E5)까지 냄으로써 건재함을 증명했다. []

2017년 5월 13일 드디어 10집 앨범 Part 2의 일부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관련기사 단, Part 2를 전부 발표하는 것은 아니고 일부를 episode 1로 묶어 같은 날 전국투어 서울 콘서트에서 선공개한 후 싱글로 두 곡을 발표한다고 한다. 추후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싱글을 발매한 뒤 합쳐서 10집 정규앨범으로 낼 계획이라고. 7집 이후의 앨범들이 소프트 록과 발라드에 중점을 둔 반면 10집 Part 2는 메탈 위주의 곡들로 이루어 진다고 한다.

2017년 6월 불후의명곡에서 '목포는 항구다'를 불렀는데, 여러번의 3옥타브 솔♯(G♯5)이라는 음을 냈다. 또한 동년 동월 공연들을 보면 샤우팅 뿐만 아니라 진성에서의 음역대에서도 과거 시절의 음색을 보여줄 수 있는 노래들을 셋리스트에 추가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나의 사랑 천상에서도'가 있다.

2018년 2월 불후의명곡에서 트로트 가수 김연자의 '아모르파티'를 불렀는데 모든 출연자들을 제치고 우승하는 클래스를 보여준다. 이때 곡의 편곡 스타일이 EDM트로트와 김경호식 헤비메탈의 융합이 절정에 이르러 관객들에게 많은 호응과 환호를 이끌어냈다.[] 이후 3월, 불후의 명곡 작곡가 이영훈편에 한번 더 출연하여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를 불러 자신의 클래스가 여전히 변치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최후반의 '와인' 변주음과 곁들여진 울부짖는 듯한 절규의 샤우팅은 듣는 사람에게 가히 소름이 돋게할 무대였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이 개최 되던 시기에는 경기장 내 초대가수로 가게 되어 올림픽 경기를 보러 온 관람객들에게 '사랑했지만', '밤이면 밤마다', 'Hey Hey Hey', '해야' 등을 선 보였고 계속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아가는 중이다.

2018년 3월 22일 프로젝트 형식의 그룹인 '포에버(FOURever)'의 멤버로 들어 가 첫번째 디지털 싱글 음원 'PROMISE'[]를 발표 할 계획이라고 한다.관련기사 그룹 구성원은 김경호 본인을 포함 해 김태원, 김종서, 박완규 이렇게 4명으로 구성 되어 있다.[]

최근의 활동으로 볼 때 음이 단계적으로 올라간다 가정할 경우 현재 실질 최고음은 최대 3옥타브 라#(A#5)으로 보인다.[]

2019년 6월 8일 서울콘에서 매우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었다. 특히 밤공이 호평이었는데 Higher To The Top의 후반 샤우팅 난사와 후반부의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예이다. 그 중 제일 압권인 건 금지된 사랑. 작년처럼 3절의 먼 훗날 우리 부분을 관중에게 넘기는 일은 아예 없었고, 플랫도 없었다.[] 다만, 2019년 서울콘의 컨디션이 크게 좋았을 뿐[], 확실히 진성 음역대는 3옥타브 도~3옥타브 도#이 마지노선으로 보이며 현재까지도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의 여파로 공연 활동은 거의 하지 못했으나, 경연 프로그램인 로또싱어에 출연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백두산의 '말할걸' 무대가 호평을 받았었다.

2021년 역시 코로나19이 장기화되어 별다른 활동이 없었으나, 박완규와 같이 유튜브 채널 '쉰호규전'을 개설하여 유튜브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2021년 말 시즌1이 종료되어 휴식기를 갖고 있다.

2022년 초중반에는 두차례의 단독 콘서트를 진행하였는데, 6월 서울 콘서트에서 김경호 스스로도 '코로나 탓에 잃은 것도 많지만 목소리를 얻을 수 있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2022년 9월 열린 전국투어 콘서트에서 2024년에 30주년 앨범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022년 10월 드라마 천원짜리 변호사 오프닝인 '천원짜리 변호사[]' OST 에 참여하였다. 음원은 10월 14일에 발매되었다.

