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아르헨티나의 배우.
대표작인 <로미오와 줄리엣>에 출연하여 1969년 골든 글로브 신인상과 다비드 디 도나텔로 황금접시상을 수상했다.
1951년 4월 17일 스페인계 아르헨티나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명은 올리비아 오수나(Olivia Osuna). 그러나 2살 때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와 살다가 영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964년 TV 영화 <더 크런치>로 배우로 데뷔했다.
그리고 1968년 작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역으로 출연하는 게 결정됐을 때 올리비아 핫세의 나이는 불과 15살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대흥행하면서 핫세는 전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자국 피가 절반이 흐르는 인물이 스타가 됐다는 사실에 고무된 아르헨티나 정부는 핫세를 아르헨티나 옛날 집으로 보내서 핫세가 할머니랑 포옹하는 장면을 찍어 생방송으로 내보내기도 했다. 어려서 헤어졌던 아빠도 이때 처음 재회했다. 할리우드 연예인들이 핫세를 만나려고 일부러 영국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이듬해인 1969년에는 골든 글로브 여자 신인상과 이탈리아의 아카데미상인 다비드 디 도나텔로 황금접시상을 수상했다.
훗날 출간된 본인의 자서전 제목조차 <발코니의 그 소녀(The Girl on the Balcony)>일 정도다. 그렇게 핫세는 '영원한 줄리엣'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어린 나이에 심한 정신적 괴로움을 겪었다.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은 현장에서 매일 "왕가슴녀(Boobs O’Mina)"라며 성희롱을 해댔고 제작자는 핫세에게 다이어트 약을 먹이려 했다. 다행히 약을 발견한 엄마가 변기에 다 쏟아부었지만, 핫세는 이때부터 자신이 영화에 나오기엔 너무 살집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또한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하도 말을 걸어대는 통에 20대엔 광장 공포증에 걸리기도 했다.
한편 막 스타덤에 올랐던 10대 시절의 핫세는 짧은 치마를 입고 술에 취해 춤을 추고 어른들을 조롱하는 모습이 매일같이 언론에 오르내리곤 했다. 핫세는 특히 영국에서 소위 "Swinging Sixties"라 칭해지던 반문화적인 쾌락주의를 영위하는 1960년대 비행청소년들을 대변했다. 이때 한 영국 기자가 핫세에게 "난 (당신처럼)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15살 소녀를 본 적이 없다"고 하자 핫세는 "왜요, 있는데."라고 대꾸했다.
그 유명한 담배 인터뷰 영상은 서구권 언론이 비판하던 이런 방종한 모습들의 작은 단편에 불과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이란 "소녀" 캐릭터의 형성에 도움이 됐던 긴 머리카락조차도 "히피" 선언으로 받아들여졌을 정도다. 요즘에도 영국 언론에서 핫세를 길게 언급할 때면 "모든 영국 부모들이 자식들이 저렇게 될까봐 두려워했었다"는 설명이 따라나온다.
그 뒤 핫세는 들어오는 굵직한 배역들을 다양한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고전 명작의 반열에 오르는 <트루 그릿>도 "존 웨인이 뭐라고."라며 넘겼다. 핫세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존 웨인과 내가 함께 있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아서 그랬다"고 변명했다. 무려 리처드 버튼의 상대역이었으며 남녀 주연 배우 모두가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게 되는 <천일의 앤>(1969)은 별 이유도 없이 거절했다. 결국 할리우드에서 전폭적으로 밀어주려했던 명제작자 핼 B. 월리스는 핫세를 포기하고 갈라서고 말았다. 이 당시에 보인 자신의 태도와 행동거지를 핫세는 나중에 매우 후회했다.
이렇게 10대의 핫세는 라이징 스타가 된 부담감으로 불안, 반항심을 통제하지 못하고 성인 톱스타로의 발판이 될 수 있었던 좋은 제안들을 다 허비하고 말았다.
