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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3. 10. 2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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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일생

박정희 정부 당시 전두환과 함께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시해되고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자리에 오르자 전두환을 따라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였으며 정국을 장악한 전두환이 집권한 뒤에는 정치인으로 전향했다.

6월 항쟁 직후 6.29 선언을 발표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고, 신헌법에 따라 국민 직선제로 치러진 최초의 대선인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여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당선되어 1988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6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대통령에 취임하자 5공 청산론을 받아들여 군부 출신 인사들을 대거 정리하였고, 정치 활동이 금지된 재야인사들을 대거 복권시키고 언론의 자유를 확대하며 중도통합에 나섰다. 세계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발맞추어 북방정책을 펼치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여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하였다. 또한 북한과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등 제6공화국 모든 정부에서 추진할 대북정책의 기초를 수립하였고 19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대통령 각하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지 않은 대통령이며[19] 대통령이 국민 앞에 설 경우 처음으로 스스로를 '나'가 아닌 '저'로 표현하는 등 권위주의 시대의 끝을 알리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대통령 퇴임 후 12.12 군사반란 및 5.17 내란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1995년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구속 기소되어 1997년 4월 17일 반란모의참여죄 등으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아 확정되었다.[] 이에 헌정사상 첫 번째로 구속된 대통령이 되었으나 1997년 12월 22일에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다.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건강 악화로 인해 연희동 자택과 병원을 오가며 칩거생활을 했다. 희소병인 소뇌위축증을 앓고 있었으며 기본적인 거동조차 하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지팡이를 쥐고 움직이는 불편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2007년 6월 6·29 선언 20주년 만찬장 참석을 마지막으로 공식석상과 매스컴에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2021년 숙환으로 인하여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2021년 10월 26일, 향년 88세로 병상에서 사망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시작을 주름잡은 1노 3김시대는 완전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노태우 회의를 자주 하는 대통령

노태우 정부 시기에 회의를 굉장히 자주 했다고 한다.[] 제5공화국 군정의 이미지를 벗고 문민 이미지를 심기 위해서 회의를 강화했으며, 덩달아서 정부 부처에서도 회의를 자주 했다고 한다. 노태우는 취임하고 얼마 뒤, 식사 자리에서 “나는 이름부터 '큰(泰) 바보(愚)'니 당신들이 많은 의견을 내 달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보좌진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기 위해서 회의를 자주 했다고 한다.

약간 유사할 수도 있는 증언으로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지낸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두 가지 의견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사안이 있으면 참모들끼리 회의를 해서 결정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 적지 않은 사안들을 참모나 장관들에게 위임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삼 전 민주자유당 대표와는 최소 일주일에 한 번씩 청와대에서 회동을 가졌다고 한다. 당 대표와 매주 만나서 국정현안에 논의하고 대화를 했다.

6공의 특징 중 하나인 국민과의 대화 역시 그의 작품이다. 이후 하는 대통령도 있고 안 하는 대통령도 있었지만 대부분 6공 대통령들은 국민과의 대화를 진행하여 소통 능력을 평가받았다.

노태우 슬로건

대통령 선거에 쓰였던 슬로건인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말이 유명하다. 박정희, 전두환처럼 완전 독재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노태우 역시 군부 이미지가 강했고 실제로 그렇게 될 뻔하기도 했다. 대선 당시에도 민주화 열기 때문에 김영삼, 김대중에게 많은 부분에서 뒤쳐지고 있었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이 둘이 서로 욕심이나 부려서 먼저 대통령 하겠다고 단일화 안 하고 뻗대고 있던 것과 대선 포스터에 걸렸던 이 문구 하나가 대선판을 바꿔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노태우에게는 어찌 보면 고마운 수식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노태우 선거 캠프에서는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을 접하고 "아니, '보통 사람'이 무슨 대통령을 해? 이미지가 너무 약한 것 아니냐?"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노태우 본인은 "일반 국민들에게 친근하고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문구"라며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라는 슬로건이 특히 친근감 있게 다가간데는 해당 항목 5번에 나와있는 1980년대 초반 최고 인기 드라마 "보통 사람들"의 영향력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드라마는 1982-1984년까지 무려 491화가 방영된 역대 최장기 일일극으로 황정순, 이순재, 김민자, 강석우, 유지인, 이영하, 금보라, 송재호, 한혜숙, 정한용, 한진희, 조용원, 태현실 등 초호화 출연진으로 국민적 인기를 누렸다. 노태우의 선거 전략가들은 1980년대 경제 발전상과 중산층 확대된 모습을 따뜻하게 그려낸 이 드라마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의미를 놓지지 않았고, 큰 성공을 거뒀다.