2023년 3월 9일, 개인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채널명은 '습관처럼 김경호'로 팬들을 위해 소소하게 시작했다고 한다

 

김경호 가창력

타고났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음역대와 성량[]을 바탕으로 폭발적인 샤우팅과 단단한 중저음역까지 보여 주는 국내 가요계의 레전드로 손 꼽힌다. 다소 흉성의 비율을 높인 중성에 기반한 발성법이 두터운 미성에 결합되어 만들어진 음색에 강한 비브라토와 스크래치 같은 기교적 요소가 합쳐져 8비트 기반의 록발라드에도 강점을 보인다. 다만 착각하지 말아야 할 점은, 김경호는 록에 더더욱 부합하는 보컬이라는 점이다. 최근에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감정이 점점 더 깊어지고 저음도 더욱 잘 낼 수 있게 되었다.

많은 고음역대 가수들의 큰 단점으로 고음에서 감정이 없어 소리만 빽빽 지르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고, 이것 때문에 고음 가수들은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하지만 김경호는 파워풀하고 단단한 보컬임에도 불구하고 엄청 섬세하게 곡을 표현하며, 이는 저음부 뿐 아니라 초고음에서도 마찬가지라서 감성적인 발라드에도 강점을 보인다. 성대결절 이후 중고음역대 발라드를 부르기 시작한 이후엔 더욱 감성적인 발라드를 불렀다.

무엇보다도 김경호의 가창력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바로 샤우팅이다. 이 메탈릭한 샤우팅은 세계에서도 손꼽힐 만하다.[] 무대를 빈틈 없이 꽉 채우는 강렬한 사운드와 무시무시한 음역, 이제는 전설이 되어 버린 김경호의 스크래치 창법이 결합된 샤우팅은 그의 음악적 감각에 의해 적재적소에 활용되어 뛰어난 평가를 받는다. 당시의 김경호를 보지 못해 이 샤우팅의 비중이 잘 실감되지 않는 10 ~ 20대 사용자들은 전성기 시절 나얼의 애드립 능력이 그의 보컬에서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또한 전성기, 성대결절의 고난을 지나 현재진행형으로 흉성에서 끌어올리는, 날카롭기보다 묵직하다라는 표현에 더 걸맞는 샤우팅을 구사하고 있다. 이는 16년 03월 19일 돌발콘에서 정점을 찍는다. 또한 발성적인 면에서, 전성기 때 샤우팅보다 덜 무리가 간다고 확신할 수는 없으나, 샤우팅이라는 창법 자체가 무리가 갈 수밖에 없으므로 샤우팅이 많이 가성틱해져도 이만큼 회복한 것도 경이로울 따름이다.

2021년 현재, 진정한 제2의 전성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폼이 올라온 상태다. 2021년 3월 KBS에서 진행한 가수대행진 무대에서 부른 '금지된 사랑'을 보면 목소리 톤이나 호흡이 최근 몇 년 동안 이렇게 좋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 심지어 후반부의 3옥타브 도#(C#5)을 진성으로 깔끔하게 냈다. 팬들 사이에선 코로나로 인해 무대에 설 일이 줄어들게 되자 본의 아니게 목을 쉬게 해주어서 많이 회복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는 중이다.

전성기 당시의 성종은 하이 테너였고, 현재의 성종은 미들 ~ 로우 테너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김경호 보컬

스스로 변성기를 겪지 않고 음색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에서 일단 타고난 하이테너라는 건 따질 것도 없는 사실이고, 여기에 중음에서 초고음까지 배음이 일정하게 유지되면서 강한 악센트를 계속 걸어주는 게 가능할 정도로 성대의 탄력이 매우 탄탄하다. 여기에 마이클 베세라, 마이클 스위트, 세바스찬 바흐 등의 네오클래시컬/팝 메탈 보컬의 특징을 카피하면서 자기만의 발성을 단련한 경우인데, 참고로 저 세 보컬 역시 겁나 타고난 하이톤의 소유자라는 점이 특징이다. 김경호 스스로는 80년대 헤비메탈 보컬리스트, 가령 롭 핼포드, 로니 제임스 디오 그리고, 프레디 머큐리를 동경했다고 하지만 사실 라이브 레퍼토리로 트리뷰트하는 성격이 강했지 실제로 보컬링에 큰 영향을 준 경우는 아니다. []