그래도 1972년 흥행 1위 영화 <대부>에서 아폴로니아 비텔리를 맡을 예정이었으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시칠리아에서 만난 소녀로 배우를 교체하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어느 새 배역을 고를 처지가 아니게 됐을 땐 단역에 가까운 위치까지 떨어져있었다. 그나마 비중이 클 땐 소위 폭망작이 됐다. 그 중 하나가 <잃어버린 지평선>(1937)의 1973년 리메이크작으로, 핫세는 여기에서 무용수 역으로 나왔는데, 더 골든 터키 어워즈를 창시한 영화평론가 마이클 메드베드가 꼽은 역대 최악의 영화 50에 선정되기도 했다.
1974년에 공개된 공포 영화 <블랙 크리스마스>는 대표작으로 꼽을만 하다. 북미권 도시 전설인 "불길한 장난전화가 알고보니 같은 집 윗층에서 걸려온 것이었다"라는 소재를 차용한 이 영화는 개봉 당시에는 평범한 반응을 얻었지만 세윌이 지나며 재평가가 이루어져 캠퍼스 슬래셔 영화의 원조라 불리며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핫세는 당시 점술가에게 "이 영화가 성공할 것"이란 얘기를 듣고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다. 영미권 젊은 세대에선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이 영화로 핫세를 알게 된 경우도 많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감독인 프랑코 제피렐리가 감독한 tv 미니시리즈 <나자렛 예수>(1977)에서 성모 마리아 역을 하기도 했다. 나자렛의 요셉과 혼인하는 장면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 둘 다 젊지만, 이후에 요셉이 죽는 장면에서는 요셉은 백발이 성성한데 마리아는 여전히 10대 소녀 같은 동안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는 장면에서는 아들인 예수보다 훨씬 어려보인다. 참고로 가톨릭ㆍ정교회는 나자렛의 요셉이 혼인 당시 고령이었고 성모 마리아는 평생 동정이었다는 교리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피에타상에서처럼 젊고 아름답게 표현된다. 이에 반해 개신교에서는 요셉도 마리아와 동년배의 청년이었고 예수 탄생 이후에는 요셉과 마리아가 다른 부부들처럼 성관계를 하여 예수의 동생들을 낳았다고 본다. 감독은 절충점을 찾아 결혼 장면에서는 개신교의 관점을, 그 후의 장면에서는 가톨릭과 정교회의 관점을 따랐을 수도 있다.
<나일강의 죽음>(1978)도 좋은 필모 중 하나다. 일종의 군상극이며 조연 위치라 분량은 그리 많지는 않다.
1980년 글렌 포드 등 여러 할리우드 배우들이 참여한 일본 영화 <부활의 날>에도 출연한 바 있다. 1982년 TV 영화로 만들어진 <아이반호>에 레베카 역으로 나왔다. 1990년엔 <사이코>의 프리퀄 격인 TV 영화 <사이코 4>에서 모든 일의 발단인 엄마 노마 베이츠 역으로도 등장하였다.
2003년에는 <마더 데레사>에서 테레사 수녀 역으로 출연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모가 여전해서 실제 테레사 수녀의 외모와 너무 동떨어졌다는 비판도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그나마 더 늙어보이게 하려고 장시간 특수분장을 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한편 재미있게도 핫세는 이전에 <마더 테레사의 사랑>이라는 영화를 찍은 적도 있었다.
2015년에 개봉한 영화 <관종(Social Suicide)>에 실제 딸과 모녀 사이로 함께 출연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를 연기했던 레너드 와이팅과는 부부 사이로 나온다.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47년 만의 재회였다. 일종의 배우개그인 셈. 핫세의 가장 최근 연기와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작품.
올리비아 핫세 영원한 줄리엣의 탄생
1951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올리비아 핫세는 1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역을 맡아 전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빛과 섬세한 표정 연기는 셰익스피어의 불멸의 사랑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었죠.
올리비아 핫세 다채로운 필모그래피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에도 올리비아 핫세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꾸준히 활동했습니다. '블랙 크리스마스', '나일강의 죽음', '아이반호'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죠.
올리비아 핫세 암 투병과 별세
안타깝게도 올리비아 핫세는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8년 유방암 진단 후 유방절제술을 받고 완치되었지만, 다시 병마와 싸워야 했습니다.
마무리
올리비아 핫세는 단순히 아름다운 배우를 넘어,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녀의 작품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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