그래서 대선 이후에도 취임식이나 각종 연설이 있을 때마다 상당히 많이 썼으며, 노태우 집권 당시 대한뉴스에서 가끔씩 선행을 베푸는 일반인들을 취재해 '위대한 보통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쓰면서 보도한 적도 있다. 노태우 선거 운동 조직인 '보통 사람들의 모임'에는 드라마의 히로인 황정순이 참여했다. 그녀는 드라마 팔도강산-보통사람들로 이어지는 한국 경제 성장의 상징이자 힘든 시절을 인내한 현모양처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군사정권의 부정적 유산을 누그러뜨리고 긍정적 유산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88 서울 올림픽 성화에 불을 붙인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이 손기정을 예상했으나 이를 깨고 보통 사람 셋이 점화를 했을 정도로 해당 수식어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 때문에 개그맨들이 노태우 성대모사를 할 때마다 이 말을 상당히 많이 사용했으며 본인도 "앞으로는 나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아도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책적으로도 5공과의 고리를 끊고 상술된 문단에서처럼 회의를 장려한다든지 본인도 김영삼, 김종필 등 야당 인사들과 잦은 회동을 가지면서 이전에 있던 군사 정권, 권위주의 이미지를 타파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기에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은 노태우와 노태우 정부를 상징하는 단어로 남게 되었다.

상기한 바와 같이 대통령 자신을 코미디 소재로 써도 된다고 공언했던 것처럼, 그의 슬로건이었던 '보통 사람들'은 당시 풍자 만화가 주완수의 '보통 고릴라'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주로 1980년대 말 사회의 일그러진 모순을 고릴라의 모습으로 풍자한 책이었으며, 대표적으로 중간에 다음과 같은 노래 개사가 실려 있다.

노태우 민주운동에 대한 망언

이날 노태우는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경북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예전 중국에서 문혁 때 수천만 명이 희생 당하고 엄청난 걸로 말하자면 우리 광주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망언을 했고, 해당 망언이 동아일보사 시사주간지 <NEWS+(현 주간동아)> 10월 18일자에 보도되면서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MBC, KBS) 이로 인하여 노태우는 국민들의 지탄을 받게 되었고 그 당시에 비자금 사건도 터지면서 전두환과 더불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 직후 국민들의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노태우는 "처음에는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나지않았으나 나중에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니 그런 얘기를 했더라면서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는 궤변으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처지가 못된다"며 답변을 유보했다.[] 당시 노태우의 망언에 정치권까지 듫끓게 되었고 집권당인 민자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망언에 대해 해명을 촉구하는 형식으로 수습하자고 대응했으나 국민들의 공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노태우는 10월 13일, "자신의 발언으로 5.18 피해자 유족에게 상처를 준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자신의 광주 망언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노태우 애증의관계

서술한 대로 전두환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사이였다. 군인 시절부터 줄곧 인생의 파트너[] 이기도 했지만 대통령 재임 중 '5공 숙청'으로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내는 애증의 관계이기도 했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본인이 직접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이 된 후 말을 듣지 않아 상당히 괘씸했다고 한다. 반면 노태우는 스스로 직선제를 통해서 대통령이 되었다고 생각하였고[] '체육관 대통령'인 전두환과 쌍으로 엮이는 것에 상당히 불쾌해 했다고 한다. 전두환은 자기도 같이 했으면서 이렇게 배신을 때리냐며 대통령이라도 귀 싸대기 맞는다며 분노했고[] 노태우는 전두환이 퇴임했으면서도 자신을 조종하려 드는 것에 반발했다. 전두환은 퇴임 직전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정치 기구를 만들고 퇴임 이후 본인이 의장을 맡으려고 했다. 장관급 예우를 받으며 국가 정책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노태우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노태우에게 닥치는 정치적 위기 대다수가 5공과의 연결 고리에서부터 오는 거라 전두환을 그냥 둘 수가 없었고, 결국 둘 사이의 골은 깊어졌다. 전두환 퇴임 이후 노태우가 집권하면서 전두환이 백담사로 유폐되고 노태우가 전두환을 멀리하면서 노태우의 집권 기간에 둘은 전혀 만나지 않았다.

YS가 집권하면서 5공 청산이라는 전 국민적 요구 속에서 역사 바로세우기 정책을 밀어붙이며 둘다 위기감이라는 공통 분모하에 1994년 전두환 퇴임 이후 6년 만에 처음으로 강남 음식점에서 화해의 만찬을 가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 다 구속되어 재판정에 서면서 재회하게 되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지척을 두고서도 통 가까이하지 않았다. 사적으로는 1999년 노태우의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1907~1999) 여사가 사망했을 때 전두환이 조문해 20여 분간 독대한 것, 공적으로는 2004년 1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전직 대통령들이 오찬을 가질 때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다가 2014년 8월 13일 전두환이 노태우의 자택을 방문했다. 당시 노태우는 뇌 질환으로 휠체어로 거동하고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상당히 나빠져 자택에 갇히다시피 지내면서 치료를 받아왔다고 한다. 전두환은 누워있는 노태우에게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겠는가"라고 물었고, 옆에 있던 부인 김옥숙이 "알아보면 눈을 깜박이라"고 말하자 노 전 대통령이 눈을 깜박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 출범 이후 근 30년여간 애증이 겹쳤던 묵은 정을 마지막이 되기 전에 미련 없이 풀어내려 했던 듯하다.

그리고 2021년 10월 26일, 자신보다 1살 연상인 전두환보다 먼저 사망했다. 전두환은 노태우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아무 말 없이 눈물만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정확히 4주 뒤인 11월 23일 전두환도 친구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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