임재범과 이승철이 '딥 퍼플'의 보컬이었던 데이비드 커버데일, 김종서가 '레드 제플린'의 보컬 로버트 플랜트의 커버로 보컬을 연마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국내 락 보컬들의 상당수가 자신들이 동경했던 유명 해외 보컬들의 모창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김경호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여러 해외 보컬들을 커버했고, 그 중 마이클 스위트의 커버가 유명하다. 김경호 특유의 발음 엑센트가 마이클 스위트의 발음과 거의 닮았던 적도 있었다


이와 같이 김경호는 마이클 스위트의 보컬을 가장 많이 커버했으며, 오디션을 볼 때 '스트라이퍼'의 발라드 명곡 'Honestly'를 주로 불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오디션에서 자주 떨어지는 고배를 마시기도 했는데, 기획사에서는 댄스 음악을 권하고 김경호는 록 음악을 지향하는 등의 괴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한편, 오디션을 보러 다니면서도 구로공단의 작은 월세방에서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며 꾸준히 연습해 창법을 연마해 나갔고, 그 창법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샤우팅 창법이다.

뿐만 아니라, 김경호는 80년대의 보컬들 중 무대 액션이 컸던 '퀸'의 프레디 머큐리[], '스키드로우'의 세바스찬 바흐, '미스터 빅'의 에릭 마틴 등의 무대매너를 참고하면서 자신만의 독보적인 컨셉과 스타일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올드하면서도 마초적인 느낌이 강했던 80년대 헤비메탈 록 보컬들의 이미지와 강력한 4옥타브를 넘나드는 샤우팅 창법을 마스터하고 좀 더 극적인 무대 연출까지 더해져 나온 괴물이 바로 '김경호'였다.

김경호 창법


전성기 시절에는 두성을 주로 사용하고 흉성을 당기는 묵직한 고음과 특유의 폭넓은 비브라토를 선보였고, 어느 정도 방향성이 잡혔던 3집 이후부터는 노래에 스크래치를 섞어가기 시작했다. 진성으로 3옥타브 파(F5)정도까지 구사 가능했고# 그 이후 초고음역에는 샤우트 창법을 택했다. 또한 샤우팅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만큼, 메탈릭한 노래의 경우 곡 중간중간에 샤우팅을 넣어 흥을 돋구는 보컬 운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점점 사용 빈도가 많아져가는 샤우팅 구사와 지나치게 높은 음역대의 곡 구성, 거기다 혹사에 가까운 공연 일정으로 인해 결국 2000년 8월에 목상태가 굉장히 안좋았다가 2001년 초반 어느정도 안정되었으나, 6집 활동으로 컴백하면서, 기존과는 달리 목을 조이고 얇은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7집 앨범 녹음중에 공식적으로 성대결절 판정을 받는다.[] 김경호는 당시 소속사의 이사 2명이 빚을 내서 그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계속 무리하다가 7집 활동 때 성대결절 판정을 받고 가성까지[] 상해서 2004년, 결국 샤우팅을 잃어버렸다.[] 결국 'Shout', '탈출', 'Rock N' Roll' 등의 초고음 곡은 셋리스트에서 빠지게 된다.

그 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샤우팅을 배제하고[] 중저음의 미드 템포 발라드를 부르면서 최악이었던 목 상태를 어느 정도 회복시켰다. 인터뷰에서 가온다를 기준으로 3옥타브 미(E5)까지는 가능하게 됐다고 밝혔다.[] 나아가 꾸준한 연습을 통해 극복하고 진성을 위주로 한 힘 있는 보컬이 가능하게 되었고, 2011년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면서 오랜만에 TV에 얼굴을 비추고 나는 가수다에서 최다 1위라는 기록을 세우며 가수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 후로도 연습과 관리를 꾸준히 해 나가면서 컨디션을 서서히 끌어올려 2014년 하반기부터 샤우팅이 부활했으며, 기량 면에서도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젊은 시절보다 샤우팅의 파워가 다소 약하단 의견도 있으나[] 이 샤우팅의 유무는 김경호가 무대를 꾸미는 데 있어 굉장히 큰데, 전성기 시절의 김경호가 빠른 메탈 곡을 소화할 땐 간주 중간마다 3옥타브 솔(G5)~라(A5) 정도의 샤우팅을 냄으로써 흥을 돋우고 무대의 사운드를 채웠다.[] 그러나 샤우팅을 잃은 후, 김경호는 샤우팅을 했던 부분에 ‘어이!’나 2옥타브 라(A4)~시(B4) 정도 되는 ‘워~이예’ 등의 중음역대 애드립을 사용해 관객 호응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창법 운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성대결절을 겪고도 어느 정도의 음역대를 수복한 김경호는 '나는 가수다' 무대에서 1위를 4번이나 차지하는 등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지만, 예전의 엄청났던 메탈 무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아쉬움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 시점부터는 되살아난 샤우팅을 통해 메탈 무대를 다시금 화려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샤우팅이 들어가지 않은 140823 ‘첫차’ 무대와 샤우팅이 들어간 151003 ‘첫차’ 무대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샤우팅 부활의 위력은 '불후의 명곡' 247회에서 '돌팔매'가 첫대결 최고점에 올킬을 기록하면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2016년 9월 말 대전콘서트에서 부른 'Exodus'는 키조정을 거쳤지만 3옥타브 솔(G5)을 샤우팅으로 선보였다. 불후의 명곡 273회 아리랑 특집에서는 '아리랑 목동' 무대에서 3옥타브 파(F5)를 샤우팅으로 선보였다! 그리고 불후의 명곡 6월 3일 방송에서 이를 뛰어넘는 3옥타브 솔♯(G♯5)을 샤우팅으로 선보였다! 결절로 인해 상당 부분 잃어버렸던 목소리를 다시 찾고 있다는 증거로서 팬들에게는 반가운 무대일 듯. 그리고 무턱대고 불렀다가는 성대결절 피하기 어렵다던 그 샤우트를 1키 낮춰서 5월 13일 서울 낮콘에서 불렀었다!!! 게다가 그 후에 돌발콘, 부산콘에서도 불렀는데, 점점 육성도 뚫릴 뿐만 아니라 샤우팅도 발전하고 있다. 부산콘에서 부른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에서 3절 하이라이트 구간 3옥타브 레(D5)을 깔끔하게 진성으로 처리했다. 이걸로 볼 때 순간적으로 뽑을 수 있는 진성 한계가 3옥타브 레(D5)까지 가능한 듯. 그러나 2018년도에는 진성이 많이 낮아져 플랫이 지나치게 많아지고 한계 진성음 역시 3옥타브 도♯(C♯5)으로 많이 낮아졌고, 그마저도 잘 나오지 않는다. 무리한 일정과 잦은음주가 원인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확실한 것은 목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이다. 목상태의 회복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만 샤우팅 음역은 2018년에 3옥타브 라(A5)을 기록한 후 여전한 듯 하나 진성을 배제하고 샤우팅 처리를 하는 것은 노래의 완성도도 떨어뜨리고 목건강에도 좋은 것은 아니다. []

정리해 보면, 과거의 샤우팅이 어마어마한 음역대와 성량을 기반으로 진공을 가르는 느낌을 준다면, 현재는 깊이 있는 목소리를 바탕으로 포효하는 느낌의 샤우팅으로 변했다고도 볼 수 있다. Youth gone wild 도입부를 과거와 현재 순으로 편집해 놓은 유튜브 영상 댓글 중에 리즈는 전투기 같고 현재는 전차같다는 비유가 딱 들어맞는다

2018년도에는 샤우팅이 14~15년도에 비하면 매우 좋아졌다. 실제로 15년 초 김경호 본인도 샤우팅은 힘들면 못 한다고 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고 연달아 샤우팅을 한 뒤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정도로 실제로도 많이 힘겨워 하였으나 지금의 김경호는 탄탄한 샤우팅을 연달아 구사 할 수 있을 정도로 가성대를 회복 했다. 반면 진성은 2014년부터 서서히 호흡이 짧아지고 3옥타브 도#(C#5)이상의 음을 내기 힘들어 하기 시작 했다. 17년 이후에는 3옥타브 도♯(C♯5)~레(D5)음을 진성으로 낼 경우 플랫되는 경우가 많아 아예 샤우팅으로 처리 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금지된 사랑과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17년 이후로 모든 음정을 제대로 소화 한 라이브는 매우 드물다. 3옥타브 도♯(C♯5)까지의 진성음이 단단해졌다는 의견이 있는데, 순간적으로 그 음역대를 찍고 내려 오는 아스파라거스, 나사천 등에서의 모습으로 볼 때의 이야기다. 반면 2옥타브 라(A4)이상의 고음이 많이 지속되는 곡에서는 과거 날카로움을 과시하던 2013년대까지와는 상대적으로 많은 플랫이 일어난다. 진성 최고음(~D5) 사랑했지만 등 2옥타브 후반 대의 음역대, 샤우팅에서는 오히려 소리가 더 탄탄해졌으나 샤우팅 음역과 달리 진성음역대가 떨어져 간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호흡도 짧아져 가사를 끊어 부르는 빈도가 증가하고 있다. 짧아진 호흡이 나슬사의 최고음 브릿지 부분의 고음 연타 부분을 더 소화 하기 어렵게 된 이유로 보인다.[]

18년에는 그의 목 상태는 샤우팅을 제외하면 2003년~2004년 이후로 가장 좋지 않다.[] 15년부터 휴식기를 거친 뒤인 연초에는 컨디션이 괜찮다가 그 해의 2~3번째 콘서트에서부터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을 반복하더니 18년에는 아예 3옥타브 도♯(C♯5)조차 보기 힘들게 됐다. 2옥타브 후반도 플랫이 많이 일어 나는 수준으로 냉정히 말 하면 특유의 음색, 비브라토, 스크래치 등의 기술은 전성기 버금갈 정도로 좋아졌지만, 가창 자체는 2번째 성대결절이 일어난 시기 이후로 최악의 컨디션을 보여 주고 있다. 고음 내기가 힘 들어지니 고음을 상대적으로 더 내기 쉬운 발음으로 내려고 하는데, 이 때문에 가사 전달력이 떨어지고 발음이 뭉개져 아쉬운 모습을 보인다. 일부 사람들은 일반인 수준[] 아니냐는 이야기도 할 정도였으며 성대결절을 2번이나 심하게 겪은 40대 후반의 가수라는 점이 확실한 원인이긴 하지만 그것이 프로가수가 음정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 할 정도로 노래를 들려 주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되진 않는다. 그의 노래의 키를 더 내리면 음정을 상대적으로 정확히 맞출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이미 현재의 키도 원곡보다 2~3키 낮은 것이다. 노래 자체가 원곡과 너무 동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8년 말부터 서서히 목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 나슬사 같은 경우엔 여전히 발음이 뭉개지고 플랫도 자주 일어나지만, 금지된 사랑 같은 경우 "은퇴는 없다" 라고 멘트를 한 후 부터 먼 훗날 우리 구간에서 3옥타브 도#(C#5)을 다시 깔끔히 소화하고 있다. 2019년이 되어서도 역시, 더 히트에서 노라조의 슈퍼맨과 콜라보를 펼친 Shout나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와 콜라보를 펼친 금지된 사랑을 불렀을 때를 보면 목상태는 다시 회복을 해 가는 것 같다. 그런데, 목이 회복하는 이 와중에, 이번엔 허리가 발목을 잡았다. 허리 회복을 위해 독한 주사를 맞고 있고, 이로 인해 호흡이 짧아졌다고 19년 3월 9일 돌발콘에서 밝혔다. 실제로 한 달 후, 4월 11일 임시정부 100주년 행사에서 컨디션이 많이 다운된 모습을 보여 팬들뿐만 아니라, 당시 공연을 보러 온 관중들까지 상당히 힘들어하는 그의 모습에 많이 걱정하였고 우려하였다.[] 그 이후 디스크 수술을 했다고 한다.

2019년에 들어서는 2018년보다 훨씬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고, 특히 6월 8일 서울콘에서는 다시 미친 모습을 선보였다. 흉성에서 끌어올리는 묵직한 창법과 폭 깊은 바이브레이션을 다소 자제하는 듯한 모습이었고, 플랫도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오히려 3옥타브 레(D5)를 다시 낼 기세였던 밤공에서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으로, 작년의 안 좋았던 목 상태를 아예 기억조차 안 나게 할 정도였다... 나슬사 3절 브릿지 구간은 아직도 인골라가 일어났고 플랫도 났으나, 확실히 작년보다 훨씬 나았다. 2017년 당시의 나슬사를 듣는 느낌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나슬사 한정일뿐이지 다른 곡들은 2016년 3월 돌발콘보다도 좋은 모습을 보였으며, 나가수 이후 최고의 컨디션인 2013년과 견줘도 손색없을 수준을 자랑했다.[] 샤우팅도 또 다시 발전했는데 [] 마치 14~15년도 묵직함 + 16~18년도의 단단함과 날카로움 = 2019년 묵직함과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느낌의 샤우팅이 만들어졌다.[] 하여튼 여러모로 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상태다.

2019년 6월 이후로 김경호는 지금까지는 별 기복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17년 말 ~ 18년 중반 때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창법을 운운하기 어려워진 것이 진성 음역대가 더 올라가는 건 바라기 힘들고 이제는 컨디션과 체력관리가 중요시되어야 할 것 같다. 2020년도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휴식 기간이 길어진 탓인지 하반기의 두 차례 콘서트 및 로또싱어에서 모두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었다.

2020년 하반기 이후 나가수 시절부터 보여줬던 스크래치를 절제하고 최대한 깔끔하게 부르는 걸 지향하는 것으로 바뀐 듯. 불가피하게 바꿨던 창법을 다시 복구하려는 듯하다. 2021년 12월 25일 락 크리스마스 공연을 보면 알 수 있으며 락을 부를땐 파워풀 하다.

2022년 6월 서울콘서트에서 '슬픈 영혼의 아리아'를 최대한 정박에 가깝게 부르는 모습을 보여줄 정도로 회복된것으로 보이나, 2022년 9월 청주콘서트에서 다시 셋리스트에 올라온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3키로, '비정'이 -4키로 조정된 것으로 보아 진성으로 내는 음역대가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김경호는 10년을 주기로 목소리가 바뀐다고 했었고 실제로 그래왔다. 이번에 키 조정을 함에따라 그 주기가 된것으로 보인다.

김경호 인지도

대중들은 김경호를 대한민국 최고의 록 보컬리스트로 꼽는데 이견을 가지지 않는다. 보수적이고, 매우 까다롭기로 유명한 록씬에서도 '김경호 같은 보컬이 한 명만 더 나와줬으면.' 이라 생각할 정도이며 김경호는 록발라드로 인기몰이를 했지만 정작 자신의 공연에서는 록발라드보다 강렬한 하드록, 메탈 넘버들을 더 많이 불렀다.

여담으로 자신이 직접 곡을 쓰지 않는다고 까는 안티들도 가끔 있는데 김경호의 자작곡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데뷔도 자작곡으로 했으며 음반 프로듀싱에도 참여했다. 애초에 김경호는 록 보컬리스트를 지향한 것이지 작사, 작곡, 노래를 전부 하는 싱어송라이터를 지향하지 않았다.

김경호의 엄청난 고음은 중고딩들이 고음병과 발성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 원인이 되었고, 쓰잘데기 없는 발성 지식과 고음 내는 방법 등 속칭 입발성을 널리 퍼뜨리는 데 본의 아니게 일조했다.[]

예전만큼 많지는 않지만, 아직도 포스트 김경호를 꿈꾸는 꼬마들이 있는데 MBC 위대한 탄생에서 백청강이 김경호 노래로 오디션을 본 적이 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김태원은 "김경호는 한 사람이다. 그를 아무리 똑같이 따라 해본들 김경호에게는 이길 수 없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처럼 김경호의 노래 스타일이나 발성은 굉장히 유니크한 것으로 그렇게 노래를 잘하기는 굉장히 힘들다. 발성적 지식을 모르고 함부로 따라 하다간 나쁜 버릇이 들기 딱 좋다. # 복면가왕에서 조장혁도 김경호의 창법을 두고 깊은 내공이 있지 않으면 발성하기 쉽지 않은 창법이라 평가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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